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산첨자(山尖子) 

 

왜 조조묘를 "인산위체(因山爲體)"묘라고 하는가?(인산위체묘는 산에 구멍을 뚫어서 관을 모신 형태의 능묘). 근거는 도대체 있는 것인가? 있다면 얼마나 있을까? 아래에 그 증거를 열거하니 참고하기 바란다:

 

1. "서원(西原)", "서강(西岡)"의 증거

 

'서원'은 조조의 <종령(終令)>에서 말한 "서문표사(西門豹祠) 서원(西原)위의 수릉(壽陵)" 이라는 내용의 그 '서원'이다.

<한곡(漢曲)>의 해석에 따르면, "원(原)은 원(源)의 고자(古字)이다. 수원(水源)은 물이 흘러나오는 첫머리의 땅이다. 회의: 소전자형. 샘물이 산언덕에서 솟아나는 모양을 본 땀. 종창(從廠, han); 산언덕의 석혈형태임. 본의: 수원. 원천. <설문해자>에는 "원(原)은 '수천본(水泉本)'이다" 라고 되어 있음. 그러므로 수계의 원천 혹은 용맥의 원천이라고 해석할 수 있음.

 

'서강(西岡)'은 조조의 <유령(遺令)>에 나오는 "업의 서강(西岡)위에 매장하라"에서 가리키는 '서강'이다. <설문해자>에는 "강(岡), 산척(山脊, 산마루)이다." 즉, 산맥을 가리킨다.

 

서원이 가리키는 것은 한 장소이고, 서강이 가리키는 것은 한 지방일대이다. 서원은 상류에 있어 '서문표사와 가까이' 있을 수가 없다; 서강은 하류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서문표사와 가깝다'고 할 수가 있다.

 

만일 우리가 정확하게 조조가 말한대로라고 한다면 '서원'과 '서강'은 같은 장소를 가리키지, 두 장소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원'자가 편평하고 넓은 들이라는 의미의 '원'은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보면 위에서 본 서원, 서강의 해석이 정확하고 모두 산지(山地)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2. "산아(山阿)"의 증거

 

조비의 <무제애책문>에 보면 "기차궁정(棄此宮庭), 척피산아(陟彼山阿)"에서 말하는 '산아'이다. 조비는 조조묘의 산아지형을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 조조묘는 <종령>, <유령>에 따라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산아'는 '구아(邱阿)'와 같지 않다. 사전에는 '구아'라는 말이 있다. 조비가 말한 '산아'는 평원지형을 배제할 수 있고, 구아지형도 배제할 수 있다. 이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산아는 '비인산(非因山)'의 조조묘를 논증할 때 뛰어넘기 불가능한 하나의 장벽이다.

 

3. "묘도(墓道)"의 증거

 

조비의 <무제애책문>에는 조조의 묘도에 대하여 썼다: "복장기종(卜葬旣從), 대수기통(大隧旣通), 만만장야(漫漫長夜), 요요현궁(窈窈玄宮)". 이는 조조의 수동묘도의 유암(幽暗)과 만장(漫長)을 표시하고 있다; 조식의 <무제뢰>에는 "요조현우(窈窕玄宇), 삼광불석(三光不晰)" 역시 조조묘도가 심원,유암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조조묘의 긴 터널형 묘도는 아마도 인산묘중에서도 선례가 없는 것일 것이다. 예를 들어, 하북 만성의 유승묘, 산동 구룡의 노왕묘등은 모두 유암하나 만장하지는 않다는 느낌이다. 유암한 것은 묘문의 안쪽이 그렇고, 묘도는 직삭(直削), 평진(平進), 노천(露天)식이다.

 

그러한 묘도로는 아무리 깊고 길어도 '만만장야'라는 느낌은 없을 것이다. 이런 묘도는 평원에 깊이 팠을 때 가는하고 그렇기 때문에 기울어진 내리막묘도가 많다.

