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전(謝田)



서예는 고대인들의 마음 속에서 아주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 역대이래로 명가의 서예작품은 귀중하게 소장해왔다. 특히 서성(書聖) 왕희지의 작품은 더욱 그러했다.


왕희지에 대한 숭배는 중국에서만 1천여년간 이어져 내려온 것이 아니라, 당나라때부터, 왕희지의 서예는 일본에서도 추종받게 되며, 일본의 서예 풍격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2018년 2월 10일부터 4월 8일까지, 일본의 큐슈국립박물관에서는 "왕희지와 일본서예"라는 제목의 전람회가 열리고 있다. 일본에서 역대이래로 전해져 내려오는 왕희지서예작품과 일본초기 서예가의 대표적인 작품을 모아서 전시하고 있다. 그중 가장 진귀한 것은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는 <상란첩>이다. 이 작품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내력이 분명하고 일본천황가의 소장품이 되어 있다.


중국 고대의 예술은 처음부터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었다."통신(通神)"을 위한 예술이었다. '하늘'과 소통하기 위하여 상고의 선민들은 여러가지 방법을 시험하는데, 짐승의 얼굴을 무섭게 새겨넣은 청공기부터 따스하고 부드러운 옥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방법을 썼다. 고대인들이 최종적으로 발견한 것은 '하늘'과 소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자라는 것이다. 당나라의 미술사학자인 장언원(張彦遠)은 <역대명화기>에서 그림은 얘기하지 않고 먼저 전설상의 창힐이 문자를 만든 얘기부터 꺼낸다. "천우속(天雨粟), 귀야곡(鬼夜哭)"(창힐이 문자를 만든 후에 하늘에서 음식이 내려오고, 귀신이 밤에 곡을 했다고 한다), "조화부능장기비(造化不能藏其秘), 신괴부능둔기형(神怪不能遁其形)" 고대인들의 마음 속에, 문자는 신통력이 있는 것이었다. 문자가 출현한 이후에 옥기(玉器)는 점차 장식품이 되고, 청동기상에는 대량의 조상과 신령에 대한 명문이 새겨지게 된다.


문자는 그 자체로 신성한 속성이 있기 대문에 중국역대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예술분야는 서예였다. 그 다음이 서예와 가까운 '회화'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상고의 서예가는 이사(李斯)가 소전(小篆)을 쓴 것에서 시작하여 명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것을. 종요(鍾繇), 왕희지,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顔眞卿)등등이 있다. 대부분은 모두 조정의 중신이다. 원나라때에도 글씨를 제일 잘 썼던 조맹부(趙孟頫)는 관직이 일품에 달하고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진다. 화가는 비록 그렇게까지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역대화가는 모두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서 대대로 전해지고 있다.


서예는 고대인들의 마음 속에 지위가 너무 높기 때문에, 역대왕조는 명가의 서예작품을 귀하게 여겨서 소장해왔다. 특히 왕희지(303-361)의 작품은 더더욱 귀하게 여겨서 반복하여 보고 따라 썼다. 비슷하게 따라 쓸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인생의 큰 성취가 된다.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는 왕희지의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은 비록 당모본(唐摹本)이지만, 고대에 진품처럼 취급되어 원, 청 두 왕조 황제들이 좋아하는 소장품이 된다. 건륭제는 더더욱 평생 이 글을 베껴 쓰며, 천하제일보물이라고 치켜세웠다.


중국이 이처럼 서예를 중시하는 것은, 주변의 한자문명국가들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중 가장 전형적인 곳이 바로 일본이다. 일본 고대에는 문자가 없었고, 문명의 기원은 바로 한자에서 온다. 한나라 광무제가 하사한 "한위노국왕인(漢委奴國王印)" 금인(金印)은 현재까지도 일본의 국보이다. 수,당 시대에 이르러, 일본은 왕희지를 위시한 중국명가의 서예작품을 대량으로 구매하는 것이 조야 상하의 기풍이 된다. 나중에는 심지어 일본 자신의 서예풍격도 형성된다. 이는 한자서예사상의 중요한 일환이 된다.


2018년 2월 10일부터 4월 10일까지 일본 후쿠오카현 태재부(太宰府)의 큐슈국립박물관에서는 "왕희지와 일본서예"라는 제목의 성대한 전람이 연린다. 금년 동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전시회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전람회장에서 여러 뛰어난 작품들을 보았고, 이번에 헛걸음을 한 것이 아니라고 깊이 느꼈다.


