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문기(高文麒)

 

2003년 4월, 천진의 마르코폴로광장의 북쪽에 두 동의 나란히 선 이탈리아식 서양건물이 정식으로 관광객에게 개방되었다. 북쪽으로 놓여진 건물은 중화민국초기의 대사상가 양계초의 주택이고, 남쪽으로 놓여진 건물은 그의 서재인 그 이름도 유명한 음빙실(飮氷室)이다.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은 청나라의 통치를 끝내버렸다. 그해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일본으로 도망가있던 양계초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양계초는 비록 장기간 일본에 망명하여 있었지만, 그는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었다. <<청의보>>와 <<신민총보>>를 차례로 창간하고, 개혁을 고취하며, 혁명에 반대했다(양계초와 그의 스승 강유위는 당시의 개혁파이고, 손중산의 혁명사상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양의 정치학설을 대량으로 소개하여, 당시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아주 컸다.

 

1912년 양계초는 중국으로 되돌아온다. 당시 대총통인 원세개는 웅희령(熊希齡)으로 하여금 내각을 조직하게 한다. 1913년 9월 양계초는 웅희령의 추천을 받아 사법총장(司法總長)의 직을 맡는다. 그러나 웅희령 내각은 반년도 되지 않아 해산된다. 1914년 북양정부는 천진에 폐제국(幣制局)을 만들고, 양계초를 폐제국 총재로 임명한다. 그러나 양계초는 자신의 화폐개혁구상을 실현하기 어려줘지자, 폐제국 총재직위를 사임한다. 그가 폐제국총재를 맡았던 그 기간동안 그는 천진의 이탈리아조계의 서마로 25호(지금의 민족로 44호)에 자신의 집을 짓는다.

 

다음해 8월, 양도(楊度)등이 원세개의 뜻에 따라 "주안회(籌安會)"를 조직하여 황제제도를 선전하니, 원세개가 황제가 되려는 야심이 분명히 드러났따. 양계초의 제자인 채악은 여러번 병문안을 핑계로 북경에서 천진으로 와서 "음빙실"에서 양계초와 원세개를 토벌할 계책을 협의한다. 채악은 운남신군(雲南新軍)의 원로급장군이었다. 당시 채악은 이미 원세개에 의하여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어, 거의 연금상태였다. 오래지 않아 채악은 몰래 도망쳐서 운남으로 간다(전해지는 바로는 소봉선(小鳳仙)과 함께 중산공원의 금우헌에서 차를 마시러 간 기회에 도망쳤다고 한다), 나중에 양계초는 <<이재소위국체론자>>라는 글을 통해서 양도등의 글을 반박하고, 원세개의 황제야심을 폭로한다; 채악과 당계요(唐繼堯)등은 운남에서 호국군을 일으켜 무력으로 원세개를 토벌하려 한다.

 

1917년 7월, 풍국장(馮國璋)은 대리대총통이 되고, 단기서(段琪瑞) 내각이 성립된다. 양계초는 재정총장(財政總長)에 임명된다. 11월, 풍국장, 단기서의 불화로 단기서가 사직한다. 양계초도 재정총장직을 사직한다. 이때부터 그는 다시는 북양군벌의 정치활동에 참가하지 않고, 천진에 은거하여 저술에 주력하며, 천진 남개대학에서 <<중국문화사>>과정을 강의한다. 이 시간에 양계초는 정기적으로 음빙실에서 강좌를 열었다. 엄복(嚴復), 호적(胡適)...등의 학계명사들이 그의 친구가 되었다; 동시에 후기지수인 양수명(梁漱溟), 서지마(徐志摩)...등과는 스승과 제자의 우의를 맺는다.

 

음빙실이라는 이 건물은 이탈리아건축설계사의 작품이다. 네모난 건축에 원형의 채광 지붕이 있어,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같다. 음빙실에 들어가면, 정면에는 양계초가 쓴 글이 걸려 있다.

 

헌신감작만시적(獻身甘作萬矢的),

착론구위백세사(着論求爲百世師)

몸을 바침에는 만인의 표적이 되어도 달게 받고

글을 씀에는 백세의 스승이 되고자 한다.

 

이곳은 양계초과 강좌를 열던 곳이다. 양수명, 서지마..등이 강의를 듣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가장 특별한 것은 왼쪽 벽에 걸려있는 유화 한폭이다. 그림에는 군복을 입은 장군이 그려져 있는데, 바로 양계초의 제자인 채악이다. 채악은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양계초가 아쉬워했다. 그리하여 그 제자의 화상을 이곳에 걸어놓게 함으로써 기념을 삼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