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시인


  1979년 계간 『문학과지성』을 통해 시단에 나옴. 시집으로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한잔의 붉은 거울 』 등. 김수영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소월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


 

 

 

모래 여자 / 김혜순 
 
 

모래 속에서 여자를 들어올렸다
여자는 머리털 하나 상한 데가 없이 깨끗했다
 

여자는 그가 떠난 후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고 전해졌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숨을 쉬지도 않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와서 여자를 데려갔다
옷을 벗기고 소금물에 담그고 가랑이를 벌리고
머리털을 자르고 가슴을 열었다고 했다
 

여자의 그가 전장에서 죽고
나라마저 멀리멀리 떠나버렸다고 했건만
여자는 목숨을 삼킨 채
세상에다 제 숨을 풀어놓진 않았다
몸속으로 칼날이 들락거려도 감은 눈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자를 다시 꿰매 유리관 속에 뉘었다
기다리는 그는 오지 않고 사방에서 손가락들이 몰려왔다
 

모래 속에 숨은 여자를 끌어올려
종이 위에 부려놓은 두 손을 날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낙타를 타고 이곳을 떠나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꿈마다 여자가 따라와서
검은 눈 번쩍 떴다
여자의 눈꺼풀 속이 사막의 밤하늘보다 깊고 넓었다


- 2006년  제6회 미당문학상 수상시 -

 

 

 

칼과 칼 / 김혜순
 

 

칼이 칼을 사랑한다
발이 없는 것처럼 공중에서 사랑한다
사랑에 빠진 칼은 칼이 아니다 자석이다
서로를 끌어당기며 맴도는 저 집요한 눈빛!
흩어지는 땀방울 내뱉는 신음
두개의 칼이 잠시 공중에 엇갈려 눕는가 했더니
번쩍이는 두 눈빛으로 저 멀리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도 한다
서로 몸을 내리치며 은밀하게 숨긴 곳을 겨냥하는 순간
그 눈빛 속에서 4월마다 벚꽃 모가지 다 베어지기를 그 몇 번!
누군가 하나 바닥에 몸을 내려놓아야 끝이 나는 칼의 사랑
분홍신을 신은 무희처럼 쉬지 않고 사랑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랑을 멈출 수는 없는
시퍼런 몸 힘껏 껴안고 버틸 수는 있어도
끝내 헤어져 돌아갈 수는 없는
공중에서 내려올 수도 그렇다고 넘어질 수도 없는
꼿꼿한 네 개의 무릎에서 피가 솟는다
저 몸도 내 몸처럼 구멍이다 저 검은 구멍을 베어버려라
거기서 솟는 따뜻한 피로 얼굴을 씻어라
아무리 소리쳐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저 끔찍한 사랑
그러기에 이제 내 사랑은 몸을 공중에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고
한번도 발을 땅에 붙이지 못한 것이었다고 말해야 하나?
다행인가? 우리 사랑이 아직 저렇게 공중에 떠 있다는 것

 

-2006년 미당문학상 최종 후보작 -

 

 

 

그녀의 지휘봉 / 김혜순

 


사랑에 빠진 나비가 어둠 속을 날아간다
어쩌자고 잠도 안 자고 밤중에 돌아다니는 건지
 

달도 없는 밤 강물이 입술을 달짝거리는 소리
길가의 나뭇잎들이 땅속에서 길어 올린 추억에 잠겨 몸을 떠는 소리
 

강물 속에서 조약돌들이 몸을 떨기 시작하자
바위들의 억센 피부마다 소름이 돋는다
 

소프라노가 테너 위로 올라서자
관객 속에서 터지는 느닷없는 고함소리
파닥거리던 그녀의 지휘봉이 흠칫 몸을 떤다
나비 한 마리에 묶인 음악당이 밤하늘로 이륙한다
 

바람이 연주하는 길고 검은 피리소리
창문이 덜컹거리고 복도가 소라고둥처럼 도를 말리고
도시의 골목들이 튿어진 옷고름처럼 날리다 말고
공중에 나선형으로 치솟아 오른다
아기들 잠든 방들이 부서지고
길 잃은 바람이 뒤돌아보며 높이높이 울부짖자
 

자동차들마저 길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클라리넷과 모든 관악기가 불꽃을 길게 내뿜는다
모든 성부聲部들이 몸을 맞대고 떤다
 

사랑에 빠진 나비가 태풍 속을 난다
치솟아 오르다 쓰러지고 다시 쓰러지는 나비 한 마리
미쳐버린 오케스트라 공중에다 팽개친다


나는 창문을 열고 우리 아파트 옥상까지 찾아와
투신 자살한 젊은 여자의 시신을 오래, 오래 내려다본다
 

태풍의 눈처럼 거대한 고막이 풍경 속을 떠돈다
나비가 이제 그만 사랑을 검은 관 속에 가두었나
 

나비는 보이지 않고 느닷없이 검은 피아노가 열리고
수천만 개로 쪼개진 나비의 떨리는 살점들이
강물 위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환한 방들 / 김혜순

 

 

복사기가 일초에 한번씩
해바라기를 토해 내고 있다
잠시 후 돌아보니 방안 가득 해바라기 만발이다
어찌나 열심히 태양을 복사했던지
고개마다 휙 젖혀진 해바라기 꽃밭 사이
평생 늙지도 않는 소피아 로렌이 걸어 나올 것 같다
 

나의 복사기, 네모난 환한 상자
나는 복사기 안으로 들어설 때마다
피라밋 투탄카멘에서 출토된 미라처럼
가슴에 품었던 검은 꽃다발을 공기 중에
산화시키며 미소를 날린다
밥해서 먹이고 웃겨줘야 할 입들이 들어찬 방
외풍과 한숨이 들락날락하는 환한, 나의 방!
 

