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화운초(和運超)





사천 광원시(廣元市)는 여러해동안 관광선전에서 삼국중진이라는 것과 여황고향이라는 두 가지 레테르를 붙여왔다. 2017년 사천성은 사천역사명인문화전승 창신공정을 시행하여, 전문가학자의 회의를 거쳐, 공식적으로 제1차 10대역사명인을 공표했는데, 무측천도 그 중에 들어 있다. 일대여황외에 대우(大禹), 이백(李白)등 논쟁이 비교적 많은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두보(杜甫)와 같이 절대로 사천에서 출생하지 않은 사람까지 '사천역사명인'에 포함시켰다. 이 명단이 공표되자, 자연히 큰 파란을 불러온다. 무측천은 비록 출생시기가 정확하지 않지만, 사천에서 출생했을 가능성은 기본적으로 배제할 수 있고, 그녀는 그저 도연시기에 이주(利州, 사천 광원시 이주구)에서 한동안 생활했을 정도라고 봐야 한다. 그럼 무측천은 도대체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그리고 왜 여러해동안 사천에서 태어났다고 선전하여 왔을까? 광원 황택사(皇澤寺)는 왜 무측천을 기념하는 사묘가 되었을까?


1. 무측천은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후인들이 무측천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잘 모르게 된 첫째 요인은 바로 그녀의 출생연도가 불확정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부친 무사확(武士彟)의 관리로 있던 곳도 계속 바뀌었다. 그리하여 무측천 출생지를 확정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관방사서 <구당서>, <신당서>와 <자치통감>은 모두 무측천이 중종복위의 신룡원년(705년)에 사망했다고 명확히 적어 놓았다. 이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다만 무측천의 나이에 대하여는 기록에 차이가 있다. <구당서>는 83세라고 했고, <신당서>는 81세라고 했으며, <자치통감>은 82세라고 했다. 그렇다면, 무측천의 출생시기는 각각 622년, 623년, 624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료에 따르면, 무사확은 당무덕4년(621년)에 양씨(楊氏)를 취하고, 무측천은 양씨가 낳은 둘째딸이다. 그러므로, 무측천이 당무덕6년(623년)보다 일찍 태어났을 가능성은 배제해도 된다. 현재, 학술계에서 비교적 공인된 무측천의 출생시간은 무덕7년(624년)이다. 즉, 무측천의 향년은 81세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 허세(虛歲, 부르는나이)와 주세(周歲, 만나이)의 구분이 있으므로 무측천은 아마도 무덕6년623년) 혹은 무덕7년(624년)에 태어났을 것이다.


무측천의 부친 무사확은 수나라때 태원에서 목재상이었다. 태원을 지키고 있던 이연과는 옛날부터 아는 사이이다. 이연이 거병을 지지한 최초의 공신중 한 명이다. 그저 논공행상때, 무사확은 주로 물자조달을 책임졌기 때문에 공적이 보통이었고, 게다가 남묵조이래로 문벌전통의 영향이 있어, 무사확의 지위는 두드러지지 못한다. 이런 난감한 처지는 이세민이 등극한 정관연간까지 계속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사확은 홍농양씨와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무측천이 나중에 재인(才人)의 신분으로 입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사확은 무측천의 생모 양씨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고향에서 결혼하여 아들 둘이 있었다. 618년이후, 무사확은 이연을 따라 장안으로 들어가고, 전후로 고부낭중(庫部郞中),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지낸다. 고향의 처인 상리씨(相里氏)가 병사하자, 이연이 중매를 서서 양씨와 장안에서 혼인하게 된다. 625년하반기에 무사확은 양주대도독 장사(長史)로 나간다. 그의 전임인 이정(李靖)은 624년까지 아직 임기를 마치지 않았다.


