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챕터] - '앞으로 다가올 모든 저녁'(522)을 위하여


그녀는 펜을 찾아서 앞으로 몇 주에 해당하는 페이지에 사선을 커다랗게 그어버린다. 일정들? 없었던 걸로 하자.
평행우주에서는 강간당하지 않은 그녀가 이 모든 일정을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야심차고 사교적이고, 한때는 그녀에게도 있었던 에너지를 뿜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녀의 삶은 이제 텅 빈 책이다. (269)

폭력 다음에 또 다른 폭력이 뒤따른다. 지난 몇 주간 그녀가 알게된 것은 여기까지다. (330)

* 위니 리 장편소설, [다크챕터]에서
- 한길사, 1판 1쇄, 2018.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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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설의 형식을 띤 자신의 이야기, 그것도 성폭행 피해자로서의 경험담입니다. 마침 #미투 운동으로 우리 사회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는 즈음에 이 책을 만난 건 어떤 우연일런지 생각하며 '비비안'이라는 주인공을 따라 그 '어두운 시간'속으로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 순간은, 겨우 삼십 분 남짓했던 그 순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슬픔처럼, 가라앉아 있다가 때때로 출렁이겠지만, 그녀는 그 기억에 좌절하거나 쓰러지지 않고 스스로 일어서 자신의 길을 살아가고 았습니다. 하여 소설의 많은 부분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비비안'에게 맞춰져 있습니다.

게다가 이 소설은 주인공의 시각과 병행하여 가해자의 시점에서 씌어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년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삶을 살다가 비비안을 만나 '강간'이라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지. 그러고도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진심으로 깨닫지 못하는 과정들이 세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덕분에 신문기사로만 접하는 성폭행, 강간, 피해자, 가해자라는 낱말의 조각들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언제든, 어디서든 겪을 수 있는 일임을, '나쁜 일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

악몽의 시간을 건너,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함으로써, 성폭행은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 '모든 것은 가해자의 잘못'(12 )임을 우리가 더 선명하게 깨닫게 해 준 그녀의 '용기'에 박수와 위로를 보냅니다. 무디어진 눈길을 들어 조금이라도 더 돌아보고 끌어안고 다독이는 마음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우리 곁의 수많은 '그녀들'에게 귀 기울이며.


'성폭행당한 사실을 공공연하게 말하고 글로 쓰는 게 부끄럽지 않으세요?"라는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애초에 제 잘못이 아닌 일을 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 (11)


( 180331 들풀처럼 )


#오늘의_시







* jtbc 인터뷰 :


   https://youtu.be/mQiyKg-Ni0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