일초에 한번씩 불 켠 복사기가
내 몸을 밀었다 당겼다 할 때마다
들숨은 들어가고 날숨은 나온다
지하철 4호선 긴 의자에 앉은 내 얼굴이
복사된 얇은 종이가 벌써 수억만 번째
희미한 빛 속에 가라앉고
원본은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내 얼굴
이미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진 내가
또 한번의 출퇴근 궤도를 그리고 있다
 

집에 돌아오면 마멸이라는 이름의 비누로 얼굴을 씻고
마멸이라는 이름의 크림으로 얼굴을 지우고
오늘 밤 복사된 내가 철(綴)해진
스프링 노트를 힘껏 찢어 버린다
과연 나는 내 몸에 살고 있는 걸까
마지막으로 복사되다만 내 미소가 떠 있는
환한 방의 스위치를 내리면
복사기 네모난 상자도 어두워지고
내 몸도 관(棺) 속처럼 어두워진다


<동서문학 2004년 봄호>

 

 

 

핏덩어리 시계 / 김 혜 순


 

내 가슴속에는 일생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뚝딱거리는 시계가 있다
피를 먹고 피를 싸는
시계가 있고, 그 시계에서 가지를 뻗은
붉은 줄기가 전신에 퍼져 있다
저 첨탑 위의 시멘트 시계를 둘러싼
줄기만 남은 겨울 담쟁이처럼


나는 너의 시계를 한 번도
울려보지 못했다 그리고 누구도
내 핏덩어리 시계를 건드리지 않았다
참혹한 시계에게도 생각이 있을까
백년은 짧고 하루는 길다고 누가
나에게 가르쳐준 걸까


태양 시계를 쏘아보다 기절한 적도 있지만
바닷속으로 시계를 품은
내 몸통을 던져버린 적도 있지만
어떤 충격도 어떤 사랑도
이 시계를 멈추진 못했다
각기 출발한 시각이 다르므로
각기 가리키는 시각도 다른 우리 식구 셋이
식탁에 둘러앉아 묵묵히 시계에 밥을 먹이고 있다
우리 중 누구도 시계를 풀어
식탁 위에 놓지 않았다, 아직
아아, 안간힘 다해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너의 귀에 대고 말해본다
네 시계까지 들리라고, 네 시계를 울리라고
큰 소리로 말해본다
그러나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오후 세시의
뚝딱거리는 말, 정말일까?
우리는 우리의 시계까지 들어가본 적이 없다
시계 밖으로 일진 광풍이 일자
겨울 담쟁이 붉은 줄기들이
우수수 몸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내 눈에 눈물 고인다
잠시만이라도 내 시계 바늘을 멈추어볼 수 있니?
이 바늘 없는 시계를 네 품에 안을 수 있니?
네 가슴속에 귀를 대보면
핏덩어리 시계 저 혼자 쿵쿵 뛰어가는 소리
시간 맞춰 잘도 울린다

 

 

 

 

『또 하나의 타이타닉 호』(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문학과지성사 /2000)


솥이 된 ‘또 하나의 타이타닉 호’

1911년 건조되었고, 선적지는 사우샘프턴

속력은 22노트, 여객선, 한 번 항해에 2천 명 이상 탑승한 경력

내가 결혼한 해에 해체되었으며

지금은 빵 굽는 토스터, 아니면 주전자, 중국식 프라이팬,

한국식 압력 밥솥이 되었다

상처투성이의 큰 짐승

육지 생활에 여전히 적응 못 하는 퇴역 선장

그래서 솥이 되어서도

늘 말썽이 잦다

나는 밥하기 싫은 참에 압력 밥솥 회사에 항의 전화를 걸었다

자꾸 김이 새잖아요?

내가 씻은 쌀이 도대체 몇 톤이나 될까. 새벽에 일어나 쌀을 씻고, 식탁을 차리고, 다시 쌀을 씻고, 솥을 닦고, 숟가락을 닦고, 화장실을 닦고, 다시 쌀을 씻는다. 닭의 뱃속에 붙은 기름을 긁어내고, 쌀을 씻고, 생선의 내장을 꺼내고, 파를 다진다. 다시 쌀을 씻는다. 망망대해를 떠가는 배, ‘또 하나의 타이타닉’표 압력 밥솥, 과연 이것이 나의 항해인가. 리플레이, 리플레이, 리플레이

우리집에 정박한 한국식 압력 밥솥 ‘또 하나의 타이타닉 호’

불쌍해라, 부엌을 벗어난 적이 없다

밥하는 거 지겨워

설거지하는 거 지겨워

그럼 그것도 안 하면 뭐 할 건데?

압력 밥솥이 내게 물었다

뱀처럼 밥 먹고 입을 쓰윽 닦지

내가 대답했다

영사기에서 쏟아지는 빛처럼 가스 불이 솥을 에워싸자 파도가 끓는다

스크린처럼 하얀 빙산에 배가 부딪힐 때

밤 바다로 쏟아져들어가는 내 나날의 이미지

물에 잠겨서도 환하게 불켜고

필름처럼 둥글게 영속하는 천 개의 방

느리디느린 디졸브로

솥이 된 여자, 그 여자가

곧, 스타들과 엑스트라들이 끓어오르는 흰 파도 속에서 잦아든다

그 이름 ‘또 하나의 타이타닉 호’

화이트 스타 선박 회사 건조

수심 4천 미터 속 부엌을 천천히 걸어다니며

짙푸른 바닷속에 붉은 녹을 풀어넣고 있다


『잘 익은 사과』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문학과지성사 /2000)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명왕성』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문학과지성사 /2000)


명왕성에 자원 근무를 나간 그에게서

e-mail이 왔다

올 겨울 방학, 폭설에 교통 두절되면 꼭 놀러와

이곳은 인력이 미미한 곳

탱자처럼 작은 태양은 누구도 감시할 수 없어

우리 원 없이 함께 타락해보자

살기 좋은 곳도 쌨는데 왜 거기까지 자원해 갔는지

내 책갈피 속 끼워둔 그의 머리칼 아직도 새까만데


명왕성, 달력에도 없는 요일에 깨어나

잠에 취한 도시를 달려가보는 맛!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무덤에서처럼

몸 속에 안개만 가득한 사람들!

