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우춘(史遇春)


명선종(明宣宗) 주첨기(朱瞻基, 1398-1435), 명나라 제5대황제, 명인종(明仁宗)의 장남. 어렸을 때, 조부 주체(朱棣, 명성조)와 부친 주고치(朱高熾, 명인종)의 사랑과 인정을 바았다. 명성조 영락9년(1411), 14살때, 조부에 의해 황태손(皇太孫)으로 세워진다. 여러번 주체를 따라 몽골을 토벌하는데 나서고, 명인종 홍희원년(1425) 즉위한 후, 선덕10년(1435)에 사망하니, 향년 38세이고, 경릉(景陵)에 묻힌다.


명성조 영락15년(1417), 주첨기가 20살 때, 호선상(당시 16사)은 황태손비로 뽑힌다.


호선상(1402-1443)은 제녕(濟寧) 사람으로 금의위 백호 호영(胡榮)의 셋째 딸이다.


명인종이 즉위한 후, 호선상은 황태손비에서 황태자비로 승격한다.


명선종이 즉위한 후, 호선상을 황후로 책봉하고, 그녀의 부친 호영은 광록경(光祿卿), 표기장군(驃騎將軍), 중군도독부첨사(中軍都督府僉事)가 된다. 그리고 그녀의 오빠인 호안(胡安)은 부군전위(府軍前衛) 지휘첨사를 동생 호선(胡瑄)은 부군전위 백호(百戶)로 임명한다.


호선상은 공주만 둘을 낳았다.


하나는 순덕공주(順德公主)로, 명성조 영락18년(1420)에 태언ㅆ다. 즉 호선상이 결혼한 후 2년만인 18살에 낳은 것이다. 명선종이 즉위할 때 순덕공주는 6살이었다.


다른 하나는 영청공주(永淸公主)인데, 출가전에 요절했고,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호선상이 황후에 책봉된 후 그녀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


이때 명선종은 손귀비를 총애했다.


손귀비에 관하여, <명사>권113, 열전제1 <후비.선종효공황후손씨전>을 참고하 ㄹ수 있다.


여기에서 손귀비의 배경에 대하여 간략히 소개하고자 하다. 이것을 알면, 정사 및 관련사료의 손귀비에 관한 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청나라때 사람인 모기령(毛奇齡)이 쓴 <승조동사습유기> 권2 <선종조. 의덕>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추평(鄒平, 명나라 초기 푸평현, 제동현은 제남부에 속했다. 지금의 산동성 빈주시 추평현) 사람인 손충(孫忠)은 태학생(太學生)에서 영성현(永城縣, 하남성 개봉부 귀덕주, 지금의 영성은 하남성 상구시 관할하의 현급시이다)의 주부(主簿)로 승진한다. 


손충에게는 딸이 하나 있는데 용모가 뛰어나고, 피부색이 하앴으며, 총명하고 영리했다.


명인종(당시 태자)의 장황후(張皇后, 당시의 태자비)는 영성(永城) 사람이다.


장황후의 부친은 나중에 팽성백(彭城伯)이 되고, 모친인 팽성백 부인은 일찌기 영성 주부의 관사(官舍)에서 손충의 딸 손씨를 본 적이 있다. 팽성백 부인은 손씨의 용모, 총명함등에 깜짝 놀란다.


주첨기가 황태손이 된 후 명성조 주체는 이렇게 말한다: 황태손의 나이가 이미 적지 않으니, 그에게 배우자를 선택해주어라.


그리하여, 팽성백부인은 장황후의 앞에서 손씨의 현숙함을 칭찬하고, 장황후는 다시 이를 주체에게 전한다.


주체는 명을 내려, 손씨를 궁중으로 불러들인다. 이때 손씨는 겨우 10살이었다. 그리하여 장황후가 손씨를 기르게 된다.


황태손 주첨기가 정식으로 황태손비를 정해야할 때가 되었을 때, 장황후가 손씨를 기른지는 이미 7년이 되었다. 이로써 추산하면, 손귀비는 호선상보다 1살이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때, 황태손비를 뽑는데, 사천감(司天監)에서 상소를 올린다. 후성(后星)이 노(魯)의 땅에 빛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정은 제녕의 호선상을 황태손비로 선정한다. 그리하여 손씨는 겨우 빈(嬪)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팽성백부인은 이에 대하여 자주 장황후의 앞에서 불만을 토로했다. 장황후는 현량한 인물이고, 그저 못들은 척 했다.


이 모든 것을 명인종 주고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명인종이 즉위한 후, 주첨기가 황태자로 책봉되고, 호선상은 태자비로 책봉되며, 손씨는 빈으로 책봉된다. 책봉시, 명인종은 특별히 손씨를 보살펴 주었고, 그녀에게 특별히 태자비의 관복을 입을 수 있도록 허락한다.


