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교, 타협, 혼란

APOSTASY, COMPROMISE,

 

CONFUSION

 

1.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2. 에큐메니칼 운동의 문제

 

3. 선교 개념의 변질

 

4. 교회의 윤리적 부패

 

5. 은사운동의 혼란

 

6. 복음주의의 타협

 

7. 근본주의의 입장

 

김효성 목사

 

Hyo Sung Kim, Th.M., Ph.D.

 

 

옛신앙

 

Old Faith Press

 

2001

저자 김효성 목사 소개

 

1973년, 연세대학교(철학과) 졸업(B.A.)

1979년, 총신대학 신학연구원[신학대학원] 졸업(M.Div. equ.)

1983년, 미국, 페이스(Faith) 신학교 졸업(Th.M.)

1988년, 미국, 밥 죤스(Bob Jones) 대학교 대학원 졸업(Ph.D.)

J. G. 메이천, 신약개론, 신앙이란 무엇인가? 등 다수 번역

총회신학연구원(합동보수) 교수 역임

예수교 장로회 신학연구원 교수 역임

현재, 서울 합정동교회 담임목사

계약 신학대학원 대학교 전임강사

옛신앙 출판사(Old Faith Press)

121-884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4-1

전화 (02) 334-9874, 팩스 (02) 337-4869

전자우편: book@oldfaith.org

등록번호 제10-1225호

1993년 9월 30일 (기독교문서선교회, 초판)

2001년 2월 24일 (옛신앙 출판사, 개정증보판)

2001년 3월 30일 (2쇄)

ISBN 89-951985-0-8 03230

총판: 도모 기독서점((02) 830-8566, Fax. (02) 830-8567

‘옛신앙’이란, 옛부터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주의 사도들이 가졌던 신앙, 오직 정확 무오(正確無誤)한 하나님 말씀인 신구약성경에만 근거한 신앙, 오늘날 배교와 타협의 풍조에 물들지 않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렘 6:16).

내용 목차

♣♣♣♣♣♣♣♣

머리말 / 5

제1부: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 17

서론 / 19

1. 자유주의 신학의 근원, 분류, 세력 / 21

2. 기독교와 자유주의 / 23

3.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단 사상의 예들 / 28

4. 자유주의 이단들에 대한 성경적 반박 / 71

5. 오늘날 교회들에 끼친 자유주의 영향들 / 100

결론 / 123

제2부: 에큐메니칼 운동의 문제 / 125

서론 / 127

1. 세계교회협의회의 공식적 진술들 / 131

2. 신학적 포용주의--전체적 고찰 / 134

3. 신학적 포용주의--성경관 / 141

4. 신학적 포용주의--신조의 개념 / 148

5. 신학적 포용주의--복음의 개념 / 153

6. 신학적 포용주의--믿음의 개념 / 157

7. 신학적 포용주의--천주교회에 대하여 / 159

8. 성례주의적 경향 / 182

9. 한 세계교회를 지향함 / 184

10. 종교적 다원주의의 경향 / 189

결론 / 196

제3부: 선교 개념의 변질 / 199

서론 / 201

1. 넓어진 선교 개념 / 201

2. 사회 정치적 관심과 행동주의 / 209

결론 / 213

제4부: 교회의 윤리적 부패 / 215

1. 열린 예배 / 217

2. 현대 기독교 음악 / 224

3. 남녀 평등주의 / 229

4. 낙태 / 234

5. 동성애 / 237

6. 안락사 / 253

결론 / 254

제5부: 은사운동의 혼란 / 255

1. 은사운동의 기원과 세력 / 258

2. 성령의 세례 / 264

3.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 271

4. 비평: 은사운동에 대하여 / 275

결론 / 285

제6부: 복음주의의 타협 / 287

1. 개념의 정의 / 289

2. 복음주의 협의체 / 294

3. 복음주의 잡지와 학교들 / 304

4. 복음주의 인물들 / 309

5. 복음주의 교단들 / 316

6. 기타 / 319

결론 / 320

제7부: 근본주의의 입장 / 323

1. 역사적 고찰 / 326

2. 개념의 정의 / 332

3. 성경적 평가: “분리의 원리” / 335

4. 역사적 후원 / 351

5. 잘못된 비평들에 대한 비평 / 355

결론 / 369

전체적 결론 / 373

머리말: “순결한 교회를 위하여”

서론

교회는 초대로부터 문제들을 갖고 있었음

주께서 피흘려 사신 교회는 거룩하고 영광스런 교회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사도 시대로부터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율법주의 이단의 침입이 있었고(갈라디아서), 고린도 교회에는 파당과 분쟁, 음행한 자의 포용, 성찬식의 무질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 부활의 부정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다(고린도전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은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를 제외하고는 다 책망거리들을 갖고 있었다(요한계시록 2-3장). 이러한 교회의 문제들은 사도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교회의 역사는 교회 문제들의 역사이었다.

현대 교회들의 문제들

21세기에 들어선 현대 교회에도 많은 문제들이 있다. 그것들 가운데 다음 몇 가지는 매우 중대한 것들이다. 첫째는 이단적인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이며, 둘째는 비성경적인 에큐메니칼 운동의 문제이며, 셋째는 복음의 중심과 연결되고 교회의 사명인 선교 개념의 변질이며, 넷째는 이런 교리적 문제들에 첨가된 교회의 윤리적 부패의 문제이며, 다섯째는 말씀보다 경험을 중시함으로 혼란을 일으키는 은사 운동의 문제이며, 여섯째는 타협적 복음주의 혹은 신복음주의의 문제이다. 이런 문제들로 인하여, 많은 교회들은 배교(背敎)의 길을 걷고 있고, 다른 많은 교회들은 그 뒤를 따르거나 그 배교와 타협하고 있으며, 또한 이런 문제점들과 더불어 또는 이런 문제점들 때문에 더욱, 교회들은 영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다.

교회의 문제들의 원인

땅 위에 있는 교회들이 이러한 문제들을 안고 있는 까닭은, 부분적으로는 성도들의 성화(聖化)의 불완전, 즉 그들의 지식과 인격이 불완전하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부패시키려는 사탄과 그 도구인 위선적 교회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활동 때문이다. 사탄은 에덴 동산 때로부터 지금까지 세상에 거짓말을 퍼뜨리며 또한 교회들을 부패시키고 있는 장본인이다.

신앙 생활의 표준과 근거는 성경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 생활의 표준과 근거이다. 우리의 신앙은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 등 인간의 권위에 근거해서는 안되고, 또 단순히 교회의 권위에 근거해서도 안된다. 우리의 신앙 생활은 오직 성경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물론 성경을 바르고 건전하게 해석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정통과 이단의 구별이 필요함

역사상 교회 안팎에는 많은 거짓 교사들이 나타났고 여러 가지 잘못된 신앙 사상들과 가르침들이 있어 왔고, 따라서 바른 사상과 그릇된 사상, 바른 가르침과 그릇된 가르침 즉 정통과 이단의 구별이 필요하게 되었다.

성경에는 이단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이미 예언되어 있다. 주께서는 마태복음 24장에서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었다(11, 24절). 바울 사도도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背道)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했다(2:3).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사도 시대에 벌써 여러 이단자들이 나타났었다. 예를 들어, 디모데후서 2장에 보면, 후메내오와 빌레도라는 인물이 언급되는데, 그들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거짓된 사상, ‘독한 창질’ 같은 사상을 퍼뜨리고 있었다(16-18절).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사도들을 통해 전수된 바른 교리 즉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보수(保守)할 것을 가르쳤고 또 이단자들과 그 사상을 명확히 정죄하였다. 디모데후서 1: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갈라디아서 1:8, 9,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교회 역사상 가장 큰 이단은 천주교회(로마 카톨릭 교회)

교회역사상, 가장 큰 이단은 천주교회이다. 천주교회는 트렌트 회의의 선언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성경의 복음 진리를 정죄하고, 교황의 무오성(無誤性)을 주장하고, 마리아를 거의 신적 존재로 숭배하여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보혜사, 중보자’라고 부르며, 연옥의 교리와 미사의 교리 등을 주장함으로써 성경 진리들을 매우 이탈하였고 그 진리들에 명백히 반대되었다.

개혁신학

그러므로 천주교회를 반대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소위 ‘개혁신학’이 정립되었다. 개혁신학의 요점대로,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無誤)한 기준이다. 어떤 개인의 가르침이나 심지어 교회의 가르침이라도 성경과 다르면,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고 배격해야 한다. 또 하나님은 절대주권자이시며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력해졌으므로,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자유주의 신학

오늘날 가장 심각한 이단은 자유주의 신학

근세에 들어와 19세기 이후, 안식교,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통일교 등 여러 이단종파들이 일어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늘날 교회들 안에서 가장 심각한 이단은 자유주의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역사상 그 어떤 이단들보다도 더 파괴적인 이단이며, 게다가 다른 이단들처럼 구별되지 않고 장로교회, 감리교회, 루터교회, 침례교회, 성결교회 등의 기성 교회 속에 들어와 있다.

자유주의 신학의 근원과 정체(正體)

자유주의 신학은 근대의 이성주의, 과학의 발달, 진화론 등에 힘입은 성경의 비평적 연구에서 시작되었다. 성경의 비평적 연구는 성경의 진실성과 기적들을 부정하는 생각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또한 자유주의 신학의 정체는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을 부정하고 예수님에 대한 기본적 사실들을 부정하는 사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을 부정하며 성경을 오류투성이의 책으로 본다. 이것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적으로 부정하며 하와를 범죄케 하였던 사탄의 말과 같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 신학자 C. H. 다드는 말하기를, “[성경의] 외적 권위는 엄밀한 의미에서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 “우리가 계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어느 것도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상대적이다. 아무 곳에서도 진리는 우리가 자존적 외적 권위를 찾을 수 있는, 순수하게 ‘객관적인’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말하기를, “선지자들과 사도들 자신은 심지어 그들의 직분에 있어서도, 심지어 증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도, 심지어 그들의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우리와 같이 실제, 역사적 인간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죄가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기록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범했다”고 하였다.

또한,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처녀 탄생, 기적들, 대속(代贖), 부활, 재림 등의 교리들을 부정한다. 우리의 문제점 제기를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말을 조금 인용해보자.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처녀 탄생에 대하여, 자유주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버는 말하기를, “영원(永遠)이라는 것이 시간 속에 들어온다는 개념은 지성적으로 불합리하다. . . .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는 진리가 보통 판단되는 모든 규범들을 어긴다”고 하였고,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주장은 역설적(逆說的)이 아니라 부조리한(nonsensical) 말이다”고 했고, 라인홀드 니이버는 말하기를, “‘처녀 탄생’과 같은 기적들은 후대에 삽입된 생각들이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기적들에 대하여, 루돌프 불트만이라는 신학자는 말하기를,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이야기가 이방의 전설로부터 취해져 예수께 돌려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사실, 그 이야기의 주제, 즉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은 디오니서스 전설의 전형적 주제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대속(代贖)에 대하여, 라인홀드 니이버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교리는 많은 신학적 오류들에 도달하는데, 그 중에는 인간의 도덕 의식을 모욕하는 대리적(代理的) 속죄의 이론들이 포함된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에 대하여,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는--현대 학자들의 사고 형식들과 용어로--사가(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반대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 그것은 동일한 것인데,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고 하였고, 라인홀드 니이버는 말하기를, “기독교의 교리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들을 부정하는 사상이다. 물론 모든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다 똑같이 모든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 지 모른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은 분명히 하나님의 거룩하고 귀한 진리를 부정하고 모욕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의 사상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2천년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이단이요 철저한 이단이요 불신앙인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결과 혹은 영향력

20세기에 들어와 자유주의 신학은 교회에 매우 큰 영향력을 미쳤다. 자유주의 신학으로 말미암아 유럽의 교회들은 거의 전체적으로 변질되었고, 미국의 대교단들도 그 뒤를 따랐다. 1923년에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작성되었던 소위 ‘어번 선언서’는 자유주의 신학을 용납하는 표시이었는데, 그 내용은 성경 무오, 기적의 사실성,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대속(代贖), 그리고 그의 육체적 부활을 성경과 장로교회 신앙고백서에 본질적인 교리들이 아니고 인간의 학설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 교회들의 다수는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한 ‘넓어진 교회’ 혹은 자유주의화한 ‘배교적 교회’가 되었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사회학자인 제프리 해든이 미국의 7441명의 성직자들에게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성경이 신앙과 역사와 세속 문제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감된 무오(無誤)한 말씀임을 믿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87%과 감독교회의 95%가 ‘아니오’라고 대답했고, 연합 장로교회의 82%와 미국 침례교회의 67%와 미국 루터교회의 77%가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탄생하셨음을 믿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의 60%와 감독교회의 44%가 ‘아니오’라고 대답했고, 연합 장로교회의 49%와 미국 침례교회의 34%와 미국 루터교회의 19%가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이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의 51%와 감독교회의 30%가 ‘아니오’라고 대답했고, 연합 장로교회의 35%와 미국 침례교회의 33%와 미국 루터교회의 13%가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1985년, 약125명의 개신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 신학자들이 ‘예수 세미나’를 시작했는데, 그 목적은 예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고 무엇을 말씀하지 않으셨는지를 결정하기 위함이었다. 이 세미나의 결과, 1988년 예수님의 비유들이라는 책자가 출판되었는데, 거기에는 적색, 분홍색, 회색, 흑색으로 예수님의 비유들의 역사적 신빙성의 정도를 표시했다. 이 세미나의 대략적인 결론은 다음과 같다: ① 예수님의 말씀들의 오직 20%만이 실제로 그의 말씀으로 생각되며, 요한복음에서는 오직 한 구절만이 그의 말씀이다. ② 주기도문도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다. ③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야라고 공적으로 주장하지 않으셨다. ④ 예수님은 자신이 신과 매우 가깝다고 느겼지만, 자신을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셨다. ⑤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을 약속하지 않으셨다. ⑥ 성경에 묘사된 지옥은 없다. ⑦ 예수님은 독신이 아니셨고 독신을 옹호하지도 않으셨다.

교회 연합 운동의 문제

오늘날 많은 교회들 가운데는 신학의 변질이 있을 뿐만 아니라, 비성경적 교회 연합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 교회 연합 운동(에큐메니칼 운동)은 자유주의 이단 사상을 비판 없이 수용하는 신학적 포용주의의 운동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교회 연합 운동은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포용적이며, 심지어 이방 종교들에 대해서도 포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타종교와의 대화분과장이었던 웨슬리 아리아라자는 세계교회협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출판된 성경과 타종교인들이라는 그의 책에서 기독교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고 힌두교 같은 이방종교들에 대해 포용적 입장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통탄할 만한 기독교회의 상황이다. 하나님의 참된 성도들은 이 시대의 기독교계의 상황을 분별하고 바르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신복음주의/ 복음주의

오늘날 교회들의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라는 입장과 태도와 정신이다.

신복음주의/ 복음주의의 정체(正體)와 예들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란 보수적인 교회 안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명확히 반대하지 않고 미온적으로 대처하여 그것을 포용하고 그런 자들과 교제하는 입장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가르쳐주신 교제의 원리를 저버리고 폭넓게 활동하려는 인간적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보다 인간의 생각을 앞세우고 자신의 명예와 인기를 구하는 잘못된 태도이다.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은 이러한 정신의 표본이다. 그는 전도 대회들을 개최할 때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단들과 협력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로마 천주교회의 지도자들과 협력한다. 더욱 슬픈 일은, 전도 대회들에서 얻은 결신자들이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천주교회들로 돌려보내지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전도 방법이 아니요 바울 사도의 전도 방법도 아니다.

미국의 많은 보수적 교회들이나 단체들은 물론, 우리 나라의 예장 합동과 예장 고신 등 많은 복음주의 교단들과 신학교들, 그리고 대학생선교회(CCC), 아이 브이 에프(IVF) 등 많은 학생 선교단체들이 이런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적 입장 혹은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은 심히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다.

신복음주의/ 복음주의의 평가

자유주의자들과 자유주의 교회들의 포용과 그들과의 교제는 하나님 앞에서의 불성실과 불순종이며 이단과의 타협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이단자들과 교제하지 말고 그들과 싸우고 그들로부터 분리하라고 분명히 가르쳤다.

로마서 16:17, 18,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원문, ‘너희가 받은 교훈’ 즉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고린도후서 6:14-17,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요한일서 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한이서 7-11,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만일 참된 교회들이 성경의 명백한 교훈대로 순종하지 않고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용납하고 계속 교제하면 결국 서서히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고 머잖아 변질되고 말 것이다. 구약 역대하 18장, 19장에 보면, 남방 유다왕 여호사밧은 경건한 왕이었지만, 우상숭배자요 악한 자인 북방 이스라엘왕 아합과 교제함으로써 결국 그 후손들의 시대에 와서 유다 나라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악한 영향을 받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신복음주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생생하게 증거한다.

열왕기하 8:18, “저가[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 아내가 되었음이라.” 8:27,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니 저는 아합의 집의 사위가 되었음이러라.”

은사운동

마지막으로, 오늘날 교회들의 또 하나의 심각한 큰 문제는 은사운동이다.

은사운동의 역사와 특징

20세기 초에 시작된 방언 운동은 오순절 교파를 형성하였고, 20세기 중엽에는 기성 교회들에 영향을 주어 방언과 예언과 병고침 등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강조하는 소위 은사운동으로 진행되었다. 은사운동은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적 교회들과 단체들에서 활발하다. 미국 복음주의협의회의 회원교회들의 다수는 오순절 교회이며 벌써 여러 해 동안 그 단체의 회장은 오순절파 목사가 맡아오고 있다. 우리 나라에도 은사운동은 오순절파 뿐만 아니라, 또한 많은 교파들에서 활발하다.

은사운동의 문제점과 평가

은사운동은 신구약 66권의 성경말씀과 십자가 속죄의 복음으로 만족치 않고, 현재의 은사 경험을 추구하고 강조하며, 실제로 은사 경험을 성경말씀의 신앙보다 더 중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기독교의 모습이 아니다. 참 기독교의 모습은 고린도전서 1:22, 23의 말씀에 잘 드러나 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또한 고린도전서 13:8-12은 예언, 방언 등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이고 초보적인 성격의 것들임을 증거하였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특히, 은사운동은 성경이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주신 충족한 말씀이라는 사실과 배치된다. 예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성경의 충족성을 다음과 같은 말로 증거하셨다: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27-31).

또한 히브리서 1:1, 2은 신약계시가 최종적이고 절정적 계시임을 증거하였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또한 요한계시록 22:18, 19은 성경의 종결성을 증거하기를,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했다.

덧붙여 말할 수 있는 것은, 은사운동이 감정과 육신적 만족에 호소하는 경향이 많고 록 음악 등의 세속적 요소를 사용한다는 점과, 오늘날 자유주의와 천주교회를 배제함이 없이 잘못된 교회연합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은사운동은 하나님이 주신 참된 교회의 부흥이 아니고 오히려 참된 교회에 주는 말세의 또 하나의 큰 혼란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들은 오늘날의 은사운동을 용납하지 말고 경계해야 한다.

결론

결론적으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그러나 단지 소수의 교회들만 순결한 교회를 세우기 위한 바른 길을 추구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은 순결한 교회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임을 밝히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일찌기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13, 14).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5:26, 27에서 하나님의 뜻이 순결한 교회임을 증거하기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다.

오늘날 참된 교회의 바른 길은 무엇인가? 오늘날 참된 교회의 바른 길은 자유주의의 배교(背敎)를 배격하고 오직 성경의 근본적 교리들을 보수하고,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무분별함과 타협을 반대하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이단을 배격하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이단적인 자유주의 신학을 배제함이 없는 교제와 협력과 연합 활동은 그 어떤 명분으로 이루어지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다.

바울 사도는 심지어 성경의 교훈을 고의적으로 불순종하고 규모 없이 행하는 자들을 책망하고 그들과 교제하지 말라고까지 명령하였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살후 3:6, 14).

오늘날 참된 교회의 바른 길은 또한 은사운동의 혼란을 배격하고, 성경 66권의 말씀으로 만족하며 그 말씀을 믿고 소망하고 순종하며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와 교훈대로 바로 믿고 바로 행해야 한다. 우리는 옛신앙 그대로, 옛길 그대로, 성경 교훈 그대로 믿고 행해야 한다. 우리는 이 시대의 풍조를 분별하고 잘못된 것을 배격하고 옛길을 추구해야 한다.

예레미야 6:16에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라고 말씀하였다. 디모데후서 4:3-5에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씀하였다.

이 시대가 엘리야의 시대 같고, 미가야의 시대 같고, 예레미야의 시대 같을지라도, 우리는 다수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가를 생각하고, 비록 그 길이 외롭고 힘든 길일지라도, 바른 길, 성경적인 길을 구하고 붙들어야 한다.

저자는 지식이 적고 말과 글에 둔한 자이지만, 누군가가 이 긴급하고 중대한 교회 문제들에 대하여 분명히 증거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 시대에 분별력 있는 경고의 소리가 잘 들려지지 않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본서를 낸다.

오늘날 중요한 것은, 지식이 많고 적고가 아니고 글을 잘 썼고 못썼고도 아니며 많은 사람에게 인기가 있는가 없는가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오늘 교회들의 문제이며, 무엇이 교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인가, 무엇이 오늘 시대에 참 교회의 갈 길인가를 바로 아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모든 뜻은 신구약성경 말씀 속에, 오직 그 말씀 속에만 밝히 계시되어 있다.

저자는 본서가 시대의 잘못된 풍조들을 분별하여 신앙의 건전한 옛길을 지키고, 참 교회를 보존하고 설립하고 회복하기를 원하는 주의 신실한 종들과 성도들에게 참고와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

제1부: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목차

서론 / 19

1. 자유주의 신학의 근원, 분류, 세력 / 21

2. 기독교와 자유주의 / 23

3.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단 사상의 예들 / 28

4. 자유주의 이단들에 대한 성경적 반박 / 71

5. 오늘날 교회들에 끼친 자유주의 영향들 / 100

결론 / 123

서론

현대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현대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학의 변질이다. 다수의 현대 신학은 교회가 전통적으로 믿고 고백해왔던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포기하고 표류하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배교적이며 이단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개신 교회의 대교단들의 신학교들은 이러한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포용하거나, 그러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장악되고 있는 실정이다.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의 필요성

먼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의 필요성에 대해 간략히 생각해보자.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이 필요한 첫번째 이유는,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회 속에 들어온 가장 무서운 이단적, 적그리스도적 사상이며, 우리가 이런 이단 사상에 대해 힘써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으나, 그것은 성도들 상호간에 사사로이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지, 하나님의 종들이 교리적 이단들을 비판치 말고 묵인하고 포용하라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였고(마 7:15),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나님께 속했는지 분별하라’고 하였다(요일 4:1).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이단에 대해 명확히 비판하였고, 디모데후서 2:17에는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이름을 들어서 비판하였다. 유다서 3절에는 이단에 대하여 힘써 싸우라는 교훈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역사상 가장 무서운 이단적이며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임을 깨닫고 자유주의자들을 포용치 말아야 하고 또한 그들을 포용하는 자들도 책망해야 할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이 필요한 두번째 이유는, 우리가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이 해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상과 생활은 연결되어 있다. 경건한 신앙 사상이 부패하면 경건하고 성결한 생활이 해이해지고 만다. 그래서 교인인지 세상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쇠잔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왜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 자유주의 교회들이 쇠잔해졌는가 하는 이유이다.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면, 구태여 교회에 나올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교회에 진리가 있고 기쁨과 감격이 있고 새 생활이 있어야, 교회에 나올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이 필요한 세번째 이유는, 우리가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적임을 바로 알아야 우리 주위의 교회들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 우리의 자녀들이 교회를 선택하고자 할 경우 아무 교회나 출석하지 않고 바른 교회를 찾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모든 성도는 순결한 교회에 참석할 의무와 특권이 있다. 참된 성도는 자유주의적 교단에 속한 교회에 참석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자유주의는 이단이며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교단은 하나님 앞에 신실한 교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교회협의회(WCC나 NCC)에 속한 교단들, 한국 기독교 장로회(기장측)나 대한 예수교 장로회(통합측)나 기독교 대한 감리회(기감측) 등의 교단들은 순결하고 건전한 교단들로 인정되기 어렵다. 참된 성도들은 성경적 신앙을 지키는 순결하고 건전한 교단에 속한 교회에 출석해야 한다.

교회 출석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들의 연합 활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성경대로 믿는 보수적 교회들이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교단들이나 교회들과 연합하여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활동을 주님께서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다. 외국 교회들와의 교류나 해외 선교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보수적 교회들은 보수적 교회들이나 단체들과만 협력해야지,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단체들과 협력해서는 안될 것이다.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활동들은 조만간 부패되고 말 것이다. 그것이 왜 처음에는 건전하게 시작되었던 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점점 변질되었는가 하는 주요 이유이다.

사탄은 교회들로 하여금 자유주의를 배격하지 않고 은근히 수용하고 두둔하게 하고, 또한 신학생들의 사상을 변질시키고 지식 있는 교인들의 사상을 변질시키고 마침내 교회 전체를 변질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탄의 교묘하고 치밀한 배교(背敎) 운동을 분별하고 격퇴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이 얼마나 이단적이며 적그리스도적인가를 바로 비판하고 신실한 교인들에게 확실하게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1. 자유주의 신학의 근원, 분류, 세력

자유주의 신학의 근원

자유주의 신학의 근원은 무엇인가?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교회의 권위에 대해 맹목적으로 순종해야 했었다. 그러나 중세 시대가 무너지고 개인의 자유와 이성의 권위를 발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해서 비평적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소위 성경의 고등비평이라고 불리우는 연구 방식이었다. 과학의 발달과, 촬스 다윈이 주창한 진화론의 등장 등은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더욱 회의적인 눈으로 보게 하였다. 더욱이, 경험할 수 없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세계와 및 창조와 종말에 대한 지식이 인간에게 불가능하다고 말한 칸트(Kant)의 지식론은 지성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분류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의 쉴라이엘마허와 릿츨과 하르낙 등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이후 오늘날까지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던 불신앙적인 신학 사상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밥죤스 대학교의 스튜어트 카스터 박사는 그것들을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표는 본서에서 인용된 인물들임.)

1. 구(舊)자유주의--Adolf Harnack, Harry E. Fosdick, Henry

P. Van Dusen, L. Harold DeWolf, Nels F. S. Ferre

2. 후(後)불트만 학파--*Rudolf Bultmann, Hans Conzelmann,

Erich Dinkler, Ernst Kasemann, Gunther Bornkamm,

Ernst Haenchen, Reginald H. Fuller

3. 해석학파--Gerhard Ebeling, Ernst Fuchs, James M.

Robinson

4. 불트만 급진 좌파--Herbert Braun, Manfred Mezger

5. 편집 비평학파--Willie Marxsen

6. 급진파--*Dietrich Bonhoeffer

7. 과정 신학--Schubert Ogden, John Cobb, Charles

Hartshorne, Norman Pittenger

8. 세속화 신학--Paul van Buren, Harvey Cox, John A. T.

Robinson

9. 신 죽음의 신학--Thomas J. J. Altizer, William Hamilton

10. 진화론 신학--Pierre Teihard de Chardin

11. 신정통주의--*Karl Barth, Emil Brunner, Karl Heim,

[영국] *C. H. Dodd, Peter T. Forsyth, [미국] *Reinhold

Niebuhr, Richard Niebuhr, William Hordern, *Paul

Tillich, [스칸디나비아] Anders Nygren, Gustave Aulen,

12. 독립파--Helmut Thielicke, Ethelbert Stauffer, *Joachim

Jeremias, Jurgen Moltmann

13. 판넨베르크 학파--*Wolfhardt Pannerberg, Rolf Rendtorff,

Trutz Rendtorff, Ulrich Wilckens, Klaus Koch, Martin

Elze, Dietrich Rossler

14. 구속사 학파--*Oscar Cullmann, W. D. Davies, Werner

Kummel, Otto A. Piper, Eduard Schweizer, Alan

Richardson, A. M. Hunter

15. 신(新)자유주의--Millar Burrows, Floyd V. Filson, George

E. Wright, Carl E. Braaten, Paul Minear, *Krister

Stendahl, Charles C. Anderson, Hugh Anderson

자유주의 신학의 세력

자유주의 신학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지극히 작은 세력이었다. 그러나 이 새 사상은 20세기 말에 와서 전 세계의 역사적 대 교단들 속에서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역사적 대교단들의 신학교들은 자유주의 신학들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는 자유주의적 신학교들이든지, 아니면 적어도 자유주의 신학들을 포용하는 넓어진 신학교들이 되었다. 오늘날 세계의 다수의 교회들은 자유주의적 교회들이든지, 아니면 적어도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이다. 오늘날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고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보수적 교회들은 숫적으로 다수가 아니고 소수인 것 같다.

2. 기독교와 자유주의

본질적 차이

성경적 기독교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단지 지엽적 문제들에 있어서가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본질적 이해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이것은 1920년대에 미국에서의 소위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간의 신학적 논쟁’에서 잘 드러났다. 미국 북장로교회의 보수적 지도자이었던 메이천은 당시의 논쟁을 표현하기를, “특히 종교의 영역에서 현대는 싸움의 시대이다. 항상 기독교로 알려져 왔던 저 위대한 속죄적 종교가 전혀 다른 형태의 종교 신앙과 싸우고 있는데, 이 종교 신앙은 전통적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더욱 파괴적일 뿐이다. 현대의 이 비속죄적(非贖罪的) 종교는 ‘현대주의’ 혹은 ‘자유주의’라고 불리운다”라고 하였다(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p. 2).

자유주의 잡지인 크리스챤 센츄리 1924년 1월 3일자 사설은 두 파의 차이를 더욱 인상적이게 이렇게 말하였다:

근본주의에 의한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요, 현대주의에 의한 기독교는 다른 한 종교이다. 어느 것이 참된 종교인가는 오는 세대들을 위해 우리 세대에 의해 아마 해결될 문제이다. . . . 근본주의자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요, 현대주의자의 하나님은 다른 한 하나님이다. 근본주의자의 그리스도는 한 그리스도요, 현대주의자의 그리스도는 다른 한 그리스도이다. 근본주의의 성경은 한 성경이요, 현대주의의 성경은 다른 한 성경이다. 교회, 하나님의 나라, 만물의 종말--이것들이 근본주의자들에게와 현대주의자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각각 다르다. 어느 하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인가, 어느 그리스도가 기독교의 그리스도인가, 어느 성경이 기독교의 성경인가, 어느 교회, 어느 하나님의 나라, 어느 구원, 어느 종말이 기독교의 교회, 기독교의 하나님의 나라, 기독교의 구원, 기독교의 종말인가? 미래가 말해 줄 것이다("Fundamentalism and Modernism: Two Religions," Christian Century, January 3, 1924, pp. 5, 6).

자유주의에 의한 기독교

자유주의 신학에 의하면, 기독교는 교리와 별개의 한 경험 혹은 생활이며, 교리는 기독교적 경험 혹은 생활을 한 시대의 사고 방식으로 표현한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며 따라서 교리는 시대마다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 한다고 한다.

교리를 경시하는 이러한 태도는 자유주의 신학의 초기로부터 볼 수 있는 태도이었다. 19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쉴라이엘마허는 말하기를, 종교는 감정이나 직관에 근거하며, 종교의 핵심은 이성적 증명과 토론이 아니고 감정이며 항상 그러하였고, 종교인에게 하나님은 하나의 경험,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라고 했었다. 19세기 중엽, 릿츨도 좀 다른 각도에서이긴 하지만 말하기를, 종교는 이론적이어서는 안되며, 하나님은 사람의 가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원리이며, 구원받는다는 것은 새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19세기 말, 하르낙도 주장하기를, 사람이 스스로 경험한 종교만 고백될 수 있으며, 다른 모든 신조나 신앙고백은 예수의 견해에 의하면 위선적이고 파멸적이라고 했다(Adolf von Harnack, What Is Christian- ity?, p. 159). 그에 의하면,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아버지시요 모든 사람이 서로 형제라는 데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부정했고,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을 역사적인 기록으로 간주하지 않았다(Ibid., pp. 21, 22).

이들은 모두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선구자들이었다.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은 처음부터 기독교의 본질을 교리와 별개의 경험 혹은 생활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들에 의하면, 기독교 교리, 더 정확히 말하여 전통적 교리들은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되었고 현대의 철학적, 과학적 도전 앞에 변경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윌리암 호던은 자유주의 신학의 기본적 태도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자유주의의 방식은 기독교 신학을 현대화하고자 하는 시도를 포함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주장하기를, 기독교계의 초기 신조들이 작성되었던 이후 세계는 급격히 변해 왔고 그래서 그 신조들은 현대인에게 낡고 비실제적이게 들린다고 한다. 우리는 기독교를 현대 세계가 이해할 수 있는 사고 방식들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해리 E. 포스딕은 주장하기를, 우리는 기독교의 본질 즉 ‘영속적 경험들’을 표현해야 하고, 이것들을 과거에 표현되었던 ‘변하는 범주들’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예를 들어 기독교의 영속적 경험은 하나님께서 악을 이기실 것이라는 확신이었으며, 이것은 전통적으로 악을 파괴하고 선을 세우기 위해 구름을 타고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범주로 묘사되어 왔고, 우리는 더 이상 이 낡아빠진 범주[재림]를 보존할 수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고대의 사고 방식이 표현하려고 했던 진리를 믿을 수 있다고 했다(Hordern, p. 74).

메이천은 자유주의 신학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현대 자유주의가 해결하고자 시도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기독교의 특수한 점들, 즉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기독교 교리들과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속(救贖)의 교리들에 대해 과학적 반론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자는 이 특수한 점들을 단지 종교의 어떤 일반 원리들의 시대적 상징들로 생각하며, 그 일반 원리들을 건지려고 하고, 또한 그것들을 ‘기독교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한다(Machen, p. 6).

성경에 의한 기독교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기독교는 교리와 별개의 어떤 경험이나 생활이 아니고 교리에 근거한 경험 혹은 생활이며, 또한 기독교 교리는 확실하고 불변적이다.

기독교는 교리(敎理, doctrine)에 근거함

기독교는 어떤 교리에 근거하고 있다. 교리는 기독교에 있어서 본질적이다. 여기에서 교리란 단순히 진리의 진술을 의미한다.

기독교가 어떤 교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의 기원을 고찰함으로써 확인된다. 최초의 기독교 전파자들은 단순히 어떤 신비적 경험이나 하나의 생활 교훈을 전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전했는데, 이 사실들의 설명이 곧 교리이다.

예를 들어,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22, 23에서 그가 전파한 내용을 표현하기를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했고, 고린도전서 15:3, 4에서 복음의 요지를 언급할 때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죽으셨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속죄의 교리인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그 시초로부터 교리적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교리가 없는 기독교는 생각할 수 없다.

교리가 기독교에 본질적이라는 사실은 바른 교리를 보수하고 이단을 배격하라는 성경의 교훈에서도 확인된다. 로마서 16:17, “너희가 배운 교리를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원문 직역). 디모데후서 1:13,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의 본을 굳게 붙들라”(원문 직역). 요한일서 4:2, 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고백하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원문 직역). 성경의 이러한 교훈들은 바른 교리가 본질적임을 전제하고 있다.

기독교의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임

더욱이 기독교 교리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이다. 이 사실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불변하심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거짓말과 거짓 증거를 미워하시고 정죄하신다. 출애굽기 20: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잠언 6:16-19,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또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다. 시편 102:26, 27,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如常)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기독교 교리의 확실성과 불변성은 기독교 복음의 성격들에서도 확증된다. 첫째로, 기독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에 기초하였다. 고린도전서 15:3, 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러므로, 만일 기독교 복음의 내용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이었다면, 그것들은 확실하고 불변적일 수밖에 없다.

둘째로, 기독교 복음은 하나님의 기적들로 확증되었다. 사도행전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표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하나님의 확증하는 표임을 보인다.

세째로, 기독교 복음은 목격한 증인들의 증거들에 의해 확증되었다.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순교의 피는 그들의 목격자적 증거들의 최후 확증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진리와 교리의 확실성과 불변성은 기독교 복음의 기본적 성격들에 의해서 확증된다.

덧붙여, 성경에는 기독교 진리의 확실성과 불변성이 분명한 말로 선언되어 있다. 갈라디아서 1:8, 9,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 .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전한 복음, 즉 사도 시대의 교회들이 받은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기독교 복음은 명확하고 고정된 내용이다. 아무도 그 내용에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그 고정된 내용을 바르게 파악하고 확신하고 후시대에 전수해야 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성경적 기독교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에 대한 본질적 개념에 있어서 서로 다른 대답을 하고 있다. 두 사상 체계의 차이는 실로 심각하다. 성경적 기독교는 교리를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만, 자유주의 신학은 그것들을 경시하고 쉽게 부정하거나 재해석한다. 여기에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異端性)이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것이나 그러한 포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대단히 큰 실수요 불성실한 일이다.

3.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단 사상의 예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단 사상들의 예들을 전부다 드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또한 불필요하다. 많은 이들은 전체적으로 불신앙적이고, 어떤 이들은 부분적으로 그러하다. 그러나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적이라는 것은 다음에 인용한 대표적 인물들의 사상의 예들을 통해 분명하다.

<자유주의자들의 이단 사상의 예들을 인물별로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를 원하지 않는 분은 4장[71쪽]으로 넘어가십시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칼 바르트는 신정통주의의 시조이다. 그는 구(舊)자유주의의 내재주의적 경향을 비판하고 초월자 하나님의 계시와 그 내용인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성경이 객관적 계시의 기록임을 부정하고, 소위 성경의 고등 비평을 용납하며,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 역사를 분리하는 이중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The Epistle to the Roman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33 (German edition, 1918).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28.

Church Dogmatics. Edinburgh: T. & T. Clark, 1936-1962.

The Knowledge of God and the Service of God.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49.

Dogmatics in Outline. London: S.C.M. Press, 1949.

Christ and Adam. New York: Harper, 1957.

A Shorter Commentary on Romans. Richmond: John Knox

Press, 1959.

The Humanity of God. Richmond: John Knox Press, 1960.

1. 성경은 객관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

“말씀을 깨달음과 믿음은 하나의 사건이며 이 사건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것을 그의 말씀이 되게 하는 한, 즉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말씀하시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다”(Church Dog- matics, I. i. pp. 122, 123). “그러므로 성경은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Ibid., p. 124). “계시와 성경의 직접적 동일시는 우리가 전제하거나 기대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성경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발생한다. . . .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곳에서 계시와 성경은 하나가 된다”(Ibid., p. 127).

성경은 인간의 문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이며 비평적인 연구로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 연구는 성경 안의 그리스도에 대한 전체적 인간적 형식의 증거를 명백히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연구가 그 증거의 대상 즉 하나님의 계시 자체를 드러내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어떻게 계시가 계시로 말미암음 외에 그 증거의 신적 내용으로 인식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계시를 계시로 말미암아 인식하는 것이란 우리의 신앙을 일깨우는 계시에 의하여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그 이중적(twofold) 역사를 사실 그대로 인식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은 그 안에 참여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은 계시 자체에 의하여 일깨워진 신앙을 가지는 것일 것이다”(The Knowledge of God and the Service of God, pp. 66, 67).

2. 성경은 무오(無誤)하지 않다고 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 자신은 심지어 그들의 직분에 있어서도, 심지어 증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도, 심지어 그들의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우리와 같이 실제, 역사적 인간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죄가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기록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범했다”(Church Dogmatics, I. ii. pp. 528, 529).

“축자(逐字, 글자) 영감이란, 오류와 결함이 있는 인간의 말을 그대로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과 그 인간적 오류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Ibid., p. 533).

3.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 전반에 대해 회의적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65).

“구약과 신약의 성경 역사는 실상 전혀 역사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일련의 자유로운 신적 행위들이며 아래서 보면 본질상 불가능한 어떤 것을 이루려는 일련의 결실 없는 시도들이다”(Ibid., p. 72).

“진정한 역사 속에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이 동반하고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고 의무적이다”(Church Dogma- tics, III. i. p. 81).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전체 진리가 위치한 앞뒤 문맥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자체로는 그것이 거짓이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관계된다는 사실에서만 어떤 타당성을 가진다”(Christ and Adam, pp. 54, 55).

4. 하나님의 인성(人性)을 주장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神性)이 그의 인성(人性)을 배제하지 않고 포함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아는 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볼 때이다”(The Humanity of God, p. 49).

“이러한 신적 자유 의지와 선택에서, 이러한 주권적 결정에서(옛날 사람들이 말했던 대로, 그의 작정에서), 하나님은 인간적이다. 인간에 대한 그의 자유로운 긍정, 그에 대한 그의 자유로운 관심, 그를 위한 그의 자유로운 대리(代理)--이것이 하나님의 인성이다”(Ibid., p. 51).

5. 성경의 천지 창조 기록을 사가(saga)라고 한다.

“그것은 자체 안에 시간의 시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실상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 진술을 피하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들에서 오직 순수한 사가(saga)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다”(Church Dogma- tics, III. i. p. 42). [그는 사가를 “역사의 선(先)역사적 실상에 대한 직관적, 시적 묘사”라고 설명했다(Ibid., p. 81). 그것은 신화 혹은 전설과 비슷한 개념이다.]

6. 아담의 타락을 사가(saga)라고 한다.

“그 첫번째 사람이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된 자로서 존재했다고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사가 아니고 오직 사가(saga)일 뿐이다. . . . 그리고 타락, 즉 그 첫 사람의 타락이 발생했던 것은 바로 이런 영역에서, 다시 말해 예언적으로 증거된 말씀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이었다”(Ibid., IV, i, p. 508).

“그렇다면 죄가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옴이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적이거나 심리학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따른다. 원죄의 교리는, 서방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어왔던 바와 같이, 바울에겐 ‘매력적 가설’(리츠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의 의미에 대한 많은 역사적이며 심리학적인 왜곡들 중의 하나이었을 것이다.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온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나타난 의와 같이, 초시간적(timeless)이며 초월적이다”(The Epistle to the Romans, p. 171).

7.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을 신화라고 한다.

(로마서 1:3, 4의 해설) “우리의 세계가 예수님 안에서 다른 세계에 의해 접촉될 때, 그것은 역사, 시간, 혹은 사물로서 직접 관찰될 수 있기를 그친다. . . . 그리스도로서, 즉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은 역사의 종말이시다. 그리고 그는 오직 역설로서(키에르케골), 승리자로서(블룸하르트), 원시 역사로서(오베르베크)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 있는 지평이시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그 지평을, 그는 수직적으로 위로부터 가로지르신다.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은 오직 문제 혹은 신화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Ibid., pp. 29, 30)

8.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분명히 긍정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 주목할 만한 두 마디가 하나님께서 값없는 은혜로서 사람, 진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주장함을 보려고 해야 한다”(Dogmatics in Outline, p. 96).

“그의 어머니가 젊은 부인으로 불리우는가 아니면 처녀로 불리우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Church Dogmatics, IV. i. p. 5, footnote).

9.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로마서 3:24의 설명에서) “나사렛 예수 즉 육신을 따라 난 그리스도는 역사의 다른 가능성들 가운데의 하나이시다. 그러나 그는 불가능의 모든 표들을 소유하신 가능성이시다. 그의 생애는 역사의 구조 속의 한 역사이며, 다른 구체적 사건들 가운데서의 한 구체적 사건이다. . . . 그러나 그것은 의미를 가득히 가진 역사이다. 그것은 시작과 끝을 나타내는 구체성이다”(The Epistle to the Romans, pp. 103, 104).

“그의 피를 흘림으로써 . . . 심판자 자신은 . . . 그를 믿는 사람들 전체를 위한 유화적(宥和的) 제물이 되셨다. 그는 그들의 정죄를 마땅히 따라야 하는 그 형벌의,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모든 결과들의, 책임을 짊어지셨다”(A Shorter Commentary on Romans, p. 46) 이 진술은 대리적, 형벌적 속죄, 그것도 제한 속죄를 믿는 것 같으나, 그는 처음의 로마서 주석을 포기하지 않는 것 같다.

1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확실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한 사건(an occurrence)이다. . . . [그러나] 부활은 도무지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이 아니다”(The Epistle to the Romans, p. 3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명백하다”(Church Dogmatics, IV. i. p. 335).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는--현대 학자들의 사고 형식들과 용어로--사가(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Ibid., pp. 335, 336).

1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한 사건 즉 비록 그것이 역사 안에서의(in) 유일한 실제적 사건이지만 역사의(of) 한 실제적 사건이 아닌 사건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역사가들은--물론 그것이 그들의 확신을 파괴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재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12. 보편 구원론적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버림을 당하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 . .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죄인에게 심판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심판의 형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이기를 중단치 않는다”(Ibid., III. ii. p. 34).

“하나님의 ‘예’(용납하심)는 선언되었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 . . 그것은 영원 전부터 그가 아들 안에서 택하시고 사랑하신 인류에 대한 그의 ‘예’이었고 ‘예’이다”(Ibid., IV. i. p. 356).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근거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가, 심지어 가장 쓸데 없는 자들, 가장 악하고 불쌍한 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이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이심을 생각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생각 위에서 그를 취급해야 한다”(The Humanity of God, p. 53).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그 어떠한 종류의 제한을 가할 아무런 신학적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우리의 신학적 의무는 그것이 우리가 전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고 깨닫는 것이다”(Ibid., p. 62).

13.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바르트는 몸의 부활을 스캔달이요 부조리요 종교적 물질주의요 거침돌이라고 말하였다(바르트, 죽은 자의 부활 <대한기독교서회>, 89쪽; 한종희,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 신학자들,” 기독신보, 1991년 3월 30일, 9쪽).

14. 성경이 윤리의 객관적 규범임을 부정한다.

“사람은 자유의 은사(gift)에 내재(內在)한 명령에 따라 행동할 때 선을 행한다. 그는 그의 자유에 반대되는 법에 복종할 때 악을 행한다. . . .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자유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 지침과 기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자유인은 하나님의 가장 구체적인 명령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이 명령을 통하여 인간의 자유가 권위적 형태를 취하고 인간이 직면하고 측정되는 바 그 명령이 확고하게 되기 때문이다”(“The Gift of Freedom: Foundation of Evangelical Ethics,” The Humanity of God, p. 84).

“선과 악의 문제는 결코 사람이 일련의 규범들로서의 하나님의 권위적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대답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선하고 악한 행위들의 법전,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일종의 잣대로서 사람에 의해 발견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부과되지 않는다”(Ibid., p. 85).

씨 에취 다드(C. H. Dodd, 1884-1973)

C. H. 다드는 영국의 신정통주의의 대표적 인물로서 신약신학자이었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The Authority of the Bible. New York: Harper & Brothers

Publishing Co., 1929.

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New York: Harper &

Brothers Publishing Co., 1932.

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s. New York:

Harper & Brothers Publishing Co., 1951(1936).

About the Gospel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2.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3.

1. 성경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바울이 했다는 설교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나 다른 이들이 했다는 설교들은 사도행전 저자의 자유로운 작품일지 모른다는 것은 가능한 생각이다”(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s, p. 17).

“비록 우리는 아마 디모데전서를 진짜 바울의 편지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지만. . . .”(Ibid., p. 30).

“요한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하나의 추가적 기록보다 하나의 해석, 즉 새로운 대중을 위한 하나의 해석을 의도했다”(About the Gospels, p. 31).

“그렇다면 그[가나의 기적]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의 참된 의미는 더 깊은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더 깊은 의미에 대한 아무런 직접적 단서를 갖고 있지 못하다”(The Interpre- tation of the Fourth Gospel, p. 297).

2.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성경의] 외적 권위는 엄밀한 의미에서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The Authority of the Bible, p. 14).

“문자적 의미에서 성경은 사람의 ‘말들’로 구성되어 있다. . . . 그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로마서의 저자는 하나님이 아니고 바울이다. . . .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가 아니고, 성경의 저자들이 나누어 가진 그 생명의 조성자이시다”(Ibid., p. 16).

“우리가 계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어느 것도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상대적이다. 아무 곳에서도 진리는 우리가 자존적(self-subsistent) 외적 권위를 찾을 수 있는 순수하게 ‘객관적인’(objective)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Ibid., p. 289).

3.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한다.

“성경 무오(無誤)에 대한 옛날 견해가 과학적 발견과 역사 비평학의 연속적 공격으로 파괴되었던 과정에 대해 상술할 필요는 없다. 과학과 역사의 문제에서 성경의 정확성을 주장함에 있어서 성경 무오의 변호자들이 희망 없는 입장을 택했었다는 것은 오래 전에 벌써 분명했다. . . . 성경의 그 옛 교리적 견해는 과학과 역사 비평학의 입장에서 공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신중히 생각한다면 그것은 종교와 공중 도덕에 위험물이 된다”(Ibid., p. 13).

“바울이 잘못이라고 나는 때때로 생각하고, 과감히 그렇게 말해 왔다, 비록 전체적으론 그가 말하는 바가 내가 보기에 충분히 참된 것 같지만”(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p. xxxv).

4. 하나님의 형벌적 의의 속성을 부정한다.

“이와 같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로서의 진노가 사라지는 길이 열려 있고, 그의 사랑과 자비는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된다. 바울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을 가지는 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도덕 세계에서의 불가피한 인과(因果) 과정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Ibid., p. 23).

“하나님을 인격의 가장 높은 이상(理想)으로 생각하면서 비(非)이성적인 진노의 격정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전혀 논리일관하지 않다”(Ibid., p. 24).

5. 아담은 신화적 인물이라고 한다.

“비록 바울에겐 그가 실제적 인물로 생각되었을지 모르지만, 아담은 하나의 신화이다”(Ibid., p. 79).

6.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 모호한 개념을 가진다.

“그 복음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각, 즉 우주의 의미를 표현하는 생애의 기록이다. 영원한 로고스[말씀]이 이해되는 것은 바로 이 생애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서이며, 다른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다. . . . 그 서두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읽어질 수 있다: ‘모든 실제적 존재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그 신적 의미 혹은 원리이다. 세상이 있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은 바로, 생각에 있어서 하나님과 분리될 수 있으나 실재상 그와 분리되지 않는, 이 원리이다’”(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pp. 284, 285).

7.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승귀라고 간주한다.

“요한에게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심 자체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승귀와 영광이기 때문에 . . . 부활이 그에게는, 그것이 다른 어느 저자들에게 가지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의의를 거의 가질 수 없다”(Ibid., pp. 440, 441).

“그리스도의 승천이나 승귀가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지만.”(Ibid., p. 442).

8.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代贖)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유화(宥和, propitiation)라는 번역은, 진노하신 하나님을 누그러뜨림을 암시하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비록 이것이 이교적(異敎的) 용법에는 맞을지라도, 성경적 용법에는 생소하다”(The Romans, p. 55).

“하나님의 의(義)가 (예를 들어, 죄의 대리적 형벌에 의해) 만족될 수 있고 동시에 그의 자비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사용되는 어떤 방책이 있었다는 아무런 암시도 없다. 의와 자비 간의 그러한 대립은 바울의 마음 속에 있지 않았다”(Ibid., p. 59).

9. 보편 구원론적이다.

“우리가 참으로 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격과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격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가 무엇과 같음을 참으로 우리에게 보인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그의 사랑이 모든 사람들을 그와의 연합으로 이끄는 길을 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떠나서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다”(Ibid., p. 186).

“후기 서신들에서 교회는 참으로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내면적 필요성에 의해 그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를 포함해야 하며, 화목된 우주의 중심을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다”(The Authority of the Bible, p. 208).

10. 재림과 심판에 관한 성경 구절을 부정한다.

“그 서신의[데살로니가후서의] 첫번째 장에 나오는 종말론적 구절(7-10절)은--대부분의 비평가들이 그것이 문체에 있어서 바울의 것과 같지 않다고 논평했는데--유대교적이든지 혹은 유대-기독교적이든지 간에 실상 당시의 어떤 묵시 문학의 인용으로 가장 잘 이해된다. 거기에는 그 내용에서나 그 일반적 어조에서 특별히 기독교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The Apostolic Preaching, p. 37).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 1892-1971)

라인홀드 니이버는 미국의 신정통주의의 대표적 인물로서 사회윤리학자이었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Beyond Tragedy. New York: Charles Scribner's, 1938.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New York: Charles

Scribner's, 1943.

The Self and the Dramas of History. New York: Charles

Scribner's, 1955.

1. 교의(敎義)의 진리성을 부정한다.

“교의(敎義, dogma)는 기껏해야 언약 공동체의 공동 견해를 나타낸다”(The Self and the Dramas of History, p. 93).

2. 기독교 진리 일반에 대해 회의적이다.

“기독교 종교에서 참된 것은 어느 정도 임시적이고 표면적인 거짓을 포함하는 상징들로서만 표현될 수 있다. . . . 우리는 거짓에 의해 진리를 가르친다”(Beyond Tragedy, p. 3).

“기독교는 원시종교적, 예술적 신화들과 상징들을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전달한 종교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Ibid., p. 7).

“성경의 상징들은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유한한 지성들이, 역사를 초월하고 성취하는 것[신]을 파악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II, p. 289).

3. 창조를 신화적 개념이라고 한다.

“창조는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하나의 신화적 개념이다”(Beyond Tragedy, p. 7).

4. 아담의 타락을 신화라고 한다.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의 이야기는 원시적 신화이다. 현대 신학은 현대 문화가 그런 신앙을 종교의 개화 반대론(obscurantism)의 증거로 간주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즐거이 타락 이야기를 부정했다”(Ibid., p. 10).

“타락의 개념은 동산, 과일, 그리고 뱀이라는 원시적 신화를 역사적으로 참된 사실로 간주하는 오류에 굴복한다. . . . 타락은 역사적이지 않다. 그것은 그 어떤 구체적 인간의 행위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러한 행위들의 전제이다”(Ibid., p. 11).

5.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불합리하다고 한다.

“영원이라는 것이 시간 속에 들어온다는 개념은 지적으로 불합리하다”(Ibid., p. 13).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는 진리가 보통 판단되는 모든 규범들을 어긴다”(Ibid., p. 14).

6.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진리를 신화라고 본다.