무측천 출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무사확이 언지 이주로 부임했느냐는 것이다. <신당서>의 외척전 기록에 따르면, 그저 모호하게 무사확이 이주도독, 형주도독으로 임직한 바 있다고 적었다. 그가 양주로 가서 이정의 자리를 대체한 것도 적지 않았다. 바로 이 중요한 임명의 구체적인 시간이 불명확하므로, 무측천이 출생한 개략적인 시간을 무덕6년 내지 7년으로 추단하더라도, 출생지에 대하여는 의문이 남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사서인 <책부원귀>는 무사확이 양주에 부임한 적이 있다는 기록을 제공한다; "무덕말기, 창주(暢州)의 누군가가 조군왕 이효공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밀고하여, 당고조는 무사확으로 하여금 양주검교로 가게 한다." 비록 <책부원귀>는 송나라때 자료이기는 하지만, 비교적 정확하다. 일부 내용은 참조를 통해서 받아들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무사확이 무덕연간에 공부상서를 지낸 것에 관해어도 한 가지 사항을 추가해 놓았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완전해졌다. <책부원귀. 퇴양>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무사확, 무덕연간에 공부상서, 판육상서, 사실봉팔백호(賜實封八白戶). 사확은 성격이 청렴하고 근검하여 만족할 줄 알았고, 비록 은혜를 입었지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전후로 세번이나 사양한 다음 비로소 받았다." 그는 원래 '검교우상숙위(撿校右廂宿衛) 즉, 당궁의 근위군 장교가 되고 싶어했는데, 이 직위는 보토이 아니다. 전문적으로 황제의 호위안전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이연은 무사확은 높이 평가했고, 그래서 친히 그와 양씨의 혼사를 연결시켜 주게 된다. 또한 나중에 무사확을 발탁하고 중용하여 무씨집안을 끌어올려준다. 이를 보면 무사확은 이연과 밀접했다. 이 점은 바로 나중에 이세민이 무사확을 장안에서 먼 곳으로 보내버린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무사확은 이연과 가까운 사람이고, 무사확의 가족의 둘째인 무사일(武士逸)은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의 심복이었다. 무사일은 이원길과 함께 태원을 근거지로 하여 유무주(劉武周)에 대항했다. 이런 가족관계로 인하여, 무사확은 더 이상 이세민의 신임을 받기 어려워진 것이다. 그래서, <책부원귀.에서 무사확에 관한 기록은 <신구당서>와 <자치통감>에 바로 다음가는 중요한 사료라 할 수 있다.


무사확이 언제 이주로 갔는지에 관하여, 확실히 의안왕(義安王) 이효상(李孝常)의 뒤일 가능성이 있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정관원년(정해년, 627년) 무신일, 이주도독 의안왕 이효상등이 모반을 일으켜서 주살된다. 이효상은 입조하여 경사에 머무르며, 우무위장군 유덕유 및 그으 생질인 통군 원홍선, 감문장군 장손안업과 모의하여 숙위병으로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이 사건은 <구당서. 태종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무신일. 이주도독 의안왕 (이)효상, 우무위장군 유덕유등이 모반을 일으켰으나 토벌하고 주살한다. <신당서>의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과정은 <책부원귀>의 기록이 가장 상세하다.


이효상은 왕의 작위를 가지고 있고, 수나라때 대장군 이원통(李圓通)의 아들이다. 이연이 거병하여 장안으로 진군하려고 준비할 때, 이효상은 화음현령으로 있었다. 그는 영풍양창(永豊糧倉)을 바치며 투항한다. 그리하여 이연이 장안에 순조롭게 진입하고, 관중을 점거하고, 수양제가 돌아올 가능성을 단절시킬 수 있었다. 이연은 이효상의 공로를 생각해서 의안군왕에 봉한다. 또 다른 층면에서 보자면 이효상과 이연가족은 인척관계에 있다. 그는 이연의 처인 두(竇)씨가족의 사위인 것이다.


이전이 이효상이 이천도독을 지냈으므로, 무덕9년(627년)의 중요한 시기에 장안에서 큰 변고가 일어난다. '현무문사변'. 이효상은 이때 장안으로 돌아와 있었고, 다시 사변을 준비했다. 무사확도 이 해에 장안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세민이 막 등극하고, 아마도 만일을 대비하기 위하여, 금방 연말에 무사확은 이주로 보냈을 것이다. 몇년후에는 다시 형주도독으로 보내고, 635년 임지에서 사망한다.


