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월(許越), 설영(薛瑛) 

 

200여년전의 어느날 밤, 북경 창평(昌平)의 한 작은 마을에 하루종일 일을 한 촌민들은 꿈속에 빠져 있었다. 돌연, 창밖으로 천군만마의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전체 마을을 포위한 것같았다. 간이 큰 사람은 몸을 일으켜 어찌된 일인지 살펴보았다. 바깥에는 완전무장한 어림군(御林軍)이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은 집안에 남아있고, 바깥을 쳐다보지 말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밤하늘은 등불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날이 밝은 후, 사람들은 깜작 놀란다. 원래 마을의 서쪽에 있는 금벽휘황한 왕부(王府)가 하룻밤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땅 위에는 벽돌 두 조각도 연이어 쌓여져 있지 않을 정도였다. 나중에 누군가가 반쯤 메워버린 우물을 발견했고, 이 우물의 사방은 황동(黃銅)으로 쌓여있었다. 옛날 왕부의 번화함을 드러내는 유일한 증거이다.

 

여러해 후, 이곳은 왕부의 흔적이라고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뿐이다. 이 왕부는 신비로운 색채로 가득했다. 평지에다가 지은 후 다시 철거하여 평지로 돌아가기까지 겨우 십여년의 시간만이 걸렸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곳을 소황궁(小皇宮)이라고 불렀다. 겹겹으로 지어진 큰 집에 사방은 호성하(護城河)가 둘러싸고 있었다. 게다가 병사들이 수비를 서고 있었으며, 평소에 드나드는 것은 모두 태감, 궁녀들이었다. 일반 백성들은 똑바로 쳐다보기만 하여도 얻어맞을 정도였다. 이 저택에 누가 살고 있는지는 아무도 감히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당시 청나라에는 법도가 있어서, 왕공귀족은 반드시 내성(內城)에 살아야 하고, 마음대로 떠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북경교외에 무슨 왕부를 짓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지 못하게도, 나중에는 그 우물마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정가장(鄭家莊)에는 이후 평서왕부라는 별칭과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갖게 되었다. 누구든지 이 황동우물을 찾기만 하면 당시 왕부의 유적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200여년후, 사람들은 과연 이 전설상의 황동우물 유적지를 찾아낸다. 2005년, 공사일꾼들은 오래된 우물을 발견한다. 우불의 벽은 금황색을 나타내고 있었고, 샘물은 맑고 투명했다. 이것은 전설상의 왕부가 전혀 근거없는 헛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더욱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그 곳에 지은 신왕부호텔을 개업하는 날, 요녕에서 돌은 한 사람이 나타난다. 그는 엣왕부주인의 후손이며, 개발상에게 '평서왕부'라는 칭호를 쓰지 못하게 경고하기 위하여 온 것이었다. 그리고 개발상에 대한 소송을 법원에 제기한다. 그 노인에 따르면, 이 왕부의 주인은 대명이 자자한 오삼계(吳三桂)이다. 그리고 그는 오삼계의 후인이라고 한다. 오삼계가 평서왕에 봉해졌기 때문에, 평서왕부는 그의 옛집이라는 것이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오삼계는 확실히 평서왕에 봉해진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반란을 일으켜 멸문지화를 당한다. 어디서 그의 후인이 나타날 수 있겠는가?

 

이 신비한 왕부는 왜 황급히 지어지고, 황급히 철거했을까? 주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오삼계와 정말 관련이 있을까? 이 왕부에는 어떤 놀랄 비밀을 숨기고 있을까?

 

1. 누구의 왕부인가?

 

북경토박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청나라의 왕부는 일반적으로 모두 성안에 있고, 성밖에 있는 무슨 왕부는 모조리 분묘이다. 살아있는 사람이 거주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향산의 사왕부, 소서부같은 것들은 모조리 분묘이다. '평서왕부'라는 몇 글자를 가지고 오삼계의 후인이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왕부가 정말 오삼계의 '평서왕부'인가?

