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악남(岳南)

 

 

 

1

 

필자가 혁련발발의 신비한 매장장소 - 가평릉(嘉平陵)을 알게 된 것은 이미 많이 늦었다. 그가 사망한 후 1580년이 지난 이후이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이 흉노대선우의 능침을 알게 된 것은 2013년 9월 27일 그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던 오전이었다. "대도건곤, 미려연천(大道乾坤 美麗延川) 명가채풍단(名家采風團)"의 일원으로 동행들과 함께 차를 타고 연천현(延川顯) 현성의 남쪽 30킬로미터에 있는 양가을대진(楊家圪臺鎭) 고리촌(古里村) 동남쪽 백부도사(白浮圖寺) 유적지 앞에 있는 산강대지(山崗臺地)로 갔다.

 

차에서 내려서, 사방을 돌아보니, 첫번째 느낌은 환경이 올때 보넌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더더구나 이전에 상상했던 섬북고원(陝北高原)의 황토로 덮여있고, 질풍이 날카로우며, 모래바람이 하늘을 뒤덮은 모습과 거대한 반차(反差)가 있다. 비록 주위에는 여전히 골짜기와 언덕이 분포되어 있지만, 와호복호와 같이 시야를 가리지 않고, 평탄하고 개활하다. 먼 산과 가까운 언덕은 녹색으로 덮여 있다. 거기에는 연천 특산의 대추나무로 가득하고 중간에는 다른 과실나무와 이름을 모르는 수목이 자라고 있다. 중원복지의 가을과 아주 유사했다. 놀라는 와중에, 가이드 아가씨가 큰 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앞의 양쪽 멀리 보십시오. 왼쪽의 높은 산은 청룡이고, 오른쪽은 백호입니다. 고대의 풍수학의 이론에 따르면, 이곳은 와호장룡의 땅입니다. 일대효웅 혁련발발의 능묘가 바로 앞에 있습니다. 모두 저를 따라가서 한번 보시지요."

 

사람들은 청석벽돌을 깐 좁은 길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광활한 산강대지에는 초목이 무성했다. 마치 야생의 갈대와 같았는데, 실은 한망(寒芒)이라고 부르는 식물이 가득 자라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의 무릎보다 높으며, 면화덩어리같은 화서(花序)는 바람에 따라 흔들렸다. 들꽃과 함께 한무리 한무리의 꽃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이때,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니, 황사바람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푸른 하늘과 들판이 보이고, 구름이 오고갔으며 먼산과 가까운 곳이 모조리 파랬다.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소매에 향기를 가득 몰고 왔다. 이곳은 확실히 하늘과 땅이 만들어낸 풍수길지이다. 풍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 넓다란 산강대지를 걸으면, 산천초목에서 밀려나오는 그 말로 다할 수 없지만 느낄 수는 있는 신비로운 기상과 호호탕탕한 위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고 풀이 흔들리는 와중에, 높고 큰 흙무더기가 돌연 눈 앞에 나타났다. 고대 북방유목민족이 거주하던 원형의 천막과도 같았다. 흙무더기의 드러난 부분은 이곳이 인공건축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단지 천년의 비바람에 침식되어 이미 형편없이 무너지고, 대부분의 황토가 바깥에 드러나 있어서 마치 외롭게 황토고원에 서 있는 석은 나무가 마지막 바람에 황토흙 속에 묻히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잔존의 흙무더기의 사방에는 이름모른 관목이 자라고 있었다. 상반부에는 산조수(酸棗樹)가 자라고 있었고, 뱀이나 지네같이 생긴 흑황색이 섞여 있는 나무뿌리는 흙무더기에 자리잡고 자라고 있었다. 어지러운 가운데 황량하면서도 약간은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나타냈다.