“사람들은 처녀 탄생의 원시적 신화에 의해 속임을 당하고, 바로 역사 너머를 가리키기 때문에 의미 있는 그것을 하나의 순수한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Ibid., p. 17).

“‘처녀 탄생’과 같은 기적들은 후대에 삽입된 생각들이다”(The Self and the Dramas of History, p. 66).

7.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는 신학적 오류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교리는 많은 신학적 오류들로 인도하는데, 그 중에는 사람의 도덕 의식을 모욕하는 대리적 속죄의 이론들이 포함된다”(Beyond Tragedy, pp. 17, 18).

8. 영혼 불멸에 대해 회의적이다.

“영혼의 불멸이라는 개념이 몸의 부활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선입견은 단지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 사상으로부터 온 유산에 불과하다”(Ibid., p. 290).

9.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크게 속인 교리라고 한다.

“기독교의 교리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Ibid., p. 21).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상징은 문자적으로 이해될 수도 없고 중요치 않은 것으로 내버려질 수도 없다”(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II, p. 289).

10.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몸의 부활의 개념은 물론 문자적으로 참될 수 없다”(Beyond Trage- dy, p. 290).

11. 마지막 심판을 부정한다.

“신약의 상징론에서 에스카다(eschata) 혹은 ‘마지막 일들’은 세 개의 근본적 상징들로 묘사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마지막 심판, 그리고 부활이다”(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II, p. 290).

“현대 기독교 안에 있는 감상적 도덕 의식이 아마 심판 개념의 중요성을 일소했을 것이다--비록 문자주의적 정통주의가 그 일소를 정당하게 보지 않았던 것 같지만. 기독교인들이 천국의 가구(家具)나 지옥의 온도에 대한 어떤 지식을 주장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Ibid., p. 294).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

루돌프 불트만은 불트만학파의 시조이며 신약신학자이었다.

Jesus Christ and Mythology. New York: Scribner, 1958.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Oxford: Basil

Blackwell, 1970.

Theology of New Testament. 2 vols. New York: Scribner,

1951-55.

Hans Werner Bartsch, ed., Kerygma and Myth: A Theolo-

gical Debate by Rudolf Bultmann and Ernst Lohmeyer,

Julius Schniewind, Helmut Thielicke, and Austin Farrer.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61.

1. 성경의 신빙성과 역사적 증거성을 부정한다.

“그 두 이야기들은 역사적 서술들로서 조화될 수 없다. 실상, 그렇게 하려는 어떤 시도도 각 이야기의 독특한 의도를 파괴한다. 하지만, 마가복음 1:16-20에 나오는 두 장면이 역사적 서술이 아니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이야기가 믿을 만한 역사적 전통을 담고 있다는 것은 가능하다”(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p. 108).

“고난 당하시고, 죽으시고, 다시 사시는 메시아 혹은 인자(人子)는 유대교에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수난의 예언들에서 인자라는 유대인의 메시아 개념이 재해석되었다는--혹은 더 낫게 표현한다면, 독특하게 부요하게 해석되었다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개념의 이러한 재해석은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 사건들 후에 교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31).

“만일 그 계시가 그[공동체=초대 교회] 안에 살아있다는 점에서 예수께서 그 공동체 안에 계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또한 이 기도에서도 그 안에 계실 것이다. 사실 누가 기도하고 있는가? ‘역사적 예수’가 아니고, 역사적으로 말해서 그 공동체이다”(The Gospel of John, p. 522).

“비록 예수께서 유대인들에 의해서가 아니고 로마인들에 의해서 체포되고 정죄되셨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정확할지라도, 요한의 묘사는 거의 더 나은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체적으로 그것은 역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Ibid., p. 637).

2. 성경은 전설과 신화로 가득한 책이라고 한다.

“비록 그것이 요한의 예수 세례라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출발되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예수님의 세례 이야기(막 1:9-11)는 하나의 전설이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26).

“예수께서 어떤 종류의 메시아인지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종류의 메시아를 믿는지에 대한 생각을 나타내는 시험받으신 이야기(막 1:12 이하 혹은 마 4:1-11)는 전설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는 전설로 채색되었고, 수난 이야기도 상당히 전설로 덮여 있다”(Ibid., I, p. 27).

“첫눈에 우리는 [요한복음의] 서두를, 그 주제로 판단하여, 신화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신적 존재, 그의 생애, 그리고 그의 운명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The Gospel of John, p. 14).

“요한복음 서두는, 혹은 그것의 자료는, 그노시스 신화의 언어로 말한다. . . . 그 복음서 저자는 기독교 전파와 신학을 위하여 이 신화를 사용한 첫번째 사람이 아니었다. 바울은, 비록 그 자신이 로고스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을지라도 안트로포스(사람) 신화의 용어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이고 구원론적인 의미를 빈번히 해석함으로써, 요한보다 앞섰었다”(Ibid., p. 28).

3. 그리스도의 선재(先在)하심을 그노시스 신화로 보려고 한다.

“[요한복음 17:1-5의] 언어는 신화적이다. 아들의 소원은, 그의 지상의 존재로부터 한때 그의 선재 상태에서 가졌던 하늘의 영광 안으로 다시 올리움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그노시스 신화의 사상 형식과 완전히 일치한다”(Ibid., p. 496).

4.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전설로 본다.

에게네토를 기적적 과정으로, 즉 생리학적 기적으로 보는 것은, 그 계시자가 사람이라는 그 복음서의 주제를 거스리는 것이다. 더욱이, 1:45; 6:42; 7:27 이하는 그 복음서 기자가 처녀 탄생의 전설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거나 알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을 보인다”(Ibid., pp. 62, 63).

“그러나,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그들은[아주 초기 교회는] 지상의 예수님을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처녀 탄생의 전설은, 바울에게 그러했듯이, 그들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50).

5.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신화로 본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말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그러한 개념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신화들에서 널리 퍼져 있었고, 그 후 역사적 인물 예수에게 이전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신화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적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17).

6.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전설로 간주한다.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그 이야기가 이방의 전설에서 취해져 예수께 돌려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사실, 그 이야기의 주제, 즉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은 디오니서스 전설의 전형적 주제이다”(The Gospel of John, pp. 118, 119).

7.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적 증거들을 부정한다.

“그러나,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아주 초대 교회는] 지상의 예수님을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50).

“여하튼, 아주 초대 교회는, 비록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다 하더라도, 그를 예배하지는 않았다”(Ibid., I, p. 51).

“[요한복음 10장] 17절 이하에서 복음서 기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시라는 신화적 진술을 했고, 예수님의 권위의 증명을 위한 유대인들의 요구를 만족시킬 풍자적 대답을 첨가하기 위하여 그것을 사용했다”(The Gospel of John, p. 282).

8.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신화적이라고 말한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말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 . .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적(Gnostic)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17).

9.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전설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여전히 그것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한 바 그 빈 무덤의 이야기들은 전설들이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45).

“만일 부활절 사건이 어떤 의미로든지 십자가 사건에 첨가된 역사적인 사건이라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의 발생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설교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이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부활 자체는 지나간 역사의 사건이 아니다”(Hans Werner Bartsch, ed., Kerygma and Myth: A Theological De- bate by Rudolf Bultmann and Ernst Lohmeyer, Julius Schnie- wind, Helmut Thielicke, and Austin Farrer, p. 42).

10.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기대는 망상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의 개입 선포가 성취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때--즉, 세상의 가까운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그 기대가 망상으로 판명되었을 때--그의 신 개념이 또한 망상적이지 않았는지 하는 질문이 일어나기 때문이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p. 22).

1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한다.

“여하튼, 공관복음서의 전통에는 예수께서 자신이 언제(혹은 곧) 돌아오겠다고 말한 말들이 없다. (인자의 ‘오심’을 가리키는 파루시아라는 말도 기독교의 최초의 시기에는 ‘돌아옴’으로가 아니고 ‘도착, 도래(到來)’로 정확히 이해되었다)”(Ibid., I, p. 29).

“여하튼,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와 같이 그를[예수님을] 신화적 인물로 간주했다. 그들은 그가 세상의 심판자로서 구원과 저주를 내리시려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인자(人子)로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했다. . . . 요한에게는 예수님의 부활, 오순절,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파루시아)은 한 동일한 사건이며,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33).

12.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신화적이라고 한다.

“종말론적 드라마의 개념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신화적이다”(Ibid., p. 14).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폴 틸리히는 구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의 경계선에 있다고 표현된다. 그의 사상들은 매우 과격하다. 인용된 그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Systematic Theology. 3 vol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1-64.

1. 근본주의를 마귀적이라고 한다.

“그들은 영원한 진리와 이 진리의 시간적(temporal) 표현을 혼동한다. 이것은, 미국에서는 근본주의로 알려져 있는 유럽의 신학적 정통주의에서 명백하다. . . . 근본주의는 현재의 상황과 접촉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상황을 초월한 곳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 아니고, 과거의 상황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한하고 일시적인 어떤 것을 무한하고 영원한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높인다. 이 점에서 근본주의는 마귀적 특성을 가진다”(Systematic Theology, I, p. 3).

2. 기독교는 최종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다고 한다.

“기독교 자체는 최종적이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 단지 그것이 증거하는 바가 최종적이고 보편적일 뿐이다. 기독교의 이 심오한 변증법을 잊어 버리고 교회적인 혹은 정통적인 자기 주장들로 기울어져서는 안된다. 그러한 자기 주장들에 대항하여, 소위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의 종교가 최종성이나 심지어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함에 있어서 옳다”(Ibid., I, pp. 134, 135).

3. 특별 계시의 종결성을 부정한다.

“예언 활동을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 . . 예언자적 비평과 약속은 교회의 전 역사에서, 특히 수도원 운동과 종교 개혁과 복음주의적 급진주의에서 활동적이다. 그것은, 조로아스터교와 어떤 헬라 신비종교와 이슬람교와 많은 작은 개혁 운동들에서와 같이, 기독교 밖의 종교적 혁명들과 협회들에서 활동적이다”(Ibid., I, p. 141).

4. 성경의 영감을 부정한다.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기계적, 혹은 기타 모든 형태의 비무아경적(非無我境的) 영감 교리는 마귀적이다. . . . 영감이란 이성의 주체-객체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지식의 복합체에 아무 것도 더해 주지 않는다”(Ibid., I, p. 114).

“성경 저자들의 영감이란 가능적으로 계시적인 사실들에 대한 그들의 수용적이며 창조적인 반응이다”(Ibid., I, p. 35).

5.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율법적으로 생각되고 작성되고 인봉된 기록, 그래서 그것에 근거해 우리가 어떤 주장들을 결정할 수 있는 그런 기록이 아니다”(Ibid., I, p. 35).

“만일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른다면, 신학적 혼동이 거의 불가피하다. 그러한 동일시로부터, 구수적(口受的) 영감 교리, 성경 본문을 취급함에 있어서의 부(不)정직, 한 책의 무오성(無誤性)이라는 ‘일성론적’(一性論的, monophysitic) 교의 등과 같은 결과들이 나온다”(Ibid., I, p. 158).

6. 정경의 개방을 주장한다.

“정경(正經, canon)을 창조한 자는 바로 성령이시며, 영적인 모든 것들과 같이, 정경은 율법적으로 확정적 방식으로 고정될 수 없다. 정경의 부분적 개방은 기독교회의 영성(靈性)의 안전 장치이다”(Ibid., I, p. 51).

7. 하나님은 존재하신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은 존재하시지 않는다. 그는 본질과 존재를 초월한 존재 자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를 부정하는 것이다”(Ibid., I, p. 205).

“이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문제는 질문될 수도, 대답될 수도 없다. . . .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무신론적이듯이 그것을 긍정하는 것도 그러하다”(Ibid., I, p. 237).

8. 인격적 하나님을 부정한다.

“그러한 가장 높은 존재에 대한 무신론의 반항은 정당하다. 그의 존재에 대한 아무 증거도 없고, 그는 궁극적 관심의 주체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적 참여가 없이는 하나님이 아니다. ‘인격적 하나님’은 하나의 혼동을 주는 상징이다”(Ibid., I, p. 245).

9. 진노의 하나님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과 병행하는 하나님의 어떤 감정이나, 섭리와 병행하는 어떤 행동 동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것을 저항하는 것을 거절하고 스스로 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사랑의 활동의 정서적 상징이다”(Ibid., I, p. 284).

“정죄란 피조물이 자기가 택한 비존재(非存在)에로 내버려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Ibid., I, p. 284).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신성과 그 무조건적 성격과 명백히 모순된다. 그러므로 그 개념은 재해석되든지 아니면 기독교 사상에서 완전히 포기되어야 한다”(Ibid., II, p. 77).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의 죄책에 따라 계산된 특별한 형벌 행위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공의는 그가 실존적 소외의 자멸적(自滅的) 결과들을 그대로 허용하는 행위일 뿐이다”(Ibid., II, p. 174).

10.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상징들은 변증법적이다. 그것들은 삶의 변증법 즉 분리와 재결합의 운동을 반영한다. 셋이 하나요 하나가 셋이라는 진술은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가장 나쁜 왜곡이었다”(Ibid., III, p. 284).

11. 창조를 부정한다.

“창조의 교리는 ‘옛날에’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상 간의 관계의 기본적 묘사이다”(Ibid., I, p. 252).

“‘창조의 목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피해야 할 애매 모호한 개념이다. 창조는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Ibid., I, p. 263).

12. 천사와 귀신을 신화라고 한다.

“천사와 귀신의 세력들에 대한 교리의 진리는 선(善)의 초(超)개인적 구조들과 악(惡)의 초개인적 구조들이 있다는 것이다. 천사들과 귀신들은 존재의 건설적인 그리고 파괴적인 세력들을 위한 신화적 명칭들이다”(Ibid., II, p. 40).

13.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 혹은 기적을 부정한다.

“기적들은 자연 과정에 대한 초자연적 간섭으로 해석될 수 없다. 만일 그러한 해석이 참되다면, 존재의 근거의 나타남은 존재의 구조를 파괴할 것이다. 종교적 이원론이 주장했듯이,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분열될 것이다”(Ibid., I, p. 116).

“섭리는 간섭이 아니다. . . . 그것은 한 추가적 요인, 즉 초자연주의에 의한 어떤 기적적인 물질적 혹은 정신적 간섭이 아니다”(Ibid., I, p. 267).

14. 인류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신학은 분명하게 그리고 애매 모호하지 않게, ‘타락’을 옛날에 일어난 한 사건 이야기로가 아니고 보편적으로 인간의 상황을 위한 한 상징으로 표현해야 한다”(Ibid., II, p. 29).

15.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조리하다고 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주장은 역설적(逆說的, paradoxical)인 말이 아니라, 부조리한(nonsensical) 말이다”(Ibid., II, p. 94). (‘역설적’이라는 말은 ‘일견 모순된 것 같으나 바른’이라는 뜻임.)

“문자적 해석은 옛날에 그의 하늘 처소로부터 내려보내져 사람으로 변형된 한 초월적 존재를 상상함으로써 네번째 단계를 취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참되고 힘있는 상징이 한 불합리한 이야기가 되며, 그리스도는 하나의 반신(半神, a half-god),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한 독특한 존재가 된다”(Ibid., II, p. 109).

16.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증거들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모든 역사적 지식과 같이, 이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가설적이다. 역사적 연구는 이 지식을 방법론적 회의주의에 복종시키고 또 본질적인 부분들 뿐만 아니라 각개의 부분들에서도 계속적인 변화에 복종시킨다”(Ibid., II, p. 107).

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류를 가지셨다고 한다.

“유한성은 오류로의 개방을 뜻하며, 오류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실존적 곤경에 참여하심에 속한다. 오류는, 우주에 대한 그의 고대적 개념, 사람들에 관한 그의 판단들, 역사적 순간에 대한 그의 해석, 그리고 그의 종말론적 상상에서 분명하다”(Ibid., II, p. 131).

18.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를 부정한다.

“[‘대리적 고난’이라는 용어]는 불행스런 용어이며 신학에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실존적 소외의 고난에 참여하지만, 그의 고난은 피조물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도 사람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고난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여와 변형에 의해 피조물의 자멸을 극복하는 능력이다. 대리가 아니고 자유로운 참여가 신적 고난의 성격이다”(Ibid., II, p. 176).

19.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을 가진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주는 자유케 하는 인상은 그의 자기 복종적 사랑의 인상이다. 이 사랑은, 진노가 아니라 사랑이 하나님 안에 있는 마지막 말이라고 확신하는 응답적 사랑을 사람 안에 일깨운다”(Ibid., II, p. 172).

“속죄의 교리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 안에 있는 새 존재가 소외의 상태에 붙잡혀 있는 자들에게 미치는 효력에 대한 묘사이다”(Ibid., II, p. 170).

“하나님의 속죄적 행위는 그가 실존적 소외와 그것의 자멸적 결과들에 참여하심이라고 이해해야 한다”(Ibid., II, p. 174).

“. . .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실존적 소외에 참여하심이 드러나게 된다”(Ibid., p. 175).

2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명료한 신화적 사건이라고 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한 자의 십자가이다. . . .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실존적 소외의 죽음에 복종시켰던 자의 부활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추가적인, 의문의 기적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 . . 십자가의 이야기들은 아마 역사적 관찰의 충분한 빛 안에서 발생했던 한 사건을 가리킬 것이지만, 부활의 이야기들은 그 사건 위에 깊은 신비의 베일을 덮는다”(Ibid., II, p. 153).

“신들과 반신(半神, 절반쯤의 신)들의 부활은 잘 아는 신화적 상징이다. . . .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불리우는 순간 . . . 부활의 개념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됨은 거의 불가피하다. 그 상징이 사건이 되었다는 제자들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그리스도로서 메시아가 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의존했다”(Ibid., II, p. 154).

“이 사건의 성격은 어두움 속에, 심지어 부활절 이야기의 시적 합리화 속에 남는다. 그러나 한 가지 일이 분명하다. 그것은, 그의 부활의 확실성이 그 작은 흩어진, 그리고 실의에 찬 무리들을 붙잡았던 날들에, 교회가 탄생되었다는 것이다”(Ibid., II, p. 154).

“역사적 연구는, [부활의 상징에서] 그 주위에 있는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이러한 사실적 요소를 찾아내려고 함에 있어서 정당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는 결코 개연적(蓋然的) 대답 이상의 것을 줄 수 없다”(Ibid., II, p. 155).

“사건과 상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하는 자신의 승리의 확실성이다. 역사적 확신이나 성경 권위의 수납이 이 확실성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을 넘어서는, 어떤 확실성도 없고, 단지 개연성(probability)--흔히 매우 낮고 때로는 높은 개연성--만이 있을 뿐이다”(Ibid., II, p. 155).

21.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승천은] 부활이 표현하는 동일한 사건의 다른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다. 우리가 그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공간적 상징 표현은 우스꽝스러운(absurd) 것이 될 것이다”(Ibid., II, p. 162).

22. 영혼의 불멸을 부정한다.

“인간의 자연적 특질로서의 불멸성은, 비록 그것이 플라톤의 교리일 가능성은 있을지라도, 기독교적 교리는 아니다”(Ibid., II, p. 66).

“불멸성의 상징이 이 유행하는 미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곳에서, 그것은 기독교에 의해 근본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에의 참여는 ‘죽음너머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의 자연적 특질도 아니다”(Ibid., III, p. 409).

2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상징이라고 한다.

‘재림’의 상징(Ibid., II, p. 163).

24. 영원한 심판을 부정한다.

“보통 사람들은 ‘영원한 정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단어들의 결합이다. . . . 그러므로 ‘영원한 정죄’라는 용어는 신학 용어들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 . . 사람은 존재의 기반[하나님]으로부터 결코 잘리워버리지 않으며, 심지어 정죄의 상태에서도 그러하다”(Ibid., II, p. 78).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마지막 심판은 가장 극적인 상징들 중의 하나이다”(Ibid., II, p. 164).

“[영원한 죽음은] 또한 해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액면 그대로 해석되면 완전히 모순되는, 영원과 죽음이라는 두 개념들을 결합하기 때문이다. 이 단어들의 결합은 영원으로부터 ‘떠난’(away) 죽음, 즉 영원에 도달하지 못하고, 일시적 시간성에 내버려져 있음을 의미한다”(Ibid., III, p. 415).

25. 천국과 지옥의 장소성을 부정한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들이지 장소들의 묘사가 아니다”(Ibid., III, p. 418).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디트리히 본훼퍼는 급진파로 분류되며 또한 세속화 신학의 선구자이다. 인용된 그의 책은 다음과 같다:

Creation and Fall: A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Genesis

1-3. New York: Macmillan, 1959.

Ethics. New York: Macmillan, 1955.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New York: Macmillan,

1967.

1. 종교의 시대는 끝났다고 한다.

“나를 끊임 없이 괴롭히는 것은, 오늘 우리를 위해, 기독교가 참으로 무엇인가, 혹은 그리스도가 참으로 누구이신가 하는 문제이다. 신학적인 말이든지 경건한 말이든지 간에, 사람들이 모든 것을 말로 들을 수 있는 시대는 끝났고, 종교 일반의 시대를 의미하는 내면성(內面性)과 양심의 시대도 그러하다. 우리는 전적으로 비종교적 시대를 향하여 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단순히 더 이상 종교적일 수 없다”(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1967], p. 152).

2. 종교의 개념 자체를 반대한다.

“여기에 기독교와 모든 종교들 간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사람의 종교성은 그를 세상의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은 데오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절박한 상황의 해결책)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무력(無力)하심과 고난을 향하게 눈을 돌리게 한다. 오직 고난 당하시는 하나님만 도우실 수 있다. . . . 이것이 아마 우리의 ‘세속적 해석’을 위한 출발점일 것이다”(Ibid., pp. 196, 197).

“‘종교적 행위’는 항상 부분적인 것이지만, ‘신앙’은 사람의 삶 전체에 관계하는, 전체적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새로운 종교로 부르시지 않고 삶으로 부르신다”(Ibid., p. 199).

3.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비종교적(religionless) 해석을 옹호한다.

“만일 종교가 오직 기독교의 옷이라면 . . . 비종교적 기독교란 무엇인가? 이런 식의 생각을 시작한 유일한 사람인 바르트는 그것을 완성하지 못했으나, 하나의 계시의 실증론에 도달했는데, 그것은 결국 근본적으로 하나의 회복이다”(Ibid., p. 153).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종교 없이, 즉 시간적으로 제한되는 형이상학과 내면성 등의 전제들 없이 말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세속적’ 방식으로 말하는가?”(Ibid., p. 153).

“나는 네가 신약성경의 ‘비신화화’에 관한 불트만의 논문을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그것에 대한 오늘날의 나의 견해는 대분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가 ‘너무 멀리’ 갔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충분히 멀리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기적, 승천 등과 같은, 윈리상 하나님, 신앙 등의 개념들과 분리될 수 없는 ‘신화적’ 개념들만이 아니고, ‘종교적’ 개념들 전반이다. 너는 불트만이 상상하듯이 하나님과 기적을 분리시킬 수 없고, 그 둘을 다 ‘비종교적’ 의미로 해석하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Ibid., p. 156).

“나의 견해는, 신약성경이 보편적 진리의 신화적 옷이 아니고 이 신화들(부활 등)이 본질(the thing itself)이므로 ‘신화적’ 개념들을 포함하여 그 모든 내용이 보존되어야 하지만, 그 개념들이 종교를 신앙의 전제 조건으로 만들지 않는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Ibid., p. 181).

4. 기독교는 속죄적 종교가 아니라고 한다.

“다른 동양 종교들과 달리, 구약의 신앙은 구속(救贖)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가 항상 구속의 종교로 간주되어 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구약과 분리시키고 구속에 관한 신화들에 맞추어 그를 해석하는 기본적인 오류가 아닌가?”(Ibid., p. 185).

“오늘날 구속은 무덤 너머의 더 좋은 세계에서 근심과 고통과 공포로부터의 구속,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속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이 참으로 복음서들에서 그리스도의 선포하신 내용과 바울이 선포한 내용의 본질적 성격인가? 그렇지 않다고 나는 말해야 하겠다”(Ibid., p. 186).

5. 성경 전반의 확실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는 잘못된 질문이다. . . . 이것에 대한 증거는 아무 것도 없고, 우리는 단순히 그것이 그러하다고 그것을 해석해야 한다.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성경과 기독교의 신앙은 이러한 문제들에 의해 서거나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Ibid., p. 210).

6. 창조 사건을 부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앞에 과학적으로 매우 천진 난만하게 표현된 고대의 세계 묘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자연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지식이 급속히 변화되는 것을 볼 때, 너무 조소하거나 자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지만, 의심할 것 없이 이 구절에서 성경 저자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기인하는 모든 제한성들을 노출하고 있다. 하늘과 바다는 그가 말하는 식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진술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매우 나쁜 양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축자 영감(逐字靈感)의 관념이 그것을 피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저자는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처신하고 있다”(Creation and Fall: A Theological Inter- pretation of Genesis 1-3, p. 26).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흙과 진흙으로 그의 그릇을 만드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신인 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들은 더욱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즉 하나님이 진흙으로 모양을 만드시고, 사람은 흙 한 줌으로 빚어지는 그릇같이 빚어진다는 표현들 말이다. 이것은 확실히 사람의 기원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줄 수 없다. 확실히, 하나의 이야기로서 이것은 다른 어떤 창조 신화처럼 부적절하거나 혹은 의미 있을 뿐이다”(Ibid., p. 44).

7. 사람의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피조물들로서 그리고 악의 목소리의 장소로서의 뱀, 하와, 지식의 나무의 애매함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하고 명확한 해석으로 미숙하게 부숴지게 해서는 안된다. . . . 성경의 목적은 악의 기원에 관한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고, 죄책으로서의 그리고 인간의 무한한 짐으로서의 그것의 성격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와 별개로 악의 기원에 관해 질문하는 것은 성경 저자의 마음과 거리가 멀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 대답은 명백하거나 직접적일 수 없다”(Ibid., p. 65).

8.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다른 사람을 위한 삶으로 설명한다.

“믿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예수님의 이러한 존재에의 참여이다. . . .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는 가장 높으신 분, 가장 능력이 많으신 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으신 분--그것은 진정한 초월성이 아니다--께 대한 ‘종교적’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는 예수님의 존재에의 참여를 통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존재’로서의 새로운 삶이다”(Letters from Prison, p. 209).

9. 교회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한다.

“교회는 오직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할 때만 교회이다. 우선 그것은 그것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보해야 한다. 목사들은 오로지 그들의 회중들의 자원하는 헌금에 의하여 살거나, 가능하면 어떤 세속적 직업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지배함으로써가 아니고 돕고 섬김으로써 인간의 일상 생활의 세속적 문제들에 참여해야 한다”(Ibid., p. 211).

10.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의 절대 표준임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확립된 규범들의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각기 다른 상황마다 새롭고 다른 어떤 것이며, 이 이유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를 늘 새롭게 검토해야 한다”(Ethics [1955], p. 161).

“[하나님의 계명은] 역사적이며 시간적인 것과 대조되는 보편적으로 타당하며 영원한 것이 아니다”(Ibid., p. 244).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1902- )

오스카 쿨만은 구속사 학파(The Heilsgeschichte)의 시조이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Christ and Time.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0.

Immortality of the Soul or Resurrection of the Dead?.

London: Epworth, 1958.

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9 [rev. ed., 1963].

Salvation in History. New York: Harper & Row, 1968.

1. 성경은 사가(Saga)들과 신화들을 포함한다고 한다.

“그 동일한 구속적(救贖的) 선(line)은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사건들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적 시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들, 예를 들면 역사적 구조 안에 있는 사가들(sagas)이나 창조와 자연의 과정들을 취급하는 신화들도 포함한다. 우선, 원시적 기독교는 이러한 다양한 내용들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 . . 원시적 기독교 글들의 저자들에게서는 역사 의식이 완전히 없으며,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역사와 신화 간의 구별은 선천적으로 멀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 오늘날 낡은 세계관이 사용된 것과 같이 분명히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역사, 사가, 그리고 신화가 동일한 수준에 놓여지는 것이 원시적 기독교에서 어떻게 쉽게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해 줄 뿐이다”(Christ and Time, p. 94).

“만일 원시적 기독교가 소위 원시적 역사나 종말론적 역사를 실제의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시키는 것은 오직 그 둘을 분리시킬 능력이 정식으로 없었던 결과라면, 우리가 역사적 지식을 통해 그 선의 역사적 요소들과 비역사적 요소들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 때에 곧, 그 연결은 없어도 되게 될 것이다”(Ibid., p. 95).

“이와 같이, 불트만이 논리 일관하게 구속의 과정을 하나의 전체로서 취급하고 ‘신화를 벗기는’ 그 동일한 방법을 역사적 연구가 가능한 그 선의 부분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는 적어도 더 정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식하는 것은, 원시적 기독교에서 그 선은 실제로 하나의 완전한 전체를 형성한다는 것과, 오직 처음과 마지막으로부터만 시간 구조를 벗기고 그 역사적 중간 부분을 이 시간의 옷이 입혀진 채로 내버려둠으로써 그것을 깨뜨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Ibid., p. 96).

“하나의 전체로서의 구속사는 ‘예언’이다. 여기에 역사와 신화 간의 대조를 초월하는 점이 있다”(Ibid., p. 97).

“그 과정 전체의 기원과 종말에 관한 이야기들은 객관적으로는 오직 계시의 대상일 뿐이며 주관적으로는 오직 믿음의 대상일 뿐이므로, 그것들은 오직 예언일 뿐이다. 사실들에 대한 인간의 역사적 결정을 통한 확증은 여기에서 가능하지 않다. 좁은 의미에서 역사적인 성경의 책들(역사서)에 언급된 것은, 완전히 믿음과 독립된 역사적 시험에 적어도 부분적으로 열려 있다”(Ibid., p. 98).

2.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가진다.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르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은, 그러므로, ‘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예’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첨가해야 한다--우리가 그 개념을 본체(substance)와 성질들(natures)에 관한 후대의 헬라적 사색들과 연결시키지 않고, 그것을 엄격하게 ‘구속사’(Heilsgeschichte)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는 조건에서”(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ament, p. 306).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후대에 혼란한 여러 가지 이단적 위장들에 대해 교회는 정당히 정죄했는데, 그러한 혼란이 초대 기독교에게 낯설었던 것은 정확히 말해 초대 기독교의 사고가 ‘구속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혼란의 위험은 오직 사람이 기독론의 문제를 본체와 성질들에 관한 사색들로써 풀어보려 할 때에만 일어난다”(Ibid., pp. 306, 307).

3. 보편 구원론적인 경향을 가진다.

“신약에 의하면 기독교적 보편주의가 있다. . . . 그것은 창조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화목된다. 그것은 종말론적 완성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서의 모든 것이신 하나님께 복종된다”(Christ and Time, p. 179).

“하나님의 선택은 모든 인류의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한다”(Salvation in History, p. 160).

“하나님의 계획에서 선택에 주어진 구원역사의 집중이 어떻게 궁극적으로 보편주의(universalism)를 그 목표로 가지는가 하는 것은 특히 바울의 구원 역사관(롬 9-11장)에서 분명하게 된다”(Ibid., p. 162).

“우리는 모든 구원 역사가 처음부터 보편주의적 방향을 띤다는 것을 보았다. ‘돌아가는 노선’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에 이르며, 그 다음엔 전세계에 이른다. 비록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도, 구원 역사는 여전히 선택의 원리에 의존하지만, 이제 선택은 이전보다 더욱, 단순히 구원을 선택된 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구원을 세계에 선포하는 특별한 사명을 위한 선택을 의미한다. 그것이 모든 구원 역사의 길이다. 즉 보편주의는 그것의 목표요, 집중(선택을 의미함)은 그것의 실현의 수단이다. 여기에서 그 길은 심지어 비기독교 종교들, 혹은 더 잘 표현하면, 성경 밖의 종교들에게도 열려 있다. 왜냐하면 유대교는, 물론, 좁은 의미에서 구원 역사에 속하기 때문이다”(Ibid., p. 310).

4. 영혼 불멸을 헬라 철학 사상이라고 한다.

“진리에 대한 관심에서 내가 발견한 바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용감하고 기쁜 원시적 기독교의 소망과, 불멸적 영혼의 잔존에 대한 평화로운 철학적 기대 간에 선을 긋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Immortality of the Soul or Resurrection of the Dead?, p. 6).

“만일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죽음과 영생이 항상 그리스도 사건과 묶여져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처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혼이 본질적으로 불멸적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서만 그러하게 되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Ibid., p. 17).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개념[영혼의 불멸]은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들 중의 하나이다”(Ibid., p. 15).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1928-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판넨베르크 학파의 시조이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Revelation as History. New York: Macmillan, 1968.

Jesus--God and Man. Philadelphia: Westminster, 1968 [2nd

ed. 1977].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9.

The Apostles' Creed. Philadelphia: Westminster, 1972.

1.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부정한다.

“. . . 우리는 그의 이름, 그의 말씀을 통한, 혹은 율법과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직접적 자기 계시의 개념을 거절한다. 그와 대조하여 최종적으로 나타난 바는, 역사 속에서의 그의 행위의 반사(reflex)로서의 하나님의 간접적 자기 계시의 생각이다”(Revelation as History, pp. 13, 14).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의 현재 사건들의 규명된 목표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오직 그것들이 일어난 후에만 하나님의 신성이 감지된다. 이와 같이, 계시를 역사의 끝에 두는 것은 계시의 간접성에 근거한다”(Ibid., p. 131).

“바울의 복음은 그가 경험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남에 대한 해석이라고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바울의 복음이 그 완성된 형태로, 들리는 방식으로 그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와 빌립보서의 저작 사이에 바울의 사상에 발전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것에 반대되는 가장 작은 증거가 아니다”(Jesus--God and Man, p. 73).

2. 사람이 성경을 판단하기에 자유롭다고 한다.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에의 참여는 사람을 모든 다른 궁극적 권위로부터 자유케 한다.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도록 자유롭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 생활 형태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교회적 조직들과 형식들에도 적용된다. 자유의 선물과 특권은 교회들에 의해 제출된 선언들, 교회들의 교리적 결정들, 성경의 책들,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 자신이 전한 내용에 관련하여 시행되어야 한다”(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 94).

3. 사도신경의 진리성을 부정한다.

“사도신경의 진술들이 부분적으로 현대인의 마음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이 진술들 중의 많은 부분은, 이런 혹은 저런 방식으로, 상당히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The Apostles' Creed, p. 10).

“사도신경의 표현 형식들은 믿음의 기초적 사실들의 요약이며 또한 그것의 중심적 내용이 된다. 그것들은 그 시대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언어는 더 이상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의 언어일 수 없다. 따라서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우리는 질문하면서, 숙고하면서, 비평하면서 그 진술들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이런 방식은 초대 교회의 방식과 다를 것이다. 또한 현대 그리스도인은 항상 동일한 결론들에 도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초대 교회의 그 신조을 자기 것으로 삼으면서 아직도 그것을 반복할 수 있는가? 책임 있게 이렇게 할 수 있는 때는 오직 우리가 그 근본적 의도들에 동의할 때 뿐인데, 이 근본적 의도들은 그 신조의 진술들에서 시대적으로 제한된 그 표현 형식을 찾았다. 이 의도들의 언어적 심지어 지적 표현은 더 이상 항상 우리 자신의 현대적 사물 인식을 표현할 수 없다”(Ibid., p. 13).

4. 창조 대신 진화론을 받아들인다.

“만일 모든 피조물들의 미래가 보편적인 것이라면,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같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오늘 바라보는 미래는 이전의 각각의 현재(現在)가 직면했던 것과 동일한 미래일 것이다. 지금의 나의 미래는 또한 쥴리어스 시이저의 미래이었고, 역사 이전 시대의 도마뱀들의 미래이었고, 약 10조(兆)년 전의 최초의 물질 과정들의 미래이었다”(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 61).

5.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전설이라고 한다.

“기독론적으로, 처녀 탄생의 전설(legend)은 그 계시적 사건의 한 근본적인 요소, 즉 예수님이 최초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에 대한 한 예비적 표현이라는 의의를 가질 뿐이다”(Jesus--God and Man, p. 146).

“신학은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그의 지상 생애의 기원에 요구되는 한 기적적 사실로서 주장할 수 없다. 그러한 만큼, 처녀 탄생이 사도신경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Ibid., p. 149).

“예수님의 처녀 탄생에 관한 전통에 대한 강한 역사적 반론들이 있고, 그 전통은 과거의 사건에 관한 사실적 주장의 성질을 가지는 고로, 역사적 반론들은 단순히 치워버려질 수 없다”(The Apostles' Creed, p. 72).

“가장 초기의 형태의 그 전통 자체에 대한 조사는, 그러므로, 그것이 그 자체의 이탈과 동기의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것의 역사적 신뢰성에 반대되는 가장 강한 반론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와 같이 처녀 탄생에서 우리는 하나의 전설과 관계를 가진다. 그것이 이 경우에 아주 확실하게 주장될 수 있는 까닭은, 전승된 그 본문 자체가 그 전통의 전설적 기원에 대한 동기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Ibid., p. 73).

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 진술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복음서들에 보도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들은 바울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강하게 전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 자체의 역사적 알맹이를 거의 찾을 수 없다”(Jesus--God and Man, p. 89).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의 환상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들에 대해서 말하는 사건들의 과정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 제자들 자신들과 똑같이 비유적 언어로 말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이 방해를 받지 않았듯이, 우리도 다른 설명의 가능성들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그러한 언어에 의해 표시된 것의 도움으로 사건들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방해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Ibid., p. 98).

7.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신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그러므로 본래는 육신적 아들의 신분을 의미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신적, 초자연적 존재로 표시한 것도 아니었다. 요컨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워진 유다의 왕은 확실히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유대인의 전통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단지 예수님의 역할, 즉 그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시행하도록 임명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의 본성(nature)을 묘사한 것이 아니었다”(The Apostles' Creed, pp. 63, 64).

8. 보편 구원론적 경향을 가진다.

“그의 죽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의 결과, 즉 죄에 대한 형벌을 단지 그의 백성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짊어지셨다. 그를 통하여, 그러나, 하나님이 버리신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극복되었다. 더 이상 아무도 홀로 그리고 소망 없이 죽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그 내용인 새 새명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나타났고, 그 자신이 그 새 생명에 장차 참여하리라는 소망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Jesus--God and Man, p. 269).

“창조적 사랑은 자유로부터 나오며 세상에서의 자유의 긍정과 창조에로 향한다. 만일 인류의 통일이--그것이 역사의 목적인데--어느날 실상이 된다면, 그것은 이 사랑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p. 69, 70).

“물론, 예수님의 죽음의 대리적 효과는 이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아무도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이제부터는 아무도 더 이상 홀로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특별히 죽음에서 그는 예수님의 죽음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간적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 간의 이 교통은 예수님의 죽음의 대리적 의미의 본질적 내용이다”(The Apostles' Creed, p. 89).

9. 죽은 자들의 부활을 비유로 본다.

“물론, 이런 식으로 죽은 자들의 부활 개념의 긍정적 타당성을 인식하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또한 그것의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성격에 관해 분명히 이해한다는 조건에서, 가능할 뿐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의 개념을, 사람의 모든 경험으로부터 감추어진 사람의 미래에 대한 일종의 초자연적 지식으로 보는 자에게, 그것은 사람의 경험에서 낯설은 요소로 계속 남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사람의 자기 이해에 있어서의 그의 상황의 표현으로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비유로서의 그것의 독특한 성격에서일 뿐이다”(Ibid., p. 104).

10. 지옥의 개념을 부정한다.

“지옥의 개념은, 수많은 심판의 그림들에서 묘사된 대로의 그 독특한 특징들에 있어서, 확실히 공상적이다. 이러한 그림들이 지옥의 고통들에 관해 말하는 바는 매우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진정으로 결정적인 특징인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으로부터 제외됨은 끝없는 구덩이의 전통적인 묘사들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 .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에 대한 분명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제외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지옥일 것이다. 지옥이 어디냐 하는 ‘장소’의 문제는, 그러므로, 부적당한 그리고 우리에게 폐지된 사고 방식에서 나온다”(Ibid., p. 91).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 1900- )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독일의 신약 신학자이었다. 인용된 그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The Central Message of the New Testament. New York:

Scribner, 1965.

New Testament Theology. New York: Scribner, 1971.

1. 성경의 기적 사건들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비평적인 문학적, 언어적 분석에 복종될 때, 기적 이야기들의 내용은 매우 상당히 감소된다”(New Testament Theology, p. 86).

“기적 이야기들의 문학적 비평적 조사는 기적 요소를 높이는 경향을 나타낸다. 수가 증가한다. 기적들은 정교해진다. 이중적 보도들이 전달되어 내려온다. 요약들은 예수님의 기적 행하는 행위를 일반화한다. 몇 가지 경우들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적 이야기가 언어적 오해에서 자라나왔는지 볼 수 있거나 혹은 적어도 상상할 수 있다”(Ibid., p. 86 footnote).

“심지어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신 이야기(막 6:45-52; 요 6:16-21)도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막 4:35-41 참조)로부터 언어적 오해의 결과로 자라나왔을 것이다”(Ibid., p. 87 footnote).

“만일 우리가 랍비주의적 그리고 헬라주의적 기적 이야기들과 비교한다면 그 내용은 더욱 감소된다”(Ibid., p. 88).

“우리는 또한 특히 헬라주의적 환경으로부터의 당시 유행하는 작품에서, 귀신의 추방, 병고침, 죽은 자들을 일으킴, 풍랑을 잔잔케 함, 포도주 기적들의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기적 이야기들의 어떤 것들은 복음서들의 그것들과 매우 밀접한 접촉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전통이 그것의 주위 환경으로부터 빌려왔으며 적어도 그것으로부터 어떤 개별적 주제들을 이어받았다는 결론을 거의 피할 수 없다”(Ibid., p. 88 footnote).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 보도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수난은 며칠의 과정을 거쳐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하나의 관찰할 수 있는 사건이었던 반면에,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顯現)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아마 여러 해들에 걸쳐서 계속된 다른 종류의 다양한 사건들이었다. 전통은 오직 비교적 후대에만 그리스도의 현현들의 기간을 40일에 한정했다(행 1:3)”(Ibid., p. 301).

“처음에 보기엔, 부활의 주님의 나타나심들이 그 처음 증인들에게 직접적 경험이라는 점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우리의 자료들이 그 사건들로부터 수십년 동안 떨어져 있고 부활적 기사들이 그 동안 정교화되고 여러 점들에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아주 절망적인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시대의 사고로부터 시작한다면, 하나의 가설이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Ibid., p. 308).

“부활절 사건들이 주는 직접적 인상의 추가적 반향은 예수님의 부활이 그의 보좌에 앉으심이라는 생각에 보존되어 있을지 모른다. . . . 그렇다면 이것은, 그 종말을 향하여 재촉하는 역사의 과정에서의 하나님의 독특한 능력의 행위로서가 아니고(비록 이것은 그것이 짧은 기간의 간격 후에 그들에게 그렇게 보였음에 틀림없는 것이지만), 종말 사건의 여명으로서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직접적 경험이었다. 그들은 비추는 빛 안에서 예수님을 보았다. 그들은 그의 영광 안으로의 들어감의 증인들이었다. 다른 말로 말해, 그들은 파루시아[재림]를 경험했다”(Ibid., p. 310).

3.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법정적(法廷的, forensic) 성격을 약화시킨다.

“우리는 이와 같이, 법정적(法廷的) 비교가 묽어졌거나 심지어 완전히 포기된 것처럼 보이는 디카이우스다이의 용법을 보았다. 나는 이 용법을 법정적 용법과 구별하기 위하여 ‘구원론적’ 용법이라고 부르고 싶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의롭다고 하다’(혹은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용법이 법적 영역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은 분명하다. 비록 법정적 측면이 완전히 없지는 않지만. . . 구원론적 의미가 그의 말을 지배한다. 바울에게서는, 능동태 디카이운은 ‘은혜나 기뻐하심을 베풀다’는 것을 의미하고, 수동태 디카이우스다이는 ‘은혜나 기뻐하심을 얻다’는 것을 의미한다”(The Central Message of the New Testament, pp.53, 54).

4. 성례가 구원의 은혜를 전달한다고 본다.

“. . . 칭의가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불경건한 자들을 용납하시는가? 이 문제에서 우리는, 이 주어짐이 발생하는 것이 바로 세례에서라는 것을 지난 수십년 동안 배웠기 때문에, 오늘날 더 분명하게 사실들을 본다”(Ibid., p. 59).

“칭의와 세례의 연관이 바울에게 매우 분명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바로 세례에서라는 것을 그렇게 많은 말로 진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Ibid.).

“바울은 성찬이 세례와 동일한 은사, 즉 그리스도의 대리적 죽음에와 그의 몸의 친교에 참여함을 전달한다고 이해했다”(Ibid., p. 65)

피에르 떼이아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1955)

피에르 떼이아르 드 샤르댕은 카톨릭 예수회 신부이며 철저한 진화론자이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Hymn of the Universe. New York: Harper & Row, 1965.

The Phenomenon of Man. New York: Harper & Row, 1965.

The Divine Milieu: An Essay on the Interior Life. New

York: Harper & Row, 1965.

Science and Christ. New York: Harper & Row, 1968.

The Future of Man. New York: Harper & Row, 1969.

1. 범신론적이다.

“그렇다면, 성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혼합이나 멸절의 독이 조금도 없는 훌륭한 형태의 ‘범신론’이다. 즉 그것은 각 요소가 그것에 깊이 빠져 동시에 우주로서의 그것의 완성에 이를 완전한 일체에 대한 기대인 것이다”(The Phenomenon of Man. p. 294).

2. 우주와 인간의 창조를 부정하는 진화론자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존재들의 진화 즉 자연적 진화의 마지막 지점이고, 그러므로 진화는 거룩하다”(Hymn of the Universe, p. 133).

“모든 비교물을 초월하는 지구의 과제는 신실한 자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그리고 그러므로 하나님 안으로 합병하는 물질적 합병이다. 그리고 이 최고의 일은 자연적 진화 과정의 정확성과 조화를 가지고 이루어진다” (Ibid., pp. 143, 144).

“무엇이든지 과거로 되돌리는 것은 그것을 그것의 가장 단순한 요소들로 환원시키는 것과 동등하다. 그것들의 근원들의 방향으로 가능한 한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 집합체의 마지막 섬유들은 보이지 않게 되고 우리의 눈에서 바로 우주라는 물건과 합쳐지는 것이다”(The Phenome- non of Man. p. 39).

“원자가 단순한, 원소적 물질의 자연적 미립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세포는 생명의 자연적 미립자이다. . . . 세포는, 만일 우리가 그것을 과거와 미래 사이의 진화론적 선상에 두지 않는다면, 세상의 다른 모든 것과 같이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즉, 우주의 합리적 조직 속에 병합될 수 없을 것이다)”(Ibid., pp. 79, 80).

“쥴리안 헉슬레이의 인상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진화가 자체를 의식하게 된 것 외의 다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내 생각에는 우리의 현대적 지성들은 (그들이 현대적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 견해에 정착하기까지는 결코 안식을 발견하지 못할 것 같다. 이 정상(頂上)에서 그리고 이 정상에서만 휴식과 빛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Ibid., p. 221).

“우리 자신의 의식(意識)이라고 하는 것은 진화가 자체를 쳐다보고 자체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Ibid.).

“우리의 시간 척도에 의하면, 생명이란 3억년 이상의 거대한 시대의 현상이다. 더욱이 그것은 수만개의 분리된 원소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이 온 세계에 덮여 있다”(The Future of Man, p. 66).

3. 죽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죽음이란, 생물들의 경우와 같이, 한 개인이 종족의 혈통을 따라 다른 개인으로 대치되는 일정한, 불가피한 상태이므로, 그것[분해의 악]은 더 악화되고 이중적으로 운명적인 형태라고 덧붙여 말해야 하겠다. 죽음이란 기계에서의 레버요 생명의 증가인 것이다”(The Phenomenon of Man. p. 312).

4. 에큐메니칼 운동을 옹호한다.

“내가 믿기는, 이와 같이 기독교 사상에 의한 현대 진화론적 견해들의 병합과 동화는 수 세기 동안 계속 이성과 신앙 사이에 일어났던 장벽을 허물기에 충분하다. 그 부동(不動)의 장애물이 제거된 한, 미래에 카톨릭 교인들과 비카톨릭 교인들이 발견의 고속도로를 따라 손에 손 잡고 함께 전진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 없다. 오늘날 양측의 협력은 가능하게 되었다”(Science and Christ, p. 190).

“이 순간, 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형태가 스스로를 주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지구의 정신적 성숙과 결합되어 있고 그러므로 그것은 확실히 올 것이다”(Ibid., p. 197).

“이러한 조건들에서, 나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향한 유일한 두 가지의 효과적인 길들이 이런 것들이 아닌지 생각한다. 즉 (1) 참으로 ‘우주적’ 척도에서 극단적 정통 기독교와 극단적 인본주의 기독교를 제시하려는 관심을 가지는 기독교인들 간의 (정상 에큐메니즘). (2) 인류의 미래에 하나의 공통적인 인간의 ‘신앙’의 기초들을 정의하고 확장하려는 관심을 가진 일반 사람들 간의 (기초 에큐메니즘). 이 두 노력이 결합된다면, 그것들은 자동적으로 우리를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에큐메니즘으로 인도할 것이다”(Ibid., p. 198).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

크리스터 스텐달은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 신학부장이며 신자유주의 학파로 분류된다.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The Scrolls and the New Testament. Edited by Krister

Stendahl. New York: Harper & Row, 1957.

The School of St. Matthew and Its Use of the Old Testa-

ment.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68.

Paul among Jews and Gentiles and Other Essay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6.

"Foreword," in Great Religions of the World. Edited and

Published by National Geographic Society, n.d.

1. 마태복음은 사도 마태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고, 마태 학파에 의해 쓰여졌다고 본다.

“본 답슈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개종한 랍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제안했다. . . . 만일 우리가 그 복음서를 개종된 랍비에게 돌린다면, 우리는 그가 전적으로 혼자서 사역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가 살았고 봉사했던 교회의 생활 속에서 활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상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마태의 교회 안에 활동적이었던 한 학파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The School of St. Matthew and Its Use of the Old Testament, p. 30).

“이와 같이 마태 학파는 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한 학파로서 이해되어야 하고, 이런 이유 때문에 저 학파의 저작품은 교회 내에서의 가르침과 행정을 위한 안내서의 형태를 취한다”(Ibid., p. 35).

2. 바울은 교회의 전통에서 잘못 해석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바울과 루터 사이의 차이점들을 분별하는 것이 동등하게 중요한 점이 있다. 바울의 경험은 서방의 신학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회심의 내면적 경험이 아니다. 이 차이점 배후에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그것은, 서방에 있는 특히 종교개혁의 전통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바울을 루터나 칼빈과 같은 인물들의 경험을 통해 읽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에 대한 우리의 대부분의 오해들에 대한 주요한 이유이다”(Paul among Jews and Gentiles, p. 12).

“. . .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바울의 교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깊은 생각에서 그 신학적 맥락을 가지고 있지,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가 혹은 사람의 행위들이 어떻게 인정을 받을 것인가라는 문제에서가 아니다”(Ibid., p. 26).

3. 신약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임을 부정한다.

“현대 학자들은 신약성경의 본문이 액면 그대로 해석될 수 없고, 그것이 초대 교회의 신학적, 선교적, 그리고 교리 문답적 관심들의 표시들을 보인다는 사실을 잘 의식하고 있다. 또한, 신약성경이 초대 교회 내의 서로 다른 발전 단계들과 상호 충돌적 경향들과 행위들을 증거한다는 것도 명백하다”(The Scrolls and the New Testament, p. 3).

“우리가 방금 인용한 ‘[교의와 신적 계시로서 선전되었다기보다] 단순히 인간 역사의 한 에피소드[혹은 삽화]라는’ 기독교에 관한 윌슨의 진술이 심각하게 이해되어야 할 부분이 여기이다. ‘에피소드’와 ‘계시’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시초부터 기독교 신학의 기본적 신학적 문제이었다. 1세기에 기독교 사상의 주관심은 기독교를 영원한 진리의 체계로 변형시키려는 모든 경향들에 대항하여 그 에피소드의 면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Ibid., p. 4).

4. 기독교의 절대적, 불변적 성격을 부정하고 혼합주의적 경향을 가진다.

“지구의 하나됨을 가정한다면, 우리의 다원주의는 부채가 아니고 자산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실지 모르나, 종교들은 여러 개이다. 그것들은 그 문화가 가장 특징적인 곳 즉 바나라스, 메카, 로마, 예루살렘 같은 곳들에서 그 세력의 중심을 가진다. . . . 내가 이 책을 넘겨볼 때, 나는 우리가 동등한 것을 동등한 것과 비교해야 한다는 모든 종교 연구의 기본 법칙을 기억한다. . . . 사실,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과 구조는 문화에 따라 두드러지게 다르다”("Foreword," in Great Religions of the World, p. 7).

“우리는 또한 오늘날 우리 자신의 신앙과 고대의 종교적 행위들을 비교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종교들은 발전하고 변화한다. 족장 아브라함과 신학자 아브라함 헤쉘에 의해 표현된 종교적 견해들 사이에는 두드러진 차이점들이 존재하지만, 그 둘은 다 정당하게 유대교적이라고 불리운다. 혹은 복음서 기자 요한과 교황 요한 23세 간이나, 마르틴 루터와 마르틴 루터 킹 간에도 그러하다. 우리는 오늘날의 것과 오늘날의 것을 비교해야 한다”(Ibid.).

“그의 종교와 우리의 종교는 모든 경계선들을 넘는 능력을 가진 생명력 있는 종교들이다. 그리스도가 동양에서 자기 증인들을 가지게 될 것처럼 부처는 서양에서 자기 증인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Ibid.).

4. 자유주의 이단들에 대한 성경적 반박

1. 성경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칼 바르트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전체 진리가 위치한 앞뒤 문맥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거짓이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관계된다는 사실에서만 어떤 타당성을 가진다”(Christ and Adam, pp. 54, 55).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65).

