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관첩(關捷)


많은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다. 청태종 홍타이시는 영명한 군주였는데, 왜 아들들 중에서는 푸린(福臨)이 황제에 오른 외에 나머지 인물들은 역사에 별로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까? 큰아들인 하오거(豪格)은 비록 중화에 이름을 떨쳤지만, 어찌 젊은 나이로 자살하게 되었을까?


도르곤이 섭정한 후, 가장 마음을 놓지 못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정맥(正脈)의 홍타이지 아들들이다. 즉 그의 형이 남겨놓은 7명의 아들들이다. 그리하여 그는 7년의 시간을 들여 이들을 탄압한다. 순치7년 그가 죽을 때까지.


홍타이시는 원래 11명의 아들을 두었다. 각각 다음과 같다:

황장자 하오거(豪格, 1609-1647), 생모는 계비 우라나라씨. 만력37년 삼월 십삼일 자시 생. 순치5년 삼월 졸. 숙무친왕.

황차자 로거(洛格, 1611-1621), 생모는 계비 우라나라씨. 만력39년 생, 만력49년 졸. 

황삼자 로보후이(洛博會,  1611-1617), 요절. 생모는 원비 뉴후루씨. 만력39년생, 만력45년 졸

황사자 예부슈(葉布舒, 1627-1690), 생모는 서비 얜자씨(顔扎氏). 천총원년십월십팔일 자시생, 강희28년 졸, 보국공(輔國公).

황오자 슈어사이(碩塞, 1629-1654), 생모는 측비 예허나라씨. 천총2년 십이월 이십사일 해시(1629.1.29)생, 순치11년 십이월 졸 승택유친왕(承澤裕親王)

황육자 가오사이(高塞, 1637-1670), 생모는 서비 나라시. 숭덕2년 이월십율일 자시생. 강희9년졸. 진국각후공(鎭國慤厚公)

황칠자 창슈(常舒, 1637-1699), 생모는 서비 이얼근줴뤄씨 숭덕2년 사월십구일 인시생, 강희38년졸. 보국공(輔國公)

황팔자 이름없음(1638-1639), 숭정2년 칠월 초팔일 해시생, 숭덕4년 정월 졸

황구자 푸린(福臨, 1638-1661), 생모는 효장문황후 보르지지터씨 숭덕3년 정월 삼십일 술시(1638.3.15) 성경황궁의 영복궁에서 출생. 순치18년 정월 초칠일 북경 자금성의 양심전에서 붕어. 순치제.

황십자 타오사이(韜塞, 1639-1695), 생모는 서비 크이크러씨 숭덕4년 이월초팔일 술시생, 강희34년 이월 초구일 묘각 졸. 보국공(輔國公)

황십일자 보무보고르(博穆博果爾, 1641-1655). 생모는 의정대귀비 보르지지터씨. 숭덕6년 십이월 이십일 신시(1641.1.20) 생, 순치13년 칠월 초삼일 졸. 양소친왕(襄昭親王)


이들 황자중에서 요절한 사람을 제외하고, 사실상 하오거, 에부슈, 슈어사이, 가오사이, 창슈, 타오사이, 보무보고르를 살펴보겠다. 순치제는 황제가 되었으니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한다.


먼저 하오거를 보자. 그는 홍타이시의 장남이다. 그는 1609년에 태어났고 도르곤보다 3살이 많다. 그는 도르곤이 가장 골치아파 하던 인물이다. "처음에 패륵이 되었다가, 천총6년 칠월 화석패륵으로 승진하고, 숭정원년 사월 군공으로 숙친왕으로 승진한다. 육월 호부의 일을 관장한다. 팔월 사건으로 패륵으로 강등된다. 삼년 팔월, 명나라를 공격한다. 다음 해 사월, 개선한다. 팔월, 호부의 일을 관장한다. 구월, 다시 친왕이 된다. 육년 삼월, 군왕으로 강등된다. 칠년 칠월, 군공으로 다시 친왕이 된다. 순치원년 사월, 사건으로 삭번된다. 십월 다시 친왕에 봉해진다. 삼년 정월, 정원대장군이 되어 사천을 정벌한다. 십이월, 장헌충을 멸망시킨다. 오년 이월, 개선한다."