 

가이드 아가씨에 따르면, 이 넓다란 대지(臺地)는 하나의 큰 산언덕(山崗)이라고 한다. 이 산언덕이 너무 커서, 마치 큰 코끼리가 청룡백호의 중간에 누워있는 것같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앞으로 가보니 더 이상 산처럼 느껴지지 않고 단지 놀고 넓다랗고 편평한 평대(平臺)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이 평대의 위에는 비옥한 토지가 잇어 초목이 자라는 양분을 주었고 보기에는 화북의 한 평원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이 평원의 양쪽은 강물이 흐른다. 강물은 구불구불 흘러서 멀지 않은 곳으 황하만(黃河灣)으로 간다. 이렇게 하여 산환수포(山環水抱)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좌우는 크고 웅장한 산봉우리로 남북은 트여 있어. 높은 산이 막는 것은 없다. 날씨가 좋을 때면, 산꼭대기에서 30킬로미터 바깥에 있는 연천현성을 볼 수가 있다. 대지에는 원래 능묘 7개가 있었다. 기세가 대단하고, 수목이 숲을 이루었다. 황가원림의 모습이었는데, 뒤에는 2개의 흙무더기만 남았고, 나머지 몇 개는 비바람에 씻겨서 갈수록 작아졌다. 1950년대, 인민공사와 생산대대가 성립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개의 크고, 다섯 개의 작은 흙무더기는 차례로 현지 농민들에 의하여 무너뜨린 다음 농사를 지었다. 지금은 단지 1개의 용두묘(龍頭墓)만이 비바람 속에서 힘들게 버티고 있다. 연천현 문화문물부서의 측량에 따르면, 이 잔존한 능묘의 봉토는 높이가 약 10미터, 바닥의 직경은 17미터, 주위는 약 60미터라고 한다. 흙무더기의 앞에는 석비가 하나 세워져 있는데, 정면에는 "가평릉비기(嘉平陵碑記)"라고 적혀 있고, 뒷면에는 능침주인의 평생을 소개한 글이 쓰여 있다.

 

기나긴 역사의 강물 속에서, 화하민족의 마음 속이 뿌리박은 유명한 고대제왕을 꼽으라면 원고의 삼황오제를 빼고는 진황한무(秦皇漢武, 진시황과 한무제), 당종송조(唐宗宋祖, 당태종 이세민과 송태조 조광윤) 일대천교 징기스칸, 그 밖에 머리에 쥐꼬리같은 변발을 땋고 매일 밤 잠도 자지 않고, '차(), 차"'같은 소리와 함께 TV 모니터에서 오가는 대청왕조의 몇몇 황제이다. 만일 필자의 눈앞에 있는 능묘주인을 얘기하자면, 아마도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낯설 것이다. 어쨌든 이 혁련발발이라는 사람은 그가 창립한 국가와 함께 성문의 대왕기가 변환하는 역사의 풍진가운데, 황하건곤만에서 일어났다 사라진 하나의 낭화(浪花)와 같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소멸하였던 것이다.

 

고증가능한 사료를 보면, 혁련발발은 자가 굴혈(屈孑)이고, 조적(祖籍)은 산서(山西)이며, 흉노족이다. 381년에 태어났으며, 부친 유위진(劉衛辰)은 일찌기 전진(前秦)의 서선우(西單于)이고, 척발위(拓拔魏)에게 살해된 후, 혁련발발은 남으로 내려가 후진(後秦)의 요흥(姚興)에게 의탁한다. 나중에 후진의 지절안북장군이 되어 삭방(朔方, 지금의 내몽골 항금기의 이북)을 지켰가; 407년, 혁련발발은 장인일 몰역간(沒亦干)을 죽인 후, 그의 부하병졸을 모아서 나라를 세워서 왕이 되고 스스로 대선우가 된다. 국호를 대하(大夏)라 한다. 연호는 전후로 용승(龍昇), 봉상(鳳翔), 창무(昌武), 진흥(眞興)을 쓰고, 유씨성을 혁련씨로 바꾼다. 413년에는 통만성(統萬城, 지금의 섬서성 유림지구 정변현 북백성자)을 쌓고 국가의 수도로 삼는다. 도성의 명칭은 통만성이라고 하는데, 이는 "통일천하(統一天下), 군림만방(君臨萬邦)"의 뜻이다. 지금의 섬서북부, 내몽고남부, 영하북부, 감숙일부를 지배했다. 418년 동진의 장안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 대선우는 대하천왕(大夏天王)으로 고치고, 국호를 하(夏)로 고친다. 한때 중원의 강자가 되어 전성기를 맞이한다. 407년부터, 혁련발발은 18년간 재위하고, 428년 8월 통만성 영안전(永安殿)에서 병사한다. 그 후에 가평릉에 묻히니, 향년 45세이다.

