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아초광인(我楚狂人)


남명의 가장 단명한 정권은 광주(廣州)의 소무정권이다. 후세의 평가가 가장 낮은 것도 역시 소무정권이다.


순치3년(1646) 십일월 초이틀, 남명의 대학사 소관생(蘇觀生)과 융무제(隆武帝)의 보신(輔臣) 하오추(何吾騶)등은 융무제의 동생인 당왕(唐王) 주율오(朱聿鐭)를 광주에서 감국(監國)으로 추대한다. 초오일, 당왕은 황급히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소무(紹武)라 한다. 소관생의 주재하에, 소무정권은 처음부터 청나라에 항거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지 않고, 반대로 황제의 정통을 다투기 위하여, 막 건립된 영력정권(永歷政權)과 서로 전투를 벌인다. 다만, 청나라병사들이 이때 이미 항장(降將) 이성동(李成棟)의 지휘하에 혜주, 조주를 함락시키고, 광주로 진격하고 있었다. 십이월 십사일, 청군은 14기를 보내어 거짓으로 원군이라고 하여, 이에 속아 성문을 열자, 대부대가 벌떼처럼 밀고 들어간다. 소관생은 급시 숙위 백여명을 모아서 저항한다. 다음 날, 광주성은 청군의 손에 들어간다. 당왕과 소관생등은 자결로 끝을 맺는다. 소무정권은 겨우 41일간 존속하다가 멸망한 것이다.


남명 융무제 주율건(朱聿鍵)이 포로로 잡혀 단식으로 순국한 후, 당시 당왕이던 주율오와 융무제 조정의 관리들은 광주로 도망친다. 그리고 나머지 남명세력은 광동의 조경(肇慶)에서 명신종(明神宗)의 손자이자, 명사종(明思宗)의 당제(堂弟)인 주유랑(朱由榔)을 감국으로 추대한다. 같은 해 십월 십육일, 강서 공주(贛州)가 함락된 후, 주유랑정권은 대경실색하여, 십월 이십일일 황급히 광동 조경에서 광서 오주(梧州)로 도망친다. 이렇게 광동성은 전부 버리고 돌보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대학사 소관생은 광동의 권력징공과 여러 명나라 번왕들이 이미 해로로 광주에 도착한 상황을 이용하여, 대학사 하오추, 광동포정사 고원경(顧元鏡), 시랑 왕응화(王應華), 증도유(曾道唯)등과 함께 주율오를 감국으로 옹립한 것이다. 그리고 도사서(都司署)를 행궁(行宮)으로 삼는다. 융무2년 십일월 오일 41세의 주율오는 형종제급(兄終弟及)의 원칙에 따라 황제를 칭한다. 그리고 다음해를 소무원년으로 하기로 정한다. 소관생은 옹립에 공이 있어 수석대학사에 임명되고, 건명백(建明伯)에 봉해지며, 병부를 장악한다. 주율오는 황급히 황제를 칭했으므로 등극시 입은 용포와 백관의 관복은 모두 월극(粤劇) 배우들의 옷을 빌려 입은 것이었다.


소무제는 즉위후에 영력정권과의 정통성다툼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십일월 초팔일, 소무제가 칭제하였다는 소식이 오주로 전해진다. 주유랑정권은 크게 놀라고 크게 분노하여, 4일후에 조경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십팔일에 등극하여 황제를 칭한다. 연호는 영력(永歷)이라 한다. 영력제는 즉시 병과급사중 팽요(彭耀)와 붕부주사 진가모(陳嘉謨)를 광주로 보내어, 번왕을 대하는 예로 소무제를 만난다. 그리고 소무제에게 황제의 칭호를 취소할 것을 권유한다. 수석대학사 소관생은 대노하여, 팽요와 진가모를 참한다. 그리고 다시 진제태(陳際泰)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조경을 공격하게 한다. 영력제는 병부우시랑 임가정(林佳鼎), 하사부(夏四敷)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가게 하여, 십일월이십구일 삼수현성의 서쪽에서 소무군과 내전을 벌인다. 그리고 소무제의 군대를 물리친다. 소관생은 다시 광동총병 임찰(林察)로 하여금 새로 투항해온 해적등 수만명을 이끌고 반격하게 하여, 영력군대를 대파한다. 대첩소식이 광주에 전해지자, 소관생은 광주에 오색등을 달도록 명하여, 태평성세인 것처럼 분식한다. 소무, 영력 두 황제가 서로 치고받고 싸우고 있을 때, 퉁양갑(佟養甲), 이성동이 이끈느 청나라군대는 이미 조조, 혜주를 취하고, 광주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빼앗은 남명의 지방관인을 이용하여 소무제는 평안무사하다는 잘못된 정보를 보낸다.


십이월 십오일, 소무제는 무학(武學)에 행차하고, 백관이 모인다. 그런데, 이때 청나라군사들은 이미 몰래 광주성 아래에 모여있었다. 성안에서 호응하는 자들은 이미 위장한 머리를 내려서 변발을 드러낸다. 누군가 소관생에게 이를 보고했으나, 오히려 그가 참수당한다. 소관생은 말했다: "조주에서 어제 보고가 있었는데, 어찌 여기까지 온단 말인가. 망언으로 백성들을 홀렸으니, 참해야 한다." 얼마 후 청군이 몰려온다는 것이 확인된다. 소관생은 그제서야 부대를 이끌고 청병과 일주야동안 격전을 벌인다. 청나라군대는 원래 철수할 생각이 있었는데, 내부의 배신자인 사상정(謝尙政)이 청병을 성안으로 끌어들이는 바람에 광주가 함락된다. 소관생은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 "대명충신의고당사(大明忠臣義固當死)"라는 여덟글자를 쓴 후에 자결한다. 이미 옷을 갈아입은 소무제는 성벽을 타고 올라가서 도망치려고 했으나, 추격하는 기병에게 붙잡혀 동찰원(東察院)에 갇힌다. 이성동은 사람을 시켜 음식을 보냈는데, 소무제는 거절한다. "내가 만일 너의 물 한모금이라도 마신다면 어찌 조상의 얼굴을 지하에서 뵐 수 있겠느냐" 그 후에 자결하여 순국한다. 이렇게 40일간의 통치는 끝이 난다. 소무제때의 주요관리인 하오추, 왕응화, 고원경등은 모두 청나라조정에 투항한다. 광주에 있던 24명의 명나라 번왕(藩王)은 모조리 피살당한다. 소무제가 죽은 후, 영력제는 남명의 유일한 황제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