“구약과 신약의 성경 역사는 실상 전혀 역사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일련의 자유로운 신적 행위들이며 아래서 보면 본질상 불가능한 어떤 것을 이루려는 일련의 결실 없는 시도들이다”(Ibid., p. 72).

“진정한 역사 속에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이 서로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고 의무적이다”(Church Dogmatics, III. i. 81).

씨 에취 다드

“요한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하나의 추가적 기록보다 하나의 해석, 즉 새로운 대중을 위한 하나의 해석을 의도했다”(About the Gospels, p. 31).

“그렇다면 그[가나의 기적]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의 참된 의미는 더 깊은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더 깊은 의미에 대한 아무런 직접적 단서를 갖고 있지 못하다”(The Interpreta- tion of the Fourth Gospel, p. 297).

“바울이 했다는 설교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나 다른 이들이 했다는 설교들은 사도행전 저자의 자유로운 작품일지 모른다는 것은 가능한 생각이다”(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s, p. 17).

“비록 우리는 아마 디모데전서를 진짜 바울의 편지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지만. . . .”(Ibid., p. 30).

오스카 쿨만

“그 동일한 구속(救贖)의 선(line)은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사건들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적 시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들, 예를 들면 역사적 구조 안에 있는 사가(saga)들이나 창조와 자연의 과정들을 취급하는 신화들도 포함한다. 우선, 원시 기독교는 이러한 다양한 내용들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 . . 원시 기독교 글들의 저자들에게서는 역사 의식이 완전히 없으며,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역사와 신화의 구별은 선천적으로 멀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 오늘날 낡은 세계관이 사용된 것과 같이 분명히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역사, 사가, 그리고 신화가 동일한 수준에 놓여지는 것이 원시적 기독교에서 어떻게 쉽게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해줄 뿐이다”(Christ and Time, p. 94).

<성경적 반박>

누가복음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혹은 확실하게 믿어진 일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이 말씀은 성경의 확실성과 신빙성을 증거한다.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이 말씀은 성경 기자들이 증인들이었고 성경의 내용들이 증거적 성격을 지님을 말해준다.

요한복음 20:30, 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표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확증하시는 표라는 뜻이다. 성경은 이러한 확증의 표들을 지니고 있다.

2.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다드

“[성경의] 외적 권위는 엄밀한 의미에서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The Authority of the Bible, p. 14).

“우리가 계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어느 것도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상대적이다. 아무 곳에서도 진리는 자존적(自存的) 외적 권위를 찾을 수 있는 순수하게 ‘객관적인’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Ibid., p. 289).

폴 틸리히(Paul Tillich)

“성경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율법적으로 생각되고 작성되고 인봉된 기록, 그래서 그것에 근거해 우리가 어떤 주장들을 결정할 수 있는 그런 기록이 아니다”(Systematic Theology, I, 35).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5:18,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주 예수님께서 친히 성경의 신적 권위와 축자적[逐字的, 글자의] 영감을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10:35, “성경은 폐할 수 없나니.” 주 예수님께서 친히 성경의 신적, 절대적 권위를 이 한마디로 분명히 선언하셨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 . .” ‘하나님의 감동으로’라는 원어(데오프뉴스토스)는 ‘하나님이 숨을 내쉼으로’라는 뜻으로 성경의 영감 뿐만 아니라, 또한 성경의 신적 기원과 권위를 증거한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굳게 서서 우리의 말로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전통]을 지키라.” 바울 사도는 사도들의 교훈[즉 신약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증거했다.

요한계시록 22:18, 19,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성경의 신적 권위를 이처럼 강력하게 증거하는 말씀이 또 어디 있겠는가?

3.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부정한다.

바르트

“선지자들과 사도들 자신은 심지어 그들의 직분에 있어서도, 심지어 증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도, 심지어 그들의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우리와 같이 실제, 역사적 인간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죄가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기록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범했다”(Church Dogmatics, I. ii. pp. 528, 529).

다드

“성경 무오(無誤)에 대한 옛날 견해가 과학적 발견과 역사 비평학의 연속적 공격으로 파괴되었던 과정에 대해 상술할 필요는 없다. 과학과 역사의 문제에서 성경의 정확성을 주장함에 있어서 성경 무오의 변호자들이 희망 없는 입장을 택했었다는 것은 오래 전에 벌써 분명했다. . . . 성경의 그 옛 교리적 견해는 과학과 역사비평학의 입장에서 공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신중히 생각한다면 그것은 종교와 공중 도덕에 위험물이 된다”(The Authority of the Bible, p. 13).

“바울이 잘못이라고 나는 때때로 생각하고, 과감히 그렇게 말해 왔다, 비록 전체적으론 그가 말하는 바가 나의 보기에 충분히 참된 것 같지만”(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p. xxxv).

<성경적 반박>

요한복음 10:35, “성경은 폐할 수 없나니.” 주 예수님께서 친히 성경의 신적, 절대적 권위를 이 한마디로 분명히 선언하셨다.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5:18,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께서 친히 성경의 신적 권위와 축자적(逐字的, 글자의), 아니, 축획적(逐劃的) 영감을 증거하셨다.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축자적 영감을 부정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 말씀은 성경의 영감이 단어의 복수형 혹은 단수형에까지 미침을 보인다.

시편 19:7, 8,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성경의 이러한 네 가지 성격, 특히 그 완전성, 및 그것의 독특한 목적은 성경의 무오성에 맞고, 성경의 유오성에 맞지 않는다.

요한복음 20:30, 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의 목적은 영혼을 구원하는 중차대한 목적이다. 이러한 목적을 가진 책이 불확실하고 오류투성이일 수 있단 말인가?

4. 하나님의 진노의 속성을 부정한다.

다드

“이와 같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로서의 진노가 사라지는 길이 열려 있고, 그의 사랑과 자비는 모든 것을 포괄하게 된다. 바울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을 가지는 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도덕 세계에서의 불가피한 인과(因果) 과정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p. 23).

“하나님을 인격의 가장 높은 이상(理想)으로 생각하면서 비(非)이성적 진노의 격정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전혀 논리 일관하지 않다”(Ibid., p. 24).

틸리히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과 병행하는 하나님의 어떤 감정이나, 섭리와 병행하는 어떤 행동 동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것을 저항하는 것을 거절하고 스스로 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사랑의 활동의 정서적 상징이다”(Systematic Theology, I, 284).

“정죄란 피조물이 자기가 택한 비존재(非存在)에로 내버려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Ibid., I, 284).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신성과 그 무조건적 성격과 명백히 모순된다. 그러므로 그 개념은 재해석되든지 아니면 기독교 사상에서 완전히 포기되어야 한다”(Ibid., II, 77).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의 죄책에 따라 계산된 특별한 형벌 행위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공의는 그가 실존적 소외의 자멸적 결과들을 그대로 허용하는 행위일 뿐이다”(Ibid., II, 174).

<성경적 반박>

창세기 6-8, 19장, 노아 홍수 심판과 소돔 고모라의 불 심판.

예레미야 애가 2:1-4,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 . . . 진노하신 날에 . . . 노하사 . . . 맹렬한 진노로 . . .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다섯 장으로 된 이 짧은 예레미야 애가서에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이 약14회 나온다.

나훔 1:2, 3, 6,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 . .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느니라. . . .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성경의 이 명백한 말씀을 어떻게 부인하며 달리 해석할 수 있는가?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지옥의 교리는 주 예수님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다. 아무도 이 진리를 변경시킬 수 없다.

로마서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의 진노의 날은 확실히 있다.

데살로니가후서 1:7-9,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성경이 증거하는 이 마지막 형벌을 부정하는 자가 이단이 아니면 누가 이단인가?

5. 창조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바르트

“그것은 자체 안에 시간의 시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실상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 진술을 피하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들에서 순수한 사가(saga)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다”(Church Dogmatics, III. i. 42). [그는 사가를 “역사의 선(先)역사적 실상에 대한 직관적, 시적 묘사”라고 설명했다(Ibid., p. 81). 그것은 신화 혹은 전설과 비슷한 개념이다.]

다드

“비록 바울에겐 그가 실제적 인물로 생각되었을지 모르지만, 아담은 하나의 신화이다”(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p. 79).

니이버

“창조는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하나의 신화적 개념이다”(Beyond Tragedy, p. 7).

틸리히

“창조의 교리는 ‘옛날에’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의 기본적 묘사이다”(Systematic Theology, I, 252).

본훼퍼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앞에 과학적으로 매우 천진 난만하게 표현된 고대의 세계 묘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자연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지식이 급속히 변화되는 것을 볼 때, 너무 조소하거나 자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지만, 의심할 것 없이 이 구절에서 성경 저자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기인하는 모든 제한성들을 노출하고 있다. 하늘과 바다는 그가 말하는 식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진술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매우 나쁜 양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축자 영감(逐字靈感)의 관념이 그것을 피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저자는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처신하고 있다”(Creation and Fall: A Theological Inter- pretation of Genesis 1-3, p. 26).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흙과 진흙으로 그의 그릇을 만드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신인 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들은 더욱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즉 하나님이 진흙으로 모양을 만드시고, 사람은 흙 한 줌으로 빚어지는 그릇같이 빚어진다는 표현들 말이다. 이것은 확실히 사람의 기원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줄 수 없다. 확실히, 하나의 이야기로서 이것은 다른 어떤 창조 신화처럼 부적절하거나 혹은 의미 있을 뿐이다”(Ibid., p. 44).

판넨베르크

“만일 모든 피조물들의 미래가 보편적인 것이라면,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같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오늘 바라보는 미래는 이전의 각각의 현재가 직면했던 것과 동일한 미래일 것이다. 지금의 나의 미래는 또한 쥴리어스 시이저의 미래이었고, 역사 이전 시대의 도마뱀들의 미래이었고, 약 10조년 전의 최초의 물질 과정들의 미래이었다”(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 61).

<성경적 반박>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조의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초보적 내용이다. 창조를 믿지 못하면 성경의 나머지 모든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세계와 인류의 역사는 창조로부터 시작된다.

히브리서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아나니.” 창조를 믿는 믿음은 기본적 믿음이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바울 사도는 창조의 진리를 밝히 가르쳤다.

6.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한다.

니이버

“영원이 시간 속에 들어온다는 개념은 지적으로 불합리하다. . . .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는 진리가 보통 판단되는 모든 규범들을 어긴다”(Beyond Tragedy, pp. 13-14).

불트만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그러한 개념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신화들에서 널리 퍼져 있었고, 그후 역사적 인물 예수님에게 이전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신화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적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17).

틸리히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주장은 역설적(逆說的)이 아니라 부조리한(nonsensical) 말이다”(Systematic Theology, II, 94).

<성경적 반박>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성육신(成肉身)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매우 근본적 진리이다. 그는 인간의 본질을 취하신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부정함은 기독교의 지엽적인 무엇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의 구주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성육신하지 않으신 예수는 다른 예수에 불과하다.

요한일서 4:2, 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고백]하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고백]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성육신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적, 이단적 영의 활동이다.

요한이서 7, “이는 미혹하는[속이는] 자들이 많이 세상에 나왔음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라. 이것이 미혹하는[속이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 이 말씀이 증거한 대로, 성육신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속이는 자들이요 적그리스도들이다.

7.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부정한다.

바르트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 주목할 만한 두 마디가 하나님께서 값없는 은혜로써 사람, 곧 진짜 사람이 되셨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려고 해야 한다”(Dogmatics in Outline, p. 96).

“그의 어머니가 젊은 부인으로 불리우는가 아니면 처녀로 불리우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Church Dogmatics, IV. i. 5, footnote).

니이버

“사람들은 처녀 탄생의 원시적 신화에 의해 속임을 당하고, 바로 역사 너머를 가리키기 때문에 의미 있는 그것을 하나의 순수한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Beyond Tragedy, p. 17).

“‘처녀 탄생’과 같은 기적들은 후대에 삽입된 생각들이다”(The Self and the Dramas of History, p. 66).

불트만

에게네토를 기적적 과정으로, 즉 생리학적 기적으로 보는 것은, 그 계시자가 사람이라는 그 복음서의 주제를 거스리는 것이다. 더욱이, 1:45; 6:42; 7:27 이하는 그 복음서 기자가 처녀 탄생의 전설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거나 알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을 보인다”(The Gos- pel of John, pp. 62, 63).

“그러나,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그들은[아주 초기 교회는] 지상의 예수님을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처녀 탄생의 전설은, 바울에게 그러했듯이, 그들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p. 50).

판넨베르크

“기독론적으로, 처녀 탄생의 전설은 그 계시적 사건의 한 근본적인 요소, 즉 예수님이 최초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에 대한 한 예비적 표현이라는 의의를 가질 뿐이다”(Jesus--God and Man, p. 146).

“신학은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그의 지상 생애의 기원에 요구되는 한 기적적 사실로서 주장할 수 없다. 그러한 만큼, 처녀 탄생이 사도신경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Ibid., p. 149).

“예수님의 처녀 탄생에 관한 전통에 대한 강한 역사적 반론들이 있고, 그 전통은 과거의 사건에 관한 사실적 주장의 성질을 가지는 고로, 역사적 반론들은 단순히 치워버려질 수 없다”(The Apostles' Creed, p. 72).

“그러므로, 가장 초기의 형태의 그 전통 자체에 대한 조사는 그것이 그 자체의 이탈과 동기의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그것의 역사적 신뢰성에 반대되는 가장 강한 반론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와 같이 처녀 탄생에서 우리는 하나의 전설과 관계를 가진다. 그것이 이 경우에 아주 확실하게 주장될 수 있는 까닭은, 전승된 그 본문 자체가 그 전통의 전설적 기원에 대한 동기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Ibid., p. 73).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1:18-25,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 . .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 . .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그리고 매우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다. 성경을 믿는 자라면 어찌 이렇게 자세하고 확실한 증언을 부정할 수 있는가?

누가복음 1:26-38, “. . .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 . . 이는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은 아무 것도 없음이니라.” 누가복음도 이 사실을 밝히 증거한다. 성경의 증거는 확실하다. 애매 모호하지 않다. 성경의 이 증거를 믿지 못한다면, 성경의 다른 어느 증거는 믿겠는가? 자유주의는 믿음 없는 사두개파적 오류일 뿐이다. 사실상, 예수님의 처녀 탄생에 대한 믿음은 성경의 초자연주의 수납의 시금석이다. 더욱이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처녀 탄생 사건과 그의 신성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35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요한복음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 . .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 . . .” 이 표현은 그의 신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인적 존재가 단순히 인간 부모의 육신적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요한 사도도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의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고린도전서 15:47, “. . .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이 표현도 위의 말씀과 비슷하며, 이것은 바울 사도도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의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8.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부정한다.

불트만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그 이야기가 이방의 전설로부터 취해져 예수님께 돌려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사실, 그 이야기의 주제(motif), 즉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은 디오니서스 전설의 전형적 주제이다”(The Gospel of John, pp. 118, 119).

틸리히

“모든 역사적 지식과 같이, 이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가설적이다. 역사적 연구는 이 지식을 방법론적 회의주의에 굴복시키고 또 본질적인 부분들 뿐만 아니라 각개의 부분들에서도 계속적인 변화에 굴복시킨다”(Systematic Theology, II, 107).

예레미아스

“비평적인 문학적, 언어적 분석에 복종될 때, 기적 이야기들의 내용은 매우 상당히 감소된다”(New Testament Theology, p. 86).

“기적 이야기들의 문학적 비평적 조사는 기적 요소를 높이는 경향을 나타낸다. 수가 증가한다. 기적들은 정교해진다. 이중적 보도들이 전달되어 내려온다. 요약들은 예수님의 기적 행하는 행위를 일반화한다. 몇 가지 경우들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적 이야기가 언어적 오해에서 자라나왔는지 볼 수 있거나 혹은 적어도 상상할 수 있다”(Ibid., p. 86 footnote).

“심지어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신 이야기(막 6:45-52; 요 6:16-21)도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막 4:35-41 참조)로부터 언어적 오해의 결과로 자라나왔을 것이다”(Ibid., p. 87 footnote).

“만일 우리가 랍비주의적 그리고 헬라주의적 기적 이야기들과 비교한다면 그 내용은 더욱 감소된다”(Ibid., p. 88).

“우리는 또한 특히 헬라주의적 환경으로부터의 당시 유행하는 작품에서, 귀신의 추방, 병고침, 죽은 자들을 일으킴, 풍랑을 잔잔케 함, 포도주 기적들의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기적 이야기들의 어떤 것들은 복음서들의 그것들과 매우 밀접한 접촉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전통이 그것의 주위 환경으로부터 빌려왔으며 적어도 그것으로부터 어떤 개별적 주제들을 이어받았다는 결론을 거의 피할 수 없다”(Ibid., p. 88 footnote).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사두개인들과 같이, 자유주의자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한 자들이다.

사도행전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은 은밀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너희도 아는 바에,’ ‘너희 가운데서,’ ‘너희 앞에서’라는 말씀들이 그 사실을 보인다.

사도행전 10:38, 39,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주의 제자들은 그 기적들에 대한 산 증인들이었다.

성경의 신빙성과 신적 권위를 믿는다면, 성경에 증거되고 기록된 모든 내용들을 다 믿을 수 있다. 앞에서도 열거했지만, 성경의 역사적 신빙성에 대한 주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누가복음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혹은 확실하게 믿어진 일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20:30, 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9.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代贖)을 부정한다.

다드

“그러므로 유화(宥和, propitiation)라는 번역은, 진노하신 하나님을 누그러뜨림을 암시하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비록 이것이 이교적(異敎的) 용법에는 맞을지라도, 성경적 용법에는 생소하다”(The Romans, p. 55).

“하나님의 의(義)가 (예를 들어, 죄의 대리적 형벌에 의해) 만족될 수 있고 동시에 그의 자비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사용되는 어떤 방책이 있었다는 아무런 암시도 없다. 의와 자비 간의 그러한 대립은 바울의 마음 속에 있지 않았다”(Ibid., p. 59).

니이버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교리는 많은 신학적 오류들로 인도하는데, 그 중에는 인간의 도덕 의식을 모욕하는 대리적 속죄의 이론들이 포함된다”(Beyond Tragedy, pp. 17, 18).

불트만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救贖)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 . .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주의적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17).

틸리히

“[‘대리적 고난’이라는 용어]는 불행스런 용어이며 신학에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실존적 소외의 고난에 참여하지만, 그의 고난은 피조물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도 사람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고난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여와 변형에 의해 피조물의 자멸을 극복하는 능력이다. 대리가 아니고 자유로운 참여가 신적 고난의 성격이다”(Systematic Theology, II, 176).

<성경적 반박>

속죄 사역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다. 속죄의 성경적 의미는 ① 제사(속상 贖償; expiation), ② 구속(救贖, redemp- tion), ③ 유화(宥和, 진노를 가라앉게 함; propitiation), ④ 화목(re- conciliation) 등의 성경적 용어에서 나타나며, 속죄의 요점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 즉 피택자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는 것이다. 속죄의 진리는 성경 전체에 펼쳐져 있지만 다음 구절들은 대표적인 것들이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은 속죄 사역이었다.

로마서 3:24, 25,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속죄 사역에 근거하여 피택자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고린도후서 5:14, 21,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 .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속죄의 이치는 대리적 형벌로 인한 공의의 만족에 있다. 죄인은 그리스도의 속죄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짐을 짊어지시고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신 죽으심, 즉 속죄의 죽으심이었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한 단번 속죄의 십자가이었다. 그는 2000년 전에 피택자들의 속죄를 다 이루셨다.

히브리서 10:10, 12,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 . .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 . .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신자들은 법적으로 이미 2000년 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거룩하여졌고 완전하여졌다.

베드로전서 1:18, 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에게서 유전된 헛된 행실로부터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죄 문제의 해결은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함뿐이다.

요한계시록 5:9,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우리를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리스도의 피는 피택자들을 죄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지불하신 값이다.

1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바르트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부활은 그러므로 역사 안에서 일어난 한 사건(an occurrence)이다. . . . [그러나] 부활은 도무지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이 아니다”(The Epistle to the Romans, p. 3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명백하다”(Church Dogmatics, IV. i. 335).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는--현대 학자들의 사고형식들과 용어로--사가(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Ibid., pp. 335, 336).

불트만

“바울이 여전히 그것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한 바 그 빈 무덤의 이야기들은 전설들이다”(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I, 45).

“만일 부활절 사건이 어떤 의미로든지 십자가 사건에 첨가된 역사적 사건이라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의 발생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설교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이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 자체는 지나간 역사의 사건이 아니다”(Hans Werner Bartsch, ed., Kerygma and Myth: A Theological Debate by Rudolf Bultmann and Ernst Lohmeyer, Julius Schniewind, Helmut Thielicke, and Austin Farrer, p. 42).

틸리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한 자의 십자가이다. . . .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실존적 소외의 죽음에 복종시켰던 자의 부활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추가적인, 의문의 기적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 . . 십자가의 이야기들은 아마 역사적 관찰의 충분한 빛 안에서 발생했던 한 사건을 가리킬 것이지만, 부활의 이야기들은 그 사건 위에 깊은 신비의 베일을 덮는다”(Sys- tematic Theology, II, 153).

“신들과 반신(半神)들의 부활은 잘 아는 신화적 상징이다. . . .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불리우는 순간에 . . . 부활의 개념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됨은 거의 불가피하다. 그 상징이 사건이 되었다는 제자들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그리스도로서 메시아가 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의존했다”(Ibid., II, 154).

“이 사건의 성격은 어두움 속에, 즉 부활절 이야기의 시적 합리화 속에 남는다. 그러나 한 가지 일이 분명하다. 그의 부활의 확실성이 그 작은 흩어진 그리고 실의에 찬 무리들을 붙잡았던 날들에, 교회가 탄생되었다”(Ibid., II, 154).

“역사적 연구는, [부활의 상징에서] 그것의 주위에 있는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이러한 사실적 요소를 찾아내려고 함에 있어서 정당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는 결코 개연적 대답 이상의 것을 줄 수 없다”(Ibid., II, 155).

판넨베르크

“복음서들에 보도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들은 바울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강하게 전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 자체의 역사적 알맹이를 거의 찾을 수 없다”(Jesus--God and Man, p. 89).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의 환상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들에 대해서 말하는 사건들의 과정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러면 그 제자들 자신들과 똑같이 비유적 언어로 말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이 방해를 받지 않았듯이, 우리도 다른 설명의 가능성들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그러한 언어에 의해 표시된 것의 도움으로 사건들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방해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Ibid., p. 98).

예레미야스

“수난은 며칠의 과정을 거쳐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하나의 관찰할 수 있는 사건이었던 반면에,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아마 여러 해들에 걸쳐서 계속된 다른 종류의 다양한 사건들이었다. 전통은 오직 비교적 후대에만 그리스도의 현현들의 기간을 40일에 한정했다(행 1:3)”(New Testament Theology, p. 301).

“처음에 보기엔, 부활의 주님의 나타나심들이 그 처음 증인들에게 직접적 경험이라는 점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우리의 자료들이 그 사건들로부터 수십년 동안 떨어져 있고 부활적 기사들이 그 동안 정교화되고 여러 점들에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아주 절망적인 것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시대의 사고로부터 시작한다면, 하나의 가설이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Ibid., p. 308).

<성경적 반박>

4복음서는 자세하고 충분한 증거들을 제공한다.

사도행전 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확실한 많은 증거들로 보이셨다고 했다. 그런데 증거가 없고 있을 수도 없다고 말하다니! 성경을 꺼꾸로 읽는 자들이다.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인정되셨다’는 말은 ‘확실하게 증거되셨다, 선언되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신성의 당연한 결론이요 확증이었다. 하나님이 죽음 아래 얽매이실 수 있는가? 그는 인성으로는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여 죽으셨지만, 신성으로는 3일 만에 다시 사셨다.

로마서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매우 기초적인 믿음의 내용이다. 이 믿음 없이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될 수 없다.

고린도전서 15:3, 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적 내용 중의 하나이다.

고린도전서 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린도전서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부활을 부정하는 자는 결국 이 세상만이 전부인줄 알고 사는 자가 아닌가?

덧붙여,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승천과 재림의 진리와 관련된다. 그의 부활을 부정하면 그의 승천도, 그의 재림도 부정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부활, 그의 승천, 그의 재림을 사도신경에 고백된대로 믿고 고백한다.

11. 보편 구원론적 경향을 가진다.

바르트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버림을 당하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 . .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죄인에게 심판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심판의 형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이기를 중단치 않는다”(Church Dogmatics, III. ii. 34).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근거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가, 심지어 가장 쓸데 없는 자들, 가장 악하고 불쌍한 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이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이심을 생각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생각 위에서 그를 취급해야 한다”(The Humanity of God, p. 53).

다드

“우리가 참으로 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격과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격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가 무엇과 같음을 참으로 우리에게 보인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그의 사랑이 모든 사람들을 그와의 연합으로 이끄는 길을 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떠나서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다”(The Romans, p. 186).

“후기 서신들에서 교회는 참으로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내면적 필요성에 의해 그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를 포함해야 하며, 화목된 우주의 중심을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다”(The Authority of the Bible, p. 208).

쿨만

“신약에 의하면 기독교적 보편주의가 있다. . . . 그것은 창조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화목된다. 그것은 종말론적 완성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서의 모든 것이신 하나님께 복종된다”(Christ and Time, p. 179).

“하나님의 선택은 모든 인류의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한다”(Salvation in History, p. 160).

“우리는 모든 구원 역사가 처음부터 보편주의적 방향을 띤다는 것을 보았다. ‘돌아가는 노선’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에 이르며, 그 다음엔 전세계에 이른다. 비록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도, 구원 역사는 여전히 선택의 원리에 의존하지만, 이제 선택은 이전보다 더욱, 단순히 구원을 선택된 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구원을 세계에 선포하는 특별한 사명을 위한 선택을 의미한다. 그것이 모든 구원 역사의 길이다. 즉 보편주의는 그것의 목표요, 집중(concentration, 선택을 의미함)은 그것의 실현의 수단이다. 여기에서 그 길은 심지어 비기독교 종교들, 혹은 더 잘 표현하면, 성경 밖의(extra-biblical) 종교들에게도 열려 있다. 왜냐하면 유대교는, 물론, 좁은 의미에서 구원 역사에 속하기 때문이다”(Ibid., p. 310).

판넨베르크

“그의 죽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의 결과, 즉 죄에 대한 형벌을 단지 그의 백성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짊어지셨다. 그를 통하여, 그러나, 하나님이 버리신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극복되었다. 더 이상 아무도 홀로 그리고 소망 없이 죽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그 내용인 새 새명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나타났고, 그 자신이 그 새 생명에 장차 참여하리라는 소망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Jesus--God and Man, p. 269).

“창조적 사랑은 자유로부터 나오며 세상에서의 자유의 긍정과 창조에로 향한다. 만일 인류의 통일이--그것이 역사의 목적인데--어느 날 실상이 된다면, 그것은 이 사랑에 의해 성취될 것이다”(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p. 69, 70).

“물론, 예수님의 죽음의 대리적 효과는 이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아무도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이제부터는 아무도 더 이상 홀로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특별히 죽음에서 그는 예수님의 죽음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간적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 간의 이 교통은 예수님의 죽음의 대리적 의미의 본질적 내용이다”(The Apostles' Creed, p. 89).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7:13, 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서로 전혀 다른 두 개의 궁극적 운명의 상태 및 처소와, 현실적 상황이 언급되어 있다.

누가복음 13:23, 24,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멸망할 자들이 있을 것인가? 예,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악인의 궁극적 운명이다.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하나님은 인생의 악을 미워하시며, 악인에 대해 그 악에 상응하는 최종적 형벌을 예비하셨다.

12. 사람의 영혼 불멸을 부정한다.

니이버

“영혼 불멸이라는 개념이 몸의 부활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선입견은 단지 교회 안에 있는 헬라 사상의 유산에 불과하다”(Beyond Tragedy, p. 290).

틸리히

“인간의 자연적 특질로서의 불멸성은, 비록 그것이 플라톤의 교리일 가능성은 있을지라도, 기독교적 교리는 아니다”(Systematic Theology, II, 66).

“불멸성의 상징이 이 유행하는 미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곳에서, 그것은 기독교에 의해 근본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에의 참여는 ‘죽음너머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의 자연적 특질도 아니다”(Ibid., III, 409).

쿨만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개념[영혼의 불멸]은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들 중의 하나이다”(Immortality of the Soul or Resurrection of the Dead?, p. 15).

<성경적 반박>

영혼 불멸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① 죽음에 대한 묘사(‘영혼이 몸을 떠난다,’ “열조들에게 돌아간다”), ② 죽은 후의 상태에 대한 묘사, ③ 부활에 대한 약속의 말씀들, ④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누가복음 16:19-31, “. . .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 . . .”

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1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한다.

바르트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한 사건 즉 비록 그것이 역사 안에서의(in) 유일한 실제적 사건이지만 역사의(of) 한 실제적 사건이 아닌 사건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역사가들은--물론 그것이 그들의 확신을 파괴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재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니이버

“기독교의 교리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Beyond Tragedy, p. 21).

불트만

“여하튼,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와 같이 그를[예수님을] 신화적 인물로 간주했다. 그들은 그가 세상의 심판자로서 구원과 저주를 내리시려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인자(人子)로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했다. . . . 요한에게는 예수님의 부활, 오순절,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파루시아)은 한 동일한 사건이며,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16, 33).

틸리히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하나의 상징으로 본다(Systematic Theology, II, 163).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24:30, 42,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 . .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의 특징적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친히 외치는 소리와 천사장의 목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데살로니가후서 1:7, 8,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셔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실 때 그러하리니.”

베드로후서 3:3, 4,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14. 사람의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니이버

“몸의 부활 개념은 물론 문자적으로 참될 수 없다”(Beyond Tragedy, p. 290).

판넨베르크

“물론, 이런 식으로 죽은 자들의 부활 개념의 긍정적 타당성을 인식하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또한 그것의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성격에 관해 분명히 이해한다는 조건에서, 가능할 뿐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의 개념을, 사람의 모든 경험으로부터 감추어진 사람의 미래에 대한 일종의 초자연적 지식으로 보는 자에게, 그것은 사람의 경험에서 낯설은 요소로 계속 남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사람의 자기 이해에 있어서의 그의 상황의 표현으로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비유로서의 그것의 독특한 성격에서일 뿐이다”(The Apostles's Creed, p. 104).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요한복음 5:28, 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사도행전 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고린도전서 15:51, 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5. 마지막 심판과 지옥을 부정한다.

니이버

“현대 기독교 안에 있는 감상적 도덕 의식이 아마 심판 개념의 중요성을 일소했을 것이다--비록 문자주의적 정통주의가 그 일소를 정당하게 보지 않았던 것 같지만. 기독교인들이 천국의 가구(家具)나 지옥의 온도에 대한 어떤 지식을 주장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Ibid., p. 294).

틸리히

“보통 사람들은 ‘영원한 정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단어들의 결합이다. . . . 그러므로 ‘영원한 정죄’라는 용어는 신학 용어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 . . 사람은 존재의 기반으로부터 결코 잘리워버리지 않으며, 심지어 정죄의 상태에서도 그러하다”(Systematic Theology, II, 78).

“[천국과 지옥은] 상징들이지 장소들의 묘사가 아니다”(Ibid., III, 418).

판넨베르크

“지옥의 개념은, 수 많은 심판의 그림들에서 묘사된 대로의 그 독특한 특징들에 있어서, 확실히 공상적이다. 이러한 그림들이 지옥의 고통들에 관해 말하는 바는 매우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진정으로 결정적인 특징인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으로부터 제외됨은 끝없는 구덩이의 전통적인 묘사들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 .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에 대한 분명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제외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지옥일 것이다. 지옥이 어디냐 하는 ‘장소’의 문제는, 그러므로, 부적당한 그리고 우리에게 폐지된 사고 방식에서 나온다”(The Apostles' Creed, p. 91).

<성경적 반박>

마태복음 13:39, 40,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추수 때는 마지막 심판의 때이다. 그런데 왜 이 사실을 부정하는가? 마귀가 아니고서야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로마서 2:5-16, “. . .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 . .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자유주의자들이 이렇게 명확한 진리를 부정하다니, 이단이 아니고 무엇인가?

요한계시록 21:11-15,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성경의 최종적 진리는 심판의 진리이다.

16. 성경이 윤리의 규범임을 부정한다.

바르트

“사람은 자유의 은사에 내재(內在)한 명령에 따라 행동할 때 선을 행한다. 그는 그의 자유에 반대되는 법에 복종할 때 악을 행한다. . . .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자유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 지침과 기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자유인은 하나님의 가장 구체적인 명령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이 명령을 통하여 인간의 자유가 권위적 형태를 취하고 인간이 직면하고 측정되는 바 그 명령이 확고하게 되기 때문이다 ”(“The Gift of Freedom: Foundation of Evangelical Ethics,” The Humanity of God, p. 84).

“선과 악의 문제는 결코 사람이 일련의 규범들로서의 하나님의 권위적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대답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선하고 악한 행위들의 법전,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일종의 잣대로서 사람에 의해 발견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부과되지 않는다”(Ibid., p. 85).

본훼퍼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확립된 규범들의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각기 다른 상황마다 새롭고 다른 어떤 것이며, 이 이유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를 늘 새롭게 검토해야 한다”(Ethics, p. 161).

“[하나님의 계명은] 역사적이며 시간적인 것과 대조되는 보편적으로 타당하며 영원한 것이 아니다”(Ibid., p. 244).

<성경적 반박>

성경이 신앙과 생활에 대한 정확 무오한 유일의 규범이라는 진리는 기독교의 기초이다. 이것은 개혁교회와 루터교회와 영국교회 등 만국 교회가 고백하는 기본적 신조이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에덴 동산의 뱀의 주장과 똑같다.

디모데후서 3:16, 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신적 권위의 말씀이요, 온전함의 표준이다.

마태복음 5:18, 19,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구약의 도덕법은 오늘날도 폐지되지 않고 여전히 타당성을 가진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우리의 말로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들을 지키라.” 사도들의 글들은 교회가 지켜야 할 내용들이다.

데살로니가후서 3:6, 14,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우리에게 받은 전통대로 하지 아니하고 무질서하게 행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 . .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주의하며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사도들의 교훈들을 무시하는 것은 교회적 교제를 단절해야 할 악으로 간주되었다. 신구약성경은 우리의 행위의 법칙이다.

5. 오늘날 교회들에 끼친 자유주의 영향들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는 몇몇 신학자들의 문제가 아니고 대교단들의 목사들 상당수의 문제이다. 유럽의 기독교계는 일찌기 배교적이 되었고 미국의 기독교계도 1920년대의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의 논쟁 이후 점점 포용적이게 되었다. 다음의 예들은 자유주의 신학이 오늘날 교회들 안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증거한다.

미국 교회 전반

1967년의 제프리 해든의 설문 조사

1967년, 미국의 사회학자 제프리 해든(Jeffrey Hadden)은 미국의 10000명의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하였는데, 실제로 7441명이 대답해 왔다고 한다. 그 설문 조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는데, 그것은 당시의 미국 교회 목사들이 얼마나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잘 증거한다([워싱톤 대학교의] Trans-Action, 1967년 7-8월호; Christian News, 1969년 3월 3일; 1983년 6월 27일, 5쪽; Pulpit Helps, 1987년 12월호; Christian News, 1987년 11월 23일, 2쪽):

1) ‘귀하는 성경이 신앙과 역사와 세속 문제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감된 무오한 말씀임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87%, 감독교회 성직자들의 95%, 연합 장로교회 성직자들의 82%, 미국 침례교회 성직자들의 67%, 미국 루터교회 성직자들의 77%는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2) ‘귀하는 오늘 세계에 악한 귀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62%, 감독교회의 37%, 연합 장로교회의 47%, 미국 침례교회의 33%, 미국 루터교회의 14%는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3) ‘귀하는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의 60%, 감독교회의 44%, 연합 장로교회의 49%, 미국 침례교회의 34%, 미국 루터교회의 19%는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4) ‘귀하는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의 51%, 감독교회의 30%, 연합 장로교회의 35%, 미국 침례교회의 33%, 미국 루터교회의 13%는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1985년에 시작된 ‘예수 세미나’

1985년 약 125명의 개신교회들과 로마 천주교회의 신학자들이 ‘예수 세미나’를 시작했는데, 그 목적은 예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고 무엇을 말씀하시지 않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 중심 인물은 로버트 펑크인데, 그는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신약학자이며, 에모리 대학교 캔들러 신학부 교수이었고, 그 후 캘리포니아에 웨스타 연구원을 설립하였다. 미국에서 가장 큰 성경학자 협회인 성경문헌협회의 증경회장이기도 하다. 이 세미나의 결과, 1988년에는 예수님의 비유들(The Parables of Jesus)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거기에는 빨강색, 분홍색, 회색, 검정색으로 예수님의 비유들의 역사적 신빙성의 정도가 표시되었다(Robert W. Funk 공저, The Parables of Jesus--Red Letter Edition--A Report of the Jesus' Seminar). 또 1993년에는 오복음서: 예수님이 참으로 말씀하신 것(The Five Gospels: What Did Jesus Really Say)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세미나의 대략적인 결론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성경 연구 혹은 신학이 얼마나 배교적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잘 보인다:

① 예수님의 말씀들의 오직 20%만이 실제로 그의 말씀으로 생각되며,

요한복음에서는 오직 한 구절만 그에게 돌려진다.

② 주기도문도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다.

③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아라고 공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④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과 매우 가깝다고 느꼈지만, 자신을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⑤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결코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

⑥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再臨)을 약속하지 않았다.

⑦ 성경에 묘사된 신화적 의미의 지옥은 없다.

⑧ 예수님은 독신이 아니셨고 독신을 옹호하지도 않으셨다.

(“Did Jesus Say He's Messiah?: Seminar Concludes He Didn't Publicly,” The Charlotte Observer, 1987년 10월 18일, Christian News, 1987년 11월 2일, 24쪽에 실림; “Views of Jesus Seminar Scholars Adopted at Roman Catholic and Protestant Seminaries,” Christian News, 1989년 1월 2일, 1, 21-22쪽; John Dart, “Panel: Jesus Didn't Speak of Second Coming,” Philadelphia Inquirer, 1989년 3월 6일; “Jesus Never Promised Second Coming, Seminar Concludes,” Courier Post , 1989년 3월 7일, Christian Beacon, 1989년 3월 9일에 실림; Christine Wolff, “Seekers of Jesus' Words,” Cincinnati Enquirer, 1989년 10월 1일, Christian News, 1989년 10월 9일, 10쪽에 실림; Gayle White, “Scholars Conclude Jesus Didn't Practice or Advocate Celibacy” , Christian News, 1989년 10월 9일, 1, 10쪽; “The ‘Jesus Seminar' Strikes Out Again,” Cal- vary Contender, 1991년 5월 1일; Time, 1994년 1월 10일; St. Louis Post Dispatch, 1994년 1월 8일; "Jesus Seminar Publishes New 'Bible,'" Christian News, 1994년 1월 17일, 1, 20-22쪽.)

‘중성’(中性) 성경 번역에 대해

1999년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WCF)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1999년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의 대의원들인 우리는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지 않는 단성(單性) 언어 번역들 성경을 만들어 내려는 국제 성서 공회(International Bible Society)와 새 국제역 성경 번역 위원회와 및 존더반 출판사의 최근의 노력들을 반대하고 비평함에 있어서 연합한다. 우리는, 영감된 성경 본문에 있는 성이 구별된 명사들과 대명사들을 현대 번역들에서 중성 단어들로 고의적으로 대치하는 것은 성경의 축자(逐字) 영감에 대한 성경 자체의 교훈에 모순되며 결국 하나님의 무오(無誤)한 말씀의 거룩한 본문에 대한 더러운 위조에 불과하다고 판단한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8월 1일.)

하버드 대학교

1636년 목사들을 위한 양성 학교로 설립된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는 일찍부터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일위신론자의 손에 넘어갔었다. 그러나 오늘날 하버드 대학교는 130억달러의 기금과 16억달러의 연간 수입을 가진 미국 고등 교육의 우상이 되었다. 학교에 출석하는 18,000명의 학생들 가운데, 학부 학생들은 매년 수험료와 기타 경비로 무거운 32,000달러의 금액을 낸다(World, 1999년 10월 9일). 낙태 찬성, 반(反)군국주의, 인종 편애, 과격한 남녀평등주의, 종교적 상대주의 등의 자유주의적 입장들은 캠퍼스에서 복음으로 간주된다. 천주교 신부가 부장인 하버드 대학교의 신학부는 자유주의와 개방적 마음가짐, 다양성(그러나 위의 문제들에 있어서는 다양성이 없다!), 그리고 정치적 정확성 등을 자랑한다. 기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 편견은 하버드 대학교에 퍼져있다고 한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11월 15일.)

마틴 루터 킹을 추앙함

전 미국연방수사국(FBI) 국장 제이 에드가 후버는 마틴 루터 킹을 “우리 나라에서 가장 악한 거짓말장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킹은 미국에서 그를 기념하는 공휴일이 지정될 정도로 영예를 얻었고 천주교회에서는 신앙을 위한 순교자로 선포될 후보자까지 되었다(Huntsville Times, 2000년 1월 14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투투 대주교는 1999년 12월 세계교회협의회 모임에서 마틴 루터 킹에게 찬사를 돌렸다. 그러나 크리스챤 뉴스 2000년 1월 3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실렸다: “킹이 공산당과의 의식적 협력자이었고 표절에 의해 그의 철학박사 학위를 얻은 거짓말장이요 . . . 간음을 행하는 자이었고 . . . 미국의 적국에게 원조와 위안을 준 반역자라는 것 등은, 수많은 사실들에 의해 의심 없이 확증된다. . . . 그는 예수님의 참된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는 신학교 출신이며 역사적 기독교를 믿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친구에게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임을 말했다. 마이클 다이슨은 그의 새로 쓴 책 나는 당신을 거기에서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의 참된 면모(I May Never Get You There: The True Martin Luther King Jr.)에서 위의 사실들 중의 일부를 확증하고[표절자, 간음자 등] 킹이 죽을 무렵에는 미국의 불평등의 해답이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에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Huntsville Times, 2000년 1월 17일). (Calvary Contender, 2000년 1월 15일.)

‘위대한’ 설교자들 목록

설교(Preaching)지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들을 열거하면서 빌리 그레이엄과 마틴 루터 킹을 처음 10명 중에 두었다(Christian News, 1999년 12월 20일). 그 목록은 또한 스코틀랜드 설교자 제임스 스튜어트, 죠지 버트릭, 해리 에머슨 포스딕, 지 캠벨 모건, 윌리엄 생스터, 죤 알 더블류 스토트, 마틴 로이드-죤즈, 및 클레어런스 매카트니 등을 포함한다. 두번째 10명은 레슬리 위더헤드, 죠지 트루에트, 알 쥐 리, 노만 빈센트 피일, 피터 마솰, 이 스탠리 죤스, 도날드 그레이 반하우스, 랠프 사크맨, 더블류 에이 크리스웰, 및 가드너 테일러이었다. (Calvary Contender, 2000년 1월 15일.) 그러나 마틴 루터 킹, 해리 에머슨 포스딕, 노만 빈센트 피일 등은 정통 기독교와 거리가 먼 사상을 가진 자들이다.

미 합중국 장로교회(PCUSA)

1923년, ‘어번 선언서’

1923년 미 북장로교회[지금의 미 합중국 장로교회] 안에서 어번 선언서(Auburn Affirmation)라는 것이 작성되었고 곧 1293명의 목사들의 서명을 받았다. 그 내용은, 총회가 1910년에 선언하고 1916년, 1923년에 재확인한 내용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총회가 1910년에 선언한 내용이란 다음의 다섯 가지 교리들이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본질적이라는 것이었는데, 첫째는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이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이며, 셋째는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이며, 넷째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이며, 다섯째는 그리스도의 기적들의 사실성이다. 어번 선언서는 이상의 다섯 가지 교리들을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본질적이지 않고 단지 이론들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성경 무오성의 교리는 성경 숭배에 빠지기 쉬운 교리라고 주장했다.

1967년 신앙고백

1967년, 미 연합장로교회(지금의 미합중국 장로교회)는 전통적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이탈하는 소위 ‘1967년 신앙고백’을 채택했는데, 그 고백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갖고 있다(“1967년 신앙고백,” 미국 연합장로교회 헌법 제1부: 신앙고백집,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부 발행 <1968년>, 251-265쪽; 킥, 띠 깐지, 헨리 공저, 1967년 신앙고백서 비판, 임택권 역 <1967년> 참조).

1) 성경의 초시간적 진리성을 부정한다

1967년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나님의 유일 충족한 계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다. 그에 대하여 성령은 성경을 통하여 유일하고 권위 있는 증거를 한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락되고 복종을 받는다. 성경은 다른 여러 증거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비길 데가 없는 증거이다. . . . 성경은 성령의 인도 아래서 주어진 것이지만 역시 사람들의 말이며, 그것들이 기록된 장소와 시대의 언어, 사상 형식, 문학 형태들의 지배를 받는다. 성경은 그 당시에 유행하던 인생관, 역사관, 우주관을 반영한다”(1. 3. 2).

2) 타종교들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취한다

1967년 신앙고백서는 진술하기를, “그리스도인은 타종교들과 자신의 종교 간의 비슷한 점들을 발견하며, 모든 종교들에 대해 열린 마음과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반복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갱신을 도전하시기 위해 비기독교인들의 통찰력을 사용하셨다”라고 했다(2. 1. 3).

3) 속죄의 교리를 한 이론으로 돌린다

1967년 신앙고백서는 진술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화목의 행위는 성경이 여러 가지 방식들로 묘사하는 한 신비이다. 그것은 어린양의 제사, 목자가 양을 위해 목숨을 주심, 제사장의 속죄로 불리우며, 또한 종의 속전(贖錢), 빚의 지불, 법적 형벌의 대리적 만족, 그리고 악의 세력들에 대한 승리로 불리운다. 이것들은 모든 이론의 범위를 넘어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 속에 머무는 한 진리의 표현들이다”라고 했다(1. 1. 1.).

4) 화목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보인다

1967년 신앙고백서는 말하기를,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은 그의 화목케 하시는 공동체로서 세상 속에 보내지는 것이다. 이 공동체 곧 세계적 교회는 하나님의 화목의 메시지를 위탁받았으며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키는 적의(敵意)를 고치시려는 하나님의 수고에 참여한다”라고 했다(2. 1. 1).

이 진술은, 사람과 사람 간의 화목이라는 개념으로 하나님과 인간 간의 화목이라는 성경적 개념을 혼란시키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이 넓어진 화목 개념은 많은 문제들을 일으킨다. 그래서 그 신앙고백서는 교회의 사명이 이러한 화목의 사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말한다.

그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교회의 회원들은 화평의 밀사(密使)들이며 정치, 문화, 경제면에서 세력 있는 자들이나 집권자들과 협력하여 인간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바로 이 세력들이 인간의 안녕을 위태롭게 하는 경우에는 가장(假裝)과 부정(不正)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1. 3. 1). “인간을 향한 그의[그리스도의] 봉사는 교회가 모든 형태의 인간 복리를 위하여 일할 것을 위탁한다. 그의 수난은 교회가 인류의 모든 고통에 대해서 민감하여 각종 궁핍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도록 만든다”(2. 1. 1). “교회는 모든 민족 차별의 폐지를 위하여 노력하며 그것으로 인해서 상해를 받은 자들을 위하여 봉사한다”(2. 1. 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 사업은 인간 생활 전체 곧 사회와 문화, 경제와 정치, 과학과 기술, 개인과 단체, 전부를 포괄한다”(3. 1. 1).

이 뿐만 아니라, 미 연합 장로교회는 목사의 임직 서약도 변경하였다. 변경된 임직 서약에서는, 성경이 더 이상 신앙과 행위의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선언되지 않았고,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 소요리문답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 지도 아래 행한다고 선언되었다. 1965년 5월 17일자 자유주의 잡지 크리스챠니티 앤드 크라이시스(Christianity and Crisis)는 말하기를, ‘새 신앙고백서는 1924년 어번 선언서의 교리적 노선으로 내려간다. 40년 전에 겨우 허용되었던 소수파의 견해가 이제는 교회의 공식적 교리로 제안되고 있다’고 했다(Carl McIntire, The Death of a Church <1967>, p. 129).

1981년, 케이스맨 목사 사건

1981년 미 연합 장로교회(오늘날의 미 합중국 장로교회) 총회 상설재판국은, 그 총회에서 봉사하던 연합 그리스도교회(UCC) 소속 맨스필드 케이스맨(Mansfield M. Kaseman)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무죄성, 대리적 속죄, 육체적 부활을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판결하기를, 지노회가 케이스맨의 견해를 새 임직 서약에 의해 허용된 ‘용납할 만한 해석의 범위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함에 있어서 옳았다고 했다(Time, 1981년 2월 16일; Christian News, 1983년 6월 27일, 5쪽; James R. Mook, "The Validity of the Kaseman Case Verdicts in the Confessional/ Subscriptional Context of the United Presbyter- ian Church in the U.S.A.," [Th.D. dissertation, Dallas Theolo- gical Seminary, 1985]). 이 사건은 미연합장로교회가 이단을 권징하고 제거할 의지가 없음을 증거한 사건이었다. 이것이 교회의 배교가 아니고 무엇인가?

2000년, 자유주의 신학자 몰트만에게 수상함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루이즈빌 장로교 신학교와 루이즈빌 대학교가 수여하는 2000년 루이즈빌 그로메이어 상과 상금 20만불을 받았다(Christian News, 1999년 12월 27일).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3년 1월 11일자는 그를 “금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불렀다. 그러나 크리스챤 뉴스 1993년 1월 23일자에는 몰트만이 삼위일체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거절하고 마르크스주의적 해방의 신학을 위해 문을 연다고 말했다. (Calvary Contender, 2000년 1월 15일.)

미국 연합 감리교회(UMC)

자유주의자들로 인한 보수주의자들의 고통

미국 연합감리교회는 오래 전부터 자유주의적이었다. 최근의 한 예로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글라이드 기념 연합감리교회의 목사 시실 윌리암즈(Cecil Williams)는 자기의 정박소는 ‘해방의 신학’이라고 말했다. 해방의 신학이란 민중들을 정치적, 경제적 억압과 착취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구원이요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일파이다. 그는 말하기를, “규칙들과 교리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라고 했다.

미국의 감리교회의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더 이상 연합감리교회의 회원으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월드(World)지 1998년 7월 25일자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다: “신자들은 신앙의 기본적 사실들을 긍정하지 않는 자들과 영적 동반자들일 수 없다,” “우리는 본교단에서 연합될 수 없는 두 개의 다른 믿음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분열에 대한 존 웨슬리의 다음과 같은 말도 인용되어 있다: “불경건과 배교가 우세한 교회들 안에서, 분열의 악은 교회 안에 머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자들에게 있다.” (Calvary Con- tender, 1998년 8월 15일.)

미국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UCC)

도날드 블뢰쉬 박사의 증거

미국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래 전부터 미국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교단이다. 그 교단의 듀부크 신학교(Dubuque Seminary) 신학교수 도날드 블뢰쉬(Donald Bloesch) 박사는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는 유니테리안[일위신론적] 교회가 된 캐나다 연합교회(UCC)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 교회는 삼위일체의 삼위를 구별된 존재보다 비유로 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블뢰쉬는 성경적 증거 협의회(Biblical Witness Fellowship)의 간행물인 위트니스(The Witness) 1996년 겨울호에 실린 한 대담에서 “유니테리안들은 이단종파가 되고 있다. 유니테리안들과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 사이에는 많은 연관성이 있다. 유니테리안으로의 표류, 즉 하나님을 양성적(兩性的) 혹은 자웅 동체적(雌雄同體的)으로 보려는 강한 경향은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의 중심적 특징들 중의 하나이다”라고 덧붙여 말했다.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아마 가장 널리 알려졌고 읽혀지는 자라고 위트니스가 말하는 블뢰쉬는 주장하기를,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는 유니테리안 사상으로 표류하고 있다. 이 교단은 이미 만인구원론적이다. 천국과 지옥, 구원과 멸망 같은 구별들은 이미 상실되었다. 유니테리안들과의 통합을 실제로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한다(Christian News, 1996년 2월 12일, 1, 14쪽).

미국 감독 교회(ECA)

미국 감독교회(혹은 성공회)는 1995년에 7,415교회, 세례교인 158만명인 대교단인데, 그 교단도 역시 매우 자유주의적이다.

죤 쉘비 스퐁 주교의 무신론

미국 감독교회 소속 죤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 주교는 인격적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Christian News, 1998년 7월 13일). 그는 역사적 사건들로서의 예수님의 기적들, 동정녀 탄생, 부활, 그리고 승천을 부정한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자기 아들의 희생을 요구한 신을 예배하기보다 혐오할 것이다”라고 했다(Christianity Today, 1998년 6월 15일). (Calvary Contender, 1998년 8월 15일.)

그는 “만일 모든 사람이 구속(救贖)함을 얻지 못한다면 아무도 완전히 구속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 보편구원론자이다. 1999년 4월 26일자 뉴 아메리칸(New American)지에 의하면, “스퐁의 판단에는, 기독교가 생존하려면 기독교는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성육신(成肉身),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그리고 기적들과 같은 교리들을 치워버려야 한다. 더욱이, 기독교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인식을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스퐁의 말로 표현하자면 그러한 생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관 안에서 조성된 것이며’ ‘지식의 팽창으로 낡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바울 사도를 동성연애자라고 불렀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5월 15일.)

그는 2000년 1월 29일 은퇴하였으나 그 후 몇 달 동안 하버드 대학교에서 강의하였다. 그는 천국과 지옥, 영원한 형벌과 보상에 대한 ‘옛 견해’를 버린다. 그는 마리아의 동정녀성과 예수님의 부활을 헐뜯었고, 모든 도덕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단언했고, 기도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했다(Huntsville Times, 2000년 1월 29일). 그는 미국에서 최초로 공공연한 동성애 신부에게 안수하였다. (Calvary Contender, 2000년 2월 15일.)

