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 윤봉길의사 순국 장면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된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1908∼1932)의사의 처형장면을 담은 사진은 너무나 놀랍고 충격적이다

 

윤 의사의 무릎을 꿇린 채 처형함으로써 일제가 윤 의사의 기개를 꺾으려했던 점, 총탄이 너무나도 정확히 윤 의사의 이마를 관통해 오히려 피가 별로 흐르지 않은 점 등이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처연하게 만든다.

 

지난달 초 일본 방위청 자료실에서 ‘만밀대일기(滿密大日記)’에 실린 이 사진을 발견한 ‘더 채널’의 김광만(金光萬) 대표나 신운용 근현대사 팀장,이 사진 사본을 전해 받은 유족이나 윤병석(尹炳奭) 인하대 명예교수의 첫 반응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윤 의사 처형 장면을 담은 사진이 처음 발견된 데다 그 모습이 너무나 끔찍하고 생생하기 때문이었다

1. 윤봉길 사형집행 전말에 대한 보고서

 

●문서번호: 1250-1254    尹奉吉 사형집행 전말 보고
 
  조선 충청남도   

  尹奉吉    

  명치 41년 5월19일 生 


  右의 者에 대하여 昭和 7년 12월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 작업장에서 사형의 집행을 행한 상황은 

왼쪽

  과 같음〉. 
    
  1. 소화 7년(1932) 12월17일 陸密 제489호로 尹奉吉 사형집행에 관한 명령서를 수령하여 같은 날에 바

      로 이를 군법회의 검찰관 根本 莊太郞(네모토 소타로)에게 전달함. 

 

    검찰관으로부터 그 집행 일시를 같은 달 19일 오전 7시로 결정되었다는 보고를 접함으로써 당일  집   행 및 경계를 위하여 보병 1소대(장교 이하 19명)의 파견을 보병 제7연대장에게 명령함과 동시에 검찰관으로 하여금 경계 등에 관하여 가나자와 헌병대장과 연계하게 하는 등 집행에 관한 세부의 준비를 시켰음.
 
  2. 刑場 예정지를 金澤(가나자와) 육군 작업장으로 결정하여 미리 幕僚(막료) 및 검찰관으로 하여금 이를 實査(실사)하게 하여 범인, 射手(사수), 立會人(입회인), 입장 허가를 받은 자 등의 각 위치 등에 대하여 選定(선정)했음.
 
  형장은 石川(이시카와) 縣 이시카와郡 우치가와 마을 三小牛(아자 미고우시) 지역 內의 가나자와 육군 작업장 서북쪽의 골짜기라서 公衆들에 위험성이 없으며 교통도 희박하고 또 동쪽의 斷崖(단애)는 높이 약 7m의 突起(돌기)가 있어 사격에 적합하여 형장에 가장 적당한 장소임.
 
  3. 같은 달 18일 오후 5시 헌병 護送(호송) 아래 囚人(수인)이 拘禁所(구금소)에 도착하여 收禁(수금)함. 이에 따라 구금소 소속의 醫官(의관) 육군 일등군의 瀨川 吉雄(세가와 요시오)는 범인의 건강진단을 하였는데 身心 공히 이상 없음.
 
  4. 같은 달 19일 오전 6시30분 보병 제7연대로부터 파견된 보병소대가 형장에 도착. 보초를 배치하여 경계를 맡김.
 
  5. 검찰관 겸 감옥장 네모토 소타로 및 구금소 소속 육군 일등 군의 세가와 요시오, 육군 錄事(녹사: 조서작성 등을 담당) 立村 久兵衛(다치무라 규베)는 같은 날 오전 7시 15분 형장의 설비를 끝냄.
 
  6. 같은 날 오전 7시 15분 범인(편집자 注:尹奉吉 의사)은 看守長(간수장) 및 간수 2명, 헌병 3명의 護衛(호위) 아래 형장에 도착함-검찰관은 바로 醫官으로 하여금 건강진단을 행한 바 범인의 身心 공히 이상 없음을 확인하여 범인 尹奉吉에 대하여 본년 5월25일 上海 파견군 군법회의에 있어서 살인, 同 미수, 상해, 폭발물 단속벌칙 위반죄에 의해 言渡(언도)된 사형의 집행을 하는 것을 고하며 遺言의 有無를 묻자, 「사형은 미리 각오한 것이니 지금에 임하여 아무 것도 해야 할 말이 없다」는 내용을 말했음. 따라서 눈을 가려 刑架(형가) 앞의 가마니 위에 범인을 正坐(정좌)시키고 간수로 하여금 신체 양손을 형가에 묶게 하여 7시 27분 射手(사수)에게 사격을 명했음.
 
  7. 사수 正副(정부) 2명 공히 하사관을 선정하여 범인의 눈을 가린 직후 검찰관의 신호로 所定(소정)의 위치에 엎드리고 正射手(정사수)의 제1발이 양 눈썹 사이에 명중하자 이윽고 絶命(절명)하였음. 의관은 劍傷(검상)을 검사하여 범인이 완전히 절명한 것을 확인하여 검찰관에게 보고함으로써 오전 7시40분 경계를 해제하여 윤봉길의 사형집행은 여기서 종료됨.
 
