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대한민국 임시정부 

 

 

[1] 1934년 한·중 함께 군관학교 설립

 

광복군 모태로 김구는 1933년 봄 남경의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국민당 정부의 최고지도자 장개석 군사위원회 위원장과 만났다. 윤봉길 의거의 배후로 지목되어 상해를 탈출한 후 가흥에 은둔하던 때였다

 

1932년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는 3년간

근대적인 군사 지식과 훈련으로 단련된 130여명의 군사·정치 간부를 길러내…

임정의 이동기는 ‘방랑의 시기’가 아니라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시간이었다

 

김구는 군사 인재 양성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고, 그 결실로 중국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 한인(韓人)특별반이 개설됐다. 1934년 초 중국 국민당의 진과부·진립부 형제를 중심으로 하는 최대 계파인 ‘CC파’의 지원하에 설치된 한인특별반의 정식 명칭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였다.

상해를 출발하여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동기는 고난과 역경의 시기였지만, 이처럼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연대 등을 배경으로 항일전선을 재정비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임정이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중국측의 지원은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金九)와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을 상대로 전개됐고, 두 사람은 향후 독립운동의 동량이 될 군사인재 양성에 착수했다.

 

▲ 1939년 11월 17일 일본군에 대한 선전활동·심리전 등을 위해 파견되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김구(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등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임정이 이동기에 길러낸 청년 군사 간부들은 1930년대 말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김구가 설립을 주도한 중국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 한인특별반의 교육 목표는 “일본 제국주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노동자·농민을 지휘할 수 있는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운영은 김구가 총괄했으며, 안공근·안경근·노종균 등이 실무를 맡았다. 훈련은 총교도관 이청천과 오광선·이범석·조경한 등 이전에 만주에서 활동한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 간부들이 담당하였다. 92명의 입교생에게는 피복 등의 군수품과 매월 12원(당시 쌀 세 가마 값에 해당)의 급여가 지급됐으며, 비밀 유지를 위해 엄격히 통제됐다.

이들은 김구가 모집한 한인 청년을 주축으로, 만주사변 이후 남경으로 이동해 온 전 한국독립군 대원들, 간부학교 2기생 일부, 남화(南華)한인청년연맹 대원 약간 명 등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한국독립군 간부와 대원의 동참은 만주 지역에서의 군사활동이 중국 관내(關內) 지역으로 무대를 옮겼고, 군사활동 노선을 중시하는 독립운동 세력이 연합했음을 의미했다. 1935년 4월 9일 졸업과 함께 이들은 여러 갈래로 흩어졌다. 한국독립군 출신 졸업생들은 신한독립당 산하 청년군사간부특별반으로 편제됐으며, 의열단 계열의 졸업생들은 민족혁명당 조직으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김구 휘하의 졸업생들은 남경으로 이동하여 한국특무대독립군에 수용되었다.


 

 

▲ 낙양군관학교 사령부 김구와 장개석의 합의로 한인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던 중국 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의 사령부 건물
1934년 12월 하순 결성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의 본부는 남경 목장영(木匠營) 고강리(高崗里) 1호에 소재했으며, ‘김구구락부’로도 불렸다.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와 중앙대학 등에 재학 중인 김구 계열의 청년들도 수시로 이 곳에 집결하여, 세계 정세 및 혁명운동에 관한 정신교육 등을 받으며 조직화를 꾀했다. 대원들은 김구가 쓴 ‘도왜실기(屠倭實記)’를 읽거나, 3·1운동 때 한인학살 사진 및 태극기를 배경으로 촬영한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사진 등을 보며 항일 의지를 다듬었다.

