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즈버, 내 젊은 그 시절이

-동네 한 바퀴-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고안상

 

 

 

 

  요즘 토요일 오후 7시에 방송하는 KBS1TV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가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탤런트 김 씨가 도시의 한 지역을 방문하여 그 지역의 숨겨진 정보, 사람 사는 이야기들을 조명해줌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나도 이 방송을 보고서 내 고향으로 추억여행을 떠나 나와 함께 했던 이웃을 찾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던 중에 마침 우리 집을 찾은 큰아들 내외와 손녀 나윤이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고향마을을 찾았다.

 먼저 동네 입구에 들어서니, 예전의 구불구불하던 논밭은 사라지고, 시원하게 직사각형 모양으로 경지정리가 된 널따란 논들이 물을 가득 담고 있어서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요롭게 느껴졌다. 부모님이 짓던 논들이 저렇게 농사짓기 편리하게 넓고 평편하게 다듬어져 있다니,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얼마나 부러워하실지 모르겠다. 동네 앞길도 넓게 확장되어서 예전의 불편함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동네를 감싸고 있던 산들은 숲이 울창해졌다. 마을 앞 모정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고, 주위도 넓어져 한여름 동네 사람들의 쉼터로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6· 25 전란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마을과 주위 벌거숭이 산이 떠올랐다. 마을에는 토담이나, 벽을 대나무나 수숫대를 엮어 만든 발에 흙을 짓이겨 붙인 집들로 대부분이 초가집이었다. 집집마다 10여 명 이상의 가족들이 북적거리며 끼니를 걱정하고 살아야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고, 우울한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니, 그렇게 한가하게 비관하거나 우울한 생각에 젖어있을 만큼 여유롭지가 못했다. 모두가 입에 풀칠하기 위해 무슨 일에든 바삐 움직여야만 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1950년대 후반, 어른들은 어린애들을 돌볼 틈 없이 먼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고, 들에 나가 쑥이나 나물을 캐거나, 논밭에 나가 농사일을 하는데 정신없이 매달려야만 했다. 그 당시만 해도 농사를 지어도 땅이 척박해 소출은 신통치 못했다. 거기다 집집이 대가족이어서 먹고사는 일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서 토지가 많지 않은 집에서는 가장인 남편이나 장성한 아들은 객지로 돈 벌러 나가고, 집안일과 자식 기르는 일은 아내가 도맡아야만 했다. 우리 마을도 종구 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대도시로 나가 생계를 위해 돈을 벌었다. 그 당시만 해도 마을에는 도로가 없었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모든 것을 자연 그대로 의지하고 불편함을 온몸으로 이겨내며 살았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 우리 사내아이들은 큰비가 내린 뒤 뒷산 계곡 낭떠러지에서 흘러내리는 폭포수로 아니면, 멀리 대흥천에서 무더위를 식히곤 했다. 또래들이 어울려 시원하게 목욕을 한 뒤, 그중 몸이 날랜 친구는 폭포수 옆 낭떠러지 바로 위로 살금살금 올라가 청호반새가 사는 구멍에 손을 집어넣어 새끼를 잡거나, 소나무 위로 올라가 산새 새끼를 잡아다 기르는 재미에 푹 빠지기도 했다. 폭포나 냇가에 가 더위를 쫓는 일은 낮에는 온통 사내애들의 차지였다하지만 어둑한 밤에는 아녀자들이 무더위를 식히려 계곡으로 올라가 목욕을 하거나, 우물을 길어다 집에서 몸을 씻었다. 그때, 짓궂은 애들은 폭포 주변에 숨어 들어가 여자들이 목욕하는 장면을 몰래 훔쳐보다가, 계곡에서 떨어져 한동안 고생하기도 했었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먼저 아래뜸 내가 살던 집터를 찾아가 보았다. 아니 이럴 수가? 텃밭을 포함 500여 평 되던 집터가 온통 대나무 숲으로 뒤덮여 옛 자취는 찾을 길이 없었다. 벌써 부모님이 고향을 떠나신 지도 30년이 다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아래뜸은 길이 잘 닦여 있고 주차장도 갖추어져 있었다. 집이 이십 호나 되던 아래뜸은 지금 열 집이 남아있었다. 우물은 사라지고 많은 집이 빈터로 남아 썰렁한 느낌이었다.

 발길을 돌려 위뜸으로 올라가 보았다. 예전에는 위뜸으로 오르는 길이 바위가 울퉁불퉁 나와 있어서 미끄럽고 다니기가 참으로 불편했었다. 특히 눈이나 비가 내리면 미끄러워 오르내리다가 다리를 다쳐 한동안 고생하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다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면서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오가기가 수월했는데, 지금은 전보다 길이 넓게 다듬어져 불편함이 전혀 없을 것 같았다. 열아홉 집이었던 위뜸은 이제는 열 집정도 남았다. 그리고 우물도 자취없이 사라졌다.

 다시 동네 한가운데를 떡 버티고 서있는 은천듬을 넘어 요강샘뜸으로 가보려 했으나 이젠 숲이 우거져 그곳에 오를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다시 아래뜸으로 내려와 요강샘뜸으로 가보았다. 여덟 집 중 외로이 두 집만 남아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뒷산 울창한 숲에서 산짐승이 달려내려올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 요강 샘에서 퐁퐁 솟아오르던 시원하고 상큼했던 물맛을 보고 싶었으나 샘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었. 참으로 아쉬운 마음 가득했다. 주변이 대나무를 비롯한 여러 가지 나무들로 숲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어린 시절 은천뜸에서 진돌이나 야구를 하던 젊은이들의 함성이 들려올 것만 같았다.

 마침 요강샘뜸에 사는 명섭이를 만났다. 우리를 보더니 아주 반가워 했다. 명섭이는 오리농장을 운영하여 큰 부를 이루었다. 지금은 논농사를 만여 평 지으며 잘살고 있단다. 광주에서 직장에 다니는 아들 창수가 아내의 제자라고 했다. 명섭이에 따르면 우리 동네가 예전에는 오십여 호가 넘었는데 지금은 이십여 호로  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그중 이곳으로 새로 이사 온 분이 열두 집이고 원주민은 열 집뿐이란다. 그러니까 서른일곱 집이 고향을 떠났으니 그동안 아주 큰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명섭이와 육우를 수십 마리 기르며 농장을 운영하는 회국이 같은 젊은이(?)가 고향을 지키며 꿋꿋이 살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고향을 찾아와 보니, 세월이 참으로 덧없이 빠르고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이 절절히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과 남매들, 그 옛날의 다정했던 고향 사람들이 몹시도 그립다. 내가 고향을 찾아와 본 느낌과 야은 길재가 송도를 찾아가 보았던 느낌이 어떻게 다를까?

 

오백 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 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위 시를 통해 고려의 옛 도읍지 개경을 찾아가 돌아본 뒤에 애달파 하고 허망해하는 야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비록 이곳 접지마을이 개경은 아닐지라도 내게는 더없이 정든 내 고향이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니, 산천은 의구하되 내 젊은 시절 정답게 지내던 이웃들은 어디론가 모두 떠나버려 쓸쓸하기 짝이 없다. , 세월은 무정하게도 우리를 한 곳(동네)에 오랫동안 머물도록 해주질 않는구나 싶었다. 어즈버, 내 젊은 그 시절의 그 모든 것들이 꿈만 같구나.                                                                                (2019. 05.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