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의 작품세계 Ⅰ- Warhol, Andy

 

(미국 팝아트의 대표적인 화가 1928.8.6~1987.2.22)

 

 

 

미국 팝아트의 대표적인 화가. 출생지 : 미국 필라델피아

주요저서 : 《1970년대의 조망》 주요작품 : 실험영화 《슬립》 《엠파이어》

 

1928년 8월 6일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하였다. 피츠버그의 카네기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952년경부터 뉴욕에서 상업디자이너로 활약하다가 화가가 되었다. 1962년 시드니 재니스화랑에서 열린 ‘뉴리얼리스트전(展)’에 출품하여 주목을 끌기 시작하고 그 후 만화의 한 컷, 신문보도 사진의 한 장면, 영화배우의 브로마이드 등 매스미디어의 매체를 실크스크린으로 캔버스에 전사(轉寫) 확대하는 수법으로 현대의 대량소비문화를 찬미하는 동시에 비판하여 이름을 떨쳤다.

 

1963년부터는 《슬립》 《엠파이어》 등 실험영화 제작에 힘쓰고, 상업영화에 손대는가 하면 소설도 출판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약하여 1960년대 미국 예술계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1994년 9월, 호암갤러리에서 그의 팝아트전이 개최되었다. 주요저서에 《1970년대의 조망》 등이 있다.

 

미국의 팝아트의 대표라면 앤디 워홀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실크스크린이라는 대량 복제가 가능한 인쇄 방법을 이용하여 반복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는 광고의 속성을 차용한 것으로 현대의 대중 문화에 걸맞는 예술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워홀은 대중적 이미지 뿐아니라 공포의 이미지도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영화 배우와 같은 유명인들, 꽃, 코카콜라병, 또는 전기의자, 자동차 충돌 장면, 폭풍의 현장 등을 캔버스 위에 반복적으로 묘사하여 거의 임의적인 색채를 첨가함으로써 미묘한 효과를 보여준다.

 

워홀의 작품은 대량 생산품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는지 끔직한 장면이나 유명인들에 대한 반응을 마비시키는 등의 결과를 초래한다. 그는 대중적 속물주의를 정착시켰다. 특히 동어반복적 표현을 통한 작품의 유일무이 성 부정, 오리지낼리티의 부정 등은 후에 추상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나는 원래 상업미술가로 시작했는데 이제 사업미술가로 마무리 하고싶다. 사업과 연관된 것은 가장 매력적인 예술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미술은 심오한 정신의 산물이 라기 보다는 오락적, 일상적 '상품'으로 취급하여 미술의 새장을 열었다.

 

피카소가 20세기 미술에 있어 프로메테우스였다면, 선전가·장난꾸러기·벼락 출세자였던 워홀은 그리스 신화의 목신인 판이었다. 팝아트는 엄청난 상업성을 위해 미국미술 의 정신성을 포기한 장르다.

 

1960년대 초 워홀은 헐 리 우드의 요부들과 켐벨 수프 깡통 이미지의야 한 실크스크린 작품들로 미술계를 뒤 흔들었다. 그것은 밝고 조야한 색 채, 그리고 전 세계는 생 산된 제품일 뿐이 라는 그의 차가운 메시지 때문이다.

 

모든 것이 판매를 위한 생산라인 이미지로 격하 될 수 있다면, 마릴린 엘비스 브릴로 는 모두 현금으로 전환 가능하다는 것이다. 워홀은 자신의 이력을“나는 상업적 예술 가로 시작했고, 실업적 예술가로 마무리 짓고 싶다.” 고 요약했다 .

 

 

워홀은 자신의 본업이 미술은 물론 록 밴드를 지원하기도하고, 잡지<<인터뷰>> 를 창간하기도 했으며,TV에 카메오 출연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당대의 번쩍이는 네온사인 역할을 했다.

 

사후에도 그 네온사인은 쉽게 빛을 잃지 않았고 , 그의 명성은 미술계를 떠돌았다. 워홀처럼 언론에 의해 명성을 얻는 미술가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미국의 제프쿤스와 영국의 다미엔 허스트 는 그 대표적 예다. 

 

 

 

 

 

 

 

 

이것도 앤디 워홀의 대표적의 하나1968년작 [캠벨 수프]

 

 

 

 

 

 

 

 

 

비너스의 탄생 (산드로 보티첼리) 1984년  합성 폴리모 물감과 실크 스크린 잉크

 

이는 광고의 속성을 차용한 것으로 현대의 대중 문화에 걸맞는 예술 형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워홀은 대중적 이미지 뿐아니라 공포의 이미지도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영화 배우와 같은 유명인들, 꽃, 코카콜라병, 또는 전기의자, 자동차 충돌 장면, 폭풍의 현장 등을 캔버스 위에 반복적으로 묘사하여 거의 임의적인 색채를 첨가함으로써 미묘한 효과를 보여준다.

 

워홀의 작품은 대량 생산품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는지 끔직한 장면이나 유명인들에 대한 반응을 마비시키는 등의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대중적 속물주의를 정착시켰다. 특히 동어반복적 표현을 통한 작품의 유일무이성 부정, 오리지낼리티의 부정 등은 후에 추상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이작품이 그의 출세작이다, 그는 같은 이미지의 같은 회사의 같은 모양의 같은 크기의 캠벨수프 캔을 나열함으로서 복제에의한 각인을 ( 카리스마) 상기시켰다.

 

그는 또 "나는 원래 상업미술가로 시작했는데 이제 사업미술가로 마무리 하고 싶다. 사업과 연관된 것은 가장 매력적인 예술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미술은 심오한 정신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오락적, 일상적 '상품'으로 취급하여 미술의 새장을 열었다.

 

 

 

  

 

  

 

 

 

광고미술에서 출발한 앤디 워홀은 작품에 상업미술을 도입했다. 그는 미국 가정에서 매일 먹는 깡통 수프와 섹스의 상징 같은 유명한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의 사진 이미지를 이용해 대중성을 강조했다. 먼로의 영화 포스터에 익숙한 대중이 미술관에서 만나는 먼로의 다양한 모습은 결코 싫지 않을 것이다.

 

 

워홀은 미술의 주제를 대중문화에서 취하며 소비품처럼 값싸고 신속하게 복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워홀은 광고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신속하게 15분 동안은 누구나 유명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의 팝 아트를 통해서 강조했다.

 

앤디워홀이 타계한지 5년여가 되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망자들에게 관대한 법인가? 그가 죽고 난 뒤 평소의 드높던 악명과는 달리 그가 비밀리에 교회에 다녔고 빈민들을 위해 봉사한 사실이 대서특필 되었다.

 

작가의 생애나 사생활이 미술애호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단언컨대 여지 껏 워홀처럼 평생을 세인의 주목 속에 살다 간 작가는 없었다. 그의 유지에 따라 이루어진 골동품과 허접 쓰레기가 뒤섞인 엄청난 양의 수장품의 경매는 다시 한번 그의 명성의 대단함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고, 헐리우드의 대스타 못지않았던 그의 일생의 대미로 손색이 없는 큰 행사가 되었다.

 

생전에 워홀은 어떤 사람들에게 대단한 비난과 경멸의 대상이었던 반면,어떤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현역의 많은 젊은 미술가들이 그를 가장 중요한 선배작가로 꼽고 있기 도 하다. 이러한 시각의 차이는 평론가들이나 미술사가 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의 작품 이나 작가적인 위상에 대한 평가는 논쟁의 대상이며, 또한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그의 미술사적 업적을 정리해 보려는 근자의 학술토론회는 거기서 개진된 의견의 차이와 는 별도로 우선 그런 모임의 성사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그가 중요한 작가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3)

 

그렇다면 워홀 평가에 있어 무엇이 문제인가? 위에 인용된 것은 그 의 일생과 작업방식이나 취향 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 특유의 언급들이다. 그는 이런 말들을 진심으로 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과연 농담조로 미술을 한 것인가? 그는 일각에 서 믿는 것처럼 평론가나 미술 사가들이 과대 포장한 엉터리에 불과한가?

 

 

 

 

 

 

1981년작 [달러 사인]

 

이미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워홀은 돈을 무지 좋아했다고한다. 일생동안 강하게 집착해서 그 욕구를 작품으로까지 연결됐었다.일부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해온 노동자 가정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대공황 시기를 격으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의 성장배경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도 한다  

 

워홀이 평생 명성과 부를 좇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그가 남에게서 작품의 아이디어를 구했고,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빈번히 차용했으며, 조수를 고용하여 작업의 상당 부분을 맡겼고, 같은 주제를 무수히 반복하고, 때로는 자신의 사인가지도 남들에게 맡기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는 것 역시 공개된 일들이다.

 

그는 상업성이 있는 일은 가리지 않고 했 으며, 작품을 주식에 비유하기도 했다. 문제는 그가 이런 행동을 통해 무엇을 의도했든 간에 (혹은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데 있다.

 

워홀이 제시한 문제점들은 한마디로 미술의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가없는 부정과 도전으로 규정할 수 있는데 대게 다음 몇 가지를 그 특성으로 열거 할 수있다 .즉 오리지낼리티의 부 정,작가의 손 수작업( authorship) 이나 기량에의 무관심, 반복을 통한 작품의 유일무이성의 부정, 그리고 무자비한 상업주의와 출세지상주의 등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미술품에 따라 다 니는 천재와 영감이라는 아우라( aura)를 자각의 명성이 발하는 아우라로 대치하였고, 고급 정통미술과 대중미술의 경계를 부정하고, 더 나아가 미술품을 상업시스템에 종속되는 이래 상품으로 파악, 제시했다.