김구는 또 1935년 2월부터 한인 청년을 수용·교육시키는 학생훈련소를 운영했다. 위치는 남경 동관두(東關頭) 32호였고, ‘특무대예비훈련소’또는 ‘몽장훈련소(蒙藏訓練所)’로 불렸다. 대원들에게는 매월 10원의 급여가 지급됐고,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중국어·기하·대수 등의 학과 교육과 정신 교육을 받았다. 훈련소에는 조선일보·동아일보·대판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대공보(大公報)·화보(華報) 등의 신문과 신동아·신조선 등의 잡지, 각종 도서를 갖추어 면학을 독려했다.

이들은 1935년 6월 22일 일제의 정보망을 피해 강소성 의흥현 장저진 용지산 속에 있는 징광사(澄光寺)로 이동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징광사와의 임대 계약 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대원들은 다시 남경으로 이동하여 한국특무대독립군 본부 등지에서 합숙했다. 이후 한국특무대독립군 및 학생훈련소 대원들은 한국국민당청년단으로 재편성된 다음 ‘통합’한국독립당과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임정을 지키는 데 자신을 바쳤다.

한편 김원봉은 1932년 가을부터 국민당 정부 군부 계통의 지원하에 남경 근교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이하 간부학교)를 운영했다. 황포군관학교 4기 졸업생이기도 한 그는 황포동학회(黃捕同學會) 및 비밀첩보기구인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와 제휴하여 간부학교를 설립했다.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가 정식 명칭인 이 간부학교는 의열단의 대중투쟁 노선을 선도할 중견 군사·정치 간부의 양성을 교육 목표로 표방했다. 1932년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는 3년여의 기간에 걸쳐, 근대적인 군사 지식과 훈련으로 단련된 130여명(1기생 26명, 2기생 55명, 3기생 44명)의 ‘청년투사’를 배출했다.

김구와 김원봉은 이미 이 무렵부터 군사활동에서 공조했다. 일제의 정보 자료에 따르면 1934년 4월경 김구가 간부학교 2기생 교육 상황을 살피러 와서, 김원봉의 소개를 받은 다음 “최후의 승리와 안락이 다가오고 있으며, 일본과 소련의 전쟁이 시작될 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졸업 후에도 제군들은 혁명을 위하여 끝까지 분투하기 바란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그리고는 학생들에게 ‘별에 태극기 모양을 넣은 클립이 달린’ 애국 만년필을 한 자루씩 선물로 주고 돌아갔다고 한다.

 

당시는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고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의 활동 여건이 악화되어 가던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한·중 국제연대를 배경으로 설립된 중국육군군관학교 냑양분교 한인특별반과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등 군사간부 양성기관, 한국특무대독립군·학생훈련소 및 청년군사간부특별반이라는 수용·훈련시설의 존재는 이동기 임정의 취약한 지도력을 보완해 주었을 뿐 아니라 한국광복군의 인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매주 중요했다. 아울러 이는 임정의 이동기가 덧없이 흘러버린 ‘방랑의 시기’가 아니라, 중경(重慶)에서 재도약할 수 있는 밑받침이 될 군사인재를 양성·단련시킨 귀중한 시간이었음을 알려준다.

 

 

[2] 임정 보선에 좌파 참가… 좌우통합 20년 노력 결실 

중국 서부 사천성에 위치한 중경(重慶)은 사람 살기에 그리 좋은 곳이 아니다. 너무나 무더워서 남경·무한과 더불어 중국의 ‘3대 화로’에 속하는 곳. 1년에 9개월이나 안개가 끼어 해가 나오면 개가 짖는다는 곳. 그래서 중일전쟁 때 일본의 공습을 피해 중국 정부가 임시수도로 삼고 항전을 벌인 곳이 중경이다.

가릉강이 양자강으로 합류하는 틈바구니에 솟은 거대한 암반도시, 거기에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을 밤에 보면 마치 고층건물이

밀집해 있는 듯 착각하게 만들었다고 독립지사들은 회고했다. 그곳에 임시정부가 도착한 것은 1940년 9월이요, 5년 동안 터전으로 삼았다.
중경시대는 임시정부가 활기찬 시절이었다. 고난의 이동기를 접고 안정된 바탕 위에 활동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일본의 패전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그곳에서 한국광복군 창설, 건국강령, 외교적 성과, 좌우합작 달성 등 많은 업적을 일궈냈다.

