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9.16. 진전면 오서리 밀양박씨 화수당(花樹堂) 전경


진전면 오서리 527-4번지는 밀양박씨의 재실 화수당(花樹堂)이 있는 곳이다. “화수(花樹)란 직역하면 ‘꽃이 피는 나무’라는 뜻이지만 ‘집안이 화목하고 번창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용어이다. 진전면사무소는 이곳 오서리(五西里)에 위치하는데 ‘오서리’란 진해현 서쪽에 있는 다섯마을이라는 뜻으로 월안리(月安里), 회동리(檜洞里), 탑동리(塔洞里), 동대리(東大里)와 서대리(西大里)를 말한다. 특히 동대마을(東大里)과 서대마을(西大里)은 하나의 마을처럼 모여 있으며 관공서는 모두 동대마을 쪽에 집중된 모습이다. 동대마을은 안동권씨의 집성촌이고 서대마을은 밀양박씨의 집성촌이다. 밀양박씨의 화수당(花樹堂)은 서대마을의 옛 국도2호선 길가에 자리하고 있다.




신암(新庵) 박연홍(朴連弘)공의 시비(詩碑)의 제목은 '증자헌대부병조판서신암 밀성박공휘연홍지시비'라 새겼다.




화수당의 대문은 춘양문(春陽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대문의 좌측에는 신암(新庵) 박연홍(朴連弘)공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아래에는 화수당의 기문을 소개한다.




'춘양문(春陽門)' 대문 편액의 글씨는 염봉철(廉鳳哲)



화수당(花樹堂)편액



화수당(花樹堂) 주련
蘇譜休云觀己盡 소보(蘇譜)를 아름답다 이르는 것은 진심을 다해 보이도록하며
挑圓長有悅其情 도원결의 장유유서와 같이 그 마음을 기쁘게 함이다.
毋隱詩書光世業 시서(詩書)를 숨기지 말며 세상에 빛과 업을 더하니
且看花木後春榮 또 다음을 보니 나무에 꽃이 핀 후의 찬란한 봄 같아라.




[原文]
花樹堂記
舊鎭西竹谷之里 密城朴氏世居焉 積山之蒼翠列帳 竹谷川之濶 擁流田野宣於 稼墻道路便於 交通可謂一方之佳境樂士也 朴氏之先 有新庵公諱連弘 氣象異凡 瞻略出類 龍蛇之亂 以天馬神劍踴躍斬賊 又擧大石投殺甚衆 今藍津其石尙立 因與固城八壯士 殾勢相依 大振兵威 固晉泗昆之間賴而得安 忠翼公郭忘憂壯其忠勇聞于 朝廷特除訓鍊院僉正 亂靖後陞掌隷院判決事 錄宣武原從勳 後贈兵曹判書 今其後承慕仰肯肯建龜川齋 廣爲宗約典堂 壽藏在嶺外築履露齋於 楸下齊宿 而歲薦樹戰績碑於鳳山下以紀念之 朴氏之崇祖 殊誠鄕省所艶誦不己者也 然而朴氏諸公猶不 以爲多乃相與謂曰 先德蔭讀 其麗蕃衍列守門戶垂 而爲幸比來生業機關類多在外諸族中隨 而遷轉者稍稍矣 固有韋氏 而花樹爲園月會 以睦族至 今稱爲勝事可法也 於是門中所選 律鉉光鉉氏率先宣力 而主其役鳩材招工 數閱月功告訖堂宇門 廊皆備淸 禁列叢紅紫 芬馥異常所 以證花樹義也 因扁其堂曰花樹 門曰春陽 遺門內烈主注敬徵 余記事之文 盖舊已欐有頌楣有記 而記出於本宗所 爲更欲以他人述 爲要所懇在是 余以不文固辭 二君不以爲然久 而彌勖舊要之言 終不可不重也竊念 花樹之名倡於 唐之韋賢月會故事 而盖其九族之會 爲爛漫團樂如春風 花樹之象徵 故名言然推其源 委窮其眞意所在 則非惟韋氏專其美 漢之兩疏饋金宗族 東平張氏之九世同居至 宋范吳中之義 庄蘇眉州之族譜亭皆爲是也 吾東士大夫家亦循是 而行之團和懿睦 以持門戶 朴氏之爲此不亦宜乎 嵐今道喪倫弊西歐風靡 家族核論同姓婚說播多橫流幾乎 人倫之陷入禽獸之瑁矣 其不爲世道凜惕矣乎 噫吾知朴氏之先見有明 能通古今常然之外也 旣己能羹墻烈祖 炳心忠孝 以篤其本繼 以團聚睦族花樹成華藉 爲千蔽以防彼哉 蠢動孰敢有逼於此乎哉入 其門而卽之以溫升 其堂而春和自生因與之孝悌 以勉醉飽 以德悅親戚之情話 講彭澤歸來之賦茴 天倫之樂事誦靑蓮春夜之序 則千古精華與高門花樹流芳於無窮矣 顧不韙歟然徒其名 而無其實君子恥之許 其巳能而勖其未然朋友所宜故 余於諸公申勤及此 惟諸公胥克加勉之爲幸甚
歲癸亥中秋節 孔巖 許格 記


