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풍대군파(환조대왕 제1남) 약사

 

     완풍대군(完豊大君) [1330(고려 충숙왕 17)∼1388(고려 우왕 14)]

풍대군은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 완남군(完南君) · 완녕군(完寧君) 등 네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세 딸은 이인우(李仁雨) · 노신(盧愼) · 변중량(卞仲良)과 혼인하였다.
대군의 장남인 완원부원군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선평군(善平君)은 또 세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경명군(慶明君)은 두 아들은 두었는데 장남 권생(勸生)은 대사헌을 지냈다.
13세 시태(時泰)가 완산부원군파에서 양자로 왔고, 18세는 효령대군파에서 철재(轍在)가 입양되었다.
완원부원군의 후손은 공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양평 부근과 서울, 그리고 대군의 묘소가 있는
함흥 북청 부근에 많이 살고 있다. 한말의 용익(容翊) 대감과 준(儁) 열사가 공의 후손이다.
대종가(大宗家)는 서울 안국동 옛 경기고교 자리에서 여러 대를 내려왔으며 지금의 미국대사관
자리에는 별장도 있었다.
18세 철재 종손은 공주부(公州府) 경무관을 거쳐 탁지부 재임 때 한일병탄이 되자 시흥으로
낙향하였다. 완원부원군의 부조위 사우(祠宇)는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 21세 대종손 주원(柱元)은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다.
둘째 아들인 완산부원군은 세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여양군(驪陽君)이 돌아가니 정부인(貞夫人) 김씨가 네 아들을 데리고 친정인 전남 담양에 있는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김천서(金天瑞)의
집으로 낙향하였다.
여양군의 장남인 월성군(月城君)의 아들 효상(孝常)은 다시 전남 영광으로 성종 때 이주하였고 5세 세원(世元)이 완산부원군의 부조위 사우를 다시 짓고, 사림(士林)이 묘장서원(畝長書院)을
창건하였다. 23세 종손 규헌(奎憲)에 이르기까지 5백여 년 간 종손이 한 집터, 한 지붕 아래서 면면히 이어가며 번성하고 있다.
셋째 아들인 완남군은 외아들 여안군(驪安君)을 낳고 여안군은 또 외아들 진릉군(晋陵君)을
두었다.
진릉군은 함길도진무사(咸吉都鎭撫使)로 봉직하고 있었을 때 군기불단속죄(軍紀不團束罪)로
삼척에 유배되었다가 둘째 아들 교리(校理) 승복(承福)의 무죄상소가 받아들여져 풀려나와 복직을 마다 하고 1456년(세조 1) 양양(襄陽)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입향조가 되었다.
흥덕현감(興德縣監)을 지낸 6세 공량(公樑) 이후 19세에 이르러 종손 곤하(崑河)가 월북하여 면수(冕洙)가 종손 역할을 하고 있으며 5백여 년을 양양에서 세거하고 있다.
넷째 아들인 완녕군(完寧君)은 외아들 여강군(驪江君)을 두었고,여강군은 외아들 춘성군(春城君)을 두었다.
후손들은 평안남도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세계를 이어왔다.

종원 분포 상황

완풍대군 후손은 59,813명으로 파악되고 재북(在北)종원을 합하면 159,813명으로 추산된다.
완풍대군 할아버지는 아들4형제를두었으며  

  첫째인 완원부원군(안소공) 후손은 공의 묘소가 있는 양평 일대와 종가가 있었던 서울에서 많이 살고, 청주 · 김포 · 영천 · 평택 · 진부 · 파주 등에 산재하여 12,000여 명에 이르고, 북한의 함흥 · 북청 · 명천 · 영흥 · 홍원 ·이원 · 웅기 등지에 100,000여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후날 우리국사책에 나오는 이준열사도 배출하였다 
  둘째인 완산부원군(양도공) 후손은 공의 부조위 사우와 묘장서원이 있는 영광에서 20대째 5백여년간 세거하였으며, 후손의 대부분이 이 고장에서 퍼져 나갔다. 산업화에 따른 거주 이전으로 지금은 영광을 중심으로 함평 · 장성 · 나주에 2,920명, 광주 · 담양 · 화순 · 곡성에 9,120명, 목포 · 무안 · 여수에서 3,700명, 전주 · 부안 · 고창 · 순창 · 남원 · 임실 · 정읍 · 이리 등 전북지역에 7,120명,
기타 지역 10,000여 명, 서울 · 경기 일원에 10,000여 명이 이주하여 계 42,860여 명으로 파악된다.
  세째인 완남군 후손은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수여리를 중심으로 진릉군(晋陵君) 세문(世門)이 입향 · 이후 5백여 년 18대째 세거하고 있는데, 양양 · 속초 · 고성에 2,053명, 강릉 · 평창 · 홍천에 1,500명, 서울 기타 등지에 1,200명, 계 4,753명이며

  네째인 완녕군 후손은 평안도가 주거지이나 남북분단으로 월남한 종원들이 서울 등지에 200여 명이 살고 있다.

