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진과 아들 위종

 

 이범진 열사 추모비(오른쪽)와 묘역.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51) 이범진 열사의 넋을 기리며 

 

ㆍ“조국 대한은 죽었습니다”
ㆍ참을 수 없는 비통과 절망…외교관 생 마감 
ㆍ재러 항일운동 주도…일부 유적 기념관조성 차질 ‘착잡’

실크로드의 시베리아 초원로를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쪽 끝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1만여㎞(1만188㎞)를 두 번에 꺾어 주파했다. 이 기나긴 여정에서 필자는 이 길 위에서 풍기는 인간들의 삶과 만남의 향훈을 만끽했을 뿐만 아니라, 이 길과 더불어 남긴 우리 겨레의 애환이 가득 찬 족적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어쩌면 이것이 노독을 무릅쓰고 긴 여정을 단숨에 달려가게 한 동력이었으며, 그 여정의 기록을 거의 마무리하는 이 순간까지도 뇌리의 심연에 각인되어 있는 지울 수 없는 기명(記銘)일 것이다. 그 가운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범진 열사와의 새삼스러운 만남이 있다.

이범진과 아들 위종

그 시절 우리의 외교사를 편력하던 중 우연히 이범진 열사의 최후를 단편적인 기사로 읽은 바 있다. 화려한 외교관의 삶을 순국 자진(自盡)으로 마무리하는 일은 외교사에 드문 일이다. 그래서 일찍이 이곳에 들렀을 때도 궁금증을 풀려고 기웃거려 봤지만 허사였다. 사실 열사의 행적은 90여년이란 긴 세월 동안 소외와 무지 속에 파묻혀 있었다. 다행히 새로운 세기와 더불어 비장되었던 문서기록과 친지들의 생생한 증언, 그리고 학자들의 고증에 의해 그의 행적은 빛을 보게 되었다. 드디어 오늘 우리는 그 현장을 찾게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르그로보 3번지 북방묘지(옛 우즈펜스키 공동묘지) 제8구역에는 2002년 7월에 세워진 이범진 공사의 추모비가 의연하게 서 있다. 추모비에는 “이범진 공사는 1852년 9월3일 서울에서 탄생하여 1911년 1월13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순국한 대한의 충신이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위훈에 비해 너무나 소략한 비문이라서 조금은 아쉬운 감이 없지는 않지만, ‘순국한 대한의 충신’이란 한 마디 글귀에서 ‘순국지사’이자 ‘독립운동가’란 명예를 읽을 수 있지 않나 싶어 그나마 위안을 느낀다.


국운이 경각에 달려있던 한말에 활동한 이범진(李範晉)은 전주 이씨 가문 출신으로서 자는 성삼(聖三)이다. 부친 이경하(李景夏)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애국 무장이다. 이런 무가에서 태어난 이범진은 27세에 병과로 급제해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과 총애 속에 관운이 뒤따라 승승장구한다. 명성황후가 피살된 을미사변 후에는 일제의 위해가 걱정되어 고종과 황세자를 러시아공간에 옮기는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년)을 주도하고 김홍집을 괴수로 한 친일내각을 몰아낸다. 대신 박정양을 수반으로 한 친러내각을 조직하는 데서도 주도적 역할을 한다. 그러다가 주미공사(3년간), 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겸임공사에 이어 1901년 러시아 상주공사로 임명된다. 대 러시아 외교를 한창 펴고 있을 무렵인 1905년에 망국적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대한의 주 러시아 공사관은 폐쇄된다.

주 러시아 한국공사관 건물(1901~1905년)

일제의 강요에 의한 공사관의 폐쇄에 불만을 가진 이범진 공사는 송환령에 불응한다. 그 후 순국할 때까지 6년간 여권 발급 등 정상적인 공사관 업무를 계속하면서 구국의 일념에서 국권 회복을 위한 국제적 활동을 전격적으로 전개한다. 그는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는 고종의 친서를 러시아 황제에게 전하는 등 현지에서 고종의 밀사 역을 수행하면서 러시아의 도움으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과 이상설, 그리고 둘째 아들 이위종을 특사로 밀파하여 일제의 조선 강점을 만천하에 고발하고 빼앗긴 국권 회복을 호소한다.

