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31. 이응종 등 55명, 영광군을 지키다 - 영광 임진 수성사
입력시간 : 2011. 02.23. 00:00


영광읍에 있는 임진수성사의 숭의문.
"영광은 호남 요충지" 자발적 향토 방위

임란발생 이후 온통 비관 일색 백성들 불안 속

26개 문중 사림 55명 삽혈동맹 통해 항전 결의

5개월간 수성 치밀한 조직운영 등 대비 돋보여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광 사람들 역시 긴장한 모습이었다. 비록 왜적이 영광 땅에 쳐들어오지는 않았으나 나쁜 소식만 들려왔다. 선조 임금이 의주로 피난을 가고, 고경명과 조헌의 의병이 금산에서 순절하고, 임해군·순화군 두 왕자가 왜군에게 붙잡히는 등 온통 비관 일색이었다.

7월 하순에 영광의 선비 이응종(1522-1605)은 71세의 나이에 장성 창의 소식을 듣자, 두 아들 극부·극양과 함께 김경수를 찾아간다. 이응종은 개국공신이고 종친인 완산부원군 이천우의 6대 손으로서 일찍이 외삼촌 윤구에게서 공부를 배우고 덕망을 쌓은 선비였다. 그는 김경수와 함께 창의할 것을 맹세하고 의병 50인과 의곡 40여 섬, 말 17마리와 소 4마리를 모았다.

그런데 10월2일에 영광군수 남궁현이 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자 영광 백성들은 불안을 감추지 못하였고 민심이 흉흉하였다. 체찰사는 이방주를 직무대리로 임명하였으나 불안한 민심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광의 지도층들이 자발적으로 향토방위에 나선다. 10월 18일 오성관에서 26개 성씨의 문중, 55명의 사림들이 모인다. 그들은 “영광은 호남의 요충지이니 이곳을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 군사의 양식을 운반하는 길은 끊어지고 만다. 죽음으로 우리 성을 지켜내자”고 결의한다. 그리고 삽혈동맹, 즉 산 짐승을 잡아 서로 피를 나눠 마시며 맹세하기를, “무릇 우리 동맹한 사람들은 맹세한 뒤에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목을 벨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모임에서 사매당 이응종을 수성도별장으로 추대하고 성의 방위 체제를 24개 부서로 편성하여 55명의 책임자를 임명하였다.

24개 부서는 행정부서와 전투부대로 나누었다. 도별장 밑에 부장, 종사관 , 군정, 참모관, 장문서, 폐막관, 도청 서기 등의 직책은 주로 행정 부서이고, 수성장과 종사관, 대장 군관, 부장 군관, 남·북 수문장, 중위장, 중부장, 유군장, 동·서·남 외진장, 동·남 종사관, 군관, 수성군관은 전투부대에 해당한다. 행정부서는 영광군 일상 업무를 수행하였고 전투부대는 성을 지키었는데 편제는 남문과 북문을 수비하게 하고, 성외에도 동서남쪽에 진장을 배치하였으며, 기동타격대 형태의 유격대를 두어 전투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참여한 의사 55명 명단은 다음과 같다. 도별장 이응종, 부장 강태, 종사관 이홍종, 이해, 신장길, 이용중, 임수춘, 정희열, 군정 이굉중, 정희맹, 참모관 이헌, 이안현, 이옥, 노석령, 류익겸, 김재택, 정희열, 봉단의, 임수춘, 장문서 김태복, 이분, 이극부, 강항, 폐막관 이용중, 이극부, 수성장 오귀영, 종사관 김남수, 정여기, 김경, 도청 서기 김구용, 정응벽, 오윤, 정구, 대장 군관 정경, 류영해, 이효안, 이극양, 이극수, 부장 군관 김운, 류집, 강윤, 남수문장 이희익, 강극효, 북수문장 김대성, 이거, 중위장 최희윤, 중부장 이희룡, 유군장 김찬원, 서외진장 이효민, 남외진장 김춘수, 동외진장 한여경, 남종사관 이유인, 동종사관 김광선, 군관 김정식, 송약선, 정여덕, 정념 ,수성군관 강락, 김봉천이다. (직책으로는 59명이나 4명이 겸직하여 실제 참여인원은 55명이다)

이들 55명 중 이굉중, 이용중, 오귀영, 임수춘, 강항, 이헌, 이안현, 송약선 등 18명은 6월에 함께 창의하여 의병과 의곡 그리고 무기를 고경명 의병소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형제, 아들, 조카들이 함께 참여한 문중도 상당수 있다. 도별장 이응종의 경우는 아우 이홍종, 두 아들 이극부와 이극양, 그리고 조카 이극수가 참여하였고, 세종 때의 명신 강희맹의 집안에는 부장인 증손자 강태와 남수문장인 4대손 강극효, 강극효의 아들 강락 그리고 조카 강항 (강항은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가서 일본에 성리학을 전파한 유학자이다. 간양록을 썼고 영광 내산서원에 배향되어 있다)과 강윤이 동참하였다. 군정 정희맹은 동생 정희열, 두 아들 정경과 정건이 함께 참여하였고, 참모관 류익겸은 아들 류집, 조카 류영해와 같이, 군정 이굉중은 아우 이용중과 함께 참여하였다. 아울러 송약선은 중종때 청백리 송흠의 4대손이고, 봉단의는 사육신 박팽년의 매제 봉여해의 4대손이었다.

