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천애간점역사호(天涯看點歷史號)


장헌충과 이자성은 다같이 명나라말기 농민반란군의 지도자들이다. 다만 역사는 두 사람에 대한 평가를 전혀 다르게 하고 있다. 이자성은 백성들을 고난에서 구원해준 "이틈왕(李闖王)", "틈왕이 오면 양식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여 대중의 환영을 받았지만, 장헌충은 살인을 밥먹듯이 하는 "살인마왕"으로 얘기된다. 심지어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도 서로 다른 대우를 받는다. 이자성은 비록 지방 단련(團練)의 손에 죽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죽어없어졌다는 것을 믿지 않아서, 그를 위헤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다"는 '아름다운 결말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장헌충은 달랐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조차도 모른다. 더더구나 그의 죽음에 대하여 안타까워하거나 탄식해주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장헌충은 도대체 어떻게 죽었을까? 본문에서는 시간, 장소 및 사망원인의 3가지 측면에서 하나하나 얘기해볼까 한다.


우선, 장헌충의 사망시간을 보자. 장헌충의 사망을 기록한 사료는 아주 많다. 관방의 원시자료는 청군의 총사령과 하오거(豪格)가 청나라조정에 올린 보고서이다. 당시 허오거는 명을 받아 장헌충의 대서정권(大西政權)을 소탕했다. 하오거는 보고서에서 이렇게 썼다: "신은 부대를 지휘하여 십일월 이십육일 남부에 이르렀습니다. 역적 장헌충은 서충현(西充縣)에 군영을 설치해 놓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호군통령 아오바이(鰲拜) 바투루(巴圖魯)등에게 명을 내려 팔기호군을 나누어 이끌고 먼저 출발하게 했습니다. 신은 대군을 이끌고 밤을 틈타 계속 전진했습니다. 다음 날 여명에 서충에 도착했습니다. 장헌충은 기병, 보병을 모조리 이끌고 나와 대항했습니다. 아오바이등이 용맹하게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고, 장헌충을 진에서 참했습니다(斬獻忠於陣)" 이 보고서를 보면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오거의 대군은 1646년 십일월 이십칠일 장헌충이 주둔하고 있던 서충현에 도착했고, 그를 격살했다. 장헌충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하여 보고서는 약간 과장되어 있다(뒤에서 상술한다). 다만 날짜는 하오거가 조작할 동기가 없다. 왜냐하면 날짜는 고쳐봐야 그에게 도움이 될 일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날짜는 아주 믿을 만하다.


그외에, 날짜에 관하여 또 다른 방증도 있다. 장헌충은 사천에서 현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서방선교사들을 붙잡았는데, 이들 선교사들은 나중에 장헌충을 따라다닌다. 그리고 장헌충에 관한 사료를 남겼다. 선교사는 <성교입천기(聖敎入川記)>에서 이렇게 적었다: "서력 1647년 1월 3일...돌연 정탐부대의 어느 병사가 군영으로 빠르게 뛰어들어와 장관에게 보고했다. 말하기를 군영앞의 높은 산에서 만주병 4,5명을 보았는데, 각각 좋은 말을 타고 있으며, 산골짜리고 밀려 들어오고 있다고....장헌충은 피 위에서 마구 뒹굴며, 극히 고통스럽게 죽었다." 소위 서력 1647년 1월 3일은 바로 음력으로 1646년 십일월 이십팔일이 된다. 하오거의 보고서에 나오는 날짜와 단 하루가 차이난다. <성교입천기>는 민간기록이고, 여러번 옮겨적었으므로, 와전되었을 가능성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하오거의 보고서에 나온 십일월 이십칠일이 더욱 신뢰할 만하다.


다음으로, 장헌충의 사망장소에 관하여 3곳을 두고 다툼이 있다. 첫째, <명사>의 기록에 따르면, "염정(鹽亭)지역에 이르러, 크게 안개가 끼었다. 장헌충은 새벽에 가다가 봉황파(鳳凰坡)에서 우리 병사를 만났고,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지고, 장작더미 아래에 엎드려 있었다. 우리 병사가 장헌충을 붙잡아 끄집어 내어 참(斬)했다." 그러나, 염정현지에 따르면, 염정현에는 봉황파라는 곳이 없다. 둘째, <수구기략(綏寇紀略)>의 기록에 따르면, 장헌충은 염정현과 서충현의 경계지역에 있는 봉황산(鳳凰山)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염정, 서충의 경계지역에는 봉황산이라는 지명이 없다. 오히려 서충현에는 봉황산이 있다.


