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살사(薩沙)


청나라는 약사상 민족압박정책을 진행했다. 여기에는 다툼이 없다. 가장 현저한 즈거는 바로 통치자가 규정한 '만한불통혼'즉 만주족과 한족은 혼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정책은 200년간 실행되다가 1902년에 비로소 폐지된다.


1902년 1월 31일, 광서제는 '만한불통혼'의 금지령을 폐지하여, 민족간의 장벽을 허물었다.

현재의 교과서에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민족간의 갈등을 가볍게 표현하고 있다. 그건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몽원(蒙元)과 만청(滿淸)시기에 소수민족통치자들이 한족에 대한 민족압박을 시행했다는 것도 객관적인 사실이고, 말하기 꺼릴 이유도 없다.

몽원이 직접 한족을 '제3등'과 '제4등'민족으로 분류한 것과 비교하면, 만청은 함축적이었다.

그러나, 만한불통혼의 존재는 민족압박의 존재를 가장 잘 설명해준다.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만한불통혼은 '기한불통혼(旗漢不通婚)'이라고 해야 한다.

즉, 국가통치계층인 '기인'에는 만주팔기, 몽골팔기, 한군팔기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기인은 보통의 한인과 결혼할 수 없다.

만한불통훈정책이 시행된 200여년동안 복잡한 변화는 있었지만, 대체로는 일치한다.

입관(入關)떄, 팔기의 총인원수는 개략 2,30만이었다. 만주족, 몽골족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청나라말기, 기인의 총수는 150만명으로 늘어난다. 그중 105만명이 만주족이고, 몽골인과 한인의 수량은 모두 많지 않아서 각각 20만이었다. 이들 기인은 만청의 특권계급이다. 기인으로 편제되어 있으면 국가에서 돈을 주어 먹여살린다. 한산기인(閑散旗人) 즉 놀고 있는 기인도 각종 복지혜택을 받는다. 예를 들어, 소위 양육병제도(1만여명이 있었다)가 있어, 공짜로 전답을 주었다(정전제도, 동북둔전제도), 심지어 만주족 기인의 대우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부분 한족기인을 쫓아내기도 했다.


팔기자제를 먹여살리는 것은 만청정부의 심각한 재정부담이 되었다. 한때 2000여만냥백은에 달하여, 재정의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였다.

확실히 이는 명백한 민족압박이다.

당연히 이것이 특수한 것은 아니다.

명나라가 멸망했을 때, 주씨성의 황족구성원이 개략 5,6십만명에 이르렀는데, 역시 국가에서 먹여살렸다.

만청의 가장 두드러진 민족압박은 만한불통혼이다.


만한불통혼은 도르곤시대에 형성되었고, 강희제, 건륭제때가 전성기를 이룬다.

유사한 법률은 아주 많다.

예를 들어, 건륭13년, 명확히 규정한다: 몽골, 시보(錫伯), 바르후(巴爾虎), 한군포의좌령(漢軍包衣佐領) 아래의 여자는 한인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한다.

만주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하여 한군팔기의 한족여자들 이외에 나머지 기인의 여자들은 일률적으로 한족에 시집갈 수 없었다.

이것은 법률이다. 일단 위반하면 법률의 엄격한 처벌을 받게 된다.


건륭49년, 왕세신(王世新)이라는 한족상인이 동북에서 허저족(赫哲族)의 여인을 처로 취한다. 그리고 자식을 낳았다.

이 일을 만청정부가 알고난 후, 왕세신은 칼과 족쇄를 차고 1년간 공개된 후, 변방의 군대로 보내어진다. 그의 처와 나이 겨우 3살된 딸은 모두 군인의 노비로 보내어진다. 심지어 처의 부친까지도 처벌을 받는다.

정치적 목적에서, 만청의 고위층은 특별히 만한간의 혼인을 허용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이것은 단지 정치적 수완일 뿐이었다. 수량도 극히 적고, 손가락으로 꼽을 만하다.

예를 들어, 화석공주가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에게 시집간 것이나, 화석거거가 경정충에게 시집간 것, 건륭의 딸이 공자의 후손에게 시집간 것 등등이다.

이것들은 모두 특수한 혼인이다. 고대의 화친정책과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항상 예외는 있는 법이다

기인은 어쨌든 인구가 적고, 황친국척은 왕왕 삼처사첩이다. 그렇게 되어 하층기인은 그럴 듯한 여자를 처로 맞이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만청통치자들은 왕왕 만한통혼에 대하여 눈감아주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기인의 보통남자가 한족여인을 처로 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부가 고의로 만한불통혼의 정책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다.

청나라때, 귀족이건 평민이건 모두 후대를 잇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만일 기인 남자가 한족여자를 취할 수 없게 하면, 그들은 적당한 기인여자를 구할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큰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부분적인 현상이고,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기인은 자신이 처를 얻지 못할 지언정 한족여자를 취하지는 않았다.

1958년, 대련기상공장의 만주족노동자인 왕모는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의 민족관념은 비교적 전통적이었다. 모든 여자는 반드시 족내결혼을 해야한다고 했다. 한족을 취할 수 없다고 했다. 그 결과 나는 삼십여세가 되어서 비로소 만주족여자와 결혼할 수 있었다.


그외에, 최고통치자인 황족과 귀족은 특별히 미인을 좋아했다.

기인중 만주족여자는 비교적 적었고, 용모도 통상적으로 평범했다. 동치제, 광서제 후궁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처첩을 들이는 범위를 한군팔기중의 한족여자들에게까지 넓힌다.

그리하여, 황족중에 일부 한군팔기의 여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면 강희제의 모친인 퉁자씨(佟佳氏)등이 있다.

이것은 만한통혼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 기인내부의 통혼이다.

소위 한녀(漢女)는 기인중의 한녀일 뿐이다(한군팔기의 수량은 20여만에 불과했다). 3억에 이르는 팔기밖의 한인이 아니다.

1902년이 되어서 비로소 광서제의 정책이 나오면서 만한불통혼의 정책이 폐기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만한불통혼은 만청의 국책이다. 민족압박의 수단이며 200년간 지속되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기인 특히 기인중의 만주족이 한인에 동화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둘째, 만청황족, 귀족은 기인 중의 한족여성을 취할 수 있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것이 아니라. 기인의 수량이 너무 적었다. 그래서 충분한 여자가 없었다(혹은 미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상을 몽골족과 한족여성으로 넓힌 것이다.

셋째, 만청의 기인 평민남성은 한족여성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많지는 않았다.

둘째점과 같이, 기인 평민남성이 기인여성을 취할 수 없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고,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다. 이런 행위는 보편적이지 않았고, 절대다수의 기인은 한인여성을 처로 취하지 않았다.

넷째, 만청기인여인은 절대로 기인외의 남자에게 시집갈 수 없었다. 극수소 정치적인 행위로 예외가 인정되었다.

기인의 여인이 기인외의 남자에게 시집갈 수 없다는 것은 확정적인 국책이고, 1902년에 비로소 폐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