탁자 위에 자신의 미라를 올려놓고

천천히 붕대를 풀며 노래부르는 멋!


언젠간 그의 초청을 받아들여야지

죽어도 썩어 문드러지지도 않는 집들,

이제 손자 볼 때가 도래할 나에게

내 엄마가 아직도 시집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곳,

이십 년 전의 그놈이 아직도 하나도 안 늙고 숨어 있는 제방,

언젠간 그곳에 가야지

잠이 덜 깬 숲의 나무들이

나날의 내 손바닥을 매달고 생명선, 운명선, 감정선

흔들어 보이는 곳

죽어버린 초침이 하나도 없어

내 살아낸 곳이 모두 현재인 장자님 붕새의 고향

언젠가 그곳에 가서

그에게 내 귀부터 파보라고 해야지

달팽이관을 딱딱 울리고 시도때도없이 지나가는

이 기차부터 파내라고 해야지

내 골칫덩어리 이 두뇌의 바다를 펼쳐놓고

내 영혼과 짠짜라 짠 결혼식도 올려볼까나

편지를 다 읽자, internet 접속이 저절로 끊기고

검은 화면 위로 오늘의 일용한 해가 떠올랐다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문학과지성사 /2000)


발목 밑으로 줄줄 새는 그림자를 따라 걷는 밤

머리에 포마드를 짙게 바른 남자의 다리와

여자의 이마가 홍색으로 젖는다


내가 꿈값을 내고 내 얼굴 주위로 뭐가 보이나요

타로 점쟁이 할머니에게 물었을 때

다시 눈뜨면 너는 다른 세상에 있으리

거울 속에 보이는 놈은 몽땅 다 가짜

저 세상 사람이니 그를 잊어라

내 하룻밤의 검은 넥타이 천사, 남미 마피아들이

무대 맨 아래 좌석에 도열하자

탱고는 시작되고, 먼 나라에서 온 나는 마피아의 검은

겨드랑이 밑에서 샹그리아를 홀짝거리며 꿈속으로 흘러갔지

조명 속에서 인디오 악사들이 목각 인형처럼 떠오르고

남녀는 네 다리를 얽으며 시큼한 슬픔을 발자국 가득 찍어내었지


슬픔이란 말할 수는 없어도 몸에서 흘러내리는 것

가슴과 가슴 사이엔 물 넘치는 지구라도

품어져 있는 걸까 시큼한 본드라도 붙여놓은 걸까

춤 냄새 한번 고약했었지

지독한 슬픔을 견디는 건 저 거친 들숨 날숨 따라서 찍는 발자국뿐

다리를 얽으며 쓰러질 듯 다시 돌아오는 질긴 싱커페이션,

그대는 나, 나는 그대라고 노래하지만 정녕 너는 내가 아니라는

다만 허공에 주형을 뜨듯 찍어보는 육체의 얽힌 형식이 있을 뿐

통곡이 올라오는 몸은 앞뒤로 흔들어줘야 하는 법

칙칙한 조명 끝자락 속에서 내 이마가 홍색으로 젖는다


검은 얼음 조각으로 만든 것처럼 어둠 속에서 몸이 녹아내리는 밤

내 그림자 찐득거리며 한없이 발바닥에

붙어버렸지 나는 소리 없이 아팠지


같이 가요 마피아, 지구 반대편의 그를 해결하고

제발 나를 해결해줘요


『月印千江之曲』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문학과지성사 /2000)


1

글러브에서 탁탁 두드려진 달이 플레이트를 떠나려 할 때

방망이가 철가면에게 보내는 사인

빨리 끝내고 목욕이나 하러 가자

공이 명왕성 방향에서 날아오르는 것을 그는 가장 좋아한다

산봉우리 하나만큼 큰 허벅지가 들려지고

달이 떠오른다 그가 방망이를 높이 들어올리면


그러나 이 달은 피칭 머신에서 나오는 것

그는 이미 순서를 다 외우고 있다

커브 다음은 그가 한 번도 때려본 적이 없는

170킬로 이상의 직구

실내 야구 연습장 친구들은 이 공을

‘달이 뜨지 않는 밤’이라 부른다


누군가 ‘달이 뜨지 않는 밤’을 두드린 모양이다

관중석에서 출렁거리던 수천의 강이 일어섰다 앉는다

달이 그 천 개의 강에 하나하나 도장을 찍어주고 간다

다음 타자는 계곡에서 미끄러지다가 돌부리에 걸린다 발이 젖는다

오늘은 개기 월식날처럼 하늘이 붉다

이번 달엔 29타석 노 히트 최대의 슬럼프다

마지막 떠오르는 공도 붉다 이 직구는 흔들흔들 술 취한 놈처럼 온다

바다는 고향 집 대문 앞까지 부풀어 있을 것이다


2

내가 내 몸 속의 산맥들을 내려다보네

몸 속의 천 개의 강도 출렁거리네


이 속에 있으면서

저곳으로 가고 싶은,

갇혀서, 갇혀서 흐르는 강이

출렁거리네

달이 그 천 개의 강에 하나하나

도장 찍어주고 가네


도시를 건너온 구름이

달의 얼굴을 젖은 모포처럼 둘러 싸안다가 놓고 가면

몸 속에 흐르는 내 천 개의 강이

너에게로 한없이 흐르고 싶은 이 물이,

하늘하고 수평으로 나란히 눕고 싶은 이 물이,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또 한 번 출렁거리네