주첨기가 즉위한 후, 장황후는 황태후가 된다.


황태후의 지시로 호선상과 손씨의 지위는 이미 정해진지 오래되었으니, 다시 논의할 여지나 필요가 없다. 그러니 이전의 서열에 따라 호선상을 황후로 책봉하고, 손씨를 귀비로 책봉한다.


이는 은연중에 투쟁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관례에 따르면, 황후를 책봉할 때 쓰는 것은 금보(金寶, 즉 印), 금책(金冊)이고, 황귀비이하를 책봉할 때는 금책(金冊)만 내리고 금보(金寶)는 없다. 이때, 주첨기는 내심으로 손귀비를 향해 있었다. 그래서 손씨를 귀비로 책봉할 때, 특별히 황태후에게 청하여, 손씨에게 금보(金寶)를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고, 장태후도 승락한다. 그리하여 손씨를 위해 특별히 금보를 마련하여, 황후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하사한다. 이 일은 당시 사람들에게 법도에 맞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즉위후, 주첨기는 여러곳을 돌아다니며 노는 것을 즐겼다. 황후 호선상은 여러번 그에게 그러지 말 것을 간언한다. 그리하여, 황제는 호황후를 싫어하게 된다.


모기령이 기록한 것은 여기까지이다. 이제는 호선상의 인생경력을 얘기해보기로 한다.


명나라때 사람 왕기(王錡)의 <우포잡기(寓圃雜記)> 권1 <호황후>에 따르면, 호선상의 일생은 기복이 있었다. 명선종이 즉위한 후, 위에서 말한 것처럼 손귀비를 총애했고, 호황후를 싫어했다.


이때,궁중의 궁인이 주첨기의 아이를 임신한다. 낳아보니 아들이었다. 아마도 궁녀의 임신부터 출산까지 손귀비가 전력을 다해서 도운 것같다. 상세한 과정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궁녀의 아들은 손귀비가 자기 것으로 삼는다.


이렇게 하여 손귀비에게는 아들이 있는 것이 되었고, 황후 호선상에게는 아들이 없는 것으로 되었다. 그 결과 주첨기는 호선상에게 글을 올려 황후의 자리를 사양하도록 요구한다. 그후 손귀비를 황후로 책봉한다.


호선상은 폐위된 후, 장안궁으로 물러가 거주하며, 도고(道姑)가 된다. 도호는 정자선사(靜慈仙師)이다.


호선상이 폐출된 건에 관하여 당시 조정의 여러 대신들 예를 들어 장보(張輔(, 건의(蹇義), 하원길(夏原吉), 양사기(楊士奇), 양영(楊榮)등은 모두 다투지 못했다.


황태후 장씨는 호선상의 현량(賢良)을 좋아했고, 잘못이 없는데 폐출된 것을 동정했다. 그래서 그녀를 청녕궁(淸寧宮)에 거주하게 하고, 궁중에서 그녀에 대한 대우는 황후일 때와 똑같이 하도록 했다


매번 연회를 열 때면 황태후 장씨가 호선상을 황후 손씨보다 윗자리에 앉도록 조치했다. 그녀는 호선상에 대한 은정이 깊었고, 예절도 다했다.


황태후 장씨가 이처럼 호선상을 후대하므로, 황후가 된 손씨는 앙앙불락했다.


선덕10년(1435), 춘정월, 명선종이 붕어하고, 황태자 주기진이 즉위한다. 그가 명영종이다. 다음 해 연호를 정통으로 바꾸고, 황태후 장씨를 태황태후로 올리고, 황후 손씨가 황태후가 된다.


이때 무슨 일이 있건, 황태후 손씨와 같이 있을 때면, 호선상은 매번 양보했고, 더 이상 감히 손태후보다 윗자리에 앉지는 않았다.


명영종 정통7년(1442년) 십월, 태황태후 장씨가 붕어한다. 육궁내에서 지위가 있는 사람은 모두 장례에 참석해야 했다.


생전에 호선상을 보호해주던 태황태후가 죽은 후, 호선상은 궁중에서 의지할 사람이 없어진다. 긜고 폐위된 후 도고로 있다보니 호선상에게는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태황태후 장례에 참석할 때, 호선상은 감히 태후의 줄에 서지 못하고 그저 여러 비빈들과 같은 줄에 서서 참석했다. 이렇게 몸을 맞추며 지냈지만, 손태후가 이를 알고난 후에 문제삼는다. 그녀는 호선상에게는 태황태후의 장례식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 것이다. 이 일로 인하여 손태후는 호선상을 크게 견책한다.