무사확의 역정을 종합해보면, 그는 당고조 이연의 심복이다. 최소한 당고종이 인정한 공신중 하나이다. 무덕3년(620년)부터 무덕8년(625년)까지 장안에 있었고, 그 후에 양주로 가서 장사를 지낸다. 비록 장안을 떠났지만, 당나라때의 양주는 경사만큼 번화한 도시였다. 그때는 "양일익이(揚一益二)"라는 말까지 있었다. 수양제가 강도(양주의 속현, 또는 양주의 별칭)를 개발한 후, 군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도시가 된다. 예를 들어, 서경업(徐敬業), 낙빈왕이 거병하여 무측천에 반기를 든 곳도 양주이다. 안사의 난때, 영왕 이린(李麟)이 당현종에게 사도절도사로 임명되는데, 그는 강릉에서 양주로 가서 병마와 전량을 모집하여 근왕을 준비한다. 황위를 빼앗긴 당숙종은 이를 할거로 본다. 이백이 쓴 <영왕동순(永王東巡)>)강릉에서 강을 따라 양주로 가는 것을 '동순'이라고 했다) 시가를 '종역(從逆)'이라고 하기도 했다. 이를 보면 양주는 당나라때의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연이 나중에 무사확을 중용하기 위해서 단련을 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관원년(627년) 십이월, 무사확은 이주도독이 된다. 그와 이연의 관계에 비추어보면, 그리고 복잡한 가족배경을 감안하면, 이세민은 무사확을 이연만큼 중시하지 않았다. 그가 발탁하여 심은 것은 모두 진왕(秦王) 천책원수부(天策元帥府)의 인물들이다. 위징, 왕규등 전태자 이건성의 곁에 있던 인재들이 중용된 것은 아주 드물다. 그래서, 관직은 비록 낮지 않다고 하더라도, 무사확은 장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이 위치에서 6,7년의 시간을 보낸다. 이는 측면으로 설명해주는 것이다. 그후 형주로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아 사망한다. 무사확의 사인을 연구한 바에 따르면 어느 정도 권력을 빼앗은 이세민의 시기와 불신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본다.


전체적으로, 무측천이 무덕6년에 태어났건, 아니면 무덕7년에 태어났건, 당시 무사확은 장안에 재직하고 있었다. 이주로 간 것은 이세민이 황위를 승계한 이후에 이효상의 후임으로 간 것이다. 그래서, 무측천은 장안에서 출생했을 것으로 본다. 기본적으로 사천에서 출생했을 가능성은 배제해도 된다.


2. '광원설'이 유행한 원인


연원으로 보면 무측천이 광원 이주에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현대인이 역사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더더구나 오늘의 사천사람들이 광원을 선전하기 위하여 고의로 만들어낸 말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이 주장은 오래 전부터 유행했다. 지금까지 이미 천년이 지났다.


예를 들어, 북송 송신종때의 <구역지(九域誌)>를 보면, 무사확이 이주에서 도독을 지냈는데, 거기에서 무후를 출생했고, 황택사는 무후의 진용전(眞容殿)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기타 사료를 인용하여, 무사확은 확실히 이주에서 '도독'을 맡은 바 있으며, 이곳에는 무측천의 부친을 위하여 세운 묘비도 있으며, 묘비에는 명확하게 '정관원년배이주도독(貞觀元年拜利州都督)"이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무씨의 고향인 산서 문수(文水)를 제외하고, 사천 광원의 '황택사'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여황 무측천을 기념하는 사묘이다. 광원 현지에는 '측천파(則天壩)도 있다(지금의 광원 상서경제개발구). 전설에 따르면 거기에서 무측천이 어렸을 때 자주 놀았다고 한다.


