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요(子繇)


청나라 도광29년 즉 1849년 8월 22일 오후 6시경, 마카오반도에 접해 있는 대륙의 연화경건관갑(蓮花莖建關閘) 일대에서 한 관리복장의 포르투갈인이 부관을 데리고 말을 타고 놀러 나왔다.


비록 하늘이 이미 어두워졌고, 부관이 계속 그에게 최근 주변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알려주었지만, 이 외팔의 포르투갈 관리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오히려 말 위에서 미친 듯이 웃어제꼈다. 그 후에 말을 몰아서 백여미터를 달려간다.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그런데, 바로 이 때, 6명의 포르투갈상인복장의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돌연 달려와서 이 포르투갈 관리를 둘러싸고 보고드릴 사건이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동포들인 것을 보자, 이 포르투갈관리는 기분이 더욱 좋아져서 급히 몸을 숙이고 얘기를 나눈다. 누가 알았으랴. 이 6명의 '포르투갈동포'는 돌연 고개를 숙이는 포르투갈관리를 말에서 끌어내리고, 칼로 내려친다. 놀란 부관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조금 전까지 미친듯이 웃고 있던 포르투갈 관리의 머리는 잘려나갔다.


놀라자빠진 포르투갈 관리도 역시 이 6명의 '포르투갈동포'에게 끌려온다.


이때서야 그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 '포르투갈동포'들은 기실 포르투갈상인의 복장을 한 중국인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들은 얼굴에 노기등등했다.


부관은 자신이 겁난을 벗어나기 힘들다고 생각하여 눈을 감고 죽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들 중국인들은 그를 보며 차갑게 손을 슨든다. 그에게 빨리 떠나라는 뜻이다. 겨우 목숨을 건진 부관은 급히 도망쳤다. 이들 중국인들은 포르투갈 관리의 수급을 들고 떠나는 것을 그냥 눈뜨고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이 살인사건은 마카오를 발칵 뒤집어 놓는다. 심지어 각국의 상인들까지도 의론이 분분했다. 왜냐하면 이 피살된 포르투갈 관리가 보통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로 포르투갈에서 마카오에 파견한 총독 Joao Ferreira do Amaral이었기 때문이다. 이 살인사건을 "아마랄사건"이라고 부른다.


당당한 포르투갈 주마카오총독 아마랄이 왜 머리를 잘리게 되었을까? 그럼 먼저 알아봐야 할 것이 있다. 청나라의 영토인 마카오에 언제부터 포르투갈이 총독을 파견하기 시작했을까?


명나라 가정연간이래로 포르투갈인은 마카오에 거주하는 것을 허가받았다. 그후 그들은 계속 하여 임대료를 납부하는 '조객(租客)'이었다. 마카오에서 사법행정권은 중국 향산현이 관리했다. 명나라때 중국법률을 어기는 포르투갈인들이 있으면, 향산현 아문으로 끌고 와서 곤장을 때렸다. 


대청 도광연간에 어찌하여 그동안 고분고분하던 포르투갈인들이 돌연 총독을 파견하게 되었을까?


기실, 이것은 바로 이 때의 포르투갈 정부가 후안무치한 생각을 품었기 때문이다: 300년간 빌려서 거주해온 마카오를 포르투갈영토로 편입시키려 한다. 이 피비린내나는 아마랄사건은 바로 그것때문에 발발한 것이다.


아마랄사건이 발생한 19세기 중엽은 한때 유라시아대륙을 종횡하던 포르투갈이 일찌감치 쇠퇴하여  작일황화(昨日黃花)같은 형국이었다. 해외의 식민지는 일찌감치 모두 잃었다. 유럽에서는 기본적으로 프랑스 영국의 강국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말그대로 유럽의 약국중 하나였다.


그러나 바로 이 '약국'이 청왕조가 아편전쟁때 엉망진창으로 무너지는 장면을 본 후에 마음 속으로 진화타겁(趁火打劫)하려는 생각을 품는다. 그리하여 포르투갈여왕 마리아2세는 이렇게 선언한다: 포르투갈은 이제부터 '자유항'이다. 여왕의 말에 숨은 뜻은 오늘부터 마카오는 포르투갈령이라는 것이다.


포르투갈인들도 알고 있었다. 여왕의 말한마디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한번은 싸워야 한다는 것을. 1846년 4월, 한 인물이 포르투갈체 의하여 일방적으로 마카오총독에 임명된다. 바로 '독비장군(獨譬將軍)" 아마랄이다.


당시 포르투갈의 군대내에서 아마랄은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원래 포르투갈의 해군대령이다. 포르쿠갈의 남미에서의 전쟁에도 참가한다. 그때도 용맹하고 잘싸우기로 유명했다. 팔 하나는 전쟁에서 잃었다. 마카오총독에 취임한 후, 성격이 흉악한 아마랄은 부임하자마자 고자세로 선언한다. 더 이상 청정부에 임대료를 납부하지 않겠다고. 이것은 청나라정부에 대한 도전이다: 이후부터 마카오는 너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청나라정부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당시는 아편전쟁이 끝난지 몇년이 지나지 않았다. 아래에서 위까지 모두 경궁지조(驚弓之鳥)였다. 


비록 포르투갈이 유럽의 약국이지만, 청나라관리들은 대외적으로 잘 알지 못하므로 금발 벽안의 사람만 보면 벌벌 떨었다. 그래서 아마랄의 이런 행동에 대하여 청나라관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몇 마디 한 것을 빼고는 기본적으로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못한다. 그저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랐다.


