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산 구천계곡, 순례길 나들이 '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 신익희 선생묘 주변)


▲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

▲  신익희 선생묘

▲  유림 선생묘



♠  북한산 구천계곡에 숨겨진 옛 분청사기 가마터
수유동(水踰洞) 분청사기 가마터 - 서울 지방기념물 36호

▲  밑에서 바라본 분청사기(粉靑沙器) 가마터

1년의 절반이 허무하게 저물고 나머지 절반이 막 시작되던 7월 첫 무렵, 북한산(삼각산) 구
천계곡 주변에 숨겨진 여러 명소와 숨바꼭질을 하였다.
북한산(北漢山)은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지금까지 수백 번 이상을 안겼으나 아직도 미
답처(未踏處)들이 적지 않다. 하여 미답지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자 신익희 선생묘 서쪽 숲에
숨겨진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를 찾은 것인데, 그거 하나만 보기에는 무척 허전할 것 같아
서 주변에 있는 애국지사의 묘역 여럿을 후식으로 둘러보았다.

북한산 수유동과 우이동 산자락에는 20세기 초/중기에 활약했던 애국지사의 묘역이 많이 있
으나 정작 가본 곳은 손병희(孫秉熙) 선생묘 뿐이다. 암덩어리 같은 근/현대사에 관심이 거
의 없다보니 소중한 백신 같은 그들에게도 딱히 마음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카데미하우스 종점(강북구 마을버스 01번 종점)에서 신익희 선생묘로 이어지는 길(4.19로
32길)을 가다가 그 묘역 입구에서 오른쪽(북쪽) 숲길로 조금 들어서 왼쪽(서쪽) 산길을 넘으
면 근래 천하에 공개된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가 활짝 마중을 한다. (이정표가 잘되어있어
찾기는 쉬움)


▲  윗쪽에서 바라본 분청사기 가마터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는 북한산(삼각산) 동남쪽 자락으로 구천계곡 바로 북쪽이다. 구천계
곡과 도선사(道詵寺) 밑인 우이동계곡 주변에 조선시대 가마터가 많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들
중의 지방문화재로 지정되고 이렇게 정비까지 받아 천하에 개방된 존재는 오로지 이곳이 유
일하다. 나머지는 세월을 원망하며 죄다 숲속에 묻혀있어 전문가가 아니면 찾기도 어렵다.

이곳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잠깐 등장했던 분청사기를 생산했던 가마터이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중기에 짧게 운영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서울(한양)과 아주 가까워 왕족과 귀
족들의 분청사기 수요를 충당하느라 가마터 굴뚝의 연기는 마를 날이 없었다. 이후 분청사기
의 인기가 하락하고 주변에 괜찮은 가마터들이 생겨나면서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15.6도의 경사를 지닌 무계단식 단실요<單室窯, 아궁이의 열이 경사지를 옆으로 지나면서 그
릇을 익힌 후,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구조>로 길이 19.8m, 최대 너비가 1.5m에 이르는 커다란
가마이다. 가마는 벽과 천장을 돌과 점토로 쌓아 다졌는데 가마 입구인 회구부(灰丘部)와 아
궁이, 연소실(燃燒室), 소성실(燒成室), 폐기장, 온돌 등이 확인되었다.
가마는 앞부분은 잘 남아있으나 뒷부분은 상당수 손상되어 붉게 탄 바닥만 확인되었다. 아궁
이는 타원형으로 길이 1.6m, 내폭 1.3~1.6m, 깊이 0.9m 크기이며, 연소실과 소성실 사이에는
높은 불턱이 있다. 소성실은 가늘고 길쭉한 모습으로 여러 자기편이 나왔으며 폐기장은 아궁
이 우측에서 1.5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온돌도 발견되었는데 길이 3.2m, 폭 2m
정도로 자연석을 이용해 조성되었으며, 가마가 문을 닫은 이후에 설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  옆에서 바라본 분청사기 가마터