 

솔직히 말하면, 이 왕부는 오삼계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오삼계 본인이 청나라에 있을 때 개인은 북경에 집을 마련해두지 않았다. 그의 아들 오응웅(吳應熊)은 청태종 홍타이시의 14째 딸이다. 그는 청나라황제의 사위(額駙)이다. 오응웅의 저택은 지금 서단(西單)의 북대가(北大街) 석부후통(石府胡同)에 있다. 오삼계가 북경에 머무른 시간은 아주 짧았고, 나중에 계속 남방에 있었다. 마지막에는 운남으로 나고 번왕에 봉해진다. 그 개인은 청나라때 북경에 저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명나라때는 북경에 집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북경저택은 황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를 보면, 왕부는 분명히 오삼계의 '평서왕부'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느 청나라왕부가 북경에서 이렇게 떨어진 곳에 세워졌을까?

 

여기까지 얘기하면 사실 의문이 떠오른다. 그것은 이상하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대청국에는 한 가지 법도가 있다. 모든 왕공귀족은 반드시 내성에 거주해야 한다. 별도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경성에서 40리를 떨어져 살 수가 없다. 왕야를 제외하고, 보통의 기인(旗人)들도 마찬가지이다. 비준을 받지 않으면, 주둔지에서 30리를 떨어질 수 없다. 이를 어기면, 탈영으로 취급하여 죽임을 당한다. 이치대로라면 '평서왕부'의 소재지는 경성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지금 보더라도 북경자금성에서 창평까지는 상당한 거리이다. 하물며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청나라때는 더욱 멀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 당시, 대청국황제는 왕공대신들을 대비하는것이 아주 엄격했다. 성에서 40리를 더나지 못하게 하였을 뿐아니라, 평소에 동료들과 사귀거나, 관직에 있는 친구를 만나는 것도 모두 불가능했다. 외지관리가 경성의 관리들과 만나는 것도 모두 불가능했다. 만일 누구 집에 잔치가 있어서 관계가 좋은 왕야를 부르려고 하더라도, 집에 도착하여 문을 들어갈 때 직접 들어갈 수 없다. 반드시 문앞에서 큰 소리로 통보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공친왕, 나는 어느어느 친왕입니다. 당신을 만나뵈러 왔습니다." 기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왕부안에 있는 왕야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왕야는 당신이 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가? 밀정에게 말하는 것이다. 밀정을 통하여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 황제가 안심하는 것이다. 만일 결혼, 장례, 결혼등 큰 행사의 경우에도 같은 기(旗)내로 제한된다. 예를 들어,정백기에 속하면 정백기의 사람들은 그의 집으로 가서 축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황제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청나라시대드라마에서 서로 집을 찾아다니고, 얘기를 나누는 것이 나오는데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그 때는 대갓집 규수들뿐아니라, 관리들이라 하더라도, 집밖을 나갈 수가 없었다. 당연히 황제가 이렇게 엄히 단속한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청나라군대는 북경으로 들어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암암리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황제는 작위를 주고, 공명과 녹봉을 주고 이들을 안정시켰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중국의 과거역사를 보면, 이성상잔(異姓相殘)의 역사를 지나고 나면, 동성상잔(同姓相殘)을 벌인다. 왕족 특히 고위왕공의 반란을 막아야 했다. 청나라때 왕공에 대한 단속은 아주 심했고, 서로간에 교분을 가지기 어려웠다. 

 

이렇게 엄격한 관리제도를 지니고 있는데, 어떻게 황성에서 40리나 떨어진 곳에 '평서왕부'를 만들 수 있을까? 아무리 봐도 이는 규격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느 왕의 저택이었을까? 그리고 왜 '평서왕부'라고 불리웠을가? 하나하나 근원을 추적해보도록 하자.

 

2. 난륜의혹사건

 

현지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옹정(雍正)연간의 어느 날, 이 작은 마을애 내무부의 사람들이 한무리 몰려왔다. 그리고, 말도 없이 말을 몰아서 땅을 확보한다. 며칠 지나지 않아, 이곳에는 아주 기세있는 호성하가 만들어지고, 호성하의 안쪽에는 높은 담장이 저택이 세워진다. 백성들은 생각한다. "우리 마을은 황친국척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어찌해서 내무부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집을 짓는 것을 감독하는가?" 며칠 지나지 않아, 태감, 궁녀가 속속 이주해 들어왔다. 그러나 아무도 이 집의 주인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본 적이 없다. 더욱 이상하게 느껴지는 점은 이 집의 경비가 삼엄하고, 많은 관병이 주둔하여잇어, 호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감시한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같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백성들의 능력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성에서 정보가 들려온다. 이 집에 사는 사람은 바로 왕야이고, 비(妃)를 주고 받은 왕(王)의 자리라고 했다. 비를 주고 왕을 받는다니, 이런 웃기는 일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옹정제가 황위를 차지한 후, 형제들을 대거 죽이기 시작한다. 폐태자 윤잉의 아들 홍석(弘晳)은 처를 데리고 성을 나가 피난을 간다. 그러나 황제에게 붙잡히고 만다. 옹정제는 홍석의 처가 폐월수화, 침어낙안의 미인이라는 말을 들어, 그녀를 비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교환조건으로 홍석의 죄를 사면하고, 경성에서 40리 떨어진 창평의 정가장에 왕부를 지어 그를 살게해준 것이라는 것이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연금한 것이다.

