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재신(張再申)


조적(祖籍)이 절강인 노근재는 구미에서 이름을 떨친 대골동상이다. 그는 중국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문화재를 해외로 빼돌려 팔아먹은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05년, 청나라조정이 붕괴되기 직전이 되자, 일부 왕공귀족, 팔기자제들은 생활이 힘들어, 어떤 사람은 황궁에서 보물을 훔쳐내고, 어떤 사람은 조상대대로 물려내려온 문화재를 꺼내와서 시장에서 팔거나 전당포에 맡겼다. 일시에 각지의 골동시장은 활성화되고, 장사가 잘되었다. 그중 상해 성황묘일대가 가장 활발했다. 상인들이 운집하고, 국보가 다 모여들었다. 그래서 북경 유리창이나 천진, 홍콩의 골동시장보다 더 대단했다. 그해에 26살의 노근재는 절강의 같은 고향사람이자 손중산의 친구인 장정강(張靜江)의 건의에 따라,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골동생애를 시작한다.


처음에 일을 시작할 때는 노근재가 북경, 상해등의 골동상중 장사를 크게 하는 사람들과 결탁하여 시장을 좌지우지한다. 국내외의 청동고옥, 자기서화등 희대의 진품이 등장하면 어떻게 돌고 돌더라도 마지막에는 반드시 그들의 손에 들어갔다. 그 후에 다시 상해를 거쳐 파리, 뉴욕등지로 보내어 매각되었다. 1906부터 1949까지 노근재등은 이런 거래를 계속 했다. 사료기록에 따르면, 1926년에만, 상해항에서 미국으로 수출된 문화재의 관세비용만 778,325해관냥(당시 1달러가 1해관냥이었다)에 달했다. 당시 노근재를 거쳐 경매된 강희때의 흑지소삼채자기(黑地素三彩瓷器)의 가격이 겨우 2,000달러였고, 고옥(古玉) 하나에 겨우 64달러였다. 이렇게 추산하면 40년간 그가 해외에 판매한 중국문화재는 아마도 수십만건에 달할 것이다.


금방, 노근재는 그가 소장하고 있는 많은 아름답고 정교한 중국문화재로 파리, 런던, 뉴욕등지의 골동업계를 정복한다


당시의 구미의 매체보도에서 우리는 당시 노근재가 해당국가에서 가지고 있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고학자 노근재는 대량의 묘장조각, 청동기, 부장고옥, 도용, 불상을 유럽과 미국으로 운반해, 구미의 수장가들이 중국의 묘장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그는 정교한 문화재전문지식과 천재적인 상업적 안목으로 점차 구미의 소장가들을 정복했고, 구미의 은행가, 군수업자, 석유업자, 부동산업자들 가운데에서 중국문화재 구매붐을 불러 일으켰다..."(<뉴욕타임즈>기사에서 전재)


도대체 노근재가 얼마나 많은 국보를 해외에 팔았을까? 지금까지 아무도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조사를 해서 행방을 아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당나라때 용문석굴의 석사자: 미국보스톤미술관

14세기 대형불교벽화: 미국메트로폴리탄미술관

수나라 청동불상, 한나라 화상전(畵像塼): 미국보스톤미술관

향당산조소 몇개: 펜실베니아대학박물관

당나라 시녀도 묘장석조: 시애틀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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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기록에 따르면, 노근재가 친히 뉴역에서 거행한 두 번의 경매에서 중국문화제 2,800여건이 팔렸다. 거래금액은 10만여달러에 달했다. 파리의 전람회에서는 청동기, 조소, 옥기 3,000여건을 판매했다.


그외에 우리가 당시 노근재가 프로모션하기 위하여 출판한 일부 화책에서도 약간의 단서를 잡을 수 있다. 이들 화책으로는 : <중국석조전>, <중국예술인물전>, <중국고대제사청동기전>, <런던국제중국예술전>, <당송원회화>, <한대상감동기도록> 등등이 있다. 이들 전람품은 수량도 엄청나고, 모두 정품(精品)이다. 그중 세계적인 진귀한 문화재도 있다. 이 국적(國賊)이 스스로 한 말에 따르면, "중국5천년문명사의 전과정을 완벽하게 견증하는데 충분하다"


노근재가 판 중국문화재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국내외에 명성을 떨친 "당태종소릉육준(唐太宗昭陵六駿)>중 2준과 송나라때의 <수양오로도(睢陽五老圖)>이다. 이 두 건의 국보는 모두 중국예술사상 가장 위대한 걸작들 중 하나이다. 이들의 역사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는 숫자로 말할 수가 없다. 이런 국보를 노근재는 처음 미국으로 갔을 때, 처음 만난 인사로 12만5천달러와 8만달러에 각각 펜실베니아대학박물관,워싱턴프리어박물관, 예일대학박물관과 뉴욕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헐값에 팔았다. 해방후 중국정부와 민간조직에서 여러번 미국정부를 통해 이들 국보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이들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의 영수증이 제대로 갖춰져 있고, 당시 중국정부가 발급한 통관증명이 있어 결국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노근재는 중국문화재를 해외에 판매하는데 공로가 있어 프랑스정부의 특별허가를 받아 파라의 중심지에 5층짜리 홍루(紅樓)를 지어 골동품을 소장한다. 현지인들은 이를 "중국루브르"라고 불렀다. 미국인의 기록에 따르면, 거의 모든 구미의 국립박물관이 지금 모두 이 '중국루브르'에서 판매한 중국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노근재를 합작파트너 내지 공신으로 보았다. 미국의 아시아문화재소장의 거두이자 국립 아시아예술관의 창시자인 프리어는 노근재에게 보낸 서신에서 "친애하는 파트너, 미국은 당신이 필요하다. 유럽은 당신이 필요하다"라고 하였다.





1949년 신중국이 성립된 후, 노근재가 상해에 설립한 분점의 중요문화재는 몰수된다. 그의 중국각지에 분포되어 있던 파트너나 일당들은 어떤 사람은 감금되고 어떤 사람은 처형되었다. 노근재는 더 이상 신중국에서 문화재를 가져다 판매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비통해하며 친구에게 말한다: "중국문화재거래는 이제 끝났다. 나의 취미는 모두 빼앗겼다." 1950년, 중국사상 가장 대단했던 문화재밀수자 노근재는 미국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이어서 뉴욕의 분점을 정리해서, 그의 동료인 프랑크 가로가 접수한다. 프랑스 파리의 골동점과 그 유명한 '중국루브르"는 그의 작은 딸 Janine Loo가 넘겨받는다. 2006년에 이르러 가족들이 경매해서 처분한다.


1957년 노근재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다가, 폐렴으로 스위스의 한 병원에서 사망한다. 향년 78세이다. 사람들에게 욕을 많이 얻어먹은 이 국적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지를 알았던 것같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벗어나려고 생각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긴 글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확실히 아주 부끄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들 국보를 해외에 유실하게 만든 근원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유일하게 안위하는 것은 이들 문화재가 한던도 공개된 시장에서 다른 매입자와 경쟁하여 구매한 것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노근재는 죽을 때까지 거짓말을 했다. 미국의 예술잡지 <파르나소스>에서는 이런 글을 실은 바 았다: "과거 수년간 시장에 나타난 많은 묘장조각은 거의 그 중국조각을 소장하는 사람이 이미 중국의 대부분 지상문화재를 긁어모은 후, 현재는 눈길을 지하로 돌려서 시장을 메우고 있다. 노근재는 자칭 이런 물건은 모두 그의 협력자가 직접 중국의 도굴자로부터 구매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