그는 심지어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간주한다. 그는 거의 모든 기독교 교리를 거부한다(Christian News, 2000년 2월 7일). 그는 말하기를, “나는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어린 소녀들을 죽이려 한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또한 그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 한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그는 ‘동성애자들’을 벽 속에 가두고 여자들을 신부직에서 제외하는 교회에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뉴저지주의 Daily Record, 2000년 1월 27일). 그의 후임자인 북 뉴저지주의 주교는 죤 크로운버거(John Croneberger)이다. 크로운버거는 조용히 싸우지만, 스퐁과 같은 많은 싸움을 싸웠다(뉴저지주의 Star-Ledger, 2000년 1월 30일). 그의 교회는 1990년 ‘남자 동성애자’인 한 신부의 임직식을 거행하였다. (Calvary Contender, 2000년 3월 1일.)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

신학자 마틴 마티

루터파 자유주의자 마틴 마티(Martin Marty)는 그가 편집인으로 있는 크리스천 센추리(Christian Century)지 1999년 4월 7일자에 “나는 성경을 포함한 아무 책도 무오하지 않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Christina News, 1999년 4월 12일). 그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의 교리를 포함하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오래 전부터 부정해왔다. 그런데 그는 1992년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NAE)의 연사이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5월 15일.)

필립 헤프너 교수의 불신앙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단(ELCA)의 교수 필립 헤프너(Philip Hefner)는 뉴스위크 2000년 5월 1일자의 한 면 전체에서 “왜 나는 기적들을 믿지 않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헤프너는, “나는 정말 어떤 관습적인 의미로도 기적들을 믿을 수 없고, 오직 복(福)들을 믿는다. 그것들은 매일 일어난다”고 글을 끝맺는다. 그는 미국 시카고에 있는 루터파 신학교(Lutheran School of Theology)의 조직신학 교수이며 자이곤 종교-과학 연구소장이다. 그는 오래 전부터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공격해왔다. “기적 이야기들--신앙에 대한 증언인가 신빙성의 세대 단절(credibility gap)인가”라는 그의 글은 루터파 신학교의 컨텍스트(Context)지 1968년 봄-여름호에 실렸었다. 이런 상황이지만,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단의 임원들은 인간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포함하여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교단의 교수들에 대해 어떤 권징적 조치를 취하기를 오래 전부터 거절해왔다. (Christian News, 2000년 5월 22일, 1, 5쪽.)

미국 남 침례교회(SBC)

1976년, 노엘 홀리필드(Noel W. Hollyfield)의 신학석사 논문

1976년 미국 남침례교 신학교 학생 노엘 홀리필드는 그의 신학석사(Th.M.) 논문에서 남침례교 신학교 학생들의 신앙적 상태를 알 수 있는 한 설문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의 논문 제목은 “남침례교 신학교의 선정된 학생들 가운데서의 ‘기독교 정통성’의 정도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Sociological Analysis of the Degrees of ‘Christian Ortho- doxy’ among Selected Students in the Southern Baptist Theo- logical Seminary)이었다. 미국 켄터키주 루이스빌에 있는 남침례교 신학교는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의 신학교이다. 그 교단은 세계에서 제일 큰 교단으로서 세계교회협의회(WCC)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은 비교적 보수적이라고 알려져 있던 교단이다. 그러나 홀리필드의 설문 조사는 미국 교회들의 배교가 남침례교회에까지도 미쳤음을 보인다(David O. Beale, S.B.C.: House on the Sand? <1985>, pp. 44-46):

M.Div. M.Div. Th.M.

1학년 3학년 & Ph.D.

-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없이 믿는다. 74% 65% 63%

- 마귀의 실제적 존재는 확실하다. 66% 42% 37%

- 기적들이 성경의 증거대로 실제로 일어났음을 믿는다. 61% 40% 37%

-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은 확실하다. 66% 33% 32%

-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셨음은 확실하다. 59% 44% 22%

- 예수께서 신적인 하나님 아들임을 의심치 않는다. 87% 63% 63%

-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은 구원에 절대필수적이다. 85% 60% 59%

- 성경을 하나님의 진리로 믿는 것은 구원에 절대 필수적이다. 42% 33% 21%

- 죽음 너머의 삶이 있음은 확실하다. 89% 67% 53%

- 예수께서 어느날 실제로 땅에 돌아오실 것을 확신한다. 79% 56% 53%

협동 침례교 협의회(CBF)

남침례교회 신학교 부학장인 대니얼 에이킨(Daniel Akin)은, 1998년 11월 앨러배머주 남침례교인들에게 한 연설에서, 미주리의 보수적 남침례교인들이 온건파/자유파 협동 침례교 협의회(CBF)를 비판하며 준비한 비난 내용들의 목록으로부터 “그들[CBF]은 급진적 견해들을 가진 사람들을 관용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장막을 너무 크게 만들고 있다”는 내용을 읽었다(Alabama Baptist, 1998년 11월 26일). 에이킨은 협동 침례교 협의회에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그의 제사적 죽음의 필요성과 처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지도자들이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말하기를, 어떤 협동 침례교 협의회 지도자들은 낙태와 동성애에 관한 자유주의적 견해들을 취하고 있다고 했다. 버지니아와 텍사스주들에서의 남침례교인들 간의 갈등은 보수주의자들로 하여금 대체할 새로운 주(州) 대회들을 설립하게 하였다. 그러나 앨러배머주 보수주의자들은 대회의 새 지명자들을 인준했고 협동 침례교 협의회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12월 15일.)

남 침례교단과 협력 침례교 협회

(버지니아주 남침례교회들의) 뱁티스트 배너(Baptist Banner) 1월호는 남침례교단과 협력 침례교 협회(Cooperative Baptist Fellow- ship)(교단 내의 자유주의/온건 이탈파) 간의 몇 가지 ‘대조되는 점들’을 열거하였다. 그것에 의하면, 협력 침례교 협회(CBF)에는 다음과 같은 이들이 소속되어 있다: (1)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그의 제사적 죽음의 필요성, 혹은 그의 동정녀 탄생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지도자들, (2) ‘그리스도-소피아(Sophia)’(그리스도의 여성화를 주장)에 대한 예배를 요구하는 여권주의 신학 지도자들, (3) 남녀 동성애자, 양성애자(兩性愛者, bi-sexual), 성(性)전환자들(transgendered)의 안수를 요구하는 지도자들, (4) 하나님께서 때때로 여자에게 인구 억제의 목적을 위해 아이를 낙태시키라고 명령하신다고 선언하는 지도자들, (5) 낙태를 위한 연방 정부의 기금이나, 부모의 승락과 동의가 필요하다는 법의 폐기를 옹호하는 지도자들, (6) 성경이 모든 형태의 동성애적 행위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포하는 지도자들, (7) 여성을 담임 목사로 안수하기를 요구하는 지도자들, (8) 펜트하우스(음란물 출판사), 전국 남녀 동성애자 전문위원회, 가족계획 협회와 연합하여 활동했던 지도자들, (9)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지도자들, (10) 성경적 학문이 침례교인들과 무신론적 ‘세속 인본주의자들’ 간의 공통적 기반의 영역이라고 진술하는 선언서에 서명한 지도자들, (11) 동성애자들이나 양성애자들에게 특별한 일자리의 보호를 제공하는 고용-비차별 법령과 같은 입법활동을 위하여 일한 지도자들. . . . 그 글은 한걸음 더 나아가 말하기를 협력 침례교 협회(CBF)는 현재 동성애 활동을 하는 자들을 안수하는 교회들을 포함하고, 지도자들이 상황적 낙태 지지를 공공연히 선언한 기관들과 협력하고, 동성애를 환영 혹은 주장하는 교회들에게 지난해 모든 ‘선교 지원금들’을 제공한 단체와 협력하고, 핵심 지도자가 어린이들을 사용한 음란물의 복제와 판매를 옹호한 단체와 협력한다고 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3월 1일.)

머서(Mercer) 대학교

머서 대학교는 미국 남침례교단에 소속한 학교로서 미국의 보수침례교협의회(Conservative Baptist Fellowship)의 재정지원을 받고 있다. 그런데 머서 대학교 총장 커비 갓세이(Kirby Godsey)는 한 책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 예수는 죽으실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하고, 동정녀 탄생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버리고, 회개와 예수님 영접이 ‘구원의 근거’임을 거부하고, “교리적 건전함이란 교만한 신학적 난센스[터무니 없는 생각]이다”고 주장하였다(Baptist Banner, 2000년 1월호). (Calvary Contender, 2000년 2월 15일.)

또 머서 대학교 신약과 설교학 교수 폴 듀크(Paul Duke)는 “동성애(同性愛)와 교회”라는 제목의 1994년 협동 침례교 협의회(남침례교단의 자유파)의 총회전 학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은 우리의 최종적 권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날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에 그것을 가지고 가지 않을 것이다. . . . 동성애는 성경의 주된 관심이 아니다. . . . 나는 성경이 모든 형태의 동성애 행위를 정죄한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없다.” 듀크는 동성애적 짝들의 결합에 대한 자신의 ‘넓은 후원’을 긍정하였으나, 자신의 개인적 취향은 이성애적(異性愛的) 짝들이라고 주를 붙였다(Calvary Contender, 1999년 6월 1일).

캐나다 교회들

캐나다 연합교회의 총회장 빌 핍스 목사의 자유주의 사상

교인 300만을 가지고 있는 캐나다 최대의 개신교단인 캐나다 연합교회(UCC)의 총회장 빌 핍스(Bill Phipps) 목사는 1997년 10월 24일자 오타와 시티즌(Ottawa Citizen)지와의 대담에서 “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셨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했고, 천국과 지옥의 성격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나는 지옥이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나는 예수께서 지옥에 대하여 그렇게 관심을 가지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여기 땅 위의 삶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셨다. . . . 천국이 장소인가? 나는 모르겠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나는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지 않는다. 나는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과학적 사실로 믿지 않는다. 나는 그런 일들이 발생했는지 어떤지 모른다. 그것은 부적절한 문제다”고 했다. 그는 후에 자신의 사상에 대하여 첨가하여 말하기를, “예수께서 신적이시지 않다는 노골적인 진술은 잘못된 인상을 준다. 나는, 우리가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본질을 볼 수 있는 만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하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본질의 전체적 개념은 예수님에게서 표현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넓고 더 신비하고 더 거룩하다”고 하였다.

그의 발언은 한 달 이상 교단내 자유주의 진영과 보수주의 진영 사이에 논쟁을 일으켰다. 논쟁이 가열되자 85명의 교단 집행위원들은, “캐나다 연합교회는 개인의 신앙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을 전통으로 삼고 있으며, 따라서 총회장의 개인적 신앙고백을 존중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캐나다 연합교회의 신학적 노선과 총회장 신임을 재확인했다. (기독신문, 1997년 12월 3일, 16쪽; Christian News, 1997년 12월 8일, 1, 12쪽.)

배교적인 클라크 피나크(Clark Pinnock)

캐나다의 맥매스터(McMaster) 신학교의 신학 교수 클라크 피나크는 배교자라고 불리웠는데(Calvary Contender, 1992년 4월 15일) 아마 정당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1960년대에 그는 남침례교단 소속 뉴올리언즈 침례교 신학교의 보수적 교수이었으나,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성경 영감과 지옥의 본질 같은 교리들에 대해 매우 비(非)정통적인 이해에 도달한 변화를 겪었다. 그는 최근의 복음주의 신학회(ETS)에서의 논문에서 종말 사건들에 대한 ‘더 포용적인’ 복음주의 이해를 요청했는데, 거기에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포함한다(Baptist Banner, 2000년 1월호).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하나 이상의 언약과 하나 이상의 백성을 가지고 계신다”라고 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는 다양한 길들’에 대해 말했고, 많은 이방인들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다고 말했다.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을 거절하면서,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심판의 표준은 개인이 “다른 이들의 봉사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생활 방식에 참여함”이라고 했다. (Calvary Contender, 2000년 2월 15일.)

피나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아무리 그의 피조물들이 죄악될지라도 그들에게 영원한 고통을 부과하는 그런 잔인하고 보복적인 신을 고안할 수 있을까?” 그는 말하기를, 그러한 일을 하는 하나님은 “하나님보다는 사탄에 더 가깝다”고 하였다. 한편 복음주의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도 지옥의 불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복음주의 지도자 죤 스토트도 성경적 비유로 불의 주된 기능은 멸망시키는 것이며, 지옥의 불이 영원하고 꺼지지 않을지라도 “만일 거기에 던져진 것이 멸망치 않는다고 판명된다면 매우 이상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된 지옥은 영원한 불의 고통이 있는 실제적 장소이다. (Calvary Con- tender, 2000년 2월 15일.)

영국 교회(성공회)

1984년, 런던 주말 텔레비젼의 보도

1984년 런던 주말 텔레비젼의 ‘크리도우(Credo, 신조)’ 프로그램은 영국교회(성공회) 39명의 주교들 중 31명에게 질문한 결과를 보도했는데, 그것은 영국교회의 배교적 상황을 단적으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한다(Daily Telegraph, June 25, 1984; The Revivalist, July/ August 1984, p. 13):

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으로 간주해야 한다(11명), 하나님의 최고 대리자로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19명).

② 신약성경의 기적들은 후대의 삽입이다(15명).

③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가 그들 가운데 살아계신다”고 확신시켰던, 예수님 죽음 후의 ‘일련의 경험들’이다(9명).

지옥에 대한 견해

영국 교회의 교리위원회가 준비한 “구원의 신비”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많은 전통적 입장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옥의 교리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과거에는 지옥불과 영원한 고통과 형벌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 사람들을 두렵게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가학적(加虐的) 괴물로 만든 두려운 신학들을 고백했다. . . . 지옥은 영원한 고통이 아니고, 하나님께 대해 아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의 최종적이고 취소할 수 없는 선택 . . . 즉 유일한 종말은 완전한 비(非)존재이다”(Chris- tian News, 1996년 2월 12일, 15쪽).

캔터베리 대주교의 불신앙

영국 교회의 머리인 캔터베리 대주교 죠지 캐리(George Carey)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달리,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부활하셨다는 것을 똑같이 확실하게 알 수 없다. . . . 우리는 그가 다시 사셨다는 것을 알 수 없다”(WITW). (Calvary Contender, 2000년 3월 1일.)

한국 교회들(전반)

몸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

문익환 목사, “사도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에 실존적으로 동참함으로 주의 부활에도 동참한다고 믿었다. . . . 고린도전서 15장의 내용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부활한 몸에 관한 호기심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겨둔다고 해서 손해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함으로 믿는 자가 전인적인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죽음에 대한 성서의 물음과 대답,” 기독교 강좌 <대한기독교서회>, 제1권, 138쪽; 한종희,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는 신학자들,” 기독신보, 1991년 3월 30일, 9쪽).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현재적 의미와 미래적 의미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의 부활은 현재 구원받은 우리에게 새 새명을 주는 원동력이지만, 또한 그것은 미래의 우리의 부활의 첫열매이다.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는다. 그러므로 문 목사의 이런 혼동스런 생각은 혼란만을 남긴다. 그는 예수님의 역사적 부활 사실에 대해 분명한 언급을 했어야 했다.

조향록 목사,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그 사건 자체를 사건적으로 입증하든지 부정하든지 하는 논란은 큰 의미를 거두지 못한다. . . . 문제는 이 사건을 받아들이는 수용 자세에 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리스도 부활 사건은 신앙의 창문을 열고야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기는 하나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요 대상이 된다. 신앙은 그 신앙의 대상이 되는 문제나 사건이 신앙하는 자에게 의미적으로 받아지는 것이다”(“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 주간 조선, 1976년 4월 26일; 한종희, 같은 글).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입증하지 못하는 것이 어떻게 큰 문제가 아닌가? 또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단순히 신앙의 문제로만 돌리고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큰 오류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며 인식의 대상인 동시에 우리의 신앙의 문제인 것이다.

허 혁 교수, “그러므로 저는 성서에 부활의 사실을 가지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부활의 보도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 . . 이것을 학자들은 신앙의 표현이라고 하더군요. . . . 그것은 신앙을 사건으로 보는 입장이지요. . . . 저는 내가 믿는다는 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좋지 않느냐 하는 생각입니다”(허혁, “부활 사실과 부활 신앙,” 기독교 사상, 1973년 4월호; 한종희, 같은 글).

그러나 부활의 사실과 부활의 보도를 구별하는 배면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의심이 있어 보인다. 또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말하지 않고 그 대신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 사건을 말하는 것도 역시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한 확실한 긍정을 보류하는 회의적 태도일 뿐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성을 명확히 인정하지 않고 애매하게 표현하며 단지 그 의미성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불신앙이다.

김동수 목사와 박봉랑 교수는 1973년 부활절 메시지에서 한국교회가 인간의 영혼불멸 사상을 지니고 있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부활은 2천년 전의 골고다의 예수의 부활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오늘 이곳 한국 땅에서 날마다 사는 부활의 승리에서 영광을 되찾는 것이라고 말하였다(크리스챤 신문, 1973년 4월 21일; 한종희, 같은 글).

그러나 역시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의 의미를 무시하고 현재적 부활의 의미만을 붙들려고 하는 태도는 불신앙과 회의주의적 맛을 남길 뿐이다.

박대선 감독의 불신앙적 신앙 사상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박대선 감독은 1974년 6월 14일 고(故) 홍종철 특별보좌관 장례식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죽지 않고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분이 두 분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은 에녹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엘리야이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에녹이나 엘리야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육신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서의 기록을 생각해 볼 때 이 세상에서 불의를 모르고 가장 뛰어나게 의롭게 살다가 죽은 에녹과 엘리야의 사랑하던 제자들과 가족들과 친지들이 에녹과 엘리야의 죽음을 결코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하던 에녹과 엘리야의 이미지가 너무나 생생하게 그리고 강하게 그들에게 심어졌기에 도저히 죽었다고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선생이 그들과 같이 앉아서 말씀을 하시는 것만 같고 길을 걸어갈 때도 같이 걸어가는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켰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이 죽지 않고 산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박하게 기록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친필 원고에서 인용함).

김경수 목사의 자유주의 신학 사상

제주 남부교회 김경수 목사는 폴 틸리히의 조직신학(3권)을 번역한 후 다음과 같이 썼다: “신학적으로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신학자는 김재준, 칼 바르트, 폴 틸리히라고 할 수 있다. . . .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의 조직신학 교수는 폴 틸리히의 신봉자였고, 그는 폴 틸리히를 빼 놓으면 신학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틸리히 신학에 빠져 있었다. 내가 폴 틸리히에게 몰두하게 된 것도 그의 덕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폴 틸리히는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마음을 빼앗곤 했고 공감을 일으켰다”(교회연합신보, 1986년 8월 17일).

기독교 대한 감리회(기감)

1992년 5월 7일 기독교 대한 감리회 서울 연회 재판위원회는 당시 감신대학 학장인 변선환 학장과 동대학 조직신학 교수인 홍정수 교수에게 출교를 선고했었다. 그들의 사상은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적 예가 될 것이다. 기독교 연합신문 1992년 5월 17일자(6쪽)에 실린 “변선환, 홍정수 교수 재판 판결문”과 기타 신문들에 실린 성명서들이나 보고서들에 의하면, 변선환 교수와 홍정수 교수는 다음과 같은 이단적 사상들을 발표하였다.

변선환 학장의 자유주의 사상

변선환 교수의 경우, 그는 특히 기독교의 유일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의 길 되심을 부정하였다. 그는 기독교 사상이라는 정기간행물에 기고한 글에서 “그리스도만이 보편적으로 유일한 구속자이신 것이 아니라”고 말했고, 또 “저들의 종교[타종교들]도 그들 스스로의 구원의 길을 알고 있다”고 하였다(299호, 155쪽). 심지어 그는 “그리스도는 힌두교 안에 있다”고 주장하였다(같은 책, 156쪽). 또 그는 크리스챤 신문 1990년 12월 8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기독교 밖에 구원이 없다는 교리는 신학적인 토리미의 천동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고 또 “종교의 우주는 기독교도 다른 종교도 아니고 신을 중심하여서 돌고 있다는 것을 기독교는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또 “예수님을 절대화, 우상화시키며, 다른 종교적 인물을 능가하는 일종의 제의의 인물로 보려는 기독교 도그마에서 벗어나 . . . 신 중심주의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비평할 가치조차 없는 이단이다. 성경은 기독교의 유일성을 밝히 증거한다(출 20:3; 요 14:6; 딤전 2:5).

홍정수 교수의 자유주의 사상

홍정수 교수의 경우,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정하는 무신론적 발언을 하였다. 그는 그의 저서 베짜는 하나님에서 “신 없는 종교를 알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그리고 무신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종교까지는 몰라도 꼭 신을,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 . . 만일 신은 계신가하고 누가 묻는다면 ‘신은 없다’고 잘라 말할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52, 56쪽). 이것은 명백히 이단이다.

둘째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적 죽음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한 정기 간행물에 기고한 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신의 아들의 죽음이 아니다”고 했고 또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속량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우리를 속량하는 것이다”고 하였다(한 몸, 7권, 16, 17쪽). 또 그는 그의 저서에서도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아니라 특정한 메세지를 전하고 있던 한 설교자의 죽음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고 말했다(베짜는 하나님, 190쪽). 이것은 명백히 예수님의 신성과 대속 사역을 부정하는 이단이다.

셋째로, 그는 골고다 산상에서의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광주 망월동 민주 항쟁으로 죽은 많은 민주 인사들의 죽음을 동일시하였다. 그는 그의 책에서 말하기를, “예수라는 설교자의 죽음은 억울한 희생이 아니라 ‘말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서의 선택된 죽음이다. 이런 현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구호를 외치면서 투신 또는 분신해 쓰러져 간 젊은이들의 죽음과 매우 유사하다”(베짜는 하나님, 191쪽). 이것은 신성모독적이다.

넷째로, 그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부정하였다. 그는 크리스챤 신문 1991년 3월 30일자에 기고한 글에서 “부활 신앙은 이교도들의 어리석은 욕망에 불과하다”고 하였고 동신문 6월 8일자의 글에서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빈 무덤이 아니다”고 주장하였다. 또 그는 다른 잡지에서 “나는 단연코 육체의 부활을 부정한다”고 말했다(우먼 센스, 1991년 12월호).

그의 저서에서도 그는 “만일 예수님 부활 사건이 오늘날의 우리가 소박하게 생각하듯이 그렇게 역사적으로 육체적으로 발생했다면, 그 사건은 자연 현상 중의 기이한 일에 불과하며, 전혀 ‘하나님’의 행위가 아님을 뜻한다. 따라서 예수님 부활의 역사성, 육체성을 실증주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성격에나 하나님의 성격에 전혀 맞지는 않는 이치임을 시인해야 한다”고 말했다(베짜는 하나님, 201쪽).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에 대한 기본적 사실을 부정하는 명백한 이단이다. 사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의 사실을 확증한다. 또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통합)

한국의 장로교단들 가운데, 한국 기독교 장로회(기장측)는 처음부터 자유주의자 김재준 박사를 옹호하면서 세워진 교단으로서 자유주의적이었고 지금도 그 교단과 한신대학교는 자유주의의 일선에 서 있다. 그러나 그보다 온건한 사상을 가진 자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통합측)와 그 교단 신학교인 장로회 신학대학원도 자유주의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예장 통합측이 자유주의적이라는 사실은 상식적인 일인 줄 안다. 통합측 신학교인 장로회 신학대학의 학장으로 오랫 동안 재직하였던 이종성 박사가 신정통주의자이었다는 것은 한국교계에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신정통주의’란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의 증거를 부정하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한 파로서 칼 바르트, C. H. 다드, 라인홀드 니이버 등의 신학을 따른다.

장로회 신학대학이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에 대해 부정적으로 가르친다는 것도 알려진 사실일 것이며, 그 신학교가 모세오경의 모세 저작성을 부정하고 자유주의적인 문서설을 용납하고 또 이사야 40장 이하를 이사야가 쓴 것이 아니고 후대의 어떤 익명의 저자가 썼다는 자유주의 학설을 용납하고 있다는 것도 알려진 사실일 것이다.

또 그 교단 소속 한철하 박사(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설립자 및 원장)가 오래 전에 장로회 신학대학을 신정통주의적이라고 논평한 것도 알려져 있었다.

1980년 서울 사당동 총신대학 부근에서 개척교회를 하던 예장 통합측의 한 목사는 학교에서 배운 자유주의 신학과 성경적 설교를 요구하는 현실적 교회의 목회 사이에서 자신이 ‘고민’하고 있음을 저자에게 솔직하게 인정한 적이 있다.

또 예장 합동측 신학교에 3년간 재학하였다가 통합측으로 옮겨 수년간 공부했던, 저자가 잘 아는 한 친구는 “과연 예장 통합측 신학교의 분위기가 다르기는 다르더라. 그러나 구약교수들 중 한 명은 보수적이며 문서설을 반대하고 있다. 나머지 교수들은 ‘고뇌하는 신학자들’이라고 보인다”고 저자에게 증거한 적이 있다.

덧붙여, 예장 통합측 교단지도자들은, 비록 보수적이라고 알려진 인물들까지도(예를 들어, 임 옥 목사), 오늘날 심히 배교적인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은 그 교단 지도자들의 사상적 분별력과 입장의 정도를 증거한다.

예장 합동측 기관지 기독신보의 주필로 오랫 동안 일했던 채기은 목사는 그의 책 한국교회사에서 “필자가 진단하기에는 본교단(예장 합동측)을 비롯하여 고려측, 성경장로회측, 호헌파, 재건파, 복구파, 중립파는 전적으로 보수주의 신학편에 들 수 있으며, 통합측은 반반[半半]으로 나뉘어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가진 이들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기장측에는 절대 다수가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고 쓴 바가 있다(채기은, 한국교회사 <1977>, 231쪽).

특별히, 저자가 읽어본 장로회 신학대학원의 한 석사 논문은 그 결론 부분에서 솔직히 인정하여 말하기를, “우리 입장은 신정통주의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계속 표류 중이다”라고 하였다(이동렬, “한국교회와 신정통주의,” 장로회신학대학원, 1984).

1994년 예장 통합측 총회는 701대 612로 여성 안수안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결정을 통해 통합측 총회는 사도적 교훈의 신적 권위를 부정하고 성경이 명백히 금하는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세우는 악을 허용한 것이다(딤전 2:11-14; 고전 14:34-38).

이상의 사실들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이 자유주의적이라는 것을 증거한다. 물론 통합측의 모든 목사들과 모든 성도들이 자유주의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 교단의 목사 양성원인 장로회 신학대학원이 자유주의적이라면 또 그 교단의 지도적 목사들의 다수가 자유주의적이라면, 그 교단은 자유주의적이라는 말이다. 통합측은 건전한 교단이 아니다.

결론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 교회가 직면한 가장 무서운 이단 사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고 기독교의 본질을 어떤 생활 혹은 경험에서 찾으며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한다. 메이천의 말과 같이, 자유주의는 기독교와 뿌리가 다른 종교 신념이며 기독교가 아니다.

그런데 자유주의 이단이 기독교계 속에 깊숙이 들어와 교회들을 부패시키고 있다. 유럽의 교회들은 일찍 부패되었고 미국 교회들이 20세기 초에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오늘날 세계의 역사적 대교단들의 대다수는 자유주의적이거나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포용주의적인 교단들이 되었다. 우리 나라만 해도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측),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측),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를 비롯하여 한국기독교침례회(기침측), 기독교대한성결회(기성측), 구세군 등이 자유주의적 내지 포용주의적 교단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에 이미 예언된 바가 성취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4: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데살로니가후서 2:2, “먼저 배도(背道, 배교)하는 일이 있고.” 디모데전서 4:1, 2,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속이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귀신들의 교리들]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요한이서 7, “미혹하는 자[속이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자유주의 신학이 이단이므로, 참된 교회들이 자유주의자나 자유주의적 내지 포용주의적 교단에 대해 대처해야 할 태도는 분명하다. 성경은 이단과 분리하라고 분명히 가르쳤다. 로마서 16:17, 18,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요한이서 7-1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유다서 3, 4,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껴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제2부:

에큐메니칼 운동의 문제

목차

서론 / 127

1. 세계교회협의회의 공식적 진술들 / 131

2. 신학적 포용주의--전체적 고찰 / 134

3. 신학적 포용주의--성경관 / 141

4. 신학적 포용주의--신조의 개념 / 148

5. 신학적 포용주의--복음의 개념 / 153

6. 신학적 포용주의--믿음의 개념 / 157

7. 신학적 포용주의--천주교회에 대하여 / 159

8. 성례주의적 경향 / 182

9. 한 세계교회를 지향함 / 184

10. 종교적 다원주의의 경향 / 189

결론 / 196

서론

에큐메니칼 운동의 정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란 무엇인가? 마틴 마티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세계의 분열된 기독교회들이 자기들의 본질적 일체성을 인식하고 새로운 일치와 재(再)연합을 향해 움직이는 시도”라고 정의했다(The Encyclopedia America, IX, 623). 로버트 브라운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분열된 기독교 가족을 재연합시키려는 관심”이라고 표현했다(The Encyclopedia of Religion, V, 20).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요 결실이요 주요 수단인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진술하기를,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는 “한 거룩한, 공동적, 사도적 교회의 유형적(有形的) 일체성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Gathered for Life: The Official Report of the Sixth As- sembly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p. 51). 이상의 설명들에서 볼 수 있듯이, 에큐메니칼 운동은 세계의 모든 기독교회들을 재(再)연합시키려는 운동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역사적 고찰

19세기 말의 특기할 사건들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를 간략히 고찰해 본다면, 우선 19세기 말 특기할 만한 몇 가지 사실들이 있었다.

첫째는 선교의 부흥이었다. 이로 인하여,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선교회들이 조직되고, 곳곳에서 선교 대회들이 열렸다.

둘째로, 1846년 복음주의자 연맹(Evangelical Alliance)이 영국에서 조직되었다. 이 단체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으나 교회 연합체로서의 의의를 가진다.

셋째로, 기독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이 때 기독 청년 단체들(YMCA, YWCA)이 설립되었고 학생자원 해외선교운동이 일어났다. 1895년에는 세계 기독 학생 연맹(WSCF)이 조직되었다(David P. Gaines,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pp. 5-17).

1910년의 세계 선교 대회

1910년 영국 에딘버러에서 세계 선교 대회가 열렸다. 연구자들은 보통 이 선교 대회를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작으로 간주한다. 미국 감리교 평신도이었던 죤 모트의 활약으로 159개의 선교회들로부터 1196명의 총대들이 모였던 이 대회는 이름 그대로 세계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모였던 세계 대회이었다(William H. T. Gairdner, Echoes from E- dinburgh 1910, p. 50). 이 대회의 한 결과로, 1921년에 국제 선교 협의회(IMC)가 조직되었는데, 이것은 최초의 세계적 에큐메니칼 기구이었으며, 1961년 세계교회협의회에 병합되었다.

생활과 봉사 운동

1925년, 스웨덴 웁살라의 대주교 나단 죄더블롬의 주도 아래,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생활과 봉사의 세계 기독교 대회’가 모였는데, 이 대회의 관심은 사회 정치 문제들에 대한 기독교적 원리들의 적용이었다. 이 대회로부터 시작하여 생활과 봉사(Life and Work) 운동이라고 불리우는 일련의 모임들이 있었다(The Stockholm Conference 1925, ed. G. K. A. Bell, pp. 1-37).

신앙과 직제 운동

1927년, 미국 감독교회의 감독 촬스 브렌트를 중심으로, 스위스 로잔에서 ‘신앙과 직제의 세계 대회’라는 또 하나의 세계적 회의가 열렸는데, 이 대회의 관심은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unity)의 회복 문제이었다. 이 대회로부터 시작하여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운동이라고 불리우는 일련의 모임들이 있었다(Faith and Order, ed., N. H. Bate, pp. 508-26).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생활과 봉사 운동과, 신앙과 직제 운동이 서로 연합하는 움직임이 있게 되었고, 그 결과 1948년 네델란드의 암스텔담에서 마침내 세계교회협의회가 조직되었다(The First Assembly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ed. Willem A. Visser 't Hooft, p. 14). 이와 같이, 세계교회협의회 조직의 배경이 되는 3대 관심은 선교, 사회 문제, 교회의 일체성이었다. 세계교회협의회는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요 결실이요 주요 수단이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1948년 창립 총회 이후,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제2차 총회, 1961년 인도 뉴델리에서 제3차 총회, 1968년 스웨덴 웁살라에서 제4차 총회, 1975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제5차 총회를 열었고, 1983년 캐나다 뱅쿠버에서 제6차 총회,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제7차 총회, 1998년 아프리카 짐바브웨 하라레에서 제8차 총회를 열었다.

비평적 연구의 필요성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비평적 연구는 다음 몇 가지 점에서 필요하다.

첫째로, 우리는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력과 영향력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된다. 세계교회협의회는 1991년에 117개국의 311 회원 교단들에 소속된 4억 이상의 기독교인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하였다(Christian News, 1991년 4월 8일, 1쪽). 한국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측), 대한기독교감리회(기감측), 구세군 등이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이다. 그러므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문제점들을 성실히 폭로하고 비평하지 않는다면, 세계의 모든 교회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가담하고 있든지 있지 않든지 간에,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 에큐메니칼 운동은 성경적 근거와 신적 승인을 주장하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 제1차 총회는 선언하기를,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땅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한다. 그가 우리를 이 곳 암스텔담에 모으셨다”고 했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21),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 등의 성경 구절들을 즐겨 인용함으로써 에큐메니칼 운동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과 직제 사무국 행정 사무관인 한스-게오르그 링크는 말하기를, “(에베소서 4:3을 언급하면서) 일체성에 대한 사도의 권면과 일체성을 위한 우리의 현재의 추구는 동일한 뿌리를 가지고 있고 이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한 주님께 대한 불순종이 된다”고 하였다(Apostolic Faith Today, p. 1). 이러한 주장들은 에큐메니칼 진영 안팎의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들에게 혼란의 목소리로 남아 있다.

셋째로, 더욱이 최근에 복음주의자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이전보다 더 우호적 태도를 보인다.

이전에는 보수적 교회들이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과 세계교회협의회를 비성경적이라고 간주해 왔었다. 사실상, 세계교회협의회는 창립 당시부터 그 지도층에 죤 베네트, 브롬리 옥스남, 헨리 반 듀젠, 추첸 차오, 대주교 죄더불롬, 윌리엄 템플 등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을 포함하고 있었다(Carl McIntire, Modern Tower of Babel, pp. 139-206; David Hede- gard, Ecumenism and the Bible, pp. 171-214).

그러나 1983년 세계교회협의회 제6차 총회시 “뱅쿠버의 복음주의자들: 공개 편지”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복음주의자들 다수의 선언문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들이 복음의 핵심을 신봉하는 자들이며 ‘하나님께서 명백히 받으신’자들이므로, 복음주의자들이 에큐메니칼 지도자들로부터 물러나지 말고 기쁘게 그들을 영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일치와 갱신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들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우리의 결심을 공적으로 선언할 압박을 느꼈다”(M. H. Reynolds, The World Council of Chruches: The Cup of the Lord or the Cup of Devils?, pp. 16-20).

이 공개 편지의 서명자들은 미국 풀러 신학교의 선교학 교수이며 미국장로교회(PCA) 목사인 아더 글라서,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WEF)의 전총무이었던 월드론 스카트,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 간사인 로버트 영블러드, 고든-콘웰 신학교 교수인 리차드 러블레스, 개혁주의 에큐메니칼 협의회(REC)의 총무인 폴 슈로텐보어 등 200여명이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할 때,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비평적 연구가 필요하고, 만일 에큐메니칼 운동이 비성경적인 운동으로 판명된다면, 우리는 이 운동의 잘못을 널리 알리고 진실한 교회들에게 인식시켜 그들로 하여금 이 운동에 참여치 않게 하고 또 이 운동으로부터 멀리 떠나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1. 세계교회협의회의 공식적 진술들

에큐메니칼 운동은 현대 교회의 신학적 변질 혹은 배교(背敎)와 더불어 시작되고 발전되었다. 그 문제점은, 비록 초창기에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사실상 처음부터 존재하였다. 그것은 교회가 신학의 변질을 인식하지 못하고 배제하지 못한 것이었다. 기독교계는 한편에서는 신학의 변질을, 다른 한편에서는 무분별한 연합 운동을 맞아들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의 일체성 혹은 연합이라는 구실 아래 전세계교회의 연합을 추구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그 문제점은 특히 그 운동이 추구하는 교회의 일체성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밝혀질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기초’

세계교회협의회 헌법의 맨처음에는 ‘세계교회협의회의 기초’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 있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고백하고 한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영광을 위하여 그들의 공동적 부르심을 함께 성취하기를 추구하는 교회들의 교제이다”(Constitution, I, in Gathered for Life, p. 324).

이 진술 자체에는 어떤 잘못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단지, 두 가지 질문이 필요할 것이다. 첫째로, 세계교회협의회에 소속된 모든 교회들이 이 진술에 충실히 서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이 진술은 적어도 이단적 자유주의자들을 배제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기독교회들의 건전한 교회 연합체로서 이 진술의 내용이 충분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진술은 이것에는 동의할 수 있어도, 기타 다른 중요한 점들에서 이단적인 교회들, 예컨대 로마 천주교회 같은 교회를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한 신앙’

세계교회협의회는 한 신앙 안에서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5차 총회는 선언하기를, 세계교회협의회의 첫번째 기능과 목적은 “한 신앙 안에서와 한 성찬 교제 안에서의 유형적 일체성의 목표로 교회들을 초청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1982년 리마에서 모인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 직제 위원회는 유형적 일체성의 실현을 위한 첫번째 요건으로서 “한 신앙 안에서의 일체성”을 강조하였다(Towards Visible Unity, p. 5).

1993년 한국의 주류 장로교단들(예장 통합, 예장 합동, 기장, 고신 등) 한국 장로교 협의회도 다음과 같은 공동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모든 장로 교단들은 ‘오직 성경으로만’의 원리, 하나의 복음에 대한 공동 이해, 개혁 신학과 신조에 바탕을 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공동 고백과 세례, 성만찬을 행하고 있다”(“장로교 연합활동 활성화,” 기독교보, 1993년 12월 11일, 7쪽).

에큐메니칼 운동의 ‘한 신앙’에 대한 강조는 성경적인 맛을 가진다(엡 4:5). 그러나 문제는 그 ‘한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 그 한 신앙에 포함될 수 있는가? 또한 천주교회의 사상이 그 한 신앙에 포함될 수 있는가?

‘사도적 신앙’

더욱이, 세계교회협의회는 사도적 신앙 안에서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 직제 위원회는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함께 고백하려고 할 때, 우리는 수백년을 걸쳐서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온 성경대로의 사도적 신앙에 충실하기를 원한다”고 한다(Apostolic Faith Today, ed. Hans-Georg Link, p. 93). 세계교회협의회의 뱅쿠버 총회도 교회 일체성의 목표를 향한 한 단계로서 사도적 신앙의 공동적 인식, 공동적 설명, 공동적 고백을 강조한다(Gathered for Life, p. 48).

이것은 더욱 놀라운 진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그 내용이 무엇이며, 세계교회협의회의 모든 회원 교회들이 그 신앙에 충실하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세계교회협의회는 사도적 신앙의 예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제안하기도 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 직제 위원회는, “세계교회협의회는 교회들에게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표현된 기독교 신앙의 완전한 일체성을 다시 인식하고 . . . 그 내용을 더욱 포괄적인 교회 일체성의 기초로 주장하도록 요청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Towards Visible Unity, p. 35).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주후 381년에 작성된 신조로서 성자와 성령의 참된 신성을 고백하는 정통적 신조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하늘과 땅,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전능하신 아버지이신 한 하나님을 믿는다. 또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하나님의 독생자, 빛으로부터 나신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이시고, 창조되지 않으시고 나셨으며,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셨고, 그를 통해 만물이 존재하게 되었고, 우리 인간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구원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 의해 성육신(成肉身)하셨고 사람이 되셨다.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고난을 당하셨고 장사되셨고 제3일에 성경대로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셨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계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또 우리는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자이신 성령을 믿는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세계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우리는 죄사함을 위해 하나의 세례를 고백한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내세(來世)의 삶을 바라본다. 아멘.”

이것은 교회 일체성의 기초로 제시된 보다 구체적인 신앙의 내용이다. 그러나 역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첫째는, 오늘날 자유주의적 교회들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성실히 받아들이겠는가이며, 둘째는 비록 이 신조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다른 추가적 요소들에서 이단적인 로마 천주교회를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2. 신학적 포용주의--전체적 고찰

앞에서 살펴본 세계교회협의회의 공식적 진술들과 제안들은 겉으로 보기에 매우 그럴 듯하다. 그러나, 세계교회협의회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자료들을 조금만 더 자세히 읽어 본다면, 심지어 위의 네 가지 내용들도 단지 형식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그것들은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 교회 일체성을 위해 주장하는 형식적(形式的) 기초에 불과하다.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교회 일체성의 실제적(實際的) 기초는 신학적 포용주의(神學的 包容主義, theological inclusivism)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은, 에큐메니칼 운동이 기독교회들 안에 있는 다양한 신학들을 비평 없이 포용하면서 교회의 일체성을 강조하며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분석

1. 다양한 신학들을 용납함

첫째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세계교회협의회와 그 지도자들이 다양한 신학들을 용납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전총무 에밀리오 카스트로는 말하기를, “세계교회협의회의 공식적 신학이란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이 결코 있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 교회가 아닙니다. 심지어 교회들 안에서도 신학의 다양성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One World, January-February 1986, p. 5). 세계교회협의회의 전총무 유진 카슨 블레이크도 교회 연합을 위해 제안하기를, “연합된 교회는 그 공동성 안에서 (그리고 그 공동성 때문에) 신앙의 신학적 작성 형식들의 광범위한 다양성을 포용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The Ecumenical Review, 38 <1986>, 146). 세계교회협의회는 선교에 대한 한 선언문에서 진술하기를 자신이 “공통적 신앙의 다양한 표현”을 추구한다고 했다(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 search, 7 <1983>, 68).

2000년 2월, ‘교회일치운동의 역사와 현황’이라는 제목의 제1회 에큐메니칼 포럼의 기조 발제에서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인 박종화 목사는 교회의 영적 측면을 강조하는 부류[보수적 교회]와 교회의 사회참여적 역할을 강조하는 부류[진보적 교회]는 한 동전의 양면과 같고, 이 둘을 포함하는 통합적 에큐메니즘이 크게 강조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 한국 상황의 경우, 지금에 와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새롭게 구축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 동안 에큐메니칼 운동은 에반젤리칼[복음주의] 운동과의 대립 구도로 자리 매김되는 축소된 위상을 지녀왔으며, 이런 이분법적 구도는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심화된 상태의 ‘적대적 냉전 구조’에서 파생되고 강화된 현상이라고 주장하였다(교회연합신문, 2000년 2월 13일, 8쪽).

2. 신학적 다양성을 정당화함

둘째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 그 운동 안에 있는 신학적 다양성을 비평하기는커녕 오히려 정당화한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신학적 다양성에 대한 그들의 정당화는 두 방면에서 관찰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그 신학적 다양성을 역사적 관점에서 정당화한다. 임마누엘 설리반, “1963년 몬트리얼에서의 신앙 직제 대회는 신학적 대화가 11, 16세기의 대분열 이전 시대들 즉 교회 안에 어느 정도의 건전한 다양성과 다원주의 뿐만 아니라 신앙의 기본적 일치가 있었던 시대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말하였다(Ecumenical Trends, 15 <1986>, 4). 진 마리 틸라드(Jean-Marie Tillard)도 말하기를, “하나님의 교회는 심지어 가장 놀라운 일치의 시대들 동안에도 항상 다원적 형태이었다. 이것은 실천의 차원에서도 교훈의 차원에서도 그러했다”고 하였다(Different Theologies, Common Responsibility: Babel or Pentecost?, p. 63).

한편, 어떤 이들은 그 신학적 다양성을 신학적 관점에서 정당화한다. 콘스탄티노플 에큐메니칼 교구의 대표자인 메트로폴리탄 다마스키노스 파판드루는 이렇게 말한다: “성육신 진리가 각 시대에 취한 역사적 복장은 진리의 본질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교회의 문제점은 그 회원들 중의 어떤 이들이 본질과 형식을 더 이상 구별할 줄 몰라서 형식적인 점들을 본질적인 것으로 취급하거나(전통주의의 오류) 혹은 중심적인 본질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잘못된 개혁론의 오류)”(Towards Visible Unity, p. 87). 하딩 마이어도 반문하여 말하기를, “우리 교회들의 분리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교리적 정죄는 결코 근본적 차이점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단지 개인적 차이점에 근거했다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라고 한다(Ecumenical Trends, 15 <1986>, 40).

3. 에큐메니칼 행위들

셋째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그 지도자들의 다음과 같은 에큐메니칼 행위들에서도 드러난다.

(1) 포용주의적 교리 진술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회의 일체성을 위해 기독교 교리를 포용주의적으로 표현하기를 제안하고 강조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 직제 위원회 이전 의장인 니코스 니씨오릴스는 말하기를, “우리는 일체성을 위하여 진리를 정의하여야 한다. . . . 교회가 발언하는 모든 교리들은 교회의 교제를 회복하는데 의무적이라는 불가피한 명제는 절대적으로 참되고 필요하다”고 한다(Ecumenical Trends, 15 <1986>, 181). 라이문도 파니카도 말하기를, 에큐메니칼 토론의 목표는 “다양한 기독교 신앙 고백들을 초월하며 또한 내재하는 원리에 보다 더 깊이 충실하는 항상 어떤 새로운 일치점이다”라고 한다(Journal of Ecumenical Studies, 19 <1982>, 781).

(2) 상호 인정과 성찬 교제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또한 교회의 일체성을 위해 서로를 인정하고 성찬의 교제를 나누기를 제안하고 강조한다. 교회연합협의회(COCU; 이 단체는 1999년 1월 명칭을 CUC로 바꿈)의 소위 ‘언약’(Covenant- ing)은 한 세례 안에서 회원들을 서로 인정할 것, 서로를 교회들로 인정할 것, 안수 받은 목사들을 서로 인정하고 화해할 것, 정규적인 성찬 교제를 나눌 것 등을 포함하였다(Covenanting toward Unity: From Consensus to Communion, pp. 9-20). 르로이 개릿도, 일체성의 실제적 적용으로 제안하기를, 모든 기독교인들은 서로의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동등한 자로 영접할 수 있으며, 기독교인들은 교리적 심사 없이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고, 또한 함께 일하는 목회 사역이 가능하다고 했다(Theology Today, 40 <1984>, 446).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 미 합중국 장로교회(PCUSA), 미국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UCC), 및 미국 개혁교회(RCA)는 국내외 선교 협력과 목회자 상호 인정 등을 포함한 ‘전면적’ 교단 교류를 선언한 합의서를 수용하였다. 미 합중국 장로교회 외의 다른 세 교단들은 1997년 총회에서 이미 그것을 수용했고, 미 합중국 장로교회는 1998년 3월 19일 현재 172개 노회 중 표결을 끝낸 111개 노회 중 109개 노회가 그것을 찬성함으로써 확정된 것이나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기독신문, 1998년 3월 25일, 16쪽.)

1993년 12월 한국 장로교 협의회 운영위원회는 1994년 사업 계획으로 각종 강단 교류, 신학생 예배 강단 교류, 연합 예배 등을 결의했다(“장로교 연합활동 활성화,” 기독교보, 1993년 12월 11일, 7쪽).

2000년 2월 한국 장로교 총연합회(대표 회장: 김도빈 목사)는 내장산 관광호텔에서 한국 장로교 연합과 일치 간담회를 열었다. 그 모임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 모색’이라는 제목의 주제 강연에서 전병금 목사는 “처음부터 기구적인 통합을 모색하려고 하기보다는 우선 연합교회의 형태를 갖춰가면서 점진적인 통합을 이뤄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 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과제들로서 교단간의 강단교류 활성화, 총회에 상호 사절단 파견, 2000년 장로교 총회 개회예배 함께 드리기, 같은 지역 안에서의 연합예배와 성찬식, 세계 개혁교회 연맹 참여로 국제 교회와의 연합 강화 등을 제안하였다. 논찬에서 김재규 목사(예장 대신측 총회장)는 “한국교회에서 사상 논쟁이 사라졌다는 발제에 동감을 표하고, 열린 보수와 열린 진보가 대화하면 사상 논쟁은 무너질 것”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일치를 위해 “우선 실현 가능한 선교, 예배에 대한 것만이라도 구체적으로 실천해가자”고 주장하였다. (기독교보, 2000년 2월 12일, 10쪽.)

(3) 선교 활동에서의 협력

또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회의 일체성을 위해 선교 활동에서 서로 협력할 것을 제안하고 강조한다. 앞에서 언급한 교회연합협의회(COCU)의 언약은 선교와 전도에 함께 참여할 것을 포함하였다(Covenanting toward Unity, pp. 14-16). 콘스탄티노플 에큐메니칼 교구의 세계교회협의회 파송 상임대표인 메트로폴리탄 에밀리아노스는 말하기를, “인간적인 혹은 신적인 어떤 법도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교리적 혹은 예배 의식적 차이점들 때문에 다른 자녀들을 돕는 것을 중지시킬 수는 없다. . . . 교회 역사는 요컨대 교리적 차이점들이 선교 활동에 협력치 못할 이유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인다”라고 하였다(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 72 <1983>, 258).

(4) 협의체들의 구성

에큐메니칼 운동은 이미 1948년에 세계교회협의회라는 세계적인 협의체를 구성하였다. 또 각 나라에서는 교회협의회(NCC)들이 구성되어 있고 지역적으로도 협의체들이 있다. 또한 미국 안에서는 9개 교단들로 시작된 교회연합협의회(COCU; 이 단체는 1999년 1월 명칭을 Churches Uniting in Christ=CUC로 바꿈)가 있다.

한국의 개신교 17개 교단의 총회장 및 총무 23명은 2000년 7월 6일 연세대에서 간담회를 갖고 한국 개신교 전체를 대표하는 연합기구를 만드는 역할을 담당할 ‘한국교회연합준비위(가칭)’를 구성하였다. 참여한 교단들은 예장 통합, 예장 대신, 감리교, 기장, 기하성, 기성, 기침, 구세군, 정교회 등이다.

교단 대표들은 90년대 이후 침체 상태를 보이고 있는 한국 개신교가 사는 길은 연합과 일치밖에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최성규 기하성 총회장은 “지금의 위기감을 넘어서는 길은 진보와 보수, 개혁과 복음 등 이분법을 넘어서 형제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의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는 주요 교단들이 주체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예장 합동, 예장 고신, 예장 개혁 등 보수교단들의 참여, 그리고 현존하는 양대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 총연합회의 해체 등의 큰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지적된다. 이번 모임의 초청자였던 기장측의 전병금 목사는 “한국 교회가 이번에 하나되지 못하면 존재 자체가 흔들리며 앞으로 상당 기간 연합하기 어렵다는 각오로 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선일보, 2000년 7월 10일, 21쪽.)

4.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세계교회협의회의 손짓

수십년 동안 자유주의적 경향을 보였던 세계교회협의회(WCC)는 근래에 와서 복음주의자들에게 호의적인 손짓을 보이고 있다. 1998년 12월 짐바브웨의 하라레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제8차 총회는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의 지도자인 죠지 반더벨드를 주요 연사로 내세웠다. 또한 세계교회협의회 지도부는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회에 파송된 월드 비젼의 공식적 대표인 독일 루터교회의 쿠르트 방게르트 목사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였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10월 15일.)

미국교회협의회는 새 조직체의 시작을 탐구하기 위해 천주교인들과 복음주의자들과 함께 만날 것이라고 한다. AP통신에 의하면, 이런 제안의 통지문은 미국 천주교 주교회와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에 보내졌다. 미국교회협의회는 지난해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새 에큐메니칼 모험이 필요하다고 결정했었다. (Calvary Contender, 2000년 6월 15일.)

비평

1. 바른 교리와 바른 신학은 기독교에 본질적임

무엇보다 생각할 점은, 바른 교리와 바른 신학은 기독교에 본질적이라는 사실이다. 교리(敎理, doctrine)는 진리의 언어적 표현 혹은 명제적(命題的, propositional) 진술을 가리키며, 신학(神學, theology)이란 그러한 교리들을 체계적으로 정돈한 것, 즉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가리킨다. 성경은 기독교가 하나님의 확실하고 불변적인 진리들 위에 기초하고 있음을 밝히 계시한다. 이 사실로부터 당연히 내려지는 결론은, 신학의 중심적 내용은, 만일 그 신학이 바른 신학이라면, 변하지 않으며 변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른 교리와 바른 신학은 기독교에 본질적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신학들을, 그것도 그것들이 서로 모순됨에도 불구하고, 비평 없이 받아들이는 신학적 포용주의는 명백히 비성경적인 잘못이며 기독교회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2. 교회의 일체성도 교리적 성격을 가짐

또한, 교회의 일체성도 교리적 성격을 가진다. 교회의 일체성의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요한복음 17장과 에베소서 4장은 교회의 일체성의 대상과 성격을 통해 그 일체성의 교리적 성격을 잘 보인다. 그 구절들에 의하면, 교회의 일체성이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사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자들의 일체성(엡 1:3-14),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의 일체성이며(요 17:9), 하나님 안에서의, 진리 안에서의 일체성이다(요 17:11, 21). 다시 말해, 교회의 일체성은 바른 진리와 교리 안에서의, 그 위에서의 일체성인 것이다.

워필드는 바르게 말하기를,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의 일체성은 신자들의 공통적 기독교 신앙 위에 기초하였다. 그리스도 안의 일체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한 불신실함 위에 세워질 수 없다”라고 하였다(B. B. Warfield, "True Church Unity," Selected Shorter Writ- ings, p. 302). 마틴 로이드-죤스도, “진리와 교리를 떠난 일체성이란 없다”고 바르게 말하였다(Martin Lloyd-Jones, The Basis of Chris- tian Unity, p. 50). 그러므로, 교회의 일체성이라는 이름 아래 신학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은 명백히 비성경적이다.

