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묵가(墨家)는 선진(先秦, 진나라이전)시기에 중요한 학술유파이다. 유가(儒家)와 나란히 "현학(顯學)"이라 불리기도 했고, 도가(道家)와 분정항례(分庭抗禮)의 세를 이루기도 했다. 소위 "천하지학, 불귀약즉귀묵(天下之學, 不歸楊則歸墨)"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선진시기에 이렇게 중요했던 학술유파가, 진나라 한나라의 교체기를 거치면서 돌연 사라져 버린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쯤에는 이미 묵가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후에는 더더욱 언급하는 사람이 적어진다. 사람들은 그저 묵가에 대하여 개략적인 것만 알 뿐이지, 이 학파의 진실한 상황에 대하여는 잘 알지 못했다.

 

다행히 2천년이 지난 후, 청나라때 <도장(道藏, 도교경전모음집)>을 정리하다가, 그 안에 묵자의 책이 잘못 수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리하여, 건륭, 가경연간에 묵학연구의 붐이 일어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세심하지 못했던 <도장>의 편찬자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가 묵자의 책을 잘못 실어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진귀한 학술전적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묵자의 책을 읽어보면, 내용이 광범위하고 사상이 정교하고 깊이가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묵가학파가 돌연 사라진 것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이에 대하여, 많은 묵학연구자들이 언급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즉, 묵가사상 자체의 국한성때문에 신흥지주계급의 수요에 맞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은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다. 그러나 이런 분석도 묵가가 사라진 것이 돌연하다는 점은 전혀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선진시대의 제자백가의 학문은 한나라때까지도 흥성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며, 드러나기도 하고 숨어있기도 하지만, 그 종적을 찾아볼 수는 있었다. 오로지 묵가만이 수수께끼처럼 사라져 버린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 문제를 해결하자면, 그 학설의 국한성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알아내기 어렵다. 또 다른 출로를 찾아보아야 한다.

 

묵가학파의 돌연한 소실의 근본원인을 찾아보면, 이 학파의 조직특징과 행위특징에 있다.

 

묵가는 숭고한 이상을 지닌 학파이다. 이 이상은 바로 공천하(公天下), 겸애천하(兼愛天下)이다. 이상을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묵가의 종지는 "입으로 말을 하면 몸으로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口言之, 身必行之)"이다. 그러므로, 묵가는 강렬한 사회실천정신을 지닌 학파였다. 바로 이와같이 자신의 이상사회를 실천할 필요성때문에, 묵가는 선진의 여러 유파들 중에서 유일하게 엄격한 조직을 만들었던 유파이다. 묵가들은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거자(巨子)라고 부르며, 거자를 성인으로 받든다. 사실, 묵자는 바로 제1대 거자였다. 그는 이 집단의 정신적 지도자일 뿐아니라, 이 조직이 사회실천에 참가하도록 조직한 사람이다. 이뿐아니라, 묵가들의 특징은 엄격한 자율정신이다. 그들은 "이승묵자교(以繩墨自矯)"하여, 자신에게 엄격했다. 소위  승묵은 목수들이 직선을 그릴 때 쓰는 먹줄과 먹이다. 바로 이런 '이승묵자교'의 엄격한 자율성이 이 학파를 묵가로 부르게 된 진정한 이유이다. 그들의 얼굴이 검거나, 묵자가 경형(黥刑)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이상의 분석에 다른 자료를 종합해보면, 우리는 묵가에 대하여 이런 전체적인 이미지를 그릴 수 있다. 묵가는 지도자가 있고, 학설이 있고, 조직이 있는 학파이다. 그들은 숭고한 사회이상과 강렬한 사회실천정신을 지니고 있다. 묵가들은 힘든 일을 견디며 참고, 자신을 엄격하게 규율했다. 공리와 도의를 유지보호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의무와 책임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지식노동자이다.

 

바로 이런 이상에 집착하고 견지하는 것으로 인하여, 묵가들은 용감한 정신을 지닌다. 공리와 도의를 위하여, 그들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다. 서한초기의 육가(陸賈)는 이렇게 말한다. 묵문에는 용사들이 많다(墨門多勇士). <회남자>에는 이런 말도 있다. 묵가의 사람들은 "모두 불과 칼날을 밟고 지나가고, 죽어도 발길을 돌리지 않는다(皆可使赴火蹈刃, 死不旋踵)". 이것들은 모두 묵가의 헌신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묵가는 사회실천에 참여하면서, 많은 경우 조직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이런 헌신정신은 쉽게 집단행위로 나타난다.