이곳에서는 여러 종류의 도기와 자기, 흑유자, 도침, 동전 등이 출토되었다. 도기류는 접시
와 발이 제일 많이 나왔고 잔, 배, 호, 매병 등도 조금씩 나왔으며 주요 유물로는 도기방상
씨편(도깨비 문양 비슷한 것), 청자상감용문매병편, '上'과 '德'이 새겨진 자기편, 동전 등
이 있다.
상감청자(象嵌靑瓷)에서 분청사기로 넘어가는 도자생산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유적으로 평
가되어 2011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했으며 2014년 서울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손질되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가마터는 보존을 위해 겉면에 산뜻하게 풀을 씌워놓았다. 하여 가마터 흔적은 저 안에 고스
란히 묻혀있다. 가마터 동쪽에는 조촐하게 쉼터를 닦아 쉴 구석을 마련해주었는데, 이곳의
존재감이 아직은 미약하여 인적은 드물다. 하여 조촐하게 사색을 즐기기에는 아주 그만이다.
가마터 남쪽으로도 산길이 나있으며 그 길은 자연관찰로로 구천계곡을 거쳐 아카데미하우스
로 이어진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127-1


▲  신익희 선생묘 입구
저 숲길의 끝에 해공 신익희 선생의 유택(幽宅)이 둥지를 틀었다.


♠  구천계곡 주변에서 만난 독립 애국지사의 묘역들

▲  신익희 선생 묘 직전 계단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왔던 길로 돌아나가 신익희 선생의 묘역을 찾았다. 우리 귀에 너무나도
숙한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1894~1956), 그는 누구일까?

신익희는 평산신씨 가문으로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판서를 지낸 신단(申壇)의 6남 중 막내
로 자는 여구(汝耉), 호는 해공이며, 중원대륙에서 사용했던 이명(異名)은 왕해공(王海公).
왕방오(王邦午)이다.
어린 시절 한학을 익히고, 1908년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한 뒤 동경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들어갔다. 유학 시절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하여 총무, 회장 등
을 역임했으며 학지광(學之光)이란 잡지의 발간을 담당하여 학생운동을 하였다.
1913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고향 광주에 동명강습소(東明講習所)를 열었으며, 중
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부터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가 되었다.

1918년 송진우(宋鎭禹), 최남선(崔南善) 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했으며, 1919년에는 해
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지도자와의 연락을 담당하여 만주, 북경, 상해 등을 오갔다. 그러
던 중 문창범(文昌範), 홍범도(洪範圖)와 연락을 취하고자 만주로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
고 돌아오던 중, 평양에서 3.1운동을 목격하고 서둘러 서울로 돌아와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그래서 제자인 강기덕(康基德), 한창환(韓昌桓) 등과 연락해 3월 5일 남대문역(서울역)에서
만세시위를 추진하니 그것이 제2차 독립만세시위이다. 이 시위는 3.1운동의 지방 확산에 크
게 기여했으나 그로 인해 왜정의 수배를 받게 되자 급히 상해로 망명했다.


▲  신익희 선생 묘 - 등록문화재 520호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헌정 제정 기초위원으로 활약했으며 내무
차장, 외무차장, 국무원비서장, 외무총장 대리, 문교부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중원대륙 세
력과 합작해 왜를 토벌할 계획을 세우고 중국국민당에 가담하여 중장(中將)이 되었으며, 조
선과 중원의 청년 500명을 모아 유격대인 분용대(奮勇隊)를 조직, 군사훈련을 시키며 본토
진입을 꾀했으나 신익희를 돕던 호경익(胡景翼)이 1924년 사망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하여 장개석(蔣介石)을 찾아가 한,만 국경에 왜군을 토벌해야 된다며 협조를 요청했으나 뜻
을 이루지 못했다.
1929년 한국혁명당을 창당하고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해 무장 독립투쟁을 준비했으며 '우리
의 길'이란 기관지를 발행하여 중원대륙에 살던 동포들에게 민족정신과 독립의지를 심어주었
다.