3. 교회는 바른 교리들을 지킬 의무를 가지고 있음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전달받았고 현재 소유하고 있으며 또 그 진리들을 간직하고 지키라[보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遺傳, 전통)을 지키라.” 디모데후서 1:13, 14,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바른 말들의 표준을 지키라].” 기독교의 정통 교리들은 근본적 교리들을 내포한다. 개신교회의 주류적 교파들은 공통적으로 믿고 고백하는 교리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공통적 근본 교리들은 교회의 일체성의 기초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이나 죤 오웬도 기독교의 본질적 교리들을 그리스도인의 일체성의 기초로 간주했다(Institutes, IV. i. 12; The Works of John Owen, XV, 106). 그러므로, 바른 교리들을 지킬 교회의 의무를 생각할 때, 바른 교리들을, 적어도 역사적 개신교회들의 공통적 근본 교리들을, 보존함이 없는 신학적 포용주의는 명백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잘못이다.

4. 교회는 이단들을 배격할 의무를 가지고 있음

더욱이, 교회는 이단들을 배격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로마서 16:17, “너희의 교훈을[너희가 배운 교리를]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거절하라].” 유다서 3,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회 안에는 기독교의 전통적, 정통적 신앙 사상을 부정하는, 갖가지 형태의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이 유행하고 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그것이 무슨 전문적 명칭으로 분류되든지 간에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초자연적 사실들과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형벌적 의의 속성,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 복음의 핵심인 그의 형벌적 대리적 속죄 사역, 그의 육체적 부활, 그의 재림 등을 부정하고 있다. 그것들은 교회 역사상 어느 이단 종파의 사상보다도, 심지어 우상숭배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천주교회의 신학보다도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로부터 크게 탈선한 이단이다. 메이천의 분석과 평가대로, 자유주의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연주의적, 비(非)속죄적 종교이며, 단순히 한 이단이 아니라 전혀 기독교가 아니다(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그러므로, 바른 믿음에서 떠난 이단들을 배격해야 할 교회의 의무를 생각할 때, 기독교계 안에 있는 다양한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함이 없는 신학적 포용주의는 명백히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큰 오류이다.

3. 신학적 포용주의--성경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이상의 전체적 고찰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구체적인 몇 가지 점들에서도 확인된다. 우선 그것은 잘못된 성경관의 포용에서 나타난다.

분석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 직제 위원회의 모임들에서 채택된 다섯 개의 공식적 보고서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① 1949년의 왜담 보고서(“성경 해석을 위한 지침들”), ② 1963년의 몬트리얼 보고서(“성경, 전통 및 전통들” ), ③ 1967년의 브리스톨 보고서(“에큐메니칼 운동을 위한 해석학적 문제의 중요성”), ④ 1971년의 루베인 보고서(“성경의 권위”), ⑤ 1977년의 로컴 보고서(“신약성경과의 관계에서의 구약성경의 중요성”) 등이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이것들을 묶어서 성경: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그것의 권위와 해석(The Bible: Its Authority and Interpretation in the Ecumenical Movement, ed., Ellen Flesseman-van Leer)이라는 책을 내었다.

이 책에 담긴 보고서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성경관에 있어서 포용주의 입장을 취한다. 브리스톨 보고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성경관들을 제시한다: ① 성경은 교회가 전적으로 의존하는 유일한 진리의 규범이다, ② 성경은 교회 안에서 계속적 생명을 가졌던 동일한 전통의 산물이다, ③ 성경은, 입구가 여럿인 기독교 진리의 종합관(varigated complex)에서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 그런 다음, 그 보고서는 “우리는 이 입장들 중의 어느 것도 배타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고 진술한다(pp. 38, 39).

또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포용적이다. 몬트리얼 보고서는 성경 해석에 관한 다음과 같은 여섯 개의 다른 원리들을 제시한다: ①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② 성경의 중심 주제(center)가 해석의 열쇠이다, ③ 성경은 성령의 인도 아래 개인의 양심에게 말한다, ④ 교회의 생각(mind)이 해석의 열쇠이다, ⑤ 교회의 가르치는 자들(magisterium)이 그 관리인(guardian)인 신앙의 저장물(the deposit of faith)이 해석의 열쇠이다, ⑥ 신조들이 해석의 열쇠이다. 그런 다음, 그 보고서는 말하기를, 우리는 자신의 해석 원리를 “자명하거나 결정적인 것으로 혹은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월한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한다(pp. 22, 38).

그러나 이 책에서 세계교회협의회는 특히 다음과 같은 명백한 잘못들을 포용하고 있다.

1. 성경의 문학적, 역사적 비평을 받아들임

첫째로,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에 대한 문학적, 역사적 비평을 공인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브리스톨 보고서는 말하기를, “성경은 일군(一群)의 문학적 문서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문학적 문서들의 연구에 사용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 . . [그러므로] 문학적 비평적 방법이 필요하다”(p. 31), “성경은 그 많은 부분에서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다. . . . 전통들과 기록물들은 이스라엘과 초대 교회에서 전달되어 내려 왔으며, 흔히 오랜 기간 동안 결합되고 후대의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재작성되고 재해석되었다. . . . [그러므로] 역사적 비평적 방법이 필요하다”(Ibid.). 책의 편집자 플레스만-반 리어는 이 보고서에 대해 논평하면서 말하기를, “그 보고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문학적 역사적 비평을 사용하는 학자적 주석의 과정을 전적으로 긍정한다”라고 한다(p. 45).

루베인 보고서도 진술하기를, “성경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서 기원한 인간 문서들의 집합으로, 그리고 과거의 모든 다른 문학적 문서를 위해 채택된 절차들을 따라서, 연구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 . . 역사적 비평적 연구에 근거하여 성경 학자들은 최근 수십년 동안에 많은 애매한 점들을 분명하게 해결했다. . . . 그 연구 방법은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라고 한다(Ibid.).

2. 성경 속에 신학의 다양성과 상호 충돌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함

둘째로,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 속에 신학의 다양성과 상호 충돌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브리스톨 보고서는 진술하기를, “성경은 매우 다양한 문학적 전통들의 집합을 포함하는데, 그 내용들은 흔히 서로 긴장 속에 있다. . . . 우리가 볼 수 있는 한 때때로 진짜 모순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 . . 우리가 볼 수 있는 한 그것들이 참으로 모순적인 곳에서 이것은 성경 시대 자체 안에서의 실제 신학적 불일치들로 돌아갈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서로 다른 사회적 혹은 역사적 상황들에 기인했을 것이다”라고 한다(pp. 31, 32).

3. 성경 사건들의 역사성을 부정함

셋째로,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 사건들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그것들을 해석된 역사로 본다. 루베인 보고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성경 학자들은 무엇보다 성경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건들이 모든 경우들에서 이미 해석된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 . . 보도된 사건들은 그러므로 결코 ‘순수한(bare) 사실들’이 아니고 오직 성경 저자들에 의한 해석의 옷을 입고서만 항상 우리에게 접근한다. . . . 우리는 성경에서 해석되지 않은 사건들이 없다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p. 48).

또한, 세계교회협의회는 1984년에 우리의 공통적 신앙의 뿌리들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거기에는 죠지 판텔리스(Jorge Pantelis)의 자유주의적 글이 비평 없이 실려 있다(“The ‘Apostolic Faith’ in Rela- tion to the Teaching and Deeds of Jesus,” in The Roots of Our Common Faith, pp. 41-53). 판텔리스는 성경 학자들이 예수님의 ‘명확한’ 역사적 생애를 재구성하는데 실패했다는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받아들인다(p. 41). 사복음서의 기적 이야기들을 논하면서, 그는 말하기를, “저 이야기들은 분명히 초대 교회가 예수님의 생애의 그 측면을 어떻게 다른 방식들로 확장하기를 좋아했는지를 보인다”고 한다(p. 43). 또한, 변화산 사건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그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이야기가 부활 사건 이후의 제자들의 경험임을 동의한다”고 말한다(p. 50).

4.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함

넷째로,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직접적으로 성경이 더 이상 신앙과 행위의 규범이 되지 못함을 주장한다. 루베인 보고서는 진술하기를, “우리는 성경이 일차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에서 따라야 할 표준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 . . 우리는 [성경을] 모든 문제와 모든 상황을 위한 규범으로 변경시켜서는 안된다. . . . 성경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부과되는 규범이 아니다”고 한다(p. 56). 그 대신, 그 보고서는 성경의 “관계적 권위”(relational authority)를 주장한다. 즉 성경의 권위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한다. 그 보고서는 진술하기를, 성경의 권위는 “사람들이 그것을 권위있는 것으로 경험할 때에만 현재적 실재이다”고 한다(p. 48). 덧붙여서, 이 보고서는 성경의 영감이나 성경 저자들의 목격자적 성격도 성경의 신적 권위에 본질적이지 않다고 말한다(pp. 49, 54).

이상의 성경관으로부터 다음의 두 가지 결과들을 가지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첫째로, 성경 구절들을 증거 구절들(proof texts)로 인용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브리스톨 보고서는 말하기를, “흔히 해왔듯이 고립된 성경 본문을 ‘증거 구절들’로 인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한다(p. 32). 둘째로, 성경의 명확한 메시지(the definite message)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몬트리얼 보고서에 대해 논평하면서, 플레스만-반 리어는 말하기를, “특정한 문제에 관해 성경의 메시지나 성경의 교리에 대해 더 이상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다. . . . 어떤 [성경] 본문도 어떤 현재의 교리적 혹은 윤리적 질문에 대해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고 한다(pp. 4, 11).

비평

1. 성경의 문학적, 역사적 비평을 용납함에 대하여

첫째로,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의 문학적, 역사적 비평을 용납한다. 에드가 크렌쯔는 성경의 문학적 비평과 역사적 비평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학적 비평(Literary Criticism)은 저자의 저작 목적, 사용된 문학 형식, 작품의 완전성과 신빙성, 그리고 그것의 자료들을 결정한다. 역사적 비평(Historical Criticism)은 작품이 쓰여진 역사적 상황과 그 작품의 선(先)역사에 관계한다”(Biblical Studies Today, p. 17).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간의 말이므로 위의 접근 방식들이 어떤 타당성을 가질지도 모른다. 워필드는 말하기를, “개혁 교회들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 예외 없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그러나 그것과 더불어 그들은 그 모든 말씀이 인간의 말임을 똑같이 명백하게 믿는다”라고 했고(“Inspiration and Criticism,” in Revelation and Inspira- tion, pp. 397, 398), 헤르만 바빙크도 성경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또한 전적으로 인간 저자들의 산물임을 주장했다(G. C. Berkou- wer, Holy Scripture, p. 25). 아브라함 카이퍼는 심지어 역사 비평 연구를 수납했으며, 단지 그것이 추구한 지나친 부분들을 반대했다(Ibid., p. 15). 도날드 거스리는 말하기를, “참된 문학적 비평이 고등한 성경관과 공존할 수 없다는 타당한 이유는 없다”고 했다(Biblical Criticism: Historical, Literary, and Textual, p. 121).

그러나 문제는, 문학적 역사적 비평 방식을 취하는 비평가들이 실제적으로 두 가지의 잘못된 전제들 혹은 선입견들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첫째로, 비평가들은 초자연적 사건들이 불가능하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지 현대인들이 초자연적 사건들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리차드 소울런은 말하기를, “엄격히 말하면, 역사적 비평 방식이라는 용어는 실재(reality)에 대한 인간의 현재적 경험이 과거에 무엇이 발생할 수 있을지 혹은 없을지를 결정할 객관적 기준을 제공할 수 있다는 역사적 추론의 기본원리를 가리킨다”고 했다(Richard N. Soulen, Handbook of Biblical Criticism, p. 99).

둘째로, 비평가들은 성경책들이 문자 그대로 참된 책들이 아니라고 전제한다. 즉 성경의 문자적 신빙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방법론은 내적 증거들로부터 성경책들의 진실성, 신빙성을 결정하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 가설적 비평적 방법에 의한 결론은 성경이 그 언급된 저자들의 작품이 아니고 후대의 익명의 편집자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들 그리고 이런 류의 비평 방식은 매우 주관적일 뿐이다. 현대인들이 성경의 초자연적 사건들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근거하여 옛날에 성경 역사에서 일어난 계시적, 초자연적 사건들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참되고 정당한 변론이 될 수 없다. 비록 현재 경험치 못하는 것일지라도 과거에 발생했던 사건들이라면 그것들은 인정되고 수납되어야 한다. 또한 성경책들이 그 주장된 저자들의 작품이 아니고 후대의 익명의 편집자의 것이라는 생각도 전적으로 주관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류의 불신앙적, 파괴적 비평 방식이 건전하고 정당한 성경 연구의 방식으로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2. 성경에 신학적 상호 충돌이나 모순이 있다는 생각에 대하여

둘째로,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에 신학적 상호 충돌이나 모순이 있다는 생각을 용납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단순히 인간 저작들의 모음으로 본다면 상호 충돌이니 모순이니 하는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책이며 하나님이 성경의 참 저자이심을 믿는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성경의 통일성의 교리는 성경 영감과 신적 권위의 교리 안에 내포되어 있다. 촬스 핫지는 말하기를, “만일 성경책들이 그것들이 주장하는 그것, 즉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책들은 한 생각의 작품이며, 그 생각은 곧 하나님의 생각이다. 이 사실로부터, 성경이 성경과 모순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라고 했다(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I, 187).

3. 성경 사건들의 역사성을 부정함에 대하여

셋째로,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 사건들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 계시들은 역사적 성격을 가졌다. 성경 저자들은 진실한 증거자들이었다. 성경의 권위는 일차적으로 역사적 권위이다. 즉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은 진실한 증인들의 증거에 근거한 것이므로 믿을 만하다. 따라서 성경에 증거된 사건들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성격과, 성경 저자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진실한 증거성을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곧바로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파괴적인 오류이며 무서운 이단인 것이다.

4.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함에 대하여

넷째로, 세계교회협의회는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성경의 객관적 권위 대신에 ‘관계적 권위’를 주장한다. 그것은 바로 신정통주의적 성경관이다. 물론, 성경의 관계적 권위라는 개념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며 성령께서 성경의 신적 권위를 사람에게 확신시키시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5은 진술하기를,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납득과 확신은 우리 마음 속에서 말씀에 의해 그리고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으로부터 온다”고 했다. 그러나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의 성경관의 문제는,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하고 관계적 권위만을 주장하는 데 있다.

그러나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개신교회들의 공통적인 기본 원리를 근본에서부터 뒤엎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모든 성경은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 되도록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주어졌다”고 진술했다. 루터교회의 일치신조는 “모든 교의들과 모든 박사들이 평가되고 판단되어야 할 유일한 규칙과 규범은 구약과 신약의 선지자적이고 사도적인 글들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고 진술했다. 영국교회의 39개 신조도 “무엇이든지 [성경에서] 읽을 수 있고 그것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아무에게도 그것을 신앙의 조항으로 믿도록 요구되어서는 안된다”고 진술했다. 이와 같이, 개신교회들은 공통적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의 절대적, 객관적 규범이라는 확신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개신교회들의 공통적인 기본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의 부정은 성경 자체의 명백한 증거들과 충돌한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명백히 증거하셨다. 주 예수님은 “성경은 폐할 수 없다”고 밝히 선언하셨다(요 10:35). 바울 사도도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전통들]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다(살후 2:15).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믿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이 기초가 무너지는 곳에 참 기독교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에큐메니칼 운동은 이 기초를 부정하는 자유주의적 성경관을 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포용주의는 명백히 잘못이다.

4. 신학적 포용주의--신조의 개념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또한 신조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의 포용에서도 나타난다. (신조, 복음, 믿음에 대한 고찰을 생략하기를 원하는 분은 7장<159쪽>으로 넘어가십시오.)

분석

1. 교회 연합을 위한 신조적 내용을 축소시키려 함

첫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회 연합을 위한 신조적 내용을 축소시키려고 한다. 세계교회협의회에서 아직 공식적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으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이를 위해 제안된다. 1982년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 직제 분과의 리마에서의 보고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니케아 신조]에 근거하여 자기 교회의 신앙 고백적 입장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과거에 다른 교회들의 가르침을 배제하기 위해 작성되고 이해되었던 정죄들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Towards Visible Unity, p. 43).

2. 니케아 신조가 시대 제약성을 가진다고 주장함

둘째로, 어떤 지도자들은 니케아 신조가 시대 제약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리마 보고서는 1세기 신조들의 언어가 “그 시대의 문화와 필요와 상황에 의존했다”고 주장하면서, “[니케아] 신조도 그 언어와 그 개념들과 그 사상 형식들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진술한다(Towards Visible Unity, p. 34). 그 보고서에 의하면, “니케아 신조를 고백하는 것은 고대 헬라-로마의 사상과 언어의 형식들에 속박되는 것을 의미한다”(Ibid., p. 40).

3. 니케아 신조를 부적절하거나 부정확하다고 간주함

셋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솔직하게 니케아 신조를 부적절하거나 부정확하다고 간주한다. 1981년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 직제 분과의 소련 오뎃사에서의 회의 보고서는 “어떤 이들은 [니케아] 신조가 단지 낡은 언어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잘못된 기초적 존재론을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라고 진술한다(Apostolic Faith Today, p. 250). 그 보고서는 또한 “그 신조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성경적 신앙에 대한 부적절한(inadequate) 신조로 생각된다”라고 말한다(p. 251). 그 보고서는 덧붙여 설명하기를, 그들에게 그 신조는 일방적인데 왜냐하면,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와 성육신의 교리는 오직 요한복음에만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Ibid.).

4.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주장

넷째로, 심지어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부적절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주장한다. 오뎃사 보고서는 “신비의 요소가 [니케아] 신조에서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말로 표현하려는 어떤 시도에서든지 인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다음, 하나님에 대해 진술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를 믿는 유대적 신앙으로부터의 이탈, 즉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비판 없이 인정한다(p. 252). 구체적 한 예로, 다마스키노스 파판드루는 말하기를, “신조가 생명으로 취급될 때, 그것의 내용은 모든 정의를 초월한다. . . . 파악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를 누가 표현할 수 있는가? 누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 위험을 무릅씀이 없이 그 정의할 수 없는 분을 정의할 수 있는가?”라고 한다(Towards Visible Unity, p. 86).

비평

1. 교회 일치를 위해 신조를 축소하려는 생각에 대하여

첫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회 일치를 위해 신조적 내용을 축소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조가 무엇인가? 제임스 배너만은 신조의 기능을 ① 연합의 기초로서 성경의 진리를 붙듬, ② 하나님의 진리를 권위 있게 가르침, ③ 세상의 오류나 불신앙을 대항하여 진리를 증거하고 선포함이라고 요약한다(James Bannerman, The Church of Christ, I, 296-302). 신조의 세번째 기능이 본 논의에 특히 중요하다. 죤 머리도 신조들은 오류의 침입에 대항하여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했음을 강조한다(John Murray, “The Creedal Basis of Union in the Church,”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I, 281). 그는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의 어려운 상황을 생각할 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 . . 가장 기초적 불신앙의 모순들이 확고한 성경 교리와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Ibid.). 그러므로 이상적 신조는 모든 진리들을 선언하고 교회에 존재하는 모든 오류들을 반박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신조의 이 기능에 비추어 볼 때, 니케아 신조는 오늘날 교회의 교제의 기초적 신조로서 여러 점들에서 부족하다. 예를 들면, 니케아 신조에는 펠라기우스적 오류를 반박할 인간의 부패성에 대한 진술들이 들어 있지 않다. 또한 그 신조에는 교황 무오(無誤), 마리아 숭배, 미사, 연옥과 같은 천주교회의 오류들을 반박하는 아무런 진술들도 없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신조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 그리스도의 속상적(贖償的), 유화적(宥和的) 속죄, 인간들의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그리고 성경의 무오(無誤) 등의 중요한 진리들에 대한 아무런 언급들도 없다. 오늘날 교회들은 현대적 오류들이 부정하거나 모호하게 만드는 진리들을 분명하게 선언하는 보다 더 자세한 신조를 필요로 한다.

개신교회들은 종교개혁 이후 자신들의 신조들을 이미 가지고 있다. 이 신조들은 니케아 신조보다 더 자세하다. 오늘날 교회 일체성의 기초로서의 신조는 이러한 신조들의 본질적 내용들 이상을 포함해야 한다. 따라서 개신교회들이 그들의 확장된 신조들을 깍아내리고 보다 더 간략해진 신조로 돌아가려는 것은 후퇴이며 오류이다. 죤 머리가 표현하듯이, 그들의 현재의 신조들을 부정하는 것은 퇴보일 뿐만 아니라, 또한 “펼치시는 섭리의 사건들을 통해 그의 계시된 뜻을 더 충만히 이해하도록 교회를 깨우쳐 오셨던 성령님”을 모욕하는 것이다(Ibid., p. 284). 그러므로, 교회 일치를 위해 필요한 신조적 내용을 니케아 신조에 제한시키려는 어떤 지도자들의 생각은, 신조의 기능을 고려할 때, 명백히 잘못이다.

2. 니케아 신조가 시대적 제한성을 가진다는 주장에 대하여

둘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니케아 신조가 시대적 제한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의 특별 계시들을 구체적, 역사적, 문화적 상황들 속에서 주셨고 정통적 신조들도 그런 상황들 속에서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특정한 문화들로 옷입었다고 묘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 계시들이 주어진 문화적 상황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진리와 뜻을 전달하시는 적절한 수단이었고,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을 구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이러한 성격은 인간의 진술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런데 왜 이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신조가 시대적 제한성을 가진다고 강조하는가? 만일 이 강조가 신조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객관적, 영원적 진리들을 적절히 전달하기에 부족함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 자체의 근본적 성격에 심각하게 도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만일 하나님께서 역사적 상황을 그의 진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셨다면, 왜 어떤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작성된 신조가 영원한 진리를 적절히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겠는가?

더욱이, 만일 누가 신조는 시대적 제한성 때문에 영원한 진리를 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즉시 회의주의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사람의 모든 진술이 어떤 특정한 역사적, 문화적 상황에서 주어지는 것이므로, 우리는 “당신의 주장도 시대적 제한성을 가지는가?”고 정당히 질문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조적 진술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직접 전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신조들의 역사적, 문화적 옷들--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뿐만 아니라, 또한 신조들이 선언하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 자체에 대한 순전한 거부이다.

사실, 신조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정확히 반영할 때 영원한 성격을 가진다. 왜냐하면 진리와 교리는 내용에 있어서 불변적이며, 신조란 기본적 기독교 진리들과 교리들의 진술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이 기독교 진리들에 있어서 최종적 권위이므로, 모든 신조들은 성경에 일치해야 하고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신조가 성경적 진리들을 바르게 나타내는 한, 즉 그것이 성경적인 한, 그것은 또한 신적 권위를 가지고 또한 영원한 성격을 가진다. 교회의 신조들이나 교리들은, 아치볼드 앨릭잔더가 진술했듯이,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공식적 표현”이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권위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Archibald Alexander, “Creed,”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 clopaedia, I, 741).

3. 니케아 신조가 부적절하고 부정확하다는 주장에 대하여

셋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니케아 신조가 부적절하고 부정확하다고 주장한다. 만일 ‘부적절하다’(inadequate)는 말이 양적인 불충분성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니케아 신조는 내용에 있어서 교회의 일체성을 위한 기초로서 불충분하다. 그러나 만일 그 부적절함이 질적인 불충분성 혹은 부당성(impropriety)을 의미한다면, 그 주장은 잘못이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 그 신조는 그것의 기본적 철학에 있어서 부정확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 일방적이라고 주장하므로, 그들이 의미하는 부적절함이란 부당성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니케아 신조가 부적절하다는 그들의 주장은 그 신조의 권위와 타당성을 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생각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니케아 신조는 개신교회들을 포함하는 모든 기독교 세계가 공식적으로 성경적 신조로 수납해 왔던 신조이다. 영국교회의 39개 신조는 “니케아 신조는 철저히 받아들여지고 믿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가장 확실한 증거들에 의해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고 진술한다(Philip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III, 492). 루터교회의 일치신조(The Formula of Concord)도 니케아 신조는 “보편적 기독교 신앙의 일치적 찬동이요 정통적 참 교회의 고백이다”고 말한다(Ibid., pp. 94, 95). 에이 에이 하지는 니케아 신조를 모든 기독교회의 신조라고 표현하였다(A. A. Hodge, The Confession of Faith, p. 5). 그러므로 니케아 신조의 권위와 정확성을 부정하는 것은 분명히 기독교회의 정통적 전통 혹은 전통적 정통에 반대되는 이단적 개념이다.

4. 진리의 언어적 표현은 부적절하다는 주장에 대해

넷째로, 심지어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진리의 언어적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지난 반세기 동안 유행했던 신정통주의적 관념이다. 이러한 관념은 하나님의 계시가 언어적, 명제적(命題的, pro- positional)이지 않고, 인격적, 경험적임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실상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 즉 객관적(客觀的) 계시의 부정이며, 나아가서 결과적으로 기독교를 하나의 신비주의나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만들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실 때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셨다. 하나님의 계시들은 언어적, 명제적이며, 여기에서 사람의 언어의 지식적 기능(cognitive function)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언어적 표현, 명제적 진술을 반대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기본적 성격을 반대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계시 자체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이단적 개념들을 단호히 거절해야 하며, 건전한 옛 신조들을 굳게 붙들어야 하는 것이다.

5. 신학적 포용주의--복음의 개념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또한 복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의 포용에서도 나타난다.

분석

1.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함

첫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1963년 신앙 직제 위원회의 몬트리얼 보고서는 전통(Tradition)과 성경을 분리시키며, 교회는 실제로 복음 자체를 의미하는 전통(영어의 대문자 Tradition)을 소유하고 있지 않고, 단지 복음에 관한 증언들을 의미하는 전통들(traditions)의 형태만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았다(The Bible in the Ecumenical Movement, p. 21). 플레스만-반 리어는 말하기를, “우리는 전통(영어의 대문자 Tradition)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적 전통들(traditions)의 형태로 우리에게 온다”고 한다(Ibid., p. 3).

2. 복음이 교리가 아니고 살아있는 실재(實在)라고 주장함

둘째로, 어떤 이들은 복음이 교리가 아니고 살아있는 실재(實在)라고 주장한다. 몬트리얼 보고서는 복음의 명제적 진술의 부당성을 주장하면서, 복음은 살아있는 실재(혹은 존재, a living reality)인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말한다: “전통의 내용은 정확히 정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달하는 실재는 명제적 형식들 안에 완전히 포함될 수 없기 때문이다”(Ibid., p. 27), “전통이 의미하는 바는 복음 자체 . . . 즉 교회의 생명 속에 계신 그리스도 자신이시다”(Ibid., p. 19). 플레스만-반 리어는 그 보고서에 대해 논평하기를, “따라서 전통(Tradition)은 단번에 고정된 그리고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된 교리들의 총체로서 이해되지 않았고, 하나의 살아있는 실재, 즉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 속에서의 그 과정으로 이해되었다”고 한다(Ibid., p. 2).

3. 복음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주장함

셋째로, 어떤 이들은 복음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몬트리얼 보고서는 “복음의 선포는 항상 불가피하게 역사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말한다(Ibid., p. 20). 또한 1981년의 오뎃사 보고서는 순수한 복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복음의 ‘헬라주의화’의 문제 뿐만 아니라 그것의 ‘유대주의화’의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의 제기는 우리가 결코 ‘화학적으로 순수한’(chemically pure) 복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핵심으로 돌아간다”(Apostolic Faith Today, p. 252). 1983년 세계교회협의회의 뱅쿠버 총회도 이와 비슷하게 진술한다: “많은 선교사들은 그들이 전파한 복음이 이미 많은 다른 문화들과 오랜 세기 동안의 상호 작용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는 것과 그들이 이 시점에서 문화적으로 제한된 기독교를 다른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Gathered for Life, p. 33).

4.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고 주장함

넷째로, 어떤 이들은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고 주장한다. 오뎃사 보고서는 이렇게 진술한다: “신약의 글들 자체는 전통의 계속적 과정과 그것의 재해석을 증거한다. ‘복음은 동일한 복음으로 남기 위하여 변하는 것이 필요하다’. . . . 만일 신약 시대의 기간에 신앙의 작성과 재작성의 계속적 과정이 있었다면, 왜 우리는 이 과정이 역사상 어느 지점에서 중단되고 동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Apostolic Faith Today, p. 252).

비평

1.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대하여

첫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가 복음을 받았고 지금 소유하고 있음을 명백히 선언한다. 고린도전서 15: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갈라디아서 1:9,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사도는 그들에게 확정적, 불변적 복음을 전했고, 그들은 그것을 그들의 소유로 받았다.

그 뿐만 아니라, 주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실 때, 그 명령은 그의 제자들이 전파할 복음을 소유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만일 그들이 전파할 내용을 소유하고 있지 못했다면, 무엇을 전파할 수 있었겠는가? 주의 제자들은 주께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전파했다. 그러므로 교회가 복음 자체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은 명백한 오류이다.

2. 복음은 교리가 아니고 살아 있는 실재(實在)라는 생각에 대하여

둘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복음이 교리가 아니고 살아 있는 실재(實在)라고 주장한다. 물론, 복음의 내용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라는 점에서, 복음은 살아 있는 실재(존재, 인격)이다.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살아 계시다. 그러나, 복음에 있어서 교리와 인격(살아있는 실재) 간의 대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제시된 그 인격이시다. 예수께 관한 교리적 진술들은 복음의 근본적 내용이다(고전 15:3, 4). 그러므로 복음은 교리가 아니고 살아 있는 실재라는 견해는 비성경적인 오류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복음의 주요한 요점들을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들이 공격을 받을 때, 복음은 파괴된다”고 했다(Commen- tary on the Galatians, p. 31). 고든 클락도 다음과 같이 적절히 말했다: “머리와 가슴 사이의 어떤 대립도, 지적 신앙에 대한 어떤 무시도 없다. 기독교는 어떤 명확한 역사적 명제들의 진실성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한 명제들의 진실성을 부정하거나 그것들을 어떤 신비적 경험의 상징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Gordon Clark, Religion, Reason and Revelation, pp. 107-8).

3. 복음이 문화적 제약을 받는다는 생각에 대하여

셋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복음이 문화적 제약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1:8, 9에 나타난 바울 사도의 정죄는 순수하고 영원한 복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 구절에서 칼빈은 “복음의 순수하고 단순한 교리”에 대한 바울의 강조를 관찰했다(Commentary on the Galatians, p. 31). 이와 비슷하게, 루터는 로마서 주석에서 “이 서신은 바로 가장 순수한 복음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 mans, p. xiii).

만일 우리가 복음의 내용이 문화적으로 옷 입었다고 부른다면, 우리는 그 문화 자체를 하나님의 영원한 계시의 거룩한 수단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어진 문화 속에서 그의 영원한 진리들을 사람에게 주실 수 없는가? 사실, 만일 어떤 특정한 문화 속에서 주어진 인간의 모든 진술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었다면, 그래서 어떤 순수하고 영원한 진술도 가능하지 않다면, 오직 회의주의와 불가지론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문화적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순수한 복음이 없다는 생각은 명백히 오류이다.

4.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는 생각에 대하여

넷째로, 심지어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복음의 내용이 영원하고 불변적이라고 선언한다. 갈라디아서 1:8, 9에서, 바울 사도는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파했고 그들이 그로부터 받았던 것 외에 다른 복음이 없다고 밝히 말한다. 복음의 내용은 그것에 대한 사도의 선포와 더불어 영구히 고정되었다. 이것이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바른 복음관이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갈라디아서 1:8, 9에 관련하여 말하기를, “한 번 복음의 음성이 들렸으므로, 그것은 마지막 날까지 취소되지 못할 것이다. . . . [갈라디아 교인들은] 아무 것도 더해서는 안되고 아무 것도 수정해서는 안된다”고 했다(Lectures on Galatians, pp. 55, 56). 그러므로 복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는 생각은 명백히 비성경적인 오류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이처럼 기독교의 핵심인 복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을 포용하고 있다. 미국 남장로교회의 조직신학 교수이었던 로버트 댑니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의 포용주의적 견해 즉 소위 ‘넓은 교회주의’(Broad Churchism)는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해 신실한 증거를 하지 못하게 만든다. 각 유형교회는 증거적 단체이므로, 오직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사두개적 멸시나 불성실만이 이 견해와 조화될 수 있을 것이다”(Robert Dabney, “What Is Christian Union?” Discussions: Evangelical and Theological, II, 440).

6. 신학적 포용주의--믿음의 개념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또한 믿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의 포용에서도 나타난다.

분석

1. 믿음에 대한 반(反)지식적 견해를 주장함

첫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믿음에 대한 반(反)지식적 견해, 즉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는 견해를 주장한다. 예를 들어, 재시 마라쉰(Jaci Maraschin)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체계가 아니고 “하나의 산 경험, 하나의 존재의 양식, 그리스도인들이 그 안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분위기”이며, “이성적 범주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에 의존한다”(Towards Visible Unity, pp. 25, 26).

2. 믿음의 내용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함

둘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믿음의 내용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죠지 판텔리스는 현대 성경 학자들이 “예수의 ‘명확한’ 역사적 생애를 재구성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The Roots of Our Common Faith, p. 42). 또한, 1983년 신앙 직제 위원회의 로마 보고서는 주장하기를, “이 사도적 믿음은, 사도적 공동체의 본래의 증거와 여러 세기를 걸쳐 이루어진 그 증거의 충실한 설명과 연속성을 가지고, 변하는 시대들과 장소들의 상황 속에서 항상 새롭게 고백되고 해석되어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Ibid., p. 20).

비평

1. 믿음에 대한 반지식적 견해에 대하여

첫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믿음에 대한 반지식적 견해를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이 지식을 요구하고 그것을 내포함을 명백히 보인다. 이 사실은 복음서 기자들이 복음서들을 기록한 이유에서 증거된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1:4, “. . .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믿음에 지식이 필요치 않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생애에 대한 정보를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믿음의 지식적 성격은 또한 주의 제자들이 무엇을 전파했는지를 살펴볼 때에 분명해진다.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대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 특히 그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전파했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믿음의 지식적 요소를 강조했다. 칼빈은 믿음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이라고까지 표현했다(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II. ii. 7). 또한 그는 천주교회의 ‘맹목적 믿음’(implicit faith)의 개념을 반박하면서 “지식이 없는 곳에 믿음도 없다”고 단언했다(Commentary on the Galatians, p. 32). 촬스 핫지도 말하기를, “지식 즉 믿어야 할 명제의 의미의 인식은 믿음에 본질적이다”고 했다(Systematic Theology, III, 84). 제이 그레샴 메이천도 “모든 참 믿음은 지식적 요소를 내포하며 . . . 어떤 인격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 인격에 대한 지식을 가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 . . 어떤 명제들에 대한 동의는 믿음에 절대필수적 요소이다”고 단언했다(What Is Faith?, pp. 40, 48).

그러므로 믿음과 지식을 대립시키고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의 생각은 큰 오류요 명백히 이단적이다.

2. 믿음의 내용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주장에 대하여

둘째로, 어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믿음의 내용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믿음의 내용은 ① 예수 그리스도, ② 복음 진리들, 그리고 ③ 성경 전체인데, 그 어느 것도 변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며(히 13:8),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진리의 내용도 불변적이며(갈 1:8, 9),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기록된 성경은 하나님의 기록된, 불변적 말씀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내용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항상 변한다는 말보다 더 파괴적이고 악한 말이 없다.

7. 신학적 포용주의--천주교회에 대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포용주의는 개신교회 안의 이단적 자유주의 사상들의 포용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천주교회에 대한 긍정적, 우호적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사실, 천주교회 신자들의 수효가 개신교회와 헬라 정교회의 신자들을 합한 수효보다 훨씬 능가하므로, 소위 기독교계의 재연합이라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비젼은 천주교회를 포함함이 없이는 수적으로 큰 결함이 있을 것이다. 세계 기독교 백과사전에 의하면, 1980년 중반 천주교회 신자 수는 약 8억 9백만명, 개신교회 신자 수는 약 2억 8천만명, 헬라 정교회 신자 수는 약 1억 2천 4백만명, 영국교회 신자 수는 약 6천 5백만명이다(David B. Barrett, World Christian Encyclopedia: A Compara- tive Study of Churches and Religions in the Modern World AD 1900-2000, p. 6).

분석

타임지 종교 편집인 리차드 오슬링은 포트랜드 대학교 잡지에서, “오늘날, 기독교도들에게 당면한 궁극적 질문은 비천주교인들이 교황 제도 아래 연합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 이하의 것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다(Richard Ostling, “Piercing Together the Ecumenical Puzzle,” University of Portland Magazine, Summer 1986, p. 11). 그의 말과 같이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은 천주교회와 점점 가까와지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1. 천주교회에 대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긍정적, 우호적 태도

첫째로,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천주교회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초대 총무이었고 명예 회장인 빌렘 비셜트 후프트는 세계교회협의회와 천주교회의 적극적 협력 관계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가 반복해 말하는 바는, 세계교회협의회 내의 교회들과 천주교회는 이제 모두 한 동일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우리는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The Ecumenical Review, 37 <1985>, 336).

세계교회협의회의 전총무인 에밀리오 카스트로도 공언하기를, “세계교회협의회와 천주교회 간의 현재의 관계는 매우 긍정적이며 모든 종류의 우호 관계들이 있다”고 했다(One World, January-February 1986, p. 6).

1992년 세계교회협의회의 새 총무로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 콘라드 라이저(Konrad Raiser) 박사가 선출되었다. 그는 튀빙겐, 하이델베르그, 쥬리히, 하버드 대학 등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공부한 학자이다(기독교 연합신문, 1992년 9월 6일, 15쪽). 그의 배경은 루터파이지만, 그는 말하기를, “내가 에큐메니칼 운동 안으로 더 많이 이끌리면 이끌릴수록, 나는 헬라 정통교회와 로마 천주교회의 전통들을 더 많이 존경하게 되었고 그것들에 의해 더 많이 풍성하여졌다”고 했다(Calvary Contender, 1992년 10월 1일). 그는 후에 또 말하기를, 세계는 ‘후(後)-교파적’ 시대에 있고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전통적 교단들을 넘어서서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하며, 이것은 세계교회협의회가 비(非)교회들에 대해 열려 있음을 나타낸다고 하였다(Christian News, 1993년 6월 7일).

1997년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의 에큐메니칼 관계자 프랭크 센(Frank Senn) 목사는 말하기를, “나는 우리와 천주교회와의 관계가 우리가 다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의제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진영에 있다”고 했고, 부언하기를, “우리는 16세기에 분리되어 나간 자들이며, 우리는 다시 함께 돌아가야 할 자들이다”고 하였다(Calvary Contender, 1997년 8월 1일).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는 1997년 8월 모임에서 수세기 동안의 천주교도들과의 분열의 싸움이 끝났다고 선언하였고, 과거의 정죄들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진술을 958대 25의 표결로 승인하였다(Calvary Contender, 1997년 9월 15일).

1998년 1월 아시아 기독교협의회(CCA)와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FABC)는 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서 제2차 ‘기독교 일치를 위한 아시아 운동’ 세미나를 갖고 아시아 지역 신구교 일치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 세미나는 아시아에서 유일한 신구교 사이의 공식적인 논의 기구이다. (기독교 연합신문, 1998년 1월 11일, 2쪽; 기독교신문, 1998년 1월 25일, 1쪽.)

1998년 1월 기독교 일치주간 연합예배가 성공회 대성당에서 열려 기독교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였다. 거기에 참여하는 교회들은 일반 개신교회, 한국 성공회, 한국 정교회, 천주교회 등이다. (기독교신문, 1998년 1월 11일, 1쪽.)

세계 루터교회 연합회는 제네바에서 열린 1998년 연례회의에서 제의된 “칭의(稱義)의 교리에 대한 [천주교회와의] 공동선언문”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Dallas Morning News, 1998년 7월 4일). 그렇지만, 하루 뒤, 바티칸의 고위 관리들은 그 문서를 칭찬하면서 몇 쪽의 ‘설명서’를 내어놓았는데, 거기에는 이런 문장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생이 은혜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선행과 공적에 대해 주시는 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8월 1일.)

세계교회협의회와 천주교회 사이에는 협력을 위해 지난 7년 동안 연합 실무회가 있어왔다. 둘 사이의 관계는 점점 진전되었다. 천주교회는 이미 온 세계의 56개국의 교회 협의회들의 정회원이다. 1998년 세계교회협의회 제8차 총회에 참석한 많은 천주교 신부들과 수녀들 중의 하나인 토마스 스트란스키는 신문기자들에게 천주교회와 세계교회협의회 간의 관계에 대한 간단한 역사적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1972년에는 바티칸이 가까운 미래에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이 되기를 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했었지만, 이제 “나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미래에 세계교회협의회의 정회원이 되리라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2월 1일.)

미국 천주교 주교 대회와 미국 교회 협의회는 매년 문안과 사절단을 교환하며, ‘커져가는 협력’과 계속적인 ‘공동적 활동’을 보고한다. 1999년 6월 21일 크리스챤 뉴스는, “그러한 협력의 다른 한 상징으로, 교회 협의회의 회장이며, 미국의 전(前) 유엔 대사인 [친 마르크스주의적] 앤드류 영(Andrew Young)은 9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있는 천주교 성당에서 그의 취임식을 거행할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Calvary Contend- er, 1999년 7월 15일.)

매트 코스텔라는 미국 침례교회(ABC)의 2년마다 모이는 1999년 6월 모임에 대한 보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 침례교회 목회자협의회는 그 매2년 모임의 첫째날에 모였고 싸우스 다코타주 워터타운에 있는 하나님의 어머니 수도원에서 온 베네딕 수녀 아드리엔 카우프만이 ‘실제적 대화: 회중들이 분열 가능한 문제들을 분열됨 없이 다루는 수단’이라는 주제에 대해 강연하는 것을 들었다. (지난번 매2년 모임에서는, 천주교회 추기경이 전체 모임에서 설교하였다).” (Foundation, 1999년 7-8월; Calvary Contender, 1999년 9월 1일.)

1999년 미국의 역사 깊은 하버드 대학교 신학대학의 새 학장에 천주교회 신부인 브라이언 헤이르(Bryan Hehir)가 임명되었다. 헤이르는 이 직위에 임명된 최초의 천주교인이다(Christian News, 1999년 9월 13일; Calvary Contender, 1999년 10월 15일).

1999년 10월 31일, 루터교회 세계연맹(LWF)의 크리스티안 크라우제 주교와 천주교회 교황청 일치위원회 위원장 에드워드 카시디 추기경은 ‘칭의(稱義)의 교리’에 관한 공동 선언에 서명하였다. 이 사건은 신구교의 500년만의 화해의 사건으로 알려졌다(조선일보, 1999년 11월 2일, 8쪽). 크라우스 주교는 그 공동 선언을 치하하면서 그것을 ‘희망의 서명’이라고 묘사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그 선언을 칭찬하면서 그것이 완전한 기독교 일치의 회복을 향한 중요한 걸음이라고 말했고(Christian News, 2000년 1월 10일, 3쪽), 또 “그리스도인들이 환희와 일치와 연합으로 나아가는 길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라며 환영했다(기독신문, 1999년 11월 3일, 16쪽).

천주교회와 루터교 세계연맹(자유주의 루터교)의 대표자들은 1999년 10월 31일에 모여 칭의(稱義) 교리에 관한 그들의 애매모호한 공동선언서에 서명하였다(Calvary Contender, 1999년 12월 1일). 그러나 천주교회는 16세기 트렌트 공의회에서 공식적 교회 교의(dogma)가 된 이단들을 계속 주장한다. 천주교회가 그 무오한 교의들을 ‘개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 일치란 개신교 당사자들이 그들의 선조들이 믿었거나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일 것이다(World, 2000년 1월 1일).

빌리 그레이엄과 촬스 콜슨 같은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위대한 기독교 목자로 찬양을 받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최근에 2천년을, 면죄부의 발행으로 완전케 되는 ‘희년’으로(연옥에서의 활동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때로) 선포하였다(Calvary Contender, 2000년 1월 15일).

조선일보 2000년 1월 22일자(23쪽)는 “신-구교 ‘하나 되기’ 기도”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기독교 일치기도 주간 행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18일부터 25일까지는 그리스도교 여러 교파들이 화해와 단결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그리스도교 일치기도 주간’. 1968년 로마 교황청과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함께 제정한 일치기도 주간을 맞아 국내외에서 많은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 . . 18일 로마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가톨릭, 동방정교회, 성공회, 루터교, 감리교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2000년 대희년(大禧年) 교회일치 기도회가 열렸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영국 국교회 수장(首長) 조지 커레이 캔터베리 대주교, 동방정교회 대표 헬리오폴리스 수석대주교는 함께 베드로 대성당의 ‘거룩한 문’을 열어 젖히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 예배 의식을 가졌다. 교황은 ‘우리는 서로 떨어져 있는 형제들이지만 이제 굳은 결의를 가지고 완전한 일치에 이르는 길에 들어섰다’며 ‘지난 1000년간 교회가 하나되지 못한 데 대해 그리스도께 용서를 구하고 새 밀레니엄에는 간절한 기도로 교회의 일치를 이루자’고 강조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18일 저녁 서울 명동성당에서 가톨릭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소속 개신교 교단들, 루터교, 한국정교회, 성공회 등이 참가하는 합동기도회가 열렸다. 이 기도회는 여러 교파의 성직자들이 공동으로 의식을 집전했으며 성가대도 연합으로 구성하여 찬양을 불렀다. 교회협의회장 이성덕 구세군사령관은 설교를 통해 ‘신-구교 신자들은 관행과 제도가 다른 가운데 지내왔지만 이 순간 그리스도의 마지막 소원을 재확인하면서 “주 안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간절한 일치의 기도를 올려야 한다’고 말했다.”

캐나다 교회협의회는 창립 56년 만에 처음으로 천주교인을 회장으로 선출했다. 2000년 4월 앨버타 에드몬튼에서 열린 회의에서 캐나다 교회협의회는 천주교회 온타리오 주교인 안드레 발리를 새 지도자로 선출했다. 캐나다 최대 교파인 천주교회는 1997년 캐나다 교회협의회에 회원으로 정식 가입되었다고 한다. 캐나다 교회협의회는 현재 19개 교단이 가입되어 있다. 발리 주교는 취임 인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화를 위해 서로를 더 잘 아는 것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일치가 내일 당장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는 일치를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크리스챤신문, 2000년 5월 22일, 2쪽.)

미국의 앨러배머주의 헌츠빌 타임즈(Huntsville Times) 2000년 1월 15일자의 한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천주교 신부가 [남] 침례교회에서 연설하고 안식교인들과 그리스도의 교회 교인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대 희년 예배를 위한 기독교 일치 축제’에서이다. . . . 기독교 공동체는 1월 23일 [헌츠빌] 제1침례교회에서 예배와 찬양의 시간으로 모일 것이다.” 주최측은 이것이 이 곳에서의 새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작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 천주교 연사는 로마 천주교회와 헬라 정교회와 개신교와 복음주의자들/은사주의자들이 대화를 위해 함께 모이는 것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세계의 모든 주요 종교들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평화를 소유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 안식교 목사는 말하기를, “우리의 소망은 모든 분열의 장벽들이 제거되고 우리를 연합하고 함께 모으는 것들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오류 안에서 연합하는 것보다 진리에 의해 분리되는 것이 더 낫다. (Calvary Contender, 2000년 2월 1일.)

심지어, 에큐메니칼 운동에는 모종의 교황 제도를 받아들이려는 경향까지 존재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초대 총무이었던 비셜트 후프트는 일찌기 그 사실을 인정했다(The Ecumenical Review, 37 <1985>, 336).

1999년 5월 12일 영국교회(성공회)와 천주교회 신학자들로 구성된 ‘영국교회-천주교회 국제위원회’는 웨스트민스터 교회당에서 발표한 “권위의 은사(교회의 권위 III)”라는 제목의 문서에서 “로마 주교는, 교회의 보편적 수위권(首位權)의 표현으로서, 진리를 분별하고 밝히는 특별한 사목(司牧) 활동을 한다”고 명시했다. 죠지 캐리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번 문서에 대해 “환영한다. 폭력과 분열로 갈라진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이 한 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기독신문, 1999년 5월 19일, 16쪽; Calvary Contender, 1999년 8월 1일.)

2.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천주교회의 태도의 변화

둘째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천주교회의 태도도 변하였다. 천주교회는 1959년까지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 밖에 있었다. 그러나 교황 요한 23세는 1960년에 기독교 일치 촉진 사무국을 설립했고, 1962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시작했고, 그를 이어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쳤고, 1967년 기독교 일치 촉진 사무국을 교황청의 상설 기관으로 만들었다. 이 두 교황의 노력으로 천주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적극적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특별한 전환점이었다. 그 회의 이후, 천주교회는 다른 교회들과의 대화들에 활발히 참여해 왔다(John J. McDonnell,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and the Catholic Church, pp. 129-221).

비록 천주교회가 현재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교회가 아니고 또 회원권을 구하고 있지도 않지만, 그 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활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68년 이후, 10-15명의 천주교회 신학자들이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 직제 위원회에 정회원으로 참여해 왔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회는 (1) 매년 기독교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을 위한 예비 대회들에 참여했고, (2) 세계교회협의회의 주요 대회들에 참관인 혹은 참조인으로 정규적으로 참여했고, (3) 세계교회협의회의 프로그램 작성 간사 중에 들어 있고, 또한 (4) 1985년 현재, 적어도 25개의 지역적 혹은 국가적 교회 협의회에 회원권을 가지고 있다(Apostolic Faith To- day, p. 9).

1993년 8월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제5차 신앙 직제 위원회 세계 대회의 120명 회원 중 26명은 천주교인으로서 전적으로 참여하였다(Calvary Contender, 1993년 9월 15일). 1999년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천주교회는 이미 온 세계의 56개국의 교회 협의회들의 정회원이다(Calvary Contender, 1999년 2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수석 교리 사무관인 라칭거 추기경은 “교회의 일치와 신앙과 도덕에 대한 [천주교회의] 책임”에 대해 말하며, “이제까지 분리된 공동체들이 교황과 더불어 일치 안으로 들어올 때” 교황직의 사용이 [기독교계를] 변화시킬 방식들을 구상한다(Christianity Today, 1998년 5월 18일). 교황은 1995년에 비(非)천주교인들을 초청하기를, 교황직의 사용이 기독교 일치에 장애물이 아니라 도구가 되도록 그것을 함께 재고하자고 하였다(Calvary Contender, 1998년 6월 1일).

1998년 세계교회협의회 제8차 총회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공식적 편지가 세계교회협의회 총무인 콘라드 라이저 박사에게 전달되었는데, 거기에서 교황은 총회 대표들에게 문안하고 축하하면서 말하기를, “세계교회협의회와 천주교회의 관계에 관하여, 연합 실무회의 골격 안에서 미래의 협력의 길들이 기독교 일치를 위한 추구를 강화하기 위하여, 또한 그것의 유형적 차원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다”라고 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2월 1일.)

3. 은사 운동의 접착제 역할

셋째로, 오늘날 은사 운동은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 간의 접착제로서 나타난다. 이그네이셔스 카타넬로(Ignatius Catanello)에 의하면, 1983년 미국에서만 60만명 이상의 천주교인들이 매주 은사주의적 기도회에 참여하고 있고, 온 세계에서는 약 5천만명이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The Effects of the Charismatic Movement on Local Ecumenism” , p. 1).

4. 복음주의자들의 천주교회 포용

천주교회에 대한 포용적 태도는 자유주의적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또한 적지 않은 복음주의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이런 예들은 점점 누적되고 있다.

(1) 빌리 그레이엄

1993년 6월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은 미국 피츠버그에서 세번째 전도대회를 개최했는데, 1050개의 교회들과 65개 교단들이 협력하였다. 이 대회에서 여섯 명의 천주교인들은 실행위원에 포함되었다(Christianity Today, 1993년 7월 19일자; Calvary Contender, 1993년 8월 1일).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 이사 스털링 허스턴은 말하기를, “지난 10-15년 동안 그레이엄 전도대회에서 천주교회의 참여가 크게 늘어났고 약간의 수의 천주교회 지도자들은 이제 전도대회 계획위원회들의 공식적 대표자들로 봉사한다. 천주교회 신자들은 안내위원들, 성가대원들, 심지어 상담위원들로 환영을 받고 있다”고 했다(Calvary Contender, 1993년 12월 1일).

무디 먼슬리 1993년 11월호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오늘날, 선이든 악이든,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을 분리시키는 선들이 사라지고 있다. 양쪽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 촬스 콜슨은 쓰기를, “지금은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가 우리의 신앙고백들과 우리의 전통들의 차이점을 무시하고 함께 모일 적절한 때이다”라고 했다. 빌리 그레이엄과 루이스 팔라우와 월드 비젼 같은 단체들이 천주교인들을 포함한다. (Calvary Contender, 1993년 12월 1일.)

휴스턴 크로니클(Houston Chronicle) 1997년 3월 30일자는 빌리 그레이엄의 알라모도움에서의 전도집회에 대한 보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지역 천주교회도 중심적 역할을 했는데, 그것은 교황의 1987년 샌안토니오 방문 기간에 보인 그 침례교인[빌리 그레이엄]의 후원에 대한 일종의 보답이었다. . . . 기독교 지도자로서 빌리 그레이엄은 신학적 차이점들을 초월하는 존경을 얻었기 때문에 침례교인들과 천주교인들과 장로교인들이 그레이엄 전도집회 준비를 위한 수개월 전의 계획 모임들과 훈련 회의들에 함께 모인다.” (Calvary Contender, 1997년 5월 1일.)