임시정부가 중경에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좌우 세력이 그곳에 집결하고 있었다. 1938년 말에 김구가 미리 도착해 내륙을 거슬러 올라오던 임시정부 본진(本陣)의 이동을 원격 지휘하고 있었다. 또 1939년 후반에는 조선민족전선연맹 대표 김원봉이 계림에서 조선의용대를 지휘하다가 중경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합작 논의가 다시 시작되었다. 1939년 후반 기강(?江)에서 열린 7당 회의와 5당 회의가 그 서막이었다. 1920년대 유일당운동과 1930년대 합작운동에서 못다 이룬 통일운동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파 세력이 임정에 참여한 1942년 10월 제34차 의정원 의원들이 기념 촬영을 했다. 앞줄 외쪽에서 다섯 번째가 김구이고 오른쪽 끝이 민혁당 지도자 김원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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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가 중경에 도착하기 직전에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우파 세력이 하나로 통합하였다. 1940년 5월에 한국국민당(김구), 재건한국독립당(조소앙), 조선혁명당(이청천)이 새롭게 한국독립당을 창당한 것이다.

이들은 “3·1운동의 생명을 계승한 민족운동의 중심적 대표당”임을 선언하고, 삼균주의(三均主義)를 근간으로 강령을 정했다. 이들이 지향한 ‘신민주국가’는 완전한 광복이라는 터전 위에 정치·경제·교육이 평등한 사회를 추구해 안으로는 균등 생활을 확보하고, 밖으로는 세계일가(世界一家)를 구현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완전한 광복을 통한 대한민국의 건설, 보통선거제 실시를 통한 정치적 균등 실현, 토지와 대(大)생산기관의 국유화를 통한 경제적 균등 실현, 의무교육을 통한 교육적 균등 실현, 그리고 광복군 편성과 의무 병역 실시 등을 당강(黨綱)으로 채택했다. 자유와 평등이 조화를 이룬 신민주국가, 그것이 지향점이었다.

1940년 9월 17일에 한국광복군을 창설함으로써 임시정부는 당(한국독립당)·정(임시정부)·군(한국광복군)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서 다음해 11월에 ‘대한민국 건국강령(建國綱領)’을 확립했다. 제2차 대전 발발이 임박한 시점에 광복이 현실로 다가왔다는 확신을 가진 임시정부가 환국하여 건설할 국가상을 마련한 것이다.

건국강령은 총강(總綱)·복국(復國)·건국(建國) 등 3장 24개 항으로 구성됐다. 총강은 민족사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복국과 건국은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여 민족국가를 건설할 단계를 설정해 추진할 임무와 절차를 규정하였다.

여기에 제시된 민족국가는 개인이나 특정 계급의 독재를 철저하게 반대하는 신민주국이요, 정치·경제·교육에서 국민 모두가 균등한 권리를 가지는 균등사회를 목표로 삼았다.

결국 광복 이후에 세울 국가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로 기우는 국가가 아니라, 한민족이 기반이자 한국민을 기본 단위로 삼는 전민적(全民的) 국가였다. 이는 한국독립당의 이념으로 표명된 것이기도 하고, 좌파 세력의 대표인 조선민족혁명당의 강령과 흡사하여 합작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기도 했다.