그는 단일정당으로 민족의 힘을 모아 왜를 때려잡아야 된다고 역설하며 1932년에 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 의열단(義烈團), 한국광복동지회 대표와 협의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
對日戰線統一同盟)이란 동맹 단체를 탄생시켰다. 거기서 그는 김규식(金奎植), 박건웅(朴建
雄)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1934년 자신의 한국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을 합쳐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창당했으며, 1935
년 7월, 남경 금릉(金陵)대학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원칙 아래 신한독립당(윤기섭), 의열단<김
원봉(金元鳳)>, 조선혁명당(최동오), 한국독립당<조소앙(趙素昻)>, 대한독립당(김규식) 등 5
당 통합을 이끌어내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었다. 허나 1937년 1월 제2차 전당대회로 비(非) 의
열단 계열의 인사들이 탈당하면서 세력이 위축되고 말았다.

1937년 여름, 왜가 중원대륙 침공을 본격화한 이른바 중일전쟁이 터지자 그는 조선민족전선
연맹 결성에 참여했고, 중원대륙 곳곳을 돌면서 대일항전을 지도했다. 그리고 1938년 9월에
조선청년전위동맹에 가담했으며, 1939년 8월 27일 김구와 김원봉의 주도로 사천성(四川省)
기강에서 광복전선과 민족전선 양측의 7당 통합회의가 열리자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허나 그 7당 통합도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조선의용대 병력이 있는 낙양(洛陽)으로 가서 김성숙(金星淑)의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연
합하여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이들을 지도하면서 1941년 한중합작으로
한중문화협회를 조직하여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1943년 4월, 대한민국 잠행관제에 의해 설치된 선전부의 선전위원회에서 조소앙, 엄항섭, 유
림(柳林) 등과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의 선전계획의 수립과 실행에 나섰으며, 1944년 5월 임시
정부 연립내각 성립 때 내무부장에 선임되어 활약하다가 중경(重慶)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신익희 선생 묘

1945년 12월 2일 임시정부 요인의 제2차 환국(還國) 때 서울로 돌아왔으며 모스크바 3상 회
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김구(金九)를 도와 반탁운동에 나섰다. 허나 그와는 정치 노
선이 달라 정치공작대, 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해 이승만에 접근했다.

1946년 경복궁 서쪽에 국민대(현재 정릉동에 있음)를 설립했고 자유신문을 발행하여 민족자
주성을 고취시켰다. 미군정 시절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을 지냈고 1948년 정부수립으로
제헌국회에 들어갔으며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1947년에는 지청천(池靑天)의 대동청년단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결성하여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50년 한국민주당과 합당했다. 그리고 이후 개편된 민주국민당의 위원장으로 뽑
혔다.
3선 국회의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나날이 개판을 치며 심지어 그 유
명한 사사오입(四捨五入) 사건까지 일으키자 자유당 타도를 외치며 1955년 장면(張勉), 조병
옥(趙炳玉)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했다.

1956년 대선 때 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정권교체를 노렸다. 이미 민심도 그에게 돌아선
상태라 승산은 넘치도록 충분했으나 5월 5일 유세차 열차를 타고 전주로 가던 중, 이리(익산
) 정도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선거 유세로 너무 과로했던 것이 화근이 된 것
이다. 하여 모두가 그리던 정권교체는 물거품이 되었으며, 대신 장면이 이기붕을 누르고 부
통령에 당선되었다.
허나 4년 뒤, 1960년 대선에 조병옥 박사가 출마했으나 그마저 유세 중에 위암으로 사망하여
정권교체의 기회를 또 잃고 말았다. <하여간 이 나라는 오래 살아야 될 사람이 빨리 죽고,
빨리 없어져야 될 것들이 오래 삼, 그래서 발전이 안됨>
1956년 5월 23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져 북한산(삼각산) 자락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대
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그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천하 제일의 싸움꾼으로 널리 알려진 시라소니(이성순)가 그의
경호를 맡았다. 그가 허무하게 죽자 장면 박사의 경호를 맡았는데, 그가 경호하는 동안에는
자유당의 끄나풀인 이정재의 동대문 패거리들이 감히 접근을 못했다.

▲  신익희묘 봉분과 하얀 피부의 상석,
향로석, 장명등

▲  망주석(望柱石)에 새겨진 세호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신익희 묘역은 호석을 두룬 커다란 봉분과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 문인석(文人石) 1쌍, 장명등, 묘비(묘표)로 이루어져 있으며 묘역으로 인도하는 계단 끝
에는 호랑이상 1쌍을 배치하여 악의 기운을 경계한다. 무덤을 지키는 석물들은 파리가 미끄
러질 정도로 매끄럽고 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있으며 고색은 아직 여물지 못했으나 장차 20세
기 중반 무덤 양식의 하나로 교과서에 절찬리에 소개될 것이다.