 

또 다른 황장제주의 수혈식 묘도를 보면, 더더욱 만장, 요조의 느낌은 없다. 그래서, 조조묘는 모도로 볼 때, 인산묘의 묘도이다. 내리막길형의 묘도나 황장제주형의 묘도는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4. 조비묘와의 비교논증

 

조비의 <종제(終制)>를 가지고 조조의 <종령>을 해석하고, 다시 조비묘와 조조묘의 실제방식을 비교하면, 우리는 양자간에 고도의 일치성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조의 "고자징자(古之葬者)"는 바로 조비가 말한, "요장곡림(堯葬谷林), 우장회계(禹葬會稽)"이다; 조조의 "인고위기(因高爲基)"는 바로 조비의 "인산위체(因山爲體)"이다; 조조의 "불봉불수(不封不樹)"는 바로 조비의 "무위봉수(無爲封樹)"이다. 실제 방식도 양자는 모두 묘제를 지내지 않고, 모두 와기를 염했고, 금옥을 넣지 않았다. 모두 공개적으로 장례를 지냈고 묘지를 공개하지 않았다는 등등. 모두 그들간의 일치성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보면, <종제>의 행문격식은 완전히 조조의 <종령>의 틀을 가져와서 쓴 것이다. 조조묘에서 한 것을 조비묘에서도 그대로 따라했다. 이것들을 보면 조조묘가 '인산위체'를 했고, 조비요가 이를 다라 '인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조비묘는 인산이라고 생각하지만, 조조묘는 인산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조조의 <종령>에서 이를 명확히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의로 '산'이라는 글자를 회피하였기 때문이다. 그 뜻은 묘의 장소를 노출시키지 않고, 비장을 통하여 매장장소를 숨기고자 했기 때문이다. 조조의 <유령>에서 다시 한번 연막탄을 뿌렸다. '서문표사와 가깝다'는 것이 큰 미혹작용을 한 것이다.

 

조비인산묘는 그 자신이 새로 창작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명확히 잘못된 것이다. 조비의 강산사직 및 문신무장등은 모두 부친 조조로부터 넘겨받은 것이다. 조조묘 및 대신의 배릉등도 모두 조비가 처리했다. 묘장방면에서 조조와 다르게 할 수 있겠는가? 조조보다 등급을 더 높게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조비의 <종제>는 그가 등극한 후 2년째 되던 해에 반포한 것이다. 짧은 준비 시간으로 볼 때 그는 일찌감치 이를 준비했다고 보아야 한다. 거기에 조조묘의 근 이천년역사를 보면 그의 묘 및 배릉은 하나도 노출되지 않았고 도굴되지 않았다. 이는 조조묘에 일찌감치 만전의 대책을 세우고 완벽하게 숨겨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조조시부(詩賦)에서의 증거

 

실제경관과 대조해보면 조조가 쓴 7수의 '유산시' <정렬>, <기출창>, <맥상상>, <추호생>등은 완전히 그의 묘의 지리 및 경관의 각종 묘사라고 볼 수 있다.

그중 <정렬>이라는 시는 감히 조조의 시부버전의 "종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상곤륜거(思想崑崙居)" 이는 암암리에 '서원'의 소재를 가라킨다. 조조가 쓴 '곤륜'이라는 것은 중국의 산들 중 조종(祖宗)이다. 그러므로 업의 서쪽에 있는 뿌리가 되는 조산(祖山)의 대칭이라고 볼 수 있다. 조조묘는'조산'을 등지고 있다는 것이다.

"회계지분구(會稽之墳丘)" 이는 조조묘가 '인산위체'라는 것을 가리킨다. 우임금이 회계산을 자신의 분구로 삼은 것처럼.

7수의 '유산시'중에서 '곤륜'은 계속되는 주제어이다. 조조가 서릉의 묘를 묘사한 대표적인 단어이다. 몇개으 시에서는 묘의 실제경치에 대한 여러 번의 묘사가 실려 있다.

 

6. 조비 '탐릉(探陵)'의 증거

 

조비의 <맥상상>은 그가 개인적으로 부친의 묘를 찾아갔을 때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고향(棄故鄕), 이실댁(離室宅), 원종군려만리객(遠從軍旅萬里客)

피형극(披荊棘), 구천맥(求阡陌), 측족독궁보(側足獨窮步), 노국작(路局苲). 호표호동(虎豹嗥動). 계경금실(鷄驚禽失), 군명상색(群鳴相索). 등남산(登南山), 내하도반석(奈何蹈盤石), 수목총생욱차착(樹木叢生郁差錯)

침호초(寢蒿草), 음송백(蔭松柏), 읍체우면점침석(泣涕雨面沾枕席), 반여단(伴旅單), 초초일영락(稍稍日零落), 추창차자련(惆悵且自憐). 상통석(相痛惜).