 

이런 일은 현대인들이 보기에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근본적으로 난륜이 아닌가. 그러나, 당시는 수백년전의 중국이고, 소수민족들에게 난륜이 아니다.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것은 별 일이 아니다. 집안의 재산을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습속이 있으므로 황궁내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아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백성들의 아름다운 추측이다. 설마 옹정이 정말 후궁미녀들에게 질려서 강제로 조카의 부인까지 빼앗았단 말인가?

 

기실 이 전설을 신뢰도가 낮다. 매년 궁정에서는 수녀선발대회를 열어서 황궁으로 무수한 젊은 여인들을 보낼 뿐아니라, 황족들에게도 나누어주었다. 옹정이 아주 호색한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 몇년동안 여자를 진공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게다가 그 조카의 부인이 절색미녀였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순간에 황제가 왕위와 여자를 교환한단 말인가? 알아야 할 것은 옹정이 자신의 형제들을 대거 죽이면서, 정권을 공고히 하려는 때였다는 것이다. 그가 이런 중요한 순간에 한 여인을 위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영향을 줄 일을 할 리는 없을 것이다. 군주가 되려는 자는 모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중요하고 시급한 일을 구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청나라 궁중드라마를 많이 본 사람들은 권모술수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라. 그가 한 여인을 위하여 그 남편을 연금시키고, 왕부를 지어준다면 이것은 오히려 남들에게 많이 알라고 떠드는 꼴이 아닌가? '여기에는 삼백냥을 묻지 않았습니다"라고 목패를 세우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이 일은 결국 전설일 뿐이라고 할 것이다.

 

다만, 청나라초기의 기인들에게 확실히 남의 처를 빼앗는 일은 많이 벌어졌다. 예를 들어, 도르곤이 북경에 진입한 후, 자신의 조카인 하오거를 죽이고 그의 처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았다. 그러나 청나라가 입관한 후 특히 강희, 옹정이후가 되어서는 점점 한화되어, 한족의 습관을 따랐다. 관외에 있을 때는 만주족의 인구가 적어서 여인도 귀한 자원이었다. 인구가 작을 수록 쉽게 족내혼을 성행하게 한다.

 

3. 누가 왕부의 진정한 주인인가?

 

한참을 애기했지만, 이 왕부안에 살았던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왜 그를 위하여 이런 왕부를 지어주었을까?

 

창평 정가장의 이 왕부는 실제로 하나의 감옥이었다. 이것을 짓기 시작한 것은 옹정원년이었다. 옹정은 폐태자(廢太子) 윤잉을 궁안에서 쫓아내기 위하여, 이곳에 주택을 지은 것이다. 그후 폐태자가 이주해온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아들 홍석(옹정은 그를 이군왕에 봉하였다)도 이 곳으로 옮기게 하여 그가 부친을 모시도록 하였다.

 

