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이용익선생 

 

 

군부대신 시절 이용익선생 모습

 

 

 

 

 

 

이용익 선생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후손으로 1854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출생했다. 고종 황제의 충신으로 탁지부 전환국장, 원수부 전환국장, 중앙은행 부총재, 군부대신 등 조선왕조의 주요 요직을 섭렵했다.

1902년에는 탁지부 대신이 되어 항일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는 이준·민영환·이상재 등과 개혁당을 조직하였다.

1904년 굴욕적인 한일의정서 체결에 반대하다가 일본에 납치된 이용익 선생은, 선생의 납치를 위해 일제천황까지 직접 서명한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일제에게는 '요주의 인물'에 올라 있는 항일 독립운동가였다.

납치에서 풀려난 이용익 선생은 귀국 후, 독립정신과 구국이념 민족교육을 위해 1905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와 보통학교(현 보성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고종황제의 '일제 세력의 축출을 위하여 프랑스·러시아 세력과의 제휴를 꾀하라'는 밀령을 받고 프랑스로 가던 중,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해외에서 구국운동을 벌였다.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김현토의 총을 맞고 병을 얻어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용익 선생 사후, 선생의 정적이자 선생을 모함했던 친일파 상당수가 일본의 조선 강제 합병에 공헌한 대가로 일제로부터 작위와 재물을 받았다.

반면 이용익 선생 가문은 일제에 의해 재산과 직위를 몰수당했다. 그럼에도 이용익 선생의 손자인 이종호 선생은 조부를 이어 보성전문의 교장을 역임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여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친일파들로부터 '친러파'로 낙인찍힌 이용익 선생은 '친일과 반공'으로 이어진 우리 근현대 역사 속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용익 선생의 공적이 제대로 평가될 경우 그를 탄압했던 친일파들이 자신들의 만행이 부각되는 것을 우려, 선생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도 지난 2002년 고려대학교 조익순 명예교수가 <고종황제의 충신 이용익의 재평가>를 출간하면서 우리 역사학계에서도 선생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일고 있다.
/ 최재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