 

이 혁련발발 대왕의 비범하면서도 짧은 일생을 살펴보면,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그는 기민하고 용감하지만 성격은 잔폭했다. 민족의 생존공간을 쟁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걸었고, 또한 동족도 무수히 살륙한다. 그를 위하여 병기를 제조해준 공장은 병기를 완성한 후 반드시 죽임을 당했다. 죽은 자가 무수했다. 그의 성격은 포학한 외에 변태적이다. 그는 자주 혼자서 성위 혹은 언덕 위에 서서 활과 화살을 들고,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보이면 바로 죽였다. 신하들이 간언하면, 이를 비방으로 보고, 먼저 혓바닥을 자르고 나서 죽였다. 바로 이런 깡패같은 인물이 확실히 역사의 대혼란과정에서 휘황한 업적을 세운다. 417년 동진이 장안을 포위하고, 후진의 요홍이 투항하여 나라가 멸망한다. 혁련발발은 진나라군대의 유유가 병력을 회군하자 관중으로 남하하여 일거에 장안을 점령한다. 418년, 이 깡패는 패상에서 황제위에 오르고 연호를 창무로 바꾸고 다시 진흥으로 바꾼다. 여전히 수도는 통만성이고, 장안은 남도(南都)로 정하여, 태자 혁련괴(赫連璝)로 하여금 지키게 한다. 그리고 혁련귀를 "영대장군, 옹주목, 녹남대상서(領大將軍, 雍州牧, 錄南臺尙書)"등의 관직을 내린다. 몇년 후, 혁련괴는 전횡발호하고, 기염효장(氣焰囂張)하며, 아직 늙지도 않은 부친은 눈아래 두지 않았다. 혁련발발은 그를 싫어해서 혁련괴를 폐위시키고 다른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한다. 혁련괴는 그 소문을 듣고 반란을 일으킸으나, 동생인 혁련창(赫連昌)이 이끈 군대에 격패당하여 참수당한다. 혁련창이 새로운 태자가 된다. 425년, 혁련발발이 병사하고 시호는 무열황제가 되며 묘호는 세조(世祖)이다. 혁련창이 황위를 승계한다. 427년, 북위는 통만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다음 해 혁련창이 생포된다. 431년 하나라는 멸망한다.

 

2

 

혁련발발의 능묘 앞에 서니, 자연히 이 능묘주인과 그가 생존한 시대 그리고 이 단명왕조의 세속공명과 사후의 역사지위에 대하여 흥미가 일어났다. 가이드의 해설을 듣는 외에, 시시때때로 함께 온 학자들의 질문도 있었다. 대화과정에서, 한 역사학자는 이런 비유를 했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남겼고, 항우는 아방궁의 잿더미를 남겼고, 조조는 72의총을 남겼고, 징기스칸은 몇 자루의 매를 쏜 긴 활과 날카로운 화살을 남겼으며, 주원장은 산채로 사람껍질을 벗기는 제도를 남겼고, 주체(영락제)는 고공, 장릉을 남겼으며, 모택동은 대채(大寨), 대경(大慶)과 곳곳에 흩어져 있는 연창(煙窓), 연진(煙塵)을 남겼고, 혁련발발은 통만성을 남겼다. 이는 그리스 신전의 건축과 비견할 만하다. 역사가의 이 비유는 어떤 사람들이 듣기에는 자극적이지만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여겼다. 다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능묘의 주인인 혁련발발이 위대한 성을 남겼다는 것은 절대로 허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서.철불유호전(魏書.鐵弗劉虎傳)>, <진서.혁련발벌재기(晋書.赫連勃勃載記)>등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413년, 혁련발발은 질간아리(叱干阿利)를 대장(大匠)으로 삼아, 영북의 이하(夷夏)족 10만명을 삭방수의 북쪽, 흑수의 남쪽에 도성을 건축하게 하고 이름을 "통만"이라 하였다. "질간아리는 재주가 뛰어났으나, 잔인하고 가혹했다. 흙을 쪄서 축성을 할 때, 송곳을 찔러서 1촌이 들어가면, 이를 만든 자를 죽여서 그 시신을 쌓았다." 이 기록은 민간의 전설과 아주 유사하다. 혁련발발은 그의 심복인 질간아리의 지휘하에 먼저 황토고원의 진흙을 덩어리 하나하나 볶고 찌게 한 다음 계획에 따라 건축했다. 이 흙을 찐 성벽은 아주 잔혹하고 세심하고 심지어 못된 장난질 혹은 악의를 품은 품질검사를 거쳤다. 만일 검사자가 쇠송곳으로 찔러서 성벽으로 1촌이상 들어가면, 성을 쌓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고, 그의 시신까지 성을 쌓는데 썼다는 것이다. 수십년 내지 수백년, 1천년후, 세상사람들은 무수한 시신이 섞인 황토로 건축된 성벽이 동장철벽(銅墻鐵壁)과 같고, 견고하기가 칼을 가는 마도석으로 삼을 정도라는 것을 발견했다.