민간전설과 소설필기에서 무측천과 광원 이주의 관계를 언급하는 것은 더욱 많다. '원천강상면(袁天罡相面)'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송나라때의 왕상자(王象之)의 <여지기승(輿地紀勝)>등 지리지에도 나온다. '원천강상면'의 이야기가 가장 먼저 나온 것은 <대당신어>라는 필기소설의 '기이(記異)'편이다. 원천강은 성도 사람으로 유명한 도사이다. 일찌기 이주에서 무사확의 일가를 위해 관상을 봐주었는데, 당시 무측천은 나이가 어렸다. 전설에 따르면 사내아이로 분장시켜 원천강에게 보여주었다. 원천강은 '만일 여자라면 천자가 될 수 있을텐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원천강이 관상을 보았다는 관련사적은 <구당서>의 '방기전(方技傳)'에도 기록되어 있다. <신당서>에는 전기에 들어 있다. 그 후, 마찬가지로 소설집인 <태평광기>에는 '방사(方士)'편에 넣었다. 비록 역사상 원천강이라는 도사는 있었겠지만, 이것은 확실히 전설이야기이다. 진실한 역사로 대해서는 안된다. <여지기승>들 지리서는 작자가 역사를 고증하는 쪽으로 장점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사료가치에 의문이 있다. <대당신어>의 시간으로 보면, 작자인 유숙(劉肅)이 헌종 원화때의 사람이므로, 원천강 상면의 이야기는 연원이 비교적 이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무측천이 광원에서 태어났다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만일 무측천의 출생지가 이주라고 추단하는 기록이라면 최초의 것은 아마도 당나라후기에 일류문학상상력을 지닌 대시인 이상은(李商隱)의 <이주강담작(利州江潭作)>이라는 시이다.


신검비래불이소(神劍飛來不易銷), 벽담진중주란요(碧潭珍重駐蘭橈)

자휴명월이등질(自携明月移燈疾), 욕취행운산금요(欲就行雲散錦遙)

하백헌창통패궐(河伯軒窓通貝闕), 수궁유박권빙초(水宮帷箔卷冰綃)

타시연포무인기(他時燕脯無人寄), 우만공성혜엽조(雨滿空城蕙葉凋)


이 시는 당선종 대중5년(851년)에 썼고, 이상은이 동천절도사 겸 재주자사(梓州는 지금의 면양시 삼대현) 유중영(柳中郢)의 막부에서 막료로 있을 때, 광원 강담을 지나다가 무측천의 전설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다. 이 만당의 대시인의 작품은 신비하여 후세에 그의 문학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해독한다. 예를 들어, 명나라때 호진형은 <당음규첨>에서 <이주강담작>에 스스로 주석을 달아 '감몽금륜소(感夢金輪所)'라고 적었다. <여지승람.에는 당나라때 이의산이 <감잉금륜소(感孕金輪所)>라는 시가 있는데, 그 의미는 바로 이 곳이다라고 했다. 기실 모두 이 시는 무측천의 술생과 관련이 있다고 적은 것이다. 명나라때의 시인 종성(鍾惺)의 <촉중명승기>에서는 더욱 직접적으로 적었다: 현의 남쪽에 흑룡담이 있는데, 무후의 모친이 용을 느껴 잉태한 곳이다. <촉지>에는 측천의 부친 사확이 배를 타고 강담을 갔는데, 무후의 모친이 용과 감응하여 무후를 임신했다. 이를 보면, 이런 주장은 모두 소위 '강담감잉(江潭感孕)'설이고, '감용교(感龍交)'라는 말을 신비하기 그지없다. 완전히 일대여황을 신격화하고 신세내력이 비범하다는 '문학적 허구'이다. 비록 고인의 봉건미신색채를 배제한다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이상은에 대한 해석은 대다수가 자신의 신세를 가련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이 시는 당나라때의 일대여황이 나중에 처량하게 된 것을 탄식하면서 자신이 여기저기 떠도는 신세인 것을 한탄하는 내용이고 무측천의 신세내력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다고 말한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런 견해는 확실히 오래전부터 전해져 왔다. 당나라말에서 송나라 명나라를 거치면서 널리 알려진다. 그저 현대이후에 더욱 많이 알려졌을 뿐이다. 사천에서 태어난 역사학자이며 극작가인 곽말약은 역사화극 <무측천>을 창작했을 뿐아니라, 동시에 <무측천이 광원에서 태어났다는 증거>라는 글도 슨다. 극본은 1960년 5월 <인민문학>에 발표되었는데, 전체극본은 6만여자에 달한다. 고증문장은 꼬박 1년후에 <광명일보>에 실리는데, 기본적으로 신중국이래로 사천광안설은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곽말약은 "당무덕7년(624년) 사천광원에서 출생했다"는 쪽이다. 그는 무사확이 무덕7년에 이미 이주로 왔다고 본다. 모호하게 정관원년에 무사확이 다시 이주도독으로 왔다고 본다. 이효상이 무덕연간에 이주에서 임직한 기간이 얼마인지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의 주장이 국내에 끼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그후 사천광원은 이곳이 무측천의 출생지라고 널리 선전한다. 개혁개방이후, '여아절'을 둘렀고, 대거 '무측천파', '천후소세루(天后梳洗樓)>, <강담감잉>등등의 이야기를 선전한다. 확실히 이는 현지의 관광에 적지 않은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말해서, 무측천이 광원에서 출생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3. 황택사의 내력과 무측천과의 관계


