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들었다

전주꽃밭정이노인복지관 수필반 백금종

 

 

교직에서 물러나니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많은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하는 게 퇴직하기 전의 걱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이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복지시설이나 문화강좌 등이 널려 있어 의욕만 갖는다면 매일이라도 공부할 수 있고, 접어두고 지냈던 소질이나 특기에 불을 지펴볼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그 사이 소소한 집안일에 동참하다 보면 곁눈 팔 시간적 여유가 없기도 했다.

직장에 다닐 때는 저녁에 퇴근하여 TV를 보거나 신문 잡지를 뒤적이는 것을 당연한 일과로 알았고, 또 그런 행위들이 용인되기도 했다. 모든 집안일이나 자식 교육은 아내의 몫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가정에 머물면서 아내의 살림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하루에도 해야 할 일이 솟아오르는 샘물마냥 끊이지 않았다. 자잘한 일거리로 서성이다 보면 긴 여름 해는 어느새 지고 땅거미가 내리곤 했다. 지금은 아이들도 성장하여 둥지를 떠난 상태이고 단 둘이만 사는 데도 이러하거늘 올망졸망 어린 시절에는 얼마나 큰 짐이었을까? 한마디 내색 없이 묵묵히 버텨 온 아내의 노고가 큰 산이었음을 새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요사이 젊은 시절에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집안청소, 밥 짓기, 설거지 등을 스스럼없이 자임하기도 한다. 때로는 아내에게 밥상을 차려 내기도 한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이 지난날 아내의 노고에 대한 보상차원의 봉사이기도 하지만 나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자구책이기도 하다. 또 아내의 건강이 예전만 못한데서 기인한 연민의 행위이기도 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양파를 손질했다. 껍질을 벗기고 물로 깨끗이 씻었다. 바쁜 시간을 쪼개 텃밭에서 가꾼 양파들이다. 지난 가을 옮겨 심은 이후 나의 손길에 깨어나고 발소리를 들으며 자란 녀석들이다. 추운 겨울에는 짚을 씌워주고, 영양제를 뿌려주며 자식처럼 다독여 주었더니 튼실한 알로 보답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육질이 단단하고 윤기가 나며 맛을 보니 달콤하면서도 특유의 향이 코를 찔렀다. 지난번에는 양파 즙이 좋다하여 건강원에 맡기고 이번에는 양파 발효액을 만들기 위해서 다듬고 씻노라 부산하다. 작은 것이라도 색다른 것을 만들면 자식이나 친지에게 나누어 주려니 영일(寧日)이 없다. 주는 기쁨을 얻으려면 단잠을 조각내야 하고, 마른자리를 마다해야 한다. 손에 물기가 말라서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돈 주고 사서 먹으면 편할 텐데, 사서 고생을 하고 있구먼.”

잡다한 집안일로 쌓여 온 고달픔과 양파를 손질하면서 생긴 불평이 인내의 틈새를 뚫고 대못처럼 솟아올랐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한마디를 던진다.

“철이 들었으니까 그렇지!”

철이란 나이에 상관계수가 높지만 꼭 그러한 것은 아니려니 싶다. 어떤 이는 어린나이에 철이 드는가 하면 평생토록 철이 들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이도 있다. 나는 남보다 일찍은 아니지만 지금이라도 철이 들었다니 다행이다. 하기야 공자님도 60이 넘어서 철이 들었다지 않던가?

나는 어린 시절에 민속놀이인 제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밭문서인 미농지로 만들었다가 할아버지한테 꾸중과 함께 ‘언제나 철이 들지 모르겠다.’고 걱정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 이후로는 내가 철이 들었다고 말해 주는 사람도 없었고 또 철이 들었는지 아니 들었는지도 모르고 살아왔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걱정을 들은 이후 60여년 만에 처음으로 그 소리를 들은 셈이다.

철이 들었다고 함은 자신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있든 분수를 알고 사리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줄 때 진정 철이 들었다고 하지 않을까?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그 세대의 보편적 수준이하일 때는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없으며,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없을 때는 결코 철이 들었다고 할 수 없다.

노령의 고원에서 석양을 바라보는 길손이지만 마음을 비우고 모든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마음 또한 철이든 마음이려니 싶다. 내일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하였듯이, 단 하루를 살더라도 욕심을 버리고 분수를 지키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철이 든 길을 걸어가고 싶다.

(2013. 6.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