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능한화지초(凌寒花枝俏)





중국에서 진(陳)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성씨이다. 최신의 성씨통계에서 진시는 이(李), 왕(王), 장(張), 유(劉)의 뒤를 이어 5위에 랭크되었다. 아는 사람중에 진씨가 한 명도 없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모든 성씨는 역사를 얘기하면 전설적이고 비장한 점이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성도 진씨와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 이, 조, 주와 같은 대왕조의 황성이거나 혹은 공, 맹과 같은 성인의 성이라 하더라도.


진씨성은 도대체 어떤 전설적인 역사가 있었을까? 여기에슨 진씨가운데 수가 가장 많은 의문진씨에 대하여 얘기하기로 한다.


중국역사상 진씨가 세운 왕조로는 진패선(陳覇先)이 건립한 남조 진(陳)이 있다. 진패선은 저명한 영천진씨(潁川陳氏)의 후손이다.


589년, 문학적 소양이 뛰어났던 진후주(陳後主)로 인하여 마침내 진나라는 망한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진씨후손들은 도망생활을 보내게 된다.


진후주는 진숙보(陳叔寶)인데, 그의 동생중에 진숙명(陳叔明)이 있었다. 진숙명의 13대손 진왕(陳旺)은 대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가족을 데리고 여산의 자락에 있는 강주(江州) 의문촌(義門村)으로 이사간다.


진왕은 이곳에 땅을 얼마 사고 집을 하나 지어서 농사를 지을 준비를 한다. 별 일이 없으면 여산에 올라가서 폭포도 보고 아주 즐겁게 지냈다.


아마 진왕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진씨가 이곳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8대를 내려가고, 8대를 내려가는 동안에 분가를 하지 않아서 인구가 100명을 넘어서게 된다. 진왕은 효의(孝義)로 집안을 다스렸고, 8대의 후손들은 모두 이 전통을 이어 내려와서 가풍이 아주 화목했다.


당나라에 이런 규정이 있었다. 일가가 5대이상 동거하면, 조정의 상을 받는다고, 8대를 화목하게 내려온 진가는 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의 황제인 당희종(唐僖宗)은 네 글자를 써서 내린다 "의문진씨(義門陳氏)" 그리고 대련도 써서 내린다:


구중천상정서귀(九重天上旌書貴), 천고인간의자향(千古人間義字香)


이것은 의문진씨가 처음 황제로부터 정표(旌表)를 받은 사례이다.


송나라에 이르러, 의문진씨일가는 천명을 넘어 선다. 송나라의 여러 황제도 연속으로 의문진가에 우대조치를 내린다. 요역을 면제해주고, 어서를 하사하며, 매년 쌀, 면, 기름을 보내어 의문진가를 표창했다.


송진종 조항(趙恒)때 의문진가는 거의 2천이 되었다. 송진종이 친히 대련을 써서 내려보내어 표창한다


취족삼천구천하제일(聚族三千口天下第一)

동거오백년세상무쌍(同居五百年世上無雙)


의문진가가 연이어 각 황제들로부터 표창을 받은 것은 그들이 대대로 같이 살고, 인구가 많을 뿐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의문진가의 가풍이었다.


의문진씨는 일족이 모여 살면서 수백년동안 화목하게 살고 흩어지지 않았다. 그들 자신의 가법, 가규, 가훈이 있기 때문이다. 의문진씨에는 저명한 33조의 가법이 있다. 가법의 핵심가치관은 바로 우애, 평등, 민주, 화해였다.


의문진씨에는 모두 14대의 가장이 있었는데, 매 대의 가장은 가족들이 공동으로 덕행이 가장 뛰어난 인물을 선출하여 맡겼다. 내정하거나 세습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민주정신은 중국역사상 절대로 독특한 것이다.


진가는 비록 인구가 아주 많았지만, 모든 재산은 공유였다. 공동노동, 평균분배, 인인평등이다. 노비는 두지 않았고, 특권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사서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실무사재(室無私財), 주무별찬(廚無別饌)" (집안에 개인적인 재산이 없고, 모든 사람이 매일 같은 음식을 먹는다. 진씨집안에서는 특별히 제공하는 음식같은 것은 없었다.