 

통만성의 건축은 6년이 걸렸다. 완공후, 비서감 호의주(胡義周)가 붓을 들어 글을 한 편 썼다. 글에서는 "고우은일(高隅隱日), 숭용제운(崇墉際雲), 석곽천지(石郭天地), 주면천리(周綿千里):"라는 말이 나온다. 비록 과장되긴 했지만, 성곽의 거대함과 견고함은 당시 북방에서 따라올 자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높고 고대한 성벽이 하늘과 땅에 연결되어 있고, 성안에는 "화림영소(華林靈沼), 중대비실(重臺秘室), 통방연각(通房連閣), 치도원원(馳道苑園)", 호화롭고 살기 편안한 모습이다. 이때의 통만성은 규모에 있어서나 배치 혹은 건축등의 방면에서, 모두 세계건축예술의 선구자였다. 그 전략적인 지위는 대하국의 성립과 발전에 대체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통만성은 그 시대 중앙아시아, 근동 내지 극동지구에서 역사상 가장 피를 좋아한 도시이다. 또한 세계인류문명사상 가장 위대한 성곽중 하나이다. 오늘날, 이 웅장한 왕성은 비록 이미 많이 파손되었으나, 여전히 기본적으로 초기 북방 소수민족왕국의 도성유적지로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유적지의 백색 성벽, 임입(林立)한 마면(馬面), 높은 각루, 독특한 '숭대비실' 구조 및 웅장한 궁전누관유적지는 분명히 이 "일통천하, 군림만방'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명명한 대하국 도성의 윤곽과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1996년, 통만성은 독특한 가치와 역사적인 지위로 국가중정문물보호단위가 되었다.

 

혁련발발이 이처럼 도성의 건축을 중시하여, 그 시대에 필적할 것이 없는 건축의 업적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영원한 서식지인 능묘지궁과 능원의 건축에 대하여는 어떻게 계획하였을까? 그의 능묘는 어디에 있는가? 영면하고 있는 지하현궁은 얼마나 호화로운 모습일까? 눈앞의 이 황토무더기에 매장된 것이 정말 일대웅주 무열황제라는 것인가?

 

역사가 세상 사람들에게 남긴 한 가지 사실은: 통만성을 얘기하는 것은 쉽지만, 가평릉을 얘기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혁련발발의 장지는 사료의 기재가 불분명하다. 명확히 기재된 것은 425년 팔월, 혁련발발은 잔인하고 피를 좋아하는 간웅, 효웅, 영웅의 '삼웅'이 혼합된 일생을 끝냈고, 통만성 영안전에서 죽었으며, 그후 가평릉에 묻혔다는 것이다. 전설이 섞인 일문(軼聞)들을 보면, 황위를 승계한 혁련창은 민중 2만5천명을 동원하여 가평릉을 파게 했고, 대하국의 거대한 인력물력을 들였다. 능이 완공되자 다시 7천명이 계오성(契吳城)에 있는 제묘(祭廟)를 만들게 했으며, 제사때 준마 수천필을 죽였다. 혁련발발이 매장될 때, 진보와 미녀외에, 대량의 세상에서 뛰어난 도창검극등 병기와 무수한 용맹하고 전투를 잘하는 위사들도 묻었다. 이들 위사와 미녀는 살아있는 채로 강제로 음산한 지하궁전으로 끌려 들어가서, 통곡과 애원 속에 문이 닫혔다. 이 건장한 남자들과 미모의 여인들은 이때부터 그들 생전의 주인과 함께 황토흙의 아래에 영면하게 된다.

