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만루(金滿樓) 

 

 

 

최근, 섬서 정변현(靖邊縣)의 통만성 유적지내에서 의외로 규모가 거대한 건축기지가 발굴되었다. 4면의 기울어진 토목구조형식은 당시 높은 누각식건축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추측으로는, 이 건축의 건조연대가 당말오대시기일 것이라는 것이다. 통만성은 이전에 "흉노고도(匈奴故都)"로 알려져 왔기 때문에, 이번 고고학적 발견은 아마도 완전히 인식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고고학발굴을 주재하는 섬서성 고고연구원 연구원 싱푸라이(邢福來)에 따르면, 통만성은 십육국시기에 건축되기 시작했고, 이 구역은 당나라말기 척발사공(拓跋思恭)의 "정난군(靖難軍)'의 지배범위에 들어 있었다. 치소(置所)인 하주(夏州)가 바로 오늘날의 통만성이다. 이를 통하여 통만성은 명백히 역사적으로 시기가 나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이전은 모두 '흉노고도'라는 말로 자리매김할 수 없는 일이다.

 

이야기는 당시의 유명한 유목민족 흉노부터 시작된다. <사기.>, <산해경>등 옛 서적을 보면, 흉노인은 황제의 후손이고 하인(夏人)의 후예이다. 상이 하를 멸한 후 북쪽으로 도망친다. 자손이 번성하여 흉노가 된다. 서주때로부터, 이들 조융(條戎), 견융(犬戎), 귀방(鬼方)등의 명칭으로 불리던 유목민족은 중원왕조와 충돌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서주는 견융에 멸망당한다. "호복기사(胡服騎射)"의 조무령왕이 상대한 임호(林胡), 임번(林煩)은 흉노부락으로 보인다. 기원전3세기,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는 동시에 흉노도 북방에서 굴기한다. 그 선우의 중앙왕정 및 동부좌현왕, 서부우현왕은 공도으로 아랄해부터 장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한다.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있을 수는 없다. 양강은 반드시 서로 싸운다. 진시황때 몽염에게 명하여 홍노를 공격하게 하고, 하투를 회수한다. "흉노를 칠백여리 쫓아냈고, 호인은 감히 남하하여 말을 기르지 못했다."

 

진왕조는 짧았다. 진정 흉노와 대규모 전쟁을 벌인 것은 한왕조이다. 한나라초기, 한왕신(韓王信, 韓信과 동명이인. 구분하기 위하여 한왕신이라고 함)이 흉노에 투항한다. 유방은 친히 대군을 이끌고 정복에 나선다. 적을 가법게 보고 너무 깊이 들어갔다가 흉노 모돈선우이 30만기병에게 백등(白登, 지금의 산서성 대동 동북) 에서 칠일밤낮을 포위당한다. 큰 손해를 본 후, 유방 및 나중의 한문제, 한경제등은 모두 화친정책을 써서 휴양생식한다. 한무제때에 이르러, 한나라는 비로소 전략적방어에서 전략적공격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기원전127년, 위청이 하투지구를 수복한다; 6년후, 곽거병이 하서주랑을 공격하여 취한다. 기원전119년, 위청곽거병의 연합군은 동서양로로 나누어 막북으로 진격한다. 위청은 흉노왕정을 소탕하고, 곽거병은 흉노를 북으로 낭거서산(지금의 몽골국 경내)까지 쫓아간다. 이 전투를 통하여, 선우 및 좌현왕은 동서로 도망다니고, 우현왕이 이끄는 부대는 한나라에 귀순한다. 그리고 감숙 무위, 장액 일대에 안치된다. 이것은 흉노의 첫번째 한화이다.