청나라정부가 저자세일수록, 아마랄은 더욱 고자세를 취한다. 부임한 다음 해, 청나라정부에서 마카오에 파견한 세금징수관리를 쫓아낸다. 그리고 관아의 건물도 몰수한다.


1849년 3월, 아마랄은 수십명의 포르투갈병사를 데리고, 청왕조의 마카오 해관(海關, 세관)을 압류한다. 그리고 청나라의 마카오에 대한 주권을 명시한 <오이선후사의조약(澳夷善後事宜條約)> 석비도 무참히 깨트려버린다.


현지백성에 대하여 아마랄은 더욱 흉포했다. 현지의 중국상선에 미친듯이 세금을 거두고, 세금을 내지 않는 중국선박에는 대포를 쏘았다. 한번은 20여척의 중국상선을 침몰시키기도 했다. 평민들 중에서도 사상자가 무수히 많이 나온다. 흉악한 포르투갈군대는 심지어 관갑을 넘어와서, 주변의 땅을 대거 차지하여 여러 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마랄은 왜 이렇게 한 것일까? 그는 그저 자신의 위세를 드러내려고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청나라정부의 약한 급소를 노렸다. 청나라관리들은 간이 작고 겁이 많다는 것을 잘 알았다. 자신이 일을 벌여도 감히 반항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아예 크게 일을 벌인 것이다. 그렇게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라는 것을 기정사실화 해버린다.


비록 이 계산이 나쁘지는 않지만,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빼먹었다: 청나라정부는 당해도 참지만, 청나라백성은 당하고 참지만은 않는다. 그래서 이 총독의 똑똑한 계산법은 사실 죽는 길을 찾는 것이다.


아마랄이 곳곳에서 악행을 저지를 때, 분노의 불길은 일찌감치 마카오의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광주 길거리에는 민간에서 아마랄의 수급에 현상금을 내건 광고가 붙기도 했다. 그리하여 포르투갈병사에게 모욕을 받은 용전촌의 촌민 심지량(沈知亮)은 앞장서서 곽안(郭安), 이보(李保), 장선(張先), 곽홍(郭洪), 주유(周有), 진발(陳發)등과 연락하여 피에는 피로 아마랄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 후에, 바로 1849년 8월 22일, 연화경건관갑의 그 놀라운 일막이 벌어진 것이다: 침략의 쾌감에 젖어 있던 아마랄은 부관 이특(李特)을 데리고 돌아다녔고, 일찌감치 매복해 있던 심지량등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 것이다. 


아마랄의 죽음으로 기세를 올린 중국백성들은 그러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진정힌 국치는 이때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아마랄의 피살은 포르투갈의 분노를 불러온다. 8월 23일 포르쿠갈 주마카오 '대리총독'은 청나라정부의 양광총독 서광진(徐廣縉)에게 항의서를 보낸다. 이틀후, 포르투갈은 120명의 병사를 모아서, 3문의 대포를 동원하여 연화경갑관갑에 포화를 퍼붓는다. 청나라정부와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당연히, 이때의 포르투갈 국력이 유럽의 약국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저 허장성세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편전쟁으로 놀라서 간담이 서늘해 있던 청나라정부는 여기에 그냥 넘어간다. 비록 암살사건이 발생했을 때, 청나라의 양광총독 서광진은 강경한 태도를 보였지만, 포르투갈이 대포를 몇번 쏘아대자, 청나라 향산현승은 놀라서 도망쳐 버린다. 청나라정보의 반응도 신속했다. 바로 고개를 숙인 것이다.


9월 12일, 심지량은 순덕현에서 체포되어 하옥된다. 9월 15일, 이 마카오에 살고 있던 중국백성은 전산채로 끌려가서 사형을 당한다. 그는 포르투갈인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라, 청나라정부의 형장에서 죽는다.


그리고 포르투갈당국의 화를 가라앉히기 위하여, 청나라정부는 황당한 결정을 내린다: 포르투갈식민정부가 마카오 남만에 아마랄의 기마동상을 건립하는 것을 용인하기로 한다. 중국을 침략해서 피비린내나는 사건을 벌인 강도를 위하여 중국영토에 동상을 세운 것이다.


다만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집어삼킬 야욕이 있었다. 당연히 청나라정부의 이런 호의만으로 끝내지 않을 터였다. 1885년 청나라정부와 마카오문제에 관한 '초약(草約)'을 달성하고 1887년 청정부와 포르투갈은 <리스본초약>을 체결한다. '포르투갈이 영원히 마카오와 그 부속각지를 관리하는 것'을 윤허한 것이다.


중국영토인 마카오는 이렇게 하여 유럽약국인 포르투갈이 집어먹게 된다.


먼저 체면을 잃고 나중에 땅을 잃는다. 이런 연환국치는 낙후하여 열강에 얻어맞던 청왕조이다. 후인들로서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1992년에 이르러, 신중국의 요구하에 마카오에 세워졌던 그 아마랄동상은 마침내 포르투갈마카오정부가 본국으로 옮긴다. 더 이상 침략자가 중국영토내에 동상을 세워놓지 못하게 한 것이다.


1999년 12월 20일 0시, 중화인민공화국은 정식으로 마카오의 주권을 넘겨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