그는 1945년 12월 귀국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나에게 쓸만한 집이 1칸 없다고 집 1채를 마
련하라고 (주변 사람들이) 권고하나 내가 망명 때 항일독립이 평생의 소원이었고 이제 반 조
각이나마 독립된 조국에서 국사를 맡게 되었으니 더 바랄게 있겠는가'

* 신익희 선생묘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1, 산 74-3


▲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호랑이상
저 패기 돋는 이빨로 친일매국노와 그 쓰레기 같은 후손들, 그리고 이 나라의
적폐들을 싹 물어뜯어주렴.

▲  평산 신하균(平山 申河均) 선생묘

신익희 선생묘 북쪽에는 그의 장남인 신하균(1918~1975) 선생묘가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그는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일찌감치 중원대륙으로 넘어가 상해(상하이) 광화대학 상
과를 졸업했다. 이후 중국국민정부에서 감찰원위임관과 국민정부군의 소교복무원(소령급 문
관), 중앙은행 과원조장, 중앙신탁국조장 등을 지냈으며,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들어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입대해 전지공작, 초모공작 훈련 등 독립운동을 진행하여
정위(正尉)가 되었다.

해방 이후, 늦게 귀국하여 한국연건기업 사장을 지내다가 1955년에는 한국외대 강사를 하기
도 했으며 아버지가 대통령선거 유세 중, 사망하자 정계로 시선을 돌려 경기도 광주 보궐 선
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도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4.19이후 민주당의 구파(舊派)인 신민당에 들어갔으며,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민
정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3선의원이 되었다.

그는 서예에도 뛰어나 1958년 귀국기념서예전에서 이 땅 최초로 중원대륙 고대의 해서체(楷
書體)인 학보자비체(學寶子碑體)를 소개했으며, 여러 차례의 서예전을 열었다.
1950년대 중반 종로구 인사동의 민주당 중앙당사 간판을 신익희가 썼는데 1960년대 중반 관
훈동(寬訓洞)의 민중당 중앙당사 간판은 그 아들인 신하균이 썼으니 이는 보통 인연이 아니
다.

1977년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되어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아비도 그렇고 그 아들도 그렇
고 독립운동에 적지 않은 공을 세우고 해방 이후 정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으니 가히 애국
자의 집안이라 할만하다. 처음에는 신익희의 독립운동 경력이 크게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
나 그의 묘역을 거쳐간 이후 조사해보니 생각 외로 경력이 화려했다.
더러운 친일매국노들로 악취가 심했던 그 시절(지금도 크게 다를 것은 없음 ㅠ), 이런 인물
이 있었던 것이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으며, 만약 그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이승만과 자
유당을 단죄하고 이 나라를 크게 부흥시켰을 것이다. 허나 그 기회를 하늘이 앗아가 버렸고
그 휴유증은 지금까지도 여전하니 과연 하늘에게 정의와 양심이 있는지 묻고 싶다.

신하균 묘역은 화려한 그의 아비 무덤과 달리 네모나게 호석이 둘러진 작은 봉분과 상석, 향
로석, 묘비가 전부인 단출한 모습이다.


▲  김병로 선생묘로 인도하는 산길
신익희선생묘에서 운가사, 진달래능선 쪽으로 4~5분 정도 오르면
김병로 선생묘가 쓱 모습을 비춘다.

▲  김병로 선생묘 밑에 자리한 묘비
귀부와 이수(螭首)를 갖춘 당당한 모습으로 묘역 동남쪽에 자리해 있어
신도비(神道碑)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  가인 김병로(街人 金炳魯) 선생묘

대쪽 판사로 유명한 가인 김병로(1887~1964)는 전북 순창에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
낸 김상희(金相熙)의 1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일찍 여위었으나 할머니가 집안에 독서당(讀書堂)을 만들어 한문 공부
를 시켰으며, 1899년에 불과 12세에 나이로 4살 연상인 연일정씨 정교원의 딸에게 장가를 들
었다. 그가 외아들이고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일찍 혼인을 시킨 것이다.