 

그후,흉노는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한다. 다시는 옛날의 위세가 없었다. 동한초기, 흉노는 남북 양부로 분열된다. 남흉노는 남하하여 한나라에 귀순하고, 나중에 하투지구에 안치된다. 이것은 흉노의 제2차 한화이다. 89년에서 91년까지 북흉노는 동한과 남흉노의 연합공격에 패배하여, 그중 일부는 서쪽으로 이주하여 동유럽으로 들어간다. 막북에 살던 사람은 선비등 기타 북방유목민족과 융합된다. 이제 중원왕조의 중대한 위협이 되던 흉노는 더 이상 총체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

 

동한말기, 남흉노의 수령이 한나라 승상 조조에게 투항한다. 조조는 그들을 5부로 나눈다. 서진의 '팔왕지란'후 남흉노 5부대도독 유연은 스스로 한왕(漢王, 역사에서는 전조(前趙) 혹은 한조(漢趙)라 한다)이라 칭한다.그리고 316년 장안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서진(西晋)을 멸망시킨다. 이때부터 중국역사상 민족간의 전쟁으로 가장 혼란스러웠던 '오호십육국'시대의 막이 열린다.

 

남흉노외에, 새내(塞內)로 이주한 흉노인은 선후로 도각호(屠各胡), 임송노수호(臨松盧水胡), 철불흉노(鐵弗匈奴)의 크게 3개의 중요한 분지집단으로 나뉜다. 도각호와 남흉노는 지금의 감숙, 섬서, 산서의 3개성과 내몽고 일대에 흩어져 살았다. '전조'멸망후, 임송노수호는 다시 장액일대에서 굴기하여 '북량(北凉)'을 건립한다. '북량'이 멸망한 후, 선비인과 흉노인이 융합한 후 탄생한 '철불흉노'는 유발발의 통솔하에 406년 대하국(大夏國)을 건립한다.

 

흉노와 한인의 혼혈아로서, 유발발은 스스로 흉노를 하후의 후예라 생각한다. 조상이 모친의 성인 유씨를 따른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유씨를 '혁련씨(赫連氏)'로 바꾼다. 그리하여 역사에서는 그를 '혁련발발'이라고도 부른다. 413년, 혁련발발은 질간아리(叱干阿利)를 어공대장(馭工大將)으로 삼아,10만의 백성을 이끌고 6년의 시간을 들여 통만성을 건설한다. 완공후, 통만성의 성벽은 높이가 10인(仞, 약18미터), 주위는 약 18리, 모두 4개의 출입문이 있고, 성내에는 황성이 있는데, 기둥과 서까래에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여, 화려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통만성에서 쓴 것은 "증토축성법(蒸土築城法)"이라고 한다. 즉 현지의 특유한 백점토(白黏土), 석영사(石英沙), 탄산칼슘을 부드러운 미자면(糜子麵)과 가축피를 섞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어고대장 질간아리는 사람됨이 포악하여, 공사품질을 점검할 때, 만일 송곳으로 찔러보아 1촌이상 들어가면, 바로 시공자를 죽이고 시신을 넣어서 성벽을 쌓았다고 한다. 이런 공포하에, 통만성 성벽은 "견고하여 칼과 도끼를 갈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아마도 이 성이 이처럼 열악한 환경하에서도 지금까지 보존된 윈인일 것이다.

 

당연히, 어떤 연구자는 이에 대하여 다른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타이완 학자인 진식인(陳識仁)은 이렇게 생각한다. 통만성 유적지의 흙은 주요성분이 석영, 점토와 탄산칼슘이다. 그 건축공법은 반드시 대량의 석회를 굽는 것을 거쳐야 한다; 생석회에 물을 넣어서 석회를 만들 때, 열기가 나온다. 온도가 올라갈 뿐아니라, 안개가 끼게 된다. 그래서 이 방법을 잘 모르는 역사학자들이 '증토축성'이라고 한 것이다; '송곳이 1촌을 들어가면 시공자를 죽여서 성벽을 쌓았다"는 주장은 최소한 현재까지 성벽내에서 인골이 발견되지 않았다. 세심한 관찰자에 따르면, 통만성 부근에 일종의 백점토가 있는데, 모래와 석회를 합리적인 비율로 섞으면 250호 시멘트의 경도가 나온다. "백성자"가 현재 회백색을 보이는 것은 아마도 이것때문일 것이다.