─어쩌지 어쩌지

저 물이 다 저무네

잦아들었다간 또 피어오를까

그가 서해를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네


3

장마 전선이 북상중이라는 소문, 시즌이 끝나가는 밤

시합 개시를 기다리는 야간의 스타디움

필드에서 캐치볼을 하는 선수들의 나른한 팔

달은 아직 스타디움 근처에 얼씬도 않고 있다


달은 아직도 어두운 구름 속을 달리고 있다

러닝 연습 중이다 ‘내 생애 단 한 번만이라도 도루할 수 있을까’


그러던 그가 오늘밤 십 초에 한 번씩 달을 쾅쾅 쳐주고 있다

외야에게 월몰 연습시키는 중인가 보다


이번엔 누군가 글러브에 달을 척척 넣어주고 있다

같은 자리를 한 번도 떠나지 않고

달 그림자 척척 받아주는 웅덩이처럼

캐치볼 전문 기계처럼

누군가 그 달을 척척 받아 그물 바구니에 넣고 있다


주먹을 떠난 돌멩이가 웅덩이의 월면을

퍽퍽 때려주고 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문학과지성사 /2000)


직육면체 물, 동그란 물, 길고 긴 물, 구불구불한 물, 봄날 아침 목련꽃 한 송이로 솟아오르는 물, 내 몸뚱이 모습 그대로 걸어가는 물, 저 직립하고 걸어다니는 물, 물, 물…… 내 아기, 아장거리며 걸어오던 물, 이 지상 살다갔던 800억 사람 몸 속을 모두 기억하는, 오래고 오랜 물, 빗물, 지구 한 방울.

오늘 아침 내 눈썹 위에 똑, 떨어지네.

자꾸만 이곳에 있으면서 저곳으로 가고 싶은

그런 운명을 타고난 저 물이

초침 같은 한 방울 물이

내 뺨을 타고 어딘가로 또 흘러가네.


『내가 모든 등장인물인 그런 소설 1』 (불쌍한 사랑 기계 /문학과지성사 /1997)


나는 내가 모든 학생인 그런 학교를 세울 수 있지. 쉰 살의 나와 예순 살의 내가 고무줄 양끝을 잡고, 열 살의 내가 고무줄 뛰기 하는 그런 학교. 이를테면 말이야. 지금의 내가 기저귀 찬 나에게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세요 말을 가르칠 수도 있고, 여중생인 나에게 생리대를 바르게 착용하는 법도 가르칠 수 있을거야. 어쩌면 열 살인 내가 예순 살인 나에게 인생이란 하고 근엄하게 가르칠 수 있을지도 몰라. 또, 이를테면 말이야, 나는 또 내가 모두 등장인물인 그런 소설도 지을 수 있지. 실연당하고 미친 듯이 농약을 구해온 열아홉 살 나와 네가 싫어 그랬다고 우리집 담을 도끼로 부수던 남자를 바라보는 스무 살의 내가 함께 나오는 그런 소설도 지을 수 있을 거야. 이런 소설은 어때? 열 살의 나와 예순 살의 나에게 겸상으로 우리 엄마가 밥상 차려주는 그런 소설. 결혼 전의 내가 공원에 앉은 지금 나의 뺨을 때리고, 일흔 살의 내가 뺨 맞은 나를 위로해주는 그런 소설 말이야.


불 다 꺼진 한밤중의 공원 벤치

나는 지금 가방을 열었어

일 년 삼백육십오 일 하고도 곱하기 삼

밥상 당번하는 거 지겨워 사춘기 소녀 식모처럼

징징거리면서 오늘밤 나는 가출했거든

그런데 무심코 가방을 열자

수많은 나와 가출해 추위에 떠는 내가 동시에 만나 버린 거야


저기 봐, 저기 가방에서 나온 내 머리통 하나

그네 위로 높이 떠올랐잖아?

가슴엔 수놓인 손수건을 달았어

부처 얼굴이 무서워 포교당 유치원을 탈출했어

아니, 잘못 봤어 그보다 몇 년 뒤야

물 없는 우물에 빠져 소리지르고 울 때야

저기 봐, 또 저기

가로등 위로 풀빵을 사든 내가 지나가잖아

할아버지 몰래 금고에서 동전을 꺼냈어

저 발 아래 물웅덩이엔

내 무릎 사이로 발가벗은 귀여운 내가 기어오네

쭈쭈 아가 이리 온, 맛있는 젖 먹여줄 게

일흔 살의 내가 마흔인 나를

위로하느라 가로수 사이 불어제치네

흰 머리칼 다 풀어지고 이마엔 땀이 맺혔어

내 몸에서 나온 나의 할머니들과

나의 딸들이 달로 뜨고 별로 뜨고

나뭇잎 잎잎마다 바람으로 불어제쳤어


한밤 내내 나는 나에게서 불을 쬐고 앉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에게 안겨 젖 빠는

가장 어린 나에게서 오오래 불을 쬐었다

일흔 살 먹은 나의 껍질뿐인 젖무덤을 더듬기도 했다

보름달 아래 겨울 가출이 아주 따뜻했다

식어가는 화로 하나 껴안은 것처럼


『환한 걸레』 (불쌍한 사랑 기계 /문학과지성사 /1997)