 

 

 

 

그는 또한 미술가의 위상을 대중적인 스타의 그것과 큰 차이 없이 규정하였는데,1980년대 미술의 여러 속성들을 예고한 이런 입장은 엘리트 모더니스트나 보수 진영 모두에게 더할 나위 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문제의 핵심으로는 그의 이런 태도를 미술의 문화비평적인 기능 또는 현대미술의 전개과정에 대한 반성적인 관심으로 평가 하기가 힘든데 있다. 다시 말해서 외견상으로는 마르쎌 뒤샹을 필적하거나 도는 능가 하 는 이런 우상타파적인 제스처가 워홀 자신의 미학적인 신념에 근거한 '전위적인'행동이라기 보다는 그어느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는 ,소위 '미학적 몰 가치'의 한 방영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4)

 

그럼 워홀은 어떤 배경을 가진 미술가였는가?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노동 이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가난하고 병약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통속적인 의미의 사회명사가 되고 싶어했던 그는 연예인이나 유명작가를 흠모하여 영화배우의 사진을 모으거나 팬클럽에 가입하는 등의 특이한 열정을 보였으며,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고자 하는 그의 욕구는 성인 이 되거나 미술가로 성공한 뒤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정통미술과 상업미술의 구분을 강조하 지 않았던 피츠버그의 카네기 테크 대학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졸업 후 뉴욕으로 가서 상업 디자이너로서 출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즈음부터 그는 자신에 대한 신화가 쌓이는 것을 목적으로 나이나 배경등을 정확히 말하지 않았으며, 인터뷰 때에는 얘기 꾸미는 것을 일삼았다고 한다.

 

그의 주변 인사들은 한결같이 그의 대외적인 이미지와 사 적인 것 사이의 괴리를 인정하고 전자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지적해 왔다.5)

 

도한 자신의 외모에 일생 열등감을 느꼈던 그는 팝 미술가로 알려지기 전에 코를 성형수술 하고 가잘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런 사실은 그의 자전적인 초기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상업미술계에서의 성공 뒤에 그는 팝아트가 대두하는 시점을 계기로 정통미술가로 데뷔하는 데, 그의 작업방법은 상업미술의 테크닉을 그대로 적용한 것으로 자신이 만들기보다는 이미 있는 재료를 활용하여 베끼거나 ( tracing) 신문이나 잡지의 이미지를 전사하는 방법을 택했 고, 가능한 한 쉽게 자업 하기 위해서 조수를 고용하고 친구들의 자발적인 도움을 유도했다.

 

한꺼번에 쉽게, 그리고 대량으로 작업하고자 하는 그가 실크스크린으로 옮아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상업미술의 이미지를 쓰고 또는 그것의 기계적인 테크닉을 사용한 것은 워홀만이 아니었고 사실 이것이 팝아트를 규정하는 특성이므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데, 특이할 것은 그가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는데 남다른 방법을 택했고, 처음부터 오리지낼리티에 대한 관심 은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늘 알만한 사람이나 주변 인사들에게 무엇을 그릴지를 물었으며, 그의 초기작으로 유명한 캠벨스프나 코카콜라를 그리게 된 동기 그의 방식을 잘 나타내준 다. 즉 스프 강통은 친구에게서 돈을 지불하고 아이디어를 산 것이고, 코카콜라는 두 개의 가능성을 두고 일조의 시장조사를 한 결과 택해진 선택이다.6)

 

그는 한때 상업미술가 시절에는 고치라면 고치는 대로만 하면 되는 점이 좋았었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바로 이런 전력이 그의 발상의 근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남들이 자신의 이런 방법을 창의력의 결핍으로 비난했을 때 미술잡지를 보고 아이디어 를 구하는 것이나 남에게 물어보는 것이나 다를것이 무엇이내고 대꾸했는데, 그의 말이 타 당하다 할지라도 그 사실을 어떻게 하든지 숨기려거나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만의 독특한 시각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그는 더 나아가 비슷한 아이디어로 더 나은 작품 을 만들기 위해 무명작가의 작업실을 둘러 보았고, 예를 들어 프랭크 스텔라에게 들러 작품 을 주문한 것도 가까운 친구에게는 아이디어를 얻기위해 다른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하는 것 이라고 털어 놓았을 정도였다.7)

 

다음으로 워홀의 특성으로 논의 할 것은 공동작업을 하거나 또는 전적으로 타인에게 맡기는 작업의 익명성이다. 그는 상업미술가 시절부터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조수를 고용하였으며, 팝 작가로 알려진 후에도 상업미술을 상당기간 계속하면서 조수에게 많은 일을 맡겼다.

 

그가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그림에서 은퇴를 선언한 후에는 (1965-66)이런 사정은 더욱 심화 되었다고 봐야 한다. 워홀이 자신의 스튜디오를 '공장(factory)' 라고 부른 것은 참으로 그 다운 발상인데, 마치 공장의 일관작업을 연상시키는 실크스크린 제작과정에서 정확하게 어디 까지 그가 직접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때 그의 조수 중의 하나가 워홀의 작품들은 자신이 제작한 것이라고 공개하고 그도 이를 수긍한 사실 때문에 수집가들이 작품 반환 요구로 소동을 벌인 것은 그가 스타일이나 수 작업의 개별성 등에 무관심했다는 것을 단적으 로 증명한다.8)

 

 

Brillo Box  

 

이와 더불어 그가 작품 제작과정에서 생기는 실수나 우연의 효과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으 며, 한 동안은 그의 어머니가 작품에 사인을 도맡아 한 사실도 그의 철학을 반영하는 좋은 예이다. 기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유명한 발언과 팝이란 가장 쉬운 일을 하는 것이라 는 정의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가장 많은 논란이 되는 것이 그의 철저한 상업주의와 이에 연관된 도덕성의 시비 이다. 그는 일단 어떤 이미지로 실크스크린을 만들면 그 스크린을 두고두고 써먹으며, 같은 주제를 숫자와 배열방식을 바꿔 가면 배치하여 여러 개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심지어는 스크린의 여분의 잉크를 닦아낸 모나리자 이미지가 찍힌 천까지도 작품으로 만들어서 저명한 평론가의 진지한 분석까지 유도한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그는 작품 값을 올리 기 위해 작품의사이즈를 불렸으며, 큰돈을 번 초상화 분야에서도 가장 상업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조수들에게 일정의 할당금을 약속하여 고객유치를 독려 했는가 하면, 심지어는 크레 디트 카드 고객을 향한 판촉선전에도 등장하며"워홀과 함께 신화를 !"이라는 문구로 자신의 작품을 유행상품화 하였다.9)

 

그는 '공장'시대의 방만한 생활의 후유증으로 총격을 당한 뒤 작업실을 옮기면서 부터는 호 가이기보다는 사업가로 자신을 규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업미술(Business art)은 미술의 다음단계 이다. 나는 상업미술가로 출발하여 사업미술가로 끝을 마치고 싶다. 나는 '미술'이라고 불리는 것을 (또는 무엇이라고 불리든지 간에)한 두에 사업으로 옮겨 갔는데, 나는 미술사업가 또는 사업미술가가 되고 싶었다. 사업에 수완이 있 는 것은 가장 매혹적인 예술의 일종이다.10)

 

그는 상업미술가로 이름을 얻을 즈음 체코시의 이름인 워홀라( Warhola)에서 끝글자를 떼 어 버려 노동이민 출신의 배경과 결별하는 변신을 꾀했고, 팝작가로 명성을 얻었을 때에는 친구들 사이에서 드렐라(Drella :드라큘라와 신데렐라의 합성어)로 통할만큼 패션과 미술계 의 신데렐라로 군림했으며, 사업미술가로 자처했을 때는 조수들로부터 보스라고 불리었다.

 

결국 이런 사업미술은 그의 아메리칸드림을 성취하는 골간이 된 것이다. 그는 미술품을 '순수한 '상품으로 취급했고, 그것도 미술품이 일종의 신분과시용의 상품으로 변질하게 되는 보 드리야 식의 교환가치를 지닌 사인으로 인식했다.

 

물론 이러한 철저한 상업주의는 비판진영 의 주된 공격의 대상이 되어서, 예를 들어 타락하고 결국은 몰락한 이란 왕가와의 유착은 그의 도덕성에 대한 심각한 비판을 야기 시키기도 하였다.

 

워홀은 뒤샹을 존경했지만 뒤샹식 의 미술비판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그의 파괴적인 생활태도는 허무적이고 위험스러운 것으 로 비판받기도 했는데, 그의 이러한 미술에 대한 "무신념"은 1970년대 말에 제작된 <산화 그림 Oxidation Painting> 에 단적으로 나타난다.