 

<여씨춘추>의 기록에 따르면, 묵가의 거자 맹승(孟勝)은 초나라의 양성에서 그와 제자 183명은 한 명도 물러나지 않고 모조리 전사했다고 한다. 당시는 전란이 빈번한 시대였으므로 이런 일이 한번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저명한 묵자의 이야기를 보자. 그는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두가지 준비를 한다. 하나는 천리먼 길을 달려 초나라로 가서 초나라에 공격하지 말도록 권한다. 다른 한편으로, 금활리등 삼백제자를 송나라에 보내어 수성하도록 시킨다. 다행히 묵자가 초나라를 설득하여 전쟁을 멈추었기에 망정이지, 초나라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초나라는 강하고 송나라는 약하다. 일단 초왕이 송나라를 공격하기만 하면, 송나라를 지키기 어려웠을 뿐아니라, 묵자와 삼백제자의 운명도 아마 끝났을 것이다. 묵가는 죽어도 굽히지 않는 정신으로 볼 때, 그들은 한 명도 퇴각하지 않고, 차라리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묵가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제자를 두었을까?

 

진한시대의 전횡(田橫)이 자주 생각난다. 전횡은 제(齊)나라 사람이다. 당초에 유방, 항우와 함게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킨다. 수년후, 유방이 황제를 칭하고, 전횡은 오백의 장사와 함께 섬에서 패망한다. 유방은 장기적인 계산에서 사신을 보내어 강온의 수단으로 전횡을 회유한다. 전횡은 할 수 없이 두 명의 문객을 낙양으로 간다. 낙양에서 삼십리 떨어진 곳에 이르자, 전횡은 두 문객에게 말한다. 당초에 나는 유방과 함께 거병했다. 그런데 지금 한 명은 천자이고, 한명은 패망한 포로이다. 나는 이를 부끄럽게 생각한다. 유방은 사실 내 얼굴을 보고싶어하는 것이니, 두 분이 내 수급을 유방에게 바쳐라. 그리고 전횡은 자살한다. 두 문객은 그가 말한대로 전횡의 수급을 유방에게 바친다. 유방은 크게 탄식하며, 왕의 예로 전횡을 장례지내고, 두 문객을 도위에 임명한다. 장례를 마치자, 두 문객은 전횡의 묘 옆에 구덩이를 파고, 같이 자살해버린다. 유방은 더욱 탄식한다. 사신을 보내어 섬에 있는 오백장사들을 중용하고자 한다. 그러나, 섬에 있던 오백장사는 사신의 입에서 전횡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한 명도 유방의 조서를 받들지 않는다. 그들이 채택한 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 유방과 전횡에 대답하는 방식이었다: 모조리 자살한다.

 

자주 생각해본다. 전횡이 묵가였을까? 전횡이 거자이고 오백장사가 묵가였을까? 만일 아니라면, 그들이 이처럼 의리를 중시하고 목숨을 가볍게 여기며 죽음을 택하는 정신과 방식이 어쩌면 그렇게 묵가와 닮았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아마도 마지막 묵가일 것이다.

 

숭고한 이상을 목표로 하여, 엄격한 조직을 유지하고, 이상을 위하여 몸을 바치는 정신을 지니고 있는 것이 묵가의 기본특징이다. 그들은 집단적이고 무리를 이루어 사회변혁과 실천에 참여한다. 그러나, 비극적인 결과도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같다. 이들 집단이 강력한 타격을 받으면, 그들은 정의와 이상에 집착하여, 죽을지언정 물러나지 않는 정신을 발휘한다. 그 결과, 토붕와해(土崩瓦解)하면 촌초무생(寸草無生)하게 되는 것이다. 토붕와해는 수습이 가능하지만, 촌초무생은 뒤를 이을 사람이 없는 결과를 낳는다.

 

묵가의 돌연한 소멸은 아마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