[해문]
화수당기
옛 진해현 서쪽의 죽곡리(竹谷里)는 밀성박씨(密城朴氏)가 대를 이어 살아 온 곳이다. 적석산(積石山)의 푸르름이 장막(帳幕)을 널어놓은 것 같고 죽곡천(竹谷川)이 넓게 돌아 흘러 전야(田野)는 농사에 적합(適合)하고 도로는 교통이 편리(便利)하여 한 지방의 아름다운 지경(地境)이라 낙토(樂土)라 이를만하다.
박씨의 선세(先世)에 신암공(新庵公) 휘 연홍(連弘)이 겨셨는데 기상이 범상(凡常)치 않고 첨락(瞻略)이 무리에서 뛰어나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준마(駿馬)을 달려 심검(神劍)을 휘 둘 면서 적진(敵陣)에 뛰어 들어가 적의 목을 베고 또 큰 돌을 들어 던져 죽인 것이 심(甚)히 많아 지금 회화면(會華面)의 남진(藍津)에 그 돌이 아직도 서있다.
이로 말미암아 고성의 여덟 장사(壯士)와 함께 명성과 위세(威勢)를 서로 의지(依持)하고 병사의 위력(威力)을 크게 떨쳐 고성(固城)·진주(晉州)·사천(泗川)·곤양(昆陽)에서는 이분들의 힘을 입어 안정을 얻었고 충익공 곽재우장군(忠翼公 郭再祐將軍)이 그 충성과 용맹(勇猛)을 장(壯)하게 여겼고 그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특별(特別)히 훈련원첨정(訓鍊院僉正)의 벼슬을 내렸고 난이 평정된 후에는 장례원 판결사(掌隷院 判決事)로 승진(陞進)되었다.
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고 뒤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지금 그 후손들이 우러러 추모하여 선세(先世)의 업을 이어 구천재(龜川齋)를 지어 넓게는 종약전당(宗約典堂)으로 하고 유품이 보관되어 있는 방마령고개 넘어 있는 묘소(墓所) 아래에 이로재(履露齋)를 지어 놓고 제계(齊戒) 유숙(留宿)하면서 해마다 제사(祭祀)를 받들고 봉산(鳳山) 아래에 전적비(戰績碑)를 세워 기념(紀念)하고 있다.
박씨들이 조상을 숭배하는 정성이 특별하여 고을에서 부러워하고 있으며 칭송(稱訟)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박씨의 여러분들이 오히려 이로써 만족(滿足)하게 여기지 않고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선세(先世)의 음덕(蔭德)으로 후손이 번연(蕃衍)하여 대대로 문호를 지켜 내려옴이 다행(多幸)이다.」라고 하였다.
근래(近來)에 생업의 종류가 많아 타향에 있는 여러 종족들 가운데 형편(形便)에 따라 옮기는 사람이 차차로 불어나고 있다. 옛날에 위씨(韋氏)가 화수(花樹)로 동산을 만들어 달마다 모여 종족간(宗族間)에 화목(和睦)을 도모(圖謀)하여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일이라고 일컫고 있으니 본받을 만하다.
지금 이 문중에서 선출된 율현(律鉉) 광현씨(光鉉氏)가 솔선(率先)하여 능력을 발휘(發揮)하여 역사(役事)를 주간(主幹)하면서 인재(人才)를 모우고 장인(匠人)을 불러 수개월(數個月)이 지나서야 공사를 마치니 당우(堂宇)와 대문과 낭무(廊廡)가 깨끗하고 산뜻하게 갖추어졌으며 오색(五色)의 아름다운 꽃을 심어 그 향기가 범상치 않아 화수(花樹)의 뜻을 증험(證驗)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당(堂)을 花樹라 편액(扁額)하고 문을 춘양(春陽)이라 하며 유문(遺門)의 묘우(廟宇) 안에는 심주(神主)를 모시고 공경(恭敬)을 다하였다.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하면서 이미 옛날의 상량문(上梁文)과 기문이 있지만 기문은 본종(本宗)에서 나와 다시 타인(他人)이 지은 것으로 하고자 간절(懇切)하게 요구한 뜻이 여기에 있다. 내가 불문(不文)이라 굳지 사양(辭讓)하였지만 두 사람이 이렇게 여기지 않고 오래도록 더욱 옛날부터 친분이 있는 것으로 말하여 끝내 허락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곰곰이 화수(花樹)의 이름을 생각해보니 당(唐)나라 위현(韋賢)이 달마다 모인 고사에서 비롯되어 이는 구족(九族)이 모여 단악(團樂)이 지극(至極)하여 그 즐김이 봄바람에 꽃이 활짝 핀 상징(象徵)과 같으므로 화수(花樹)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근원(根源)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어찌 그 참뜻을 다 궁구(窮究)할 수 없으나 비단 위씨(韋氏)만 그 아름다움을 독전(獨傳)한 것이 아니고 한(漢)나라 양소(兩疏)¹⁾가 태자태전(太子太傳)의 벼슬에서 물러날 때에 받은 금으로 종족에게 잔치를 베푼 것과 동평인(東平人) 장공예(張公藝)²⁾는 구대가 함께 살은 것과 송(宋)나라 범중엄(氾仲淹)³⁾에 이르러 종족에게 은전(恩典)으로 받은 물품과 녹본(祿俸)으로 하사(下賜)받은 것을 항상 족인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 아울러 의전(義田)과 의택(義宅)을 설치(設置)하였고 미주(眉州)소씨(蘇氏)⁴⁾의 족보(族譜)가 우뚝하게 화수(花樹)의 뜻을 가진 것이다.
우리나라 사대부(士大夫)의 가문도 이를 따라 화목(和睦)하게 단합(團合)하여 문호(門戶)를 부지(扶持)하였으나 박씨들이 이 집을 짓는 것 또한 마땅하지 않는가? 하물며 지금 인륜이 상실되고 서구(西歐)의 문명(文明)을 따라 핵가족화(核家族化)되고 동성동본(同姓同本)의 혼인설(婚姻設)이 파다(播多)하게 유행(流行)하는데 이는 거의 인류(人類)를 금수(禽獸)의 우리로 몰아넣게 되니 세도(世道)가 슬프게 되지 않았던가.
아아! 나는 박씨가 앞날을 내다보는 밝은 지혜(智慧)는 능(能)히 고금(古今)을 통하여 보통(普通)사람과 같이 변(變)하지 아니한 것을 알겠도다.
이윽고 능히 열성조(烈聖祖)를 사모(思慕)하고 충효(忠孝)의 마음을 써서 그 근본(根本)을 독실(篤實)히 하고 이어 종족(宗族)이 모여 화목(和睦)하여 화수(花樹)의 꽃이 피어 무성(茂盛)한 감당(甘棠)⁵⁾나무를 자르지 말고 베지 말라는 뜻에 의지하여 그 변화(變化)을 막았도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무리들이 감(敢 )히 여기에 침범(侵犯)할 수 있겠는가.
그 문에 들어가면 온화(溫和)하게 되고 그 당(堂)에 오르면 봄날의 화창(花暢)한 기운(氣運)이 저절로 생겨 이로 말미암아 함께 효제(孝弟)에 힘쓰고 그 덕(德)에 취(醉)하여 친척(親戚)의 정화(精話)를 즐겁게 하고 도연명(陶淵明)의 「歸去來辭」를 청론(請論)하면서 천륜(天倫)의 악사(樂事)를 펴고 이태백(李太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를 외우면천고(千古)의 정화(精華)와 훌륭한 문중(門中)의 화수(花樹)가 함께 그 향기(香氣)가 무궁(無窮)하게 흘러가게 될 것이다.
생각하건대 위대(偉大)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 이름만 헛되고 실상(實相)이 없으면 군자(君子)가 부끄럽게 여길 것이며 그 지나온 것을 기술(記述)하고 앞으로 할 일을 힘쓰게 한 것은 친구(親舊)로서 마땅히 하여야할 일이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거듭 힘쓰게 하고 여러분이 서로 힘써 주면 다행(多幸)이겠다.
계해(癸亥,1973)년 중추절(8월 15일) 공암(孔巖;陽州의 옛 이름) 허격(許格)이 기록함.