 

 

산화페인팅(Oxidation Painting) /1978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 SACK, Seoul, 2009

 

상상 그 이상의 상상을 보여주는, 가장 재미있는 작품이 바로 위의 산화페인팅이다. 이 작품은 앤디 워홀의 실험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팩토리라고 불리는 자신의 작업실에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바닥에 캔버스를 깔아놓고 물감 도료를 뿌리고, 친구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그 위에 소변을 보았다. 물감 안에 있는 구리 성분과 소변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예측할 수 없는 색감을 내는데, 그 이유는 어떠한 음식을 섭취했느냐에 따라 소변의 성질이 달라서 화학반응을 다르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작품은 당대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이름을 알리던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의 액션페이팅과 함께 수많은 평론가들이 이 둘을 비교하였다

 

원래 <오줌 그림>으로 명명되었던 이 그 림들은 물감에 금속가루를 섞어 칠한 캔버스에 오줌을 갈김으로써 재작된 것으로 미술사적 으로는 폴록의 액션 페인팅이나 추상표현주의 회화 전반에 대한 패러디가 된다.11)

 

이 작품 은 위에 언급한 모나리자 그림과 함께 그의 미학적 몰가치를 나타내주는 단적이고 극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워홀 평가가 쉽지 않은 이유를 납득하고 동시에 적지 않은 의문과 회의에 직면하게 된다.

 

미술이라는 창조적 작업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이런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정말 형편없는 엉터리가 아닌가? 이미 밝힌 대로 그를 실제 로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이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각자그이 판단에 맡기는 수 밖에 없는데,그 대답은 또한 현대미술이 제기하고 있는 많은 문제에 대한 우리들각자의 나 름대로의 평가와 연관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워홀의 이러한 측면의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여 그의미술을 '사기극'으로 속단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우선 오리지낼리티의 부정에 관한 것으로 한가지 고려 해야 할 것은 많은 미술가들이 선배나 동료 작가들의 작업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으며, 실제로 서로의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을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진정한 의미의 독창성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지 하는 것은 명확하게 규명하기 가 어려운 문제이다. 다만 어떤 아이디어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온 전히 워홀의 선택이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작품의 익명성의 강조나 상업시스템의 이용,치부 등의 문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뒤샹, 여타 팝 작품들, 또는 미니멀 등에서 이미 다루어졌거나 또는 워홀과 거의 동시에 제기 되었던 것들이다. 더욱 특기할 것은 그의 이런 유산이 1980년대 이후의 미술에서 중요하게 모방, 또는 참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술사의 문맥에서 보았을 때 캠벨스프는 재스퍼 존스의 유명한 <채색된 브론즈>(1960)에 대한 언급이며, 코카콜라는 워홀이 더욱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던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콜라 병을 이용한 코카콜라 풀랜(1958)과 연관 이있다.

 

 

 

 

코카콜라 (1960) 

코카 콜라 병을 작품의 소재로 삼은 이유에 대해 워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코카콜라는 리즈 테일러도, 미국 대통령도 마시며, 당신도 마신다. 돈을 더 준다 해서 더 좋은 콜라를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유통되는 콜라는 똑같다.” 이 말에는 대량 생산품에 대한 소비 문화를 찬사하고 있기도 하지만, 너무나 일반적인 이미지에 대한 새로운 탐험이라는 또 다른 의미도 내포되어 있

 

이것이 워홀 자신의 두 선배 작가의 작품 에 대한 대응이었다면 ,지금 현재 오리지낼리티와 차용의 이슈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셰리 레빈이나 마이크 비들로, 제프쿤스 등은 바로 이러한 워홀의 유산을 재검증하고 있는 작가 들이라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워홀은 뒤샹이 일용품을 가지 고 문맥을 바꾸어 미술품으로서의 통과제의에 도전한 이래 가장 노골적으로 독창성과 개성, 수작업, 스타일, 또는 상업성의 문제를 공략한 작가가 될 것이다.

 

<산화 그림>이 미술에 속 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현대미술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곤혹 스럽게 만드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 제작과정을 모른다면 더욱 그러하고, 혹은 알더라도 그 에 관계 없이,이를 미술품이 아니라고 하기는 힘들다.

 

미술의 영역이 거의 무한대로 확장된 현대미술에서는 그 경계를 묻는 일 자체가 미술 작품이 되기도 하며, 이미 어떤 작품의 외 양이나 제작방식이 미술, 비 미술을 결정짓는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이를 규정하는 유일한 기준은 미술품이 제시된 그 문맥, 즉 미술관이나 전시장 또는 미술잡지 등의 제도적 환경이 관건이 라는 시각이 제시된 것도 이미 근 20년 전의 일이다.12)

 

어떤 작품이 기존의 테두리를 벗어나면서 대두되면 이에 상응하는 새로운 개념이 만들어질 것이며 이런 개념의 확장이 현대 미술가들이 해온 일이라면 워홀 역시 이일을 했으며 ,그가 우리를 혼란시키는 그만큼 우리는 더욱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만약 지금껏 내가 그려온 워홀의 이미지가 악마의 그것이라는데 모자람이 없다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보탤 것이 있다. 그는 사후에 대부분의 유산을 미술계로 환원되도록 조처했으며, 그의 유지에 따라 이미 그 수혜자가 혜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이 이같은 결정을 미술에 대한 그의 최종적인 신념의 표현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공은 우리들에게 돌아와 있다.

 

우리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예술가에 대한 개념은 반 고호 같은 근대적 인간상이다. 예술가는 항상 고뇌에 잠겨 있으며 그는 돈 대신 예술을 택하고 빵을 사는 것보다 물감을 사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고집스러운 인간이다.

 

그는 예술에 관하여 처절하게 고민한 나머지 자신의 목숨을 버릴 정도로 때로는 광적이고 정신병환자처럼 보통사람과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즈음 되면 하나의 종교가 가지는 도그마와 우리시대의 예술가들을 매료 시킬만한 설득력을 파괴력을 가지게 된다.

 

누군가 그의 예술을 다른 사람에게 시켜서 자신이 서명만하고 내다 팔았다고 한다면 이보다 더한 사기 행각이 어디 있겠는가? 예술가는 개성이 가득한 고뇌의 상징인 예술품이 돈이라는 저속한 가치와 맞바뀐다고 하는 것 자체도 불경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의 독창성을 가늠 지을 예술품자체도 그의 것이 아니라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가 의문스러운 것이다.

 

(독일의 현대미술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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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별 자료 : http://pusan.aiit.or.kr/family/student/34th/%B1%E8%C7%F6%C1%D6/andy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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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들어가심 자료를 다운받으실수도 있겠네요. 단,유료군요.. 2http://www.happycampus.com/pages/2002/12/22/D117165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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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워홀의 주요 작품 - 마릴린몬로, 앤디워홀, 코카콜라 등등

중 Che Guevara,16 Jackies,Campbell's Soup 1,Flowers를 볼수 있는 곳:http://www.myinnis.com/index.html

앤디워홀의 초기 드로잉을 볼수 있는 곳 :http://5donuts.com/weblog/media/warhol1.html

출처 : 여러사이트...

 

 

<마를린 먼로 1967>

 

앤디 워홀은 상업 미술에 회화적 요소를 첨가하여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화가 입니다. 팝아트의 특징은 '이미지의 대중화, 복제, 표현방법의 보편화'에 있습니다. 예술이 과거에 소수 특권계층의 산물이었던 것을 대중적으로 만든 미술사조이지요.

 

위 그림과 같은 것은 마를린 먼로의 얼굴을 연속적으로 병렬하거나 독립적으로 실크 스크린 판화로 제작한 것입니다. 기성 상품이나 특정 스타의 얼굴을 기계의 힘을 빌어 반복-배열 하는 방식의 작업을 많이 했지요.

위의 그림의 제목은 <마를린 먼로 1967> 입니다. 기계로 찍은 그림에 회화적 느낌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색을 완벽히 칠하지 않고 삐져나오도록 한 것입니다.

 

앤디워홀은 마를린 먼로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으나 제목이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위의 그림은 마를린 먼로이지만 또 다른 작품에서는 25개의 마를린먼로.. 이런 식으로 제목이 조금씩 바뀌지요. 위의 작품은 누군가가 마를린 먼로를 일부러 모아둔 것은 아니고요, 하나의 작품입니다.

 

 

 

 

혹시 이중에 원하시는게 없으면 위의 검색어를 입력해서 찾아보세요.

http://www.nga.gov/education/classroom/self_portraits/zoomify/zoom_warhol.htm

아마도 원하시는 것에 가장 근접한 것은 이 위의 주소 입니다. 플래시라서 가져 올 수 없습니다. 가서 보심 좋을 듯.. 앤디 워홀 15분

 

미래에 모든 사람들은 15분만에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될 것이다.

in the future everybody will be world famous for fifteen minutes.  앤디 워홀은 한 티비 프로그램에서 "앤디 워홀의 15분"이라는 프로그램을 창조하였다.

 

그는 팝아트의 창시자이자 팝아트 예술 운동의 중심에 서있었다. 앤디 워홀은 보헤미안 거리의 시민이었으며, 구별된 지식인이자, 헐리우드 명성을 가진 부유한 귀족으로 알려진 예술가이자, 전위파 영화 제작자, 기록의 생산자, 작가, 또한 유명인사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든 전방위의 예술 활동을 펼치는 예술가였다.

 

그의 생애동안 그의 예술은 눈속임, 또는 겉 치례일뿐이라고 비평가들에게 비평받았으나, 앤디 워홀의 예술은 그의 사후에 더욱 유명해졌다.

 

 

 

앤디 워홀 기다림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설레임은 많은 흥분과 호기심을 가져온다.

the idea of waiting for something makes it more exciting.