물동이 인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

저 아래 우물에서 동이 가득 물을 이고

언덕을 오르는 여자들의 가랑이 아래 눕고 싶다


땅속에서 싱싱한 영양을 퍼올려

굵은 가지들 작은 줄기들 속으로 젖물을 퍼붓는

여자들 가득 품고 서 있는 저 나무

아래 누워 그 여자들 가랑이 만지고 싶다

짓이겨진 초록 비린내 후욱 풍긴다


가파른 계단을 다 올라

더 이상 올라갈 곳 없는

물동이들이 줄기 끝

위태로운 가지에 쏟아 부어진다

허공중에 분홍색 꽃이 한꺼번에 핀다


분홍색 꽃나무 한 그루 허공을 닦는다

겨우내 텅 비었던 그곳이 몇 나절 찬찬히 닦인다

물동이 인 여자들이 치켜든

분홍색 대걸레가 환하다


『딸을 낳던 날의 기억』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

┈ 판소리 사설조로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거울 안에 어머니가 앉아 계시고

거울을 열고 다시 들어가니

그 거울 안에 외할머니 앉으셨고

외할머니 앉은 거울을 밀고 문턱을 넘으니

거울 안에 외증조할머니 웃고 계시고

외증조할머니 웃으시던 입술 안으로 고개를 들이미니

그 거울 안에 나보다 젊으신 외고조할머니

돌아 앉으셨고

그 거울을 열고 들어가니

또 들어가니

또 다시 들어가니

점점점 어두워지는 거울 속에

모든 웃대조 어머니들 앉으셨는데

그 모든 어머니들이 나를 향해

엄마엄마 부르며 혹은 중얼거리며

입을 오물거려 젖을 달라고 외치며 달겨드는데

젖은 안 나오고 누군가 자꾸 창자에

바람을 넣고

내 배는 풍선보다

더 커져서 바다 위로

이리 둥실 저리 둥실 불리워 다니고

거울 속은 넓고 넓어

지푸라기 하나 안 잡히고

번개가 가끔 내 몸 속을 지나가고

바닷속에 자맥질해 들어갈 때마다

바다 밑 땅 위에선 모든 어머니들의

신발이 한가로이 녹고 있는데

청천벽력.

정전. 암흑천지.

순간 모든 거울들 내 앞으로 한꺼번에 쏟아지며

깨어지며 한 어머니를 토해내니

흰 옷 입은 사람 여럿이 장갑 낀 손으로

거울 조각들을 치우며 피 묻고 눈 감은

모든 내 어머니들의 어머니

조그만 어머니를 들어올리며

말하길 손가락이 열 개 달린 공주요 !


『죽은 줄도 모르고』(어느 별의 지옥 /문학동네 /1997)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황급히 일어난다

텅 빈 가슴 위에

점잖게 넥타이를 매고

메마른 머리칼에

반듯하게 기름을 바르고

구더기들이 기어나오는 내장 속에

우유를 쏟아붓고

죽은 발가죽 위에

소가죽 구두를 씌우고

묘비들이 즐비한 거리를

바람처럼 내달린다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먼지를 털며 돌아온다

죽은 여자의 관 옆에

이불을 깔고

허리를 굽히면

메마른 머리칼이 쏟아져 쌓이고

차가운 이빨들이 입 안에서 쏟아진다

그 다음 주름진 살갗이

발 아래 떨어지고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다시 죽음에 들면서

내일 묘비에 새길 근사한

한마디 쩝쩝거리며

관 뚜껑을 스스로 끌어올린다.


『그녀, 요나』(한 잔의 붉은 거울 /문학과지성사 /2004)


어쩌면 좋아요

고래 뱃속에서 아기를 낳고야 말았어요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못했는데

사랑을 하고야 말았어요


어쩌면 좋아요

당신은 나를 아직 다 그리지도 못했는데

그림 속의 내가 두 눈을 달지도 못했는데


그림 속의 여자가 울부짖어요

저 멀고 깊은 바다 속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그 여자가 울어요 그 여자의 아기도 덩달아 울어요

두 눈을 뜨고 당신을 보지도 못했는데 눈물이 먼저 나요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게 분명하지요?

그러니 자꾸만 자꾸만 당신이 보고 싶지요)

오늘 밤 그 여자가

한번도 제 몸으로 햇빛을 반사해본 적 없는 그 여자가

덤불 같은 스케치를 뒤집어쓰고

젖은 머리칼 흔드나봐요

이파리 하나 없는 숲이 덩달아 울고

어디선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함박눈이 메아리쳐와요


아아, 어쩌면 좋아요?

나는 아직 태어나보지도 못했는데

나는 아직 두 눈이 다 빚어지지도 못했는데


『얼음의 알몸』 (한 잔의 붉은 거울 /문학과지성사 /2004)


너는 흰눈을 저장해둔 곳에 가본 일이 있으며

우박창고에 가본 적이 있느냐*


너는 바다 밑 얼음창고에 가본 적이 있느냐

너는 거기서 물로 빚은 물고기들이 숨죽이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느냐


너는 마음속에 눈이 내려

높이 높이 쌓인 눈, 그 속에 숨은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그 사람이 잠 깨어 눈뜰 때

그 눈 속에 떠오르던 검은 달이

우는 걸 본 적이 있느냐


너는 쏜살같이 달려가는 기차에서

쏜살같이 달아나는 흰 산들을 잡으려 해본 적이 있느냐

그 산들의 싸늘한 눈길을 견뎌본 적 있느냐


땡볕 쏟아지는 여름 그 큰 얼음을 아픈 사람처럼 담요에 싸안고

눈물을 훔치며 가던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너는 그 적나라하게 뜨거운 얼음의 알몸을 만져본 적이 있느냐


깊은 밤에 깨어나 우는 사람의 눈물을 받아 먹어본 적 있느냐

그 굳센 얼음이 녹는 기분이 어떨까 생각해본 적 있느냐

그러니 잘 들어라 얼음아씨가 말하노니

너는 우박창고에 가본 적이 있느냐

다 녹아서 흘러가버린 우박창고에 우두커니

서 있어본 적이 있느냐

*「욥기」38장 22절.


