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젊어서 영명신무(英明神武)했던 당현종 이융기와 그와 마찬가지로 영명신무했던 증조부 당태종 이세민은 등극방식이 똑같을 뿐아니라, 중국역사상 마찬가지로 휘황한 태평성세를 만들었다. 바로 후세에 이름을 남긴 '정관지치'와 '개원성세'이다. 다만, 서로 다른 것이라면, 이세민은 다행히 후세에 칭찬을 듣는 천하제일의 현명한 황후 장손씨를 취하여, 이세민의 후궁이 역사상 가장 온화했던 후궁이 되었던데 반하여, 이융기는 불행히도 현명한 여인을 만나지 못했고, 자색은 뛰어나지만 후궁을 교란시킨 혜비 무씨를 취했다. 그리하여 이융기의 후궁은 시종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이융기의 후궁과 그의 조부인 당고종 이치의 후궁은 아주 유사하다. 이융기의 후기의 정무태만과 향락은 무혜비와 큰 관련이 있다.

 

무혜비(699-737) 부친은 항안왕 무유지(武攸止)이고 모친은 양씨(楊氏)이다; 그녀는 무측천의 손질녀이다. 부친 무유지가 요절하였기 때문에, 무측천의 비호를 받은 무씨는 어려서부터 궁에서 자란다. 무혜비가 어른이 된 후 자색이 뛰어나고, 노래와 춤을 잘 추었다. 그녀는 고모할머니 무측천의 아름다움, 총명함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의심많은 점이나 음독한 점도 물려받았다. 당현종이 즉위한 후, 무씨를 비로 삼고 그녀를 특별히 총애한다. 무씨는 총애를 믿고 교만했으며, 다른 비빈들을 무시했을 뿐아니라, 황후를 만날 때도 여러번 예의에 어긋나게 행동했다.

 

당현종이 황후 왕씨는 동주(지금의 섬서성 대려) 사람이다. 양 기주자사 왕신념의 후손이다. 이융기가 임치왕으로 있을 때 그녀를 왕비로 맞이하고, 일찌기 '당륭정변"에 참여하여 위후의 음모를 무너뜨린다. 이융기가 즉위한 후, 왕씨는 황후에 책봉된다. 왕황후는 책봉받은 후, 시종 아들을 낳지 못했다. 당현종은 성격이 풍류적이어서, 왕후가 나이들어감에 따라 그녀에 대한 사랑도 식어간다. 이때 무혜비는 후궁중 총애를 독점하고 있었다. 그녀는 안중무인이었다. 왕황후가 도저히 참지 못하여, 그 자리에서 질책을 한다. 무혜비는 이에 원망을 품고 있다가 당현종의 앞에서 사실을 왜곡시켜 고자질한다. 당현종은 화를 내며 바로 황후에게 가서 그 자리에서 황후를 욕하고 바로 황후에서 폐위시키겠다고 말한다. 황후는 울면서 말한다: "첩은 단지 비빈에게 미움받을 일을 했을 뿐인데, 폐하가 왜 이렇게 화를 내십니까. 설사 폐하께서 결발의 정을 생각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첩의 부친께서 '탈자반비역두면(脫紫半臂易斗麵)"해서 폐해의 생일 탕병(湯餠)으로 했던 것은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당현종은 그 말을 듣고 양심이 발동하여, 황후폐위에 관하여는 말을 꺼내지 않고 여러 해동안 미루게 된다.

 

처음에, 무혜비는 여러번 유산하다가, 나중에 연이어 2남1녀를 낳는다. 3명의 아이는 모두 용모가 뛰어났지만, 모두 요절했다. 이는 당현종을 슬프게 만든다. 나중에 무혜비는 다시 아들 수왕(壽王) 이모(李瑁)를 낳는다(나중에 양옥환을 처로 맞이한 사람). 다만 아이가 요절할까 겁이 나서, 당현종은 그의 형인 영왕 이헌(李憲)(즉, 이성기(李成器))의 사저에서 이모를 대신 기르게 한다. 그리고 영왕비 원씨가 이모에게 친히 젖을 먹여 기른다. 나중에 수왕 이모는 순조롭게 성장하고, 무비는 다시 1남2녀를 연이어 낳는다. 즉, 성왕 이기, 함의공주, 태화공주이다. 무혜비는 아들을 낳게 되자 더욱 기고만장하여 자주 당현종의 앞에서 황후를 험담한다. 당현종은 다시 황후를 폐위시킬 생각을 품는다. 그래서 비서감 강교(姜皎)와 몰래 논의하여 황후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하여 폐위시키고자 한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강교가 비밀을 누설하게 되고, 당현종은 대노하여 강교를 유배보내어 죽게 만든다.