 

앤디 워홀은 미국으로 이주한 동유럽 계통의 임금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했으며 그의 가족은 전통적인 가톨릭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어린 시절 앤디 워홀은 질병에 의해 어린 아이처럼 자주 누워 있었으며 침대에 누워서 라디오를 들었고 그의 침대 주위에 있는 영화 배우들의 포스트를 끌어모아서 그 아름다움을 즐겨보았다. 앤디 워홀은 자신의 예술적 기질이 형성되던 이 어린 시절을 자신의 중요한 시절로서 성공한 훗날 회상했다. 앤디 워홀은 어린 시절부터 카네기 멜런 대학교의 카네기 예술 연구소에서 상업 미술을 연구하던 시절까지 훗날의 성공을 위한 예술적인 재능을 보여주고 있었다.

 

 

 

 

 

 

 

앤디 워홀 괴테

 

앤디 워홀은 1950년대에 상업광고를 위한 디자인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전시회에서 100개의 콜라병들과 100개의 달러 지폐, 100개의 수프 깡통을 출판한 앤디 워홀은 명성을 그의 예술작품에 그려서 대량복제했다. 그는 예술 팩토리를 설립했고 그의 팩토리로 수 많은 유명한 작가들, 예술가들, 음악가들, 유명 인사들이 찾아왔으며 그들과의 예술활동과 파티를 즐겼다. 그는 빠른 시간안에 유명인사가 되어갔다. 그의 예술은 어렵지 않았으며 누구나 보는 즉시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앤디 워홀은 1975년에 앤디 워홀의 철학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대중문화에 대한 그의 애정과 그 자신의 예술작업에 대한 철학을 서술했다.

 

 

 

 

 

 

앤디 워홀 베토벤 핑크색

 

앤디 워홀의 비평가들은 그의 시장 문화에 대해 활짝 열린 예술적 포옹에 대해 대체로 분개했지만 그 비평마저 앤디 워홀의 명성을 드높여 주었다. 앤디 워홀을 비롯한 팝아트 예술가들은 그들의 예술을 통해 대중문화의 흐름을 제대로 반영시켰다. 그 대중문화는 상업적이었으며 1960년대의 대량생산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었다. 앤디 워홀은 그림만을 그리지는 않았으며 영화작업을 시도함으로써 헐리우드와 브로드웨이와 함께 움직였다. 앤디 워홀은 또한 에디 시즈윅을 비롯한 그가 만들어낸 보헤미안들의 몸치장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대체로 그가 만들어낸 보헤미안들은 그의 예술작업에 함께 참여했다. 그가 만들어낸 보헤미안들은 그의 평생동안 그리고 그가 죽을때까지 그의 친구로 남아있었으며 그의 죽음에 대해 슬퍼했다.

 

 

앤디 워홀 체 게바라 1962년 포스터  61 x 86 cm

 

1968년 6월 3일에 앤디 워홀은 발레리 솔라나스라는 분리적 여권주의자의 사격을 받았다.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라는 영화에 보면 이 여성에 대해 잘 표현해놓았는데 이 여성은 스컴이라는 남성을 이 사회에서 몰아내야 이상사회가 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단체에 기초한 페미니스트로서 앤디 워홀은 그녀에게 시종일관 우호적으로 대해주었음에도 앤디 워홀에게 위협을 느낀 그녀는 앤디 워홀의 팩토리로 들어와 그에게 사격을 가했다. 이 여성은 앤디 워홀의 동료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앤디 워홀은 예술의 왕이다. 이 시대의 예술의 황제이다. 그런데 너는 무슨 존재인가? 너는 무슨 값어치가 있는가?"

잘못된 사상과 터무니 없는 열등감으로 그녀는 앤디 워홀에게 사격을 가했다. 앤디 워홀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그 부상은 그의 평생동안 따라다녔다. 이 치명적인 부상은 앤디 워홀의 삶과 예술에 변화를 주었고 솔라리스는 그 날 바로 체포되었다. 이 여성이 말하길, 앤디 워홀이 지닌 에너지가 나의 삶 동안 내 삶을 통제하고 있었다고 말했지만 그 말은 사실 그녀의 망상이나 다름없었다.

 

 

 

 

 

 

 

 

 

 

 

 

 

 

 

 

앤디 워홀 마릴린 먼로

그의 팝아트 그림들은 대중적이며 도발적인 동시에 아름다운 색채로써 채색되어 있다. 그는 마릴린 먼로를 비롯해서 존 F. 케네디같은 유명인들을 그의 그림에 그려넣었다. 그는 전통적인 예술과 대중적인 예술 사이에서 그 둘의 경계선을 좁혔다. 앤디 워홀은 그의 부유한 후원자들을 위한 초상화들을 그렸는데 그가 그린 유명인들중에는 중국 공산주의 지도자 마오쩌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그의 저서인 "앤디 워홀의 철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돈을 만드는 것이 예술이다. 또한 훌륭한 사업을 연출하는 것이 가장 멋진 가장 창조적인 예술이다."

 

 

황금빛 마릴린 (1963) ]
금빛 뒷 배경은 중세의 성인을 그린 비잔틴시대의 종교화 모자이크에서 따온 것 이라 합니다. 이는 워홀이 현대의 스타들을 중세의 성인과 비견하고 있다는 의미랍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섹스 여신이라는 마릴린 먼로에게 종교적 신성을 부과한다는 거죠. 대중의 스타들이 현대의 숭배 대상이라 생각되시나요?

 

 

이디 세즈윅과 앤디 워홀

 

  

 

앤디 워홀 이디 세즈윅 1966년

"나는 로스엔젤레스를 사랑한다. 나는 헐리우드를 사랑한다. 헐리우드는 매우 아름답다."

앤디 워홀은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으며 규칙적으로 미사에 출석하였다. 앤디 워홀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은 그는 정직한 수도자였으나 그 사실이 사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른다라고 말하였다. 앤디 워홀이 죽던날 그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으며 손에는 기도서를 잡고 있었다. 많은 유명인사들과 대중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존 레논의 애인이었던 요코 오노 또한 그의 장례식에 나타났다. 앤디 워홀의 관으로 아름다운 향기를 지닌 향수와 그가 출판했던 잡지, 그리고 그가 디자인했던 티셔츠가 함께 묻혔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재산은 경매에 부쳐졌는데 그 경매는 2000만달러 이상의 총수익을 올렸다.

 

 

앤디 워홀 나비들 1955년

앤디 워홀은 살아있는 동안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작업에 참여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앨범 표지에 있는 바나나 그림은 앤디 워홀이 디자인한 그림이다. 그의 사후 2년 후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앤디 워홀을 기념하는 앨범으로 성공적인 공연을 이루어냈다. 그가 창조해낸 팝아트는 독립적이며 실험적인 예술적인 시도였다. 또 다른 팝아트 화가인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앤디 워홀 시대의 팝아트 선구자들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앤디 워홀처럼 계속해서 실험적인 예술을 시도하였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만화와 광고와 미술을 결합시켰는데 그 누구도 이러한 생각이 현실로 나타나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에 의해서 만화와 미술은 결합되어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앤디 워홀 그래서 행복하다 1958년

앤디 워홀은 유명인사들을 사랑하였다. 그들과 파티를 열고 그들을 그의 그림에 채색했다. 그의 미술은 디자인과 결합되어 있다. 앤디 워홀은 그의 작업으로써 뿐만 아니라 그가 했던 말과 그의 대중 예술가로서의 활약으로서도 유명하다. 그는 그림뿐만 아니라 여러 예술에 전방위적인 활동을 펼쳤으며 그의 팩토리를 영화제작 스튜디오로서도 활용했다. 앤디 워홀은 300여개의 실험적인 전위 영화들을 제작했다. 그의 영화들은 특이한데 어떤 영화는 25시간 쉬지 않고 상영되며 어떤 영화는 6시간 이상 잠을 자는 사람을 촬영했다. 예술을 대량생산 하는 이 철학자는 잡지를 출판하기도 했고 심지어 나이트클럽을 운영하기도 했으며 브로드웨이를 위한 예술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2달러짜리 지폐 (1962) ]
가장 일상적인 물건들에 대해 숨겨져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확인해 보자고 덤비는 워홀은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달러 짜리 지폐 또한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 중 하나죠.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는 대상에 대해 거울을 비춤으로서 거울 이면에 나타나는 이미지에 집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앤디 워홀은 특이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지닌 오로라와 개성은 아주 특이했으며 넘치는 에너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동성애기질이 있었으며 그 스스로 그 자신이 동성애 경향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는 50대에 그의 머리카락을 금발로 염색했다. 그는 여러 색채를 지닌 가발을 즐겨쓰길 좋아했으며 금발과 은빛의 화려한 가발로 그의 머리카락을 꾸몄다. 앤디 워홀은 고양이를 매우 좋아했다. 앤디 워홀이 얼마나 고양이를 좋아하는지 살펴보려면 고양이를 숱하게 그린 그의 예술작품을 보면 알 수 있다. 앤디 워홀의 친구들은 그를 진정한 일벌레로 표현한다. 앤디 워홀은 일을 즐기는 진정한 프로이자 파티의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진정한 파티인이자 또한 팝아트의 아이콘으로서 훌륭한 예술가이자 그렇다고 미사를 빠트리지도 않은 진정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완전하고 아름다우며 독특한 개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앤디 워홀은 그의 작품으로써 뿐만 아니라 앤디 워홀이라는 사람과 그의 인생으로서도 훌륭한 예술작품이다.

