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道의 실천(八正道)

八正道란 中道의 이치를 여실히 파악한 후에 나오는 실천적 中道行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당시의 인도 사상계로 봐서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또한, 緣起의 도리를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설해 진 것이 사성제(四聖諦)라고 하는데 이 四聖諦중 道의 부분을 자세히 설명해 놓은 것이 八正道입니다.
八正道는 \┳8가지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道\┳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단수형태로 불리는 것은 8개항목이 한 성도(聖道)의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라 8개가 모두 협력함으로써 인격완성이라고 하는 하나의 목적에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① 정견(正見):  올바른 견해, 즉 불교의 올바른 세계관, 인생관을 가르키는 것이다.
즉 연기(緣起)라든가 사제(四諦)에 관한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자의 지혜이기 때문에 지혜라고 부르지만 성자가 되지 못한 범부에게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正見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다. 종교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어떠한 일을 할 때 그 일에 대한 올바른 목적과 그것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을 가지는 것이 正見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올바른 목적이나 계획 없이, 혹은 그 일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없이는 어떠한 일에도 착수할 수 없으며 완성의 가능성도 없을 것이다.
바라문敎에서는 개인에게는 我라는 중심생명이 있어 我가 생명의 근원이요 활동체라고 하고 또 우주에는 梵(Brahman)이라는 중심생명이 있어 이 범(梵)이 일체의 현상계를 꿰뚫는 근본 원리가 되며, 동시에 같은 이름의 신(神) 즉 梵이 있어서 온 우주를 창조하고 지배합니다. 그리고 梵고 我는 그 본질 면에서는 같은 것 범아일여(梵我一如)이므로 我를 알면 곧 범을 알아 我梵의 본연(本然)의 상태에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 상태가 해탈이며, 이상적인 마음의 경지로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요伽(Yoga), 선정(禪定,Dhyana)을 닦아야 한다는 수정주의(修定主義)를 내세움으로써 有我 有常에 치우친 有見 常見의 입장에 서서 실천수행하고 있습니다.

② 정사유(正思惟): 올바른 사고방식이며 올바른 마음가짐이다.
이것은 자신의 입장을 잘 생각하고, 또 자기의 목적수행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 그에 대한 바른 마음가짐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른 지혜의 아래에서 끊임없이 바르게 사유(思惟)하는 가운데 이렇게 해야할지, 어떻게 하면 그 일을 가장 잘 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원시경전에 기록된 正思惟의 해석은 노여워하는 마음, 죽이고자 하는 마음, 세속적인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출가자에게 어울리는 부드럽고 평화로운 마음, 자애로운 마음, 더러움을 떠난 청정한 마음을 갖도록 끊임없이 생각하고 애쓰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반 사상계에서는 육사외도(六師外道)를 비롯하여 62見 363見이 있었다고 하여 다 알 수는 없지만 대부분 모든 것은 사대 지(地)·수(水)·화(火)·풍(風)등의 어떤 실체인 요소들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 요소가 흩어지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우리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어느 일부는 순세파(順世派)에 빠지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인간의 모든 고통은 정신보다도 육체에 있는 것이므로 이 고통을 이겨내는데는 육체의 욕구에 순응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고통의 근원인 육체를 강압하므로써 정신의 자재를 얻을 수 있다는 적취설(積聚說)에 입각한 苦行主義를 내세움으로써 요소의 실체를 인정하기는 하나 결국은 無我 無常에 치우친 無見 斷見의 입장에 서서 그에 따라 실천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모두가 어느 한 극단에 치우친 것으로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석존께서는 정각(正覺)을 이루기 전 이미 이 두 가지의 수행방법을 모두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正覺을 성취하신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에 의한 비상비무(非常非無), 비상비단(非常非斷)의 중도설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들의 주장과는 상반되는 것이었으며, 석존께서는 이들과 대립하기 위하여 이런 중도설을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석존께서 이 세상의 이치를 정확하게 깨달으시고 보니, 그들의 주장이 이처럼 틀리게 판명된 것입니다.
따라서 석존께서 말씀하신 中道行으로서의 팔정도는 정말로 새롭고 해탈에 이르는 길이 안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③ 정어(正語) : 올바른 언어(言語)행위이다.
바른 견해나 사고방식 아래에서 이루어진 言語동작은 자연히 바른 것이 됩니다.
정어(正語)의 구체적인 예로 망어(妄語), 악어(惡語), 양설(兩舌), 기어(綺語)등 4가지의 금하는 것이 제시되는데 적극적으로는 타인을 올바르게 지도, 계몽하거나, 다른 사람을 칭찬해주고 북돋아 주거나, 성실한 말로 남을 대하거나, 필요할 때 필요한 말을 하는 등의 올바른 言語 행위를 가르킨다고 보여집니다.
우리의 불화나 투쟁, 반목, 시기, 등은 그릇된 言語 행위로부터 일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올바른 言語 행위에 의해서 자타의 선의(善意)를 소통시키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매우 필요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의 생각을 밖으로 표현함에 말과 몸으로써 하는데 몸으로써의 행위보다는 말로써의 행위가 앞섭니다. 따라서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르게 생각한 바를 바르게 말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만일 생각한 바와 다르게 말을 하거나 혹은 아무런 이렇다 할 생각도 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말을 한다거나 한다면 이는 결코 바른말 좋은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른 생각과 바른말을 하여야합니다. 이것이 正語라고 합니다.