 

이 시의 단순한 내용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조비가 형극을 지고 논밭을 지나 반석을 건너고 남산을 오른다. 산위에 올라보니 단지 쑥풀만 있어, 소나무그늘아래서 통곡을 한다. 그 후에 날이 지기 전에 '서로 안타까워한다'는 마음으로 산을 내려오지 못한다. 이 시는 일인칭으로 쓰였고, 시 안에 '반려단'이라는 표현이 있을 뿐, 다른 사람이 같이 갔다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서로 안타까워한다(상통석)"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면 누구와 함께 '통석'하는 것인가. 왜 상대방인물을 쓰지 않았는가? 이 내용을 보면 그가 부친릉을 찾아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머지는 쉽게 이해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를 조비가 부친릉을 찾아갔을 때의 광경이라고 본다. 그의 부친릉은 '산' 위에 있다.

 

7. 조식 '망릉(望陵)'의 증거

 

조식도 부친릉과 관련된 몇 개의 시부를 남겼다:

<고식행>에서는 부모가 '서악(西岳)'에 있는 것을 그리워한다고 썼다: 서악은 서쪽의 높은 산을 가리킨다.

<원유편>에서는 '곤륜본오댁, 중주비아가"라고 하였는데, 이는 부친릉이 '곤륜'에 있고, 중주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금석고이창. 일월동광화. 제년여천지. 만승안족다"라는 것도 조조묘가 '인산위체'하였음을 보여준다. 금석의 단단함이라든지, 천지와 함께 한다든지 만세에 해칠 수 없다든지 하는 말들은 '인산위체'를 보여준다.

<절유부>는 조식이 동작대에서 서쪽으로 부모의 서릉을 바라보는 정경이 있다. "앙서악지숭잠(仰西岳之崧岑), 임장부지청거(臨漳滏之淸渠).관미미이무종(觀靡靡而無終).하묘묘이난수(何渺渺而難殊)." 여기의 '서악'은 <고식행>과 마찬가지로 서릉의 소재지이다. 그리고 서악은 장하와 부양하의 사이에 있는 일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작대와 서악의 거리가 어느 정도 된다는 것도 보여준다.

 

이들 서릉에 대한 묘사는 모두 산 위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8. 육기 <대묘부>의 증거

 

육기가 조조묘를 묘사한 것을 보면 "둔송객어산족(屯送客於山足), 복연도이곡지(伏埏道而哭之)"에 나오는 '산족'은 조조묘의 지형특색을 묘사한 것이다. 산족은 산각(山脚)으로 산아(山阿)의 산각이다.

 

9. 이세민 <소산부>의 증거

 

육기의 <대묘부>가 사람을 중심으로 썼다면, 이세민의 <소산부>는 묘를 중심으로 썼다. 가장 먼저 조조묘의 지형모습에 대하여 상세히 묘사한 것은 조조부자를 제외하면 이세민이다.

 

<소산부>는 처음에 먼저 조조에 대하여 쓴다. 그리고 조조묘의 풍경을 쓰는데, "항미산어기체(抗微山於綺砌), 횡착령어단지(橫捉嶺於丹墀), 계일위이건지(啓一圍而建址), 숭수척이성배(崇數尺而成坯), 기무수치시세(旣無秀峙之勢), 본핍운하지자(本乏雲霞之資); 승추우지잔류(承墜宇之殘溜), 괘저공지단사(掛低空之斷絲)".. 그 뜻은 아름다운 벽돌로 쌓아서 낮은 산의 높이를 보여주고 묘앞에는 옆으로 언덕이 가로지른다. 이같은 한줌도 안되는 땅을 골라서 묘지로 삼았으며 수척높이의 묘구를 만들었다. 수려한 기세는 없고, 구름과 안개가 있는 신비로운 장소도 아니지만, 마치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는 것같고, 낮은 하눌에서 날아다니는 것처럼 걸려 있다.

 

결국, 이세민의 이 부를 보면 각종 지형특징이 업성 서강의 어느 곳과 부합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곳이 바로 조조의 묘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