 

앤디 워홀의 작품을 처음 볼때는 잘 몰랐는데 보면 볼수록 색채도 예쁘고 작품이 무언가 끌리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팝아트는 색채들이 대개 상당히 산뜻하고 예쁘죠. 앤디 워홀의 에너지에서는 그런 면이 느껴집니다. 따뜻하고 봄의 온풍처럼 온화한 기운같은 느낌, 명성을 즐기는 사람이면서도 따뜻하고 온화한 기운이 느껴지는 그러면서도 파워있는 에너지를 지닌 그런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앤디 워홀입니다. 어떤 위인보다도 고흐나 랭보만큼 느낌이 유달리 강하게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전기가 통하듯이 찌리릿하고 통합니다.

감성지수 36.5에 소개되었습니다^^

담아가실때는 저기 위에 공감 눌러주세요.

"세계는 나를 황홀하게 한다." 앤디 워홀의 자유롭고 낙천적인 영혼을 느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영국의 데미언 허스트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영국의 예술이 활짝 열린 예술로 세계미술시장의 2위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저 예술은 전통예술이니까 예술이고 저 예술은 예술이 아니다라는 시각은 일정한 틀에 갇힌 편협한 시각이라고 봅니다. 앤디 워홀의 팝아트로 인해 미국 미술 시장이 활기를 띄게 되었고 데미언 허스트의 개념미술로 인해 영국 미술 시장이 활기를 띄게 되었으며 세계미술시장을 석권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앤디 워홀의 예술 그 자체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존경스럽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 있으며 앤디 워홀은 자신의 개성대로 그 자신이 되어서 살아간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으로서 평생동안 예술에 사랑과 열정을 바친 훌륭한 예술가입니다.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라 반응이 별로 없을줄 알았는데 덧글 달아주신분들 감사합니다. 난지도님 덧글 보고 내용이 길어서 태클인줄 알았는데ㅎㅎ 그 내용에 동감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고흐가 죽었을때가 아닌 살아있을때 예술가로 인정받고 행복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요, 왜 예술가는 자본과 거리를 두어야 합니까? 고흐는 살아있을때 예술을 하며 웃으며 행복했어야 했습니다. 영화도 자본매체로써 세계적인 시장을 갖고 있듯이 미술도 영화처럼 세계적인 시장이 있습니다. 미술도 음악처럼 영화처럼 세계적인 시장에서 유통되는 것이 마땅하구요. 고흐처럼 고통받는 예술가들이 아닌 고흐같은 예술가들이 대접받으며 웃으며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하구요.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예술을 위한 올바른 시장구조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런 올바른 시장구조가 있어야 예술가들도 행복할 것이고 예술을 구입하는 사람들도 행복하겠죠.

[출처][본문스크랩] 팝아트의 창시자이자 우아한 예술가 앤디 워홀|작성자레오

앤디워홀은..팝아트작가로 손꼽히는 사람입니다.

그가 활동했던 1960년대는 급격한 사회변화의 시기이며

대중적인 대량생산이 가능해지기 시작하여 급속도로 급변하는 사회를 만들어갔던 때이기도 하죠.

그 시대의 사람들이 느끼는 대량공산품에 대한 회의라고 해야하나요.

처음에 그는 상업디자이너로 활동을 하다가.

자신이 즐겨먹던 수프깡통이나..마릴린먼로. 등소평..등의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것들을 소재로 삼아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가..제가 아니라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작업을 했는지는 확실히 알수 없지만..

평론가들이나 나름대로의 작품을 보면서 느낀것은.

그가..상업디자인이라는 일을 했으면서도.

상업주의 물질주의..대량생산체제에 불만이 있는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찬성하는 것 같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가장 친숙하고 값어치 없는 일상소재를 이용한 작품들.

그리고 신문의 보도사진이나 충격적인 사진들..

또는 스타들을 이용한 실크스크린 작품들을 보면.

아주 현실적인..소재들을 이용한 것들이죠.

(예전의 예술은 무언가 값어치있고. 품위있고. 교양있는 사람들을 위한.또는 그런 소재들을 이용한..그래서 현실적이고 직설적이기 보다 이상향적인..면이 많았죠)

그는..익숙한 것들을..실크스크린을 통해 익숙하지 않게 만들고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만들었으며.

그것들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해보게 만들게도 합니다.

그런것들이..이전까지 제가 배워왔던..

앤디워홀은 대량소비사회를 비판하여 작품을 만들었다..라는 설명에서.

그는 대량생산된..(스타들 또한 만들어지는것이며 소멸되기도 하죠,,) 제품들의 이미지를 더 새롭게 보이게 만들면서 그것들에 일상적인 제품의 이미지가 아닌 예술의 의미들 주었고.

그것들은..일반적인 의미에서 전혀 새로운 의미로 사람들에게 재인식 시켜주었다는..면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소비사회에 대한 찬미주의가..아닐까..하네요.-_-a

일상적 소재에서 미학적인 면을 찾아내..새로운 예술을 만들어낸 셈이죠.

그냥..써내려가다보니..횡설수설하네요..

논리적이지 못해 죄송합니다.

단지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님께서 그런 이미지를 이용하신다면.

재인식의 과정에 대한것을 설명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ㅁ^

워홀이 평생 명성과 부를 좇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그가 남에게서 작품의 아이디어를 구했고,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빈번히 차용했으며, 조수를 고용하여 작업의 상당 부분을 맡겼고, 같은 주제를 무수히 반복하고, 때로는 자신의 사인가지도 남들에게 맡기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는 것 역시 공개된 일들이다. 그는 상업성이 있는 일은 가리지 않고 했 으며, 작품을 주식에 비유하기도 했다. 문제는 그가 이런 행동을 통해 무엇을 의도했든 간에 (혹은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데 있다.

워홀이 제시한 문제점들은 한마디로 미술의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가없는 부정과 도전으로 규정할 수 있는데 대게 다음 몇 가지를 그 특성으로 열거 할 수있다 .즉 오리지낼리티의 부 정,작가의 수작업( authorship) 이나 기량에의 무관심,반복을 통한 작품의 유일무이성의 부정,그리고 무자비한 상업주의와 출세지상주의 등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미술품에 따라 다니는 천재와 영감이라는 아우라( aura)를 자각의 명성이 발하는 아우라로 대치하였고,고급정통미술과 대중미술의 경계를 부정하고,더 나아가 미술품을 상업시스템에 종속되는 이래 상품으로 파악, 제시했다.

그는 또한 미술가의 위상을 대중적인 스타의 그것과 큰 차이 없이 규정하였는데,1980년대 미술의 여러 속성들을 예고한 이런 입장은 엘리트 모더니스트나 보수 진영 모두에게 더할 나위 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문제의 핵심으로는 그의 이런 태도를 미술의 문화비평적인 기능 또는 현대미술의 전개과정에 대한 반성적인 관심으로 평 가 하기가 힘든데 있다. 다시 말해서 외견상으로는 마르쎌 뒤샹을 필적하거나 또는 능가하는 이런 우상타파적인 제스처가 워홀 자신의 미학적인 신념에 근거한 '전위적인'행동이라기 보다는 그어느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는 ,소위 '미학적 몰 가치'의 한 방영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럼 워홀은 어떤 배경을 가진 미술가 였는가?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노동 이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가난하고 병약한 어린시절을 보냈다.어려서부터 유난히 통속적인 의미의 사회명사가 되고 싶어했던 그는 연예인이나 유명작가를 흠모하여 영화배우의 사진을 모으거나 팬클럽에 가입하는등의 특이한 열정을 보였으며,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고자 하는 그의 욕구는 성인 이 되거나 미술가로 성공한 뒤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정통미술과 상업미술의구분을 강조하지 않았던 피츠버그의 카네기 테크 대학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졸업 후 뉴욕으로 가서 상업 디자이너로서 출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즈음부터 그는 자신에 대한 신화가 쌓이 는 것을 목적으로 나이나 배경등을 정확히 말하지 않았으며,인터뷰때에는 얘기 꾸미는 것을 일삼았다고 한다.그의 주변 인사들은 한결같이 그의 대외적인 이미지와 사적인 것사이의 괴리를 인정하고 전자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지적해 왔다.

자신의 외모에 일생 열등감을 느꼈던 그는 팝 미술가로 알려지기 전에 코를 성형수술 하고 가잘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런 사실은 그의 자전적인 초기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상업미술계에서의 성공 뒤에 그는 팝아트가 대두하는 시점을 계기로 정통미술가로 데뷔하는 데, 그의 작업방법은 상업미술의 테크닉을 그대로 적용한 것으로 자신이 만들기보다는 이미 있는 재료를 활용하여 베끼거나 ( tracing) 신문이나 잡지의 이미지를 전사하는 방법을 택했고, 가능한 한 쉽게 작업하기 위해서 조수를 고용하고 친구들의 자발적인 도움을 유도했다. 한꺼번에 쉽게, 그리고 대량으로 작업하고자 하는 그가 실크스크린으로 옮아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상업미술의 이미지를 쓰고 또는 그것의 기계적인 테크닉을 사용한 것은 워홀만이 아니었고 사실 이것이 팝아트를 규정하는 특성이므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데, 특이할 것은 그가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는데 남다른 방법을 택했고,처음부터 오리지낼리티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는 점이다.그는 늘 알만한 사람이나 주변인사들에게 무엇을 그릴지를 물었으며, 그의 초기작으로 유명한 캠벨스프나 코카콜라를 그리게 된 동기는 그의 방식을 잘 나타내준 다. 즉 스프 깡통은 친구에게서 돈을 지불하고 아이디어를 산것이고, 코카콜라는 두 개의 가 능성을 두고 일조의 시장조사를 한 결과 택해진 선택이다.