파종회 연락처



대 표 파 종 회 주 소 연 락 처
장섭 서울 관악구 신림4동 495-10 862-6528  019-578-6528


 

 

 휘는 원계(元桂)이며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환조대왕의 1남으로, 어머니는 한산이씨이다.
 태조고황제 잠저 시에는 공과 의안대군 등 3형제의 우애가 매우 두터웠다.
 태조고황제와 함께 누차 홍건적과 왜구를 토벌, 혁혁한 공을 세웠다. 1359년(고려 공민왕 8)에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와 노략질을 하자 이를 격파하여 2등공신이 되고 1361년 2차 침입 때 내부령(內府令)으로서 안우(安祐) 등과 함께 박주(博州)에서 홍건적을 크게 무찌르고 다음 해에는 수도인 개경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1363년에 또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1375년(고려 우왕 1) 원제(元帝)가 고려 국왕으로 임명한 심왕(瀋王) 모자가 반역자 김의(金義)의 무리를 거느리고 이미 신주(信州)에 도착하였다는 보고에 따라 국방경비를 강화할 때 동지밀직사(同知密直使)였던 공은 원수(元帥)가 되어 서북방어의 임무를 담당, 반도(叛徒)를 막아내었고 1377년(고려 우왕 3) 왜구가 강화도에 침입하자 상원수인 나세(羅世)와 함께 격파하였다. 1380년(고려 우왕 6) 3월 왜구가 또 다시 광주(光州) · 화순(和順) · 능성(綾城)을 침범하자 원수로서 나가 막아냈고 동년 8월 왜적이 배 500척을 진포(鎭浦)에 매어 두고 양광(충청) · 전라 · 경상 3도의 연해에서 노략질하자 공은 양광도순찰사(楊廣都巡察使)가 되어 출전, 변안열(邊安烈)과 함께 3도도순찰사인 태조고황제를 도와 남원 운봉에 이르러 대승하였다. 유명한 이 황산대첩(荒山大捷)에서 많은 포로와 말 1,600여 필을 포획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기를 노획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388년(고려 우왕 14) 고려가 요동(遼東)을 정벌할 때 공은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출전하여 우군도통사인 태조고황제의 회군에 처음에는 고려의 충신으로서 반대하였으나 마침내 회군에 협조하게 되었다. 태조고황제 개국 후 회군2등공신에 봉해졌다.
 위화도 회군 이 후 태조고황제 옹립의 기운이 높아지자 공은 대대로 은혜를 입어 온 고려왕조를 모반할 수도 없고, 한편 형제로서의 효우(孝友)를 버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이었다. 고려 충신이었던 공은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신념을 지켜 네 아들에게 “너희는 나와 입장이 다르니 숙부(태조고황제)를 도와서 충효를 다하여라.” 유언하고, 다음의 필명시(畢命詩)를 남기고 1388년 10월 23일 음독 자결하였다.

 “이 나라 땅 안에 이 몸 둘 곳이 어데일꼬,
 죽어 지하에서 태백중옹을 만나 놀고 싶어라.
 같은 처지에서 마름질[處身]함이 다르다 말 마 오,
 형만 땅에는 바다에 뗏배 띄울 일 없어라.
 (三韓故國身何在, 地下願從伯仲遊. 同處休云裁處 異, 荊蠻不必海 浮.).”

 이 필명시는 1908년(순종 2) 18세 종손 철재가 진정하여 왕의 윤허를 받아 무덤을 수축할 때 지석에 음각되어 있어서 재확인 되었다.
 공은 처음에 척산군(陟山君)에 봉해졌고 오랑캐 토벌과 왜구 토벌의 혁혁한 전공으로 다시 추충절의보리공신 삼중대광 완산군에 올랐다. 태조고황제는 등극 후 완산백(完山伯)으로 추봉하고 `양평'이란 시호를 내렸다.
 1872년(고종 9) 완풍대군 겸 영종정경으로 추증되고, 자손들은 4세봉군(四世封君) 겸 종정경 증직의 은전을 입게 되었다.  공의 묘소는 함흥군 북주 동면 경흥리 귀주동 정릉(定陵) 오른쪽 언덕에 있다. 묘비문과 신도비명은 순종 때 왕실지친이었던 종정원경(宗正院卿) 완순군(完順君) 재완(載完)이 찬술하였다.
 남북분단으로 묘전에서 향사를 올릴 수 없어 1984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 능곡에 천향지소(遷享之所)로 흥경단(興慶壇)을 설단하고 음력 10월 첫 일요일에 세일제를 봉행한다.
 배위는 남평문씨와 경주김씨이다. 남평문씨 익점(益漸 : 목화를 전래한 사람)의 딸에게서 2남 1녀를 두니 아들은 완원부원군 · 완산부원군, 사위는 중랑장 이인우(李仁雨)이며, 경주김씨 찬성사 용(鏞)의 딸에게서 2남 2녀를 두니, 아들은 완남군 · 완녕군, 사위는 생원 노신(盧愼), 승지 변중량(卞仲良)이다.

 

 

興慶壇(흥경단)
 
 
완풍대군 양평공과 배부부인 남평文씨, 동 경주 金씨의 신위단이다.

매년 음력 10月 첫째 일요일에 제향을 모신다.

 

완풍대군묘소는 함흥 귀주동에 있으나 북한땅이기에 "안소공"묘소옆에 단비를 세웠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대심리 능곡(국수리 하차 전방 500미터 지점)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地)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소재 사적 제140호

 

이성계장군을 양광, 전라, 경상, 삼도 도순찰사에 임명 변안열, 이원계 등

8원수와 정몽주, 이천우 4종사관 1,000여 군병으로 전투 참전 대승을 거두었다.


 

완풍대군(元桂)은 8원수로 양도공(天祐)은 4종사관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완풍대군 이원계는 두차례 홍건적을 격퇴, 공신으로 척산군에 봉군 아들 양도공  

과함께 참전. 양도공은 백병전 끝에 왼편귀와 코에 큰 상처를 입었다.

출처 : 전주이씨완풍대군파동공종회  |  글쓴이 : 이현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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