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9.16. 오서저수지를 수반 삼아 놓인 수석 같은 서계재(西溪齋)


예전에 노거수를 찾고 있을 때 함께 탐방을 한 벗이 자신의 선조를 모셔 둔 곳이 탑동이라면 안내를 하여 오서리의 탑동을 둘러 본적이 있다. 그 때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건물이 오서저수지를 수반 삼아 물위에 떠 있는 듯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서계재(西溪齋)였다.
진전면 오서리 1393번지에 위치한 서계재(西溪齋)는 서계정사(西溪精舍)라고도 부르는 권득래(權得來)의 묘각(墓閣)이다. 인근에는 서계재(西溪齋)를 관리하는 고직사(庫直舍) 외에 아무른 건물이 없다. 서계재(西溪齋)는 어른 키 높이의 흙·돌담장을 쌓고 정면 4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 전통 와가(瓦家)이다.
방문 당시 대문이 잠겨있어 내부를 구경할 수 없었고 대문에 붙어있는 연락처에 전화를 하여 뜻을 전하고 이후 그곳에 살고 있는 후손분의 도움으로 편액 및 기문, 주련 등의 사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련 등은 문장의 순서를 알 수 없어 지금 소개하기 어렵다.




오서저수지 맞은편에서 확대해서 서계재를 촬영한 모습



서계재에 접근해서 촬영한 모습



담장 넘어 본 서계재



서계재의 후손인 설송 권오진(雪松 權五辰)이 보내 온 서계정사 편액



서계재(西溪齋) 편액



西溪齋記[原文]
直鎭海縣西十里塔洞有曰 西溪齋者 故權公處士諱得來之墳菴也 西溪齋者公自號也 遂以西溪爲齋扁焉 公賢而有文其學務求實踐 而不慕虛譽 亦不隨衆爲進取事囂囂 然常有以自樂嘗 有詩曰菊蘭眞我友桃李屬誰家盖自明其己志也 公歿其後嗣謹守其遺模皆有以自重 而無有失義 又能致其力於奉先敦睦之道 建齋舍塋下置守戶劃祭田具邊豆省掃有時 而謹香火之誠 宗族有會 而講花樹之誼蓋 悽愴之感 天倫之樂竝行 而有不悖矣 吾聞之天道不翕聚於始 則不能有其終之發人事無所本於前則無以見其後之昌 是以古語曰 漑其根者必食其實 公旣以深仁 實賤植其本 而後嗣之盡 孝於報本乃其所以漑根者耳夫如是權之門安得不昌大乎 公雖以菊蘭 爲友而無慕乎 桃李之榮 然吾必謂厚積而發 則將見庭蘭之益 茁其芽而桃李之盈 于門是可以執契而俟也 寧可君請記于余 余不文不足以張 其事姑誦所聞 以復之云
歲甲戌流火節 晉山 河謙鎭記