이 이력표면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는 전공이 혁혁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부황이 살아 있을 때 완성했다. 즉, 도르곤이 저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불가일세의 살인마왕 장헌충을 죽이고 개선한 1달 후에, 도르곤이 손을 쓴다. 역사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삼월, 도르곤이 모함으로 작위를 박탈당하고, 유폐된다. 사월 자살한다. 나이 사십이고, 서비 3명이 순사한다. 칠년 정월, 도르곤과 형 아지거는 각각 그의 푸진(부인) 1명씩을 취한다."


이것은 도르곤이 홍타이시의 아들을 탄압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피비린내가 충만하다. 필자는 하오거의 화상을 찾았는데, 마흔살도 되지 않은 사람이 늙은이같다. 눈빛에는 우울함이 보인다. 이것이 신주를 종횡하던 위풍당당한 친왕의 모습이란 말인가? 나중에 도르곤이 죽고나서, 순치제는 형을 위해 복수한다. 그리고 형의 명예를 회복시켜 준다. "팔년 이월, 명예회복하고 작위를 다시 추봉한다. 십삼년 구월, 시호를 무(武)로 추서하다. 건륭43년 정월 태묘에 배향하다. 특별히 조서를 내려 현재 작위를 이어받은 현친왕(顯親王)을 원래의 호인 숙(肅)으로 고치게 하였고, 세습망쳬(世襲罔替)하도록 하다. 팔월 성경 현왕사에 입사하다."


이어서 황사자 예부슈를 보자. 홍타이시가 서거할 때 그는 이미 16살이었다. 팔기의 군사규정에 따르면, 그는 13살때 전쟁에 참가해야 했다. 그러나, 사서에 아무런 기록도 찾아볼 수가 없다. 도르곤이 없애버린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후의 전쟁에서도 그의 영웅적인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전혀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다. 이게 어찌 가능한가? 청나라초기에는 건륭제때까지 황실구성원을 포함한 팔기관병은 전공으로 말했다. 전공이 없으면 발언권도 없다. 큰형이 하오거를 제외하고 나이로 보면 그는 도르곤이 두번째로 골치아파해야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전공은 이상하게도 기재가 전혀 없다. 제1차로 작위를 봉할 때 그는 황실귀족중 끝에서 두번째인 진국장군(鎭國將軍)에 봉해진다. 강희8년에 이르러, 하나 올라서 보국공이 된다. 그의 64년 인생을 되돌아보면, 그저 몇번 제사활동에 참가했을 뿐, 작위도 낮고, 정무를 처리한 것도 적고, 게다가 공로부에는 아무런 공로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 동생 순치제나 조카 강희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황오자 슈어사이를 보자. 그는 넷째형인 예부슈보다 2살이 어리다. 모친의 신분이 고귀해서 그런지 조정에서 일정한 세력이 있었다. 그리고 효장이 그를 아주 좋아했고, 그를 잘 보았다. 북경에 들어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승택군왕에 봉해진다. 도르곤은 그를 봐준 것같다. 그로 하여금 이자성을 토벌하는 전쟁에 참가하게 해준다. 나중에 다시 남정을 한다. 그가 세운 정공은 모두 공정하게 기록되어 순치에게 보고된다. 그리하여 친왕에 봉해진다. 다만 도르곤은 하오거사건에서 그도 연루시켜 타격한다. 그리하여 군왕으로 강등시킨다. 순치제가 친정한 후, 비록 명예회복시켜주고 작위를 복위시켰지만, 그는 겨우 4년밖에 더 살지 못했다. 즉 순치11년이 되어 사망한다. 그는 겨우 27살을 살았고, 이는 도르곤의 탄압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그는 천재형의 인물이다. 전공이 있을 뿐아니라, 불후의 그림작품 <기봉비폭도>와 <하산도>도 남긴다. 청나라때의 인물 이방은 그의 <팔기화록>에서 슈어사이의 그림을 이렇게 평했다: "수윤천성(水潤天成), 무진세기(無塵世氣)" 하늘이 천재를 질투한 것인가 아니면 도르곤이 천재를 질투한 것인가.


