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녀석

전주꽃밭정이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장지연

 

 

 

 난 요즘 사랑에 빠졌나보다. 첫눈에 필이 꽂히던 녀석에게 언제부턴가 마음마저 빼앗겨 버렸다. 하루만 안 봐도 안달이 나고, 밤이면 그 녀석 생각에 잠을 설치기 일쑤다. 눈을 감으면 눈 속에서, 눈을 뜨면 천정이 온통 그 녀석의 춤사위여서 시선이 끌려 다닌다. 그저 바라보고 만 있어도 입은 헤벌레 해지고 눈은 부엉이 눈을 닮아간다.

 녀석을 만난 건 꽃밭정이노인복지관을 다닌지 여드레째 되던 날이었다. '딱! 따닥!' 경쾌한 소리에 기린목을 하고 쪼르르 달려갔다. ‘당구2’라고 쓰인 곳에선 십여 명의 회원들이 알록달록한 공들과 어우러져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긴 막대기로 살짝 밀면 ‘쪽’하고 입맞춤하다, “깨버려!” 하면 우두둑 소나기소리에 공들이 질겁을 하며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어쩜 여름밤 도깨비 행렬마냥 한 순간에 모두 사라지고, 원투 스트라이크로 얻어맞은 흰 공만이 오똑 카펫에 앉아있다.

 “아, 이게 포켓볼?”

입을 쩍 벌린 채 긴 숨을 내쉬니 숨구멍이 트이면서 군침이 돌았다. 문득 ㅂ강사의 멘트가 떠올랐다. ‘기회! 기회는 항상 찾아오는 건 아니야. 기회란 놈이 어슬렁거리고 오면 다리를 착 걸어 넘어뜨려 멱살을 잡고서라도 끌고와야 내 것’이라고 했다.

 난 그날부터 회원등록을 하고 선배들의 지도로 큐대 잡는 법과 바른 자세, 그리고 공치는 요령을 배워 나갔다. 포켓볼은 2명 또는4명이 팀을 나눠 경기를 한다. 처음엔 흰 공을 쳐서 줄무늬와 색깔 공을 선택하여 적공 7개와 검정공을 넣으면 게임 끝이다. 모두가 새롭고 신기하다. 또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실내에서 하는 레포츠라 매력적이다.

 하지만 회원 수는 많은데 포켓볼 대는 하나뿐이라 배우는 것이 만만치 않다. 어쩌다 순서가 되면 잘 치고 싶은 마음이 앞서지만 번번히 파울을 하여 면목이 없다. 생긴 건 둥글둥글하지만 차갑고 냉정하기가 이를 데 없고, 사람 차별이 유별나다. 선배의 말 한마디면 속사포처럼 달려가 목적구에 ‘쓩’ 들어가면서, 내 말은 들은 척도 안하고 엉뚱한 곳으로 달아나버린다. 녀석에게 ‘은따’ 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꿀꿀하다.

 하지만 콩깍지가 단단히 낀 걸까? 저녁을 먹으면서도 온통 녀석 생각뿐이다. 밥공기로 나물접시를 밀면 3번으로, 간장종지가 생선구이를 치면? 식탁이 포켓볼대로 보인다. 공, 공만 있으면, 두리번거리다 골프공과 마주쳤다. 그리고 태극기 깃대를 쭈욱 늘이니 큐대 길이와 비슷했다.

 “어머, 딱이네!”

식탁에 꼬마 공을 올린 다음 쭉 밀었더니 데구루루 굴러가다 거실로 툭 떨어진다. 이번엔 엉덩이를 적당히 빼고 눈에 힘을 잔뜩 주고 톡 치니 뱅글뱅글 돌아간다.

 “아니야, 중심을 맞혔야지, 비스듬히 쳤구먼.”

한 시간이 넘어서니 삐뚤빼뚤 가던 공이 직선으로 갔다 되돌아온다. 공은 빛의 굴절처럼 치는 각도에 따라 방향이 달라진다는 선배의 말이 귓속을 파고든다.

 녀석을 만난 지 백일이 지났다. 처음엔 나만의 짝사랑에 몸살을 앓았지만, 요즈음엔 은근슬쩍 날 챙기는 것 같아 복지관을 향하는 발걸음은 껑쭝껑쭝 춤을 춘다. 어제는 무실점에 공 둘이 들어갔다. 오늘 첫 게임은 갈대처럼 훌쩍 큰 박선배와 한 팀이 되었다. 큐대를 잡고 적구를 쏘아보며 ‘툭’ 치니 쏙, 쏙, 들어갔다. 오랜 가뭄 끝에 쏟아지는 소나기마냥 이번 게임에 무려 다섯 개의 공을 포켓시켰다. 모두가 선배들 덕이다. 항상 칭찬과 배려로 다독여주는 선배들의 칭찬에 콧등이 씀벅거린다.

 이곳에 오면 삶이 즐겁다. 우연히 마주친 녀석과의 만남이 지쳐있던 내 마음에 활력소가 되었을까? 톡, 톡, 공 부디치는 소리만 들어도 불쑥불쑥 열정이 솟구친다. 눈도 없는 것이 녹색시트를 누비면서 임무를 완수할 때면 웃음소리가 폭죽처럼 펑펑 터진다. 웃다보면 푸념은 사라지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어 행복해진다.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에 만난 녀석과 난 오늘도 열애중이다.

                                               (2014.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