중국의 서예는 왕희지를 서성으로 하고, 서예작품의 소장에 있어서는 반드시 왕희지를 으뜸으로 친다. 왕희지의 연대는 지금으로붜 1700여년 전이므로, 그의 진적(眞迹)은 일찌감치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당나라 궁정에서 만든 모본(摹本)이다. 당나라때 궁정모본은 오늘날이 영인본과 효과가 비슷하다. 고인의 방식은 맑은 날 어두운 방안에서, 서예진품을 창문에 붙여놓고, 한장의 앏은 종이로 덮는다. 이렇게 하면 서예필적이 밝은 빛으로 인하여 분명하게 보인다. 그 후에 글자의 변을 그려내는 방식으로 글자를 복제해낸다. 그리고 나서 먹을 덧칠한다. 좋은 모본은 진품의 먹의 농담(濃淡)까지, 붓의 비백(飛白)까지도 그대로 그려낸다. 손으로 쓴 것과 거의 똑같다.


이것은 당나라의 독특한 복제기술이다. 송나라이후에는 각본복인(刻本復印)해서 널리 보급하지만, 다시는 당나라때처럼 진품과 거의 같은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왕희지작품은 고궁이 소장하고 있는 신룡본(神龍本) <난정집서(蘭亭集序)>이고,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애청이 소장하는 <상란첩>이다. 이는 천황가문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보물이다. <상란첩>은 너무나 귀중하기 때문에 전시회에 나오는 것이 아주 드물다. 이번에는 2월 10일부터 3월 11일까지이니 긴 시간동안이라고 할 수 있다.


<상란첩>이 일본에 전해진 내력은 아주 명확하다. 일본사서 <부상략기>의 기록에 따르면, 감진(鑒眞)이 일본으로 갈 때 왕희지의 진적(眞迹) 1첩을 가져갔고, 일본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상란첩>이라고 한다. 756년 성무천왕이 죽은 후 광명황후는 20권의 왕희지서예작품을 나라(奈良)의 동대사(東大寺) 정창원(正倉院)에 희사한다. 그중에 분명 <상란첩>과 또 다른 일본에 전해진 내력이 분명한 명품인 <공시중첩(孔侍中帖, 마에다육덕회 소장. 전시기간은 3월 27일부터 4월 8일까지)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두 권의 서첩은 모두 일찌기 빌려준 바 있고, 그후 연력3년(784년)에 돌아온다. 그래서 "연력칙정(延歷勅定)"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다. <공시중첩>의 인장은 업의 중간에 찍혀 있고, <상란첩>에는 주변에 찍혀 있다. 그래서 절반만 보인다. 이는 <상란첩>이 이전에는 장권(長卷)이었는데, 나중에 잘렸고, 오늘날에는 그중 남은 일부분만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람첩>이 비록 잘리긴 했지만, 그 수준은 아주 높고, 공인된 왕희지의 가장 중요한 작품중 하나이다. 학계에서는 <난정집서>에 대하여도 논쟁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 필법이 너무 느리고, 계산이 복잡하여, 술을 마신 후에 쓴 작품같지 않다는 것 때문이다. 다만, <상란첩>에 대하여는 모두 절찬하는 목소리만 있고 조그만치의 흠을 찾을 수도 없다. 왕희지의 작품에는 몇 가지 서로 다른 면모가 있는데, 요녕성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만세통천첩(萬歲通天帖)>에서의 왕희지 서예는 풍격이 단순하고 질박하다 아마도 초기의 미성숙한 때의 작품으로 보인다. <공시중첩>은 필획이 아름답고, 기법이 성숙되며, 감정표현이 적절하지만, 다만 선이 부드럽지 못해서 아마도 임모본을 보고 베낀 것같다.


<상란첩>의 대단한 점은 전혀 흠잡을 곳이 없이 임모했을 뿐아니라, 임모한 것이 진적(眞迹)이라는 것이다. 위에는 양(梁)나라때 명가인 서승권(徐僧權)의 감정과 서명이 있다. <상란첩>의 내용은 모두 3첩인데, 상란, 이사(二謝), 득시(得示).이다. 3통의 서신을 한 장의 종이에 임모한 것이다. 그중 <상란첩>에서 말하는 것은 왕희지가 조상의 묘가 파괴당했을 때의 고통스러움을 담았다. 이 글은 전체 편의 문자가 분명하고 읽을 수 있으며, 감정, 내용, 자체가 잘 어울려져서 보기 드문 작품이다.