황육자 가오사이를 보자. 그는 총명한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세 형의 운명을 잘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운명을 설계한다. 그것은 바로 황궁을 나가고, 정치를 멀리하는 것이다. 동북의 고향 심양으로 돌아가 공부하고 글을 썼다. 도르곤은 그가 이렇게 선택하는 것을 보자, 당연히 더 이상 그에게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사서에는 그에 대하여, "성격이 담백하다"고 적었다. 담백할 수밖에 없다. 황숙인 도르곤이 그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을테니까. 그는 시와 그림에 능했다. 그리고 금을 잘 연주했다. 애신각라씨가족 내지 전체 만주족은 예술을 좋아하는데, 아마도 그에게서 시작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의 성취는 아주 높았다. 시집 <공수당시>1권을 남긴다. 그의 그림은 '필의고원(筆意高遠)'이라고 평가받는다. 어떻게 '고원'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었을까? 바로 세상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나중에 강희제가 그에게 진국공을 내린다. 이것은 강희제의 후덕한 점이라 할 것이다. 역사가 남긴 문제에 대하여 정치적인 명예와 경제적인 대우로 보상해 준 것이다. 설사 천고일제의 총명한 강희제도 다른 방법은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황칠자 창슈를 보자. 부친 홍타이시가 사망할 때 그는 겨우 6살이었다. 동생 푸린보다 1살이 많았다. 도르곤은 푸린과 마찬가지로 그를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그에게 잘 대해주지도 않았다. 순치제때 아무런 지위도 없었다. 그저 진국장군에 봉해졌을 뿐이다. 도르곤은 그에게 무슨 공을 세울 기회도 주지 않았다. 자연히 평범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황십자 타오사이를 보자. 부황이 서거할 때 그는 겨우 4살이었다. 도르곤이 보정하는 기간동안 그는 7년을 살았다. 즉 4살부터 11살까지. 도르곤은 아마 그를 한번 쳐다봐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진국장군이라는 작위를 내린 외에. 그가 무슨 풍랑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점은 동생 보무보로르와 같다. 즉, 마찬가지로 도르곤의 온화한 배제정책을 받았을 뿐이다.


황십일자 보무보고르를 보자. 그는 더더욱 도르곤이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는 그저 강보에 쌓인 어린아이일 뿐이다. 그는 도르곤이 보정하는 기간동안 탁아소와 유치원에 있었던 셈이다. 도르곤이 그의 얼굴을 본 것도 몇 번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왕에 봉해졌는데, 그것은 형인 푸린이 집권한 이후인 순치12년의 일이다. 그때는 이미 도르곤이 죽은지 5년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도르곤이 중점적으로 타격한 대상은 첫째 하오거, 넷째 예부슈, 다섯째 슈어사이이다. 나머지는 주로 배제되거나 냉대받았다. 순치제는 분명히 보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모든 것은 황숙이 죽고나서 봐야 했다. 도르곤이 7년동안 권력을 장악하면서 하오거의 공로를 가리기 어려웠던 것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성공적으로 가리고 보통의 기인이 되도록 만들었다. 예부슈와 창슈등이 그러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높은 작위를 주는 것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어려웠다. 그래서 강희제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름뿐인 작위를 내리게 된 것이다.


공정하게 말해서 도르곤은 청나라 강건성세의 기초를 쌓은 인물이다. 공로가 일월과 같다. 도르곤이 없었더라면, 대청의 통일강산은 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도르곤은 너무 피곤했다. 보정하는 7년동안 중대한 군정사무를 처리하는 외에 아침저녁으로 홍타이시가 남겨놓은 아들들을 살펴봐야 했다. 결국 39살의 나이로 승덕의 카라성에서 죽고 만다.


순치7년 십이월의 초아흐레날의 오후, 소식이 자금성에 전해진다. 푸린은 비록 아주 기뻤지만, 모든 것은 이미 늦었다. 큰형 하오거는 이미 죽은지 2년이 지났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타격을 바아 기운을 잃었다.


역사적으로 문제를 보면, 도르곤이 이렇게 한 것은 당연히 그의 사심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그의 대국관을 읽을 수 있다. 순치가 6살에 등극하고, 5명의 형과 2명의 동생을 두고 있는데, 이들은 가족이면서 또한 위협이 된다. 이 7명의 형제들은 황위를 노릴 수도 있다. 언제든지 기회만 되면 도전할 수 있다. 대청강산을 위해서는 도르곤이 부득이 그들을 정치적으로 압박하여야 했다. 이것은 부득이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순치제는 임종전에 <죄기조(罪己詔)>를 써서, 자기의 형제들을 잘 돌봐주지 못한 것을 통한으로 자책했다. 거기에 드러난 것은 골육의 정이다. 그러나 강희제에 이르러 강희, 효장, 4대보정대신도 마찬가지로 순치의 형제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들의 작위와 군권은 계속 통제된다. 정치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정치이다. 봉건사회의 정치는 본질적으로 냉혹무정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