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재봉(文裁縫)


오늘 이야기할 주인공은 동치제이다.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온 이후 제8대황제이다. 그는 나이 겨우 19살에 병사하였으니, 단명황제이다. 역사의 긴 강물에서는 아주 짧은 일순간이다. 비록 그러하지만, 동치제는 제왕의 존귀한 몸으로 주목을 받는다. 우리는 그의 인생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는 가장 운이 좋았다. 즉위하여 황제에 오르는 각도에서 보자면, 동치제는 확실히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다. 청나라때의 황제를 따져보면 누르하치부터 동치제까디 누구하나 그처럼 쉽게 황제에 오른 경우가 없다. 청나라 궁정사상 제왕에 오르는데 일찌기 유혈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홍타이시(청태종)가 즉위할 때, 대비순장사건이 있었다; 옹정제가 즉위할 때 일찌기 '구자탈적(九子奪嫡)등 사건이 일어났다. 설사 순치제, 강희제, 건륭제, 가경제, 도광제, 함풍제가 즉위할 때는 그렇게 피비린내가 나지 않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경쟁자가 존재했다. 왜냐하면 황제에게 아들이 많아서, 경쟁은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치제가 즉위할 때는 피비린내나는 사건이 없을 뿐아니라, 경쟁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함풍제의 외동아들이기 때문이다. 황위를 계승할 사람은 그 밖에 없었다. 실로 행운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는 또한 가장 운이 나빴다. 어려서 즉위한 후, 동치제는 태후의 보좌에 의존했다.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호랑이가 아무리 독해도 자식을 잡아먹지는 않는다." 태후가 보좌한다는 것은 아주 행운스러운 일이어야 한다. 동치제이전의 제왕도 태후의 보좌를 받은 적이 있다. 예를 들어 효장은 순치제와 강희제를 보좌했다. 일찌기 모자, 혹은 조손간의 정이 깊다는 역사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겼다. 그러나, 동치제는 아주 불행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모자간에 서로 원수가 되었다는 역사적 기록만 있다. 모자간에 혹은 혼인으로 불화하거나 혹은 태후가 권력을 탐하여 제왕의 친정을 늦추는 바람에 반목했다. 결국 패도적인 서태후는 아들의 행복한 생활을 빼앗아 가버렸다.


비록 그러하지만 이 불행의 모든 것이 동치제 몰락의 핑계가 될 수는 없었다; 반대로 그에 대한 역사의 시험이었다. 그의 제왕으로서의 천부를 시험하는 것이었고, 그의 정치적 자질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것이다. 그의 인상, 그의 사업은 모조리 엉망진창이다. 역사를 고증해보면 동치제는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욕망이 큰 사람이었다. 그는 나이가 많지 않앗지만, 커다른 물욕을 드러냈다. 팔대후통에 들어가서 기생들과 놀아나기도 하고, 유리창을 돌아다니면서 품평을 하기도 하고, 이원에 미련을 두고 무대에 오르기도 했으며, 술집에서 가위바위보를 하기도 했다.


그는 규율이 없는 사람이었다. 동치제는 절제하지 못하는 제왕이다. 특히 공부하는 기간동안 아무 거리낌없이 드러났다. 그래서 사부도 어쩔 수 없었다. 여러번 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따. 그저 탄식하고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태후가 진노하여, 가법을 동원하는 외에는 그저 눈물로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모가 없는 사람이다. 제왕이라면 지모가 있어야 한다. 계책이 없다는 것은 불행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고처불승한(高處不勝寒). 높은 곳에 있으면 추위를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강희제는 8살에 즉위하고, 보정대신들과 지혜와 용기를 겨루어, 오배를 제거하고 일대명군이 된다. 그는 이때 지모로 승리를 거둔다. 동치제는 태후와의 싸움에서 졌다. 황숙과의 싸움에서도 졌다. 모든 실패는 그가 아무런 지모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었다. 황제의 상태가 아니었다. 당시를 생각해보면, 효장은 나이어린 현엽(강희제)을 가르칠 때, 그가 가장 우수한 제왕이 되도록 힘을 다 했고, 그에게 서 있을 때는 제대로 서 있고, 앉아 있을 때도 제대로 앉아 있으며, 절대 곁눈질로 쳐다보지 말고, 음식을 먹는 것도 적당히 먹는등 여러가지 절제를 가르쳤다. 현엽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법도에 맞았고 결국 큰 인물이 된다. 양궁태후도 동치제에 대하여 망자성룡(望子成龍)을 바란 적이 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과 어긋났다. 그는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동치제는 스스로 그 악과를 먹는다.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진다. 그는 청나라때 가장 젊어서 급사한 제왕이 된다.


첫째, 가장 단명한 제왕이다. 청나라황제를 돌아보면, 누르하치는 69세까지 살고, 청태종은 52세까지 살았고, 순치제는 24살까지 살았고, 강희제는 69세까지 살았고, 옹정제는 58세까지 살았고, 건륭제는 89세까지 살았고, 가경제는 62세까지 살았고, 도광제는 69세까지 살았고, 함풍제는 31살까지 살았고, 광서제는 38살까지 살았고, 선통제 부의는 62세까지 살았다. 동치제가 가장 단명하여 겨우 19살에 죽는다.


둘째, 친정기간이 가장 짧은 제욍이다. 동치제는 비록 단명했지만, 6살에 즉위하여 13년간 재위했다. 옹정제가 재위한 기간과 같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친정한 기간은 동치12년 정월부터 시작한다. 이전의 11년은 모두 태후가 수렴청정했다. 친정기간이 시작되고 생명이 끝날 때까지 2년이 되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이 동치제의 가장 불쌍한 면은 아니다. 아래의 두 가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워하고 탄식하게 만든다:


첫째, 자식이 없었다. 동치제이전의 제왕은 많거나 적거나 모두 자식이 있었다. 가장 많은 사람은 강희제로 55명의 자녀를 두었다. 가장 적은 사람은 함풍제로 3명의 자녀를 두었다. 제왕에게 삼궁육원을 두는 가장 주요한 목적은 바로 자손을 많이 낳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우수한 자식을 골라서 황위를 전해주는 것이다. 소위 후계유인(後繼有人)이다. 그러나, 동치제는 후궁이 많았지만 결국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아주 기괴하게도, 그부터 시작하여, 광서제, 선통제에 이르기까지 청나라의 마지막 3명의 황제는 모두 자식을 낳지 못한다. 동치제는 아주 불길한 징조를 열었다.


둘째, 태후의 수렴청정이다. 당연히 태후의 수렴청정은 동치제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저 시대의 산물이다. 그러나 동치12년이후, 서태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동치제에게 친정하게 한다. 동치제는 대권을 장악한다. 완전히 혼자서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기생집이나 가고 욕망을 풀며 인생을 허송했고 결국 젊은 나이로 죽었다. 이는 그 자신의 잘못이다. 남에게 떠넘길 수 없다. 결과적으로 권력욕이 강한 서태후의 권력장악을 돕는다. 그녀의 욕망의 불꽃은 날로 커지고, 다시 한번 대권을 장악한다. 이는 동치제가 남겨놓은 악과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동치제이다. 정말 고개를 흔들고 탄식하게 만드는 제왕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