 

<섬서통지> 권28 <사사일.사관부(祠祀一.寺觀附)>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연안부 연천현 백부도사는 현의 남쪽 육십리에 있으며, 절의 앞에 7개의 호(壕)가 있는데, 전해지기로 혁련발발이 이곳에 묻혀있닥 한다." 청나라 가경제때의 <연안부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혁련발발의 의총(疑塚, 가짜 무덤)은 연천현의 동남쪽 육십리 백부도사의 앞에 있다. 7개의 무덤이 있는데, 전해지기로 하왕(夏王)의 의총(疑塚)이라고 한다." 무덤의 북족 200미터 있는 곳에는 백부도사의 유적지가 있다. <연수람승>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백부도사는 (연천)성의 남쪽 칠십리에 있다. 전해지기로 혁련발발의 매장지이다." 전해지기로 혁련발발의 후손은 이곳에 백색의 부도사를 건립했다고 한다. 절의 앞에 있는 대기(臺基)에는 전후로 혁련발발의 후손들을 매장하는데 모두 7개의 무덤이다 명나라때는 2개만 남았다. 당시 사람들은 쌍총산(雙塚山)이라고 불렀다. 연천현지에 따르면 이를 "쌍봉횡대(雙峰橫黛)"라고 칭하여 한때 연천팔경중 하나로 되었다. 이 능묘군의 북쪽은 강물과 만나는 곳이고, 동,서,남의 세곳은 산이 둘러싸여 있다. 점유면적은 3만평방미터이다. 명나라때이후에 2개의 무덤이 있는데 서로 18미터 떨어져 있었다. 무덤은 타원형이고, 높이는 10미터, 직경은 긴 곳이 17미터, 짧은 곳이 9.6미터이고, 둘ㄹ게는 60미터이다. 무덤의 북쪽 200미터에 백부도사의 유적지가 있다. 능묘군과 마찬가지로,  백색의 부도도 겁난을 여러번 당했고, 절은 문혁때 철저히 파괴된다. 최근 들어, 촌민은 다시 원 부지에 간단한 묘우(廟宇)를 건설했다. 1991년 9월 연천현인민정부는 현급중정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해서, 보호하고 있다.

 

3

 

여기서 보충해야 할 것은, 혁련발발의 능묘가 소재한 위치는 연천현 남쪽의 한 곳 이외에 여러가지 추단과 주장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연쳔현내에 있는 것은 '의총'이라고 한다. 진정한 능묘는 통만성의 서쪽에 있다고 한다. 추단이유는 <원화군현지.사>의 기록이다: "발발의 묘는 (삭방)현 서쪽 25리에 있고, 수나라때 백성진(白城鎭)에 두었다." 이 설은 한 때 섬서성고고연구소 연구원 대응신(戴應新) 선생에 의하여 의문이 제기된 바 있다.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섬서사범대학 서북역사환경및경제사회발전연구센터 주임 후용견(侯甬堅)이 고찰해본 후에, "혁련발발의 능묘에 관하여 문헌의 기재는 칠령팔쇄(七嶺八碎)하다. 유적지에 근거하여서 판단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판단하기 쉽지는 않지만, 호사가들은 판단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어, 섬북 유림지구의 민간고고학자인 호립도(呼立濤) 선생은 수십년에 걸쳐 유림의 내외 상하에 단서를 구했다. 그는 자신이 혁련발발의 진정한 능묘를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소재 능묘지구는 유림시 유양구 마황량향을 핵심으로 200평방킬로미터이다. 이는 유럽 소국인 리히텐쉬타인의 면적을 넘어선다." 호림도에 따르면, 이 땅은 음양풍수팔괘설에 부합하고 정통의 제왕능묘를 건설할 곳이라고 한다. 이 설은 비록 신선하기는 하지만, 학계의 컨센서스를 얻지 못했고, 진위는 여전히 만능의 하느님만 알 수 있을 뿐이다.