 

왕조의 장치구안은 성벽의 견고함에 있지 않고 인심에 있다. 혁련발발 및 그 후계자는 잔혹한 통치를 하여 결국 대하정권이 20여년만 유지한다.427년, 북위군이 통만성을 함락시킨다. 4년후, 대하의 수령 혁련정(赫連定)은 토곡혼부족의 포로가 되고, 하는 멸망한다. 통만성이 함락된 후, 근검절약을 숭상하던 북위 태무제 탁발도는 황성내에 극히 정교하고 문채가 있는 아름다운 건축을 본 후 참지 못하고 탄식한다: "한줌도 되지 않는 작은 나라가 이처럼 백성을 부렸으니,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호십육국' 시기는 '오호난화'로 불리기도 한다. 소위 '오호'는 흉노, 선비, 저, 갈, 강의 5개 유목,반유목민족을 가리킨다. 이 1,2백년동안 각 민족은 북방대지에서 전쟁을 계속했고, 이로 인하여 대규모이 인구이동과 혼동이 있었다. 나중에 북방을 통일한 북위와 수, 당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마 혈연이 혼잡된 현상을 보인다. 남북조 후기, 흉노후예가 건립한 각 정권은 차례로 멸망한다. 흉노인은 기본적으로 중화민족의 대가정에 융합되어 들어간다. 이제 민족으로서의 흉노는 점점 역사가 되어 버렸다.

 

혁련발발이 통만성을 만들 때, 현지는 물과 풀이 풍성했다. "임광택이대청류(臨光澤而帶淸流)". 이상적인 도성 부지였다. 다만 북위가 통만성을 함락시킨후, 성의 인구를 모조리 약탈하고, 주변에 군대의 유목장을 둔다. 원래의 농목업은 파괴적인 타격을 입는다. <수경주>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의 통만성은 "치첩수구(稚堞雖久), 숭용약신(崇墉若新)"이다 성의 보존은 상당히 완전했었던 것이다.

 

당나라초기, 삭방군의 장수 양사도는 통만성을 차지하여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키고, 국호를 양(梁)이라 한다. 당나라군이 그를 평정한 후 그 땅을 하주로 회복시키고 통만성을 주성(州城)으로 한다. 바로 이 시기에 통만성 일대는 유사(流沙)의 침습을 받게 된다. 당나라 함통연간 허당(許棠)은 은 <하주도중>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망망사막광(茫茫沙漠廣), 점원혁련성(漸遠赫連城)". 이 시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그런 상황일 것이다.

 

당나라말기의 '황소의 난' 이후에, 척발사공은 반란진압의 공로로 정난군절도사에 임명된다. 치소는 하주 즉 통만성이었다. 연구원 싱푸라이의 소개에 따르면, "당나라 중앙정부는 척발사공에게 '이'씨성을 하사하여 이사공으로 개명한다. 그리고 정난군절도사는 세습직이다. 그의 후손이 바로 이원호의 서하(西夏)에 이른다. 우리가 현재 서하라고 부르는 국가를 왜 서하라고 부르느냐 하면, 바로 그들의 조상이 동쪽의 하주 즉 통만성 일대에서 활동하였던 것과 관련있다."

 

북송초기, 통만성은 서하인들이 점거했다. 994년, 송군이 하주를 점령한다. 당항인들이 성을 차지하고 웅거할 것이 우려되어, 송태종은 백성을 이주시키고 성을 훼손시킨다. 통만성의 두도성(즉 외곽성)의 성벽을 이때 허물어진다. 현재에도 내성은 볼만하다. 아마도 지나치게 견고하여 부수기가 어려워서 지금까지 보존되었는지도 모르겠다. 1600여년의 역사풍상을 거친 후, 일찌기 사막에 둘러싸인 통만성의 웅자는 지금도 여전하다. 최근 들어 환경보호로 사막을 다스리고 관광개발을 하면서, 이 오래된 '흉노국도'는 아마도 새로 옛날의 광채를 되찾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