그는 한때 상업미술가 시절에는 고치라면 고치는대로만 하면 되는 점이 좋았었다고 얘기한적이 있는데, 바로 이런 전력이 그의 발상의 근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남들이 자신의 이런 방법을 창의력의 결핍으로 비난했을 때 미술잡지를 보고 아이디어 를 구하는 것이나 남에게 물어보는 것이나 다를것이 무엇이냐고 대꾸했는데, 그의 말이 타당하다 할지라도 그 사실을 어떻게 하든지 숨기려거나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만의 독특한 시각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그는 더 나아가 비슷한 아이디어로 더 나은 작품 을 만들기 위해 무명작가의 작업실을 둘러 보았고,예를 들어 프랭크 스텔라에게 들러 작품 을 주문한 것도 가까운 친구에게는 아이디어를 얻기위해 다른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하는 것 이라고 털어 놓았을 정도였다.

다음으로 워홀의 특성으로 논의 할 것은 공동작업을 하거나 또는 전적으로 타인에게 맡기는 작업의 익명성이다. 그는 상업미술가 시절부터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조수를 고용하였으며, 팝 작가로 알려진 후에도 상업미술을 상당기간 계속하면서 조수에게 많은 일을 맡겼다.그가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그림에서 은퇴를 선언한 후에는 (1965-66)이런 사정은 더욱 심화 되었다고 봐야 한다. 워홀이 자신의 스튜디오를 '공장(factory)' 라고 부른 것은 참으로 그 다운 발상인데, 마치 공장의 일관작업을 연상시키는 실크스크린 제작과정에서 정확하게 어디 까지 그가 직접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때 그의 조수 중의 하나가 워홀의 작품들은 자신이 제작한 것이라고 공개하고 그도 이를 수긍한 사실 때문에 수집가들이 작품 반환 요구로 소동을 벌인 것은 그가 스타일이나 수 작업의 개별성 등에 무관심했다는 것을 단적으 로 증명한다.

이와 더불어 그가 작품 제작과정에서 생기는 실수나 우연의 효과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으 며, 한 동안은 그의 어머니가 작품에 사인을 도맡아 한 사실도 그의 철학을 반영하는 좋은 예이다. 기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유명한 발언과 팝이란 가장 쉬운 일을 하는 것이라 는 정의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가장 많은 논란이 되는 것이 그의 철저한 상업주의와 이에 연관된 도덕성의 시비 이다. 그는 일단 어떤 이미지로 실크스크린을 만들면 그 스크린을 두고두고 써먹으며, 같은 주제를 숫자와 배열방식을 바꿔 가면 배치하여 여러 개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심지어는 스 크린의 여분의 잉크를 닦아낸 모나리자 이미지가 찍힌 천까지도 작품으로 만들어서 저명한 평론가의 진지한 분석까지 유도한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그는 작품 값을 올리 기 위해 작품의사이즈를 불렸으며, 큰돈을 번 초상화 분야에서도 가장 상업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조수들에게 일정의 할당금을 약속하여 고객유치를 독려 했는가 하면, 심지어는 크레 디트 카드 고객을 향한 판촉선전에도 등장하며"워홀과 함께 신화를 !"이라는 문구로 자신의 작품을 유행상품화 하였다.

그는 '공장'시대의 방만한 생활의 후유증으로 총격을 당한 뒤 작업실을 옮기면서 부터는 화가이기보다는 사업가로 자신을 규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업미술(Business art)은 미술의 다음단계 이다. 나는 상업미술가로 출발하여 사업미술가로 끝을 마치고 싶다. 나는 '미술'이라고 불리는 것을 (또는 무엇이라고 불리든지 간에)한 뒤에 사업으로 옮겨 갔는데, 나는 미술사업가 또는 사업미술가가 되고 싶었다. 사업에 수완이 있 는 것은 가장 매혹적인 예술의 일종이다.

그는 상업미술가로 이름을 얻을 즈음 체코시의 이름인 워홀라( Warhola)에서 끝글자를 떼어버려 노동이민 출신의 배경과 결별하는 변신을 꾀했고, 팝작가로 명성을 얻었을 때에는 친구들 사이에서 드렐라(Drella :드라큘라와 신데렐라의 합성어)로 통할만큼 패션과 미술계의 신데렐라로 군림했으며, 사업미술가로 자처했을 때는 조수들로부터 보스라고 불리었다. 결국 이런 사업미술은 그의 아메리칸드림을 성취하는 골간이 된 것이다. 그는 미술품을 '순수한 '상품으로 취급했고, 그것도 미술품이 일종의 신분과시용의 상품으로 변질하게 되는 보드리야르 식의 교환가치를 지닌 사인으로 인식했다. 물론 이러한 철저한 상업주의는 비판진영 의 주된 공격의 대상이 되어서, 예를 들어 타락하고 결국은 몰락한 이란 왕가와의 유착은 그의 도덕성에 대한 심각한 비판을 야기 시키기도 하였다.

워홀은 뒤샹을 존경했지만 뒤샹식의 미술비판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그의 파괴적인 생활태도는 허무적이고 위험스러운 것으 로 비판받기도 했는데, 그의 이러한 미술에 대한 "무신념"은 1970년대 말에 제작된 <산화 그림 Oxidation Painting> 에 단적으로 나타난다. 원래 <오줌 그림>으로 명명되었던 이 그 림들은 물감에 금속가루를 섞어 칠한 캔버스에 오줌을 갈김으로써 재작된 것으로 미술사적 으로는 폴록의 액션 페인팅이나 추상표현주의 회화 전반에 대한 패러디가 된다.

이 작품 은 위에 언급한 모나리자 그림과 함께 그의 미학적 몰가치를 나타내주는 단적이고 극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워홀 평가가 쉽지 않은 이유를 납득하고 동시에 적지 않은 의문과 회의에 직면하게 된다. 미술이라는 창조적 작업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이런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정말 형편없는 엉터리가 아닌가? 이미 밝힌 대로 그를 실제 로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이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각자그이 판단에 맡기는 수 밖에 없는데,그 대답은 또한 현대미술이 제기하고 있는 많은 문제에 대한 우리들각자의 나 름대로의 평가와 연관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워홀의 이러한 측면의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여 그의미술을 '사기극'으로 속단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우선 오리지낼리티의 부정에 관한 것으로 한가지 고려 해야 할 것은 많은 미술가들이 선배나 동료 작가들의 작업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으며, 실제로 서로의 작 업이 진행되는 과정을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진정한 의미의 독창성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지 하는 것은 명확하게 규명하기 가 어려운 문제이다. 다만 어떤 아이디어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온 전히 워홀의 선택이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작품의 익명성의 강조나 상업시스템의 이용,치부 등의 문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뒤샹, 여타 팝 작품들, 또는 미니멀 등에서 이미 다루어졌거나 또는 워홀과 거의 동시에 제기 되었던 것들이다. 더욱 특기할 것은 그의 이런 유산이 1980년대 이후의 미술에서 중요하게 모방, 또는 참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술사의 문맥에서 보았을 때 캠벨스프는 재스퍼 존스의 유명한 <채색된 브론즈>(1960)에 대한 언급이며, 코카콜라는 워홀이 더욱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던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콜라 병을 이용한 코카콜라 풀랜(1958)과 연관 이있다. 이것이 워홀 자신의 두 선배 작가의 작품 에 대한 대응이었다면 ,지금 현재 오리지낼리티와 차용의 이슈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셰리 레빈 이나 마이크 비들로, 제프쿤스 등은 바로 이러한 워홀의 유산을 재검증하고 있는 작가 들이라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워홀은 뒤샹이 일용품을 가지 고 문맥을 바꾸어 미술품으로서의 통과제의에 도전한 이래 가장 노골적으로 독창성과 개성, 수작업, 스타일, 또는 상업성의문제를 공략한 작가가 될 것이다.

<산화 그림>이 미술에 속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현대미술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곤혹 스럽게 만드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 제작과정을 모른다면 더욱 그러하고, 혹은 알더라도 그 에 관계 없이,이를 미술품이 아니라고 하기는 힘들다. 미술의 영역이 거의 무한대로 확장된 현대미술에서는 그 경계를 묻는 일 자체가 미술 작품이 되기도 하며, 이미 어떤 작품의 외 양이나 제작방식이 미술, 비미술을 결정짓는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이 를 규정하는 유일한 기준은 미술품이 제시된 그 문맥, 즉 미술관이나 전시장 또는 미술잡지 등의 제도적 환경이 관건이 라는 시각이 제시된 것도 이미 근 20년 전의 일이다.