황택사는 오늘날 광원에서 '여황문화'를 만들어내는 표지이다. 황택사는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일천여년전에 만들어 졌고, 전해지는 바로는 무측천이 재위할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명나라때 진홍은이 쓴 <황택사서사비>에 따르면, "황택사는 전해지기로 무후가 만들었다고 한다" 청나라때 장방신은 <운잔기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후가 집권했을 때, 황택사를 이곳에 건립했다." 청나라 건륭년간에 만들어진 <광원현지>에서는 "무후가 집권했을 때, 황택사를 건립했다. 지금 시골에서는 측천이라고 부른다. 혹은 절이 이전에 이미 있었는데, 무측천이 수리했고, 절이름을 황택으로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황택'은 '황은호탕(皇恩浩蕩), 택급고리(澤及故里)'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황택사는 최초에는 무측천과 관련이 없었으나, 무측천이 수리하면서 그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사천문화재 업무를 하는 사람이 고증한 바에 따르면, 이 절의 전신은 아마도 남북조시기에 이미 지어졌을 것이라고 본다. 추측하기로 최초에는 이빙(李氷)부자의 사천치수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했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이빙은 사천에서 위대한 도강언을 만들었을 뿐아니라, 사천과 다른 지방의 수리에도 공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절은 원래 가릉강의 가에 있었고, 이전에는 황택사라고 부르지 않았다. 무측천이 절을 수리한 후 주로 무사확이 이주에서 관리로 있으면서 굴을 파고 상을 만들었으며, 나중에 무측천이 황제에 오르고, '황택사'라는 이름을 하사하여 용흥지지를 기념했다는 것이다. 절안에 과거 당고종과 무측천의 조상이 있고, 현존하는 '무후진용석각(武后眞容石刻)'이 남아 있다. 무측천이 말년에 비구니 복장을 한 정면 좌상이다. 그 외에 북위에서 당송시대의 석각도 아주 중요하다. 사천의 석각이 비록 많은 편이지만, 북방의 몇개 저명한 석굴과는 풍격이 다르고, 남방석각조상의 중요한 유적이 되기 때문이다.