복음 전파(Proclaiming the Gospel) 1997년 6월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주교회는 이제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대회들에 참여하고 있다. 전도대회를 선전하고 촉진시키고 천주교회 상담자들을 사용하는 댓가로, [빌리] 그레이엄은 믿음을 고백하며 앞으로 나오는 모든 천주교인들을 그들의 천주교회들로 돌려보내겠다고 그 지역의 주교와 약속한다”(Calvary Contender, 1997년 6월 15일).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8월 10일자는 이렇게 썼다: “. . . 인구 약 백만명의 [오타와] 지역을 위한 지난 6월 25-28일 빌리 그레이엄 전교 활동에서,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 간의 간격--그리고 어느 정도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 간의 간격--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전도대회를 후원한 470개의 지역 교회들 가운데, 60개는 천주교회들이었다. 천주교회의 참여는 모든 그레이엄 전도대회 가운데 가장 중대하였다.” 그 잡지는 언급하기를, 새 신자들 중의 얼마는 천주교회에서 데려갔다고 하였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9월 1일.)

빌리 그레이엄은 최근의 한 대담에서 자기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금세기의 인물로 뽑겠다고 말했다(Religion Today, 1999년 12월 20일). 그는 말하기를, 현 교황은 “지난 200년 중의 교황들 가운데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나는 그의 용기, 결정, 지적 재능, 및 천주교회, 개신교회, 헬라 정교회의 차이점들에 대한 그의 이해, 그리고 어떤 형식의 화해에 대한 시도에 감탄한다”고 하였다. (Calvary Contender, 2000년 1월 1일.)

(2) 빌 브라이트

대학생 선교회의 창설자요 총재인 1969년 천주교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천주교회를 공격하지 않는다. 우리가 믿기는, 하나님께서 그 교회 안에서 힘있는 역사를 하고 계시며 세계를 복음화시키는 일을 돕기 위하여 수백만의 천주교인들을 사용하실 것을 의심치 않는다고 했다”(The Post and Times Star, Cincinnati, Ohio, 1969년 8월 30일; David W. Cloud, "Bill Bright Joins Hands with False Gos- pels," Christian News, 2000년 1월 3일, 18쪽).

브라이트가 창설한 대학생 선교회에는 1970년대에 간사들 가운데 천주교인들이 있었다(James Hefley, "A Prejudiced Protestant Takes a New Look at the Catholic Church," 1971, p. 122; Cloud, Ibid.). 또한 그의 지도 아래 열린 ‘키(Key) ’73’과 1976년의 ‘여기에 생명 아메리카가 있다’는 집회들을 위해 천주교인들이 참여하였다(Cloud, Ibid.).

1986년 빌리 그레이엄의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브라이트는 또 이렇게 말했다: “개신교인들과 천주교인들이 서로 많이 관계하고 싶어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영께서는 천주교회 뿐만 아니라 또한 개신교회의 교제들과 교통들에서 이와 같이 크게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곳마다 매우 편안함을 느낀다”(Foundation, 1986년 7-8월호; Cloud, Ibid.).

빌 브라이트는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을 따뜻하게 용납한다. 어떤 이들은 그가 1994년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ECT)라는 상호 인정과 협력의 진술서에 서명한 것 때문에 그를 비난했고 ECT에 대한 그의 입장을 취소하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천주교인들 가운데 수천만명의 참된 신자들이 있다’고 말하면서 거절했다. (Christianity Today, 1997년 7월 14일; Calvary Contender, 1997년 8월 1일.)

(3) 다른 복음주의자들

빌리 그레이엄 뿐만 아니라, 또한 제리 팔웰, 잭 반 임페, 제임스 로빈슨, 에드 답슨 등의 복음주의자들은 다 최근에 천주교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하여 찬사를 보냈다. 1985년, 에드 답슨은 “교황 제도가 적그리스도적이라고 선언하는 극단주의자들은 . . .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다”고 말했다. 케넷 칸써는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85년 9월 6일자 사설에서 교황을 ‘성 베드로의 계승자’라고 불렀고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그 ‘자신의 호소’에 대한 이유들을 열거하였다. (Calvary Contender, 1992년 12월 1일).

촬스 콜슨, 빌 브라이트, 제임스 패커 등의 복음주의자들은 1994년 기본적으로 서로의 양무리를 ‘개종시키지’ 않기로 천주교인들과 합의한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라는 문서에 서명하였다(Calvary Contender, 1997년 6월 15일).

1997년 9월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ECT)라는 모임에서 “구원의 선물”이라는 두번째 진술서를 발표하였다. 그 글은 매우 복음적인 구원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 외에는 구원 얻는 다른 길이 없다고 바르게 진술한다. 또 그것은 의롭다 하심이 인간의 선행으로 말미암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만 근거한다고 바르게 말한다. 그러나 그 진술서는 천주교회의 공로 개념, 연옥, 마리아 경외 등의 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이해들’이 있다고만 언급하고 그것의 옳고 그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모든 사람은 주 안에서 형제 자매이다”라고 말한다. 또 그것은 진술하기를, “종교개혁의 유산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고전적 신앙고백을 확신을 가지고 공언하는 복음주의자들로서, 천주교회의 교훈에 양심적으로 충실하는 천주교회 신자들로서, 그리고 우리의 기독교 선조들에 대한 우리의 빚과 우리의 동시대인들과 우리 후에 올 자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함께 인식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우리는 우리가 여기에서 고백한 복음 안에서의 우리의 일체성을 선언한다”고 했다. 그 진술서에 서명한 사람들은 대학생 선교회 총재 빌 브라이트,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의 해롤드 브라운과 죤 우드브릿지, 위튼 대학의 마크 놀, 카나다의 리전트 대학의 제임스 패커 등이다. 이들은 다 오늘날 유명한 복음주의자들이다.

달라스 신학교 교장 척 스윈돌은 1997년 10월의 한 서신에서 테레사 수녀를 ‘주목할 만한 여인’이라고 불렀다(Calvary Contender, 1998년 2월 1일). 제임스 답슨 박사는 고(故) 테레사 수녀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그의 생애에서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잭 반 임페는 이 ‘상냥한 40킬로그램 몸무게의 숙녀’가 구원을 받지 못한 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꾸짖는다(C.E.C. Journal, 1998년 2월). 그러나 빌 잭슨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떤 개인의 구원을 판단하기를 원하지 않지만, 그 [수녀] 자신의 입술로부터 그의 영혼의 상태에 관한 어두움을 나타내는 말들이 나온다. 그는 누구와 사진을 찍을 때마다 영혼이 연옥을 떠나기를 기도했다; 그는 성찬떡에 대한 사제의 축복이 아니면 예수님을 소유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교황에게 마리아를 ‘그리스도인의 협력 구속자, 협력 중보자 및 보혜사라고 부르기를 공공연하게 간청하였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3월 1일.)

잭 반 임페는 슬프게도 영적 분별력이 없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칭송하는 자들과 연합하였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3월 2일자는, 그가 최근에 교황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변호하는데 그의 전체 방송을 사용하였다고 언급하였다. 그는 다음번 교황이 요한계시록의 거짓 선지자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 경고했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들로서 결합되었다”고 말했다(Calvary Contender, 1998년 3월 15일).

사업가이며 천주교인인 마이클 티미스(Michael Timmis)는 국제 교도소 선교회(Prison Fellowship International)의 회장으로 지명되었다. 그의 전임 회장이며 설립자인 척 콜슨은 명예 회장으로 이사회에 남아 있다(Moody Monthly, 1998년 8월). 티미스는 또한 프라미스 키퍼스의 이사로 있고(Calvary Contender, 1997년 9월 1일), 지난 10월에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모인 제4회 프라미스 키퍼스 총회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7월 15일.)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4월 6일자에는 ‘여섯 개의 영감 있는 비디오 세트’에 대한 전면 광고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라는 제목이었다. 이것에 관하여, 그 광고문은 이러하였다: “이 영감을 주는 비디오 선집은 가장 사랑받는 종교적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과 연합하도록 여러분을 초청한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4월 15일.)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9월 7일자는 고(故) 레이먼드 브라운 ‘신부’의 신약 개론을 높이 추천했고 “그는 오늘날 신약학의 탁월한 종합을 제공한다”고 논평했다. 브라운은 예수께서 전지(全知)한 하나님이 아니셨고 오류를 범하셨다고 말한 영향력 있는 천주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자이었다. 그는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거부했고,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적이었다. 그는 1971년에 뉴욕의 자유주의적인 유니온 신학교에 갔고 그 학교의 첫번째 종신직 천주교회 교수가 되었다(Christian News, 1998년 9월 14일). 그러나 풀러 신학교의 1984-85년 요람은 브라운을 강사 명단에 두었다(Calvary Contender, 1984년 10월 15일).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의 설립자요 이사장은 빌리 그레이엄이다. 죠셉 스토웰, 워런 위어스비, 에드 답슨은, 천주교인들과 더불어, 그 잡지의 ‘자문 편집 위원들’로 명단에 올라 있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10월 15일.)

1998년 12월 미국의 무디 성경학교 교장 죠셉 스토웰은 위튼 대학교 총장 듀안 리트핀(Duane Litfin)과 트리니티 국제대학교 총장 그레고리 웨이브라잇(Gregory Waybright)과 함께 천주교 추기경 프랜시스 죠지의 집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하였다(Moody Student, 1999년 2월 2일). ‘친분 관계’가 형성되었고, ‘동반자 관계’가 논의되었다. 스토웰은, 그 네 사람이 ‘사회 문제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으나 협력 때문에 ‘신학적 이해들을 타협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죠지 추기경은 ‘신학을 이야기하기를 원했으며’ 또한 “우리 회중들에게 어떤 공통적 봉사 활동들을 함께하며 기도하고 예배하자는 요청을 가지고 다음 천년에 들어갈” 가능성을 논하였다. 리트핀은, 추기경과의 친분 관계가 무엇으로 인도할지 모른다고 말했으나 ‘그러한 친분 관계를 가지는 것이 가지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3월 15일)

미국 필라델피아 제10 장로교회의 목사요 ‘고백하는 복음주의자 연맹’ 회장인 제임스 보이스는, 1999년 12월 7일 크리스챤 뉴스와의 대담에서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ECT)라는 문서에 서명한 대학생 선교회 총재 빌 브라이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단지 빌 브라이트는 신학적이지 않다. 그는 사업가다. 나는 그가 무슨 신학이든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단지 나가서 ‘세상을 복음화하고’ 있다. 그는 그의 ‘예수님’ 영화를 보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있는 이 수백만명의 사람들을 얻었다. 천주교인들도 좋은 일들을 하고자 하므로, 빌 브라이트는 실제로 천주교인들이 주님의 놀라운 전사요 충성된 군사라고 생각하지 않을 아무런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 그렇지 않은가? 천주교인들은 ‘사영리’를 믿으며 그것이 빌 브라이트의 생각에 좋다. 그래서 그는 그들과 함께 있다. 그는 그것보다 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를 정말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ECT에] 서명한 제이 아이 패커 같은 사람이다.” 패커는 신학자이지만 브라잇과 같이 에큐메니칼적이다. 브라잇과 대학생 선교회는 수년 동안 천주교인들과 가까이 일했고 그들을 간사로 환영하였다. (Christian News, 1998년 6월 8일; Calvary Contender, 1998년 12월 15일; 1999년 1월 1일.)

제임스 보이스는 크리스챤 뉴스와의 그 대담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척 콜슨은 하나님을 위해 중대한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 . . . 정력적인 큰 활동가요 운동가이다. 그것은 굉장한 일이다. 그의 아내는 천주교인이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나 적어도 그가 그의 책들에서 존경하는 사람들은 천주교인들이다. 예컨대, 테레사 수녀는 매우 높게 평가되고, 말콤 머거리지 등. 나는 참으로 그가 천주교회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견해를 가지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만일 그의 수입이 개신교인들로부터 오지 않는다면 그가 천주교회로 전향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항상 말해왔다. . . . 그것이 내가 그에게서 받은 인상이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1월 1일.)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에서 제임스 답슨 목사의 사모(숼리)는 매년 모이는 전국 기도의 날의 의장이었다. 공동의장은 대학생선교회의 빌 브라이트의 사모(보네트)이었다. 촬스 콜슨은 전국자문위원회에 들어 있다. 랍비 조슈아 하버만, ‘신부’ 로버트 시로코, 및 제임스 케네디는 연결고리들이었다. 전국 기도의 날(NDP) 책자에 의하면, “모든 종교들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전통들에 따라서 참여하도록 격려된다. . . . 전국 기도의 날은 모든 신앙의 사람들이 그들의 이해하는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만들어졌고 의도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다른 신들에게 기도하는 사람들과 함께 연합하여 기도할 수 있는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수 24:18-20). 그는 그의 영광을 유대교와 로마 천주교의 이방신들과 거짓신들과 함께 나누시지 않을 것이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6월 1일.)

척 콜슨의 교도소 선교회의 성직자들의 70페센트 이상이 왜 천주교인들인가? 천주교회 신부 죤 뉴하우스와 함께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라는 운동의 협력전개자인 척 콜슨은 왜 최근에 교도소 선교회의 말고삐를 현재 천주교인인 마이클 티미스에게 넘겨주는 것을 허락했는가? 왜 달라스 신학교는 ‘미국을 위한 천주교 캠페인’의 설립 이사인 윌리엄 베네트를 지난 달 주강사로 세웠는가?(Berean Call, 1999년 10월호). 빌리 그레이엄, 빌 브라이트, 로벗슨, 답슨 및 기타 신복음주의자들은 천주교회 지도자들을 형제들로 간주한다. 그들과 제리 팔웰과 잭 반 임페는 교황에게 찬사를 보냈고 전도대회들과 기타 행사들에서 천주교회 지도자들과 더불어 활동한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11월 15일.)

최근의 한 책에서 척 콜슨은 말하기를, “오늘날 모든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희망적 말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나왔다”고 했다(Proclaiming the Gospel, 1월-2월호).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부부는 척 콜슨과 그의 교도소 선교회를 후원하지 말아야 할 이유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첫째로, 콜슨 씨의 천주교회와 교황에 대한 높은 견해; 둘째로, 그의 글들과 말들에서 천주교인들을 기독교인으로 포함함; 셋째로,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 함께’라는 협정 문서들에 서명함; 넷째로, 교도소 선교회의 지도자들 속에 로마 천주교인들을 포함함; 다섯째로, 교도소 선교회의 신앙 진술의 당혹케 함[‘칭의’가 로마 천주교인들에게 받아들여지도록 고안됨].” (Calvary Contender, 2000년 2월 15일.)

비평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은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연합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 심지어 복음주의자들도 천주교회를 용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개신교회는 천주교회를 우상숭배적이고 변질된 적그리스도적 집단으로 간주해 왔으며 천주교회는 그 기본 교리들에 있어서 변하지 않았다. 천주교회의 근본적인 오류들을 비평함으로써 천주교회를 포용하려는 개신교회들의 경향이 잘못된 것임을 살펴보자.

1. 교황의 권위에 관한 교리

첫째로, 천주교회는 교회와 그 전통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와 동등하다고 간주하면서 로마 교회의 우위성과 교황의 베드로 사도 계승을 주장해 왔고, 심지어 교황 무오설까지 선언했다. 1870년 바티칸 회의는, 로마 교황이 그 직분을 수행하며 믿음과 윤리에 관한 교리를 정의할 때 그는 무오성을 소유한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1964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여전히 변함 없이 교황을 “베드로의 계승자,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전체 교회의 유형적 머리라고 부르면서” 교황의 수뇌성과 무오한 교훈의 직분에 관한 그 동일한 교리를 “모든 신실한 자들이 확고히 믿어야 할” 교리로 다시 제시했다(Documents of Vatican II, ed. Austin P. Flan- nery, pp. 370, 380).

그러나, 교황 무오성에 대한 천주교회의 이 교리는 성경에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개신교회 교리들의 제1 원리인 성경의 신적, 절대적, 최종적 권위의 교리에 가장 모순된다. 또한 교황 무오성의 교리는 교황의 칙령들의 실제 역사에도 모순되는 거짓된 교리이다. 역사상 교황들의 사상들과 선언들 간에는 차이점들과 심지어 상호 충돌이 없지 않았다. 예를 들어, 로마 감독 그레고리 1세(590-604)는 누구든지 ‘전 세계의 감독’이라는 칭호를 가지고자 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말했으나, 보니페이스 3세(607)는 황제로 하여금 그에게 그러한 칭호를 주도록 만들었다. 또한 씩스투스 5세(1585-1590)는 성경 읽기를 권장하였으나, 피우스 7세(1800-1823)와 여러 다른 교황들을 그것을 정죄하였다. 무오한 교황들이 서로 모순된 교훈들을 할 수 있겠는가?

그 외에도, 교황들 가운데는 역사상 드러나게 부도덕한 자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요한 12세(955-964)는 살인, 위증, 신성 모독, 간음, 근친 상간 등의 죄로 로마 황제에 의해 처형되었다. 또 알렉산더 6세(1492- 1503)는 여섯 아이들을 낳았는데, 그 중 둘은 그가 교황이 된 후에 태어났다. 이런 부도덕한 자들이 무오한 권위를 가진다고 생각될 수 있겠는가?

덧붙여, 교황들은 상당한 정치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모습과 전혀 다르다. 예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고(요 18:36), 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그는 정치적 권력을 소유하지도 행사하지도 않으셨다. 그는 천주교회의 교황들의 모습과 전혀 다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주교회의 교황이 하나님의 참 교회의 머리나 무오한 지도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참되고 유일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영광을 부당하게 탈취한 자라고 결론을 내린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렇게 진술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하신 머리이시니,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주장은 비성경적이요 사실에 근거가 없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는 권리 침해이다”(25:6).

2. 마리아에 관한 교리

둘째로, 천주교회는 마리아에 대한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천주교회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와 승천을 주장한다.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는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를 선언했고, 1950년 피우스 12세는 마리아의 승천을 선언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똑같이 선언하기를, “마침내 원죄의 모든 더러움 없이 보존된 그 순결한 동정녀는 . . . 그의 지상 생애가 끝났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리움을 받았다”(Ibid., VIII. 59)고 하였다.

또한, 천주교회는 신도들에게 마리아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 카톨릭 교리서에 보면,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는 항상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에게 신뢰하는 마음으로 각별한 공경과 기도를 드리고 모든 위험과 어려움에서 도와주시기를 청해야 한다”고 말했다(한국천주교 주교회의, 1967년, 114쪽). 천주교회에서 성자로 추앙되었던 알폰스 추기경은 말하기를, “많은 것들을 하나님께 구하고 받지 못하지만, 마리아에게 구하여 받는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구하는 바를 예수께 기원함으로써보다 마리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더 신속히 얻는다”고 했다(Alphonse de Ligouri, The Glories of Mary, pp. 127, 254).

뿐만 아니라, 천주교회는 마리아에게 부당한 많은 칭호들을 돌린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선언하기를, “[마리아는] 그의 지상 생애가 끝났을 때 몸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리움을 받았고 주님에 의해 만물 위의 여왕으로 존귀케 되었다”(Ibid., VIII. 59)고 했다. 카톨릭 교리서도 말하기를, “마리아는 . . . 하늘에 오르시어 천상과 지상의 모후(母后)가 되셨다”(114쪽)고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또 선언하기를, “하늘로 올리움을 받은 후 그[마리아]는 이 구원하는 직책을 버리지 않으셨고 여러 가지 중보사역에 의해 계속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선물들을 가져다 주신다. . . . 그러므로 그 복된 동정녀에게 우리는 교회에서 변호자[보혜사], 돕는 자, 은혜 베푸는 자, 그리고 중보자의 명칭들로 빈다”고 하였다(Ibid., VIII. 62).

추기경 알폰스는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죄인들은 마리아를 통해서만 용서받는다”(p. 83), “마리아에게 의지하지 않는 자는 실패하고 잃어버려진다”(p. 94), “마리아는 하늘의 문이라고 불리운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를 통하지 않고는 저 복된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p. 160), “구원의 길은 마리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에게도 열려져 있지 않다”(p. 169), “하늘과 땅의 모든 능력이 그에게 주어졌으므로 마리아의 명령에 모두가 순종한다. 심지어 하나님도 순종하신다. . . .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온 교회를 마리아의 통치 아래 두셨다”(p. 180, 181), “그는 우리의 구원, 우리의 생명, 우리의 소망, 우리의 모사,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도움이시다”(p. 257).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밝히 가르치는 대로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기도해야 하며,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신적 경배와 기도를 올려서는 안된다. 출애굽기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마태복음 4:10,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또한, 우리의 구주와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마리아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에 불과하다. 누가복음 1:38, “마리아가 가로되 [자신의 잉태의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에게]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우리는 성경에서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높임을 볼 수 없고 도리어 그 반대의 예들을 본다. 마태복음 2:11, “[동방박사들은]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누가복음 2:48, 49, “그 부모가[그들이]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마리아는 인간 모친에 불과하였다.

무리 중 한 사람이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고 예수께 말하였을 때, 그는 말씀하시기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고 하셨다(눅 11:27, 28). 또 그의 모친과 형제들이 그를 찾아왔을 때 그는 그의 모친을 다른 제자들보다 달리 특별히 높이지 않으셨다. 그는 오히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50).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마리아 교리는 확실히 비성경적이며 우상숭배적이다. 우리가 그것을 우상숭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피조물에게 신적 명칭과 속성 그리고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다.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보혜사, 중보자, 천국의 문, 구원의 길, 혹은 천상 천하의 어머니와 여왕’이라고 부르는 행위가 그러하다. 촬스 핫지는 천주교회의 성인, 천사, 마리아 숭배가 우상숭배적이라고 비평하면서 그 교회가 이론적으로는 마리아를 하나님처럼 섬기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피조물에게 전지와 전능의 신적 속성들, 그리고 기도 응답의 신적 사역을 돌리기 때문에 우상숭배적이라고 잘 지적하였다(Systematic Theology, III, p. 281).

3. 칭의(稱義)에 관한 교리

셋째로, 천주교회는 칭의(稱義, 의롭다 하심)에 대한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천주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복음 진리를 부정한다. 1563년 트렌트 회의는 선언하기를, “누구든지 사람이 공식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다고 말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고(Canons of Trent, Session VI, Canon X), 또 “누구든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轉嫁)에 의해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하면, . . . 혹은 심지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호의뿐이라고 말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다(Ibid., Session VI, Canon XI).

칭의의 진리와 관련하여, 천주교회는 신자들의 죄들의 속죄가 남아 있다고 가르친다. 여기에서 선행과 기도를 통한 속죄의 교리와 연옥의 교리 등이 나온다. 카톨릭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고백의 성사로 지옥의 벌은 언제나 사함을 받으나, 세상과 연옥의 벌까지 사함을 다 받는 것은 아니다. 이 유한한 벌의 사함을 받기 위해서 신부는 보속을 정해준다. 고백 성사를 받는 사람은, 우리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죽으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자기 죄에서 오는 벌을 보상해야 한다”(148쪽), “우리는 마음의 준비와 열심을 갖고 대사(大赦, 교회가 주는 큰 용서)를 받기 위해 기도와 선행을 해야 한다”(149쪽).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이렇게 선언했다: “죄는 속죄되어야 한다. 이것은 이 땅 위에서 이 생의 슬픔과 불행과 시련의 일들을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속죄는 내세에서 불과 고통들 혹은 정결케 하는 형벌들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Indulgentiarum Doctrina, I. 2), “하나님의 사랑 속에 참으로 회개하고 죽었으나 그들의 죄와 태만에 대해 적절한 회개로 보상하지 못한 자들의 영혼들은 죽은 후에 연옥에서 그들의 빚을 제거하기 위해 준비된 형벌들로 깨끗케 된다”(Ibid., I. 3).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완전하며 오직 그 공로에 근거하여 죄인이 죄씻음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을 밝히 가르친다. 로마서 3:21, 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것은 일한 것이 없이도 은혜로 받는 의이며(롬 4:4, 5),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 의이다(롬 5:18).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義)이시다(고전 1:30).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받은 사죄(赦罪)와 칭의(稱義)는 완전하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성도들의 기도와 선행은 결코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고, 예수님 믿고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은 결과요 그 열매일 뿐이다.

4. 미사(Mass)에 관한 교리

넷째로, 천주교회는 미사(mass)에 대한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 천주교회의 미사는 개신교의 성찬과 같다. 그러나 그 내포하는 의미는 매우 다르다. 천주교회는, 미사가 속죄 제사로서 거기에서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미사 때마다 반복하여 죽으신다고 주장한다.

트렌트 회의는 선언하기를, “누구든지 미사에서 참되고 적절한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다(Canons of Trent, Session XXII, Canon I). 트렌트 신앙고백에는 진술하기를, “나는 이와 같이, 미사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참된, 적절한 속죄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진다고 고백한다”고 했다(제6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선언하기를, 미사는 “십자가의 제사가 계속되는 제사”이며 “미사의 제사에서 우리 주님은 제물로 죽임을 당하신다”고 했다(Eucharisticum Mysterium, Introduction C, Section 1, 2).

한국의 카톨릭 교리서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미사 성제는 예수님이 바치신 십자가의 제사를 새롭게 하고 되풀이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제의 손으로 당신 자신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제물로 드리신다. . . . 따라서 미사 성제는 십자가의 제사와 완전히 같으며, 가장 완전한 신약의 제사이다”(135, 136쪽).

그러나 천주교회의 미사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의 사역을 모독하는 교리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 19:30). 칼빈의 주석대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성취하셨음을 나타낸다(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pp. 235-37). 칼빈은 또 말하기를, 이 말씀은 미사라는 가증스러운 것을 정죄한다고 했다(Ibid.).

또한 히브리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하팍스, 에파팍스)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음을 강조하였다. 히브리서 7:27,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26,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브리서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위해 더 이상 속죄의 제사가 필요치 않다. 히브리서 10: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상의 비성경적, 이단적 오류들을 볼 때, 우리는 천주교회가 참 교회가 아니고 복음 진리를 버린 거짓된 교회이며 마리아를 신격화 하는 우상숭배적 단체라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천주교회는 신약교회 2천년 역사상 대표적인, 가장 강력한, 그리고 지금도 세계적으로 매우 활동적인 이단이다.

그러므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천주교회가 적그리스도적이며 우상숭배적 단체임을 분명히 하였다.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교황은 “귀신들이 충만한 자요 . . . 하나님의 원수요 적그리스도”라고 단언했고, 교황 제도를 마귀적이라고 했다(Martin Luther, Church and Ministry, III, p. 363). 그는 “이 악마적인 교황 제도는 땅 위의 최종적 불행이요, 모든 악령들이 전력을 다해 할 수 있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표현했다("Against the Roman Papacy, an Institution of the Devil, 1545," in Luther's Works, vol. 41, p. 376). 개혁교회의 기초를 닦은 죤 칼빈도, 천주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치명적 대적자들로 간주했고, 천주교회는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왕 때보다 더 불순한 교리와 더 큰 우상숭배를 가지고 있고, 다니엘과 바울이 예언한(단 9:27; 살후 2:4) 바로 그 적그리스도요 그 악하고 가증한 왕국의 지도자요 기수라고 보았고(John Calvin,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IV. ii. 4, 9, 12), 교황의 복음을 바울의 복음의 ‘무서운 변질’로 간주했다(Commentary on the Galatians, p. 32).

이와 같이 천주교회는 그 교황 제도의 기초가 되는 기본적 교리들에 있어서 변하지 않았다. 그 기본 교리들은 분명히 비성경적이며 반기독교적이며 변질되었고 우상숭배적이다. 그렇다면, 천주교회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태도는 오늘날도 여전히 정당하고 유효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천주교회에 대한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의 교제와 우호 관계는 명백히 비성경적이며, 종교개혁의 귀한 유산인 은혜의 복음에 대한 배신이 아닐 수 없다.

8. 성례주의적 경향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또한 교회의 일체성의 중요한 표현으로 성례를 강조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지도자들은 약 50년간의 연구의 결과로 1982년 세례, 성찬, 및 교직제도(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BEM)라는 중요한 문서를 공식적으로 출판했다. 그러나 이 문서에 나타난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의 사상은 성례주의적 경향을 나타낸다.

분석

1. 세례

세계교회협의회의 위의 문서는 세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으로 결합되는 것이다. . . . 그것은 세례 받은 자를 그리스도와 그리고 그의 백성과 연합시킨다. . . .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의 참여(롬 6:3-5; 골 2:12), 죄 씻음(고전 6:11), 새 출생(요 3:5)이다. . . . 세례 받은 자들은 더 이상 죄에 노예들이 아니고 자유롭다. . . . 세례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받았고 깨끗케 되었고 거룩하여졌다. . . . 하나님께서는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의 기름부음과 약속을 허락하신다. . . .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서로간의, 그리고 모든 시대와 장소의 교회와의 연합 속으로 들어온다”(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pp. 2, 3).

2. 성찬

이 문서는 또한 성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찬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만드시는 은사의 성례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함을 통하여 이 구원의 은사를 받는다. . . . 그리스도의 약속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의 세례 받은 각 지체는 성찬에서 죄 용서의 확신(마 26:28)과 영생의 보증(요 6:51-58)을 얻는다”(Ibid., p. 10).

비평

위와 같은 성례관은 성례주의적이며 의식주의적인 맛을 가진다. 즉 그것은 성례의 의식 자체가 구원의 은혜를 전달한다고 보는 입장처럼 들린다. 성례주의 혹은 의식주의는 천주교회의 성례관으로 돌아가는 오류이다. 타임지의 종교 편집인 리처드 오슬링은 정확히 논평하기를, “‘세례, 성찬 및 교직제도(BEM)’라는 문서는 개신교인들과 정통교인들 간의, 그리고 비(非)성례주의적 개신교인들과, 천주교회에 가까운 성례관을 가진 개신교인들간의 간격을 극복하려고 추구한다. . . . 그 문서는 부인할 수 없는 ‘고교회적(친<親>천주교회적)’ 음조를 가지고 있다”라고 했다(Richard Ostling, “Piercing Together the Ecumenical Puzzle,” University of Portland Magazine, Summer 1986, p. 13). 그러나 성례주의, 의식주의는 분명히 비성경적이다.

1. 성례주의는 복음의 영적 성격과 모순됨

첫째로, 성례주의는 복음의 영적 성격과 모순된다. 구원은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나타나는 영적 변화이다. 성령께서 영적으로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리심이 없이는, 아무 것도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유효하지 못하다. 기독교는 단순한 의식들의 종교가 아니고, 마음과 영의 종교이다.

로마서 2:28, 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성령으로 말미암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글자로 말미암지 않는] 것이라.” 이것은 유대교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2. 성례주의는 성경의 지원을 받지 못함

둘째로, 성례주의는 성경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 성례에 참여한 자일지라도, 만일 그가 영적으로 중생치 못했다면, 영원히 멸망받을 수 있다. 가룟 유다는 주님 자신의 손에서 빵과 포도즙을 받은 후에도 멸망했다. 마태복음 26:20-25, “. . .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성례들이 구원의 은혜를 준다는 생각에 대하여, 죤 칼빈은 단언하기를, “그것은 명백히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것은 믿음 없이 의(義)를 약속함으로써 영혼들을 멸망으로 몰아가며; 둘째로, 그것은 의(義)의 원인을 성례로부터 유래시킴으로써 가련한 마음들로 하여금 미신적인 생각에 얽히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Institutes, IV. xiv. 14). 촬스 핫지는 일찌기 교회의 배교가 의식주의의 주 요인임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도 시대 동안, 그리고 사도적 형태의 종교에서, 진리는 외적 의식들보다 심히 초월하여 있었다. 교회의 배교는 의식들을 진리보다 더 중요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Charles Hodge, A Commentary on 1 & 2 Corinthians, p. 17).

9. 한 세계교회를 지향함

에큐메니칼 운동은, 비록 그 지도자들이 자주 그렇지 않다고 부인해옴에도 불구하고, 한 세계교회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분석

1. 교파의 부당성을 강조함

첫째로,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파의 부당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교파들의 분리의 현실을 부끄러운 사실로 본다. 리처드 니이버는 교파주의를 “인정치 않는 위선”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이러한 반(反)교파주의적 정신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흐르고 있다. 1982년 리마에서 모인 신앙과 직제 회의는 선언하기를, “우리의 분리들은 주님의 뜻을 거스리고 있다”고 했다(Toward Visible Unity, p. 41).

2. 교회의 유형적 일체성을 강조함

둘째로,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교회의 유형적 일체성을 강조한다. 세계교회협의회의 1948년 암스텔담 창립총회는 “우리의 의도는 함께 머무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고, 1954년 에반스톤 총회는 “우리의 의도는 연합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1961년 뉴델리 총회는 “교회의 유형적 일체는 하나의 완전히 묶여진 교제(one fully committed fellowship)에서 나타난다”라고 선언하였다.

또한 1968년 웁살라 총회는 “보편적 에큐메니칼 협의체적 형태의 일체성”을 언급하였다. 1975년 나이로비 총회는 “참으로 연합된 지교회들의 협의체적 교제”라는 표현을 쓴 후, 그것은 완전한 유기체적 일체성과 동일하며 하나의 분리되지 않은 교회의 일면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첨가하여 말하였다. 1983년 뱅쿠버 총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는 하나의 거룩한, 공동적, 사도적 교회의 유형적 일체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3. 하나의 조직체, 즉 하나의 세계교회를 지향함

셋째로,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하나의 조직체, 즉 하나의 세계교회를 지향한다. 1975년 나이로비 총회는 선언하기를, “우리는 하나의 세계적 공동체를 갈망하며 그것을 위해 싸운다”고 했고, 그들이 추구하는 “참으로 연합된 지교회들의 협의체적 교제”는 완전한 유기체적 일체성과 동일하며 하나의 분리되지 않은 교회의 일면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1983년 뱅쿠버 총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는 하나의 거룩한, 공동적[세계적], 사도적 교회의 유형적 일체를 이루는 것이다”고 진술하였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한 세계교회를 꿈꾸지 않는다고 종종 말하곤 하였지만, 위의 진술들이 결국 하나의 세계교회를 만들기를 원한다는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1993년 5월 한국장로교협의회(회장: 한영제--예장 통합측 총회장)는 회원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다섯 개 교단의 이름으로 교회 일치를 위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 선언문은 다섯 개 교단이 궁극적으로 한 장로교단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을 천명했다. 그 선언문은 한국교회의 분열이 신학적 정당성을 갖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우리 한국의 장로교단들은 신앙의 본질적인 항목들에 있어서 결코 분열될 만큼 의견의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남은 문제는 우선 협의회를 통하여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지향해야 하고, 결국은 하나의 한국 장로교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5개 장로교단 총회장 공동선언문,” 기독교연합신문, 1993년 5월 30일, 3쪽; “‘하나된 장로교’ 향한 첫걸음,” 크리스챤 신문, 1993년 5월 29일, 3쪽.)

4. 연합된 교회의 성격에 관해서는 두가지 견해가 있음

넷째로,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는 연합된 교회의 성격에 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어떤 이들은 연합된 교회가 하나의 신학과 정치구조를 가진 한 교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연합된 교회가 각 회원 교회의 신학과 정치구조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한 교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평

1. 교회의 일체성은 교리적이어야 함

첫째로, 우리는 교회의 일체성이 교리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먼저 강조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교회의 일체성(一體性, unity)이 영적, 교리적, 유형적임을 가르친다. 교회는 영적으로 이미 하나이며 그 영적 일체성은 결코 파괴될 수 없다. 또한 교회는 가능한 한 유형적으로도 일체성을 표현하고 유지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고전 1장, 엡 4장). 그러나 오늘 시대에 보다 중요한 바는 교회의 일체성이 교리적이라는 점이다. 교회의 교리적 일체성은 영적 일체성의 외적 표현이요, 유형적 일체성의 내적 기초이다.

요한복음 17장(특히 9-11절과 20-21절)과 에베소서 4:3-6은, 교회의 일체성의 대상과 성격에 관하여, 교회의 일체성이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사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자들의 일체성이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의, 그리고 진리 안에서의 일체성임을 분명히 보인다. 다시 말해,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일체성은 바른 진리와 바른 교리 안에서의 그리고 그 위에서의 일체성인 것이다.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라는 말은 그들의 교리와 교훈을 가리킨다. 사도적 교리가 없이는 교회도, 교회의 일체성도 생각할 수 없다.

워필드는 다음과 같이 적절히 표현하였다: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의 일체성은 신자들의 공통적 기독교 신앙 위에 기초했다. 그리스도 안의 일체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대한 불신실함 위에 세워질 수 없다”(“True Church Unity: What It Is,” in Selected Shorter Writ- ings of Benjamin B. Warfield, p. 302).

2. 자유주의와 천주교회의 오류를 포용하는 교회 연합은 잘못임

둘째로, 우리는 자유주의와 천주교회의 오류를 포용하는 교회 연합이 잘못임을 강조하는 바이다. 물론 조직체적 연합의 개념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건전한 교리와 정치 원리에 입각한 교회 연합을 반대할 자가 누구이랴! 불필요한 분열을 극소화하고 필요한 연합을 극대화하는 연합주의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에큐메니칼 운동의 한 세계교회 개념은 기독교계 안의 배교적 구성원들인 자유주의자들과 천주교회를 배제하지 않고 추구하는 연합이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말이다. 교회의 일체성이라는 구호가 이단을 포용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늘날 교회의 배교와 혼란의 상황 속에서, 교리적 순결을 무시한 연합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바르게 말하였다: “거짓이 종교의 성채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자마자, 요긴한 교리의 요점이 뒤집어지자마자, 교회의 죽음이 초래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 . . 교회가 사도와 선지자의 교리 위에 기초해 있다면 . . . 그 교리가 파괴될 때 교회가 어떻게 계속 존속할 수 있겠는가?”(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IV. ii. 1).

3. 교파적 확신들의 차이를 포괄하는 연합은 바람직하지 못함

셋째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파적 확신들의 차이를 무시하고 그것들을 포괄하는 초교파적 연합 교회는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교회 연합의 과정에서 모든 이단적 요소들을 배제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세계교회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리적, 언어적 간격으로 인한 불편은 놔두고라도, 많은 교회들이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중요한 교리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그리스도의 속죄의 범위, 세례의 대상과 방식, 목사직의 성격,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와 방식, 천년왕국과 휴거의 의미 등에 대해 견해의 심각한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차이들은 진리들에 대한 무지나 오해에서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교파들간의 차이점들을 고려할 때, 초교파적 한 교회는 하나님의 모든 진리에 대한 충실한 고백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설교자가 어떤 특정 교리에 대한 확신 있는 설교를 할 때 그것이 어떤 교회 회원들의 양심을 억압할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목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는 어떤 교리적 신념을 가지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교파적 차이점들을 무시하거나 포괄하는 초교파적 한 교회란 진리의 신념과 확신의 차원에서 결코 바람직한 일이 되지 못한다고 본다. 사실, 한 신앙고백이 없는 한 교회란 참으로 하나가 아니다. 마틴 로이드-죤스는 다음과 같이 바르게 말했다: “단순히 하나의 외면적 조직체 때문에 그들이 ‘하나’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단지 교회 밖에 있는 세상을 오해케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거짓말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D. Martyn Lloyd-Jones, The Basis of Christian Unity, p. 61).

4. 우리는 전제주의적 교회를 두려워함

넷째로, 우리는 무엇보다 전제주의적 교회를 두려워한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여하튼 하나를 만드는, 인간이 만든 하나의 세계적 조직체는 모든 회원을 그것의 통제 아래 놓는 전제주의적 교회가 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하나님을 바로 경외치 않고 순종치 않는 사람은 교만해져서 남을 지배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에게 교회의 일체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이다. 우리는 전제주의적 천주교회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피흘려 싸웠던 선진들의 투쟁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하며, 우리가 누리는 귀한 신앙의 자유라는 종교 개혁의 이 유산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10. 종교적 다원주의의 경향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실제적 기초는 신학적 포용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오늘날 이 운동은 이방 종교들을 포함하려는 혼합주의 또는 종교적 다원주의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분석

1. 이방 종교 지도자들을 초청함

1983년 세계교회협의회의 뱅쿠버 총회는 세계교회협의회 35년 역사상 최초로 힌두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시크교 등 다섯 개 세계종교들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공식적으로 연설케 했다.

1998년 6월, 미국의 알라바마주 헌츠빌의 ‘종교간 선교봉사회’는 그 월례회에서 미합중국 장로교단 소속 페이스(Faith) 장로교회에서 ‘거룩한 소리들’에 대한 한 프로그램을 발표했다(Huntsville Times, 1998년 7월 11일). 바하이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및 세 개의 ‘기독교’ 교단들을 포함하는 종교 대표자들은, 소리가 그들의 예배 형식에서 가지는 역할에 대해 발표했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8월 1일.)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에서 매년 모이는 전국 기도의 날의 책자에 의하면, “모든 종교들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전통들에 따라서 참여하도록 격려된다. . . . 전국 기도의 날은 모든 신앙의 사람들이 그들의 이해하는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만들어졌고 의도되었다.” 그 모임의 공동의장은 제임스 답슨 목사의 부인 숼리와 빌 브라이트의 부인 보네트이었다. 촬스 콜슨은 전국자문위원회에 들어 있고, 랍비 조슈아 하버만, ‘신부’ 로버트 시로코, 및 제임스 케네디는 연결고리들이었다. (Calvary Con- tender, 1999년 6월 1일.)

2. 대화의 방식을 강조함

세계교회협의회는 타종교들과의 대화의 방식을 강조하며, 그들에 대한 비판을 회피하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진리의 통찰력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세계교회협의회 뱅쿠버 총회는 선언하기를, “우리는 우리가 증거하는 예수의 탄생, 생애, 죽음, 부활의 독특성을 주장하는 한편, 다른 신앙들(종교들)의 사람들 가운데서의 종교적 진리의 추구에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이 있음을 인정한다. . . . 대화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세상에 어떻게 활동적이신지를 더 분별하고, 다른 신앙들의 사람들이 궁극적 실재(존재)에 대해 가지고 있는 통찰들과 경험들을 그것들 자체 때문에 감사하기를 기대한다”고 한다(Gathered for Life, p. 40).

세계교회협의회의 종교간의 대화 위원회 의장인 더크 멀더(Dirk C. Mulder)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모든 곳에서 사역하지 않으셨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는 항상 어떤 방식으로 구원적이지 않는가? 이 질문들은 아직도 우리에게 있고, 그 대답들은, 대화에서 우리가 단지 우리의 신앙을 더 잘 증거하기 위하여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새로운 빛들을 가지기 위하여 배우고 들어야 한다는 확신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The Ecumenical Review, 38 <1986>, 215).

세계교회협의회 종교간의 대화 위원회의 지도자인 죤 테일러(John Taylor)는 대표자들에게 말하기를, 모든 종교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데 협의회 회원들 가운데 일치가 있다고 하면서, “이슬람교도들과의 대화가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선교 활동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방해된다. 우리는 이슬람교도들 가운데서의 모든 선교적 노력들을 중지해야 한다. . . . 많은 유대교인들이 우리를 제발 그냥 홀로 놔두라고 말한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는 그것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Christian News, 1983년 9월 5일, 7쪽; Province [of Vancouver], 1983년 7월 27일).

3.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함

더욱이, 세계교회협의회의 지도자들 중에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세계교회협의회 종교간의 대화 위원회 의장인 더크 멀더는 “당신은 불교인이나 힌두교인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느끼십니까?”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 “물론이죠, 물론이죠”라고 대답하였다(M. H. Reynolds,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The Cup of the Lord or the Cup of Devils?, p. 8).

세계교회협의회의 타종교들과 이념들과의 대화 위원회 의장인 웨슬리 아리아라자는 세계교회협의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출판한 성경과 타종교인들(S. Wesley Ariaraja, The Bible and People of Other Faiths, 1985)이라는 그의 책에서 기독교의 절대성을 명백히 부정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절대적 의미에서의 진리는 어느 누구도 파악할 수 없고, 우리는 예수에 관한 기독교의 주장들이 성 요한, 성 바울, 그리고 성경이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절대적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한다(p. 27). 그가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이유는 성경이 명확한 기독론을 가지고 있지 않고, 서로 다르고 모순된 기독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Ibid., pp. 21, 22, 67), 성경의 언어는 신앙의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Ibid., pp. 6, 9, 24, 26).

또한 그는 이교도들도 같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회개해야 할 자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기독교의 신, 힌두교의 신, 이슬람교의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힌두교적 이해, 이슬람교적 이해가 있을 뿐이다. . . . 타종교인도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우리는 형제 자매요, 순례자이지 이방인이 아니다. 우리는 한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다. . . . 힌두교인은 회개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동료 순례자이다”(Ibid., pp. 9-11, 56). 심지어, 그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전도에 가장 큰 방해거리라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나에게 참된 증거의 가장 큰 방해거리이었던 한 가지 요인을 골라내라고 요청한다면,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하는 이 절대적 주장들이 그것이라고 말할 것이다”(Ibid., p. 53).

1990년 1월, 세계교회협의회의 살아 있는 신앙들의 사람들과의 대화 분과의 스위스 바아르에서의 모임은 15개국으로부터 온 21명의 헬라 정교회, 개신교회, 천주교회 신학자들과 전문가들이 참여하였고 ‘종교적 다원성: 신학적 관점들과 선언들’이라는 제목의 문서를 작성하였다(Marlin VanElderen, "Consultation Speaks on Plurality," Christian News, 1990년 2월 5일, 1쪽).

이 문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모든 나라들과 백성들 가운데 항상 하나님의 구원적 임재(臨在)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문서는 선언하기를, 다른 종교적 전통들의 ‘추구와 발견 속에서 하나님께서 계셨다,’ ‘그들의 가르침에서의 진실과 지혜와 그들의 삶에서의 사랑과 거룩은 . . . 성령의 은사이다,’ ‘그들이 우리와 더불어 정의와 자유를 위해 싸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 문서는, 종교적 다원성을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성취를 기다리면서 하나님과의 그리고 이웃들과의 우리의 만남을 깊게 할 기회로 본다. 또 그 문서는 말하기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길 외의 다른 길들의 추종자들 가운데서 선함과 진실과 거룩을 보고 경험했기 때문에, . . .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백한 인격적 의탁에 제한시키는 신학을 넘어서서 나아갈 필요성을 인식한다는 것을 발견한다”라고 한다. 그 문서에 의하면, 그 세계적 차원이 십자가와 부활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적 신비는 “하나님의 계획이 그 성취를 향해 펼쳐질 때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들로 매개(媒介)되고 표현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우리 밖에 있는 자들이 그들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그리고 그들을 지도하고 감동하는 종교적 전통들의 구조 안에서 성실하고 진실한 삶을 살 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들로 그들에게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문서는 주장하기를, 성령께서는 “살아 있는 신앙들의 사람들의 삶과 전통들 속에서 역사하셨다,” “우리가 다른 종교들의 진리와 선을 해석할 수 있는 것는 바로 성령의 세계 안에서이다”라고 하였다. (VanElderen, p. 15.)

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7차 총회에서는 한국 이화여대의 조직신학교수 정현경은 주제 강연에서 한(恨)을 안고 죽어간 영들, 예를 들어 하갈의 영, 우리아의 영, 입다의 딸의 영, 헤롯에게 죽임 당한 어린 아이들의 영, 잔다르크의 영, 십자군 파병 때 죽어간 백성들의 영, 지구상의 토착민들의 영, 나찌 시대에 가스실에서 죽은 유태인들의 영, 히로시마와 나카사끼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죽임 당한 자들의 영, 광주에서, 천안문에서, 리쿠니아에서 죽은 자들의 영, 그리고 심지어 인간의 탐욕으로 파괴되고 착취된 땅과 공기와 물의 혼 등을 부르는 초혼(招魂)적 행위, 즉 샤마니즘적 행위를 하였다(기독교 연합신문, 1991년 3월 17일, 7쪽; 3월 24일, 7쪽; 3월 31일, 7쪽).

그는 또 독일 영화인들 앞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은 나의 문화에서 부처를 통해, 무당들을 통해 . . .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신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해방-생존-혼합주의의 영’이라고 고백했고, 또 말하기를 “나는 여러분처럼 혼합주의자이지만, 나는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했다. (Christian News, 1992년 2월 17일; Calvary Contender, 1992년 4월 1일.)

한국신학대학 조직신학교수인 김경재는 정현경 교수의 캔버라 주제 강연에 대해 동감하면서 이렇게 썼다: “영원하신 그리스도는 역사적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서 유대땅에 화육하셨지만, 영원한 그리스도로서 연민의 사랑과 지혜의 영으로서 모든 문화 속에, 우리 조상들 속에 현존하셨다는 신앙고백이다. 기독교 전래 이전 불교와 유교를 믿고 살고간 우리 조상들은 지옥갈 우상숭배를 하고 간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혹은 그림자처럼 우리 가운데서 창조와 구원과 속량의 일을 행하여 오셨다고 믿고 신앙고백하는 것이 정 교수의 신앙고백이다. 필자는 그의 신앙고백에 동의한다”(김경재, “‘생명의 신학’ 위한 성령론의 복귀,” 기독교 연합신문, 1991년 3월 31일, 7쪽).

1998년 6월, 미국에서는 약 2천명의 예배자들이 1993년 95세로 사망한 노만 빈센트 피일의 100주년 기념을 축하했다. 피일은 1984년 필 도나웨 프로그램에서 말하기를, “거듭나는 것은 필요치 않다. 여러분은 하나님께로 가는 여러분의 길을 가지고 있고 나는 나의 길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한 신도교 사당에서 영원한 평화를 발견했다. . . . 그리스도는 그 [여러] 길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다”라고 하였다(Christian News, 1998년 6월 8일). 피일은 1980년 한 몰몬교 총회장 생일축하모임의 주 연사이었고 몰몬교 지도자들을 칭찬하였다. 그는 프리메이슨 회원이며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신성, 및 부활을 부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빌리 그레이엄과 기타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찬사를 받았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7월 15일.)

오늘날 주의해야 할 종교 다원주의적, 에큐메니칼 지도자의 한 사람은 로버트 슐러이다. 그는, 복음주의 기독교를 조롱하는 기독교 일치 학교의 (뉴 에이지) 연례대회를 위해서, 문선명과 함께 통일교회 행사들에서, 그리고 몰몬교 성전에서의 종교간의 기도 조찬에서, 주강사로 나타났다(Vantage Point, 1998년 11월호). 뉴 에이지 운동가들, 몰몬교인들, 그리고 천주교인들은 그의 수정 대성전 강단에서 연설했었다. 그의 가르침들과 행동들의 일부는 자유주의적이고 후(後)현대주의적이고 이단적이다(Calvary Contender, 1999년 1월 1일). 그는 오래 전에 죄에 대한 바울의 교훈과 이별을 고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자신을 힌두교인들과 이슬람교인들과 단절시키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더 이상 불리우기를 원치 않는다(The Discerner, 1999년 6월호). 그는 그리스도께서 천국 가는 유일한 길이요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 신앙이라고 설교하지 않는다(Christian News, 1999년 7월 19일). (Calvary Contender, 1999년 8월 15일.)

2000년 1월, 김경재 교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회보에 기고한 “새 천년은 아레오바고 영성시대”라는 글에서, 기장 교단이 불교와 심층적 대화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뚜렷하게 하고 동아시아의 위대한 영성과 창조적 지평 융합을 이루자고 주장하였다(“기장, ‘종교다원주의 논란,’” 기독신문, 2000년 4월 19일, 19쪽).

비평

1. 대화의 방법에 대해

성경적 전도 방법은 단지 대화가 아니고, 주로 그리고 일차적으로 선포와 가르침이다. 마태복음 4:23,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마태복음 28:18-20,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2. 기독교의 절대성을 부정함에 대해

아리아라자의 결론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결론이며, 이러한 성경 이해는 배교적(背敎的)이며 이단적이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간에 교회가 속화되고 부패될 때마다 우상숭배적 혼합주의가 유행했다. 그러나 사두개적 불신앙을 버리고 참된 신앙의 눈으로 성경을 보면, 성경의 언어는 단순히 신앙의 언어만이 아니고, 곧 진리의 언어이며, 성경의 신론과 기독론은 결코 애매모호하지 않고 명확함을 알 수 있다.

출애굽기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신명기 4:39,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 하지(上天下地)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라.” 이사야 43:10, “. . .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이사야 45:6,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3. 이방 종교들에 대한 성경적 평가

성경은 이방 종교들이 모두 헛됨을 밝히 가르치고 있다. 기독교의 절대성을 가르치는 앞에서 인용한 구절들은 이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출애굽기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사야 45 :6,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시편 96:5,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더욱이, 성경은 이방 종교들이 마귀적이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여기에 전도의 필요성이 있다. 고린도전서 10:20,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에베소서 2:2, 3,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요한일서 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요한복음 8:24, “내가 그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마태복음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결론

결론적으로,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매우 비성경적인 운동이다. 교회의 일체성이라는 목표는 좋지만, 이 운동이 실제로 취하는 교회 일체성의 개념은 명백히 비성경적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이 실제적으로 취하는 교회 일체성의 기초는 신학적 포용주의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계를 변질시킨 배교와 혼란의 시대에 신학적 포용주의의 태도는 자유주의 이단 사상들을 포용하는 명백한 잘못이요 악이다. 또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천주교회에 대해서 포용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신교회의 종교개혁의 유산을 뒤엎는 비성경적인 배신의 행위인 것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강조되는 성례의 개념도 정당하지 않다.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의 성례관은 성례주의적이며, 그것은 천주교회의 오류로 돌아가는 일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조직체적 관심 즉 한 세계교회의 추구도, 자유주의와 천주교회를 배제하지 않는 한, 용납할 수 없고, 또 비록 이런 이단적 요소들을 배제한 연합이라 할지라도 초교파적 연합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본다. 심지어 에큐메니칼 운동은 타종교들에 대해 포용적 경향 즉 종교적 다원주의 혹은 혼합주의의 경향을 명확히 보이고 있다. 이것은 1983년 뱅쿠버 총회 이후 더욱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볼 수 있는 배교와 타락의 모습이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연합 운동이겠는가?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은 비성경적이고 인본주의적인 바벨탑 운동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믿는 신실한 교회들과 성도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지 말고, 그것으로부터 분리(分離)되고 성별(聖別)되어야 한다. 한국에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측)와 대한기독교감리회(기감측) 안에 있는 진실한 성도들은 그 교단들로부터 나와서 보수적 교회들을 설립하든지 아니면 보수적 교회들에 가입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배교와 타협하지 말고, 옛 길, 좁은 길을 지켜야 한다. 성경을 믿는 교회들과 성도들은 옛신앙의 순수성(純粹性)을 지켜야 한다.

