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계당을 지켜온 매화 세 그루,

지실 계당매(芝室 溪堂梅)’

  -호남오매(湖南五梅)-


담양 남면의 지실마을은 장원봉을 두고 성산의 기슭에 위치한다.

옛 이름은 만수동(萬壽洞)’, 담양에서 한양으로 가던 길목으로 호남에서 한가닥 하는 선비들의 아지트였다. 이곳의 아름다움에 반해 무릉도원이라 하였고, 그곳에 머물며 시를 지으며 자신들의 해박하고 호탕함을 자랑하던 곳이다.

 


지실마을 계당매

왼쪽이 수령 100년의 '계당홑백매'이며, 그 다음이 수령 400년의 '계당홍매', 배롱나무 옆이 같은 수령 400년의 '계당겹옥매'다.

계당 홍매를 근간으로 두그루의 매화나무를 '계당매'라 한다. 


이곳은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4)’의 마음의 고향이 된다.

큰누이가 인종(仁宗, 12대 임금)’의 후궁이었으며, 둘째누이가 왕족 계림군 이류(桂林君 李瑠)’의 부인이다. 그로 인해 어린 시절부터 궁중에 자주 출입하며 어린 경원대군(慶原大君, 훗날 13대 임금 명종)’과도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그러한 후광은 시대가 바뀜으로 역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가볍지 못했던 당시의 정치적인 삶은 행복하지 못했다. 유배와 이배를 밥 먹듯 했고, 죽고 나서도 추탈과 복권을 반복했으니 두 발 뻗고 편히 지내지 못했다.

 

계당홍매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유배생활을 이어가던 중, 16살 되던 해에 할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담양 창평으로 이주 하였고, 그곳에서 순천의 처가에 은둔하던 둘째형을 만나러 가는 길에 송강에게 있어 일생 최대의 은인을 만났으니,

그가 바로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1572)’였다.

송강은 이곳에서 10년간 사촌의 문하생이 되어 환벽당에 머물며 공부했으며,

또한 사촌은 자신의 사위인 유강항의 딸과 결혼을 이어주기도 했다. 이곳에서 송강은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 1493-1582)’,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1527-1572)’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사사를 받았고,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1496-1568)’에게서 시와 학문을 익혔다. 또한, ‘송천 양응정(松川 梁應鼎, 1519-1583)’, ‘사암 박순(思庵 朴淳, 1523-1589)’ 등의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사촌의 조카인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1525-1597)’,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 1533-1592)’과 동문수학 했으며, ‘구봉 송익필(龜峯 宋翼弼, 1534-1599)’,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1598)’, ‘옥봉 백광훈(玉峯 白光勳, 1537-1582)’,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1539-1583)’, ‘중봉 조헌(重峯 趙憲, 1544-1592)’,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등의 벗들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 머물면서 지명을 따 스스로를 송강(松江)’이라 하였고, 문인 서하당을 위해 식영정(息影亭)’에서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었다.


계당겹백(옥)매



송강이란, 성산(별뫼)앞을 흐르는 시내로 6개의 이름이 있는데,

시내에 시루바위가 있어 증암천(甑巖泉)’, 7월에서부터 9월까지 백일홍이 아름답다하여 자미탄(紫薇灘)’, 고서면에 위치하여 고서천(古西川)’, 물이 짙푸르다하여 창계천(蒼溪川)’, 시냇가에 대나무가 많이 있어 죽록천(竹綠天)’, 시냇가 주변에 소나무가 많이 있어 송강(松江)’ 으로 일컬어졌다.

 

이 후 송강은 한양에 들어가 관료로서 암행어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당쟁에 휘말려 정치에 환멸을 느꼈고 그럴 때 마다 이곳으로 낙향하여 심신을 다스리며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1580(선조13)에는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 되었는데, 이 무렵에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하며 산수를 노래하는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었고, 백성들의 교화를 위한 훈민가(訓民歌)’를 지었다. 1

585(선조18)에는 동인들의 공격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며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등의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1592(선조25) 임진왜란 때 왕의 부름을 받아 의주까지 호종하면서도 서인과 북인, 남인들의 비난에 몸살을 앓았고, 이듬해 55만의 군사로 도움을 준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임명되었으나 또 다시 동인들의 공격을 받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강화도로 숨어들었고, 그 해 1218일 병으로 죽었다.