 

▲ 1941년 11월 임정이 제정·반포한 '대한민국 건국강령'. 광복 후 건설할 국가상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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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좌파 세력도 중경에 발판을 굳혔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구성하던 조선민족혁명당·조선청년전위동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 4개 정당 세력이 모두 중경에 도착하였고, 1941년을 지나면서 임시정부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장개석의 종용과 정세 변화가 주효했다. 좌파 가운데 핵심인 조선민족혁명당은 한빈과 이정호가 탈당하고 당군(黨軍)이던 조선의용대의 주력 부대가 화북(華北) 지역으로 북상함에 따라 크게 약화되었다. 게다가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만을 유일한 지원 대상으로 삼자 돌파구 마련이 시급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이틀 뒤인 1941년 12월 10일에 조선민족혁명당은 제6차 전당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임시정부 참여를 결의하고 한국독립당과 통일협상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대회 선언에서 “종래에는 임시정부에 대해 불관주의(不關主義)를 취해 왔으나 내외 정세가 변하여 임시정부에 참가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밝혔다.

1942년에 들어 정치적인 결속에 앞서 군대의 통합이 실현되었다. 5월에 조선의용대 본대 병력이 광복군으로 합류하여 신편 제1지대가 되고 김원봉이 광복군 부사령관 겸 1지대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이어서 정치적인 합류가 뒤따랐다. 1942년 10월 25일에 열린 제34차 의정원회의에서는 의원 23명에 대한 보궐선거가 있었고, 여기에 조선민족혁명당 인사들이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9명이던 국무위원의 수를 11명으로 늘려,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과 장건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어서 1943년 10월에 열린 제35차 의정원회의에서는 의원 48명 가운데 24석을 차지한 한국독립당을 이어, 조선민족혁명당이 12석, 그리고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무정부주의자동맹 등이 나머지를 차지했다. 그리고 1944년에는 좌파의 핵심 김원봉이 군무부장을 맡았다.

 
 
[3] 對日 연합군에 참여, 독립국 지위 얻길 바랐지만…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에 정박하고 있던 미 제7함대와 군사시설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미국은 이 날을 ‘치욕의 날’로 선포하고 일본과 그 동맹국인 독일·이탈리아에 대하여 선전포고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은 아시아전선과 유럽전선을 하나로 통합시켰다. 이듬해 1월 1일에는 미국·영국·소련·중국·캐나다 등 26개국의 ‘연합국 선언’이 발표되면서 이른바 반(反)파시즘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태평양전쟁의 발발 소식을 듣고 곧바로 국무회의를 개최하여 “본 정부도 3000만 인민을 동원하여 민주국 및 반(反)침략 진선(陣線)에 참가하여 공동분투할 것”을 결의했다. 12월 10일에는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의 명의로 ‘대일선전(對日宣戰)성명서’를 발표했다. 임정은 이 성명서에서 일본과의 합병조약 및 일체의 불평등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한반도와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왜구(倭寇)’를 완전 구축(驅逐)하기 위하여 최후승리까지 혈전(血戰)한다”고 선포했다.

 

中선 조소앙, 美선 이승만 활발한 활동 미 한국문제로 연합국간 이해다툼 우려 결국 완전 독립 아닌 신탁통치 결론

 

임정은 이러한 성명을 통하여 그들도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전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렇게 되면 임정은 미국의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에 의하여 군수물자를 지원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연합국들로부터 사실상의 승인을 획득하는 효과까지 거둘 수 있었다. 임정은 광복군 창설시, “만 1개년이면 최소한 3개 사단을 편성하여 중국·미국·영국 등 연합군의 교전단체로서 참가하고 국토 수복시까지 전투를 전개한다”는 계획을 세워 둔 바 있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은 이러한 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포착되었다.