예레미야 6: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고린도후서 6:14-18,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 . .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be separate,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에베소서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6세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위태하게 되는 그런 사랑과 일치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고, 20세기 초 미국 북장로교회의 신앙의 투사 죤 그레셤 메이천은 현대 교회의 문제점을 바로 찔러 말하기를, “오늘날 가장 나쁜 죄는 당신이 기독교 신앙을 동의하고 믿는다고 말한 후 기독교의 기본적 사실들을 부인하는 자들과 협력하고 타협하는 것이다”라고 했다(William Ashbrook, Evangelicalism, pp. 31, 45).

제3부:

선교 개념의 변질

목차

서론 / 201

1. 넓어진 선교 개념 / 201

2. 사회 정치적 관심과 행동주의 / 209

결론 / 213

서론

전통적으로, 선교(宣敎, mission)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명하신 전도의 사명을 가리켰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얻게 하는 사명이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에 수행해야 할 가장 숭고하고 중대한 임무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 가운데서는 선교에 대한 이 전통적이고 성경적인 개념이 변질되었다. 많은 교회들은 선교를 단순히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활동으로 보지 않고, 또한 교회가 세상 속에서 행해야 할 사회적, 정치적 책임과 활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넓어진 선교 개념은 결론적으로 말해 잘못된 개념이다. 그것은 교회의 사명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가져온다. 이와 같이 오늘날 교회들은 그 근본적 임무와 사명을 이해함에 있어서 성경적, 전통적 입장에서 크게 이탈하여 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1. 넓어진 선교 개념

분석

미국 장로교회의 1967년 신앙고백에 나타난 선교 개념

1967년, 미국 연합장로교회(지금의 미합중국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다른 소위 ‘1967년 신앙고백’을 채택했는데, 그 고백서는 교회의 사명(선교)에 대해 이렇게 진술하였다: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은 그의 화목케 하시는 공동체로서 세상 속에 보내지는 것이다. 이 공동체 곧 세계적 교회는 하나님의 화목의 메시지를 위탁받았으며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분리시키는 적의(敵意)를 고치시려는 하나님의 수고에 참여한다”(2. 1. 1). “교회의 회원들은 화평의 밀사(密使)들이며 정치, 문화, 경제면에서 세력 있는 자들이나 집권자들과 협력하여 인간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바로 이 세력들이 인간의 안녕을 위태롭게 하는 경우에는 가장(假裝)과 부정(不正)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1. 3. 1). “인간을 향한 그의[그리스도의] 봉사는 교회가 모든 형태의 인간 복리를 위하여 일할 것을 위탁한다. 그의 수난은 교회가 인류의 모든 고통에 대해서 민감하여 각종 궁핍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도록 만든다”(2. 1. 1). “교회는 모든 민족 차별의 폐지를 위하여 노력하며 그것으로 인해서 상해를 받은 자들을 위하여 봉사한다”(2. 1. 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 사업은 인간생활 전체 곧 사회와 문화, 경제와 정치, 과학과 기술, 개인과 단체, 전부를 포괄한다”(3. 1. 1). (“1967년 신앙고백,” 미국 연합장로교회 헌법 제1부: 신앙고백집,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부 발행 <1968년>, 251-265쪽; 킥, 띠 깐지, 헨리 공저, 1967년 신앙고백서 비판, 임택권 역 <1967년>.)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넓어진 선교 개념’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강조되는 선교 개념은 전도 뿐 아니라, 또한 사회 정치 활동을 포함하는 ‘넓어진 선교 개념’이다. 1980년 멜본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의 세계 선교 및 전도 대회는 선언하기를, “인권을 위한 투쟁에의 참여는 그 자체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말과 행위로 선포할 교회의 전체적 선교(사명)의 중심적 요소이다”라고 했다(Your Kingdom Come: Mission Perspectives. Report on the World Conference on Mission and Evangelism, Melbourne, Australia, 12-25 May 1980, p. 186). 소위 선교의 ‘총체적 개념’(holistic concept)을 주장한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의 전총무인 필립 포터는 “우리는 경제적 정의와 정치적 자유와 문화적 갱신을 위한 투쟁들을 하나님의 선교를 통한 세계의 전체적 해방의 요소들로 본다”고 진술했다(Your Kingdom Come, p. 17). 에밀리오 카스트로는 심지어 사회적 전도개념을 주장하기를, “복음 전도에서 우리는 개인적 문제의 해결 뿐만 아니라, 창조세계 질서 전체의 변혁을 목표한다”고 말했다(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5 <1981>, 109).

세계교회협의회의 1983년 선교와 전도 선언서도 진술하기를,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개인의 회개를 요청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조에 대한 도전이다. . . . 복음 전도는 이 세상의 구조들, 즉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제도들에 대해 말한다”고 했다(Mission and Evangelism: An Ecumenical Affirmation, p. 28). 세계교회협의회의 이러한 새로운 선교 개념은 특히 1961년 국제선교협의회가 세계교회협의회의 세계 선교 및 전도 위원회로 통합된 이후 그 위원회의 의장이 되었던 필립 포터의 지도 아래 나타났다. 그 후, 그 선교 개념은 1968년 세계교회협의회의 웁살라 총회에서 공적으로 제안되었고, 1973년 방콕에서의 세계 선교 및 전도 대회에서 강조되었다. 현재의 상태는 이전 역사의 계속일 뿐이다(Harvey T. Hoekstra, WCC and the Demise of Evangelism, pp. 66, 67).

미국의 9개 교단의 통합을 추구하는 교회연합 협의회(COCU)도 교회의 공동적 선교(사명)는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라고 선언했다(Covenanting toward Unity: From Consensus to Communion, p. 14). 심지어, 레온 왓츠 같은 이는 사회 활동을 교회의 일차적 사명(선교)이라고 강조했다(Ecumenical Trends, 14 <1985>, 10-13).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이형기 교수의 선교 개념

1996년 한국 개혁신학회(회장: 김영한 교수) 제1회 정기 학술 심포지엄에서 장로회신학대학(예장 통합측)의 이형기 교수는 “한국 개신교의 나아갈 방향: 선교 신학의 입장에서”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회심시키는데 촛점을 두었던 19세기 선교 개념이 20세기 에큐메니칼 운동에서는 교회의 사회 참여 측면을 포함하게 되었다고 전제한 후, 이 두 흐름의 선교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전체적 복음(the whole Gospel)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기독교보, 1996년 10월 12일, 5쪽.) 이것이 오늘날 유행하는 넓어진 선교 개념이다.

복음주의자들의 ‘넓어진 선교 개념’

1974년 복음주의자들의 로잔 언약은 교회의 선교(사명)에서 전도가 일차적이라고 표현하지만, 전도와 사회 정치 활동의 불가결의 연관성을 강조함으로써 선교 속에 두 요소를 포함시키는 경향을 이미 보였다. 로잔 선교대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죤 스토트는 고백하기를,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마 28:19]의 결과들 뿐만 아니라 그 실제의 부탁 자체가 전도의 책임뿐 아니라 또한 사회적 책임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나는 지금 더 분명하게 본다”고 했다(The Lausanne Covenant, p. 23).

개혁주의 에큐메니칼 협의회 총무 폴 슈로텐보어도 진술하기를, “전도는 일차적이지만 또한 예비적이다. 전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개인적 회심과 구조적 개혁을 요청해야 한다”고 했다(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6 <1982>, 152). 그는 심지어 전도에 대한--선교가 아니고--소위 ‘총체적 개념’을 주장한 것이다.

비평

그러면, 오늘날 많은 자유주의자들과 에큐메니칼 지도자들과 적지 않은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소위 ‘넓어진 선교 개념’ 혹은 ‘전체적 선교 개념’이 정당한 것인가? 교회의 선교 혹은 사명(mission)이 복음 전도 외에 사회적, 정치적 활동을 포함하는가?

우선,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얻은 성도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즉 교회는 하나의 단체이다. 그러면, 선교란 무엇인가? 선교(宣敎)라는 우리 말은 ‘교(敎)를 선전하는 것’을 뜻하지만, 우리가 ‘선교’라고 번역하는 영어 단어 밋숀(mission)은 ‘특수한 임무’ 혹은 ‘사명’(使命)이라는 뜻이다. 웹스터(Webster) 영어사전은 그것을 “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맡은 특수한 임무, 즉 어떤 기관이나 조직체의 주요한 기능이나 책임”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므로 선교 개념의 문제를 좀더 정확히 서술하면, ‘단체로서의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단체 혹은 집단으로서의 교회의 사명이 영혼 구원의 복음 전도 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적, 정치적 활동을 포함하는가? 라는 것이 문제의 촛점인 것이다.

교회의 3대 임무 중, 세상 속에서의 사명은 전도

전통적 신학이 잘 정리한 대로, 교회의 3대 임무는 예배와 영적 건립과 전도이다. 교회의 첫번째 임무는 예배이다.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는 기본적 임무이다. 교회 즉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경배를 드려야 한다. 이사야 43:7, 21,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 .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영으로 그리고 진실함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에베소서 1:6, 12, 14,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교회의 두번째 임무는 영적 건립이다. 이것은 교회가 자체를 향해 가지는 임무이다. 교회는 자체를 영적으로 성장시켜 온전케 해야 할 임무를 가지고 있다. 이 임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직분자들을 주셨고, 말씀과 기도, 교훈과 권징, 그리고 교제와 봉사와 구제의 일들을 수행케 하신다. 마태복음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에베소서 4:11, 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골로새서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사도행전 2:44, 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사도행전 6:1, 2,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 안의 과부들에게 매일 구제했다. 고린도전서 16:1, 2,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고린도후서 8:4,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고린도후서 9:1,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초대 교회에서 헌금의 주된 용도인 구제는 일차적으로 교회 안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 즉 믿는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이었다.

교회의 세번째 임무는 전도이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 속에서, 세상을 향해 가지는 임무이다. 이 임무가 주께서 세상에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명하신 특수한 임무, 즉 교회의 사명(使命, mission)인 것이다. 마태복음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 . 세례를 주고.” 마가복음 16:15,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누가복음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회개와 죄사함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전통 사본). 요한복음 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의 사명은 영혼 구원의 전도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의 계속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은 영혼 구원의 전도이었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하신 일들을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마태복음 4:23,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태복음 9:35,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가르치심과 전파하심과 병을 고치심 등 세 가지로 요약되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명이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전도의 일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것은 앞에 요약된 세 가지의 일들 중에 첫번째와 두번째에 해당된다. 주께서 자신의 사명을 증거하신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전통 본문) 왔노라.”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6:38-40,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어떤 이들은 주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일이 사회봉사활동에 해당하며 그것이 주의 사명의 일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그의 가르치심과 전파하심의 일과 분리된 것이 아니고 그 일에 종속된 부차적인 것이었고, 더욱이 주께서는 그 일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단지, 긍휼과 능력이 많으신 신적 구주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전파하실 때 불쌍한 병자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고쳐주신 것이었고, 또 그러한 치료의 기적들을 통해 자신의 신성(神性)을 증거하셨던 것이다.

또한, 병고침을 받은 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아왔던 자들이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시기 위해 이리저리 찾아다니신 것이 아니었고 당신에게 찾아온 자들을 고치셨고, 또 그에게 나아왔던 자들은 대부분 그를 믿었던 자들이었다. 마태복음 8:1, 2,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마태복음 8:2,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마태복음 8: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마태복음 8:10,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마태복음 8: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데리고 많이 예수께 오거늘.” 마태복음 9:2,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마태복음 9:22,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마태복음 9:29,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일은, 오늘날 교회들이 교회 안의 병든 성도들을 돌아보는 일이나 혹은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병자들을 치료하는 행위에 해당하지, 이런 것이 아닌 독립적인 의료 활동이나 아니면 더욱 확대하여 교회의 사회적, 정치적 활동을 의미한다고 해석되거나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교회의 사명 혹은 선교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 견해

전통적으로, 교회는 자신의 사명 혹은 선교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제이 그레셤 메이천은, 선교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한 분 하나님과 인류의 보편적 죄악성과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바르게 말했다(J. Gresham Machen, ‘What Is Christianity’ and Other Addresses, pp. 148-155). 또 로버트 홀 글로버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의 참 사명은 주님의 사명과 동일한 것, 즉 국내에서나 먼 나라에서나 간에 잃어버린 자들이 있는 곳에는 어디서나 그들을 찾아 구원하는 것이었고 또 언제나 계속 그래야 한다. . . . 초대 교회는 오늘날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사회적, 도덕적, 정치적 상황들과 문제들을 직면했지만, 사회 복음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고, 오직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어떤 변명도 없이 개인 구원의 유일한 복음을 전파했다”(Robert Hall Glover, The Bible Basis of Missions <1946>, pp. 34, 40).

해롤드 린젤은 “선교와 전도는 중심에 있어서 동의어이다”라고 진술했고 알랜 티펫도 선교를, ‘잃어버린 자들을 그에게로 인도하여 구원얻게 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이라고 정의하였다(Harold Lindsell, “The Biblical Basis of Missions and Evangelism,” Baker's Diction- ary of Practical Theology <1967>, p. 148; Alan R. Tippepp, “Mission(s),” Baker's Dictionary of Christian Ethics <1973>, p. 426).

1970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선교가 영원한 구원을 증거하고 제시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Christianity Today, 1970년 6월 19일, 5, 6쪽). 그 선언서의 초안자인 피터 바이엘하우스는 “고전적, 전통적 선교 개념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라고 증거하였다((Peter Beyerhaus, Mission: Which Way?--Humaniza- tion or Redemption, p. 17).

사회정치활동은 교회의 임무가 아님

덧붙여서, 사회정치활동이 교회의 임무가 아니라는 사실은 다음의 세 가지 점들에서 분명하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사회정치활동에 관여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그는 형의 유업을 나누어 달라는 어떤 이의 요청을 거절하셨고, 또한 자기를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을 피하셨다. 누가복음 12:13, 14,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요한복음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또한, 그는 빌라도 총독 앞에서 그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증거하셨다. 요한복음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둘째로,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사회정치활동을 명령하시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그들에게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를 명령하셨다. 이것은 복음서들과 사도행전 초두에서 밝히 증거되어 있는 사실이다.

셋째로, 주의 제자들 즉 초대 교회는 사회정치활동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이 확증하는 사실이다. 신약성경은 사회정치문제에 대해 소극적이고 온건한 입장을 취한다. 사회문제에 대해 교훈한 신약성경의 주요 구절들은 사회의 기존 질서를 존중히 여기고 위정자들에게 복종하고 규정된 세금을 바치고 또한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칠 뿐이다(롬 13:1-7; 엡 6:5-9; 골 3:22-4:1; 딤전 2:1-2; 벧전 2:13-20). 한편,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의 대사회적 말씀들이나 사건들은 신정 국가인 이스라엘에게 해당되었던 것이므로, 오늘날의 세속사회에 직접 적용하지 말고 일차적으로 교회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2. 사회 정치적 관심과 행동주의

분석

오늘날 자유주의 교회들과 에큐메니칼 단체들 속에서는 선교의 변질된 개념 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큰 관심과 행동주의적 태도를 볼 수 있다.

세계교회협의회의 헌법은 세계교회협의회의 한 기능을 “인간의 필요에 대한 봉사, 사람들 간의 장벽들의 제거, 그리고 한 인류 가족의, 정의와 평화 증진에 있어서의 교회들의 공동적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진술하였다(Gathered for Life, p. 324). 미국의 한 자유주의 교단 지도자인 데이빗 스토우는, 세계교회협의회의 1980년 멜본 세계선교와 전도대회에 관하여 증거하기를, “멜본 대회는 사회적 활동에 관한 대회보다 훨씬 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문제들에 집중하였다”고 했다(David Stowe, Missiology, 9 <1981>, 26).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사회적 관심과 활동이 오늘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그들은 또한 가난과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의 근본 문제이며, 따라서 이상적 사회는 모종의 사회주의적 사회라고 암시한다. 데이빗 스토우는 말하기를, “멜본 대회가 불평등한 경제 구조를 천국에 반대되는 주요 표현으로 인식했으므로, 그 대회는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와 같은 어떤 이상, 즉 어떤 형태의 사회주의를 불가피하게 안출했다. 약간 부드럽게 명명되는 ‘중앙설계경제’는 여러 방식으로 새 세계의 선구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인류 역사에 새 장으로서 암시되었다”고 하였다(Ibid., pp. 33, 34).

한 걸음 더 나아가,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우월권을 주며 그들의 투쟁에 연대 의식을 가지고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 그들은 단지 이론적 변론이 아니라, 투쟁의 행위를 강조한다. 1968년 세계교회협의회 웁살라 총회는 선언하기를, “인류의 갱신은 지역 사회에서 인종과 계급의 모든 배타성을 찾아내고 폐위시킴으로써 그리고 인간의 모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강등과 착취에 대항해 싸움으로써 시작되어야만 한다”고 했다(Apostolic Faith Today, p. 120). 에밀리오 카스트로도 말하기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선포는 그 나라에 참여하는, 그 투쟁들에 참여하라는 초청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전도는 혁명적 참여가 된다”고 한다(Your Kingdom Come, p. 34). 감리교 목사요 짐바브웨 대통령인 케이넌 버내너는 그의 연설문에서 “오늘날 요구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분명한 정죄와 그것을 전복시키는 활기찬 행동이다”고 가장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였다(Ibid., p.116).

세계교회협의회의 인종차별투쟁 프로그램은 그 대표적 예이다. 인종차별투쟁 프로그램(PCR)은 1970년 이후 남아프리카의 ‘아프리카 국가회의’(ANC)와 나미비아의 ‘서남 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 등 과격한 마르크스주의 폭력단체들에게 1992년 9월말 현재 1,007만불 이상을 지원하였다(Christian News, 1992년 11월 23일, 2쪽).

이전의 소련 통신사인 타스 통신은 러시아 비밀경찰(KGB, 국가보안위원회) 요원들과 동독의 비밀경찰이 유럽 교회들의 대회와 세계교회협의회에 침투하였으며 1984년에 에밀리오 카스트로의 세계교회협의회 총무 선출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도하였다(Moody Monthly, 1992년 4월호). 3천명이나 되는 많은 교직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정보제공자들로 행동했을 것이다. 일부의 러시아 정교회 신부들과 지도자들은 위험을 면하며 그들의 일들을 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감시하는데 그들의 성직자의 복장을 사용하였다(Christian News, 1992년 3월 16일). 세계교회협의회는 1961년 이후 공산세계의 교회와 러시아 비밀경찰(KGB) 성직자 회원들을 가지고 있었고 마르크스주의 테러 단체들에게 자금을 지원하였다(Calvary Contender, 1988년 7월 1일 참조). 1986-1987년 미국 연방수사국(FBI) 보고서에 의하면, 소련 사람들은 미국교회협의회(NCC)나 세계교회협의회(WCC)를 그들의 선전 목적들에 사용하고 공산 정부의 통제 아래 있는 러시아 정교회는 이것을 조종하였다.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USN&WR) 1992년 3월 2일자는 보도하기를, 러시아 정교회는 공산주의 아래의 정부의 도구이며 “어떤 정교회 신부들은 단순히 KGB의 협력자들로서가 아니고 실제적 요원들로서 활동했다고 보인다”라고 하였다. (Calvary Contender, 2000년 4월 15일.)

게하르트 베지에르(Gerhard Besier), 아르민 보이엔스(Armin Bo- yens), 게하르트 린데만(Gerhard Lindemann) 등의 독일 학자들은 수년간의 연구 끝에 최근에 1074쪽짜리의 책을 썼는데, 그 제목은 국내 개신교와 에큐메니칼 운동: 냉전 기간 동안의 교회의 활동들(National Protestantism and the Ecumenical Movement: Church Activi- ties During the Cold War)이다. 이것은 1992년에 공개된 러시아 KGB의 자료들에 근거하였다. 이 책은 냉전의 절정에서 세계교회협의회는동유럽의 정보기관들에 의해 침투를 당했고 이전 회장들 중의 한 사람인 메트로폴리탄 니코딤(Metropolitan Nikidim)은 KGB요원이었음을 확증한다(Christian News, 2000년 3월 20일). (Calvary Contend- er, 2000년 4월 15일; 5월 1일.)

비평

사회적 관심과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사회적 관심이나 행동이 그리스도인의 개인 생활을 대표하지 않는다. 사회적 관심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의 여러 영역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또한, 가난이나 경제적 불평등은 사회의 근본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근본 문제는 가난이나 경제적 불평등 같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또한 자본주의적 사회 구조 같은 외적인 어떤 것도 아니다. 성경은 사회의 근본 문제는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고 증거한다. 사회의 근본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있고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죄악성에 있다.

더욱이, 가난은 항상 사회 구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증거한 대로, 사람은 게으름과 낭비 때문에 가난하여지는 경우가 많다. 잠언 6:10, 11,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언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에게 무조건 우월권을 주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성경은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두호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출애굽기 23: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레위기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 . .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또한, 이 세상에서 공평하고 평화로운 사회의 건설은 불가능하다. 사람의 죄악성의 극복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이상적 사회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으로 세상에서 악인들이 다 제거되기 전까지 이상적 사회의 건설은 불가능한 꿈에 불과하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유, 특히 종교적 자유의 박탈과 탄압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보다 더 큰 사회적 문제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공산주의 혁명과 같은 폭력적 행위를 인정할 수 없다.

그러면 사회 개선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대책과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그리스도인들은 전도를 통해 먼저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켜야 한다. 사회의 근본적 문제는 인간의 죄악된 마음이다. 사회의 진정한 개선은 단순히 사회 구조의 개선이 아니고, 인간 개조이다. 마음의 변화가 사회의 구조적 변화보다 앞서야만 진정한 사회 개량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를 통한 영혼 구원과 인격의 변화는 사회 문제에 대한 기독교의 근본적 대답이 된다.

둘째로,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자기 집과 교회를 모범적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를 모범적이게 만들지 못한채 사회 개혁을 위해 활동하는 것은 주제넘는 일일 것이다. 중생한 공동체가 이상적이게 되지 못한다면, 중생치 못한 세속 사회에 어떤 이상적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셋째로,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그의 직업과 시민의 의무 수행에서 사회 정의의 실현과 사회 개선을 위해 힘써야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정치, 경제, 법률, 과학, 교육, 신문 방송, 예술 등 그의 직업의 각 분야에서 모범적으로 활동함으로써 그가 책임 있는 윗 사람일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혹은 그가 아랫 사람일 경우에는 간접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쳐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른 동료들을 겸손히 설득하며 그들의 양심에 호소함으로써 사회 정의 실현과 사회 개선을 위해 힘써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시민으로서 그가 속한 사회가 허용하는 합법적 방법들을 통해 점진적으로 사회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이 의와 선을 이해하지 못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저들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려고 물리적으로 강압해서는 안된다. 사실상,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심령들에게 참되고 온전한 도덕적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론

결론적으로, 교회의 사명인 ‘선교’에 대한 개념의 변질은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에 무엇을 첨가하려는 생각은 하나님의 뜻에서 이탈해 나가는 큰 오류이다. 현대 교회의 배교는 결코 선교 개념의 변질과 무관하지 않다. 실상, 자유주의 신학에는 복음이 없다. 자유주의 신학은 적그리스도의 정신이다.

우리는 이 시대를 분별해야 한다. 현대 교회의 배교와 타협과 혼란 뿐만 아니라, 또한 선교 개념의 변질을 깨달아야 한다. 많은 순진한 성도들이 선교를 위해 헌신하고 선교를 위해 후원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우리가 순수한 성경적인 선교 개념을 지니지 않는다면, 그 순수한 마음이 어리석은 마음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그리고 역사적 기독교가 믿고 힘써 온 대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오직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만 증거해야 하고, 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다 구원해 내는 이 전도의 사명, 이 전도의 임무를 이루어야 한다. 사회정치활동은 아무리 선하고 좋은 일일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이 숭고한 전도의 사명에 비교될 수 없고 거기에 첨가될 수 없다.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은 오직 한가지--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 그것뿐이다. 이것이 선교요 교회의 사명이다.

제4부:

교회의 윤리적 부패

목차

서론 / 217

1. 열린 예배 / 217

2. 현대 기독교 음악 / 224

3. 남녀 평등주의 / 229

4. 낙태 / 234

5. 동성애 / 237

6. 안락사 / 253

결론 / 254

서론

현대 교회의 문제는 교리적 배교와 타협과 혼동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윤리적 부패에서도 심각하게 나타난다. 특히, 교회들의 전통적인 경건한 예배 형식이 세속화 되고 육신적 즐거움을 만족시키는 오락적 요소들이 도입되고 있다. 현대 기독교 음악은 록 스타일과 랩 스타일을 도입하여 세속 음악과 구별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또 남녀 평등주의 사상이 교회 안에 들어와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안수하여 세우는 교단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교회들은 앞을 다투어 낙태를 정당화 하고 동성애를 용납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 심지어 안락사를 인정하는 교회들도 나타났다.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계의 이러한 이상 풍조들을 분별하며 배격하고 교회의 순결성을 지켜 하나님께서 신구약성경에 교훈하신 대로 믿고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 열린 예배

분석

요즈음 일부 교회들에서는 ‘열린 예배’라고 하여서 교회의 전통적 예배 모범을 깨뜨리고 예배 시간에 멀티비젼(대형 자막에 비쳐지는 그림들), 드라마, 무용, 세속적 형식(락이나 랩 스타일)의 복음성가와 밴드, 혹은 심지어 청바지 형태의 복장을 도입하려는 경향이 있다. 또 어떤 교회들은 ‘문화학교’를 개설하여 영어 회화, 꽃꽂이, 바이올린 등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런 경향들은 일찌기 자유주의적 교회들에서 시도되었던 바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보수주의적 혹은 복음주의적이라고 하는 교회들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이 ‘영성’(靈性)이 있는 활동이며, 심지어 이런 교회들이 ‘사도적 모범을 좇는 교회들’이라고 선전된다. 또 이런 류의 교회들은 이런 방식으로 많은 청중들을 모으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 대형교회가 목회의 성공이라고 인식하는 대중의 평가 방식에 이끌리어, 많은 목사들은 ‘여하튼 교회가 숫적으로 커지고 봐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조영엽 박사의 증거

조영엽 박사는 열린 예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다(조영엽, 열린 예배란 무엇인가?).

열린 예배란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에 일찌기 없었던, 지금까지의 전통적 예배의식과는 전연 판이한 새로운 형태의 예배로서 이 시대의 세속적 문화와 표현방법으로 예배의 형태를 바꾼 세속화된 교회의 타락한 예배의 형태를 말한다. 열린 예배는 지금까지 지켜온 전통적인 예배 의식을 완전히 뜯어고친 새로운 형태의 예배 형식이다. . . . 열린 예배를 일명 “사랑의 공동체 예배”라고도 한다. 열린 예배라는 말은 영어의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에서 나왔는데, 그것은 불신자들을 전도하기 위한 예배 즉 이웃초청 전도집회와 같은 성격을 띤 예배를 말한다.

열린 예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열린 예배를 보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메타 춰취’(meta-church)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메타 춰취’란 ‘전향하는 교회’ 혹은 ‘되어가는 교회’라는 뜻으로 전통적 예배의식에 대한 사고 방식, 의식 구조, 예배 형태를 완전히 전환하는 교회를 말한다(Carl F. George, The Coming Church Revolution, pp. 26, 27). 죠지는 그의 또 다른 책 교회 성장의 장애물들을 파괴하는 법(How to break growth barriers) 제3부에서 열린 예배를 보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열린 예배에 방해가 되는 모든 장애물들을 다 제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외형적 구조의 변경도 강조한다. 강대상을 큰 강대상 대신에 작은 이동식 탁자로 대치한다. 의자는 등받침이 없는 것을 놓고 거기에 걸터앉는다. 강단을 무대로 전환하여 노래나 춤이나 연극을 할 수 있도록 요란스런 조명 세트를 장치한다. 조화 또는 생화로 강대상 좌우를 다 꽉 채운다. 대형 자막 또는 대형 전광판을 설치한다. 고도의 방송용 음향 장비를 설치한다. 에드 답손(Ed Dobson)은 그의 책 구도자 예배(Seeker Sensive Service) 제2부에서 열린 예배는 형식에 매이지 말 것, 현대적일 것, 강요하지 말 것, 편안하게 해줄 것 등을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형식에 매이지 않기 위해 목사나 안내 위원이나 성가대원은 모두 청바지나 또는 가벼운 옷들을 입으며, 현대적이기 위해 전자 기타, 드럼들, 심벌즈, 키보드 등을 사용하여 기독교적 록 음악을 연주한다. 또 강요하지 않기 위해 공개적으로 초청하거나 앞으로 나오도록 하는 부담을 주지 않는다. 또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강대상 주변을 재단장하여 교회 강단처럼 보이지 않게 한다.

열린 예배 보는 사람들은 예배를 하나의 축제 개념으로 바꾸었다. 죠지는 그의 책 다가오는 교회 혁명(The Coming Church Revolution) 1부에서와 미래를 위해 당신의 교회를 준비하라(Prepare Your Church for the Future) 4부에서, 그리고 로버트 로간(Robert Logan)은 그의 책 교회 성장 저편에(Beyond Church Growth)에서 예배를 하나의 축제(event, festival) 개념으로 바꾸었다.

열린 예배를 보는 교회들은 찬송 대신 소위 현대 복음송, 현대 기독교 음악(CCM), 크리스챤 록 음악을 부른다. 새들백 커뮤니티 교회의 릭 워런(Rick Warren)은 크리스챤 록 음악을 ‘새 노래’라고 말하면서 새 노래를 부르라고 강조한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가 시무하는 교회가 현대 팝송과 록 음악을 채택한 이유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우리 교인의 96%가 성인 현대 음악을 듣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새들백 교회에서 우리가 사용하기로 선택한 주요 음악 스타일이다,” “우리는 열린 예배에서 찬송은 더 이상 부르지 않기로 전략적 결정을 세웠다”(한역, 318쪽).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교회에 전도의 대상으로 정해준 종류의 사람들에게 맞는 음악을 선택해야 한다”(313쪽), “나는 음악의 스타일이 좋은 음악, 나쁜 음악이라고 판단될 수 있다는 의견에 반대한다. 누가 이것을 결정하는가?”(313쪽), “교회도 어느 한 특정 형태만 신성한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314쪽), “아주 다양한 형태의 음악을 통하여 메시지는 전달될 수 있다”라고 한다.

열린 예배를 보는 교회들의 대부분은 설교의 내용이 빈약하고 말씀에 은혜가 없다. 설교는 예화, 간증, 재담,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들로 가득 찼다. 하나님, 죄, 심판, 회개, 예수님의 속죄의 피, 믿음, 구원, 지옥 등의 근본 교리들이 강조되지 않는다. 또 거룩함, 고난, 인내, 영적 싸움 등이 강조되지 않는다. 열린 예배 보는 교회들은 때때로 연극으로 설교를 대신한다. 예를 들면 하와가 아담을 꾀이는 장면,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이는 장면,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는 장면,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상,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강간하는 장면 등을 재현할 때 어떻게 경건한 예배에 조화될 수 있겠는가?

열린 예배를 주창하는 자들은 목사를 목장주(Rancher)로, 신도를 고객(Customer)으로, 교회를 기업체(Enterprise)로 간주한다. 칼 죠지는 교회 성장의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법(How to Break Growth Barriers) 제2부에서, 맥가반(McGavarn)은 교회 성장을 위한 이해(Understanding Church Growth) 제5부에서, 목사를 목장주로, 신도를 고객으로, 교회를 하나의 사(私)기업체로 간주하였다. 미국에서 열린 예배를 보는 대표적 교회들 중의 하나인 윌로 크릭 공동체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에 전화하면(미국 847-765-0070) ‘고객 서비스입니다’(Customer Service)라고 전화를 받는다.

릭 워런(Rick Warren)

릭 워런은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새들백 커뮤니티 교회의 목사이며 ‘목적에 이끌리는 교회를 건립하기’ 연수회의 지도자이다. 1998년 1월, 워런은 한 세미나에서 전통적 교회를 극적으로 성장하는 교회로 변형시키려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가르쳤다: (1) 현대적 스타일의, 비(非)위협적 ‘구도자(求道者) 집회’가 전통적 일요일 예배를 대체해야 한다. (2) 복장은 평상복이어야 한다. (3) 음악은 현대적이어야 한다. (4) 설교는 구원받은 자들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똑같이, 종종 심리학과 격려적인 성경본문을 섞는 설교 후에, 자신들에 대해 좀더 기분 좋게 생각할 수 있도록 오직 긍정적인 내용이어야 한다. (5) 교회의 사역들은 대중의 필요들을 충족시키도록, 우울증, 무절제한 식사, 불임(不姙), 동성연애자들의 가족이나 친구, 낙태 후의 일, 별거(別居) 등을 위한 후원 그룹들을 가지고 준비되어야 한다. (6) 교리적 교훈은 일요일들에 교회 전체에게 주지 말고, 예배 시간과 별도로 소그룹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한다. (7) 실용주의적(實用主義的) 타협의 정신이 우세해야 한다(Founda- tion, 1998년 3-4월호). 그러나 이러한 세속적인 에큐메니칼 ‘구도자’ 교회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을 편안하게 하고 즐겁게 할 지는 모르나, 그것들은 비성경적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한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6월 15일.)

릭 워런은 ‘구도자 집회’의 음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음악은 현대적이어야 한다. 음악의 가사들이 더 근래의 것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악의 스타일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날마다 듣는 것이어야 한다.” 릭 워런의 새들백 커뮤니티 교회의 음향시설, 밴드, 노래하는 이들과 연주 등의 오락 구성물은 어떤 세속적 록 연주회의 것과도 경쟁할 만하다. 워런은 말하기를, 교회가 해야 할 첫번째 일들 중의 하나는 ‘오르간을 밴드로 대체하는 것’이라고 했다. . . . 교회 찬양대의 목적은 ‘독창 연주자를 배경음악으로 후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찬양대로 하여금 직접 노래하게 하는 것보다 그것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 90년대의 방식이다’고 하였다.” 워런은 또 말하기를, 몰아대는 비트를 가진 큰 소리의, 쉰 목소리의 음악이 그의 회중들이 듣는 종류의 음악이라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주말 집회 때 정말, 정말 소리가 크다. . . . 나는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낮추지 않을 것이다.’ 자 그 이유는, 어린아이 같은 대중들은 음악을 느끼기를 원하지, 단지 그것을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는 전통적 음악의 사용을 주장하는 것을 우상숭배의 죄와 동일시 하였고 또 부언하기를, “모든 좋은 음악이 200년전 유럽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얇게 덮인 인종차별주의 . . . 문화적 엘리트 의식이다”라고 하였다. (Foundation, 1998년 3-4월호; Calvary Con- tender, 1998년 6월 15일.)

팀 포터 목사는 “영적이지 않고도 성공적인 방법”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릭 워런의 방법들과 그의 책 목적에 이끌린 교회(The Purpose Driven Church)의 내용들을 검토한다. 워런의 책은 W. A. 크리스웰의 서문과 더불어 로버트 슐러, 빌 브라이트, 풀러 신학교 교수 아치볼드 하트, 그리고 연합감리교회의 에스라 얼 죤스의 찬동을 얻었다. 포터는 몇 가지 철학적 및 신학적 결점들과 기타 문제점들을 열거한다. 그는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장사술에 이끌린 목회 사역은 불신자의 요구에 응하므로 결국 불신앙에 이르게 될 암(癌)이다”라고 하였다. (Visitor, 1998년 8월호; Calvary Contender, 1998년 10월 1일).

현대 교인들은 오락을 구함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 시설들, 그들의 가족들을 위한 프로그램들, 그리고 오락을 위해 교회를 찾고, 신학이나 신앙사상을 위해 교회를 찾지 않는다. 그들은 기독교적 사회활동(YMCA 같은)이나 종교적 록 콘서트의 혼합물을 찾고 있다(Christian News, 1999년 5월 10일). 슬프게도, 대형교회의 흥미 추구자들은 바른 교리와 거룩한 생활에 낮은 우선 순위를 준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6월 15일.) 성경은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말씀했다(딤후 4:3).

비평

그러나 이런 류의 교회 형태, 목회 형태는 심히 불성실하고 인위적이다. 우선, 정말 ‘열린 예배’의 형식이 바람직한 것이라면, 먼저 기도와 성경연구와 신중한 토론을 통해 목사들의 임직 서약 때 하나님 앞에서 수락했던 ‘예배 모범’을 먼저 고쳐야 할 것이다. 어떻게 목사들이 신앙양심의 거리낌 없이, 하나님 앞에서 서약으로 수락했던 예배 모범과 역행하는 예배 형식을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 있는가?

또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엄숙하고 질서 있게 행해지고 예배 음악들이 아름답고 안정되게 연주되는 것이 과연 합당하지 않은가? 성경은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라고 말씀했다(시 96:9). 또 바울 사도는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다’라고 말했고(고전 14:33), 또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빌 1:9, 10). 우리는 질서 있고 가장 아름답고 선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

또 성경은 분명히 예배의 순서가 찬송과 기도와 설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을 보이고 있다. 고린도전서 14:26,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사도행전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이런 말씀은 전통적 예배 의식이 성경적임을 보인다.

또한, 교회의 문화적 행사들은 성경의 교훈들에도, 초대 교회의 모범에도 맞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본연의 임무와 사명이 있다. 그것은 예배와 영적 성장과 전도의 일이다. 특히, 전도는 예수님 자신의 사명이었고, 그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일이었다. 초대 교회는 이 임무들과 사명에 충실하였다. 어느 시대이든지, 교회는 오직 이 임무들과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성경은 단지 개인의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만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 아니고, 또한 교회 생활과 목회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우리는 인간적 생각과 지혜로 예배하거나 교회를 운영하지 말고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가르침에 의지하여 예배하고 목회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심히 혼란스런 오늘날 교회들의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지시하는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우리 모두는 성경이 보이는 대로 교회를 운영하고 목회해야 한다.

교회의 상업적 경영 방식(Marketing)

1999년 7월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WCF)의 한 결의문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접촉하고 ‘구도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세속적인 상업적 경영전략들(예를 들어, 헐리우드 영화들, 록 음악)을 사용하는 일부 목사들에 대해 경고하였다. 그 결의문은 “바로 이 사람들, 특히 에드 답슨이 근본주의자들과 성경적 분리주의자들을 율법주의자들이라고 지칭한다”고 말했다. 그 결의문에 의하면, “이 상업적 경영방법론은 미국에서 빌 하이벨즈와 릭 워런 같은 사람들의 영향을 통하여 시작되었으나, 온 세계의 복음주의자들을 통해 급속히 퍼져 나가고 있다.” 그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 결의문은, “근본주의자들은 사도행전 2:41-47의 교회예배형태를 따르고, 요한1서 2:15-17의 경고에 주의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8월 1일.)

20세기 교회 내의 실용주의(實用主義)

보이스(Voice)지 1999년 12월호의 한 글은 오늘날 교회들의 풍조를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많은 교회들이 프로그램으로 기도를, 사람들로 능력을, 오락으로 참된 예배를, 번영으로 순수성을, 조직체적 일치로 더럽혀지지 않은 복음에 대한 충성을 대치하였다. . . . 실용주의(實用主義)가 하나님의 백성의 생각을 엄습하여 교회에서 교인수가 느는 것이 복(福)의 기준으로 간주되고 교회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일을 취하든지 정당화 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에 사람들을 포함시키려는 이 과정을 방해할 모든 것을 제거하는데 큰 강조점을 둔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으로 재(再)정의된다. 칭의(稱義)의 교리가 매우 교묘하게 정의됨으로써 천주교인들은 교회를 연합시키려는 노력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거룩에 대한 이해는, 사람이 생활방식 때문에 용납할 만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조화되지 않는 것으로 비난받지 않도록 조정된다.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과 접촉함’이라는 공통적 목표가 본질적 신학 영역들에서의 교리적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일치의 기초가 된다.” (Calvary Contender, 2000년 1월 15일.)

2. 현대 기독교 음악(CCM)

분석

오늘날 교회 음악은 급속히 변질되고 있다. 이전에 술집이나 댄스 홀에서 들을 수 있었던 종류의 음악들이 버젓이 교회 안에서 연주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이미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그 증거를 수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지 최근의 몇 가지 예들을 들어보자.

죤 비새그노 박사의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제일침례교회(남침례교단)는 그 교회의 솔리드 록 카페에서 1994년 행사로 엘비스 대회와 비틀즈 음악 연주를 가졌다. 알 엘 히머즈(R. L. Hymers) 2세 박사는 죽어가는 국가를 향한 설교(Preaching To A Dying Nation)라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단지 이 저녁 예배가 완전히 은사주의적이라고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 . . 안내 위원들은 귀걸이를 하고 짧은 바지와 모자를 쓴 남자들이었다. . . . 우리는 나이트 클럽이나 록 컨서트나 마약 소굴에 들어왔을 때 느꼈을 것처럼 부적절하다고 느꼈다. . . . [그러나] 그 교회는 남침례교단 안에서 ‘보수적’ 교회들 중의 하나라고 간주된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10월 15일.)

미국 남침례교단의 W. A. 크리스웰 목사는 달라스의 역사적 제일침례교회의 원로목사이며 경건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달라스 모닝 뉴스(Dallas Morning News) 1998년 8월 1일자의 한 글에서 달라스 제일침례교회에서 케이던스(Cadence)라는 새로운 청년 사역을 시작한 7월 25일 하드코어-어돈(Hard-Core-a-Thon) 연주회 동안 그 밤에 젊은이들은 떠들석하게 춤을 추었으며, “떠들석한 춤과 천둥 같은 기타들과 크리스챤의 경건으로 어울러진” 그 연주회로 인하여 “달라스 제일 침례교회의 부속건물인 그 장엄한 스펄젼 해리스 빌딩은 흔들린 것 같았다”고 보도되었다. (Fundamentalist Digest, 1998년 7-8월호; Calvary Contender, 1998년 9월 1일.)

미국 남침례교단에서는 2000년 신년 전야제가 유스링크(YouthLink) 2000의 7지역들에서 3일밤, 2일낮 밀레니엄 축제로 치루어졌었다. 4개의 남침례교 기관들에서 후원한 이 행사는 남침례교 역사상 가장 큰 청년 모임이었다(Sword of the Lord, 2000년 2월 18일). 그 모임은 4만 6천명 이상의 남침례교 청년들을 모았고 그들은 미국 내에서 알려진 ‘기독교’ 록 밴드들에 의해 귀가 찢어지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찬양과 예배 음악을 즐겼고 약 새벽 2시까지 웃으며 노래하며 소리치며 춤추었다고 한다. (Calvary Contender, 2000년 3월 15일.)

은사주의와 신복음주의 계열들에서 흔히 세속적, 관능적 현대 기독교 음악(CCM)과 단정치 못한 복장을 특징으로 하는 춤에 대한 경향이 있는 것은 슬픈 일이며, 그것은 어떤 근본주의적 교회들 속에도 침투하기 시작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많은 교회 음악들도 기독교적이지 않고 세속적이게 보인다. 기독교 방송국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들, 기독교 서점들에서 파는 찬송 테이프들 가운데 그런 것들이 적지 않다. 많은 교회 음악들이 리듬이나 템포에 있어서 세속 음악과 비슷해졌다. 째즈나 록 스타일의 경박한 음악들이 교회 속에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기도원들에서 연주되는 밴드나 전도집회시 세우는 밴드들은 완전히 세상적인 기분이 든다. 심지어 신학교들에서도 그런 류의 밴드가 연주되고 그런 류의 노래들이 불리워지고 있다. 경건하고 아름다운 교회 음악이 큰 도전을 받고 있다.

비평

음악은 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경에 의하면, 음악은 하나님을 섬기는 한 방법이다(시 150편; 엡 5:19). 그러나 음악은 또한 옛날부터 이방 종교들이나 우상 숭배들과도 관계가 깊었다(출 32:17-19; 단 3: 5).

하나님은 경건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요구하신다(시 96:8, 9).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을 정죄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헛된 노래를 금하셨다(출 20:7; 암 6:5). 그러나 이방 종교들이나 우상 숭배들은 육신적인 음악, 무질서와 광란의 음악을 사용하였다.

현대 기독교 음악(CCM)의 다수는 크리스챤 록 음악이다. 복음송들의 다수도 그러하다. 그러면 록 음악이란 무엇인가?

록 음악은 1950년대에 생긴 것으로서 50년대에 엘비스 프레슬리와 60년대에 비틀즈로부터 80년대 마이클 잭슨까지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음악 형태를 가리킨다.

조영엽 박사의 증거

조영엽 박사는 현대의 록 음악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증거하였다(조영엽, 열린 예배란 무엇인가?).

록 앤드 롤(rock and roll)이란 명칭은 미국의 방송 음악 진행자이었던 알란 후리드(Aland Freed)가 처음 사용한 용어이었는데, 성적, 육체적 움직임을 표현한 말이다(Webster's New World Dictionary, 3판, p. 1161; O. T. Spence, Straightway, vol. 25, p. 3). 시카고 대학의 알란 블룸 교수는 말하기를, “록 음악은 오직 한가지인 성적 욕망에만 마음을 끈다”고 하였다(Allan Bloom, 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 <1987>, p. 73).

역사적으로, 록 음악은 블루스, 컨츄리 음악, 리듬 음악 등이 혼합되어 생겼다. 블루스는 미국 동남부 흑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흑인들의 대중 가요이다. 블루스 음악의 가사들은 대부분 노예, 가난 등의 슬픈 내용들을 담고 있으며, 곡들은 재즈의 형태를 취한다. 몸을 율동적으로 움직이면서 트롬본이나 섹스폰 같은 악기들을 연주하며 쉰 목소리 같은 음성으로 노래를 부른다. 리듬 음악은 몸을 좌우로, 앞뒤로, 상하로 강하게 떨며 흔들며 움직이며 성적 자극이 있게 부른다.

여기에서 나온 록 음악의 한 특징은 고음(高音)이다. 록 음악은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고음으로 사람들의 혼을 뺀다. 대형 제트 비행기는 이륙시 대략 120 데시벨(db)의 소음을 내며, 천둥 번개의 최고 기록은 약 125 데시벨인데, 록 콘서트에서의 고음은 대략 130-140 데시벨이라고 한다(Frank Garlock and Kurt Woetzel, Music in the Balance, p. 153). 록 음악의 다른 한 특징은 반복이다. 반복 자체만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저질적 가사 내용들, 노래 부르는 사람들의 미친 듯한 고함 소리, 기타, 드럼, 심벌즈 같은 악기들의 요란한 소리들이 계속 끊임없이 반복될 때 사람들은 록 음악에 도취하게 된다. 반복은 최면 효과를 가져온다.

록 음악에서 중요한 다른 한 특징은 비트(박자)이다. 록 음악에 있어서 강하게 몰아치는 비트, 성적 자극을 일으키는 비트 그리고 부정적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비트 등은 다른 모든 형태의 음악들과 구별된다. 찰스 브라운은 “아마도 록 음악을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것은 비트이다. 록 음악은 비트 때문에 다른 음악들과는 구별된다”라고 말하였다(Charles T. Brown, The Art of Rock and Roll, 1983. p. 42). 이를 위해 록 음악에서는 드럼, 심벌즈 등과 더불어 기타가 주 악기로 사용된다.

록 음악의 비트는 강하게 몰아붙이는 비트와 약약강격(弱弱强格, ana- pestic) 비트이다. 약약강격 비트란 박자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고 역행하는 반항적 박자를 가리킨다. 박자의 기본 원칙은 “강”이 첫 박자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4박자는 강-약-중강-약이 된다. 그러나 록 음악은 박자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고 약박자가 먼저 나온다. 또 록 음악의 비트는 성적 흥분을 유발시키는 비트이다. 이러한 비트들은 기존 질서와 권위에 대한 도전과 반항, 옳은 것에 대한 거부, 긴장감과 압박감, 퇴폐, 음란, 성적 욕망 등을 일으킨다.

과연 록 음악의 내용은 성적 음란,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 술취함, 난폭, 폭력, 파괴, 마약, 환각, 동성애, 무질서, 허무, 자살, 사탄 숭배 등이다. 록 음악에는 규칙, 도덕, 법, 철학, 진리가 없다고 지적된다. 특히 사탄 숭배에 관하여 70년대는 역행 은폐(backward masking)의 방법을 사용했으나, 80년대는 보다 노골적이다. 예를 들어, 블랙 오크 알캔자스, 앨범 ‘라이브 론친롤,’ ‘알캔자스에 전기가 들어왔을 때’--“사탄, 사탄, 사탄, 그는 신이다. 그는 신이다. 그는 신이다.” 그룹 AC/DC, ‘처음 느낀 사랑의 감정’--“우리는 악마를 섬긴다. 즐겨라, 죄인들이여.” (“내곁에 도사린 사탄의 두 얼굴,” 크리스천 한국, 1993년 8월 25일, 1, 2쪽.)

1950년대 초에 처음 등장한 이후, 록 음악은 청소년 층을 중심으로 전세계에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그것은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이며 인기가 있지만, 도덕적, 사회적, 종교적 영역에서 가장 무서운 악영향을 주고 있다. 록 음악은 거칠고 난폭하며 혼란한 소리이며 저속하고 사람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최면 효과를 일으켜 사람을 열광에 빠지게 하고 청각에 손상을 주며 예술적 가치는 전혀 없다.

세속적 록 음악의 영향을 받는 현대 기독교 음악(CCM)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현대 기독교 음악의 대다수는 크리스챤 록 음악이다. 그것은 리듬이나 화성이 세속적 록 음악과 비슷하다. 곡의 작곡 형식이 전통적이지 않고 세속적 록 음악과 같다. 그것은 전통적 클라식 음악이 가지는 질서와 안정과 아름다움을 중시하지 않는다.

리듬에 있어서 그것은 약약강격을 많이 사용하고, 화성에 있어서 그것은 “도미솔, 도화라, 시레솔”의 정상적 3화음을 좋아하지 않고 불협화음들을 자유로이 사용하므로 육감적, 세속적 기분이 든다. 가사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곡에 있어서 그것은 세속 음악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O. T. 스펜스 박사는 “가스펠 록(gospel rock)은 육신적 음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하였고, 복음송에 대하여도 “가스펠 록이 거의 모든 복음송에 들어가 있다. 이 노래들은 경험, 느낌, 감상적(感傷的)인데 근거하고, 대부분 은사주의자들이 만든다”고 논평했다(1993년 10월 24일, 잠실동교회 주일낮설교). 또 그는 “현대 기독교 음악(CCM)에 젖으면 몇 년 후에 세속적 록 음악으로 간다”고 말하였다.

록 음악에 오랫 동안 몸담았던 리차드 펙은 우리가 부드러운 록 음악(soft rock)이라도 배격해야 하는 까닭은, ① 부드러운 록 음악도 메시지가 항상 부드러운 것이 아니며, ② 연주자가 그것을 흔히 온건하게만 연주하지 않으며, ③ 그것은 여하튼 록 음악의 맛을 들게 만드며, ④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하기 위해 결국 록 음악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ichard Peck, Rock: Making Musical Choices).

덧붙여, 오늘날 현대 기독교 음악에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보다 사람이 높임을 받는 경향도 없지 않다. 또 실제로 크리스챤 록 콘서트에 돈을 받음으로써 상업적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오늘날 크리스챤 록 음반 사업은 큰 사업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현대 기독교 음악(CCM) 혹은 크리스챤 록이나 그런 류의 복음송들을 경계해야 한다. 쏟아져 나오는 복음송들의 곡들과 가사들을 검토, 평가하고 우리 교회들의 청년들과 청소년들을 위해 건전한 것들을 정선하는 것은 오늘날 보수적 교회들의 큰 과제이다. 우리의 자녀들이 복음송들을 무분별하게 아무 것이나 부르지 않고 좋은 것들을 부를 수 있도록 지도해주어야 한다. 물론 록 스타일의 곡이나, 비성경적이거나 별 의미가 없는 가사는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과 청년들에게 옛날부터 즐겨불렀던 찬송가들을 부르도록 권면해야 하겠다. 그리스도인들의 찬송이나 영적 노래들(엡 5:19)은 가사와 곡에 있어서 건전해야 한다. 그 가사는 성경 교리에 합하고, 복음의 내용을 가진 것이어야 하고, 그 곡도 경건하고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 빈번한 불협화음들을 피하고, 단조(短調)도 너무 많이 사용하지 않아야 해야 한다. 소리를 너무 크게 하거나 속도를 너무 빠르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성도들의 음악과 노래는 하나님께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부르는 것이므로 결코 자기만족적이거나 자기도취적이어서는 안된다.

3. 남녀평등주의

분석

오늘날 교회들 안에는 남녀 평등주의 사상이 많이 들어와 있고 이것은 특히 여성 목사와 여성 장로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예들은 많지만, 최근의 몇 가지 예들을 들어본다.

커버넌트 신학교의 제람바즈 교수의 남녀평등주의

1997년 라브리 청년대학생 수양회의 ‘세상 속의 일그러진 성’이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미국 커버넌트 신학교 변증학 교수이며 프란시스 쉐퍼 연구소 소장인 제람바즈 교수는,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남성이 해야 할 일과 여성이 해야 할 일에 관하여 구분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돕는 자로서의 여성이라는 성경말씀은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구분하는 의미가 아니고 동등한 위치의 남성과 여성으로서 서로 협력하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남녀는 동등한 관계를 맺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연합신문, 1997년 1월 19일, 15쪽.)

미국의 여자 목사들의 증가

미국 뉴스와 세계 소식(U. S. News & World Report) 1998년 8월 10일자는 “하와에 의한 성경”이라는 특별 기사에서 “여성들은 약 80개의 기독교단들에서 목사직에 그리고 보수파와 개혁파와 재건파 유대교에서 랍비직에 용납된다. 여성들은 신학교 프로그램들 안에 있는 모든 학생들의 3분의 1에 이른다”고 했다(Calvary Contender, 1998년 9월 1일).