  8. 遺骸(유해)는 사형집행 후 이를 씻고 納棺(납관)하여 가나자와市 野田山(노다산) 육군묘지에 인접한 가나자와市 공동묘지의 한 구석에 매장하여 10시30분 모두 종료되었음. 
  
  
  2. 尹奉吉의 사형집행 및 헌병의 경계에 관한 보고서 
    
  <문서번호: 1256∼1266  

 

     헌병사령관이 육군대신에게 보낸 尹奉吉의 사형집행 및 헌병의 경계에 관한 보고서.
 
  〈상해 폭탄범 사형수 윤봉길 사형집행 및 헌병의 경계에 관한 通牒(통첩).   
  소화 7년 12월26일 헌병사령관 하타 신지(奏 眞次) 작성.
 
  육군대신 荒木 貞夫(아라키 사다오) 殿(윗사람에게 붙이는 일본식 敬稱)
 
  4월29일 上海에서 白川(시라카와) 軍司令官 등에게 폭탄을 던져 上海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5월25일 살인·살인미수·상해·폭발물 단속벌칙 위반으로 사형이 선고된 범인 尹奉吉은 12월19일 오전 7시 40분 가나자와市 교외 미고우시 육군작업장에서 제9사단 군법회의 검찰관 네모토 소타로의 지휘 아래에서 사형집행되었음. 그 상황 및 헌병의 경계상황을 보고함.
 
 
  1. 범인의 본적, 성명 

 

                           본적: 조선 충청남도 
                           한국독립당원 윤봉길 
                           明治 41년 5월 19일生
 
  2. 사형집행의 장소
 
  형장은 가나자와-小原(오하라) 간의 山中 도로의 동쪽. 이시카와縣 이시카와郡 우치카와 마을 아자 미고우시 地籍(지적)인 가나자와 육군작업장 內의 서북쪽 골짜기임.
 
  3. 집행 전의 상황
 
  범인 윤봉길은 오사카 衛戍(위수) 형무소에서 오사카 헌병대 본부 准士官(준사관) 이하 4명의 私服 헌병에 의해 압송되어 12월18일 오전 6시25분 오사카驛을 출발함. 같은 날 오후 4시35분 이시카와縣 河北(가호쿠)郡 모리모토驛에 下車. 즉시 자동차로 密行(밀행)하여 오후 5시5분 가나자와 衛戍 拘禁所(구금소)에 수용됐음.
 
  4. 집행당일의 상황
 
  (1) 사형집행의 상황   
  ―범인 尹奉吉은 가나자와 헌병대장의 지휘로 헌병 하사관 이하 3명 및 군법회의 간수 2명 호송 아래서 자동차로 12월19일 오전 6시30분 가나자와 衛戍 구금소를 출발. 오전 7시15분 형장에 도착함으로써 제9사단 군법회의 검찰관 겸 육군 감옥장 네모토 소타로는 醫官 세가와 軍醫로 하여금 건강진단을 하게 하여 그 身心 공히 이상 없음을 확인한 후 범인 윤봉길에 대해 「本年 5월25일 上海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살인·살인미수·상해·폭발물 단속벌칙 위반에 의해 言渡된 사형의 집행을 한다」는 내용을 고하며 遺言(유언)의 有無를 묻자 범인은 「사형은 미리 각오한 것이니 지금에 임하여 아무 것도 해야 할 말이 없다」고 말했음 (일본어로 하는 말이 명료하고 미소를 짓는 등 그 태도가 극히 담력이 굳세고 침착함. 看守(간수)로 하여금 刑架(형가) 앞에 正坐시키고 눈가리개를 하고 양손을 형가에 묶게 하여(별지 사진 제1) 오전 7시27분 射手에게 사격을 명했음.
 
  ―사수는 正副 2명 공히 하사관을 선정하여 범인의 눈을 가린 후 검찰관의 신호로 所定의 위치(囚人의 전방 10m)에 엎드리고 쏜 正射手의 제1발이 미간부에 명중하여 13분이 지나 絶命하였음.
 
  醫官은 劍傷을 검사하여 범인이 완전히 절명한 것을 확인하고 검찰관에게 보고하여 오전 7시40분 尹奉吉의 사형집행은 여기서 종료됨.
 
  (2) 死體 매장의 상황   
  사형집행이 끝나자마자 遺骸를 씻고 納棺한 다음에 법규대로 가나자와市 노다산 육군묘지에 접속한 가나자와市 공동묘지의 서쪽에 깊이 약 6尺(척)을 파서 매장하여 오전 10시30분 모두 종료되었음.
 