『나비』 (한 잔의 붉은 거울 /문학과지성사 /2004)


내 왼쪽 귀와 네 오른쪽 귀로 만든 나비 한 마리


두 날개가 파닥이면 맞잡은 전신으로 파문 진다


환한 날개 가루들로 네 꿈을 채워줄 게

네 꿈속에 내 꿈을 메아리처럼 울리게 할 게

귓바퀴 속 두 소용돌이가 환하게 공명한다


어쩌면 귀먹은 사람이 잠결에 들은 것 같은

그런 편지를 내 왼쪽 귀를 다하여 쓸 게

네 꿈속으로 들어가 혈액을 다정히 흔들어줄 게


이 세상 끝까지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만큼

그렇게 가볍게 날개를 파닥일 수 있겠니?


문드러진 꽃처럼 피어난 우리 입술의 암술 수술로

우리가 키우는 이 나비 한 마리


나중에 나중에 우리 없는 세상에 뭐가 남을까?

우리 몸을 버리고 날아오를 저 나비 한 마리


우리 몸속에서 아직도 팔딱거리는 어둠처럼

아직 생기지도 않은 저 멀고먼 쌍둥이 태아처럼


두 손을 맞잡고 누운 침대 위

우리는 두 귀를 맞댄 채 생생히 썩어가네

우리 무덤 위로 바스라질 듯 두 귀를 팔딱거리는 저 나비 한 마리!


『낙랑공주』 (한 잔의 붉은 거울 /문학과지성사 /2004)


그녀가 온다. 북을 둥둥 치며 온다. 하늘의 고막을 둥둥 울리며 온다. 벼락을 안고 오는지 대문이 저절로 무너진다. 그녀가 온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그녀의 마음이 내게로 온다. 내 마음이 둥둥 울린다. 이렇게 두꺼운 아버지의 고막을 찢고 그에게 가리. 나는 마치 바다를 깔고 누운 것 같다. 커튼을 치고, 뇌파를 차단하고, 아아 그녀가 떠들썩한 텔레비전 방송국을 망치로 내리친다. 베개에 피가 번진다. 내 온몸의 세포가 나를 떠나려 한다. 심장이 번개처럼 갈라진다. 나는 벼락 맞은 땅처럼 아프다. 그녀가 온다. 내 몸속으로 온다. 일곱 시간째 걸어온다. 파수병이 깰 것이다. 아아 아버지의 군대도 깰 것이다. 달이 잘 당겨진 북처럼 팽팽한 하늘을 텅텅 친다. 그녀가 온다. 태풍의 눈을 둥둥 두드리며 온다. 나는 그녀가 잘 지나가라고 내 몸을 판판하게 펴준다. 내 몸 위로 말발굽이 지나간다. 그녀의 날 선 칼이 내 눈 속에서 번쩍한다. 어디선가 전투기들이 출정한다. 멀리서 온 태평양 함대가 전멸한다. 텔레비전 방송국이 폭발한다. 궁성의 우물들이 넘쳐흐른다. 그녀의 눈 속에서 샘물이 철철 솟아 흐른다. 검은 별들이 비 오듯 쏟아진다. 물쥐들이 머릿속을 갉아먹는다. 그녀가 온다. 아직도 온다. 아버지의 궁성이 땅속으로 꺼지고 거기서 연못이 솟아오른다. 수양버들이 미친 듯 흔들린다. 그녀가 온다. 천둥 번개를 안고 온다. 아버지의 북이 둥둥 울릴 때마다 내 안의 병사들도 출정한다. 내 몸속에서 시냇물처럼 소리치며 쉼 없이 흐르던 칼의 바다. 그녀가 나를 부른다. 그녀의 쓰라린 맨발이 둥둥 내 빈 가슴을 울린다. 내 몸속 우물이 철철 넘쳐흐른다. 아 아버지, 이 북을 찢고 그를 만나리, 그녀가 울면서 온다.


『유화부인』 (한 잔의 붉은 거울 /문학과지성사 /2004)


나는 늘 한 여자를 구해주는 상상을 한다

그 여자의 손을 잡고

그 여자를 품에 안는 상상을 한다

나는 늙어도, 늙지도 않는 여자

언제나 같은 여자

꿈속으로 들어가면 늘 나를 기다리던 그 여자


서치라이트처럼 쏟아지는 햇빛에 쫓겨다니다

그 빛에 강간당해 날개가 다 타버린 여자

나는 죽은 얼굴에 밤마다 미백 크림을 발라준다

아기를 가졌다고 아버지에게 잡아 뜯겨

한정 없이 입술이 풀어진 여자

바위에 눌려 깊은 물속에 처박힌

물새같이 가련한 여자

나는 그녀의 끝없이 풀어지는 강물의 입술로 시를 쓴다

급기야는 도망가다 감옥에 갇혀 알을 낳은 여자

(아버지는 그녀의 아기를 돼지에게 주었다지만)

나는 그녀가 낳은 알뿌리를 옮겨 심고

거기에 꽃처럼 맺혀 서 있다


나는 늘 한 여자를 구해주는 상상을 한다

나는 그 여자의 손을 잡은 것처럼 내 손을 잡기도 하고

나는 그 여자를 숨긴 것처럼 내 얼굴을 어루만지기도 한다

언제나 같은 여자 늙지도 않는 여자

이야기 속으로 가라앉기만 하던 여자

아직도 내 몸 밖으로 한번도 나와보지 못한 그 여자

나는 그 여자의 몸에 베이비오일을 발라준다


그녀의 내지르지 못한 비명이 엎어진 건가 붉은 하늘이 지자

그녀의 손톱이 후벼 파놓은 상처인가

한밤중 쓰라린 초승달이 뜬다

나는 또 한 여자를 구해주는 상상을 한다


『날마다의 장례』 (한 잔의 붉은 거울 /문학과지성사 /2004)