그렇다면 왜 '평서왕부'라 불렀을까? 이것은 실제로는 오해이다. 건륭4년, 홍석은 작위를 박탈당한다. 작위를 박탈당하자, 작위가 없었다. 사람들은 이 곳을 '홍석부(弘晳府)'라고 불렀다. 그리고 위치가 창평의 경내에 있어서, 이 곳을 '창평홍석부'라고 불렀다. 중국인들은 두 글자로 이름붙이기를 좋아하는 습관이 있어서, '창평'에서 '평(平)'자와 홍석에서 '석(晳. Xi)'자를 땄다. 그런데, '석'자는 많이 쓰는 글자가 아니다보니, 발음이 같고 자주 쓰는 글자인 '서(西, Xi)'자를 쓴 것이다. 마침 위치도 북경의 서쪽이었다. 그래서 '평서부' 혹은 '평서왕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추측이다. 사료를 보면, 이런 기록은 없다. 이를 보면 이 왕부가 아주 짧은기간동안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까지 얘기했으니, 폐태자 윤잉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람의 일생은 '비참'이라는 두 글자로 형용할 수밖에 없다. 청나라의 태자 애신각라 윤잉은 성조인황제 즉 강희제의 적자(嫡子)이다. 강희13년 갑신 오월 초삼일 사시에 태어났고, 생모는 강희황제의 첫황후인 효성인황후 혁사리(赫舍里)씨이다. 윤잉의 출생당일 황후는 난산으로 사망한다. 원래는 일곱째이지만, 강희제의 요절한 아들들을 제외한다면 그는 적장자(嫡長子)이면서 황차자(皇次子)이다. 그의 모친이 그를 낳다가 죽은 이후, 강희제는 그의 모친에 대한 사랑을 모두 그에게 쏟는다. 그래서, 윤잉은 두 살때 황태자에 책봉된다. 그리고 황제는 평상시에 그를 아주 사랑하고 아꼈다. 그러나 나중에 강희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두 번이는 그를 폐위하고 다시 황태자에 세우고 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 일은 아주 복잡하다.

 

어느 해인가, 강희제가 목란위장에서 사냥을 할 때, 저녁에는 장전(帳殿) 안에서 거주했다. 소위 장전은 천으로 만든 장막이다. 한밤중이 되어, 강희제는 누군가가 몰래 들여다보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게 했더니,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강희제는 정신이 혼란스러워진다. 혹시 누군가 그를 암살하려는 것이 아닐까? 다음 날, 강희제는 경비를 강화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다음 날도 사람이 나타난다. 그래서 화도 나고, 놀란 강희제는 몇몇 호위들에게 분부하여, 그들에게 셋째날에는 장막의 밖에서 미리 매복하고 있도록 한다. 그래서 사람이 나타나자 바로 체포한다. 이때 강희제가 나가서 보니 바로 그는 그가 세운 황태자 윤잉이었다. 강희는 분노한다. 모든 문무대신과 외국선교사들의 앞에서 황태자를 폐위시켜 버린다.

 

이것을 보면 의문이 들 것이다. 태자가 자신의 부황을 보는 것은 아주 광명정대한 일이 아닌가 그는 왜 몰래 쳐다보았는가? 무슨 생각을 한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은연중에 생각할 것이다. 분명히 그의 부친이 낮에 광명정대할 때 그를 보지 못하게 하였거나 혹은 그가 계속 보려고 했으나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혹은 궁안에서는 말하기 힘든 점이 있어서 이런 시기에 몰래 본 것이다.

 

당연히, 이것은 우리가 전해져 내려오는 사서에 남아있는 조각조각의 글들을 가지고 추측한 것이다. 사실이 어떤 것인지는 이미 알 수 가 없게 되었다.

 

현재 사람들은 과거 황족생활을 추측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하게 된다. 이것은 주제와 관련이 멀 지는 모르지만, 어떤 사람은 홍루옴의 진가경을 얘기하면서 폐태자 윤잉의 사생아라고 한 바 있다. 윤잉이 '평서왕부'로 쫓겨나기 전에, 몰래 그녀를 조씨집안에 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래의 정치적 밑천으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런 게 말이 될까?

 

기실, 한 가지 일만 분석해주면 분명히 알 것이다. 윤잉이라는 사람은 두 번이나 폐위되고 태자로 세워졌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폐위된 후에 모든 자손이 연좌되고, 온 가족이 멸문의 화를 당하는 것같은 일이 그에게는 해당이 없었다. 윤잉은 일생동안 많은 자녀를 낳았고, 아들만 12명이다. 그가 창평 정가장으로 간 후에도 연금이고, 그의 정상적인 생활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그가 이렇게 많은 아들이 있는데, 그리고, 이들 아들들은 모두 작위를 받아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ㄴ데, 왜 딸 하나를 다른 집에 보내어 정치적 밑천으로 삼으려 했단 말인가? 그럴 가치가 아예 없다.