 

▲ 對日선전 성명서 1941년 12월 10일 임정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의 명의로발표된‘대일선전성명서’.
임정의 전시외교는 중국 국민당 정부 및 중경에 있는 각국 공관을 상대로 전개되었다. 그 방법은 인적 접촉과 대회 개최, 성명서 등의 발표였다. 외무부장 조소앙이 이러한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의 주장과 논리를 요약해 보면, (1)임정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망명정부로서 한국민을 대표하고 있다 (2)광복군을 비롯한 한인 무장집단은 대일전쟁에서 실질적인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3)전후(戰後) 한국은 아무런 조건 없이 즉각 독립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미국의 워싱턴DC에서는 주미(駐美)외교위원부의 위원장인 이승만이 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정계·언론계·학계 및 종교계 인사들로 구성된 한미협회와 기독교인친한회(親韓會)의 지원을 받으며 미 국무부·군부·정보기관들과 접촉했다. 1942년에는 3·1절을 맞이하여 백악관 바로 앞에 위치한 라파예트호텔에서 ‘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를 개최했다. 미국 각처에서 온 한인 100여명과 한미협회 임원들이 참석한 이 대회에서는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미 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할 것 등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대회 진행은 워싱턴의 WINX 방송을 통해 실황 중계되었다.

 

▲ 임정 승인해달라 美서 한인자유대회 1942년 2월 27일 미국 워싱턴DC 라파예트 호텔에서주미외교위원부 등이 주최한‘한인자유대회’. 임정의 승인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미국 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할 것을 결의했다.
이승만은 임정의 참전 외교를 현실화하기 위하여 미주에서는 한인 청년들과 유학생들로 구성된 ‘자유한인부대’를 창설하고, 극동에서는 임정 산하의 광복군을 미군의 지휘체계 속에 편입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미 전략첩보국(OSS)과 접촉했다. 이승만은 이때 극동에서 2만5000명의 병력을 바로 동원할 수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5000명씩의 추가 증원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 문제로 연합국 열강 간에 갈등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전후(戰後) 동아시아에서 대두될 중국과 소련의 패권주의를 경계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미국은 전후 한국의 독립 대신 신탁통치 실시 방안을 내놓았고, 중국·영국·소련은 이에 원칙적인 동의 의사를 표시했다. 이리하여 1943년 12월 1일에 한국이 전후 ‘적절한 시기’에 독립될 것이라는 카이로선언이 나오게 되었다.

카이로선언이 발표된 후 임정 주석 김구는 “만일 연합국이 제2차 세계대전 끝에 한국에 무조건 자유 독립을 부여하기를 실패할 때에는 우리는 어떤 침략자나 또는 침략하는 단체가 그 누구임을 물론하고 우리의 역사적 전쟁을 계속할 것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외무부장 조소앙은 신탁통치의 명분으로 제시된 한국민의 자치능력 부족에 대하여, “세계 어느 사람이 특수한 권리를 가지고서 어느 민족은 독립할 자격이 있고 어느 민족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만일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곧 파시즘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반박했다. 이후 임정은 전후 한국의 즉각적이며 절대적인 독립을 요구했지만, 연합국 열강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임정의 전시외교가 벽에 부딪힌 이유는 인적·물적 기반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40년대 초반 중경 거주 한국인은 300~400명 정도였다. 이들 대부분은 임정과 관계를 맺고 있던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이었다. 이들은 중국 정부로부터 거처와 생활필수품을 제공받았다. 미주(美洲) 한인사회로부터의 자금 지원은 임정 유지비로 충당되었는데, 이마저 1944년에 중단되었다. 따라서 임정은 재정적·군사적으로 중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러한 상황은 임정의 승인 외교에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대외적으로 임정은 중국에 종속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또 태평양전쟁 발발 후 임정은 좌·우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데 성공하지만, 이는 중경 지역에 국한된 것이었다. 미국은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임정을 승인할 경우, 소련 또한 그들의 영향력하에 있는 조선인을 동원하여 임시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미국은 임정 승인 문제에 있어 소련의 반발을 가장 우려했다. 그것은 자칫 미국이 구상하는 대일 연합전선 구축에 균열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전후 동아시아의 안전보장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4] 김구 주석체제 강화… 左右통합후 40·50代 진출 늘어


부주석-김규식, 외교-조소앙, 군사-김원봉이 맡아  박찬익, 對中교섭 큰 역할… 엄항섭은 宣傳서 두각 

 
중경 시기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는 여전히 60대 이상의 독립운동 원로들이 상당수 있었지만, 점차 40~50대가 포진하기 시작했다.

