1. 국궁의 성지, 황학정

사직단 뒷쪽에 자리한 황학정은 우리나라 국궁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선 후기까지 서울 장안에는 활쏘기를 닦던 이

른바 사정(射亭)이 많이 있었는데, 서촌(웃대) 지역에는 등과정을 비롯해 5개의 사정<서촌5사정>이 있었다. 1894
년 갑오개혁으로 군대 무기에서 화살이 제외되자 전국의 많은 사정이 문을 닫았고, 황학정 자리에 있던 등과정도 
거친 흐름을 헤어나지 못하고 바위글씨만 남긴 채 사라지고 말았다.
 
활쏘기를 좋아했던 고종은 백성들의 심신단련을 위하여 궁술을 장려하기로 했다. 그래서 1898년 경희궁 회상전 북
쪽에 황학정을 지어 활터로 삼고 백성들에게 개방하여 언제든 활을 쏘도록 했다.
고종은 자주 이곳을 찾아 활쏘기를 했는데, 그가 사용했던 활 호미와 화살을 보관하는 전통이 황학정에 전해 내려
오다가 1993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왜정이 경희궁을 산산조각을 내면서 1918년 이후 궁궐의 주요 건물을 민간에 팔아먹었는데 1922년 황학정 자리에
총독부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황학정을 밀어버리려고 했다. 이에 국궁을 하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왜정과 협상
을 벌였고, 돈을 주고 그 건물을 해체하여 이곳으로 가져왔다.
가져온 부재로 황학정을 다시 지을 때 인왕산에서 택견을 익힌 송덕기도 참여해 손수 건물을 해체하고 조립했으며,
황학정 지킴이가 되어 이곳에 와서 행패를 부리거나 예의 없이 구는 사람을 혼내주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사직골
호랑이'라고 불렀다.
 
왜정 이후 황학정은 전국 활터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으나 6.25 때 건물이 파괴되면서 활쏘기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며, 이후 황학정을 중수하고 한천각과 국궁전시관 등 여러 부속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전통 활터가 많이 사라진 와중에도 여전히 활터 기능을 수행하면서 우리나라 전통 궁술의 성지로 여전히 추앙받고
있으며, 궁술대회와 관련 행사, 활쏘기가 수시로 열려 언제든 활쏘기 구경이 가능하다. (활쏘기 체험과 학습도 가

능함)        



2. 황학정 정문과 표석 - 황학정은 사직공원 뒷쪽 길로 들어서면 나온다. (인왕산길에서도 접근 가능)


3. 황학정 뒷쪽 바위에 새겨진 황학정8경

황학정8경은 1928년 9월 금암 손완근이 쓴 것이다. 제목은 황학정8경이지만 정작 황학정은 없으며 모두 북악산(백악

산), 인왕산, 경복궁 주변의 풍경을 다루고 있어 제목과 내용이 완전 따로 논다. 그 8경은 아래와 같으며, 금천교

와 경복궁 담장 옆 수양버들을 제외하고는 그런데로 남아있다.
     
백악청운(白岳晴雲) - 구름이 맑게 갠 북악산(백악산)
자각추월(紫閣秋月) - 자하문(창의문) 문루 위에 가을 달
모암석조(帽巖夕照) - 인왕산 모자바위에 비치는 석양 빛
방산조휘(榜山朝暉) - 인왕산 바위 위의 아침 햇살
사단노송(社壇老松) - 사직단을 둘러싼 노송
어구수양(御溝垂楊) - 경복궁 담장 옆 배수로 둑의 수양버들
금교수성(禁橋水聲) - 금천교 밑을 흐르는 물소리
운대풍광(雲臺楓光) - 필운대의 단풍 광경



4. 황학정에서 바라본 활터 (과녁판)
황학정 밑에 활을 쏘는 곳이 있다. 여기서 저 과녁까지는 약 120~150m 정도, 저 먼거리를 어떻게 맞추나 싶겠지만 하다보

면 다 맞추게 된다. 혹여 화살이 흥분하여 과녁을 넘어갈까봐 뒷쪽에 높이 펜스를 쳤다. 
수들이 활쏘기를 벌일 때는 황학정 활쏘는 곳과 과녁 사이를 함부로 들락거려서는 안된다. 괜히 들어서다가 화살에 맞으면

상상 외로 정말 아프다.




5. 시커먼 피부의 등과정 바위글씨

황학정 바로 뒷쪽 인왕산길 변에 등과정 바위글씨가 있다. 등과정은 서촌5사정의 하나로 그 5사정은 1894년 이후에

싹 사라지고 등과정만 이렇게 고종 때 새겨진 바위글씨를 남겨 그의 옛 자리를 알려준다. 게다가 경희궁의 활터였
던 황학정이 왜정 때 이곳에 안착하면서 자연스럽게 등과정을 계승했다.


6. 등과정터 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