1902년 당대 거유(巨儒)였던 전우(田愚)의 문하가 되었다가 1904년에 처음 신학문을 접했다.
하여 친구 4~5명과 일신학교(日新學校)란 임시 학교를 세웠는데 직접 강사를 초청하여 영어,
산수, 세계사를 익혔다.
1906년 순창을 찾은 면암 최익현(崔益鉉)의 열변을 듣고 크게 감동을 먹어 5~6명의 포수(砲
手)와 함께 그의 의병부대에 들어갔다. 허나 최익현이 의병을 해산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
왔으며, 광양의 백낙구, 담양의 기우만, 정읍의 유화숙 등과 의병투쟁을 모의하다가 채상순
과 함께 김동신의 의병부대에 합류, 7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淳昌)의 왜인 관청을 공격
하기도 했다.
허나 왜가 '호남 대토벌작전'을 펼쳐 의병을 때려잡자 무력 투쟁을 그만두고 고정주가 설립
한 창흥의숙(昌興義塾)에 들어가 다시 신학문을 접했으며, 1910년 왜열도 동경으로 유학을
가 일본대학 전문부 법과 청강생이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법조인으로 길을 잡게 된다.

허나 생활고로 공부가 어려웠고 때마침 경술국치(庚戌國恥)의 비보까지 전해듣자 충격이 너
무 커 서둘러 귀국했다. 폐결핵으로 1년 동안 쉬다가 1911년 가을, 다시 동경으로 유학을 갔
으며, 명치대학 법과 3학년에 편입하여 1913년 졸업했다.
귀국하여 가산을 정리해 다시 유학길에 올랐는데 이번에는 명치대학과 중앙대학에서 공동운
영하는 법률고등연구과에서 공부를 했다. 이때 '재동경 조선인유학생 학우회' 간사부장과 '
금연회' 운영을 맡기도 했으며 1914년 창간된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스승인 야마우치(山內)의 권유로 왜열도 변호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왜인(倭人) 외에는 응시
할 수 없다는 내각회의 결정으로 결국 응시하지 못했다.


▲  남쪽에서 바라본 가인 김병로 선생묘

1915년 법률고등연구과 수료증을 받고 귀국하여 경성전수학교 조교수로 일했으며 1919년 부
산지방법원 밀양지원 판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그만두고 변호사 자격을 얻어 서대문 자택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 관련자들을 위한 무료 변호에 많이 나섰다. 1923년 이인(李仁), 허헌 등
과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설립했으며 일반 형사사건에서 나온 수임료로 애국지사의 무료변
론은 물론 그들의 가족까지 챙겨주었다.
그가 맡은 애국지사들의 사건만 보합단 사건(1921년), 김상옥(金相玉) 의거와 제2차 의열단(
義烈團) 사건(1923년), 1926년 6.10만세운동,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과 고려혁명당 사건, 정
의부(正義府) 사건(1927년), 1930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제3차 간도공산당 사건(1931년), 수
양동우회 사건(1937년) 등 실로 방대하다. 또한 안재홍(安在鴻), 안창호(安昌浩) 등의 민족
지도자들의 변호도 맡아 왜정의 온갖 악법으로부터 그들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또한 농민과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도와주어 1928년 전북 옥구군(沃溝郡)에서 소작쟁의
를 벌인 농민들과 1929년 집단파업을 한 함경남도 원산부두 노동자들과 형평사(衡平社) 조합
원들을 변호했다. 또한 1929년 함경남도 갑산에서 일어난 화전민 박해사건과 1930년 함경남
도 단천에서 농민 살상사건이 터졌을 때 직접 현장을 찾아 조사를 벌여 대책을 강구했다.

