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5.24. 쓰시마(對馬島) 이즈하라(巖原) 슈젠지(修善寺) 입구


대마도 여행 2일째 한·일 양국 유지들이 구국항일투쟁의 상징인 최익현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년 세운 순국비가 있다는 슈젠지(修善寺) 입구에 와서 대문이 열릴 때까지 계단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최익현 선생은 대마도(對馬島)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1907년 1월 4일 이곳 수선사(修善寺)에서 장례를 치르고 부산항으로 이송됐다. 이틀 후 부산 초량에 닿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유림과 신민들은 눈물을 머금고 맞이하였으며 영구(靈柩)를 붙들고 통곡했다.
상여가 마련되어 정산(定山)본가로 운구하였는데 울부짖는 민중들 때문에 하루 10리 밖에 운구하지 못하였다. 영구는 15일 만에 정산에 도착하여 그해 음력 4월 1일에 논산시 노성면 무등산(無等山)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追敍)하였다. 구한말 유학자 이자 항일의 선봉이 되어 독립운동의 선구자가 된 선생의 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다.
그의 정신을 새긴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를 보려는 일념으로 모두들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2014.5.24. 정토종(淨土宗) 원성산(圓盛山) 구품원(九品院) 수선사(修善寺) 입구와 담장


왜국(倭國)에서 우리가 말하는 절은 이곳의 수선사(修善寺)처럼 일반사람들의 묘지로 사용되는 곳인데 반하여 왜국의 신사(神社)는 영웅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신사(神社)의 문은 우리나라 절의 일주문처럼 서있으며 도리이(鳥居)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 이즈하라(巖原)에는 팔번궁신사(八幡宮神社)가 유명한 곳이다.
수선사(修善寺)는 정토종(淨土宗)이라고 적어 두었는데 정토종(淨土宗)은 중국에서 널리 전파 됐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개인적으로 믿는 경우는 있으나 종파로 발전하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12~13세기경 호넨의 노력에 힘입어 일본 정토종이 독자적인 종파로 성립되었다. 일본 정토종 계열 가운데 가장 큰 종파인 정토진종은 호넨의 제자 신란(親鸞)에 의해 성립되었는데, 이 종파에 따르면 정토에 왕생하는 데 필요한 것은 오로지 믿음뿐이며 다른 대부분의 불교 전통에서와는 달리 출가수행도 행하지 않는다.




최익현 선생 순국비 앞에서 그의 애국심에 묵념을 올린다.


최익현의 본관은 경주,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庵)이다. 출신은 경기도 포천이다. 14세 때 경기도 양근(楊根) 벽계(蘗溪)에 은퇴한 성리학의 거두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격몽요결, 대학, 논어집주 등을 통해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했다. 이 과정에서 이항로의 애군여부 우국여가(愛君如父 憂國如家)의 정신 즉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최익현이 1873년 올린 <계유상소>는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대원군이 그 위세를 몰아 화양서원과 만동묘(萬東廟)를 비롯한 서원의 철폐를 대거 단행하자 그 시정을 건의한 상소다.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의 10년 집권이 무너지고 고종의 직접 정치가 시작 되었다.
또한 면암은 민씨 일족이 왕의 총명함을 막는다고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그 냉요이 과격하고 방자하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이를 계기로 관직 생활을 청산하였다. 이후 선생은 우국애민(憂國愛民)을 위한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길을 택하였다.
1876년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병자지부복궐소(丙子持斧伏闕疏)>를 올려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을 결사반대하였다. 이 상소로 흑산도로 유배되었으나 그 신념과 신조에는 변함이 없었다.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 주위로 무궁화가 심어져 있다.