많은 살마들은 무측천이 황택사를 수리하고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믿지만, 이것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황택사는 무측천의 사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일설에 따르면, 당현종 개원연간에 비로소 절을 지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이름은 '오노사(烏奴寺)'였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아주 설득력있는 한 가지 설은 바로 후촉 맹창(孟昶)이 광정22년(959년), 당나라때부터 내려온 이 절을 개조확장한 다음 비로소 '당측천황후무후신묘'가 되었고, 황택사의 규모가 되었다는 것이다. 강쪽에는 '측천문', '천후소세루' '악루(樂樓, 戱樓)'를 만들고, '미륵불전', '철관음전'등 건축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유명한 광정비(廣政碑)도 있다. 주로 후촉 '광정'연호의 기록이다. 이 비석은 주로 후촉이 왜 이 절을 수리하였는지를 적었고, 현지의 무측천전설에 대한 신봉과 무씨부녀가 사천에 미친 영향을 회고했다. 아마도 사실에 기한 것일 것이고, 아마도 후촉정권이 난세에 촉지방의 태평을 위해 현지의 순박한 민풍을 따른 선전수단일 수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 황택사의 전신은 아마도 당나라일 것이고, 반드시 무측천시기는 아니고 당현종때일 수 있다. 그 후에 수리하고 확장한 것은 오대말의 후촉시기이다. 무측천부녀의 광원에서의 전설사적을 전면적으로 포장한 것이다. 실제로 이 시기는 확실히 광원과 무측천을 연결시키는 첫번째 붐이 일었던 기간이다. 그후 송나라때 야사필기에서도 대거 기록을 남기고, 명청의 각종 해석이 더해지면서 무측천과 황택사 그리고 광원의 관계가 널리 퍼지게 된다.


4. 장안과 광원 이외의 견해


장안과 광원만이 아니라, 역사상 무측천고향으로는 산서문수라는 주장이 있다. 마찬가지로 사료의 근거를 든다.


권위있는 <구당서>, <신당서>와 <자치통감>을 증거로 내놓는다. 이 3개의 사서에선느 마찬가지로 무측천을 '병주문수사람"이라고 적었다. 당시 무측천은 대외적으로 왕왕 스스로를 '병주문수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광원에만 소위 황택사와 무씨가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산서 문수에도 무측천사묘가 지어져 있다.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측천성모묘(則天聖母廟)"이다. 설마 무측천이 산서문수에서 태어났을 가능성도 있단 말인가? 이것도 마찬가지로 역사에 부합하지 않는다. 다만 왜 사서에서 그리고 무측츤 본인도 이렇게 말했을까/ 기실 이것은 관적(貫籍)과 출생지는 서로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서에서 무측천이 '병주문수사람"이라고 적은 것은 무씨가족의 관적이다. 무사확은 고향에서 태어났고, 당나라때 습관적으로 조적을 숭상했다. 절대다수의 당나라사람은 스스로 어디 사람이라고 할 때 그것은 조적 혹은 군망(郡望)이다. 자신의 출생지를 얘기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전형적인 것은 이백이다. 이씨가족은 농서 성기(成紀) 혹은 사천의 면주 창륭이다. 비록 이백의 출생지에 대한 논쟁도 마찬가지로 아주 복잡하지만, 가족이 죄를 받아 서역으로 가고, 그 후에 고향 면주 창륭으로 돌아왔다. 이백은 사천에서 출생했을 가능성도 있고, 외지에서 출생했을 수도 있다. 어렸을 때 그의 조적으로 돌아왔을 수도 있다. 단지 이씨집안이 언제 사천고향으로 돌아왔는지가 불분명하다. 그외에 두보는 부친이 하남에서 관리로 있을 때 지금의 공현에서 태어난다. 다만 두보는 한번도 자신이 공현 사람이라고 한 적이 없다. 왕왕 자신을 양양사람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즤 조적이 양양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나라명장 두예(杜預)를 조종으로 한다. 두보의 할아버지 두심언은 바로 양양에서 태어났다. 그후에 공현으로 옮겨서 거주한다.


자고이래로 중국인은 모두 조상을 찾고 뿌리를 찾는 습성이 있다. 조적을 아주 중시했다. 당나라사람들은 오늘날에 아주 개방적인 심리상태를 지녔다고 여겨지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당나라는 전통습속의 측면에서는 북조의 옛제도를 많이 승계했다. 즉, 문벌을 중시하는 기풍이 심했다. 이것은 이세민과 무측천이 권력을 장악했던 시기에도 분명했다.