 

왕황후는 폐위될 것을 두려워하였고, 오빠인 태자소보 왕수일은 그녀를 도와주기 위하여 좌도승(左道僧) 명오(明悟)를 찾아간다. 그리고 집에서 남두,북두에 제사를 지내고, 벽력목을 조각하고, 천지와 현종의 이름을 써서 황후로 하여금 합하여 차고 다니게 한다. 그리고 축수하려 말하기를, "이것을 차고 다니면 아들이 있을 것이고, 측천황후와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궁정에는 이목이 많다. 어떤 사람이 무혜비에게 이를 일러바친다. 당현종이 이를 듣고 중궁으로 쳐들어가니, 과연 황후의 몸에서 무고염승(巫蠱厭勝)의 증거물을 찾아낸다. 개원12년(724년), 당현종은 왕수일을 사사하고, 조서를 내려 왕황후를 폐위시킨다. 그리고 무씨를 혜비로 앉힌다. 같은 해 겨울 십일월, 왕황후는 냉궁에서 우울하게 죽어간다.

 

무혜비는 황후를 모함하여 죽인 후, 황후의 자리에 오르고자 한다. 당현종의 무혜비에 대한 총애는 시종 식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를 황후에 앉히고 싶어했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논의하도록 시킨다. 어사 반호례는 상소를 올려 무혜비의 친척으로 숙부뻘인 무삼사와 역시 친척으로 숙부뻘인 무연수가 모두 조정의 기강을 망가뜨린 인물이고, 세상사람들이 모두 싫어한다; 또한 태자 이영은 무혜비의 소생이 아니고, 무혜비에게는 아들이 있다. 일단 무혜비가 황후에 오르면, 아마도 그녀는 사심으로 태자의 지위는 불안하게 될 것이다. 이때의 이융기는 아직 완전히 멍청해지지는 않았다. 반호례의 상소를 받아들여 무혜비를 황후에 앉히지 않는다. 다만 무혜비의 궁중에서의 대우는 황후와 같았다.

 

무혜비는 황후가 될 수 없자, 아들인 수왕 이모를 태자에 앉히려 한다. 수왕은 적자도 아니고 장자도 아니다. 당현종의 삼십명의 아들 중에서 열여덟째이다. 무혜비가 황후도 아니다. 하물며 일찌감치 개원2년(714년)에 당현종은 이미 조여비의 아들인 이영을 태자로 앉혀버렸다. 태자를 바꾸려면, 먼저 갖은 방법을 써서 태자를 폐위시켜야 한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당현종이 무혜비를 총애하기 전에, 조여비, 황보덕의 및 유재인을 총애한 바 있다. 그녀들은 각각 태자 이영, 악왕 이요, 광왕 이거를 낳는다. 나중에 무혜비가 총애를 얻으면서, 세 비는 차례로 총애를 잃는다. 그리하여 이영, 이요와 이거 형제는 자주 모친이 총애를 잃은 것으로 슬퍼하고 있었고 함께 얘기를 할 때면 원망하는 말이 많았다. 무혜비의 딸인 함의공주의 부마인 양회는 무혜비가 태자 이영을 폐위시키고 아들 수왕 이모를 태자로 앉히고 싶어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사심과 사익을 위하여, 매일 이영의 나쁜 점을 관찰하고, 모든 태자에 불리한 말들을 무혜비에게 말한다. 그리하여 무혜비는 당현종이 왔을 때 울면서 호소하곤 했다: "태자가 결당하여 첩의 아들을 해치고자 합니다. 그리고 황상을 원망합니다." 당현종은 무혜비의 말을 믿고 대노한다. 즉시 재상을 불러 태자를 폐위시키고 싶다고 말한다. 중서령 장구령은 역사상의 여의, 강충, 가남풍 및 독고황후등의 이야기를 하며 당현종에게 태자를 폐위시키지 말도록 권한다. 당현종은 그의 말을 듣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자폐위의 일은 흐지부지 끝난다.