당나라사람들이 왕희지의 서예를 임모할 때는 왕왕 자(字)만 보지 문(文)은 보지 않았다. 1통의 서신에 만일 벌레먹어서 파손이 되어 몇 개의 남은 글자가 있으면, 그 남은 몇 개의 글자를 임모했다. 읽는 사람에게 연관성을 주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희제 서에작품의 많은 것은 읽어서 무슨 뜻인지 모른다. 같은 종이에 쓴 <이사첩(二謝帖)>은 비록 필자의 성씨가 안에 들어 있지만, 읽을 때 맥락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 분명히 글자가 빠져서 그런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글은 357년에 썼다고 고증했는데, 그때는 왕씨집안의 낭야에 있는 조상묘가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당시 50여세인 황희지는 서도를 이미 완성했다. 그러나 조상에게 뭐라고 할 수가 없어서 마음 속으로 고통스러움이 있었다. 이 글을 쓸 때 그런 마음이 그대로 표현되었다. 비록 마음은 고통으로 꽉차 있지만, 붓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글자를 쓴 방식을 보면, 왕희지가 왼손으로 종이를 들고, 오른 손으로 세로로 한줄 한줄 써내려갔다. 필법이 풍부하고 다양하며, 자체의 변화가 많다. 어떤 때는 아래위 두 글자가 연결되기도 하고, 중간에 이어진 운필은 아주 강한 운동감을 보여준다.


왕희지가 서성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가 서예를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행서를 창조해냈고, 글을 쓰는 사람이 한편으로 규칙을 지키면서도, 글자 자체로 복잡한 심리적 변화를 표현할 수 있게 해서 글쓰는 것을 서도(書道)의 경지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상란첩>은 감정표현으로 보마 수법으로 보나 완벽하게 왕희지의 예술을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임모가 정교하여, 벌레가 먹은 곳까지 혹은 바깥의 잔파(殘破)된 곳까지 그대로 그려냈다. 감희 왕희지의 지금까지 전해지는 작품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왕희지와 일본서예"전시회에는 모두 4폭의 당모본인 왕희지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유명한 <상란첩>과 <공시중첩>을 제외하고, 두 개의 소작품인 <매지첩(妹至帖)>과 <대보첩(大報帖)>이 있다. 모두 일본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당나라때의 모본이며, 상품에 속한다. 이를 보면 일본으 ㄴ자고이래로 왕희지의 작품을 숭상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서예는 처음에는 당나라사람을 따라 왕희지를 배웠다. 개략 8세기경 일본의 최고수준의 서예는 이미 당나라에 근접한다. 이번 전시회에는 나라국립박물관의 <자지금자금광명최승왕경>(2월 27일에서 4월 8일까지)이 전시되는데, 개략 741년의 작품이다. 위에는 금자 해서로 정교하게 썼는데, 당나라때의 작품과 비교하더라도 상승의 작품이다. 9세기에 이르러, 일본에는 3명의 대서예가가 나타난다. 평안삼필(平安三筆)로 불리는 인물인데, 각각 사가천황(嵯峨天皇), 쿠가이(空海)와 다치바나노하야나리(橘逸勢)이다. 쿠가이는 장안에서 배운 바 있고, 각종 서체에 능숙했다. 그가 일본으로 귀국한 후 남긴 작품은 대부분 초서필기이다. 이번에 필자가 본 것은 나라국립박물관이 소장한 쿠가이의 <금강반야경개제잔권>(전체 기간동안 전시)인데, 초서로 쓴 사인학불필기이다. 먹이 색이 아주 신선해서, 필법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고, 완전히 당나라때 사람들의 풍모이다. 다만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자체에 변화가 없고, 필력도 부드럽다. 이와 비교하면 사가천황의 <광정계첩>(823년, 전체 기간동안 전시)은 완전히 다른 풍모이다. 필력도 힘이 있고 시원스러우며, 진,초,행의 세 가지 서체로 변화한다. 완전히 당나라때 서법종사의 풍모이다.


894년, 당나라에 내란이 일어나면서, 일본의 견당사제도가 중단된다. 이때부터 일본은 자신의 길을 모색한다. 일본의 서예는 이때부터 독특한 길을 걷기 시작한다. 묵법, 자형등에서 새로운 혁신이 일어난다. 그외에 일본에서는 종이제작에서도 계승발전이 이루어진다. '당지(唐紙)'의 공예는 화려함의 극치인데, 이번에 전시된 <원영본고금화가집>(전체 지간 전시)의 종이공예는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화려하다. 같은 시기 북송의 종이와 비교하더라도 나으면 낫지 못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