④ 정업(正業) :  올바른 신체적(身體的)행위이다.
우리의 의지, 심정(의업:意業)은 반드시 언어적 행위(어업:語業), 또는 신체적 행위(신업:身業)를 통해 외부로 표출됩니다. 따라서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의 의업(意業)에서는 자연히 정어(正語)나 정업(正業)에 대한 해석은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을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적극적으로 생명을 구조하거나 재물의 시여(施與:남에게 조건 없이 그저 물건을 베풀어 줌), 자선(慈善)을 행하거나 인륜도덕의 도를 스스로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것을 권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속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말과 몸인데 말이 바르면 행동도 바로 해야한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언행일치(言行一致)란 말도 있거니와 말과 행동이 달라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正見 다음에 마음으로써의 정사(正思), 입으로써의 정어(正語), 몸으로써의 정업(正業)의 순서로 되어 잇는 것은 우리가 행동하고 잇는 모든 기관을 통틀어 나누면 몸(身)과 입(口)과 마음(意)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우선 마음에 생각하는 바가 있어야 말로 표현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는 몸으로써 행동하기 때문에 정해진 자연스러운 순서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원래 業이란 말은 모든 신(身)·구(口)·의(意)의 행위를 가르키는 말로 모든 행위는 반드시 원인이 되어 그에 따른 결과를 초래할 세력이 있으므로 일컫는 말인데 여기에서의 정업(正業)이란 의업(意業)으로써의 正思와 구업(口業)으로서의 정어가 이미 앞에 나와있기 때문에 身業을 가르키는 말로 표현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⑤ 정명(正命) :  올바른 생활이다.
명(命)이라고 하는 것은 활명(活命) 즉 생활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사어(邪語), 사업(邪業)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다시 여기에 덧붙여 올바른 하루하루의 생활 법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따로 분리시켜 살 수 없고, 삿된 견해(見解)가져  신(身)·구(口)·의(意)로써 삿된 업을 지어온 것이 우리들의 생활이었다면 이제 바른 견해 즉 지혜(正見)를 가지고 마음(意)으로는 바르게 생각하고(正思), 입으로는 바르게 말을 하고 몸으로는 바르게 행동하여 이것이 합쳐진 전체의 우리생활이 바르도록 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이러한 바른 행동을 하는 올바른 생활법(生活法)을 正命이라 고합니다
출가자의 正命으로는 출가자가 재가자의 신앙보시에 의존하여 주야 6시간을 규칙적으로 보내는 것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⑥ 정정진(正精進) : 올바른 노력, 올바른 용기를 말한다.
원시경전에서는 이 올바른 노력을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의하면 먼저 우리의 이상, 목적의 실현에 도움이 되는 것을 善이라고 하고, 반대로 장애가 되는 것을 惡이라고 하는데 이 善과 惡에 대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정진(精進)노력인가를 네 방면에서 고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善은 얻도록 노력하며, 존재하는 惡은 소멸시키며, 아직 존재하지 않은 惡은 이후에도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등입니다.
우리는 正見에서 正命까지를 잘 한다하여도 그것이 일순간이 되어서는 안돼는 것이며, 끝없이 이어져야만 합니다.
끝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도록 하는 正命의 생활을 정정진(正精進)이라고 합니다.