 

호립도가 주장하는 대발견을 매체가 주목할 때, 갑자기 방가구(方家溝)라는 설이 나타났다. 이 방가구는 도대체 어느 곳인가? 오늘날 감숙성 진원현 경내에 있다. 이 땅은 한 서안학자 요문파(姚文波)의 고향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자신이 고향에 돌아갔을 때 사람들이 "흑검천자분(黑臉天子墳)"을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요씨는 이 전설에 근거하여 현지의 사지(史誌)를 조사한다. 마침내, <중수진원현지>의 <읍지(揖誌)>부분에서 흔적을 찾아냈다. "혁련발발 묘지는 현의 남쪽 이십리, 남천 방가구평(方家溝坪) 침두산(枕頭山)의 아래에 있다. 무덤은 극이 높고 크다. 거의 주위의 산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흑검천자분이라고 부른다." 요씨는 현지인들이 말하는 "흑검"이 "혁련"의 해음(諧音, 같은 음을 다른 자로 쓴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방가구의 무덤이 바로 역사상 대명이 자자한 혁련발발의 진정한 무덤 가평릉이라고 본다.

 

이 주장에 대하여, 학술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연구자는 혁련발발의 주요 창업지구는 통만성이고, 그 능묘도 주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감숙 혹은 연천 등지로 간다고 한다면 그것은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게다가 고대에는 운수가 곤란하고 교통이 불편했다. 죽은 사람을 멀리 옮기는 것은 그다지 상리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감숙경내에 있다는 설은 완전히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의문이 있는 연천현의 지리위치를 보면, 통만성에서 직설거리로 거의 2백여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당시 통만성에서 연천까지의 가장 지름길로 가더라도 미지, 수덕, 청간에서 연천까지이다 이렇게 하면 300여킬로미터이다. 당시의 운수조건으로 보면 이렇게 장거리를 운구한다는 것은 아주 곤란하다. 바로 섬서성 고고연구소 연구원 대응신이 <대하통만성지고고기>라는 글에서 의문을 나타냈다: "통만성에서 근 300킬로미터 떨어진 곳을 간다는 것은 실로 너무나 멀다. 확실히 아니다." 그래서, 호사가들은 연천현 백부도사의 묘장은 혁련발발의 태자 혁련괴의 묘라고 본다.

 

이상의 여러가지 설은 각자 나름의 도리는 있다. 그러나, 자세히 연구해보면, 문제삼을 만한 부분이 적지 않다. 고대제왕의 매장장소는 주로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방면의 종합상황을 고려하여 정한다. 절대로 수도에서 거리가 가까운지 먼지를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 진시황시대에서 그 이후로 보면, 함양은 진시황릉에서 70여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개봉부 공성 송릉묘군은 200킬로미터에 달한다. 베이징에서 존화의 청동릉, 이현의 청서릉은 각각 12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제왕의 능묘와 살아있을 때의 소재지인 도성의 거리는 정해진 숫자가 없다. 그렇다면, 대하국시대에 통만성에서 200여킬로미터 떨어진 연천군을 혁련발발의 능침의 장소로 하는 것은 그럴 듯하다. 어떤 방면에서 살펴보더라도 큰 틀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하물며 아들의 능묘를 이 곳에 두었다면, 부친의 능묘가 왜 불가능하단 말인가? 만일 그 아들의 사지와 연천이 가까워서 가까운 곳에 묻었다면, 이땅의 7개의 능묘군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만일 조상릉의 소재지가 아니라면, 기타 자손들을 여기에 묻을 필요가 있을까?

 

남도(南都)의 기자인 고룡(高龍) 선생에 따르면, 그는 2012년 여름 연천현 가평릉 소재지를 조사했을 때, 현지의 두성량(杜成諒)이라는 현지의 60세된 촌민과 만나서 한담을 나눈바 있다고 한다. 두성량은 개략 1974년에서 1975년까지 대시 위의 7개의 능묘는 연이어 도굴당해서 파헤쳐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커다란 도굴동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어떤 도굴동은 능묘의 꼭대기 부분에 있고, 어떤 것은 측면에 있다고 했다. 부근에 호기심이 있는 촌민들이 줄을 서서, 도굴동으로 들어가서 가장 큰 능묘를 살펴보았다. 두성량도 뛰어들어가서 살펴보았다. 비록 한낮이었지만, 묘혈은 칠흑과도 같았고, 손전등을 들고 들어갔는데 그는 이 묘혈은 지하의 섬북요동(陝北洞)에 묻혀 있었고, 요동은 돌맹이로 쌓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벽돌로 쌓여 있었고, 벽돌은 백석회로 접착되어져 있었다. 지하의 요동은 2미터 높이였고, 3미터 깊이였다. 일반적인 요동보다 거대했다. 올라온 후에 묘혈의 거대함 외애 두성량은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안에는 무슨 보배도 없었고, 진흙도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모든 비빌은 도굴범에 의하여 깨끗이 약탈되어 버렸다.