 

무혜비는 장구령을 아주 미워했고, 그를 없애려고 한다. 황문시랑 이임보는 무혜비의 생각을 잘 읽었다. 그리하여 자주 수왕에 대하여 좋은 얘기를 해준다. 무혜비도 이임보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무혜비와 이임보는 한 편이 되어 안팎에서 자신들과 뜻이 다른 자들을 배제한다. 얼마후 장구령은 관직에서 물러나고, 이임보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개원25년(737년) 사월, 양회는 다시 무혜비에게 세 친왕을 모함한다. 그들 3명이 태자비 설씨의 오빠인 설수와 이사(異事)를 공모했다는 것이다. 무혜비는 사람을 보내어 세 왕을 입궁하게 한다. 궁안에 나쁜 놈이 있어서 없애야 하는데 도와달라는 이유였다. 그들도 그러겠다고 한다. 무혜비는 이어서 당현종에게 말한다: "태자와 두 왕이 모반하려 한다. 그들이 철갑을 입고 입궁한다." 당현종이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니 과연 그러했다. 이때 현명한 재상 장구령은 이미 파직되었다. 그리하여 재상 이임보를 불러서 상의한다. 이임보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폐하의 집안 일입니다. 신등이 간여할 것이 아닙니다." 당현종은 그 자리에서 결심을 내려 3명이 왕을 폐위시켜 서인으로 만든다. 그리고 설수는 사사한다. 얼마후 3명의 서인은 모조리 죽임을 당한다. 천하인들은 모두 그들이 억울하다고 말했다

 

세 왕이 모함을 받아 죽은 후, 무혜비는 여러번 그들의 귀혼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두려움 속에 살다가 병을 얻는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무당을 불러서 법사를 하고, 스님을 불러서 불사도 하며 그들 3왕을 개장까지 하고, 죽은 사람을 배장까지 시켜주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개원25년 십이월, 무혜비는 사망한다. 향년 38세이다. 가련한 무혜비는 아름답고 음독했지만, 황후의 자리를 빼앗지도 못했고, 태자의 자리를 빼앗아오지도 못했다. 그리고 황후와 세 왕을 억울하게 죽였을 뿐이다. 그리하여 죽을 때는 공포로 피골이 상접했으며, 이융기 조차도 문병을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가 죽은 후, 귀혼이 괴롭히는 일은 자연히 사라진다.

 

당현종의 아들인 이종(李琮)은 황후의 예로 장례를 치러 모든 황실자녀들이 복상(服喪)해야 할지 물어본다. 당현종은 허가하지 않는다. 비빈의 예로 친생자녀만 복상하도록 한다. 사후에 그녀는 황후의 자리에 추증되기는 했고, 시호를 정순황후(貞順皇后)라고 받았으며 경릉에 매장되었고, 묘를 지어 제사를 지냈지만, 그녀는 왕황후를 모함하여 죽이고, 세 황자를 모함하여 죽였으며 이 일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건원연간에 당숙종은 그녀의 황후로 제사지내는 일을 모조리 폐지한다.

 

무혜비가 죽은 후, 당현종도 한동안 슬픔에 싸여 지낸다. 다만 무혜비에 의하여 교란된 후궁은 시종 혼란스러웠다. 얼마후, 무혜비의 며느리 양옥환이 다시 풍류황제 당현종과 관계를 맺는다. 이융기는 :재천원작비익조(在天願作比翼鳥), 재지원위연리지(在地願爲連理枝)", "늙은 소가 어린 풀을 좋아한다"는 황혼불륜의 애정극을 다시 한번 펼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