【주석】
한(漢)나라 양소(兩疏)¹⁾ : 소광(疏廣), 소(疏)를 올려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로 돌아가기를 비니 임금이 황금과 태자를 하사하였다. 그는 시골로 돌아와 술과 음식을 준비시켜 날마다 친족과 친구를 청하여 다 사용하였다. 자손이 유산을 남겨 주기를 바랬으나 그는 “현명하면서 재물이 많으면 그 뜻을 손상하고 어리석으면서 그 허물을 더하게 된다.”며 줄려주지 않았다.
동평인(東平人) 장공예(張公藝)²⁾ : 구세동거(九世同居)로 유명하다.
송(宋)나라 범중엄(氾仲淹)³⁾ : 젊었을 때 가난하다가 뒤에 출세하여 재상이 되고 후한 녹봉을 받게 되자 수입을 친족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 극빈한 친족의 부양·혼인·상장(喪葬)을 도운 사람.
미주(眉州)소씨(蘇氏)⁴⁾ :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 권7 족보서(族譜序) 참조
감당(甘棠)⁵⁾ : 소공(召公)의 유덕(遺德)을 추모해서 노래한 것. 시경(詩經) 권1 국풍(國風) 소남(召南) 감당장(甘棠章) 참조




화수당 상량문




출처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