또한 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 1920년에 조선교육협회 창립 발기인, 1922년 보성전문학
교 상임이사, 1924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 산하 고등보통학교 기성회 발기인을 맡았으
며 김성수와 함께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회금보관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4년 동아일보사 간부들이 친일파들의 협박을 받은 '식도원' 사건이 터지자 이를 규탄하는
민중대회 발기준비위원을 맡았으며, 1927년 전조선변호사대회에서 신문지법과 출판법 제정을
촉구하는 등 언론의 자유를 지키고자 했다. 또한 1923년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참여했고, 1931
년 충무공유적보존운동기금 관리위원을 맡았으며, 신간회(新幹會)에도 가입해 중앙집행위원
장을 맡았다.
그러다보니 왜정의 훼방이 적지 않아 그가 연사로 나서는 집회가 금지되기도 했고 1931년에
는 6개월간 변호사 정직 처분을 받기도 했다. 하여 잠시 소나기를 피하고자 1934년 경기도
양주군으로 넘어가 잠시 운둔생활을 하였다.
1945년 왜정이 민족지도자들을 살해할 것이라는 괴소문이 돌자 급히 가평(加平)으로 피신했
고 거기서 해방을 맞이했다.


▲  김병로 선생묘의 동그란 봉분과 상석, 향로석

해방이 되자 원세훈, 백관수와 고려민주당을 세우고 이를 확대해 조선민족당을 창당했다. 여
운형(呂運亨)의 건준을 찾아가 좌우합작을 제의하기도 했고, 미군정 아놀드 군정장관이 건준
과 조선인민공화국을 매도하자 이를 비판하는 논평을 내는 등, 좌우세력을 모두 포용하는 자
세를 보였다.
1946년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학생들을 직접 변호해주었으며, 미군정청 사법부
법전 기초위원회 위원과 사법부장 등을 하다가, 1947년 사법부 내 6인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
로 활동하며 이 땅의 사법제도의 기초를 닦았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초대 대법
원장이 되었으며,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 법조협회 회장을 맡았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관장을 맡아 친일매국노 단죄에 굳은 의지
를 보였다. 친일파에 호의적이던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법 개정을 요청했으나 이를 거부하며
친일파 처벌을 추진했으나 결국 이승만 패거리의 농간으로 무산되고 만다.
1950년 골수염 치료로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으며, 1957년 12월, 70세의 나이로
대법원장에서 정년퇴임했다.

은퇴한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의 계속되는 불의와 독재를 비판했고 동아일보에 '부정선거는
천추의 한이 될 것'이라며 이승만에게 경고하기도 했다. 1960년 대선에 출마한 조병옥이 위
암으로 사망하자 장면 부통령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기자회견을 통해 호소했다.
4.19혁명이 일어나자 재야 정치인들과 사태수습을 위하여 대정부건의안을 발표했고, 이승만
이 물러나자 과도정부의 개편을 요구했다. 또한 부정선거 관련자와 부정축재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역설해 부정부패를 때려잡을 것을 촉구했다.
1960년 민의원선거로 고향인 순창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1961년 5.16이 터지자 박정희
(朴正熙)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고 군정의 종식을 촉구했다.

1963년 윤보선(尹潽善), 이인 등과 단일야당 결성을 추진하다가 여의치 않자 직접 민정당(民
正黨)을 창당해 최고위원을 맡았다. 이후에도 야권통합을 계속 추진했으나 그리 순탄치 못했
으며 민정당과 국민의당 대표최고의원에서 물러났다.
바로 그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64년 1월 13일, 인현동 자택에서 77세의 나이
로 별세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루어 북한산 자락에 고이 안장되었다.

대쪽 같은 성품과 지조를 평생 지키고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인물로 천하 법조인의 귀감
으로 추앙을 받는다. 허나 오늘날 그와 같은 법조인이 거의 없다싶이하니 그도 지하에서 통
곡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묘역은 호석을 두룬 봉분과 상석, 향로석, 장명등 2기로 이루어진 조촐한 모습이다. 신
익희 묘역보다 외진 곳이라 찾는 이는 별로 없으나 워낙 짙은 숲속에 감싸여있어 잠시 속세(
俗世)를 잊기에는 좋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86-1


▲  단주 유림묘 입구에 세워진 묘비와 호랑이석

김병로 선생묘에서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인 순례길(북한산둘레길 2구간)로 나와 우이동 방향
으로 조금 가면 왼쪽 구천계곡 건너에 훤칠한 비석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가 유림 묘비로
묘비 밑에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호랑이상 2기가 혹시 모를 나쁜 기운을 경계하고 있다.
이 땅은 이상하게도 선한 기운보다 악한 기운이 더 판을 치니 저들의 양 어깨가 꽤 무거울
것이다.
그들의 검문을 거쳐 왼쪽 산길로 들어서면 단주 유림 선생 묘가 모습을 드러낸다.


