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9.16. 창원 진북면 지산리 진주강씨 영모재 전경


진북면 지산리 216번지는 진주강씨 관서대장군파 영모재(永慕齋)가 있고 영모재의 뒤쪽엔 주인공인 해은공(海隱公)의 묘소가 자리한다. 1957년 11월에 완공한 영모재는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聖碩(성석) 盛義(성의)공의 위패를 모시고 제례(祭禮)를 올린다.
영모재의 기문을 보기 위해 영모재를 관리하는 분을 만날까 했지만 인근 주민의 말씀을 듣고 다음 기회에 다시 찾아오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주련과 영모재 편액은 담장 밖에서 렌즈로 당겨 찍었다.




진산리 진주강씨 영모재의 근거리 모습



정면 3칸 측면 1.5칸, 팔작지붕 양철지붕을 한 아담한 영모재 모습


[原文]
永慕齋記
舊鎭海縣西國士峯下 硯巖之上 有丙舍三間翼然 而新起者卽居近鼎谷姜氏 爲其先海隱公歲祭 齋宿之所 而扁其楣曰永慕 日姜君宰基鼎基訪余子合浦之寓 而請曰吾先祖海隱府君 以歷世軒冕之裔 生稟聰穎究心 儒學深有所得於 世俗富貴芬華泊如也 自丹城故居筮遯于 鎭海桑林村鼎谷 益硏經史 以自適敎諸子 以農桑不省 世間有何事所歌詠者 有海隱野集殊傳誦于鄕人 而間經兵燹蕩逸無存 者實爲孱孫 無窮之限 而今示齋之建也 則盖亦樓代經營 而未就者甚矣 其不振可知也 惟君子記而明之 宰基又曰是役也 費多出於鼎基君 君雖不自居 爲吾族者 豈可沒乎辛吾子之亦有考焉 余聞而作而曰有是哉姜氏之從玆 有作興之望也 盖未論姜氏之先赫 爲大族於國中 以至公之曾祖 祖亦有綿綿顯達 而逮公之也 稱若沈晦然學問 以賁其身節儉 而裕其後之于今日也 而數十雲仍有士 以畢業于大學 農以安分于祖基 商以皆雄于城市者 而是齋之築 亦有能快然特損 初不較計費 是豈非公之積德餘慶久 而猶陰也耶 吾知姜氏之相聚於 是齋追遠 而修睦也 怡怡焉秩秩焉 使薄世圮族之徒見 而泚子顚 則亦豈非公之澤延及於 無旣旣也 是役也 後孫元基鍾柱運材於遠地 頗屬賢勞是亦可書 而勸來者也 余旣美姜氏之擧 而重二君之請 爲之議如右
歲丁酉陽復節 夏山 成純永 記


[해문]
영모재기
옛 진해현(鎭海縣) 국사봉(國士峯) 서쪽 아래 연암(硯巖)의 위에 세간의 병사(兵舍 ; 묘막 또는 재실)가 나래치듯 세워져 있는 것은 가까이에 살고 있는 정곡강씨(鼎谷姜氏)들이 선조이신 해은공(海隱公)을 위하여 해마다 묘사 때 제계하고 묵는 장소요 그 현판 이름을 영모(永慕)라 하였다. 하루는 강재기(姜宰基) 정기(鼎基)군이 합포에 사는 나를 찾아와 청하는 말이 우리선조 해은부군께서는 대대로 역임한 헌면(軒冕; 벼슬이름)의 후예로 타고난 천성이 총명하고 빼어난 유교학문에 깊이 정진하여 세상풍속을 터득한바 있고, 속세의 부귀영화에 욕심이 없었다.
고향인 단성(丹城)으로부터 진해 상림촌인 정곡에 은거하기로 마음먹었다.
농사를 짓는데도 소홀함이 없었다. 세간의 무슨 일이던지 노래 불러 읊었음은 해은야집(海隱野集)에서 특히 향인들을 통해 전송(傳誦)되었다.
난리를 겪고 난 뒤 한 개라도 온전한 것이 없으니 실로 잔약한 후손들은 끝없는 한으로 남아 지금 이 재실을 지음도 곧 여러 대에 걸쳐 시도하였으나 이루지 못함이 심히 부진했음을 가히 알겠도다.
오직 군자께서 기록으로 밝히기를 원했고 또 재기(宰基)가 하는 말이 이 역사(役事)에 드는 비용을 정기군(鼎基君)이 가장 많이 부담했고 정기군(鼎基君)은 비록 자신은 우리 일족과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어찌 자기가 빠질 수 있겠느냐 하면서 그대께서 또한 깊이 생각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옳다고 했다.
강씨(姜氏)들이 행하는 일이 흥성해질 조짐이 있음이로다. 강씨들은 선조의 위업을 논하지 아니해도 나라 안에 큰 씨족이니라. 공의 증조부 조부에 이르러 또한 계속 이어 현달하였고 공에 이르러서도 어둡고 잠겼던 학문을 닦아 칭송하였고 그 몸은 절약과 검소로 가꾸어져 그 후손들에게 오늘날까지 이르러 수십 명의 후손들이 대학공부를 마친 선비가 있고 농사지음에도 조상의 터전에서 분수를 지켜 편안히 살았고 장사를 하여 시중에서 재력이 뛰어난 자가 이 재실을 짓는데 또한 능력이 있어 쾌히 특별성금을 헌납하였음이라. 처음 계획된 비용에 견주지를 못했는데 이것은 어찌 공이 오랫동안 덕을 쌓으므로 인한 경상가 아닐 수 있겠는가. 오히려 음덕(陰德)이로다. 나믐 강씨들이 서로 모여 이 재실에서 선조를 추모하고 화목함을 꾀하고자 하는 그 뜻을 알겠노라. 기쁘도다. 엄숙하도다. 메마른 세상에 씨족들의 무너진 무리들이 나타나는데 그대들은 조상에게 이마를 조아리니 이 또한 공의 혜택이 뻗어 미침이 없다할 수 있겠는가. 이 일에 후손 원기와 종주가 먼 곳으로부터 재목을 운반하였으니 이 역시 자못 현로(賢勞 ; 자기 재산을 써가면서 노력함)의 공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는 방문객이 있어 이에 기록함이니라.
나는 이미 강씨들의 거사가 아름다웠고 거듭 두 분이 청함에 이상과 같이 기록하노라.
정유(丁酉, 1957)년 양복절(陽復節; 11월) 하산 성순영(成純永) 기록함.




영모재 편액



영모재 주련

自今齋宿有所 이제 스스로 재숙(齋宿)¹⁾하는 장소를 만들었으니
永世勿墜家亭 이 세상 영원토록 집안의 정자가 헐리지 말지어다.
勉爾孝弟忠信 효제충신(孝悌忠信)²⁾하는 것에 힘쓰며
祀事序盡徵誠 제사에 관한 일의 차례는 정성을 다해 구하라.


【주석】
재숙(齋宿)¹⁾ : 제례를 지낼 때 잠자는 집
효제충신(孝悌忠信)²⁾ : 어버이에 대한 효도(孝道), 형제(兄弟)끼리의 우애(友愛), 임금에 대한 충성(忠誠)과 벗 사이의 믿음을 통틀어 이르는 말


출처
마산문화지-마산문화원/삼덕정판인쇄사(2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