셋째는 바로 서충현 봉황산이다. "장헌충이 서충현 봉황사에서 죽었다"는 사료는 아주 많다. 예를 들어, <촉난서략>, <남강일사>, <죄유록>과 <서충현지>등이다. 그리고 청나라 동치연간의 서충현 지현인 고배곡(高培谷)은 <봉황산>이라는 시를 남겼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공설원흉차취형(共說元兇此就刑), 하인재필오염정(何因載筆誤鹽亭)?"(모두 원흉이 이 곳에서 처형당했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염정이라고 잘못 기록되었단 말인가?) 고배곡은 서충현의 장관으로, 그 현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을 비교적 잘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동치연간은 현재보다 사건발생시와 훨씬 가깝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장헌충은 서충현의 봉황산에서 사망했다고 확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장헌충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보도록 하자. 장헌충의 사망원인에는 "병사"도 있고, "자결"도 있고, "화살을 맞아 죽었다"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장헌충은 어떻게 죽은 것일까?


왕부지(王夫之)의 <영력실록>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장헌충은 군대가 궤멸하자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自刎而死)" 이 기록은 좀 따져봐야 한다. 왜냐하면 장헌충은 거병한지 십여년동안 기복이 심했고, 여러번 대패를 경험했지만, 장현충은 의기소침해지지 않았고, 다시 힘을 모아서 재기하거나, 명나라에 거짓항복하였다가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장헌충의 사후에도 대서군은 여전히 수십만이 남아 있었다. 손가망(孫可望), 이정국(李定國)등 여러 명의 맹장도 아직 생존해 있었다. 이렇게 강력한 병마를 아직도 보유하고 있던 장헌충이 한번의 전투패배로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장헌충이 촉중(蜀中)에서 병사했다"는 것은 <명사기사본말>과 <석궤서후집>에 나온다. 이 것도 의문이 있다. 왜냐하면 장헌충에 관한 사료는 아주 많은데, 많은 사료에서 모두 장헌충이 죽기 전에 계속하여 군대의 최일선에서 지휘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병으로 쉬고 있거나 후방이 물러나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장헌충이 청군의 기습을 받아, 화살을 맞아 죽었다는 주장이 가장 믿을만한 주장이다. <성교입천기>에는 명확하게 장헌충의 사인을 기록하고 있다; "(장헌충은) 갑옷과 투구를 입지 않고, 장창도 휴대하지 않고, 단모(短矛)외에는 아무 것도 없이 졸병 7,8명 및 태감 1명과 영외로 나가 만주군대의 허실을 정탐했다. 작은 언덕 위에 올라가서, 살펴보려고 할 때, 돌연 화살이 하나 날아와서, 장헌충의 어깨 아래를 맞춘다. 왼쪽으로 뚫고 들어가 심장을 관통한다. 즉시 바닥에 쓰러지고, 피가 많이 흘렀다. 장헌충은 피 위에서 마구 구르면서 아주 고통스럽게 죽었다."


명말청초때의 사람인 비밀(費密)은 <황서(荒書)>에서 유사하게 기록하고 있다: "장헌충은 비망(飛蟒)을 입고, 팔을 반쯤 드러내고, 일당을 이끌고 나타났다. 진충(進忠)이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비망을 입은 자가 팔대왕(八大王) 장헌충입니다." 청나라 병사들은 화살을 마구 쏘았고, 야부란(雅布蘭)이라는 자가 장헌총의 왼쪽가슴을 맞추었고, 말에서 떨어졌다. 서충현 봉황산 아래의 다보사(多寶寺)인데, 절의 앞에는 태양계(太陽溪)가 흐른다." <황서>의 기록은 <성교입천기>의 기록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논리에도 부합한다. 장헌충의 부하인 유진충(劉進忠)은 장헌충에게 매를 맞고는 청군에 투항했다. 그리고 청군의 앞잡이가 되어 길안내를 해서 장헌충을 기습한다. 그리고 보고를 받은 장헌충은 청군이 그렇게 빨리 자신의 주둔지를 정탐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아서, 소수의 병사를 이끌고, 보호조치없이 군영을 나가서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반도에게 발각되어, 청군이 마구 쏘아대는 화살에 맞아서 죽은 것이다.


이제 장헌충의 사망에 대하여 우리는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1646년 십일월 이십칠일, 서충현 봉황산에서 청군에 맞서 싸울 때, 군영을 나가 청군을 살피던 장헌충은 청군의 기습을 받아 화살을 맞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