특히 좌우 합작의 ‘통일전선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런 현상은 두드러졌다. 1940년 10월 주석제가 채택되면서 김구가 주석, 이시영·조성환·조완구·조소앙·박찬익·송병조·차리석이 국무위원에 선임됐다. 이들은 대부분 여러 차례 국무위원을 역임한 한국독립당의 원로들이었다

 

이어 1941년 12월 좌파 계열이 임시정부를 ‘혁명의 최고통일기구’로 인정하고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했다. 그리고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됐으며, 10월 임시의정원의 보궐선거와 국무위원의 증원으로 좌파 계열 인사들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에 따라 민족혁명당의 김규식·장건상, 민족해방동맹의 유동열, 한국독립당의 황학수가 국무위원에 추가됐다.

또 1944년 4월 주석·부주석제가 확립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제정으로 임시정부는 본격적인 좌우 합작을 이루었다.

이에 따라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국무위원 이시영·조성환·황학수·조완구·차리석·박찬익·조소앙·조경한(이상 한국독립당) 장건상·성주식·김붕준·김원봉(이상 민족혁명당) 유림(무정부주의자연맹) 김성숙(민족해방동맹) 등이 선임됐다.

아울러 국무위원회 휘하의 행정부서 책임자는 조소앙(외무)·김원봉(군무)·조완구(재무)·신익희(내무)·최동오(법무)·최석순(문화)·엄항섭(선전)이었고, 1945년 3월 문화부장이 김상덕으로 교체됐다.

임시의정원은 이같은 인선에 대해 “이번에 선거된 주석·부주석 및 국무위원은 우리 혁명운동사에서 가장 공헌이 많은 민족적 지도자들이며, 또 우리 민족의 각 혁명 정당의 권위 있는 지도자들이 연합 일치하여 생산한 전민족 통일전선의 정부”라고 평가했다.

 

▲ 광복 후 1·2진으로 나눠 귀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1945년 12월 3일 서울에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김구이고, 그 오른쪽에 김규식·조소앙이 차례로 보인다. /독립기념관 제공
한편 임시의정원은 1942년 송병조의 별세로 홍진이 의장으로 선임됐다. 그리고 의정원 의원도 한국독립당이 절반, 좌파 계열과 무소속이 절반을 차지했다.

광복군은 1940년 창설 이래 이청천(지청천)이 총사령을 맡았고,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합류하면서 김원봉이 부사령에 임명되었다. 이처럼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이 주도하지만, 좌우 합작으로 운영되는 형태였다.

중경 시기 임시정부를 이끈 것은 여전히 김구(1876~1949)였다. 그는 1940년 10월 주석에 선출되어 정부를 대표했고 임시헌장 제정 이후 그 권한은 더욱 강화됐다. 김구는 열강의 임시정부 승인, 광복군과 미국 OSS(전략첩보국)의 군사협력을 추진하는 등 군사력 증대에 진력했다. 또 국외 무장세력 간의 연대도 도모하고 있었다.

김규식(1881~1950)은 선전부장을 거쳐 신설된 부주석을 맡았다. 한말(韓末) 미국에서 대학을 마친 그는 임시정부 초기 파리강화회의 대표와 구미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35년 민족혁명당의 주석으로 선임됐지만, 성도(成都)의 사천대학(四川大學) 교수로 재직하다가 다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그는 중국에서 영어·영문학 관련 저술과 영문 시집까지 발간한 학자풍의 인물이었다.

외교를 전담한 조소앙(1887~1958)은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 가담했다. 이어 2년여 유럽 지역에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다.

특히 스위스 루체른에서 개최된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석하여 한국 독립 승인안을 통과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가 제창한 정치·경제·교육 균등의 삼균주의(三均主義)는 한국독립당의 정치이념이 됐으며, 1941년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에 포함되어 독립 후 민족국가 건설론으로 자리잡았다.