 

중국은 역대이래로 남녀가 불평등했다. 가정내에서 같은 형제자매간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지위는 불평등했다. 대갓집의 적출의 딸, 정부인이 낳은 딸이라고 하더라도, 서출의 아들, 첩의 아들보다 지위가 낮았다. 이것은 왜 그런가? 과거에 사람들은 결혼을 일찍 했다. 기본적으로 14살에서 16살에 결혼한다. 여자는 출가한 후, 시집간 집안의 사람이 된다. 그래서 남의 집의 가족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딸이 친정에서 생활하는 것은 십여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녀는 친가의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가 없다. 그래서 투자하려면 투입산출이 이루어지는 곳에 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정말 사생녀를 다른 집안에 맡겨서 죽음을 무릅쓰고 모험을 하려면, 집안의 자손이 흩어지고, 남녀가 평등하다는 기초가 있어야 성립된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사건을 볼 때, 역사의 상황에 맞아야 하고, 역사의 배경에 부합해야 한다.

 

4. 저주받은 왕부 사람?

 

운명은 '평서왕부'의 사람들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이것은 사실이다. 건륭4년, 건륭이 돌연 폐태자 윤잉의 아들인 홍석의 작위를 박탈한다. 그를 평민으로 강등시켰다. 죄명은 그가 '평서왕부'를 궁정을 본떠서 만들고, 황가에나 있는 장의, 회계등 기구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왕야, 패륵등과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 만일 이 죄명이 성립된다면, 분명히 아주 중대한 범죄이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는 그저 작위만 박탈한다. 그의 아들은 여전히 건륭의 곁에서 신변호위로 있었다.

 

이 일이 건륭4년에 발생했을 때, 건륭은 조서를 내린다. 홍석은 스스로를 동궁적자로 보고, 불측한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작위를 박탈했다는 것이다. 작위박탈후, 먼저 이친왕의 칭호를 없앤다. 그 다음에는 종적(宗籍)에서 제명한다. 즉, 애신각라씨에서 쫓아낸 것이다. 그가 애신각라씨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건륭은 조치가 심했다. 홍석에게 이름까지 고쳐서 사십육(四十六)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 때부터 홍석이라는 이름조차 없어진다.

 

왜 '사십육'이라고 했을까? 그해 홍석의 나이가 46살이기 때문이다. 그가 작위를 박탈당한 후, 다시 3년을 더 살았다. 건륭7년, 그가 49살때 사망한다. 홍석은 건륭과 같은 배분인 사람이다. 왜 그의 작위를 박탈했을까? 그리고 그의 종적까지 파내야 했을까? 설마 그가 정말 모반을 꾀하였단 말인가?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만일 정말 뭔가가 있었다면, 아마도 일가들이 모조리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적 사료들 중에서 건륭4년의 홍석모반에 관한 자료로 현존하는 것은 아주 적다. 심지어 그가 도대체 어떻게 종적에서 제명되고, 어떻게 처치받았는지도 그저 몇마디 말밖에 없다.

 

실제적인 원인은 아마도 그가 폐태자 윤잉의 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폐태자에게는 12명의 아들이 있는데, 장남은 요절했고, 홍석은 적비의 소생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있는 아들들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다. 그는 비록 차남이지만, 실제로는 장남인 셈이다. 그들 부자의 이런 신분은 옹정, 건륭부자에게 일종의 위협이다. 홍석의 부친은 어쨌든 황태자의 지위에 있었던 적이 있다. 황태자라는 이런 정치적 밑천은 옹정과 건륭에게 경계심을 가지게 할 수밖에 없다. 종실로서 이는 진퇴양난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성이 다른 사람이 죄를 저지르면 황제는 전혀 망설임없이 처결할 것이다. 그러나, 종실이 죄를 저지르면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할 수 없다. 지나치게 엄하면, 윤리적으로 문제가 된다. 엄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위험해진다. 예를 들어, 폐태자가 왜 강희에게 미움을 샀을까? 주요한 것은 강희가 40살때, 소어투부자가 황태자를 도와준 적이 있다. 나중에 강희가 소어투를 처리하는데, 소어투와 관계가 좋았던 윤잉은 처벌하지 않는다. 그저 그를 연금했을 뿐이다. 종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석사건은 수수께끼의 사건이다. 즉, 도대체 건륭이 말한 것처럼 그가 모반을 꾀했을까? 이것은 좀더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홍석의 개인신분은 그를 비극으로 몰고갈 운명을 결정했다. 즉, 그의 신분 자체가 건륭에게 위협적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