진씨가족내에서 많은 아이들은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어느 아이든 울면 바로 젊은 엄마가 젖을 먹여주기 때문이다. 자기의 자식이건 아니건간에.


어떤 사람은 이곳을 보고이렇게 말했다. 아이가 자신의 어미가 누구인지도 모르다니, 이 마을은 아주 어지러운 것같다.


기실 정반대이다. 의문진씨는 중국에서 가장 먼저 일부일처제를 실시한 곳이다. 진씨가족의 가규에는 남자들이 첩을 둘 수 없게 되어 있다. 가법에 위반하면 처벌받는다. 그래서 의문진씨의 대가족에는 기본적으로 옆집의 왕씨아저씨는 없다.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어미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는 것은 바로 진씨일가가 대공무사(大公無私)한 결과이다.


한번은 송태종이 진가의 제8대가장인 진긍(陳兢)에게 물었다; "너희 의문일가는 큰 부락같은데도 혼란하지 않으니 무슨 이유인가?"


진긍이 대답한다: "한 글자 때문입니다. 공(公)"


가장 신기한 것은 의문진씨는 수백마리의 개도 기르는데, 개들도 매일 의문진가의 가풍에 따라 매일 식사를 할 때 한 구유에서 같이 하는데, 한 마리라도 오지 않으면 나머지 개들도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모든 개가 온 다음에 비로소 같이 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만일 낯선 인물이 마을로 들어와서 개 한 마리가 짖으면 다른 개들도 모두 따라 짖는다. 아무리 간큰 사람이라도 놀라서 도망칠 수밖에 없다. 개 한마리가 짖지 않으면 모두 따라서 짖지 않는다. 낯익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송태종이 이 이야기를 듣고 다시 대련을 내린다:


일견미지백견불식(一犬未至百犬不食), 뇌내이물개효의(牢內異物皆效義)

일폐돌기백폐제노(一吠突起百吠齊怒), 채중동성공호문(寨中同聲共護門)


대공무사는 의문진씨의 총강령이다. 그리고 진가의 영혼은 문화교육에 있다. 진가는 중국최초의 사립대학인 동가서원(東佳書院)을 만든다. 이것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보다 빠르다.


진가33조가법에 이런 규정이 있다. 어린아이는 7살부터 15살까지 소학과 중학을 공부한다. 공부를 잘하면 동가서원으로 보내어 더욱 깊이있게 공부하게 한다. 이는 중국최초의 9년의무교육이다. 일가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글을 알고 화목하게 지낸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진씨들이 교육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대학이외에, 의문진씨는 자신의 유치원, 시장, 오락장, 도서관, 양로원, 병원등등도 있었다. 이 병원은 지난 세기까지도 남아 있었다. 1939년 일본군의 폭격으로 사라졌다.


그외에 각종 건축예술작품들도 있다. 정대누각(亭臺樓閣), 사원전당(祠院殿堂), 장전원림(莊田園林)이 주변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 의문진씨 대가정은 완전히 유가에서 말하는 대동사회(大同社會)이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주의이다. 서방의 유토피아이다.


이런 전설의 유토피아가 당송시기에 일찌감치 저명한 관광명소가 되었다. 아무도 이곳을 둘러싸고 입장료를 받지도 않았고, 누구든지 와서 참관할 수 있었다. 소식, 구양수, 육유, 악비, 문천상같은 저명한 인물들도 모두 이곳을 온 적이 있다. 이곳에 관하여 적지 않은 글들을 남긴다.


송인종에 이르러, 의문진씨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들은 3900여명에 이르게 되고, 이미 15대를 내려왔다. 332년간 분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천하제일가'라는 명칭을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당희종때부터 송인종에 이르기까지 의문진씨는 9명의 황제로부터 27번의 정표를 받고, 무수한 대련을 하사받는다. 문에 다 붙일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바로 이때 의문진씨들은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곧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진씨들에게 이는 너무나 돌연한 일이었다.


분가의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진가의 가세가 너무 성하다는 것이다. 황제에 있어서, 너무나 큰 위협이 되었다. 진씨는 너무 단결이 잘되므로 만일 뭉치는 경우에는 통치자들이 처리하기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당시의 황제는 송나라의 가장 성명한 군주인 송인종이었다. 그러나 그도 방법이 없었다. 이는 제도의 비극이다.