슬픔이란 이름의 새를 아시는지

그 새의 보이지 않는 갈퀴에 대해 들어보셨는지

그 새의 투명한, 그러나 절대로 녹지 않는

갈퀴에 머리채가 콱 잡혀서

나는 문설주에 고개를 기대고 서서 말하네

잘 가거라 항구를 떠난 잠수함아

여기 절벽 위에 서 있는 나를 잊지는 말아라


누군가 내 심장 박동 소리로 내 속을 쿵쿵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저 잠수함 저 혼자 떠난 거야

누군가의 손가락 내 관자놀이에서 쉬지 않고 파닥거리기 때문에

저 잠수함 저렇게 혼자서 가라앉기만 하는 거야


엄마의 몸속에서 내팽개쳐진 그날 저녁부터

날마다 가라앉기만 하는 잠수함

이제 내 탄생의 그 종착역에 다 와간다고 기별이 오는데

내 슬픔의 박자는 이렇게 쉬지 않고 울리고

내 슬픔의 숨은 이렇게 쉬지 않고 헐떡거리고

추운 밤의 밀물 같은 슬픔이 온몸을 적시는데


찬물 속의 찬물처럼 나 흐느끼는데


항구를 떠난 잠수함아 우리가 처음 헤어지던 그날 잊지는 않았겠지

그 깊은 바다 속에서 혼자 흐느끼고 있지는 않겠지

내 머리채를 놓고 이 새가 날아가버린 날

매일 매일 가라앉는 꿈, 그 속의 잠수함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시체처럼 나는 네 속에

비로소 탑승하게 되는 거겠지?

그러니 부탁이야,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헐떡거리며 서 있는

김혜순을 잊지는 말아줘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2005년>

 

▲ 일러스트=잠산
여름 여치가 운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가을 정미소를 지난다. 차가운 (겨울) 구름이 떠있다. 그렇게 자전거는 골목 모퉁이를 돈다. (아가였던) 할머니가 구멍가게 평상에 앉아 있다. '잘 익은 사과'는 이런 일상적인 풍경을 다채로운 감각의 성찬으로 펼쳐놓고 있다.

백 마리의 여치 울음 소리는 자전거의 바퀴 도는 소리, 정미소에서 나락 빻는 소리와 겹쳐진다. 처녀 엄마가 낳은 입양 가는 아가의 뺨은 구름의 차가움으로 전이되고, 그 구름은 천년 동안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로 확장된다. 고향 마을은 금세 큰 사과로 축소되고, 마을을 달리는 자전거 바퀴는 사과를 깎는 칼날 소리를 낸다. 차르르차르르(사각사각)!

자전거 바퀴가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그때마다 고향 마을만큼이나 큰 사과가 깎인다는 발상과 그 큰 사과를 노망든 할머니가 숟가락으로 파내 잇몸으로 오물오물 잡수신다는 발상은 사뭇 상징적이면서 동화적이다. 노망든 할머니가 숟가락으로 야금야금 파먹는 사과는 시간의 신(神)이 돌리는 물레의 실타래에 비견할 만하다. 기발하면서도 유쾌하다. 아가, 처녀 엄마, 할머니로 숨가쁘게 이동하는 시간을 '천년 동안 아가인 그 사람'으로 정지시켜 놓는 것도 흥미롭다.

차르르차르르 돌던 한 세월이 발갛게 잘 익었겠다. 누군가 고향 마을에서 그 한 세월을 잘 놀다 갔겠다. 껍질이 홀라당 깎인 노르스름한 사과 속살 같았겠다. 군침 가득 돌았겠다. 그렇다면, 이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는 '밤낮을 만드시고 이 지구를 세세년년토록 운항하시는' '숫자 나라의 시간 윤전기 노동자인 우리들 앞에서/ 감독을 게을리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신', '세상의 모든 달력 공장 공장장님'을 낳은 바로 그 처녀 엄마 아니었을까.

김혜순(52) 시인은 8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이다. 그는 겹침의 시학을 즐겨 구사한다. 시간과 공간을 확장시키는가 하면 수축시키고, 감각과 시점을 겹쳐놓는가 하면 뚝 떨어뜨려 놓는다. 여성의 환상적 내면을 몸의 감각과 경험으로 그려냄으로써 일견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떠올리게 한다. 그를 최근 유행하는 '환상시'의 대모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 自序 -



..지난 시절엔 왜 그리도 자주 젊은 시신들이 땅속에서, 물 속에서 떠오르던지. 나는 그만 죽음에 휘둘려서. 사인 불명의 퉁퉁 불은 시신을 앞에 놓고 우리는 왜 그리 또 손바닥이 붉어지던지.

..또 시집을 내느냐고 웃는 사람에게 이 귀신들을 하나씩 선물한다. 부디 머리 풀고 곡하면서 소란스럽기를.


...................................................1990년 가을
.....................................................김 혜 순


 
."이제 멈추고 싶어"


.....................- 김혜순 시인 -




나는 생각의 보따리를 가득 이고
날마다 커지는 보따리를 이고
덜컹거리며 덜컹거리며
아침마다 왕복 열차를 탄다

그러나 내려서 그에게로!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늘 가면서도 한번도 닿아본 적이 없는
그에게로! 날마다 커지는 생각의 보따리를 이고

먼먼 기억의 궁륭 저편
그가 오고
또 내가 갔었는데
오늘 텅 빈 왕복 열차를 타고
피곤에 지친 내가 덜컹거리며
그곳과 이곳을 왔다갔다
생각의 보따리를 차창에 기댄 채


.
...김혜순 詩集(文知詩人選ㆍ96)
..『우리들의 陰畵』중에서 -











."밤이 낮을 끌고 간다"