  5. 立會官
 
  제9사단 군법회의 검찰관, 가나자와 위수 구금소장, 육군 범무관 겸 육군감옥장
 
  네모토 소타로, 제9사단 군법회의 錄事 가나자와, 위수 구금소 소속 立村久兵衛(다치무라 규베), 육군 일등 軍醫 세가와 요시오, 가나자와 위수 구금소 간수장 綠事(녹사) 立田 外次郞(다쓰타 소토지로)
 
  6. 헌병의 경계 상황
 
  가나자와 헌병대에서는 12월17일 사형수 도착 및 刑 집행에 있어서의 경계 등에 관하여 제9사단 군법회의 검찰관과 협의를 끝내, 尹奉吉의 호송 도착 및 사형집행은 절대 극비로 계획하고 12월18일 오후 3시 가나자와 分隊 하사관 1명에 자동차 2대를 모리모토驛에 파견·가나자와 분대장 및 상등병 1명에게 비밀리에 마쓰토驛에서 사형수가 승차하는 열차에 타서 압송하는 오사카隊 헌병과 협의하여 가나자와 驛을 통과하면 모리모토驛에서 下車시켜 같은 驛에서 가나자와 위수 구금소에 이르는 동안 자동차로 압송하여 신문기자 등의 탐색및 기타 衆目(중목: 여러 사람의 눈)에 접촉되는 것을 피해 不逞者(불령자)의 不穩策動(불온책동) 구경 등을 절대 警防(경방)하고, 또 집행 당일 19일은 가나자와 헌병대장 이하 보부 및 가나자와 분대 직원 전원이 나와 오로지 길가 및 형장의 경계에 종사하고 그 중 하사관 이하 3명은 간수와 더불어 직접 호송에 종사시켰음.
 
  7. 기타 참고 사항
 
  (1) 제9사단 군법회의 장관은 네모토 육군감옥장의 신청에 따라 집행 당일 오전 6시30분까지 보병 중위 西野 恒夫(니시노 쓰네오)가 지휘하는 하사관 이하 18명을 파견하여 헌병의 단속 경계와 연계하여 사격 형장 내외의 경계를 맡겼음.
 
  (2) 19일 오전 11시 검찰관은 검찰부에서 가나자와 신문기자단에 대하여 19일 오전 7시40분 사형수 尹奉吉의 사형을 가나자와市 교외에서 총살로 집행하였다는 내용을 공표했음.

 
  8. 反響(반향)
 
  (1) 범인의 압송 및 사형집행은 관계자 이외는 절대 비밀로 시행하는 것으로 19일 오전 11시, 제9사단 법무부장으로부터 신문기자단에 발표하여 처음으로 신문기자 기타 일반에 알린 상황임. 따라서 그 전후에 있어서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으나 반향은 현재 가만히 조사 중임.
 
  (2) 土葬(토장:시체를 땅 속에 파묻음)의 실시는 발표 전에 완료하였고 또 묘지의 소재는 극비리로 하였기 때문에 현재 묘지 등에 대한 策動(책동) 없으나, 날이 감에 따라 저절로 일반이 알게 되기 때문에 상당한 경계가 필요하므로 要注意者(요주의자), 특히 조선인 左傾分子(좌경분자) 또는 不逞(불령) 분자의 동정에 관하여 헌병과 경찰의 밀접한 연계를 유지하며 엄중 시찰 중인데 현재는 異狀을 발견하지 못함. (끝)
 
 
  3. 金九 추적 密偵 보고서 
 

尹奉吉 사형집행 전말에 대한 보고서  [문서번호: 1246-1247 ]
 
  소화 7년(1932년) 9월9일. 外事정보.     헌병사령관 秦 眞次(하타 신지)  
                                                                     육군대신 荒木 貞夫(아라키 사다오) 殿.
 
  〈金九 일파 최근 행동. 어느 정도 믿을 만한 밀정의 정보를 종합하면 왼쪽과 같음.
 
  1. 金九 일파는 최근(8월 20일 경) 上海 江西路角(강서로각) 동북의용군 후원회 간부 朱慶欄(국민당 위원회원)을 통해 1만5000달러를 수령하여 동북의용군 지원에 활동한다고 약속하였다고 함.
 
  2. 金九는 그 돈을 수령한 후 李裕弼(이유필), 嚴恒燮(엄항섭), 朴南坡(박남파), 朴贊翊(박찬익), 安敬根(양경근) 등과 謀議한 후 항주 또는 가흥 부근의 시골로 피신 潛伏(잠복)하면서 생계 방법 등을 생각하는 한편 上海를 왕복하는 것으로 보임.
 
  3. 폭탄사건 후 金九 일파 및 이유필 일파의 수령 금액은 약 2만8000달러로 보이며 그 중 1만5000엔은 피신지 官憲(관헌)의 매수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또 조만간 「버스」 파업단을 후원하기 위해 상당한 금액을 제출할 예정으로 보임. (끝)>●   
  번역:고가 사토시(古賀 聰)

 

4.윤봉길의사 친필 '출사표' 첫 공개


▲ 윤봉길 의사가 `상하의 의거' 이틀 전인 1932년 4월27일 백범 김구 선생에게 써준 자신의 이력서 가운데 일부분으로 거사에 나서는 결의와 각오 등을 담은 출사표

 

 

▲ 장제스 대만 전 총통이 1967년 윤봉길 의사 유족들에게 전달해준 친필 붓글씨




▲ 1970년 초 박 전 대통령이 윤 의사를 기려 쓴 친필 붓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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