어떤 작품이 기존의 테두리를 벗어나면서 대두되면 이에 상응하는 새로운 개념이 만들어질 것이며 이런 개념의 확장이 현대미술가들이 해온 일이라면 워홀 역시 이일을 했으며 ,그가 우리를 혼란시키는 그만큼 우리는 더욱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만약 지금껏 내가 그려온 워홀의 이미지가 악마의 그것이라는데 모자람이 없다면 마지막으 로 한가지 더 보탤 것이 있다. 그는 사후에 대부분의 유산을 미술계로 환원되도록 조처했으 며, 그의 유지에 따라 이미 그 수혜자가 혜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이 이같은 결정을 미술에 대한 그의 최종적인 신념의 표현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공은 우리들에게 돌아와 있 다. 우리의 머리속에 들어있는 예술가에 대한 개념은 반고호 같은 근대적 인간상이다.

예술가는 항상 고뇌에 잠겨 있으며 그는 돈대신 예술을 택하고 빵을 사는 것보다 물감을 사는 것을 우선으로하는 고집스러운 인간이다.그는 예술에 관하여 처절하게 고민한 나머지 자신의 목숨을 버릴 정도로 때로는 광적이고 정신병환자처럼 보통사람과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이즈음 되면 하나의 종교가 가지는 도그마와 우리시대의 예술가들을 매료 시킬만한 설득력은 파괴력을 가지게된다.누군가 그의 예술을 다른 사람에게 시켜서 자신이 서명만하고 내다 팔았다고 한다면 이보다 더한 사기 행각이 어디 있겠는가?

예술가는 개성이 가득한 고뇌의 상징인 예술품이 돈이라는 저속한 가치와 맞바뀐다고 하는 것 자체도 불경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의 독창성을 가늠지을 예술품자체도 그의 것이 아니라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가 의문스러운것이다.

출처 : http://members.tripod.com/k.peik/warhol.htm앤디워홀이 타계한지 5년여가 되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살아 남은 사람들은 망자 들에게 관대한 법인가? 그가 죽고 난 뒤 평소의 드높던 악명과는 달리 그가 비밀리에 교회에 다녔고 빈민들을 위해 봉사한 사실이 대서 특필되었다.작가의 생애나 사생활이 미술애호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단언컨대 여지껏 워홀처럼 평생을 세인의 주목 속에 살다 간 작가는 없었다.그의 유지에 따라 이루어진 골동품과 허접쓰레기가 뒤섞 인 엄청난 양의 수장품의 경매는 다시 한번 그의 명성의 대단함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 고, 헐리우드의 대스타 못지 않았던 그의 일생의 대미로 손색이 없는 큰행사가 되었다.

생전에 워홀은 어떤 사람들에게 대단한 비난과 경멸의 대상이었던 반면,어떤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현역의 많은 젊은 미술가들이 그를 가장 중요한 선배작가로 꼽고 있기 도 하다. 이러한 시각의 차이는 평론가들이나 미술사가 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의 작품 이나 작가적인 위상에 대한 평가는 논쟁의 대상이며,또한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그의 미술사적 업적을 정리해 보려는 근자의 학술토론회는 거기서 개진된 의견의 차이와 는 별도로 우선 그런 모임의 성사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그가 중요한 작가라는데는 이견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3)그렇다면 워홀 평가에 있어 무엇이 문제인가? 위에 인용된 것은 그 의 일생과 작업방식이나 취향 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 특유의 언급들이다. 그는 이런 말들을 진심으로 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과연 농담조로 미술을 한 것인가? 그는 일각에 서 믿는 것처럼 평론가나 미술사가들이 과대 포장한 엉터리에 불과한가?

워홀이 평생 명성과 부를 좇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그가 남에게서 작품의 아이디어를 구했고,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빈번히 차용했으며, 조수를 고용하여 작업의 상당 부분을 맡겼고, 같은 주제를 무수히 반복하고, 때로는 자신의 사인가지도 남들에게 맡기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는 것 역시 공개된 일들이다. 그는 상업성이 있는 일은 가리지 않고 했 으며, 작품을 주식에 비유하기도 했다. 문제는 그가 이런 행동을 통해 무엇을 의도했든 간에 (혹은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데 있다.

워홀이 제시한 문제점들은 한마디로 미술의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가없는 부정과 도전으로 규정할 수 있는데 대게 다음 몇 가지를 그 특성으로 열거 할 수있다 .즉 오리지낼리티의 부 정,작가의 손 수작업( authorship) 이나 기량에의 무관심,반복을 통한 작품의 유일무이성의 부정,그리고 무자비한 상업주의와 출세지상주의 등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미술품에 따라 다 니는 천재와 영감이라는 아우라( aura)를 자각의 명성이 발하는 아우라로 대치하였고,고급정 통미술과 대중미술의 경계를 부정하고,더 나아가 미술품을 상업시스템에 종속되는 이래 상 품으로 파악, 제시했다.그는 또한 미술가의 위상을 대중적인 스타의 그것과 큰 차이 없이 규 정하였는데,1980년대 미술의 여러 속성들을 예고한 이런 입장은 엘리트 모더니스트나 보수 진영 모두에게 더할 나위 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문제의 핵심으로는 그의 이런 태도를 미술의 문화비평적인 기능 또는 현대미술의 전개과정에 대한 반성적인 관심으로 평 가 하기가 힘든데 있다. 다시 말해서 외견상으로는 마르쎌 뒤샹을 필적하거나 도는 능가 하 는 이런 우상타파적인 제스처가 워홀 자신의 미학적인 신념에 근거한 '전위적인'행동이라기 보다는 그어느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는 ,소위 '미학적 몰 가치'의 한 방영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4)

그럼 워홀은 어떤 배경을 가진 미술가 였는가?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노동 이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가난하고 병약한 어린시절을 보냈다.어려서부터 유난히 통속적인 의미의 사회명사가 되고 싶어했던 그는 연예인이나 유명작가를 흠모하여 영화배우의 사진을 모으거나 팬클럽에 가입하는등의 특이한 열정을 보였으며,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고자 하는 그의 욕구는 성인 이 되거나 미술가오 성공한 뒤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정통미술과 상업미술의구분을 강조하 지 않았던 피츠버그의 카네기 테크 대학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졸업 후 뉴욕으로 가서 상업 디자이너로서 출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그즈음부터 그는 자신에 대한 신화가 쌓이 는 것을 목적으로 나이나 배경등을 정확히 말하지 않았으며,인터뷰때에는 얘기 꾸미는 것을 일삼았다고 한다.그의 주변 인사들은 한결같이 그의 대외적인 이미지와 사 적인 것사이의 괴리르 인정하고 전자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지적해 왔다.5) 도한 자신의 외모에 일생 열등감을 느꼈던 그는 팝 미술가로 알려지기 전에 코를 성형수술 하고 가잘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런 사실은 그의 자전적인 초기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상업미술계에서의 성공 뒤에 그는 팝아트가 대두하는 시점을 계기로 정통미술가로 데뷔하는 데, 그의 작업방법은 상업미술의 테크닉을 그대로 적용한 것으로 자신이 만들기보다는 이미 있는 재료를 활용하여 베끼거나 ( tracing) 신문이나 잡지의 이미지를 전사하는 방법을 택했 고, 가능한 한 쉽게 자업하기 위해서 조수를 고용하고 친구들의 자발적인 도움을 유도했다. 한꺼번에 쉽게, 그리고 대량으로 작업하고자 하는 그가 실크스크린으로 옮아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상업미술의 이미지를 쓰고 또는 그것의 기계적인 테크닉을 사용한 것은 워홀만이 아니었고 사실 이것이 팝아트를 규정하는 특성이므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데, 특이할 것은 그가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는데 남다른 방법을 택했고,처음부터 오리지낼리티에 대한 관심 은 없었다는 점이다.그는 늘 알만한 사람이나 주변인사들에게 무엇을 그릴지를 물었으며, 그의 초기작으로 유명한 캠벨스프나 코카콜라를 그리게 된 동기  그의 방식을 잘 나타내준 다.즉 스프 강통은 친구에게서 돈을 지불하고 아이디어를 산것이고, 코카콜라는 두 개의 가 능성을 두고 일조의 시장조사를 한 결과 택해진 선택이다.6)그는 한때 상업미술가 시절에는 고치라면 고치는대로만 하면 되는 점이 좋았었다고 얘기한적이 있는데, 바로 이런 전력이 그의 발상의 근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남들이 자신의 이런 방법을 창의력의 결핍으로 비난했을 때 미술잡지를 보고 아이디어 를 구하는 것이나 남에게 물어보는 것이나 다를것이 무엇이내고 대꾸했는데, 그의 말이 타 당하다 할지라도 그 사실을 어떻게 하든지 숨기려거나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만의 독특한 시각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그는 더 나아가 비슷한 아이디어로 더 나은 작품 을 만들기 위해 무명작가의 작업실을 둘러 보았고,예를 들어 프랭크 스텔라에게 들러 작품 을 주문한 것도 가까운 친구에게는 아이디어를 얻기위해 다른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하는 것 이라고 털어 놓았을 정도였다.7)