진씨일가를 나눠야 한다고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철면무사의 포청천 포증(包拯)이다. 이 집안의 분가를 주재한 것도 바로 포증이다.


그날 조정이 보낸 사금초(謝錦初)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지를 받들고 의문촌으로 간다. 진가들은 황제가 사람을 보내오는데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황제는 자주 그들을 표창해주곤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무슨 대련을 써가지고 보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사금초가 성지를 읽자, 모든 진가들은 방성대곡을 하고, 슬퍼하는 울음소리가 하늘과 땅을 진동했다.


진가들은 한참을 통곡했고, 아무도 왜 그런지는 몰랐다. 다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문진씨가 분가할 때, 송인종은 그들에게 12글자를 내린다: 지수종(知守宗), 희공여(希公汝), 재사언(才思彦), 승연계(承延繼). 그 뜻은 너희는 선조를 잊지 말고, 진씨의 가풍을 계승하라는 것이다.


진씨의 방대한 가족은 이미 4천명에 가깝다. 도대체 어떻게 나눌 것인가. 그리고 몇 갈래로 나눌 것인가? 매 갈래는 어디로 보낼 것인가?


진가의 마지막 가장은 진태(陳泰)였다. 비통한 진태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낸다. 일찌기 진가 일가족이 식사용으로 쓰던 큰 솥은 그들의 단결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이날부터 그들은 더 이상 같은 솥으로 지은 밥을 먹을 수 없다. 진태는 이 큰 솥을 진가사당의 대들보에 걸었다가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그리고 몇 조각으로 갈라지는지를 보아서 몇 갈래로 나누기로 한다.


큰 솥을 떨어뜨리니 291조각이 되었다. 그래서 의문진가는 291조로 나눈다. 매조의 조장은 철편 1조각씩을 가졌다. 진태는 분명 매 조장에게 알렸을 것이다. 이 철편을 잘 보관하라고 혹시 천백년후에, 우리의 자손이 이 291개의 조각을 다시 맞춰서 솥으로 만들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분가할 때는 서로 많이 가지려고 싸우지만, 진가는 서로 양보했다. 모두 좋은 물건을 상대에게 양보하려 했다. 이런 일은 지금 보더라도 불가사의하다.


이 291조의 인원은 각각 어디로 갈 것인가? 제비뽑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모두 16개 성시로 나뉘어진다: 강서, 호남, 호북, 사천, 섬서, 하남, 안휘, 산동, 강소, 절강, 복건, 광동, 광서, 해남, 상해, 천진.


이는 인류력사상 가장 비감한 가족이주이다.


전국각지로 나뉘어진 진가는 조상의 땅을 잊지 않았다. 매 진씨후인들은 자신의 집문에 4글자를 써서 붙였다: "의문세가(義門世家)', '의문전방(義門傳芳)', '의문유방(義門流芳)' 등등. 이를 통해 그들은 선조를 잊지 않고, 고향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의문진씨는 분가한 이후, 어디의 진씨가 집을 나서게 되면 어느 지방의 의문진씨집을 가더라도, 먹고 마시고 쓸 것을 마련해 주었다. 모든 의문진씨의 후손들은 서로 도왔다. 1950년대까지도, 이런 진가의 가풍은 여전히 보존되어 왔다. 1950년대이후 이런 일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의문진씨는 비록 이미 어쩔 수 없이 의문을 떠나야 했지만, 그들의 후인은 한번도 족보를 만드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의문진씨는 천하에 널려 있고, 후대의 많은 대인물들도 의문진씨의 가보를 만들어 준다. 주희, 왕양명 같은 이들이 그렇다. 원리 진가의 일은 이들 다른 성씨의 인물과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그들은 스스로 나서서 의문진씨의 족보를 만드는 것을 도와준다. 이것은 바로 천고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의문진씨에 대한 최고의 찬양이다.


최근의 성씨통계에 따르면, 중국에 진씨는 모두 7천만명인데, 그중 의문진씨만 4천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저명한 진씨성의 인물들도 대부분 의문진씨의 후손들이다. 진독수, 진담추, 진의, 진운, 진갱, 진석련, 진과부, 진입부, 진성, 진포뢰, 진인각등등이 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