⑦ 정념(正念):  바르게 올바른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자신 및 주변의 입장을 항상 염두에 두어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자아(自我)에 집착하는 마음이 아니고 正見 내지 正定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 자신이나 주위의 입장을 올바르게 알아 항상 그것에 유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올바른 의식(意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正念은 불교에서는 정지(正知)와 함께 서술되는데 이 正知와 正念은 대체로 유사한 심정을 가르킨다고 보여집니다.
正知는 자신의 일상적인 동작, 태도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을 끊임없이 의식, 반성하는 것이고, 正念은 자기 주위의 모든 것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부정(不淨)한 것임을 항상 염두에 두어 잊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正見을 얻은 우리는 正思에서 그를 깊이 새겨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으로 외부에 표출하되 그것이 전부 바른 것이고 보면 마음이 다른 곳에 쏠릴 리가 없이 오로지 일심으로 바른 것만 생각하게 됩니다.
이 바른 것만을 생각하고 그 바른 것을 한시도 잊지 않는 것을 정념(正念)이라고 합니다.

⑧ 정정(正定): 올바른 禪定으로 정신통일의 상태를 지속함을 말한다.
이것은 반드시 좌선(坐禪)에 의한 정신통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일상생활에서도 어떤 하나에 열중하여 삼매(三昧)에 드는 것은 여기에 해당됩니다. 물론 정정(正定)의 해석에서는 초선(初禪)에서 제 四禪 까지의 정식 선정(禪定)을 들고 있으나, 이와 같은 특별한 禪定은 전문가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식 禪定이 아닌, 정도가 낮은 정신 통일도 우리의 일상생활에는 큰 도움이 됩니다.
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 하는 몽매하지 않는 마음도, 무념무상(無念無想)이라고 하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는 마음의 상태도 모두 正定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특별히 正定을 훈련하지 않는다 해도 어떤 일에 열중하여 꿈속에서까지 그 일을 하게 되면 자연히 正定의 상태를 얻을 수 있다.
正定은 正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이 완전히 안정된 一心三昧를 말합니다.
모든 것이 바르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만일 마음에 조금이라도 산란함이 있다면 正見부터가 이미 흔들리므로 만사가 바른 것이 될 수 없으며, 이 마음에 아무런 산란함이 없는 것을 정정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볼 때 정견과 정정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八支는 正見에서 출발하여 정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정정은 다시 正見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이 八支는 시작과 끝이 따로 없이 입체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끝으로 바르다(正)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알아봅시다.
제일 처음의 正見이란 곧 세상의 이치를 바로 보고 바로 아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바른 이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위에서도 논중하여 본 바와 같이 다름 아닌 \┳中道\┳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正見의 正은 그 내용이 곧 中道인 것입니다. 따라서 나머지 八支는 中道로 생각하는 것이므로 正思요, 中道로 말하는 것이므로 正語요, 中道를 말하는 행하는 것이므로 正業이요, 中道로 생활하는 것이므로 正命이요, 中道로 생활을 쉬지 않고 계속하자는 것이 正精進이요,中道만을 오로지 생각하고 잊지 말자는 것이 正念이요, 中道로 직접 체득하자는 것이 正定인 것으로 八正道의 모든 行은 전부 中道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八正道란 곧 中道를 실천에 옮기는 행법(行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八正道를 실천적(實踐的) 중도행(中道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