호선상은 통곡하고 슬퍼하다가 다음해인 1443년에 사망한다.


호선상이 죽은 후, 손태후는 내각의 여러 신하들에게 호선상의 장례에 대하여 의논하게 한다. 당시 양사기는 병으로 집에서 요양중이었다. 여러 신하들이 양사기의 집으로 가서, 호선상의 후사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물어본다. 양사기는 이렇게 대답한다:


"마땅히 황후의 예의로 장례를 치르고 경릉에 안치해야 한다!"


양사기에게 물어본 사람이 양사기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만, 그건 내중(內中, 궁중의 손태후를 의미함)의 뜻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양사기는 얼굴을 돌려 벽을 향하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양사기는 단지 네 글자를 내뱉는다:


"후세매명(後世罵名)"(후세에 욕을 먹겠구나)


그 결과 여러 신하들은 손태후의 뜻에 따라, 빈어(嬪御)의 예의로 호선상을 금산(金山)에 매장한다. 시호는 정자선사라 한다.


명영종 천순6년(1462년), 황태후 손씨가 붕어한다.


황태후 손씨가 죽을 때까지 명영종은 자신이 손씨 소생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


이때, 명영종의 황후 전씨(錢氏)만이 그간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후궁의 일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결과일 것이다.


황후 전씨는 비록 내막을 알지만, 그녀는 한번도 이 일을 거론한 적이 없었다.


나중에 명영종이 중병에 들자, 황후전씨는 상황이 위급하다고 느껴, 개략 주기진이 유감을 안고 세상을 떠나게 하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황후 전씨가 곡을 하며 명영종에게 말한다:


"황상은 손태후의 소생이 아니고, 실은 궁녀 소생입니다. 궁녀는 비명에 죽었습니다. 오랫동안 칭호도 없었습니다. 그 외에 호황후는 현덕하여, 아무런 과실도 없는데, 폐위되어 도교에 귀의해 선고가 되었습니다. 호황후가 죽은 후, 조정내외에서 모두 손황후의 권위를 두려워해서, 그녀에 대한 장례를 예의에 맞지 않게 했고, 호황후는 지금까지도 명분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황상께서 가련하게 여겨주십시오."


그제서야 주기진은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기진은 황후 전씨의 말을 듣는다.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천순7년(1463) 윤칠월, 호서상에게 '공양성순강목정자장황후(恭讓誠順康穆靜慈章皇后)'라는 시호를 내리고, 능침을 만들고 부묘(祔廟)하지는 않는다. 


명영종의 황후 전씨는 평상시에 효순하고 사람됨이 조심성이 많았으며 투기하는 마음이 없었다.


정통14년(1449), 명영종이 황관 왕진(王振)의 종용으로 오이라트를 정벌하러 나섰다가 패재하고 포로로 잡힌다.


그후 주기진의 동부이모 동생인 경태제(景泰帝) 주기옥(朱祁鈺)이 즉위한다(1449년). 그가 명대종(明代宗)이다.


황후 전씨는 매일 저녁에 비통해하며 울고 하늘에 기도한다. 그러다가 피곤해지면 바닥에 웅크리고 잠들었다. 그리하여 다리 하나를 못쓰게 된다. 그 동안 너무 많이 울다보니, 눈 하나도 실명한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아 명영종이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데 노력했다.


명영종이 돌아온 후에는 태상황이 된다. 그후 그녀는 남궁에 연금되어, 꼬박 7년을 지낸다. 그 동안 주기진이 얼마나 우울하고 두려웠을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전황후가 아마도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명대종 경태8년(1457), 석형등이 탈문지변을 일으켜, 명영종이 복위한다. 다음 해에 칭제하고 연호를 천순(天順)으로 바꾼다.


복벽이후, 황후 전씨는 명대종의 왕황후(汪皇后)를 여전히 예의로 대한다.


왕황후(1427-1506), 주기옥의 본처, 경태3년(1452) 주견심(朱見深, 명영종 주기진의 장남)을 태자에서 쫓아내고 주견제(朱見濟, 명대종 주기옥의 아들)을 태자로 삼는데 반대하여, 경태제의 분노를 사서 폐위된다. 명영종이 복위한 후에는 다시 주기옥의 정실로 인정받가 성왕비(郕王妃)로 복칭된다. 그리고 태후 손씨, 황후 전씨 및 주견심의 보살핌을 받는다. 명무종 주후조(朱厚照)때 "정혜안화경황후(貞惠安和景皇后)"로 봉해진다. 나중에 남명 홍광제 주유송이 즉위한 후에는 "효연숙의정혜안화보천공성경황후(孝淵肅懿貞惠安和輔天恭聖景皇后)"로 고쳐 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