 

두성량이 말한 이 묘혈은 산서 태원의 누예묘(婁睿墓)와 아주 비슷하다. 1979년, 고고인원이 태원시 남교구 왕곽촌에서 발굴된 누예(531-570)묘를 정리 발굴했다. 이것은 중국 북제(北齊)시대의 고고학에서 중대한 수확이다. 묘주는 북제 동안왕이며,북제 무평원년에 매장되었다. 각종 부장품 870여건이 출토되었고, 그중 도용(陶俑)이 600여건이다. 그 형태, 복식과 제조방법은 모두 특색이 있다. 이 묘의 최대 수확은 중국예술사상 보기드문 북제벽화가 발견되어 북제미술의 공백을 메워주었다는 것이다.

 

누예가 매장된 시기는 혁련발발이 매장된 시기보다 145년이 늦다. 그리고 서로 다른 문화계통의 사람이다. 양자의 묘혈의 구조와 배장품은 당연히 같을 가능성이 적다. 다만 서북지구에 국가를 건립한 제왕급의 인물이라는 점은 공통된다. 서로 같은 점이 적지 않을 것이다. 누예묘에서 출토된 기물을 보면 혁련발발의 능묘 지하궁전의 대체적인 점을 추단할 수 있고, 최소한 계시는 얻을 수 있다. 두성량에 따르면, 부근 촌의 노인들은 소문을 계속 들어왔다고 한다. 산꼭대기에는 금면양(金綿羊) 한 마리가 매장되어 있고, 석조(石槽)를 가득채운 금원보(金元寶)도 매장되어 있다고. 능묘의 곁에 있는 공터에서 두설양은 둘로 갈라진 다리뼈해골을 발견한 적이 있다. "현대인들의 다리보다 많이 작았다." 현지의 전설에 따르면, 혁련발발이 이 곳에 매장된 후, 능을 만든 장인들과 그를 매장한 사람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개략 1967년, 능묘의 북쪽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백부도사의 곁에서, 두성량은 도굴범이 발굴해낸 근 20구의 죽은 사람 해골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이 두성량이라는 촌민의 말을 믿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모조리 믿을 수도 없다. 예를 들어 도굴에 관해서, 필자는 채풍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게 친히 이 능묘의 동쪽, 봉토무더기의 가운데에 위치한 둘레 약 1.5미터, 깊이를 알 수 없는 대형 도굴동을 참관한 바 있다. 이 도굴동의 위치는 두셩량이 말한 "도굴동은 능묘의 꼭대기"에 있었다"는 것이 정확하지 않다는 점을 말해준다. 필자의 수십년 고고 및 도굴사 연구 경험에 따르면, 아주 재미있는 문제가 있다. 도둘자는 묘혈의 측면에서 아래로 동굴을 뚫는 것이다. 혹은 먼 곳에서 가로로 동굴을 파서 지동과 관의 내부로 들어간다. 도굴범이 직접 무덤의 꼭대기에서 구멍을 뚫어서 내려가는 경우는 드물다. 이렇게 하려면 공사량이 많아질 뿐아니라, 심각한 것은 봉토를 잃게 되면 무게를 버티지 못하게 되어 계속 무너지기 때문에, 도둘에 대하여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측면에서 들어가거나 먼 곳에서 구멍을 파는 경우에는 그런 문제가 없다. 최소한 꼭대기에 구멍을 내는 것처럼 심각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두성량의 주장은 의심할 부분이 있다. 그가 잘못 보았거나 잘못 기억했다거나 아니면 보지는 못하고 그저 소문으로 들은 것인데 잘못된 것일 것이다. 동시에 두성량 노인이 말한 1974년부터 도굴범의 주목을 받아 7개의 무덤이 연이어 도굴되었다는 설도 정확하지 않다. 이것은 봉토가 없는 무덤이므로 도굴범이 찾을 수 없거나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때문만이 아니라, 1974년은 아직 문혁기간이다. 계급투쟁관념이 아직 한창일 때이고, 사회치안관리가 엄격할 때이다. 모든 촌에는 민병 심지어 총을 휴대한 '기층간부"가 민병초소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도굴점이 혁련발발의 7개무덤을 파헤치면서 발견되지 않거나 붙잡히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다른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은 당시는 아직 소위 "개혁개방"시대가 아니고, 국문을 개방하지 않았을 때이기 때문에, 도굴문화재는 사줄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진정 문와재의 밀수가 시작된 것은 1980년대의 일이다.

