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갈송(片碣頌) 그는 정유재란때 명나라 장군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울산 서생포전투에서 큰공을 세운다. 그러나 이때 상관이었던 양호(楊鎬)가 왜군에게 뇌물을 받고 퇴로를 내주다가 큰 피해를 당하였는데, 이후 이죄를 뒤집어 쓰고 명나라 가기를 포기하고 경주 금오산(남산)에 은거한다.

그이 아들들이 이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모시려 들어오자 이미 죽고 난뒤였다. 그뒤 3아들은 한국에 정착하여 정강편씨(浙江片氏)가 되고 손자들은 병자호란때 많은 공을 세우기도 한다.

절강편씨는 현제 1만여명, 편씨 전체는 1.5만여명이 남한에 산다하니 임진왜란때 정차한 성씨중에는 대성에 속한다.

경주 남산 포석정에서 남산을 오르다가 그의 13대손이 세워둔 "편장군묘소입구" 팻말을 본다. ...

이곳을 잘 아는 노인에게 물어보니, 묘는 어디잇는지 알수가 없고 족보에 그리 써 있어서 여기에 세워두었다고 한다. 황금바위아래 큰 산소가 있으니 그게 아닐까 추정한다했다.

그가 전적을 세운 서생포 만호진성에는 그이 11대손이 임진년(1892년)쓴 마애비가 있는데 편장군승첩동이라 적혀있다.
바로옆 창표사에는 마귀장군, 편갈송장군등 56위를 모신 사당이 있다.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를 지낸 석성(石星)이고 석성의 부인은 역관 홍순언(洪純彦)이 구해준 유씨부인이다. 유씨부인의 친정어머니가 편씨인데, 편갈송은 유씨부인의 친정 사촌이니 이를 인연으로 조선에 온것 같다.

그 석성이 죽고 유씨부인도 조선으로 아등ㄹ과 같이 넘어오니 그 주인공의 후손들은 다 조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세분은 인진왜란때 명나라 원군이 파병될때 혁혁한 공른 세운 숨은 공로자이다.

편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어찌 만난 노인과 하는 데, 그가 청년때 이곳 남산을 사수와 함께 골골이 창아 다니면서 당시 노인들에게 자문하여 만든 이름들이 지금의 남산의 골골의 이름이라고 한다... 귀한분을 만나 반가웠다. 당시 남산에는 송이가 무더기로 나는데, 지금은 국립공원법에 의해 돌하나 송이하나 가져가가면 처벌받는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