▲  유림묘 입구 (순례길에서 바라본 모습)

유림(柳林, 1894~1961)은 경북 안동 예안면에서 중소 지주인 유이흠(柳頤欽)의 3남으로 태어
났다. <어머니는 김성옥(金性玉)> 전주유씨 집안으로 호는 단주(旦洲), 월파(月波)이며, 본
명은 유화영(柳華永), 중원대륙에서 사용한 이름은 유림, 고상진(高尙眞)이다.

앞서 신익희, 김병로와 마찬가지로 제일 먼저 한학을 배우다가 경상북도 최초의 신식 중등학
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그는 거기서 인생의 스승이 되는 김동삼(金
東三), 유인식을 만나게 된다.
1910년 어둠의 시절이 오자 겨우 16세의 나이로 손을 깨물어 거기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피
로 '충군애국(忠君愛國)' 4자의 혈서(血書)를 쓰며 독립의지를 불태웠다. 하여 대구와 안동
을 오가며 계몽운동과 비밀결사 조직 활동을 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안동 임동면
편항 장터에서 열린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협동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이끔)

하지만 3.1운동이 왜정의 고약한 탄압으로 더 이상 효과가 없자 가산을 정리한 뒤 가족을 데
리고 만주로 넘어갔다. 우선 만주 봉천성 요중현에 머물 곳을 마련해 가족들을 그곳에 안착
시키고 홀로 남만주 유하현 삼원포로 이동해 미리 와있던 김동삼과 이상룡, 이회영(李會榮)
등이 닦아놓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합류했다. 이때 군자금 마련을 위해 고향에 남아있
던 나머지 재산도 싹 처분한 것으로 여겨진다.
1920년 8월 상해로 이동하여 거기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멤버로 활동하다가 1921년 북경
으로 가서 신채호(申菜浩), 김창숙(金昌淑) 등을 만났다. 그때 신채호가 주관하던 잡지 '천
고(天鼓)'의 발행을 도왔으며 거기서 그의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을
접하고 아나키스트로 노선을 잡는다.


▲  단주 유림 선생묘
'나의 이상은 강제권력을 배격하고 전 민족, 나가서는 전 인류가 최대한의
민주주의하에서 다같이 노동하고 다같이 자유롭게 사상하는 세계를
창조하는데 있다' (1945년 12월 귀국직후 기자회견에서)
 

외국어 수학을 위해 1922년 성도(成都)로 이동하여 성도사범대학에 들어갔다. 허나 학비 해
결이 큰 문제라 중원대륙 정부의 관비생(官費生)이 되고자 이름을 '고상진'으로 바꾸며 중원
사람 행세를 했다. 다행히 그게 잘 통하여 별무리 없이 영문과를 마쳤으며 프랑스로 유학을
가고자 프랑스어도 수강하는 등, 상상 이상의 다양한 외국어를 익혔다. 심지어 '에스페란토'
까지 익혔다고 하니 그야말로 외국어의 신이 따로 없다.

1926년 학교를 졸업하고 간도 길림(吉林)으로 이동하여 김종진과 이을규를 만났다. 그들은
중동선(中東線) 해림역으로 이동하여 김좌진 장군를 만났는데, 그는 김좌진과 민족주의와 공
산주의 사상을 두고 여러 번 격론을 벌이며 양 사상의 갈등을 해결해보고자 했으나 워낙 팽
팽하여 설득을 포기하고 길림 화전현으로 돌아왔다.
이후 본토(국내)의 아나키즘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던 중, 1929년 11월 평양에서 '전
조선 흑색사회주의 운동자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곳으로 달려가 최갑룡, 임중학
등과 함께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 허나 왜정의 탄압으로 대회는 무산되었
고 그는 왜군에 체포되었다. 허나 딱히 혐의가 발견되지 않아 봉천으로 추방되었다.