송강의 가사문학은 한국문단의 중심으로 등장했으며, 그의 작품들은 우리 국문학 중흥의 백미가 되었다. 그의 문학적 기여는 실로 대단한 것이다. 기존의 한문자 틀을 벗어나서 3, 4조의 운율을 자유자재로 국어를 구사했다.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였던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와 함께 시가사상의 쌍벽을 이뤘다.

 

이러한 인연으로 어린 시절을 지곡리에서 보낸 송강의 4,

기암 정홍명(畸庵 鄭弘溟 1582-1650)’1616(광해8) 낙향하여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삶과 작품들을 정리하면서 그 자리에 집을 짓고 계당(溪堂)’이라 했다.

계당은 아버지 송강의 마음의 고향을 이은 것이다. 사촌 김윤제를 만나 10여년을 머물면서 정계를 물러날 때 마다 머물며 거닐던 옛 터로 그의 후손들은 물론, 수많은 선비들이 남긴 족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1902년 화재로, 1951년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들에 의해 방화 되어 안채 등이 모두 사라지고, 사랑채만이 남아있다. 이 후 1986년 송강의 15대손 우전 정하용(雨田 鄭夏溶)’이 원래의 모습은 그대로 두고 지붕만을 고친상태로 지금에 이른다.

 



가사문학의 유구함을 간직한 땅, 그 터에 지어진 계당’,

그 입구에는 세 그루의 매화나무, 계당매와 한 그루의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다.

맨 안쪽이 백()매이며, 배롱나무, 가운데가 홍매, 그 다음이 백매다. 가운데의 홍매를 근간으로 계당매라 통칭한다. 기암이 집을 지을 때 같이 심은 것이라면 수령이 400년생인 매화들이다.


계당 백()는 수령 400, 수고 6.5m, 수폭 4.5m. 키는 홍매보다 크지만 폭은 좁다 원줄기부터 용틀임하며 올라가 가슴 높이에서 여러 가지로 갈라졌다.

계당 홍매는 백매와 함께 심겨진 것으로 수령 400, 수고 6m, 수폭 5.5m.

길 가장자리에 자리한 백매가 한 그루가 더 있는데, 원줄기는 고사하고 곁가지가 새로 나와 자란 것으로 수고 4m, 수폭 4.5m로 수령은 약 100년생이다.

 


잡풀이 우거지고 관리가 안 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 이곳, ‘계당

너른 마당은 잡풀이 듬성이고, 정원은 나무들로 어지럽다. 위로는 전깃줄이 어지럽고 계는 어수선핟다. 그러나 송강이 머물던 때는 만수동계곡으로 올라가는 옛길이었다. 하여 만수동인가라고 했다. 수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머물고 떠난 자리다. 선비들의 사랑방이었다.

 

송강이 네 번이나 낙향하였을 때, 지금의 계당터에 초막을 짓고 지었던 시로 추정되는 시가 있다. 당시의 심정과 계당을 찾았던 때의 마음을 노래한 시다.

 

제만수동인가벽(題萬壽洞隣家壁 : 만수동 이웃집의 벽에 쓰다)’

 

만수명산로(萬壽名山路) 만수동이라 명산의 길 찾아

추풍병객래(秋風病客來) 가을바람 같은 병든 나그네가 왔네.

청수동노두(淸愁同老杜) 맑은 시름은 늙은 두보와 같아서

처처희징배(處處喜徵杯) 가는 곳마다 잔(술) 들기를 좋아하오.

 

지척가거병(咫尺家居幷) 내 사는 집 지척에 두고도

경년득일래(經年得一來) 일 년 만에 겨우 한번 왔네.

동장천정죽(東墻千挺竹) 동녘담의 천 그루 대나무

의구영침배(依舊影侵杯) 변함없는 그림자  잔(술)마다 들어있네.

 

, 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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