 

▲ 주석·부주석제를 도입하고 체제를 확대 정비한 1944년 4월 임시의정원 제36차 회의가 끝난 뒤 발표한 선언문.
김원봉(1898~1958)은 광복군 부사령을 거쳐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한 그는 반일(反日) 테러 투쟁을 지속하다가 황포군관학교를 마쳤고, 1932년 남경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운영한 바 있다. 민족혁명당 창당과 조선의용대 결성을 주도한 그는 좌파적 경향이 강했지만,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이청천(1888~1959)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1930년대 중반까지 주로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서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독립군단·고려혁명군·정의부·한국독립군 등을 지휘했다. 1934년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책임자로 부임하면서 임정에 참여한 그는 1939년 10월 국무위원에 선임됐다가 한국광복군 총사령으로 광복을 맞았다.

홍진(1877~1946)은 한말에 법관양성소를 마치고 판사·검사·변호사로 일하다가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1926년 국무령에 선임됐다. 유일당 운동에 적극 관여했으며 그가 보관해 온 임시의정원 문서는 임시정부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박찬익(1884~1949)은 중국과의 교섭에서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가까워 한·중 합작 항일운동에 일찍부터 관여했다. 1933년 김구와 장개석의 면담을 주선하여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는 기회를 만들었던 그는 광복 뒤 한동안 중국에 남아 임시정부의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을 이끌었다.

엄항섭(1898~?)은 김구의 최측근으로 문장이 뛰어나 선전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32년 상해에서 한인애국단의 투쟁을 알리기 위하여 발행된 중국어본 ‘도왜실기(屠倭實記)’는 김구가 약술한 것을 엄항섭이 정리한 것이다. 환국 뒤에도 김구가 발표한 성명서의 대부분은 그가 기초한 것으로 알려졌다

 

[5] 광복군 국내 진입’ 작전개시 찰나에 日 항복


환국후 美軍政 벽에 막혀 과도정부 수립 차질  신탁·조건부독립 반대한 ‘완전독립’ 정신 남겨 1987년 헌법에 ‘대한민국은 臨政 계승’ 명문화 

1945년 8월 10일, 일제(日帝)가 항복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제의 항복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미국도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의 작전 계획은 1946년 봄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것으로 잡혀 있었고, 그해 말이 되어야 항복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일제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기 직전, 임정은 여러 방법으로 국내 진입 작전을 추진하고 있었다. 제주도를 거점으로 진입하려는 구상도 그중 하나였다. 김구가 미국의 중국전구(戰區) 사령관인 웨드마이어 장군에게 “미군이 제주도를 점령해 주면 임시정부가 그곳에 들어가 한국인을 영도하여 미군의 작전을 돕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 그것이었다. 중국과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 세력들을 연계, 압록강으로 진입한다는 구상도 있었다. 이를 위해 국무위원 장건상(張建相)을 연안에 보내 조선독립동맹과의 연계를 추진하였고, 연해주에는 이충모(李忠模)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첩보기구인 OSS와의 합작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방법은 광복군 대원들에게 OSS 훈련을 실시하고, 이들을 국내에 진입시킨다는 것이었다.

 

▲ 김구와 'OSS 책임자' 도너번.1945년 8월 초 광복군의 국내진입 작전을 합의하고 나오는 임정 주석 김구와 OSS 총책임자 도너번 장군.

1945년 8월 4일, 3개월에 걸친 광복군의 OSS 훈련이 완료됐다. 김구는 곧바로 총사령 이청천(李靑天)을 대동하고 서안으로 향했다. 제2지대 본부에서 OSS측과 회의, 광복군 대원들을 국내에 진입시킨다는 작전에 합의했다. OSS 총책임자인 도너번소장은 이 자리에서 임정과 미국이 공동으로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한다고 선언했다.

