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문학관을 찾아서

신아문예대학 금요수필반 최은우

 

 

 

 

 

  옥천 정지용문학관을 돌아보고 원주 박경리문학관을 찾아가는 버스는 두 번이나 헤매다 30분 이상이 지체되었다. 원주 흥업면 매지리에 토지문화관이 따로 있어서 버스 기사가 착각을 한 것이다. 입구에 있는 '박경리문화공원'이라는 안내판을 보고 공원 안으로 들어가니 5층 건물의 '박경리문학의 집' 건물이 나왔다. 그 옆에 북카페로 둥그런 2층 건물이 있고 안쪽으로는 2층 양옥의 박경리 작가가 살던 옛집이 있었다.  

 

  박경리문학의 집 건물로 들어가니 5층 세미나실로 안내했다. 박경리 작가의 지나온 삶을 회상하고 그의 문학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이미 상영되고 있었다. 작가는 1926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나고 1945년에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본명은 '금이'였다. 결혼 후 남편의 권유로 1950년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쓰지 못하는 일제강점기에 작가는 책을 많이 읽고 매일 일기처럼 시를 써 내려가는 것이 그에게 위안이 되었고, 희망을 잃지 않는 버팀목이 되었다고 했다.

 

  작가의 행복했던 결혼생활은 겨우 4, 6.25 전쟁 때 남편 김행도는 부역자로 몰려 옥사했다. 그 뒤 어린 아들마저 사고로 다쳤는데 안일한 의료진에 의해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리고 사위 김지하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을 당시 원주의 시댁에서 살고 있던 외동딸 영주를 만나고 와서는 “딸을 만나고 지워지지 않는 짙은 피멍이 들었다.”고 했다. 딸이 시댁에서 절망 속에 살고 있을 것을 못내 안타까워하다가 딸 옆에서 버팀목이 되어 주고자 원주로 옮겨 집을 구매한 것이 바로 문학관이 있는 이곳 단구동 문학관 자리였다.

 

  4층 자료실은 박경리 작가의 삶과 작품을 연구하는 공간으로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문학을 연구하는 공간이다. 3층 전시실은 오로지 소설 <토지>의 공간으로 토지의 역사적, 공간적 이미지와 등장인물의 관계도, 하이라이트, 영상 자료 등을 전시해 토지의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2층 전시실은 작가의 삶의 흐름에 따라 연표와 사진, 시로 구성하여 작가에 대한 이해를 돕고 타임캡슐로서의 유품을 전시했다. 소설 토지의 육필원고와 만년필, 손수 지어 즐겨 입던 옷과 직접 조각한 목각여인상, 농사지을 때 쓰던 호미, 장갑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작가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작가는 사는 게 고통스러워서 글을 썼다고 했다. 시를 쓰다가 김동리 작가의 권유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단편 소설 <계산>이 게재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단편이 주를 이루던 초기작들은 체험적인 성격이 강하다. 특히 1957~8년 아들을 소재로 쓴 <불신시대>에서 종교와 병원을 중점적으로 비판했고, <암흑시대>에서 무책임하고 경박한 의사와 간호사들의 횡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주인공은 자신의 눈에 비친 부조리한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이 소설로 신인문학상을 받았지만, 작가는 서글픈 시상식이었다고 말했다. 대표작으로는 1962<김약국의 딸들>, 1964<시장과 전장> 등이 있다.

 

  1973년에 발표한 <토지>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긴 호흡으로 다루는 박경리의 대표작인 동시에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하소설로 손꼽힌다. 구한말 동학농민운동에서부터 8.15 광복까지 민초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통해 우리 근현대사를 희망의 한으로 풀어낸 소설 ‘토지’는 생명이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다. 서울에서 12년에 걸쳐 1, 2, 3, 4부를 집필했고, 원주에서 13년에 걸쳐 4, 5부를 집필하여 1994년 장장 25년간의 종지부를 찍으며 토지는 이곳 단구동 옛집에서 완성되었다. 작가는 어렸을 때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토지를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거제도에 큰 부잣집이 있었단다. 말을 타고 둘러보아야 할 정도로 넓은 땅을 가진 부자였지. 들판의 곡식은 누렇게 익었는데 때마침 불행하게도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단다. 풍년이 든 곡식을 거둬들일 사람이 없어 곡식은 썩어나가고, 그 부잣집 사람들도 다 죽고 10살 난 계집아이 혼자만 살아남았단다.  

 

어린 금이었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생명을 나타내는 황금빛과 죽음을 나타내는 검은빛이 대비되면서 가슴에 깊이 박혔고, 훗날 작가가 되어 그 이야기를 자꾸 키워나가면서 토지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작가가 된 것은 나의 상상력이다. 그리고 나의 상상력은 수많은 독서가 밑거름되었다.

 

  대문을 지나 작가가 살았던 2층 양옥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우뚝 서 있는 마로니에 나무의 가격이 얼마나 되겠느며 해설사가 질문을 던졌다. 작가는 이 집을 구매할 때 그 마로니에 나무가 너무 좋아서 나뭇값으로 천경자 화백의 그림을 주었단다. 지금 그 그림 값이 억대로 치솟아 '억대 마로니에'라 부른다며 웃었다. 이곳은 작가가 18년간 살면서 토지를 완성한 곳이다. 마당에는 손주들을 위해 손수 만든 연못이 있고, 한쪽에 텃밭이 그대로 남아 있다. 토지를 쓰던 방은 큰 창이 2개나 있었고, 그 창을 통하여 앞마당과 옆 텃밭을 내다볼 수 있다. 그 방에는 토지를 완성하고 “끝” 자를 쓸 때까지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는 곳이다. 작가는 이곳 창문을 통해서 자연을 느끼고 교감하며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작가는 후배 문인들의 글쓰기 공간으로 원주 흥업면 매지리에 토지문화관을 건립하여 손수 고추 농사를 지으며 그들의 밥상을 차렸다. 작가는 “풀을 뽑고 씨앗을 뿌릴 때 살아 있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살아생전 작가의 넓고도 큰 사랑이 더욱더 그리워진다.

 

  작가가 미처 세상에 내놓지 못한 시가 있었다. 그의 딸은 작가의 49제에 맞춰 그 시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제목만 봐도 작가의 마음을 짐작하게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예감하며 지난 삶을 회고하고 아쉬움과 홀가분함으로 써 내려가며 생을 마무리하지 않았을까?

 

  2018년 한·러 문화외교사업 일환으로 러시아 제2의 도시이자 예술의 본거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에 고 박경리 작가의 동상이 세워졌다. 2013년 서울 중구 롯데호텔 앞에 세워진 푸시킨 동상에 대한 화답이다. 작고한 지 오래지 않은 우리 현대작가의 동상이 외국에 건립된 것은 의미가 깊다. 동상에는 박경리의 시 ''의 마지막 시구인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를 러시아어로 새겼다


 


  작가는 “생각해보면 기막히게 고달픈 작업이었다. 자연이 과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내 영혼을 언제 이토록 실하게 나를 치유해주었을까? 풀잎 하나 조약돌 하나 철마다 찾아오는 이름 모를 새들과 교감하며 내 뜰 안의 모든 생명과 함께 살았던 단구동 옛집”이라고 했다. “우리는 자연의 이자로만 살아야 한다. 땅에서 나오는 수확물만 얻고 땅을 훼손시키면 안 된다.” 작가의 자연과 생명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이곳은 박경리문학공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뜰은 우리 모두의 꿈과 희망이 되었다.

 

                                                               (2019. 5.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