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야독사서(夜讀史書)


수나라는 중국역사상 단명한 통일왕조중 하나이다. 왕조는 겨우 37년간 존속했다. 수나라는 수문제 통치시기와 수양제 통치전기에 휘황한 전성기를 누렸다. 다만 수양제가 재난적인 삼정고구려(三征高句麗) 전쟁후에 국력이 신속히 고갈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진다. 결국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수나라는 종말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문제가 여기서 나온다. 수양제는 왜 국력을 탕진하면서까지 고구려와 짜우려 했을까? 그 근원을 따져 올라가보면, 하나의 외교접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업7년(611년) 수양제는 새북으로 순행을 간다. 그리고 돌궐의 속지에서 당시 이미 수나라에 신복(臣服)한 계민칸(啓民可汗)을 접견한다. 원래 이런 왜교활동은 상징적으로 처리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 회견에 한가지 에피소드가 끼어든다. 원래 수양제가 도착하기 전에, 고구려(기원전1세기에서 7세기까지 지금의 중국동북의 남부와 한반도의 중북부에 존재했던 정권)가 이미 사신을 보내어 돌궐인과 소통하고 있었다. 수양제가 도착한 후, 계민칸은 이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구려사신과 같이 수양제를 배알한다.


수양제는 이 일을 알고난 후, 마음 속으로 불안감이 싹텄다. 그는 이 두 개의 잠재적인 북방강국이 만일 연합하여 수나라에 대항한다면, 아주 골치아프게 될 것이라고 여긴다. 황제와 동행했던 중신 중에서 배구(裴矩)도 그 문제를 인식했다. 그리하여 그는 시기를 놓치지 않고 수양제에게 말한다: "고구려는 주나라때 기자(箕子)의 봉지입니다. 한, 진때 중국의 일부였습니다. 선제가 재위했을 때 토벌할 생각을 했었는데, 폐하께서 어찌 그곳을 오랑캐의 땅이 되도록 놔두시겠습니까. 우리가 마땅히 사신을 보내어, 그들 국왕으로 하여금 조정에 와서 폐하에게 신복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따르지 않으면 토벌하셔야 합니다." 수양제는 배구의 말이 맞다고 여겨 그의 건의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수나라 사신이 고구려에 도착한 후, 고구려국왕은 즉석에서 거절한다. 그리하여 수나라의 고구려를 정벌하는 행동이 서막을 열게 된다.


대업8년(612년)부터 대업10면(614년)까지, 수나라는 세번 고구려를 정벌한다. 누적 투입병력이 삼백만에 가깝다. 결국 고구려가 표면적으로 신복하겠다고 대답했지만, 수나라는 아주 비싼 댓가를 치른 후 이 전혀 달갑지 않은 형식적인 승리를 얻어낸다.


수나라가 처음 고구려를 정벌하는데 나선 주요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고구려가 돌궐과 연합하여 동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옛 강역을 수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스스로 망국에 이르게 된다. 댓가가 너무나 컸다. 그렇다면 수양제는 고구려와 끝까지 싸워야할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 답은 있었다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목적 이외에 수양제가 고구려를 끝까지 공격한 것에는 더욱 중요한 윈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제1차 정벌이 실패한 후, 개인적인 권위가 크게 도전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정치환경에서 황제가 일단 충분한 위신을 갖지 못하게 되면, 왕왕 제국내부의 다른 군사귀족집단으로부터 도전을 받게 된다. 613년에 발생한 초국공 양현감의 반란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므로, 수양제는 반드시 고구려를 정복하는 목표를 하루빨리 달성해야 했다. 그런 위대한 승리를 가지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카리스마를 세워야 했다.


그러나, 이상은 풍만하지만, 현실은 초췌하다. 연속되는 실패를 겪은 후, 수나라의 내부는 분열되고 붕괴된다. 도처에서 망국의 모습이 드러난다. 617년, 수나라의 태원유수, 당국공 이연이 태원에서 거병한다. 그리고 신속히 수나라의 경사 대흥성(장안)을 점령한다. 618년, 이연이 등극하여 황제에 오른다. 중국은 이제 당나라시대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