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관첩(關捷)


순치제와 옹정제는 분명히 자신의 친딸도 있으면서, 계속하여 양녀를 들였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 확실히 괴이한 일이다. 순치제는 자신에게 6명의 딸이 있으면서 다시 3명의 양녀를 들였다. 그의 손자인 옹정제는 자신에게 4명의 딸이 있으면서 굳이 다시 3명의 양녀를 들였다. 이건 무슨 이유에서인가?


우리는 먼저 순치제의 3명의 양녀를 살펴보자.


순치제의 3명의 양녀는 각각 화석화순공주(和碩和順公主), 화석유가공주(和碩柔嘉公主)와 고륜단민공주(固倫端敏公主)이다.


화석화순공주는 순치제의 다섯째형인 승택유친왕 슈어사이(碩塞)의 둘째딸로 모친은 나라씨이다. 순치5년(1648냔) 팔월 이십이일생이다. 나중에 궁중에서 길러졌고, 순치17년(1660년) 화석공주에 봉해진다. 당시 나이 13살이다. 그녀는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의 일곱째아들인 상지륭(尙之隆)에게 시집을 갔고, 상지륭은 강희제의 신임을 받았고, 관직은 태자태보, 영시위내대신에 이른다. 공주는 강희30년(1691년) 십일월에 별세하니 향년44세이다.


화석유가공주는 순치제의 당형인 안락군왕 웨러(岳樂)의 둘째딸이고, 순치9년 오월생이다. 나중에 궁중에서 길러졌으며, 갛희2년,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의 손자 경취충(耿聚忠)에게 시집간다. 강희12년에 사망하니 향년22세이다.


고륜단민공주는 순치제의 당형인 간친왕 지두(濟度)의 둘째딸이다. 모친은 푸진 몽골 커얼친부 보얼지지터씨이다. 순치10년 육월십삼일생이다. 나중에 궁중에서 길러졌으며, 순치제의 양녀가 된다. 처음에는 화석단민공주에 봉해졌으나, 강희9년(1670년)에 커얼친좌익중기 사크다라다르칸친왕인 만주시리(滿珠習禮)의 손자인 반디(班第)에게 시집간다. 반디는 결혼한 다음해에 친왕으로 승격된다. 옹정원년(1723년) 공주는 고륜단민공주가 되고, 7년후에 별세하니 나이 77세이다.


옹정제의 3명 양녀는 화석숙신공주(和碩淑愼公主), 화석화혜공주(和碩和惠公主) 화석단유공주(和碩端柔公主)이다.


화석숙신공주는 옹정제의 형이자 폐태자인 윤잉(允礽)의 여섯째딸이다. 강희47년 정월 초이틀생이다. 모친은 윤잉의 측푸진인 당씨(唐氏)이다. 옹정초기에 궁중에서 양육된다. 옹정4년(1726년) 십이월, 효혜장황후 친정이 종손(從孫)인 커얼친부 보얼지지터씨 관음보(觀音保)에게 시집간다. 그리고 화석숙신공주로 봉해진다. 건륭49년(1784년) 구월 초십일 사망하니, 나이 77세이다.


화석화혜공주는 옹정제의 13째동생인 이현친왕 윤상의 넷째딸이다. 강희53년생으로 생모는 윤상의 적푸진인 조가씨(兆佳氏)이다. 나중에 궁안에서 양육되고, 옹정7년 십이월, 카르카부 지용친왕 단진도르지의 왕자인 보르지지터씨 도르지사이부텅에게 시집간다. 2년후에 사망하니 나이 겨우 18살이었다. 


화석단유공주는 옹정제의 16째동생인 장친왕 윤록의 적장녀이다. 모친은 적푸진 궈로로(郭絡羅)씨이다. 옹정초기, 궁안에서 길러졌으며, 옹정8년 (1730년) 커얼친부 군왕 보얼지지터씨 지무터도르지에게 시집간다. 옹정9년)1731년) 화석단유공주에 봉해지고, 건륭18년에 사망하니, 나이 41살이었다.


순치제, 옹정제 두 황제는 모두 6명의 종실의 가까운 왕녀를 양녀로 삼았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친딸들이 있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표면적으로 보면, 그녀들은 혹은 태후나 황후가 좋아하거나, 혹은 부친이 일찍 사망하여 가련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가지 현상에서 우리는 그 실질을 엿볼 수 있다. 무슨 현상인가? 바로 이들 왕녀는 양녀로 거두어진 후에 모두 공주에 봉해지고, 다시 번왕에게 시집을 간다. 혹은 번왕이 왕자에게 시집을 갔다. 한족번왕이기도 하고 몽골번왕이기도 했다. 이것으로 분병해졌다.


황제가 이들 종실녀를 양녀로 들이고 공주로 책봉한 것은 정략결혼을 위한 것이었다. 번왕들을 자신의 주위에 확실히 묶어놓기 위함이다. 그렇게 하여 천하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다. 자신의 친딸만으로는 부족하니까 더 늘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봉건사회의 혼인은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정치화되고, 더욱 목적의식이 강한 강강연합이 된다. 어떤 사람이 통계를 내본 적이 있다. 청나라초기부터 청나라말기까지 청나라조정은 432명의 황녀를 몽골에 시집보냈다.


몽골민족은 용맹하기로 유명하다. 진나라때부터 명나라중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중원에 대한 침략을 멈추지 않았었다. 심지어 한때는 중원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청나라때, 몽골은 중앙정부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고, 가장 좋은 친구였다. 원인은 바로 적극적인 정략결혼에 있었다.


순치제가 양녀로 거둔 3명중에서 비록 화석화순공주, 화석유가공주의 사위는 삼번중 상지신, 경정충의 동생들이었지만, 두 사람은 형들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극력 반대한다. 정략결혼이 제대로 효과를 낸 것이다. 고륜단민공주와 옹정의 세 양녀는 모두 초원에서 국가의 국방건설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당시의 역사조건하에서 성삼성의껏 화친하는 것이 그래도 상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