서계재기(西溪齋記)[해문]
진해현에서 서쪽으로 10리 쯤 떨어진 탑동(塔洞)에 있는 서계재(西溪齋)는 옛 권공처사(權公處士) 휘(諱) 득래(得來)의 묘각(墓閣)이다.
서계재는 공(公)이 스스로 붙인 호(號)인데 자호(自號)인 서계재를 재호(齋號)로 편액(扁額)하였다. 공은 어질고 학문(學文)이 있으며 실천(實踐)을 구하는데 힘써 헛된 명예(名譽)를 사모(思慕)하지 않으며 대중(大衆)을 따라 진취(進取)하는 일을 하지 않고 스스로 터득하여 욕심이 없이 항상(恒常)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일찍 지은 시(詩)에 「국화와 난초는 참된 나의 벗이며 봉숭아와 오얏꽃은 누구의 집에 떨어졌는가.¹⁾」라고 한 것은 스스로 자기의 뜻을 밝힌 것이다. 공이 돌아가자 그 후손(后孫)들이 삼가 그 물려준 법도(法度)를 지킴에 다 자중(自重)하여 의리를 잃지 않았다.
또 그 힘으로 선조를 받들고 종족(宗族)끼리 돈목(敦睦)하는 도(道)에 바쳐 선영(先塋) 아래에 재사(齋舍)를 짓고 집을 지킬 사람을 두고 제답(祭畓)을 장만하여 제기(祭器)를 갖추어 성묘(省墓)할 때에 삼가 향을 피우는 정성(精誠)과 종족이 모여 화수(花樹)의 의(誼)를 강론(講論)하고 상로(霜露)가 내리면 애통(哀痛)하는 느낌²⁾은 천륜의 즐거움이 아울러 행하여져 인륜에 어긋나지 않았다.
내가 들은 천도(天道)는 처음에 화합하게 모이지 않으면 그 결과가 피어나지 못한다고 하였다. 사람의 일은 선조(先祖)에 근본하지 않으면 후손(後孫)이 창성(昌盛)함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옛말에 「그 뿌리에 물을 대는 사람은 반드시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다.」라고 했다.
공은 이미 인(仁)을 깊이 실천함으로서 그 근본을 심었고 후손(后孫)들은 근본(根本)에 보답(報答)하는 효를 다하였으니 뿌리에 물을 댄 사람이다.
이와 같은 권씨(權氏)의 문중이 어찌 크게 창성하지 않겠는가. 공은 비록 국화(菊花)와 난초(蘭草)를 벗 삼으나 복숭아와 오얏꽃의 영화(榮華)를 사모함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덕을 쌓아 발복(發福)이 되면 창차 뜰의 난초가 그 싹이 돋아날 것이며 복숭아와 오얏꽃이 문(門)에 가득할 것을 볼 것이다. 이는 부절(符節)이 부합(符合)하듯이 되기를 기다린다. 영가군(寧可君)이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하였으나 내가 불문(不文)이라 그 사실을 나타내는데 부족하나 우선 그 들은 바에 따라 글을 지어 돌려보낸다.
갑술(甲戌;1934)년 7월에 진산(晉山) 하겸진(河謙鎭)³⁾이 기록하다.


【주석】
봉숭아와 오얏꽃은 누구의 집에 떨어졌는가.¹⁾ : 『‘도이속수가(桃李屬誰家)’는 낙양성 동쪽의 봉숭아와 오얏꽃이 이리저리 날리며 떨어지고 있는 것은 누구의 집인가.』라는 고문진보(古文眞寶)에 나오는 글로써 송지문(宋之問)이 지은 『洛陽城 東桃李花는 飛來飛去洛誰家오』에서 빌려 온 것이다.
상로(霜露)가 내리면 애통(哀痛)하는 느낌²⁾ : 『처창지감(悽愴之感)은 이슬이 내릴 때 돌아가신 조상을 생각하여 애통한 마음이 드는 것』
하겸진(河謙鎭)³⁾ : 하겸진(1870~1946) : 별호가 귀강자(龜岡子) 또는 귀강(龜岡)이다
하겸진의 자는 숙형(叔亨), 호는 회봉(晦峯)ㆍ외재(畏齋),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士谷里)에서 살았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회봉선생유서(晦峯先生遺書)》ㆍ《주어절요(朱語節要)》ㆍ《도문작해(陶文酌海)》ㆍ《명사강목(明史綱目)》ㆍ《동시화(東詩話)》ㆍ《동유학안(東儒學案)》이 있다.





西溪齋 謹次板上韻 -密陽 朴漢鉉- 전문
斯亭占取好林巒  이 재실 산림 좋은 곳에 자리 잡았으니
認是西翁福地寬  서옹(西翁)¹⁾의 널찍한 복지(福地)임을 알겠노라
多士輿情瞻院檜  많은 선비들의 여론은 마당의 檜나무를 瞻慕하고
賢孫餘慶郁庭蘭²⁾ 어진 후손의 남은 경사는 뜰의 무성한 난초 같구나.
千峰磧石簾頭滴  천 봉우리에 쌓인 바위는 발 위에 떨어지는 듯하고
一道靈泉戶外寒  한 줄기 신령한 샘물은 문 밖에 시원히 흐르네.
爲賀高門承繼業  훌륭한 가문의 가업 계승함을 축하하노니
規模非啻萬年安  범위와 제도는 만년만 안전할 뿐만 아니라네.


【주석】
서옹(西翁)¹⁾ : 西溪齋 주인. 창원시 진전면 오서리에 있는 안동권씨 재실이라고 한다. 서계재(西溪齋)의 주인은 권득래權得來이다.
庭蘭²⁾ : 지란옥수(芝蘭玉樹)와 같은 말로 남의 집안의 우수한 자제(子弟)를 예찬하는 말이다.


출처
진전면지-진전면지 편찬위원회/삼덕정판인쇄사(2001.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