......................- 김혜순 시인 -




밤이 낮을 끌고 간다
아침이 새초롬히, 소녀처럼 끌려가고
한낮이 햇살 양산을 빙그르르,
다음, 저녁이 아련한 소복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잠옷을 벗고 어둠을 한 세숫대야 씻어낸 사람들이
또 시작이야 아침을 먹고
밤새 널어놓은 신발을 신고
뛰자뛰자 집을 나서지만
늘 출발한다고 말하지만
등뒤엔 언제나 검은 파이프를 문 밤
밤이 낮을 끌고 간다
한낮을 지나 저녁을 지나 술집을 지나
잠자리에 몸을 쾅 눕힐 때까지
밤이 나를 끌고 간다

날마다 낮이 짧아진다
살아볼수록 낮이 짧아진다

매일매일의 밥이 끌려가고
매일매일의 키스가 끌려가고
매일매일의 노동이 끌려가고
매일매일의 시신을 먹고
밤은 배부른 둥근 자석 지구처럼
둥그래 검은 배가 날마다 불러온다

간혹 역사를 읽고 동상을 세우지만
책 속에서 메마르게 떨어지던 낡은 이름!
끌려간 한낮은 다시 보이지 않고
오늘 저녁이 또 바삐 끌려간다



.- 同詩集에서, -












."기다림"


...............- 김혜순 시인 -




나는 우선 집에 돌아오면
스타킹을 벗고 손발을 씻고
하루분의 화장을 지우고
대못에 가 걸린다
네가 나를 데리러 오리라는 생각
네가 날 데리고 점점점
높은 가지로 오르리라는 생각
그 생각에 걸린 채
푸줏간의 살덩이처럼
천만 근 무거운 살주머니로
밤새도록 대못에 걸려
눈알을 디룩거린다
발밑으로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도
모르는 채



.- 同詩集에서, -








■ epilogue -



..시인은 자신의 아픔을 모셔놓고 그 아픔을 향해 춤을 추는 사람이다. 시인은 자신의 아픔을 몸 속에 넣어놓고, 모시고 얼르고 놀아주고 축제를 벌여주며 때맞춰 제사 지내는 사람이다. 시인은 그 아픔이 싫어 도망가다 도망가다 병든 사람이지만 그 아픔을 제 서방보다 귀히 여기는 사람이다. 시인은 밤이면 밤마다 어둠 붙여들고 아픔 맞으러 산에 오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시인은 제 아픔의 신은 뼛속에 감춰두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얼르는 사람이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지만 시인의 눈에는 빠안히 보이는 병든 귀신들을 얼르고 놀아주다 저 멀리로 보내는 사람이다. 아픈 자였으나 아픔을 감춰두고 핏발선 눈으로 다른 사람의 아픔과 죽음을 놀아주는 사람이다. 아픔의 핵을 신처럼 받들어 들고 그 아픔의 핵인 입술로 사람의 아픔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며 책망하고 갈망하는 사람이다. 그것을 노래로 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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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납작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김혜순

드문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며칠 눌렀다가

벽에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들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포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나서

피도 눈물도 업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짝해진

천지 만물을 한줄에 꿔어놓고

가이 없이 한없이 펄렁펄렁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

 

     시집 [ 또 다른 별에서]

 

 

 

작품 해제: 이 시는 박수근 그림의 이미지와 화법이 지닌 특성을 시적인 모티프로 활용하고 있는 작품이다.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라는 부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화자는 세상을 표현하는 박수근 특유의 색채와 질감을 언어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박수근의 그림에는 대부분 시골 아낙네, 노인, 어린이 등 평범하고 일상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박수근은 공간감을 무시하고 대상을 평면화시켜 극도로 단순 명료한 형태를 추구했다. 화자는 박수근의 그림처럼 입체적인 이 세상을 납작하게 눌러서 벽에 걸어놓겠다고 말한다. 그 속에는 흰 하늘, 쭈그린 아낙네, 여편네,아이들과 같은 세상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화자는 세상을 사는 것이 그렇게 납작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납작해진 세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정서는 서글픔과 애처로움일 것이다.

 2연에서 화자는 아무런 표정없이 서성거리며 살다가 드디어는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말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사는 것이 삶이라는 것이다. 바짝 마르는 것이 삶이라는 것은, 역으로 말하면 이 세상이 사람을 억누르고 납작하게 만든다는 뜻일 것이다. 화자가 하느님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러한 바짝 마른 삶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설의적 표현을 통해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시어의 함축적 의미:

흰 하늘, 아낙네, 여편네, 아이들: 평범한 일상적 삶

바짝 마르기: 억눌리며 사는 사람들의 삶

 

주제: 고달픈 세상살이에 대한 깨달음과 연민

 

배경지식

 

 박수근 화법의 특징

 박수근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는 대부분 생활에 전념하는 시골 사람들의 꾸밈없는 모습이다. 그는 농악놀이, 빨래나 절구질하는 아낙네 등 일하는 사람들을 즐겨 그렸다. 또, 담소를 즐기는 노인들이나 열중하고 있는 어린아이들 등 삶의 현장에 있는 그대로를 조형화시켰고, 앙상한 나무들과 같이 상식적이고 평범한 소재들을 주로 다뤘다. 그는 구태의연한 사실주의적 묘사 방법에 의한 형성화를 거부했다. 그는 공간감을 무시하고 대상을 평면화시켜 극도로 단순 명료한 형태를 추구했다. 이렇듯 절제된 묘법은 배경의 생략과 더불어 주제 의식을 극명하게 하는 효과를 주고 있다. 그의 그림 속의 대상은 거의 손으로 조형화하고 있고, 세부 묘사는 보이지 않는다. 박수근 회화는 화면 바탕의 처리 방식도 독창적이었다. 그는 캔버스에 물감을 두텁게 발라 우둘두둘한 질감을 얻었다. 독특한 질감은 대개 회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무채색 계열의 기본 채도는 둔중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출처 : 도르메세상  |  글쓴이 : 도르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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