영광 의병들은 자체적으로 수성법을 만들어 성을 지켰다. 수성법은 성을 지키기 위한 전투수칙이다. 여기에는 “수성군이 먼저 공격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적이 성 밑까지 육박해 온다 할지라도 그들이 공격을 하지 않는 한 침묵을 지키다가 적이 공격을 할 때 대응을 한다”는 기본원칙 아래, “적이 와서 성을 핍박하더라도 조용하게 말없이 기다릴 것이요, 함부로 나서서 막을 것이 아니며 적의 실수를 기다렸다가 꾀로서 격파하여야 한다”고 구체적인 전술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최고의 수성 사례로 고구려 장수 양만춘의 안시성 수성을 예시하였다.

이 수성법에는 성을 지키는 데 있어 유념하여야 할 5전과 5패가 설명되어 있다. 즉 5전은 (1) 성과 못이 수리가 잘되어 있음 (2) 기구가 갖추어져 있음 (3) 사람이 적고 곡식이 많음 (4) 상하가 서로 친근함 (5) 형벌이 엄하고 상을 소중히 여김이고, 5패는 (1) 건강하고 씩씩한 자가 적고, 어리고 병약한 자가 많은 것 (2)성은 크지만 사람이 적은 것 (3) 양식은 적은데 사람이 많은 것 (4) 재물이 밖에 쌓여 있는 것 (5) 세력이 강한 자가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이다.

'영광임진수성록'에는 수성일지가 기록되어 있다. 10·18에 향토방위 의병을 조직한 이후 의병들은 각자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고 오직 성을 지켰다. 그리하여 10월 하순 경에는 민심이 다시 예전과 같이 안정되었다.

11월 3일에는 영남 의병장 곽재우가 군량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격문을 보내와 12.15에 군량을 곽재우에게 보냈다. 장성의 남문 의병도 곽재우에게 쌀 100석을 보내었다. 11월 6일 신임 군수 이안계가 도착하였다. 다음 날인 7일에 도체찰사 정철의 명령문이 왔다. 이 공문은 분조를 맡고 있는 세자 광해군의 지시가 “관청에 있는 무신들은 비록 친상을 당했을지라도 관직을 그만두고 자리를 뜰 수 없다”라서 남궁현은 다시 영광에서 근무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임 군수는 북문으로 나갔고 직무대리 이방주도 돌아갔다. 11월 13일에는 도별장 이하 의병들이 오성관에 모두 모였다. 논의결과 이거와 류광형을 모군별장으로 삼아 의병을 더 많이 모집토록 하였다. 1593년 1월 8일 드디어 명나라 장수 이여송 등이 평양성을 탈환하여 전쟁이 유리한 국면에 접어들었다. 2.28 군수 남궁현이 복직되고 왜적이 영남으로 도망갔으므로 수성의병은 마침내 해산되었다. 이로써 1592년 10월 18일부터 영광 성을 지킨 의병들은 1593년 2월 28일에 임무를 완료하였다. 무릇 5개월 동안 향토방위 활동을 한 것이다.
수성사 묘정비


영광 의병들의 수성은 비록 실제 왜군과의 전투는 없었으나 수성 조직을 치밀하게 구성하였고, 수성법에 의거 경비를 하여 만일의 사태에 철저히 대비한 점이 크게 돋보인다.

주말에 영광 임진수성사를 간다. 수성사는 영광군 영광읍 관람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사당은 2002년에 건립되었는데 영광 의사 55명의 신위가 모시어져 있다. 입구에는 임진수성비가 세워져 있다. 외삼문 이름은 숭의문이다. 의를 숭상하는 문. 영광 선비들의 정신이 문의 이름에도 잘 배어 있다.

수성사 안으로 들어갔다. 오른 편에는 수성사 묘정비가 있다. 이 비에는 한글과 한문 혼용으로 임진 수성의 내역이 기록되어 있다. 수성사 기둥에는 주련이 여러 개 있다. 이 글씨 중에는 구국, 정의, 수성등 향토방위의 의지가 담긴 단어가 적혀 있다.

사당을 들어가니 55현의 위패가 디귿자 모양으로 봉안되어 있다. 향로가 있는 곳 바로 중앙에는 수성 도별장 이응종, 오른편에는 부장 강태, 왼편은 종사관 이홍종의 위패가 놓여 있다.

쉰다섯 분의 영광 수성 의병들. 그들은 스스로 자기 고장을 지킨 진정한 향토방위군이다. 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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