1895년 을미사병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공포되자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1905년 을사 5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화와 박제순·이완용·이근택·이지용·권중현 등 을사5적 처단을 주장한 <청토오적소>를 올려 흐트러짐 없이 올곧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면암의 위정척사운동은 집단적·무력적인 항일 의병운동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때마침 그의 제자였던 고석진의 소개로 만난 임병찬이 “호남의 선비들이 장차 의병을 일으키려하는데 모두 선생을 맹주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그곳으로 가셔야 하겠습니다.”고 하자 면암은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炳贊)·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열린 강회(講會)에서 최익현은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어 오백년 종묘사직과 삼천리 강토가 이미 멸망지경에 이르렀다. 이 나라를 위해 사생을 초월하면 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함께 사생을 같이하겠는가?”라며 항일 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했다.
<기일본정부(奇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하고 다시 남원 진입을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남원을 지키고 있는 부대는 왜군이 아니라 우리의 진위대(鎭衛隊)였고 진위대 측은 “대감이 의병을 해산시키지 않으면 전진이 있을 뿐”이라는 동보를 세차례나 보내왔다. 고민 끝에 면암 선생은 임병찬(林炳贊)에게 동포끼리 싸우는 것은 원치 않으니 즉시 해산시키라고 명령했다. 이때 모인 의병의 수는 800명에 이르렀으며 쉽사리 흩어지지 않았던 의병들은 눈물을 머금고 해산했다.
최익현과 그의 곁에 끝까지 남은 12명의 의병은 체포되어 우리 사법부가 아닌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고 쓰시마(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이곳에서 적이 주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계속하다가 병을 얻어 1906년 11월 74세의 일기로 적지에서 순국했다. 
임병찬일록(林炳贊日錄)을 살펴보면 “선생께서 병이 나면서부터 20여 일에 이르기까지 혹은 평좌하시고 혹은 꿇어앉고, 혹은 엎드리고, 혹은 기대기도 하셨으나 한 번도 드러눕지 않으시니 여기에 선생의 평소 소양이 훌륭하심은 다른 사람이 따를 수가 없음을 알았다.”고 기록했다.





면암의 단식이 계속된다는 보고를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당황하여 면암의 장자 최영조와 문인들을 대마도에 보내 문병하게 하고, 조선에서 가지고 간 탕제를 권하였으나 최익현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죽음을 예감한 위대한 애국정신의 한국인 면암 최익현 선생은 임병찬 등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시 한 편을 남겼다.


起瞻北斗拜瓊樓 일어나 북두(北斗)를 바라보며 임금님 계신 궁궐로 절하고
白首蠻衫憤悌流 흰머리 오랑캐의 옷자락에 분한 눈물 쏟아 흘린다.
萬死不食秦富貴 만 번을 죽어도 진나라의 부귀와 음식을 먹지 않으리니
一生長讀魯春秋 일평생 긴 글 읽으니 노나라의 춘추(春秋)라네.





면암선생의 순국비 옆에는 아래와 같은 국한문 혼용체가 적혀 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先生)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위대한 유학자(儒學者)요 정치가(政治家)였다. 한말(韓末)의 어려운 정세(情勢)에서도 소신(所信)을 굴(屈)하지 않고 애국항일운동(愛國抗日運動)을 일으켜 일본관청(日本官憲)에 의해 대마도(對馬島)로 호송(護送) 되어 왔으며 적사(謫舍)에서 순국(殉國)하셨다.
수선사(修善寺) 창건(創建)에는 백제승법묘니( 百濟僧法妙尼)와 관계(關係)가 있다고 전하여 한국(韓國)과는 인연(因緣)이 깊다. 선생(先生)이 순국(殉國)한 후 대마도유지(對馬島有志)들이 유체(遺體)를 모시고 충절(忠節)을 되새겨 제사를 올렸다. 이렇듯 유서(由緖) 깊은 곳에 순국비(殉國碑)를 세워 선생(先生)의 애국애족(愛國愛族)의 뜻을 기리고자 한다.
崔益鉉先生殉國之碑建立委員會
최익현선생순국지비건립위원회






출처 및 참조
다음백과사전-정토종
무성서원·표충사와 항일의병-성균관유교문화사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