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아체(阿杕)

 

"풍소소혜역수한(風蕭蕭兮易水寒), 장사일거혜불부환(壯士一去兮不復還)"

이 비장한 노래소리는 이천여년의 역사가 흘렀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흐르고 있다. 형가(荊軻)가 진시황을 암살한 이야기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사람들이 형가에 존경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이 이야기가 하려는 "강자의 폭력에 굴하지 않고, 비분강개하여 죽으러 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형가를 얘기하자면 그를 암살하러 보낸 사람 즉 연나라의 태자단(太子丹)을 얘기해야 한다. 그와 진시황과의 은원은 진나라와 연나라 이 두 국가간의 은원일까? 역사서적에는 그에 관한 내용이 많지가 않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원전230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킨 때부터, 진시황의 천하통일의 막은 이미 열렸다. 동방에 남아있던 5개 국가는 거대한 생존압력을 느꼈다. 이것은 다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연나라와 진나라의 사이에는 조화될 수 없는 모순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연나라의 태자단이 형가를 파견하여 진시황을 찌르게 한 것은 연나라의 생존을 위하여 부득이 취한 졸렬한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연나라를 구하지 못하였을 뿐아니라, 오히여 멸망을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태자단의 암살행동은 몇년간 준비했고, 한나라가 멸망하기 전에 이미 모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저 진시황의 보안조치가 극히 삼엄하고, 적합한 사람을 구하지 못하였고, 진시황에 접근할 기회를 잡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국가가 멸망하려할 때, 태자단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투항으로 진시황 본인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장수는 싸우지 않고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싶어한다. 연나라의 투항은 진시황에 있어서 확실히 커다란 유혹이었다.

 

만일 연나라의 생존위기를 태자단이 암살계획을 실시할 기회로 보고 목적으로 보지 않는다면, 역사는 훨씬 복잡하고 논리에 맞지 않는다. 국가의 대립을 빼고, 진시황과 태자단의 관계를 보면 역시 심각한 은원이 존재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시황을 암살하는 행동의 최후명령하달자는 태자단이 아니라 연왕희(燕王喜)가 되었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나중에, 연왕희도 다른 사람의 건의를 받아 진시황에게 잘보이기 위하여 태자단을 요동에서 죽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역사상, 일찌기 태자단이 개인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 국가안위를 돌보지 않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태자단과 진시황은 서로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냥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잘아는 사이였다. 운명은 그들을 하나로 연결시킨 것은 기실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에서였다. 그때, 진시황은 아직 어려서 겨우 9살이었다. 태자단의 나이는 약간 더 많았다. 진시황의 큰형이라고 할 수 있다. 진시황은 일찌기 조나라에 체류한 적이 있고, 태자단도 연나라의 인질로 조나라에 체류한 적이 있다. 거의 같은 처지여서 그들은 심리적으로 가까워졌다. 그들은 깊이있고 즐거운 교분이 있었다. 그들이 교류한 구체적인 상황을 사서에서는 별로 적지 않고 있다. 사마천은 이에 대하여 단 한 마디를 적었을 뿐이다. '어려서 태자단과 즐겁게 지냈다" 이것은 당시 그들이 좋은 친구사이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시황이 9살때, 조나라는 그를 진나라로 돌아가도록 허용한다. 태자단이 언제 떠났는지는 지금 알수가 없다. 어쨌든, 한단에서 헤어진 것은 그들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이때부터 서로 다른 곳에서 지냈다. 몇년이 지나지 않아, 진시황의 부친이 사망하고, 그가 왕위를 승계한다. 그리하여 전국시대 최강의 국가인 진나라의 최고통치자가 된다. 태자단은 부친이 장수하여, 일생동안 태자의 지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는 일대의 걸출한 인재였다.

 

전국시대에, 선비들을 기르른 풍속과 교유하는 풍속이 중원에 유행했다. 제나라에는 맹상군이 있었고, 위나라에는 신릉군이 있었으며, 조나라에는 평원군이 있고, 초나라에는 춘신군이 있었다. 이들은 전국사공자라고 불린다. 이들이 기르는 선비들은 수가 많았고, 인재들이 가득했고 영향력이 컸으며, 명성이 천하에 미쳤다 .기실 이들 4명외에 반드시 언급해야할 사람이 두 사람이 더 있다. 하나는 진나라의 여불위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연나라의 태자단이다. 그들은 전국사공자이후, 여불위는 <여씨춘추>를 대표로 하고, 연나라 태자단은 형가로 하여금 진시황을 암살하게 한 것이 대표적이다.

 

태자단은 후궁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저 선비들과 교유하는 것을 즐겼으며 영향이 연나라 전국에 미쳐서, 풍속이 되었다고 한다. 그후 여러 해동안 연나라땅에서는 남자주인이 아주 통이 커서, 손님이 찾아오면 부인을 저녁에 보내어 모시게 하는 상상하기 힘든 풍속이 있었다. <한서>에서는 특히 강조하여 말하기를 이는 연나라 태자단의 유풍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제나라, 노라라의 도덕군자들은 깜짝 놀라고 비난하는 소리가 드높았다.

 

태자단은 비록 당대의 호웅이지만, 그는 진시황과의 사이에 한단에서 있었던 우의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 비교적 잘 지냈던 어린 동생이 지금은 최강대국가의 군주가 되었으니, 그가 연나라에 도움을 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중에, 태자단은 함양으로 가서 진시황의 인질이 된다. 두 사람이 만나자마자, 태자단의 모든 기대와 환상은 깨져버린다. 진시황은 이미 옛날 한단의 그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음험하고 냉혹했다. 아마도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한단에서 그가 곤궁하게 지내던 때를 알게 될까봐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옛날의 큰형은 잘 대접받지 못하였을 뿐아니라, 오히려 연금된 것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 사서에서는 "진시황이 예의를 갖추지 못했다(秦王非禮)"라고 적고 있다. 이 몇 글자에서 당시의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 태자단은 귀국하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진시황이 거절한다. 진시황은 심지어 이렇게 독한 말로 맹세까지 한다: "하늘에서 밤이 비처럼 내리고, 말에서 뿔이 나지" 않는 한 함양을 떠날 생각을 말라고 한다. 이것은 외교적으로 지나친 일이다. 수십년전, 진소왕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초회왕을 함양에 붙잡아놓은 적이 있다. 초회왕은 결국 함양에서 죽었다.

 

사람들은 하늘도 태자단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정말 하늘에서 밤같은 비가 내리고, 말에서 뿔이 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진시황은 어쩔 수 없이, 태자단을 풀어주고 귀국시킨다. 전설은 전설이다. 이런 기이한 일이 일어날 리는 없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 일을 언급했지만, 명확히 믿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태자단은 결국 방법을 강구해서 함양에서 도망친다. 이때부터 유년의 친구는 외나무다리의 원수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고심하여 복수하려던 원인이다. 이런 역사는 설명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아주 미묘하고 복잡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