다음으로 워홀의 특성으로 논의 할 것은 공동작업을 하거나 또는 전적으로 타인에게 맡기는 작업의 익명성이다. 그는 상업미술가 시절부터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조수를 고용하였으며, 팝 작가로 알려진 후에도 상업미술을 상당기간 계속하면서 조수에게 많은 일을 맡겼다.그가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그림에서 은퇴를 선언한 후에는 (1965-66)이런 사정은 더욱 심화 되 었다고 봐야 한다. 워홀이 자신의 스튜디오를 '공장(factory)' 라고 부른 것은 참으로 그 다운 발상인데, 마치 공장의 일관작업을 연상시키는 실크스크린 제작과정에서 정확하게 어디 까지 그가 직접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때 그의 조수 중의 하나가 워홀의 작품들은 자신이 제작한 것이라고 공개하고 그도 이를 수긍한 사실 때문에 수집가들이 작품 반환 요구로 소동을 벌인 것은 그가 스타일이나 수 작업의 개별성 등에 무관심했다는 것을 단적으 로 증명한다.8)

이와 더불어 그가 작품 제작과정에서 생기는 실수나 우연의 효과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으 며, 한 동안은 그의 어머니가 작품에 사인을 도맡아 한 사실도 그의 철학을 반영하는 좋은 예이다. 기계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유명한 발언과 팝이란 가장 쉬운 일을 하는 것이라 는 정의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가장 많은 논란이 되는 것이 그의 철저한 상업주의와 이에 연관된 도덕성의 시비 이다. 그는 일단 어떤 이미지로 실크스크린을 만들면 그 스크린을 두고두고 써먹으며, 같은 주제를 숫자와 배열방식을 바꿔 가면 배치하여 여러 개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심지어는 스 크린의 여분의 잉크를 닦아낸 모나리자 이미지가 찍힌 천까지도 작품으로 만들어서 저명한 평론가의 진지한 분석까지 유도한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그는 작품 값을 올리 기 위해 작품의사이즈를 불렸으며, 큰돈을 번 초상화 분야에서도 가장 상업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조수들에게 일정의 할당금을 약속하여 고객유치를 독려 했는가 하면, 심지어는 크레 디트 카드 고객을 향한 판촉선전에도 등장하며"워홀과 함께 신화를 !"이라는 문구로 자신의 작품을 유행상품화 하였다.9)

그는 '공장'시대의 방만한 생활의 후유증으로 총격을 당한 뒤 작업실을 옮기면서 부터는 호 가이기보다는 사업가로 자신을 규정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업미술(Business art)은 미술의 다음단계 이다. 나는 상업미술가로 출발하여 사업미술가로 끝을 마치고 싶다. 나는 '미술'이라고 불리는 것을 (또는 무엇이라고 불리든지 간에)한 두에 사업으로 옮겨 갔는데, 나는 미술사업가 또는 사업미술가가 되고 싶었다. 사업에 수완이 있 는 것은 가장 매혹적인 예술의 일종이다.10)

그는 상업미술가로 이름을 얻을 즈음 체코시의 이름인 워홀라( Warhola)에서 끝글자를 떼 어 버려 노동이민 출신의 배경과 결별하는 변신을 꾀했고, 팝작가로 명성을 얻었을 때에는 친구들 사이에서 드렐라(Drella :드라큘라와 신데렐라의 합성어)로 통할만큼 패션과 미술계 의 신데렐라로 군림했으며, 사업미술가로 자처했을 때는 조수들로부터 보스라고 불리었다. 결국 이런 사업미술은 그의 아메리칸드림을 성취하는 골간이 된 것이다. 그는 미술품을 '순 수한 '상품으로 취급했고, 그것도 미술품이 일종의 신분과시용의 상품으로 변질하게 되는 보 드리야 식의 교환가치를 지닌 사인으로 인식했다. 물론 이러한 철저한 상업주의는 비판진영 의 주된 공격의 대상이 되어서, 예를 들어 타락하고 결국은 몰락한 이란 왕가와의 유착은 그의 도덕성에 대한 심각한 비판을 야기 시키기도 하였다.

워홀은 뒤샹을 존경했지만 뒤샹식 의 미술비판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그의 파괴적인 생활태도는 허무적이고 위험스러운 것으 로 비판받기도 했는데, 그의 이러한 미술에 대한 "무 신념"은 1970년대 말에 제작된 <산화 그림 Oxidation Painting> 에 단적으로 나타난다. 원래 <오줌 그림>으로 명명되었던 이 그 림들은 물감에 금속가루를 섞어 칠한 캔버스에 오줌을 갈김으로써 재작된 것으로 미술사적 으로는 폴록의 액션 페인팅이나 추상표현주의 회화 전반에 대한 패러디가 된다.11)이 작품 은 위에 언급한 모나리자 그림과 함께 그의 미학적 몰가치를 나타내주는 단적이고 극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워홀 평가가 쉽지 않은 이유를 납득하고 동시에 적지 않은 의문과 회의에 직면하게 된다. 미술이라는 창조적 작업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이런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정말 형편없는 엉터리가 아닌가? 이미 밝힌 대로 그를 실제 로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이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각자그이 판단에 맡기는 수 밖에 없는데,그 대답은 또한 현대미술이 제기하고 있는 많은 문제에 대한 우리들각자의 나 름대로의 평가와 연관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워홀의 이러한 측면의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여 그의미술을 '사기극'으로 속단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우선 오리지낼리티의 부정에 관한 것으로 한가지 고려 해야 할 것은 많은 미술가들이 선배나 동료 작가들의 작업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으며, 실제로 서로의 작 업이 진행되는 과정을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진정한 의미의 독창성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지 하는 것은 명확하게 규명하기 가 어려운 문제이다. 다만 어떤 아이디어가 주어졌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온 전히 워홀의 선택이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또한 작품의 익명성의 강조나 상업시스템의 이용,치부 등의 문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뒤샹, 여타 팝 작품들, 또는 미니멀 등에서 이미 다루어졌거나 또는 워홀과 거의 동시에 제기 되었던 것들이다. 더욱 특기할 것은 그의 이런 유산이 1980년대 이후의 미술에서 중요하게 모방, 또는 참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술사의 문맥에서 보았을 때 캠벨스프는 재스퍼 존스의 유명한 <채색된 브론즈>(1960)에 대한 언급이며, 코카콜라는 워홀이 더욱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던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콜라 병을 이용한 코카콜라 풀랜(1958)과 연관 이있다. 이것이 워홀 자신의 두 선배 작가의 작품 에 대한 대응이었다면 ,지금 현재 오리지낼리티와 차용의 이슈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셰리 레빈 이나 마이크 비들로, 제프쿤스 등은 바로 이러한 워홀의 유산을 재검증하고 있는 작가 들이라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워홀은 뒤샹이 일용품을 가지 고 문맥을 바꾸어 미술품으로서의 통과제의에 도전한 이래 가장 노골적으로 독창성과 개성, 수작업, 스타일, 또는 상업성의문제를 공략한 작가가 될 것이다.

<산화 그림>이 미술에 속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현대미술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을 곤혹 스럽게 만드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 제작과정을 모른다면 더욱 그러하고, 혹은 알더라도 그 에 관계 없이,이를 미술품이 아니라고 하기는 힘들다. 미술의 영역이 거의 무한대로 확장된 현대미술에서는 그 경계를 묻는 일 자체가 미술 작품이 되기도 하며, 이미 어떤 작품의 외 양이나 제작방식이 미술, 비 미술을 결정짓는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이 를 규정하는 유일한 기준은 미술품이 제시된 그 문맥, 즉 미술관이나 전시장 또는 미술잡지 등의 제도적 환경이 관건이 라는 시각이 제시된 것도 이미 근 20년 전의 일이다.12)어떤 작 품이 기존의 테두리를 벗어나면서 대두되면 이에 상응하는 새로운 개념이 만들어질 것이며 이런 개념의 확장이 현대미술가들이 해온 일이라면 워홀 역시 이일을 했으며 ,그가 우리를 혼란시키는 그만큼 우리는 더욱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만약 지금껏 내가 그려온 워홀의 이미지가 악마의 그것이라는데 모자람이 없다면 마지막으 로 한가지 더 보탤 것이 있다. 그는 사후에 대부분의 유산을 미술계로 환원되도록 조처했으 며, 그의 유지에 따라 이미 그 수혜자가 혜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이 이같은 결정을 미술에 대한 그의 최종적인 신념의 표현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공은 우리들에게 돌아와 있 다. 우리의 머리속에 들어있는 예술가에 대한 개념은 반고호 같은 근대적 인간상이다.예술가는 항상 고뇌에 잠겨 있으며 그는 돈대신 예술을 택하고 빵을 사는 것보다 물감을 사는 것을 우선으로하는 고집스러운 인간이다.그는 예술에 관하여 처절하게 고민한 나머지 자신의 목숨을 버릴 정도로 때로는 광적이고 정신병환자처럼 보통사람과 다른 개성을 지니고 있다.이즈음 되면 하나의 종교가 가지는 도그마와 우리시대의 예술가들을 매료 시킬만한 설득력을 파괴력을 가지게된다.누군가 그의 예술을 다른 사람에게 시켜서 자신이 서명만하고 내다 팔았다고 한다면 이보다 더한 사기 행각이 어디 있겠는가?예술가는 개성이 가득한 고뇌의 상징인 예술품이 돈이라는 저속한 가치와 맞바뀐다고 하는 것 자체도 불경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의 독창성을 가늠지 을 예술품자체도 그의 것이 아니라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가 의문스러운것이다.

(독일의 현대미술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