 

눈앞의 이 천년풍우를 거치고 남아있는 능묘의 봉토와 봉토곁의 도굴동을 보면서, 현지의 인문지리 및 역사사료기술 그리고 필자 본인의 수십년에 걸친 능묘고고 및 도굴에 대한 연구를 종합하면 이렇게 단정할 수 있다. 이 봉토의 아래에 있는 궁전 혹은 묘혈의 속에 여러번 도굴당하고, 진귀하고 옮기기 쉬운 부장품은 거의 모두 도굴되었을 것이다. 나머지 6개의 능묘의 운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은 큰 불행이다. 다만, 비록 7개의 무덤이 모조리 도굴당했지만, 이것은 연구자들이 다른 방법과 증거로 이 능묘의 진위를 연구하고 확실하게 혁련발발의 가평릉이라고 단정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상응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 지리위치와 환경론으로 보면, 필자는 가평릉의 가장 가능성있고 가장 이유있는 소재지는 바로 이곳의 외로운 흙무더기라고 생각한다. 진나라때의 저명한 학자인 곽박의 불후의 명작 <장서(葬書)> 그리고 이 대작에서 말한 "삼년심룡, 십년점혈(三年尋龍, 十年點穴)"과 "혈(穴)이라는 것은 산과 물이 서로 만나고, 음과 양이 서로 엉켜 있으며, 정이 미치는 곳이다."라는 등의 점혈지도와 이 곳의 위치환경은 아주 부합한다. 고서에 쓰여 있는 소위 "산환수포필유대발자(山環水抱必有大發者)"라는 것은 유사한 산천경물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고대 감여학(풍수학)의 이론으로 가지고 근경을 '형"이라 하고, 원경을 "세"라고 한다. 여기서 먼곳의 "세"는 죄우에 길게 뻗은 청룡, 백호이고, 근"형"은 수려하고 울창한 산강대지이다. 이 산강대지는 또한 두 개의 먼 산과 서로 통하며 협곡의 물과도 이어져 있다. 그리하여 전체적인 틀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산세와 수세가 만나서 서로 휘둘러 돌아가는 산강대지는 생명이 살아나는 생기를 품고 잇는 것이다. 층층봉곡, 산강과 협간을 흐르는 물은 교상휘영(交相輝映)하고 있어, 풍수학에서의 '절수(節數)"를 형성했다. <천보조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절수다시부귀구(節數多時富貴久), 일대풍광일절룡(一代風光一節龍)"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맥'의 모습이다. 더더욱 하늘과 땅이 만든 것같은 능묘를 만들기 좋은 상승의 길지이다. 소위 하늘과 땅의 크게 아름다운 곳이 바로 이 곳이다. 만일 당시 혁련발발이 그의 능묘를 이 산강대지위에 세우지 않았다면, 우리가 오늘날 오히려 불가사의하게 여길 정도이다.

 

소개하는 바에 따르면, 연천현정부는 이미 이 곳의 인문환경과 문화유적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부근의 토지를 징용하여, 통일적으로 혁련발발능묘관광구를 조성할 예정이라고 한다. 동시에 황하건곤만지대와 함께, 종합적인 관광지구를 형성할 것이라고 한다. 필자가 참관하고 조사하면서 느낀 감상으로는 관광도 좋고 아주 중요한 것이지만, 이 짧은 글을 마무리지으면서 한 마디 언급해두고 싶은 말이 있다: 절대로 관광을 위하여 생태환경이나 겨우 남은 약간의 문화유적지를 파괴하여서는 아니된다. 쌍방은 보전하고 다시 힘이 남으면 지상유적지와 지하문물에 대하여 적절히 보호조치를 취해야 한다. 계속적인 손실과 파괴를 막아야 한다. 그러면 현지정부의 공로가 막대하다고 할 것이다. 이 능묘의 음산한 지궁에 여러번 도굴점에게 놀란 혁련발발 노선배는 다행히도 선무후후한 '삼개대표' '과학발전관' '군중노선'이 성행하는 좋은 시절을 만나서, 안심하고 편안히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