능수능란한 외교관으로서 이러한 국제적 활동을 펴봤지만, 국권 회복이라는 대의를 실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이제 얼굴을 안으로 돌린다. 최근 러시아와 일본 외교문서에서 이러한 그의 전환을 입증하는 새로운 사료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는 공사권이 피탈된, 생의 마지막 6년 동안 ‘대한의 충신’으로서의 삶을 불태우고 있다. 극동 연해주 지역의 민족운동가들과의 긴밀한 연계를 통해 애국계몽운동과 항일의병투쟁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다.

해외 항일 언론의 모태이기도 한 ‘해조신문(海潮新聞)’이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이범진은 곧바로 축하편지와 함께 지원금을 보낸다. 3년 전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의 논설로 세상을 일갈했던 장지연 선생이 주필을 맡은 ‘해조신문’은 재러 한국인들이 만든 최초의 한글신문으로서 비록 3개월 동안(1908·2·26~5·26) 총 75호를 낸, 단명의 신문이었지만, 국내외 동포들의 항일 민족의식을 북돋는 데 크게 이바지한 애국의 목탁이었다. 이범진은 같은 해 연해주 크라스키노에서 결성된 대표적 의병투쟁 조직체인 ‘동의회(同義會)’에도 금 1만루블을 휴대한 아들 이위종과 그의 장인인 사돈 놀켄 남작을 보내 지원한다. 그뿐만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거주지 신한촌의 민족교육기관인 한민학교 설립에도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러일전쟁 이후 일제가 더욱 악랄하게 기승을 부리자 이범진은 국내 진공까지 시도한다. 당시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전 간도관리사 이범윤(李範允)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연해주 방면에서 두만강을 건너서 일거에 함경도를 점령하고, 길게 몰아쳐서 서울에 들어가 승리의 노래를 연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럴 때 자신이 총사령관, 이범윤이 부총사령관이 될 것이라고 거듭 천명한다. 그 후 안중근의 의형제인 엄인섭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협심해 의병봉기를 일으킬 것을 촉구한다.

 

그러던 그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전 재산을 정리해 서슴없이 각지에 후원금으로 보낸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 그는 자산으로 7만루블을 갖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미주 국민회에 5000루블, 미주 무관학교에 3000루블, 미주 신문사에 1500루블, 하외이에 1000루블, 블라디보스토크 청년회에 2000루블, 블라디보스토크 신문사에 1000루블을 각각 기증한다. 그리고 자신의 장례비로 5000루블, 아들 이위종 부부에게 약간의 금액을 유언으로 남긴다. 실로 이익이 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를 생각해보는 견리사의(見利思義)의 정신과 공을 앞세우고 사를 뒤로 하는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의지를 대변하는 전범(典範)치고 이보다 더한 전범이 또 어디 있으랴.

이범진 열사 추모비(오른쪽)와 묘역.

이것도 모자라 망국에 참을 수 없는 비통과 절망을 통감해 오던 이범진은 마침내 고종황제에게 “우리의 조국 대한은 이미 죽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모든 권리를 빼앗겼습니다. 소인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 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소인은 자살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소인은 오늘 생을 마감합니다”라는 유서를 남겨놓고 자진 절명한다. 결국 죽음으로 원수 일제에 저항하고자 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문득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그 유명한 ‘절명시(絶命詩)’ 4수가 떠오른다. 시골에 칩거해 있던 반골선비 매천은 “나라가 선비 기르기 5백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랴”라고 절규하면서 “망국 선비로는 못 산다”라는 유언과 함께 이 ‘절명시’를 남기곤 더덕술에 아편을 타마시고 자결한다. 두 순국지사의 최후에서 우리는 나라에 대한 사명을 깨닫고 시대적 한계 속에서 자결로 그 사명을 다하는 비장함과 떳떳함이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열사를 두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근대사에서 아관파천을 주도해 나라의 이권을 러시아에 넘겨준 친러파로 지목되어 왔다. 물론 그러한 점은 부정할 수 없기에 그를 역사에서 공과를 겸행한 인물로 판정할진대, 과를 넘어선 공으로 생을 마감한 점을 감안한다면, 이제 그러한 평가는 편견이나 폄훼로 낙착 짓고 새롭게 조명해야 할 것이다. ‘웃음은 마지막 웃음이 진짜 웃음인 것’처럼 인간의 참 삶은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인간사회엔 이성에 바탕한 상쇄율(相殺律)이 있어 공이 과를 상쇄하기도 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191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간행된 홍보물 ‘애국혼’에 실린 ‘이범진공’이란 글에서 ‘생명을 충성으로 버리고, 재산을 의(義)로 씀’이란 부제로 내린 그에 대한 평가야말로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당시 현장에서 내린 실의(實意)의 평가는 오늘의 백면서생들이 책상머리에서 들먹이는 낙점보다는 진정성과 신빙성이 더 높지 않겠는가. 그리고 헤이그 밀사 파견을 진두지휘한 그에게 파견된 이준 열사나 아들 이위종보다도 낮은 급의 훈장이 서훈되었다면, 그 기사(奇事)는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는지.