OSS와 협의를 마친 김구는 서안 시내로 나왔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그는 다시 제2지대 본부로 돌아갔다. 그리고 OSS측과 합의했던 국내진입작전을 실행하기로 하고, 이범석(李範奭)을 대장으로 한 국내정진대를 편성하였다. 8월 18일 이들은 미군 비행기로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고, 김구는 중경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임정은 ‘국내에 들어가 임정을 국민들에게 봉환’하기로 결정했다. 임정은 3·1운동을 계기로 국민들이 수립한 것이고, 27년 동안 자신들이 대행해 왔던 정권을 국민들에게 갖다 바친다는 논리였다. 김구 주석이 중경에 돌아온 후 활동 방향을 정립, ‘국내외 동포에게 고(告)함’이란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를 통해 해방은 “허다한 선열(先烈)들의 보귀(寶貴)한 열혈(熱血)의 대가와 중·미·소·영 등 동맹군의 영용(英勇)한 전공(戰功)에 의한 것”임을 천명하고, 임정이 추진할 당면 정책을 밝혔다. 국내에 들어가 각계 대표들과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과도정권에서 정식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 45년 12월 19일 '임정 개선 환영대회' 1945년 12월 19일 열린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선 환영대회.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11월 23일과 12월 1일 두 차례로 나뉘어 귀국했다/백범기념관 제공
하지만 임정의 환국은 쉽지 않았다. 중경에서 국내로 이동하는 교통편도 문제였지만,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던 미국이 ‘임시정부’ 명의로 입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의 항복 후 한반도는 중국전구에서 태평양전구로 바뀌었고, 38선 이남은 미군이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입국하려면 미군정의 승낙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임정은 이처럼 환국 과정에서부터 미군정이란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미군정은 입국에 ‘개인자격’이라는 조건을 붙였다. 미군정은 확약을 받고서야 상해로 비행기를 보냈다. 임정 요인은 29명이었지만, 보내온 비행기는 15인승이었다. 고도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들어가는 순서를 정해야 했다. 제1진과 제2진으로 나누어졌고, 11월 23일과 12월 1일 각각 환국하였다.

그러나 임정 요인들은 ‘개인자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들어왔으니 정부도 들어온 것”이란 김구의 언급이나, “국제관계에 있어서는 개인 자격이지만 국내동포의 입장에서는 정부”라는 성명이 그것이었다.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임정이 귀국한 것으로 환영, 12월 19일 임시정부 개선 환영대회를 개최했다.

환국 후 임정은 정부로 활동했다. 12월 3일 임정 요인들은 김구의 숙소인 죽첨정에 모였고, 신문은 이를 ‘환국 후 최초의 국무회의’로 보도했다. 모스크바에서 신탁통치 소식이 전해지자, 각계 대표들을 소집하여 반탁(反託)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12월 31일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구 및 한인 직원은 임정 지휘하에 예속한다”는 내용의 포고를 발표했다. 미군정이 이를 ‘임정의 쿠데타’로 규정했듯이, 임정이 정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임정은 미군정이란 벽을 넘기 어려웠다. 미군정은 임정의 활동을 용납하지 않았고, 임정을 와해하는 공작을 추진했다. 임정이 대응책으로 강구한 것은 변신이었다. 1946년 2월 1일 비상국민회의, 2월 14일 최고정무위원회를 조직한 것이 그 시도였다. 비상국민회의는 임시의정원을, 최고정무위원회는 국무회의를 계승한 것이었다. 임정 요인들은 이를 국회와 정부로 여기고, 과도정권 수립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광복 후 3년 만에 독립국가를 건설하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이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임시정부가 사용한 국호였고, 제헌 헌법은 임정의 헌법을 참조했다. 민주공화제 정부로 수립된 것도, 임정이 그것을 채택하여 운영해 온 경험 때문이었다. 그리고 1987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고 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뿌리가 임정에 있다는 것을 명문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