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날, 정성으로 빚은 음식을 앞에 두고 좋은 사람과 밤깊도록 도란거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곳이 숲속이라면
요동치던 마음도 우물처럼 고요해질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나의 아쉬움들을 재빠르게 알아 차리고 그
때그때 그것들을 채워준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허겁지겁 배를 채워야 할 이유는 없다. 다투어 많은 말을 해야 할 필요
도 없을 것이다.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나와 마주한 이의 눈빛과 그의 마음 속 말들까지 죄 읽어 낼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밥 한 그릇 먹자는 얘기가 아니다. 계절이 길어올리는 빛나는 언어와 찬란한 빛의 유희를 한껏 누리며 세상살이에 지친
나를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고 싶은 것이다.
마땅한 식당이 얼른 떠오르지 않을 때 찾아가는 골짜기가 있다. 봄이면 길목에 복사꽃이 피고 키 작은 야생화들이 오종
종 피어나는 곳, 오래된 숲엔 진달래와 철쭉이 흐드러지고 아카시아 향기가 온 산을 적시는 곳.
산길 따라 한 시간 남짓 걸으면 낮은 산자락에 식당가가 나온다.(이건 내가 우리 집에서 그곳을 갈 때 걸어가는 코스다.
찻길도 있으니 걱정 할 필요 없다.) 거기 있는 식당들은 여간해선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 어떤 집에 들어가도 기본은
한다. 요즘은 경기가 좋지 않아서인지 문을 닫는 집들도 종종 있고 새 주인을 맞지 못해 쓸쓸히 빈집으로 서 있기도 하
지만 얼마 안 있어 새로운 이들이 들어와 터를 잡곤 한다.
어느 날, 골짜기 중간쯤에 묵집이 들어왔다. 그곳은 한 때는 고기집이었다가 한정식집으로 바뀌어 2년쯤 운영되었던 것
같은데 지난 봄, 묵집으로 바뀌었다. 묵요리는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라 더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겉모습만으로도
어느 정도 그 집의 분위기가 읽혀졌다. 가봐야지, 하고 벼르다 근래에 들렀다.
우리가 그곳에 들어선 시간은 점심이라고 하기엔 좀 이른 오전 11시쯤이었다. 첫 방문이라 어리둥절한데 직원으로 보이
는 이들이 둘레둘레 모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때를 잘못 맞춰 왔구나, 싶어 어찌할까 망설이는데 한 사람이 다가왔
다. 느낌으로 이 사람이 메니저인가 싶었다.(예측이 맞았다.)
"죄송합니다. 저희 직원들 식사시간인데 식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보통은 밥 먹다가라도 손님이 오면 직원이 벌떡 일어나 주문을 받거나 식사를 중단한 채 주방으로 들어가 음식을 준비하
기도 한다. 그런데 메니저가 다가와 직원들이 편히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안배하는 게 참 맘에 들었다.
"그럼요. 저희가 너무 빨리 왔지요? 기다릴게요. 천천히 식사하시고 만들어 주세요."
자리에 앉아 여기저기 둘러 보니 밖에서 보는 느낌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인테리어 하나하나가 모두 작품처럼 보인다. 예
술적 감각이 탁월한 누군가가 장식을 했거나 실제로 예술가가 내부를 꾸민 게 아닐까 싶었다. 잘 꾸며 놓아 좋은 것보다
구석구석, 손님을 배려한 세심한 손길에 감탄했다. 깔끔하고 정갈한 건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삼색 묵 샐러드
여기에 들어가는 재료들은 모두 천연의 것들이다.
식사를 끝낸 직원들이 부산히 움직이더니 얼마 안 있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채반 위에 놓인 음식은 빛깔만으로도 넉히 그
맛이 읽혀진다. 음식을 '만든' 게 아니라 '지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참 행복하다. 잠시 우린 황후가 되어 그들이 지어낸
음식과 가을 빛과 숲이 선물하는 맑은 바람을 한껏 만끽하였다.
나머지 음식들의 맛이 궁금하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이 집을 자랑하고 싶어 한 달 새에 네 번을 갔다. 갈 때마다 음식 맛에 감
탄하지만 그보다 그곳 주인의 마음 씀씀이에 탄복한다.
식당마다 고유한 분위기가 있다. 실내 분위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직원들이나 식당 공기의 흐름을 통해 느껴지는 미묘한 차
이를 말한다. 그곳은 구석구석 손님을 배려한 흔적들이 그득하지만 무엇보다 주인이 직원들을 얼마나 아끼는지를 알 수 있
다.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의 얼굴에 그리 써있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밝고 편안해 보인다. 유독 눈에 띄는 건 다른 식당
에 비해 직원들의 숫자가 많다는 것이다. 그들이 쫓기지 않고 기꺼운 마음으로 양질의 서비스를 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이곳 주인은 당진에서 큰 묵공장을 하는데 그곳에서 생산된 묵은 현대백화점과 홈플러스에 입점해 있는 '산해찬'에 납품
한다고.
가을이 들려주는 '묵 이야기' 한 번 들어보지 않으실라우?
들깨 묵 수제비
묵사발
시원하게, 혹은 따뜻하게 손님 기호에 맞춰 내온다.
도토리 올방개전
도토리 묵에 올방개를 다져 넣었는데 정말 맛이 오묘하다.
올방개 건조 묵볶음
도토리 탕수묵
올방개 불고기 전골
묵 정식에 곁들여지는 밑반찬들
후식으로 나오는 홍시죽
휴게실에서 차 마시는 손님들을 위한 실외 화장실
겉만 예쁜 게 아니다. 안에 들어가면 마치 갤러리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묵이야기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길주로 560번길(원미구 춘의동 255-1)
전화 032-68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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