1929년 가산을 털어 의성학원(義誠學院, 봉천중학)을 세웠다. 중원대륙 각급 학교 입학을 위
한 예과 과정으로 400명의 학생을 수용했으며 학생들의 중원대륙 학교 입학을 알선했고 직접
영어도 가르치면서 평화롭게 지냈다. 허나 그는 1931년 10월 왜군에게 '조선공산무정부주의
연맹'을 조직하고 활동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는 '원산흑색사건'이란 명목으로 최갑룡, 조중복 등과 함께 함흥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었
으며, 1933년 3월 24일, 5년형을 받았다. 그들은 이에 모두 항소를 했고 서울로 이송되어 경
성복심법원과 경성고등법원을 거쳤으나 별 변화없이 원심대로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
고를 치루고 1937년 10월 8일 출옥했다.

이후 만주로 넘어가 재기를 노렸으나 뜻대로 안되자 북경과 천진에서 한중 항일연합군 조직
에 진력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2년 10월,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을 찾았고 임시정부가 치
룬 경상도구 의원선거회에 나서 김원봉, 김상덕 등 6명이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임시정부를 다시 찾은 것은 '독립을 달성하고 이 나라에 아름다운 낙원을 창조하려면 우선
민족을 대표할만한 어떤 근거가 있어야 된다'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외교위원회 연구위원, 선전위원회 선전위원, 건국강령수개위원회 위원 등
을 지냈으며,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의 대표로 주석단의 1명으로 추대되어 활동했다. 또한
미국와 영국이 한국을 국제 보호 밑에 두기로 했다는 보도를 듣고 중경에서 대회를 열어 한
국의 완전한 독립과 외국의 내정 간섭 반대를 외쳤다.


▲  유림묘 봉분과 상석, 향로석
봉분에 무궁화 무늬들이 꽂혀있는데 처음에는 진짜 꽃인 줄 알았으나
가까이서 보니 그냥 문양이었다. 애국지사 묘역에 걸맞게
무궁화 무늬를 심은 센스가 돋보인다.


해방이 되자 1945년 12월 주한 미군사령부가 보낸 비행기를 타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귀국했
다. 허나 날씨가 좋지 못하여 서울비행장(여의도)에 착륙하지 못하고 군산에 착륙해 거기서
육로편으로 상경했다.
1946년 임시정부의 법통기관인 비상국민회의 부의장이 되었으며, 세계 아나키즘 최초의 아나
키즘 이념정당인 독립노동당(獨立勞農黨)을 창당해 당수로 취임했다. 그리고 노농신문을 발
간하여 노농대중의 계몽과 권익 보호에 힘썼다.
1948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아나키스트 대회'가 열렸는데, 유림은 한국 대표로 초청
을 받았으나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했다.

대한국민의회 의장이 되었으나 국민의회 기능 상실로 다시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를 결
성하고 대표간사가 되었으며, 1952년 7월 임시수도인 부산(釜山)에서 일어난 '발췌개헌안'에
항의하여 신익희, 장면 등과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세웠다.
국회의원 선거에 여러 번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1961년 4월 1일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
났다. 그해 4월 7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루어졌으며 그때 장례위원장인
성균관대 초대총장인 김창숙은 '그대 있어 이 나라가 무겁더니 그대 떠나니 이 나라가 비었
구나'
추도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무덤은 호석을 갖춘 동그란 봉분과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 1쌍으로 이루어져 있
다. 특이한 것은 봉분에 무궁화 무늬가 잔뜩 심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곳을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9시 직전에 이르렀다. 아무리 여름이라 해가 길어졌다고 해
도 그건 어디까지나 햇님의 퇴근시간이 늦춰졌을 뿐이다. 달의 사제인 땅꺼미가 모락모락 피
어올라 햇님의 세상을 훔치려고 들고, 무더위에 적지 않게 돌아다녔더니 피로감과 시장기가
달덩이만큼이나 크게 솟아오른다. 이럴 때는 욕심을 부리고 속세로 내려가 저녁을 먹는 것이
진리이다.

이렇게 하여 오후에 짧게 누린 북한산 미답지 나들이는 4곳의 미답처를 싹 지우는 큰 성과를
누리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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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5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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