이당가족은 왜 일부러 자신이 이노군(李老君)과 농서 성기(成紀)의 후인이라고 강조했을까? 기실 그들 집안의 조상인 이호(李虎)는 바로 북위의 변황지인 무천진 출신의 무부이기 때문이다. 십육국시기의 농서 양(凉)국에서 칭왕했던 이씨집안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심지어 이호는 선비습속으로 열해동안 선비이름을 써왔고, 수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한명(漢名)을 쓰기 시작했다. 이 점은 양충, 양견 부자가 홍농양씨라고 주장한 것과 같은 심리이다. 수나라의 양씨와 당나라의 이씨는 변방출신의 무인들이다. 그들은 완전히 전공에 의지했고, 우문씨의 북주에서 모종집단이익으로 연결되면서 지위가 점점 올라갔다. 그러나 여러해동안 북방의 전통을 지키다보니 문벌의식이 아주 심했다. 그래서 양씨집안과 이씨집안은 자신의 출신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무측천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당고종 이치는 원래 황후 왕씨가 바로 태원왕씨로 명문의 후예이다. 이치가 태자일 때이건 황제일 때이건 황태자비와 황후의 출신은 고귀해야 했다. 그러나 무측천은 목재상인집안으로 출신이 그에 훨씬 못미친다.


그렇다면 당나라의 습속으로 보면 '병주문수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이것은 무사확이 유언에서 '사후 문수에 묻어달라'고 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다만 이것과 무측천의 실제출생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마지막으로, 무측천의 모친 양씨의 생활궤적이다. 이를 살펴보면 무측천의 출생에 대하여 측면에서 엿볼 수 있다. 무측천의 모친 양씨는 홍농양씨로 명문출신이다. 수나라 황실과도 친척이 된다. 양씨는 어려서부터 '시를 알고 예를 배웠고, 역사책을 읽었다." 부친인 양달은 수양제를 따라 고구려를 정벌하던 도중에 죽었다. 양씨는 불교에 귀의하여 효도를 했다. 부친을 위해 경전을 읽고 기도를 했다. 순식간에 삼십여세가 되어 요즘말로 노처녀가 된다.(일설에는 그녀가 한번 혼인한 적이 있으나 남편이 일찍 죽었다고 한다)


이때 이당이 수나라를 대체하였고, 무덕중기에 무사확은 상처를 한다. 당고조 이연은 양씨가 '여자로서 현명하여 좋은 짝이 될 수 있다고 하여' 친히 중매를 서준다. 그리하여 양씨를 자신에게 충실한 공신 무사확과 결혼시킨다. 얼마 후, 양씨는 장녀를 낳고 이름을 무순(武順)이라 한다. 그때가 623년으로 무덕6년이다. 그외에 학계에서는 보편적으로 무순은 무측천보다 1살가량 많다고 본다. 여기에 양씨가 처음 시집가서 무사확과 사이가 좋았을 것을 고려하면, 무측천은 확실히 무덕7년가량에 태어났을 것이다. 당시 무사확은 아직 장안을 떠나지 않았다.


양씨는 무사확에게 시집간 후 정관9년(635년) 무사확의 사망시까지, 계속 남편을 따라 장안, 양주, 예주, 이주와 형주를 옮겨다녔다. 그들은 산서로 돌아간 적이 없다. 이것도 측면으로 무사확이 임종때 자신을 고향에 안장해달라고 한 것은 오랫동안 타향을 떠돌아서, 낙엽귀근하는 정상적인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무측천은 더더욱 산서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없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무측천과 황택사의 관계는 기껏해야 그녀가 재위기간에 이곳을 수리하고 이름을 지어주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녀와 광안의 관계도 기껏해야 어린 시절에 이곳에서 생활한 적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조적도 아니고, 출생지도 아니다. 어느 측면에서 보더라도, 사천광안을 '여황고향'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 근거가 없고, 적합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