다행히 이러저러한 착잡한 회한을 불러일으키는 열사의 유적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몇 곳에 남아 있어 그날을 증언하고 있다.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그러한 유적은 2001년 이곳에서 피살된 한 한국 유학생의 장례를 맡은 블라디미르라는 장의사가 바로 90년 전 열사의 장례를 맡았던 장의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발굴이 급물살을 타게 된다. 이범진 공사가 부임 후 임시숙소와 사무실로 썼던 집은 철도역 가까이 넵스키 대로 118번지에 자리한 한 호텔이었으며, 1901년 3월 그가 러시아 상주공사로 임명된 후 거처한 곳은 시묘노프스카야 거리 11번지의 꽤 웅장한 건물이다. 1901년 11월부터 1905년 6월까지 공사관으로 사용한 집은 시내 중심가에 있는 ‘여름정원’ 바로 옆에 위치한 페스첼라 거리 5번지의 고색창연한 5층 건물이다. 문호 푸슈킨과 레닌도 한때 거주한 바 있는 유서 깊은 이 건물이 지금은 보통 아파트로 쓰이고 있으나, 당시 모습 그대로이다. 1층 벽면엔 “이 건물에서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이범진 러시아 주재 대한제국 초대 상주공사가 집무하셨습니다”라고 한글과 러시아어로 쓰인 현판이 붙어있다. 공사관은 3층 6호와 7호실을 임대하고 있었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이 건물의 일부를 매입해 열사기념관으로 조성하려는 사업이 예산 문제로 보류되었다고 하니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이범진 열사의 시신 안치소(페트로파블롭스키 병원)
열사가 생을 마감한 순국 장소는 체르노레친스카야 거리 5번지에 있는 방이 6개가 달린 한 목조건물이다. 그는 1905년 6월부터 1911년 1월 자결할 때까지 이곳에서 홀로 비서와 함께 살았다. 장례비만 남겨놓고 독립운동에 사재를 다 털어놓은 처지라서 옷이나 시계 등 가재를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빌려 쓰는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곳의 한 일간지는 1911년 1월14일과 22일자 지면에 열사의 자결과 장례 소식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1월13일 낮 12시 한국 공사인 ‘왕자 이범진’(59세)은 거실에서 천장 전등에 밧줄을 설치하고 목 매달아 사망했다. 밧줄로 목을 맨 상태에서 권총으로 자신을 향해 총 3발을 쐈으나 탄환이 벽과 천장을 향해 빗나갔다. 고인이 관할 경찰서장 앞으로 보낸 유서에는 “그 누구에게도 잘못이 없고 지극히 평정한 마음 상태에서 자결한 것이며, 이는 조국이 주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할 명분이 없고 적에게 복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자결 원인을 담담히 적고 있다. 1월21일 ‘애국왕자’의 시신이 안치된 페트로파블롭스키 병원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친지들과 함께 각지에서 온 한국 교민대표단과 조문객 등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 고인을 바랬다. 태극기가 덮인 관과 조문객을 태운 세 대의 운구열차가 핀란드역을 떠나 장지인 우즈펜스키 묘지에 이르러 그곳에 시신을 안장했다. 비명에 간 고인의 유언이런가, 영안실이나 장지에서는 아무런 장례의식이나 추도사도 행해지지 않았다. 이렇게 독립운동가이자 순국지사인 이범진 공사는 이역만리에서 고국의 산천을 등진 채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열사의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애족의 숭고한 얼과 넋을 기리고 이어받는 일,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여전한 몫이다.

<정수일 |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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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잊혀진 간도  |  글쓴이 : 간도 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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