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5.19. 창원공씨 추원재 원경


창원공씨의 시조인 공소(孔紹)의 산소가 위치한 곳에서 동쪽으로 약 140m에는 공소의 위패를 모신 추원재(追遠齋)가 있다. 추원재의 주소는 합포구 예곡동 407-4번지이며, 인근에는 다른 집들이 없는 산중이다. 이곳에는 추원재 담장 밖의 고직사와 출입문 겸 집무실인 대문과 추원재가 있다.
공소(孔紹)는 공자(孔子)의 후손으로 창원공씨(昌原孔氏)의 시조이며, 초명은 공소(孔昭)였으나 광종의 이름을 피하여 ‘공소(孔紹)’라 하였다. 할아버지는 공지원(孔之原)이고, 아버지는 공완(孔浣)이다.
원나라의 순제(順帝) 때 한림학사로 임명되어 공민왕이 고려에 올 때 시종하였고, 그 뒤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었다. 창원백(昌原伯: 檜原君이라고도 함)에 봉해진 뒤 원나라에 돌아가지 않고 벼슬이 끝난 후 창원에서 살았다.




추원재 대문 채


추원재에는 「追遠齋東廡記」,「追遠齋重建記」,「追遠齋東廡記」,「追遠齋重修記」,「追遠齋增修記」 등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여기에는 1984년 9월에 화산 권용현이 쓴 추원재증수기(追遠齋增修記)의 원문과 해문을 옮겨 둔다.




추원재 편액




[원문]
追遠齋增修記
距昌原府西二十里 斗尺山之陽有負坎 而崇其封者 故高麗會原君諱紹衣履之藏 而齋於其下名以追遠者 後孫之爲寓慕齊宿而設者也 公爲先聖五十四世之次嫡 而以元翰林學士 東出任高麗恭愍朝位至 門下侍郞 封檜原君 東方之有孔氏始 此盖其浮海而來 始泊於此仍以居 焉故受封卜葬皆於是 焉公之蹟雖世遠莫考 然當元季政亂 危亡將至 則避地東來 盖因亂邦不居之訓 而遵夫子欲居九夷之志 則其見幾色擧之智己明矣 仕於朝而致位卿宰 則其才德之優又著矣 洵無愧爲聖人之裔 而至其孫又有漁村俯 孤山隱德業名行 著稱於世厥 後子姓繁衍蔓延域中 則可見其垂範之長 而培根之厚也 盖夫子爲天下所宗 則夫子之後宜 爲天下所愛慕況如公之賢 爲夫子之聞孫 而又東方之肇奠 則東人之愛慕於公者爲如何哉斗尺之阡 爲人所指占稱誦者有素矣 況於其子孫乎此 齋之所以築也 齋之創往 在哲宗己未 而其後數十年 癸丑又因其址 而重建之今 又世久毁敗且以狹隘難容乃就其舊 而重新之拓其址 而增策之益加恢張其倡議經紀者 後孫炳悳始終幹務者 震乙樹泳請余 記其事余謂禮有百世不遷之宗三 而自他國始遷者居其一 則公之於孔氏爲不遷之宗 而固當百世可祀況承先聖之緖 而垂東方則子孫追慕之誠 豈凡族之可 比耶夫遠者無盡之稱 則孔氏之追遠不但在於公必推 而上之遠溯先聖之道 而期其謹守勿失然後 始盡追遠之道 而益有光於斯齋也 不可但以丘龍之護齋舍之修謂畢能事也 是又孔氏之所 當思者故以是諗之
孔子誔降二千五百三十五年 甲子菊秋
花山 權龍鉉 記


[해문]
추원재증수기
창원부 서쪽 20리 거리의 두척산 양지바른 곳에 무덤이 있고 그것을 높이 봉해 둔 것은 옛 고려 회원군 휘, 소(紹)의 묘소가 있고 재실은 그 아래에 있는데 이름을 추원(追遠)이라 한다. 후손들이 추모하고 재계하고 묵기 위하여 지었다. 공은 선성(先聖:공자)의 54세손 둘째 아들이요 원나라 한림학사로써 동쪽으로 나와 고려 공민왕 때 조정에서 벼슬하여 지위가 문하시랑 이었고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져 동방 공씨(孔氏)의 시조가 되었다. 이분들은 대개 바다에 배를 띄우고 와서 처음 정박하여 이로 인해 살게 되었다. 그런고로 봉후를 받고 자리를 가려 장례하게 되었으니 모두가 이러함이다. 공의 자취는 비록 세대가 멀어 상고할 수 없지만 원나라 말기에 정난(政亂)을 당하여 장차 망할 위험에 이르니 동쪽으로 온 것이 피란처이다. 대개 나라가 어지로움으로 인해 살지 못함은 부자(夫子:공자)의 가르침이요 구이(九夷:상고시대 동방에 있던 구종의 오랑캐)들이 살고자하는 뜻이 곧 빌미가 보여 밝은 지혜로 거동하였음이라 조정에 벼슬하여 지위가 대신과 재상에 이르렀으니 그 재덕이 우수하고 또 드러났도다. 성인의 후예로써 부끄럽지 않게 믿겠고 그 자손들도 어촌에 엎드려 고산(孤山)에 의지하여 덕업(德業)과 명행(名行)이 나타나 세강에서 칭찬하고 있다. 그 자손들은 성중()에서 넓게 번성하여 우거져 모범을 드리워 길이 나타났고 근본을 북돋우어 두터웠도다. 대개 공부자께서 천하의 도종으로 천하가 애모하는 바이니 하물며 공의 어짐은 공부자(孔夫子)의 소문난 자손이다. 또 동방에서 일찍 제물을 올렸음은 동인들이니 공을 애모함도 어떠하랴 두척(斗尺)의 산소를 사람들이 손짓하며 평소에 외우니 하물며 그 자손들이 재실을 지음에야. 재실을 창건함은 옛날 철종 기미년이고 그 후 수십 년이 지나 계축년에 또 그 터에 중건하였고 지금 또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지고 퇴하여 또 지경도 좁고 수용하기 어려워 이에 그 옛터를 다시 개척하여 새로짓고 더욱 확장을 더하여 증축하였다. 그일을 발의하여 시작한 자는 후손 병덕을 청하기에 나는 이르기를 예(禮)에 백세토록 종실에 세가지 바꾸지 못함이 있다 하였다. 타국으로부터 처음 옮겨와 사는데 그 하나는 곧 공이 공씨의 종실을 옮기지 않음이요 굳건히 백세토록 가이 제사를 드리우고 하물며 선성의 실마리를 동방에서 계승하니 곧 자손이 추묘의 정성에 어찌 뭇 씨족들과 비교하겠는가. 대저 멀리 다함없이 칭송하니 곧 공씨들이 추원함은 다만 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위로 거슬러 올라가 선성(先聖)의 도이니 그것을 삼가 지키기를 빌며 잃지 않는 후 추원의 도를 다함이요 이 재실의 빛이 더할 것이다. 다만 산소를 보호하고 재실을 수리한다고 능히 일을 끝냈다고 이르기는 불가하다. 이는 또 공씨들이 마땅히 생각하는 고로 이에 간언하노라.
공자탄강 2535년 갑자국추(1984년 9월)
화산 권용현 기록함.





출처 및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공소(孔紹)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2004.1)/삼덕정판인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