미국 연방 노동청 통계에 의하면, 미국에서 자신을 ‘성직자’라고 묘사하는 여성들의 숫자는 1983년과 1996년 사이에 27,134명 증가하였다. 1983년에는 그 숫자가 16,408명이었으나, 1996년까지 여성 ‘성직자’의 숫자는 43,542명으로 늘었다. 이것은 여성들이 미국의 모든 성직자들의 12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David Cloud, "Number of Ordained Women Grows Phenomenally," in Christian News, August 10, 1998, p. 26).

1997년에, 229개의 북미 신학 대학원 학생들의 30퍼센트는 여성이었는데, 그것은 1972년의 10퍼센트와 비교할 때 크게 증가된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개신교 감독교회 신학교와 디스트릭에 있는 연합 감리교회의 웨슬리 신학교는 학생들의 절반이 여성이다(Ibid.).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의 여성 안수 가결

1994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총회는 701대 612로 여성 안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예장 통합측은 대한기독교감리회(기감측)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측)와 더불어 한국에서 자유주의적 교회들의 노선을 다시 한 번 더 드러내었다.

비평

오늘날 점차 많아지고 있는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에 대한 주장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세속사회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이런 생각이 복음주의적 신학교 안에서 가르쳐지고 기독대학생들과 청년들에게 퍼진다는 것은 대단히 슬픈 현상이다.

여성 안수을 주장하는 자들의 근거는 대개 다음과 같다. (1)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여성 사역자들이 있었다는 점(예를 들어, 여선지자 드보라, 미리암, 전도자 빌립의 딸들, 브리스길라, 뵈뵈 등), (2)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는 갈라디아서 3:28의 말씀은 남녀 평등의 원리를 가르친다는 점, (3) 세속 사회도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데 하물며 교회가 시대 조류를 역행할 수 있는가라는 주장, (4) 교회 내의 여성들의 은사를 활용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위의 반론들에 대하여 우리는 그러한 생각들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가라고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믿고 행동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상 변칙적으로 허용하신 것과 교회의 정식적 규범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밝히 가르치고 있으며 지금까지 성경을 믿는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여왔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인간적, 시대적 생각을 버리고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사람의 창조기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그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여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돕는 자]’을 지으셨다(창 2:18). 이 기사가 분명히 보이는 바는 하나님께서 여자를 먼저 만드시고 그를 위하여 남자를 만드신 것이 아니고,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그를 위하여 여자를 만드셨다는 점이다. 여기에 남녀의 역할의 구분이 있다. 여자는 남자를 위하는 역할, 돕는 역할을 하도록 창조된 것이다.

물론 이것이 남편이 아내를 마음대로 지배하고 학대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 둘은 한 몸이요 참된 사랑의 관계이다. 남편은 아내를 아끼고 사랑해야 하며 아내는 남편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그 둘의 관계는 한 편이 다른 편을 위하는 관계이고 순종하는 관계인 것이다.

신약성경은 결코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해 가르치는 디모데전서 2:11-14과 고린도전서 14:34-37은 여자 목사직과 여자 장로직을 금하는 다섯 가지의 이유들을 밝히 제시하였다.

디모데전서 2:11-14,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이 구절은 여자의 가르치는 일(목사직)과 다스리는 일(장로직)을 명백히 금하고 있다. 이렇게 금하는 이유들은 두 가지이다: ① 창조의 질서 때문이다.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자는 남자의 협조자(helper)로 창조되었다. ② 여자의 범죄에 대한 징벌 때문이다. 인류의 타락시 아담은 여자가 선악과를 줌으로 그것을 먹고 범죄하였다. 창세기 3:6,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그러므로 이제 여자는 또다시 나서서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제약을 당한다는 뜻이다. 이 두 이유들은 다 어떤 시대적, 환경적 요인들이 아니고, 역사적, 불변적 사실들이다.

고린도전서 14:34-37,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너희의 아내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여기에서도 여자들이 교회 앞에 나서서 말하고 가르치는 것을 허락지 않고 있다. 그 이유들은 ① 율법의 말씀이기 때문이다(34절, “율법에 이른 바와 같이”). 어떤 율법을 가르치는가? 예를 들면, 창세기 2:18,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창세기 3: 16,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창세기 18: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② 주의 명령이기 때문이다(37절, “주의 명령인줄 알라”). 에베소서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베드로전서 3:1, 5-6,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 . .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사도들(바울과 베드로 등)의 교훈은 곧 주의 교훈이다. ③ 교회의 보편적 규율이기 때문이다(34절,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위의 두 구절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교훈을 옛 시대의 사고방식과 풍습에 제약을 받은 사도의 인간적 말로 보는 것은, 거기에 제시된 다섯 가지의 이유들의 정당성을 무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글인 신약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항하는 큰 오류요 죄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15,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박형룡 박사는 이것이 2천년전의 한 지방 교회의 풍습이 아니고 만고 불변의 진리라고 밝히 강조했다(145-148쪽).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여성신학자들이 인용하는 다음 성경 구절들은 위의 성경 진리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1: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갈라디아서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구절들은 직분에 있어서의 남녀 평등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은혜와 구원의 복을 받음에 있어서 남녀가 동등하다는 뜻이다. 신약의 만인 제사장 진리도 가정과 교회 안에서 남녀 역할의 차등의 진리와 배치되게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신약시대의 복음 사역에 여자들의 역할이 컸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누가복음 8:2, 3,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직이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예수님과 12제자들)를 섬기더라.” 로마서 16장에는 뵈뵈, 브리스길라, 마리아 등 복음을 위해 많이 수고한 여자들의 이름이 언급된다. 그 뿐 아니라, 여자에게는 자녀 출산과 양육이라는 특별한 사역이 있다. 디모데전서 2: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이 구절은 여자가 해산을 통해 그의 낮은 지위가 회복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훌륭한 남자 배후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

4. 낙태

분석

오늘날 낙태는 대단히 큰 사회 악이다. 또한 이것은 성적 부도덕과 맞물려 유행하는 악이다. 낙태로 죽어가는 어린 생명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한 보도에 의하면, 미국에서 1980년 합법적으로 행해진 낙태는 150만명이었고 그 중 79%는 미혼자들에 의한 것이고 30%는 청소년들에 의한 것이며 심지어 1%는 15세 이하의 경우이었다.

미국 남북전쟁시 사망한 군인들의 수는 약 50만명명이었고, 1차 세계대전시 사망자수는 약 12만명, 2차 세계대전시 사망자수는 약 41만명, 한국의 6?25 전쟁시 사망자수는 약 5만명, 베드남 전쟁시 사망자수는 약 6만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낙태가 합법화 된 1973년 이후 1985년까지 미국에서 낙태된 어린 아기들의 수는 약 1500만명이라고 하니 심히 두려운 일이다(Haven B. Gow, "Is Abortion in America Like the Holocaust?," Christian News, 1985년 6월 24일, 8쪽).

그런데 현대 교회들이 낙태를 요납하고 있다. 지금부터 25년전 미국의 역사적 로(Roe) 대 웨이드(Wade) 대법원 판결 이전, 이미 미국 연합감리교회는 낙태가 더 이상 범죄가 아니며 여성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함께 일부 목사와 성도들은 낙태 여성을 위해 체포까지도 감수했었다. 미국 연합감리교회는 1972년 총회에서 발표된 사회신조를 통해 낙태를 범죄 목록에서 제거하고, 그 대신 기초적 의료 행위 과정과 연관되는 법률로 다루어야 한다며 낙태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1972년 통과된 책임 있는 부모에 대한 결의는 1968년 총회 때 확정된 결의로부터의 아주 중요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1968년 결의는, 사랑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아이들이 계속적으로 태어나는 것을 경고하면서 낙태를 찬성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에 대한 단순한 논쟁을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강간이나 근친상간, 그리고 다른 극도로 나쁜 환경의 경우 의사들에 의해 승인된 낙태만을 찬성했다. 그러나 1972년 결의는 낙태에 대한 개인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와 관련, 여성들이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하는 것으로 더욱 진보했다. (크리스챤 신문, 1998년 2월 2일.)

1986년 미합중국 장로교 총회는 낙태에 관하여 281대 266으로 ‘각자의 자유 의사에 맡긴다’(pro-choice)는 입장을 재확인하였다(Religious News Service, June 18, 1986). 미국 연합그리스도의 교회의 공식적 진술들도 낙태를 지지한다(Calvary Contender, 1999년 1월 1일).

비평

낙태는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범하는 죄이다. 출산 이전의 태아의 생명도 인간의 생명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따라서 낙태는 용납될 수 없다.

낙태가 살인이라는 성경의 원리는 출애굽기 21:22-25에 나타나 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 . 갚을지니라.”

‘낙태케 하였다’는 원어(웨야츠우 엘라데하)는 직역하면 ‘그의 아이가 나온다’이다(옛날 영어성경은 그렇게 번역함). 이것은 단순히 조산(早産)을 가리키며, 반드시 낙태 혹은 유산(流産)을 의미하지 않는다. 낙태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히브리어는 솨칼 혹은 네펠이다.

‘다른 해가 없으면’이라는 말은 엄마에게나 아기에게나 다 적용된다(칼빈과 카일-델리취도 그렇게 생각함). 이 말씀은, 만일 조산된 아기가 죽었으면 살인죄가 적용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태아의 생명체도 인간생명으로 간주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낙태는 죄라는 것이 분명히 증거된다.

모태에서의 생명이 인간 생명으로 간주되는 것은 예레미야 1:5과 누가복음 1:41에서도 증거된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야차)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태 안에서 뛰노는지라.” 태 안에 있는 생명체는 비인간적 존재가 아니고, ‘아이’이다.

의학적으로도, 인간 생명은 임신되는 순간 시작된다. 임신 3주째면 벌써 심장 근육이 움직이고 머리, 팔, 다리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40일에서 42일이면 뇌파가 감지되고, 2개월이면 코, 눈, 귀, 발가락이 나타나며, 심장이 뛰며 혈액이 흐르고 뼈가 형성되고 모든 육체 기관들이 존재하며 활동한다고 한다. 3개월이면 곁눈질하고 주먹을 쥐고 혀를 움직이며 손가락을 빨 수 있고 육체적 고통을 느낄 수 있으며, 4개월이면 몸무게는 6배로 늘어나 출산시 몸무게의 약 2분의 1이 되고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5개월이면 피부, 머리털, 손톱이 생기고 꿈을 꿀 수 있고 공기가 존재한다면 울 수 있고 자궁 밖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고 한다(노만 가이슬러, 기독교윤리학, 190, 191쪽).

유전학적으로도, 수정란은 인간이다. 남성의 정자와 여성의 난자는 각각 23개씩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고 임신이 된 수정란은 46개의 염색체를 가진다. 이것은 정상적 성인의 염색체 수와 같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그리고 의학적으로 낙태 혹은 인공유산은 허용될 수 없다. 강간이나 근친상간의 경우도 태아 살해를 정당화 할 수 없다. 낙태를 위한 불가피한 경우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심지어 모체가 태아로 인하여 생명의 심각한 위험을 받을 경우에도 그것은 정당한 일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시작된 생명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은 의사에게도 엄마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없다. 낙태는 살인이다.

5. 동성애

분석

동성애(同性愛)는 동성간의 성행위를 말한다. 옛날부터 동성애의 죄악이 있어왔지만, 오늘날 특히 사회적으로 동성애를 용납해야 한다는 소리가 강해지고 있다. 그런데 사회 뿐만 아니라 교회들 안에서도 동성애를 용납하려는 움직임이 널리 일어나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1993년 11월, 세계의 300개 교단 이상을 대표하는 세계교회협의회는 2,000명의 여성들이 참석한,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서의 리-이메이징(Re-imaging) 대회를 후원하였다. 그 대회의 연사들 중 다수는 여성 동성애를 조장하였고, 대략 100명의 여성 동성애자들 무리는 그들의 동성애를 자축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갔고 기립 박수를 받았다. 한 분과토론회는 ‘교회 내에서의 여성 동성애자들의 예언적 목소리’라는 이름을 가졌다(Christian News, 1997년 10월 27일, 5쪽).

미국 교회 협의회(NCC)

미국의 대표적 동성애 교회인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 교회 세계협회의 지도자 그윈 깃보드(Gwynne Guidbord) 박사는 최근의 미국 교회협의회 총회에서 연사로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회집된 교회협의회 대표들 중 최소한 절반은 서서 그 여자에게 갈채를 보내었다(National Liberty Journal, 1999년 2월호). 그 여자는 실제로 동성애에 대한 반대가 젊은이들을 매춘, 마약, 알코홀 남용에 빠지도록 강요한다고 비난했다. 미국 교회협의회 회장 크레익 앤더슨을 포함하여 일부 교회협의회 지도자들은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 교회 세계협회를 회원 교단으로 받아들이자는 쪽이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2월 15일.)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

1993년 11월, 2,000명의 여성들이 참석한,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서의 리-이메이징(Re-imaging) 대회의 연사들 중 다수는 여성 동성애를 조장하였고, 대략 100명의 여성 동성애자들 무리는 그들의 동성애를 자축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갔고 기립 박수를 받았다. 미합중국 장로교회에서 스스로 동성애 여목회자로 공언한 재인 스파(Jane Spahr)는 주장하기를, 그의 신학은 무엇보다도 그의 동성애 파트너인 “코니(Coni)와 사랑을 함”으로써 지식을 얻었다고 했다(Christian News, 1997년 10월 27일, 5쪽).

1997년 수년간의 논쟁 끝에 미합중국 장로교 총회는 모든 미혼 목사들, 집사들, 장로들이 독신이어야 한다는 규정을 근소한 표 차이로 통과시켰다고 한다. 이것은, 물론 성적으로 순결치 못한 모든 독신 직분자들을 당황케 할 것이지만, 특히 동성애자들의 목사 안수를 금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Calvary Contender, 1997년 5월 1일.)

1999년 미합중국 장로교회는 동성애 전도자 제인 스파(Jane Spahr)를 올 해의 ‘신앙의 여성’ 수상자로 지명하였다. 두 명의 자녀를 둔 이 이혼모는 미합중국 장로교회를 섬기는 첫번째 공공연한 동성애자이었다(Calvary Contender, 1992년 4월 1일). 그는 동성연애 장로교인들의 교회 직분자로서의 임명을 위해 바쳐진 한 단체를 섬겼다(World, 1999년 5월 15일). 상을 받을 다른 두 여자는 예일대학 교수 동성연애자 레티 럿셀과, 은퇴한 한 프린스턴대학 교수이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7월 1일.)

1999년 미합중국 장로교회 211차 총회는 동성애자에 대한 안수금지를 규정한 ‘정절과 순결’ 헌법조항 삭제를 주장하는 교회직제 목회위원회의 ‘다수파’ 보고서 대신, 동성애자에 대한 목사 장로 집사 안수 여부를 놓고 2년간 연구와 토론을 하자는 ‘소수파’ 보고서를 지지했다. 다수파 지지 총대는 총대 198명(38퍼센트)이었고 소수파 지지 총대는 총대 319명(61퍼센트)이었다고 한다. (기독신문, 1999년 6월 30일, 16쪽.)

1966년 미합중국 장로교회 총회가 채택한 ‘정절과 순결’ 조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회의 직원의 소임을 받은 자는 성경에 복종하고 교회의 역사적 신앙 표준에 적합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한 표준들에는 한 남성과 한 여성이 결혼의 서약을 맺은 관계에서 정절을 지키며 살거나, 또는 독신 생활에서 순결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요구조건도 포함된다. 신앙고백이 죄라 한 것을 범한 것을 자인하고도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안수할 수 없으며 또한 집사나 장로나 성직자로 세울 수 없다” (Book of Order, G-6.0106b).

성경이 명백히 정죄하는 동성애의 문제를 두고 동성애자들을 안수할 수 없다는 교회의 규정을 삭제하기를 원하는 총대들(즉 많은 목사들의 대표자들)이 198명이나 되고, 나머지 총대들도 그 조항을 강하게 지키려는 것보다 그 문제를 ‘2년간 연구, 토론하자’는 입장일 뿐이니, 도대체 교회가 얼마나 부패한 것인가! 1995년 통계에 의하면, 미합중국 장로교회는 11,361교회, 세례교인 266만명의 대교단이다.

미합중국 장로교회 총회 상설재판국은 2000년 5월 노스이스트 대회 상설재판국의 판결에 불복해 올라온 두 건의 상소 사건을 다루면서 목사의 동성애자 ‘결합식’(union) 주례를 인정하며 동성애자 목사후보생을 인정하는 대회 상설재판국의 판결을 정당하다고 판시하였다. 상설재판국은 1997년에 채택한 “교회 직원은 한 남성과 한 여성 사이의 결혼생활에서 성실해야 하며 독신생활에서 순결해야 한다”고 규정한 헌법 ‘수정조항(B)’은 교회 예식이나 목사후보생 자격심사의 기준으로 확대 적용될 수 없다고 해석하며, 동성간의 ‘결합식’이 이성간의 전통적 결혼식과 혼동되지 않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치러진다면 목사가 그 의식을 주례하는 것은 헌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고 판시하였다. 동성간의 결합식은 전통적 결혼예식의 의미와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또한 상설재판국은 현재 자신이 독신 동성애자이며 가까운 장래에 실제로 동성애 관계를 가질 것이라고 밝힌 사람을 합법적으로 목사후보생이 될 수 있다고 판시하였다. (기독신문, 2000년 5월 31일, 8쪽.)

2000년 6월 미합중국 장로교회 총회는 동성애 금지 조항을 명시한 헌법수정안을 전체 회의에서 한 시간의 격론 끝에 268대 251의 표결로 통과시켰다. 이 수정안은 총회 산하 173개 노회의 3분지 2의 찬성을 얻어야 효력을 가진다. (기독신문, 2000년 7월 5일, 8쪽.) 그러나 이 결정은 기뻐하기보다는 여전히 슬픈 사실이다. 왜냐하면 ‘한 시간의 격론 끝에 268대 251로’ 통과된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연합감리교회(UMC)

1979년도의 한 책에서, (연합감리교회 소속) 남부 감리교 대학교의 빅터 폴 퍼니쉬(Victor Paul Furnish)는 바울이 신약성경에서 정말 동성애를 정죄했는지 의문(疑問)하였다(Christian News, 1997년 10월 27일, 5쪽).

1982년, 연합감리교회에서 출판된 ‘인간의 성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동성애적인 남자들과 여자들이 교회 목회나 지도적 직분에서 제외되어서는 안된다고 진술하였다. 그 보고서는 주장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천성적으로 동성애적이며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완전한 그리스도인 제자의 생활을 하고 상호간의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하였다(Christian News, 1997년 10월 27일, 5쪽).

1995년 11월, 워싱턴 D.C.에 있는 연합감리교단 소속 파운드리 감리교회에서 열린 한 공개토론회에서 연사들은 바울을 ‘자신을 미워하는 동성애자’로 묘사했고, 동성애 결혼을 칭찬했고, 또 다윗 왕이 양성애자이었을지 모르며 예수 그리스도가 동성애자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였다. 그 대회에서는 동성애적 무지개 상징을 보이는 깃발을 앞세운 ‘성직자 행렬’이 있었다(Christian News, 1997년 10월 27일, 5쪽).

1997년 9월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의 제일 연합감리교회의 지미 크리치(Jimmy Creech) 목사는 그의 교인 중 두 명의 여자 동성연애자들을 위해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그 교회의 한 교인의 고소로 그 사건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런데 동성연애자들을 위한 연합 감리교인들의 비공식적 대표 모임인 ‘단언’(Affirmation)이라는 모임은 그 교단의 최고 법정인 재판위원회가 동성애자들의 결혼식에 대한 1996년 교회 금지 규정의 합헌성 여부를 판단해주기를 원한다. ‘단언’의 대변인인 진 네퍼는 말하기를, 1996년 채택된 그 금지 규정이 “불분명하고, 비헌법적이고 강요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불공정하며 교회의 어떤 회원들에 대한 필요불가결한 봉사를 부정한다”고 했다. (Christian News, 1997년 11월 24일, 11쪽.)

1998년 1월, 미국 연합감리교회 소속 목회자들 일부가 동성애를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6개항으로 된 이 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로, 그들은 성경, 전통, 이성 및 경험에 의지하여 ‘동성애라는 관행’ 그 자체가 기독교의 교훈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또한 그들은 동성 커플 계약의 약속을 위해 예전적(예를 들어, 결혼 예식 거행 등) 도움을 적절히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안수 받을 자격이 충분한 남녀 동성애자들에게 안수가 주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활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성명서에 서명한 자들 가운데는 남감리대 빅터 폴 휘니쉬 교수, 사회행동을 위한 감리교 연합 총무 조지 맥클레인 등이 있다. (크리스챤신문, 1998년 1월 26, 2쪽.)

1998년, 미국 연합감리교회 재판국은 동성애 결혼식을 집례한 일로 고소된 지미 크리치 목사의 재판에서 13명 배심원 중 8명은 크리치 목사의 유죄를 인정했으나 최소한 9명이 유죄를 인정해야 유죄평결을 내릴 수 있는 교회법에 따라 크리치 목사의 장정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평결을 내렸다. 크리치 목사의 무죄평결 이후 연합감리교회 내의 갈등과 분열은 심화되고 있다.

연합감리교내 복음주의 단체인 ‘좋은 소식’과 ‘신앙고백운동’은 3월 17일에, 그리고 노스캘로라이나 연회 감독과 12명의 감리사들은 3월 24일에 각각 이번 평결을 재심의하고 동성애 결혼집례를 금지하는 확실한 법규를 마련하기 위한 비상총회 소집을 요구했다. 휴스턴 제일감리교회 빌 힌슨 목사는 3월 15일 비상총회 소집의 필요성을 감독들에게 촉구했다. 애워스 감리교회는 3월 15일, 그리고 마운트 베델 감리교회는 3월 29일, 크리치 평결로 야기된 장정에 대한 논란이 정리되기 전까지 총회 분담금을 보류하기를 결정했다.

심지어 캘리포니아-네바다 연회 소속 ‘복음주의’ 성직자 18명과 평신도 25명은 4월 2일 ‘자유주의’ 연회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최근, 갤리포니아-네바다 연회 감독과 직전 감독은 교단내 동성애자를 지지하는 성명서에 서명했었으며, 이 연회 소속 지방회 감리사 2명은 크리치의 동성애 결혼식 집례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었었다.

한편, 크리치 목사를 지지하는 ‘비전을 선포하는 모임’이라는 단체의 목회자 92명은 동성애자 결혼식 집례를 계속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또 ‘화해하는 교회’라는 단체는 3월 16일 ‘지미 크리치 목사 재판의 평결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며 환영 성명을 발표했다. (기독신문, 1998년 4월 15일, 16쪽.)

1998년 7월, 미국의 감리교회의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더 이상 [연합감리교회]의 회원으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월드(World)지 1998년 7월 25일자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다: “신자들은 신앙의 기본적 사실들을 긍정하지 않는 자들과 영적 동반자들일 수 없다,” “우리는 본교단에서 연합될 수 없는 두 개의 다른 믿음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분열에 대한 존 웨슬리의 다음과 같은 말도 인용되어 있다: “불경건과 배교가 우세한 교회들 안에서, 분열의 악은 교회 안에 머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자들에게 있다.”

최근의 논쟁의 많은 부분은 연합감리교회의 목사 지미 크리치의 최근의 두 여성 동성연애자들을 위한 ‘언약’ 결합 의식의 집례와, 미국 뉴욕시의 악명 높은 리버사이드 교회의 ‘동성애자 주일’ 예배에서의 그의 ‘설교’ 때문에 기인하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글라이드 기념 연합감리교회의 목사 시실 윌리암즈(Cecil Williams)는 자기의 정박소는 ‘해방의 신학’이며 “규칙들과 교리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간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자기는 30년 이상 동안 동성연애자들을 위한 결합 언약 의식을 집행해 왔다고 했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8월 15일.)

1998년 미국 연합감리교회의 최고 법정에 의한 한 구속력 있는 판결은 동성(同性)의 결합들이 연합감리교회 목사들에 의해 연합감리교회들 안에서 행해질 수 없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한 보수적인 연합감리교회 지도자는 말하기를, 1998년초 240명의 연합감리교회 목사들이 그들이 요청을 받는다면 동성의 결합들을 집례하겠다고 말하는 성명서들에 서명하였다고 한다(Christianity Today, 1998년 10월 5일). 월드(World)지 1998년 9월 19일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연합감리교회 소속 글라이드 교회의 목사 시실 윌리암스와 기타 성직자들이 동성의 결합들을 즐거이 집례하겠다고 진술하는 성명서에 서명하였다고 말했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10월 15일).

1999년 1월 16일, 한 여성 동성애 부부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서 1500명의 사람들 앞에서 95명의 연합감리교단 목사들에 의해서 ‘축복’을 받았다(Christianity Today, 1999년 3월 1일). 그들은 그 의식을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동성애자들의 결합에 대한 그들 교단의 금지 조치에 항의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3월 15일.)

미국 연합그리스도의 교회(UCC)

1972년, 미국 연합그리스도의 교회는 윌리암 존슨(William Johnson)의 안수를 허락했는데, 그는 대교단에 의해 안수받은 첫번째의 공공연한 동성애자이다(Christian News, 1997년 10월 27일, 5쪽).

1980년, 미국 연합그리스도의 교회는 현행 남녀 동성애자들이 목사로 봉직하도록 공식적으로 허용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대교단이 되었다(Christian News, 1992년 4월 13일).

1985년, 미국 연합그리스도의 교회 총회(2년마다 모임)는 동성애자들을 목사로 허락하는 것을 압도적 표수로 결정했다(Christian News, 1985년 4월 29일, 3쪽).

1994년, 미국 연합그리스도의 교회 총회장 폴 쉐리(Paul Sherry)와 지도자들은 ‘남녀 동성연애자들과 양성애(兩性愛, Bisexual)자들의 동등권과 해방을 위한 워싱턴 행진’에 참가하였다(Christian News, 1997년 10월 27일, 5쪽).

1998년 미국 연합그리스도의 교회 총회장 폴 쉐리는 동성애의 용납을 지지하면서 쓴 자신의 목회 서신이 6천개의 모든 연합그리스도 교회의 강단들에서 읽혀지기를 원하였다(World, 1998년 12월 5일).

1995년 통계에 의하면, 미국 연합그리스도의 교회는 6,145교회, 147만 교인을 가진 대교단이다.

미국 감독교회(ECA)

1987년, 미국 감독교회의 뉴저지주 뉴워크시 감독 교구는 동성애적 결혼들의 인정을 요청하였다(Christian News, 1997년 10월 27일, 5쪽).

1987년 11월, 미국 감독교회의 매사추세츠 감독 교구의 ‘성직자’ 대표들은 결혼식과 비슷한 동성연애자들을 위한 축복 의식을 개발하기로 한 결의안을 승인하였다(Christian News, 1997년 10월 27일, 5쪽).

1988년, 미국 감독교회의 감독 죤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은 죄 가운데 삶: 한 감독이 인간의 성(性)을 다시 생각함(Living in Sin: A Bishop Rethinks Human Sexuality)이라는 책에서 ‘나는 남여 동성연애자들의 짝들에 대한 교회의 축복은 불가피하고 옳으며 분명한 선(善)이라고 간주한다’고 썼다(198쪽)(Christian News, 1997년 10월 27일, 5쪽).

1993년 국내 및 국제 종교 보도(NIRR)에 의한 설문조사는, 미국의 감독교인들의 75퍼센트는 성적으로 활동적인 동성애자들이 여전히 충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나타내었다. (Christ- ian News, 1997년 10월 27일, 5쪽.)

1997년 7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국 감독교회의 3년마다 열리는 총대회 기간에, 동성애에 관하여 심각히 분열되어 있는 감독교인들은 남녀 동성애자들에게 “여러 해 동안 교회가 [그들을] 거절하고 박대한 것에 대하여” 사죄하였다. 또한 그들은 동성(同性) 결합들의 축복을 연구하고, 가사의 일에 관여하는 배우자들에게도 의료보험 혜택을 확장하기로 가결했고, 성적으로 활동적인 동성애 성직자를 금지하려는 시도들을 부결시켰고, 동성애 관심사에 동정적인, 자유주의적인 새 감독 회장을 선출하였다. 미국 감독교회에는 7명의 여성 감독들과 약 1,500명의 여성 신부들이 있다(Christian News, 1997년 10월 27일, 5쪽; Calvary Con- tender, 1997년 9월 15일).

1998년, 미국 감독교회의 감독회장인 에드먼드 브라우닝(Edmond Browning)은, 감독회장으로서의 그의 마지막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국 국교회 [전통을 받은] 교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성경과 전통과 이성을 통하여 분별한다. 그렇지만, 어떤 이들은 우리의 영국 국교회 전통 대신에 성경 문자주의를 받아들이기를 택하였다. 역사는, 성경 문자주의가 노예제도의 실천 뿐만 아니라 또한 여성의 인격 훼손을 지지하는데 사용되었음을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는 노예제도를 지나서 움직여 왔고 여성 압박을 지나서 움직이고 있다. 지금은, 우리의 남녀 동성애적 형제들과 자매들에 대한 선입견들을 창조하는 성경의 문자주의적 해석의 사용을 지나서 움직일 때이다”(Evangelicals Concerned, 1998년 봄호). 새 감독회장인 프랭크 그리스월드(Frank Griswold)는 “오래 전부터 남녀 동성연애자들의 교회 생활에서의 완전한 참여에 대한 지지자이었다”고 한다(Calvary Contender, 1998년 5월 1일).

미국 감독교회의 자유주의자 죤 쉘비 스퐁 감독은 동성애자들을 안수하는 것을 찬성하고, 바울이 “심히 억제된, 자기 부정적 동성애자”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였다(Calvary Contender, 1998년 8월 15일).

1999년 2월 12일 미국 감독교회의 올림피아 교구의 세인트 마크 대성당에서는 공공연한 동성애자 로버트 테일러 주교를 수석주교로 임명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그 의식에는 200명에 달하는 교구 대표들과 세계 각지에서 온 수백 명의 성직자, 교회 대표들이 참석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투투 대주교도 참석했다. (기독신문, 2000년 3월 15일, 8쪽.)

미국 감독교회는 1995년에 7,415교회와 세례교인 158만을 가진 대교단이다.

미국 침례교회(ABC)

1993년 미국 미네아폴리스에서의 리-이메이징(Re-imaging) 대회에서의 연사들 중 다수는 여성 동성애를 조장하였는데, 미국 침례교회에 부름을 받은 첫번째 ‘드러난’ 여성 동성애 목사인 내디안 비숍(Nadean Bishop)은 성경에서 마리아와 마르다는 여성 동성애자이었다고 주장하였다(Christian News, 1997년 10월 27일, 5쪽).

1999년 미국 침례교회 대회는 캘리포니아주의 4개의 교회들을 친(親)동성애적 경향 때문에 제명출교하기로 한 결정으로 야기된 심각한 내적 분열을 드러낸 가운데 마쳤다고 한다(Christian News, 1999년 7월 5일; Calvary Contender, 1999년 8월 1일).

그러나 1999년 현재 미국 침례교회에는, 동성애자들의 참여를 격려하는 지도자 모임인 ‘환영하고 찬성하는 침례교인들 협회’에 소속하는 37개의 교회들이 있다고 한다(Huntsville Times, 1999년 7월 22일). 또한 최근에 제명된 네 교회 중의 하나의 목사인 에스더 하기스(Esther Hargis) 목사는 여러 항의들 때문에 그 제명들이 집행 유예를 향한 단계로 동결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8월 15일.)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 소속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소망 루터교회의 톰 브록(Tom Brock) 목사는 뉴올리안스에서 열렸던 교단의 여름 청년집회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던 교단 총회에 대하여 슬픔과 탄식의 심정을 가지고 몇 가지 사실을 증거하였다. 첫째로, 교단 청년집회에서는 ‘관심 있는 루터교인들’이라는 동성애를 조장하는 단체의 책상이 있었다. 교단 총회에서는 ‘정의의 벽’이라는 방에 그들을 위한 전시물이 있었다. “우리의 젊은이들을 교회 집회에 보내서 실제적 동성애자들에 의해 선전을 듣게 하는 것이 정당한가?”라고 그는 질문했다. 둘째로, 교단 총회에서, 연합그리스도의 교회 대표는 ‘성령’께서 그 교단을 인도하셔서 실제적 동성애자들에게 안수를 주었다고 진술한 후 우리 루터교인들도 그들의 순례 과정으로부터 배울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Christian News, 1997년 11월 10일, 1, 7쪽.)

미국 그리스도의 제자들 교회(The Disciples of Christ)

1993년, 미국 그리스도의 제자들 총회는 동성애자들의 목사 안수를 지지하는 목사를 대표자로 선출했다(Calvary Contender, 1993년 8월 15일).

카나다 연합교회(UCC)

1988년, 카나다 연합교회는 카나다에서 동성애자의 목사 안수를 합법화한 최초의 교단이 되었다. 그 이후, ‘남녀 동성연애자들’을 교회 생활의 모든 방면에 환영하는 연합교회들의 수가 꾸준히 늘고 있다. (Christian News, 1997년 10월 27일, 5쪽.)

1992년 5월, 카나다 연합교회의 브리티쉬 컬럼비아 대회는 공공연한 동성연애자인 팀 스티븐슨(Tim Stevenson)을 목사로 안수하였고, “그리스도인의 상호간의 위탁의 진정한 표현들로서 동성간의 언약들의 타당성을 선언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종교 뉴스 통신(RNS)은 카나다 연합교회의 어떤 목사들은 동성연애자들의 짝들을 위한 ‘언약’ 의식들을 집행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Christian News, 1997년 10월 27일, 5쪽.)

1992년, 카나다 연합교회의 마니토바와 노스웨스턴 온타리오 대회는 동성연애자들의 짝들을 교회들 내에서 결혼시키는 것을 허락하도록 표결하였다. 또한 사스카치완 대회도 앞으로 삼년 동안 적어도 10개의 강단을 동성연애자들에게 개방하기로 표결하였다. (Christian News, 1997년 10월 27일, 5쪽.)

영국교회(성공회)

1998년 8월, 램버스 회의에 참석한 전세계의 성공회 주교 대표들은 ‘동성애는 비성경적’이라는 내용을 담은 결의안을 526 대 70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하였다. 아프리카 출신 주교들이 발의한 이 결의안은 ‘한 남자와 한 여자로 맺어진 결혼관계 외의 성생활을 성경은 금지하고 있으며, 동성애자는 사제 서품을 받을 수 없으며, 동성애 결합을 결혼으로서 축복할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독신문, 1998년 8월 12일, 16쪽.) 아직도 보수적 주교들이 다수라는 사실은 감사하지만, 70명의 가증한 지도자들이 포용되어 있다!

영국 연합개혁교회(United Reformed Church)

1997년 7월, 영국의 연합개혁교회는 ‘실제적인 동성애자들’을, 그들을 뽑기로 결정하는 교회들의 목사로 받아들이기로 동의하였다(Christian News, 1997년 10월 27일, 5쪽).

호주 연합교회(Uniting Church in South Australia)

1996년, 남 호주 연합교단의 대회는 동성애자들을 지도적 직위들에 임명하는 것에 대한 연기 제안을 부결시켰다(Christian News, 1997년 10월 27일, 5쪽).

미국 메트로폴리탄 공동체교회(UFMCC)

1968년, 메트로폴리탄 공동체교회 세계협회라고 불리우는 한 교단이 활동적 동성연애자들을 위한 피난처를 제공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오늘날 그 교단은 330교회들에 30,000명 이상의 교인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1997년 2월, 주로 동성연애자들로 구성된 앞에 언급한 메트로폴리탄 공동체교회 세계협회는 남캘리포니아 에큐메니칼 협의회에 가입되었다. (Christian News, 1997년 10월 27일, 5쪽.)

미국 유니테리안 보편구원교회(UUC)

1980년, 유니테리안 보편구원교회는 공공연히 동성애적이고 양성애적인 인물들을 지도적 지위들에 채용하기로 결의했다.

1984년, 유니테리안 보편구원교단(UUF)은 동성연애자들 간의 결혼을 인정한 최초의 주요 교단이 되었다.

1996년 7월, 유니테리안 및 보편구원 회중협회(UUAC)는 동성 결혼의 합법적 인정을 공식적으로 요구하였다. (Christian News, 1997년 10월 27일, 5쪽.)

하버드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기념교회의 동성애 목사 피터 고움즈(Peter Gomes)는 말하기를, 그 교회가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허용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Huntsville Times, 1997년 7월 17일; Calvary Contender, 1997년 8월 1일).

또한 1997년 10월 3일 유에스에이 위크엔드(USA Weekend)와의 대담에서 고움즈는 레위기에서의 동성애의 금지가 동성연애자가 “본래 악하기” 때문이 아니고, “이방인들이 그것을 행하였고 그러므로 그것이 의식적(儀式的)으로 불결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로마서 1:27에서 동성애 행위에 대한 바울의 비평이 “본성적으로” 동성애자인 사람들을 가리키지 않고 이성애자들에 의한 동성애 행위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바울이 동성애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모두 그것의 타락한 이방적 표현이었다. 그는 그런 무지 때문에 정죄될 수 없지만, 그의 무지가 우리 자신의 무지를 위한 변명이 되어서도 안된다”고 하였다. (Christian News, 1997년 11월 10일, 7쪽.)

하버드 대학교의 비교 종교 및 인디안학 교수 다이아나 에크(Diana Eck)는 1998년 7월 그의 동료 교수이며 20년간 그의 동성애 파트너인 도로시 어스틴(Dorothy Austin)과 함께 하버드 대학교의 로웰 기숙사의 사감으로서의 임무를 맡았다(Huntsville Times, 1998년 4월 26일). 에크는 1988년 세계교회협의회의 이방 종교들과의 대화 위원장이었다(Christian Beacon, 1988년 12월 1일). (Calvary Contender, 1998년 6월 1일.)

투투 대주교(Desmond Tutu)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는 실제의 동성애자들의 안수를 요청한 최고위급 성공회 교인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인 투투 대주교는 동성애자들을 거절하는 것이 “거의 기본적인 신성모독”이라고 표현하였다(Calvary Contender, 1996년 6월 1일). 그는 또 말하기를, 세계교회협의회가 계속 신뢰할 만한 단체가 되기 원한다면, 짐바브웨 총회에서 동성애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하였다(Christian News, 1998년 3월 2일). 그러나 투투 대주교는 1995년 6월 미국 침례교회(ABC) 모임의 연사이었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4월 1일.)

복음주의자들

랄프 블레어(Ralph Blair)의 ‘관심 있는 복음주의자들’

랄프 블레어가 인도하는 친(親)동성애적인 ‘관심 있는 복음주의자들’이라는 단체는 연례 여름수련회들을 가진다. 그 단체의 레코드(Record)지 1998년도 봄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80년 이후, 국내의 전역에서 온 남녀 동성애자들은 . . . 교제를 나누고 복음주의적 제자 훈련을 심화시키기 위해 모였다. 여러 해에 걸쳐서 우리의 주요 강사들은 로잘린드 링커 . . . 페기 캠폴로, 낸시 할디스티, 레다 스캔조니, 버지니아 몰렌코트, 루이스 스미즈, 멜 와이트, 켄 미드마 등 기타 복음주의자들을 포함했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8월 15일.)

루이스 스미즈(Lewis Smedes)

풀러신학교 윤리학 은퇴교수 루이스 스미즈는 친(親)동성애 단체 ‘관심있는 복음주의자들’의 ‘컨넥션 95’ 대회의 특별강사이었고, 또 1999년 7월 대회의 강사인데, 그와 여자 동성애자 작가 케이시 올슨과 그 단체의 랄프 블레어가 주강사들이다. 스미즈는 동성애자들을 옹호했고 결혼전 누드 페팅이 “서로간의 발견을 위한 섬세하게 조율된 수단”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강간, 근친상간, 및 모체의 안녕 외의 다른 요인들이 낙태를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그의 글들 중 어떤 곳에서 신정통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의 말을 긍정적으로 인용한다. 그러나 복음주의적 무디 먼스리 1987년 4월호는 스미즈의 책을 칭찬했다. (Calvary Contender, 1986년 1월 15일; 9월 15일.)

루이스 스미즈는 말하기를,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상태 때문에 죄책의 짐을 받아들이기를 단순히 거절해야 한다. 그는 생물학적 사고이거나 다른 어떤 이의 잘못이거나 둘 중의 하나의 희생물이다”라고 한다(Calvary Contender, 1995년 6월 1일). 이것은 신성모독적인 말이다.

토마스 행크스(Thomas Hanks)

1992년 11월, 라틴 아메리카 선교회[LAM}의 저자인 토마스 행크스는 복음주의 신학회 연례 모임에서 회원들에게 동성애에 관한 그들의 부정적 사고를 수정하라는 도전적 강연을 했다(Calvary Contender, 1993년 7월 1일).

행크스는 복음주의 신학회 1997년 11월 모임에서도 강연했고 최근에는 풀러신학교에서 열린 동성애에 관한 패널토론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행크스는 “공공연한 남성 동성애자이며 복음주의적 성경 교사요 [LAM과 관련된] 라틴 아메리카 선교사이며 남녀 동성애자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국제적 후원사역인 ‘다른 양들’(Other Sheep)이라는 단체의 설립자”라고 한다(Evangelicals Concerned, 1998년 봄호; Calvary Contender, 1998년 4월 15일).

페기 캄폴로(Peggy Campolo)

페기 캄폴로는 최근에 친동성애적인 ‘관심있는 복음주의자들’ 모임에서 연설하였다. ‘사랑의 하나님’께 드린 그의 시작 기도는 예수님을 언급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거룩한 땅 위에 서 있다”고 말한 후, 그 여자는 뒤에 그의 중앙침례교회(ABC 소속)에서의 첫번째 동성애자 결혼식은 그에게는 “고상하고 거룩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교회를 동성애자들을 위한 ‘안전한 장소’라고 불렀고 그들은 거기에서 ‘환영을 받고 찬성을 받는다’고 했다. 거듭거듭 반복해서 그는 ‘나의 남자 동성애 형제들과 여자 동성애 자매들’이라는 말을 했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동성애자들이 법적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의 눈 앞에서도 누구든지 그들이 평생 반려자로 선택하는 자들과 결혼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진술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나의 남편[토니]은 1985년 하나님께서 기독교인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모든 사람 속에 계시다고 말함으로써 곤란에 빠졌다. [그리고] 토니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장소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봉사에서라고 말했다. . . . 토니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장소에 관해서 바르게 생각했다.” 그는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미안한 감정에서부터 그의 걸음을 시작했으나, 그 다음에 그는 그들과의 교제를 즐길 수 있음을 발견했다. 그와 토니는 지난 19년 동안 매년 ‘P-타운’(카이프 캇에 있는 ‘동성애자’ 여름 메카)으로 돌아갔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9월 1일.)

제리 팔웰(Jerry Falwell)의 애매한 태도

제리 팔웰은 최근에 동성애자들에 대한 그의 말 전쟁에서 태도를 바꾸었고 그의 토마스 로드 침례교회에서 200명의 복음주의 지도자들과 200명의 동성애 행동주의자들을 접대하였다. 동성애 지도자 멜 화이트(Mel White)는 말하기를,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나라를 위해 위대한 순간을 가지고 있는데, 곧 동성애자들과 팔웰이 함께 예배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팔웰은 여전히 동성애가 죄라고 믿지만, 그의 설교 중 그의 방문자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조심하였다(Huntsville Times, 1999년 10월 25일). 타임지 1999년 11월 1일자는 팔웰에 대해 이렇게 인용했다: “만일 우리가 수백만명의 남녀 동성애자들에 대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증거를 가지려 한다면,” 그는 ‘동성애적 변태자들(deviants)’ 같은 용어들을 포기하며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의 용어를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Calvary Contender, 2000년 1월 1일.)

비평

성경에서 처음 동성애를 말한 것은 소돔 고모라의 사건에서이다. 창세기 19:4-8,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는 말(웨네드아 오담)은 직역하면 ‘우리가 그들을 알도록’이라는 말이다. ‘안다’(야다)는 히브리어는 때때로 성관계를 의미하였다. 롯이 처녀 딸들을 내어주겠다고 제안한 사실은 그것을 증거한다. 소돔 사람들은 동성애를 원한 것이었다. 오늘날도 동성애자들은 때때로 ‘소돔 사람들’(sodomites)이라고 불리운다.

사사 시대에도 소돔 시대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기브아의 죄악이 그것이다. 기브아의 불량배들도 거기 우거하는 노인의 집에 유숙하기 위해 들어온 레위인을 내어놓으라고 외쳤다. 22절,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비류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웨네다엔누).”

동성애는 죄이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셔서 연합케 하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넓게는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에 정죄된 음란에 포함된다. 그것은 음란한 변태적 성행위이다. 하나님은 죄악되고 음란했던 소돔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하셨다. 사사 시대에 음란했던 기브아와 베냐민 지파는 그 죄로 인하여 거의 전멸되었었다.

성경은 부부 관계를 벗어난 결혼 전 혹은 결혼 외의 성행위를 음란한 죄로 정죄하며, 특히 동성간의 혹은 심지어 짐승과의 성행위를 가증한 죄악으로 정죄한다. 레위기 18:22, 23, “너는 여자와 교합함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가 된 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perversion, 변태적 행위)이니라.” 그 외에도 구약은 미동(美童)과 남색(男色)하는 자들을 정죄했다. 신명기 23:17, 18,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미동이 있지 못할지니.” 열왕기상 14:24; 15:12; 22:46; 열왕기하 23:7.

신약성경도 동성애를 중요한 죄로 간주하며 그 죄를 짓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로마서 1:26-27,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고린도전서 6:9, 10,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말라코스, 남창, 남자 동성애자)나 남색(아르세노코이테스, 동성애자)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디모데전서 1:10,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아르세노코이테스)며.”

특히, 오늘날 동성애를 통해 에이즈 질병이 많이 퍼지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징벌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 보도에 의하면, 동성애 남자들이 에이즈로 죽는 평균 연령은 39세요, 다른 원인으로 죽는 연령이 41세요, 오직 2% 미만이 늙도록 산다. 또한 동성애자들은 25배나 더 자살율이 높고 14배나 더 매독 감염 가능성이 높고, 수천배 더 에이즈 감염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Calvary Contender, 1993년 12월 1일).

6. 안락사

분석

오늘날 세속 사회에는 안락사를 허용하는 움직임이 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1997년 9월호에 의하면, 네델란드는 가망 없는 환자를 위한 안락사로부터 만성적 환자를 위한 안락사로, 신체적 질병을 위한 안락사로부터 심리적 고통을 위한 안락사로, 그리고 자발적 안락사로부터 비자발적 안락사로 움직여왔다. 일단 어떤 경우들에 있어서 죽이는 것이 허용되면, 의사들이 보다 더 회색 지역[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들]로 그 선을 넘는 것이 더 쉽다. 환자의 ‘죽을 권리’가 교묘하게 환자의 ‘죽을 의무’와 의사의 ‘죽일 면허증’이 된다. ‘죽음의 의사’(Dr. Death)라는 별명이 있는 잭 케보키안(Jack Kevorkian)은 적어도 45건의 ‘자살’을 도왔다. 그 중 많은 이들은 최종적으로 아픈 상태가 아니었고 몇 경우는 질병의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매스컴은 케보키안을 의사라고 부름으로써 그의 행위들을 정당화하지만, 그의 의사 면허증이 1991년에 중지되었음을 말하지 않는다(Calvary Contender, 1997년 9월 15일). 의료 윤리지(Journal of Medical Ethics) 1999년 2월호의 한 보고서는 네델란드에서 남의 도움을 받은 자살의 다섯 사건 중 하나는 환자의 동의 없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World, 1999년 3월 13일). 그 조사는 또한 1995년에 네델란드의 안락사(安樂死)의 거의 3분의 2가 법이 요구하는 대로 보고되지 않았다고 나타냈다. 의사들은 환자들을 죽이는 위험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4월 1일.)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교회 안에도 들어오고 있다.

1991년 미국 연합그리스도의 교회는 적극적 안락사를 지지하고 자살을 허용하는 최초의 대교단이 되게 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Calvary Contender, 1991년 8월 1일).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1999년 미국의 프린스톤 대학교의 생명 윤리학 분야의 교수직에 임명되었다(Calvary Contender, 1999년 7월 1일). 피터 싱어에 의하면, 갓난 아기는 돼지와 소와 개보다 생명에 대한 더 큰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는 척추 장애나 혈우병(血友病) 등을 가진 갓난 아기들을 죽일(단지 치료를 보류하는 것이 아니고) 권리를 환자들이나 의사들에게 주기를 원한다(New Americans, 1999년 9월 27일). 리더스 다이제스트 1999년 10월호에 의하면, 그는 “불구가 된 어린 아기를 죽이는 것은 한 인간을 죽이는 것과 도덕적으로 동등하지 않다”고 말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10월 15일.)

비평

안락사는 늙은이나 심히 병약한 자를 고의적으로 죽이는 일종의 살인 행위이다. 인간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그것은 자신이나 타인에 의해 고의적으로 손상되어서는 안된다. 남의 생명에 대한 고의적 손상은 분명히 살인의 죄에 해당한다.

결론

이와 같이, 현대 교회는 교리적으로 심히 배교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윤리적으로도 심히 부패되어 있다. 경건한 예배가 부패되고 있고 경건한 교회 음악이 부패되고 있다. 하나님이 가정과 교회에 주신 남녀의 기능적 구별의 선이 무너지고 있다. 낙태는 가장 두려운 현대 사회의 죄악이 되고 있고 이것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오고 있다. 음란의 극단적인 형태인 동성애는 교회들 속에 깊숙이 들어와 성직자들의 세계에서 유행하고 있다. 심지어 안락사를 인정하는 교회들이 나타났다. 우리가 깨어 이 현대 교회의 문제들을 직시하고 분별하고 대항하지 않으면 우리와 우리의 교회도 그 순수성과 거룩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믿음은 행위와 결코 떨어질 수 없다. 바른 믿음은 반드시 거룩한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구원의 목표는 단순히 지식의 새로움이 아니고 전인격적 새로움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그러므로 모든 불경건과 음란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성경에 교훈하신 대로 그리고 믿음의 선진들이 믿고 행하기를 힘써온 대로 우리는 경건하고 거룩하게 삶으로써 주를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세상은 악하고 음란할지라도 하나님의 교회는 흠과 점이 없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어야 한다.

제5부:

은사운동의 혼란

목차

서론 / 257

1. 은사운동의 기원과 세력 / 258

2. 성령의 세례 / 264

3.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 271

4. 비평: 은사운동에 대하여 / 275

결론 / 285

서론

어떤 이는 오순절주의 혹은 은사운동에 성령이 역사하심을 의심할 수 없다고 말하며, 개혁교회의 침체의 주원인은 전통적인 경직된 성령론으로 인해 성령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안영복, 성령론의 바른 이해, 3, 137, 131쪽). 미국의 기독교 개혁 교회(CRC)의 연구위원회는 성령의 초자연적 나타나심을 사도시대에만 제한시킬 만한 성경적, 신학적 근거가 없다고 진술하였다(데이빗 할워다, “성령과 목회사역,” 기독신보, 1988년 8월 6일, 5쪽). 복음주의자 제이 아이 패커는, 은사운동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판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Calvary Contender, 1992년 8월 1일). 은사운동에 대한 이런 긍정적 평가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에 대한 개방적 태도는 오늘날 우리 나라의 보수적 장로교회들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에 대한 이러한 견해와 주장은 비전통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비성경적이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사도시대에 주신 현상이었고 신약성경의 완성과 더불어 사도시대가 끝났을 때 그 현상은 사라졌다. 기독교 2천년 역사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계속적인 초자연적 은사들을 통해 일하신 역사가 아니고, 신구약 66권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일하신 역사이었다. 바울 사도의 증거대로, 기독교는 기적이나 인간의 지혜를 전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성경말씀과 그 중심 내용인 속죄의 복음을 통해 구원의 일을 행하신다. 성경에 기록된 복음의 말씀을 통해 죄인을 회개시키고 새롭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반적 방법이다.

1. 은사운동의 기원, 특징 및 세력

기원

은사운동은 20세기 초에 시작된 오순절주의에 뿌리를 둔다. 1896년에 미국 남동부 노스 캐롤라이나주에서 방언 현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901년 미국 중서부 캔사스주 토피카에 있는 베델 성경대학의 여학생 애그니스 오우즈맨이 성령 세례를 사모하다가 그것을 받고 방언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는 감리교 배경을 가졌고 성결교 운동에 참여했던 학생이었다. 그 후 1906년 4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흑인 성결교 설교자 윌리암 시무어에 의해 소위 아주사 거리의 집회들을 통해 방언 운동이 본격적으로 확산되었고, 여기서 오순절 교파가 생겼다(F. D. Bruner, A Theology of the Holy Spirit, pp. 47-55). 그러다가, 20세기 중엽에 와서, 이 운동은 오순절 교파를 넘어서 다른 교파들 속으로 퍼져 나갔고, 1960년 말에는 심지어 천주교회에까지 들어갔다. 이것을 ‘신오순절주의’(Neo-Pentecostalism) 혹은 ‘은사운동’(The Charis- matic Movement)이라고 부른다.

특징

은사운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특징적 주장들을 하고 있다.

첫째로, 은사운동은 신자가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성령 받는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다.

둘째로, 은사운동은 성령의 세례를 받은 최초의 증거는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은사운동은 방언 운동에서 기원하였고 특히 방언의 은사를 강조하고 있다. 북미 오순절 협회 헌법 제5항은 “순복음(full gospel, 충만한 복음)은 . . . 성령의 세례와 그것의 최초의 증거로서의 방언을 포함한다”고 진술하였다.

세째로, 은사운동은 성경에 증거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거나 회복되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병고침의 기적을 행한다고 알려진 인물들 중 하나는 베니 힌(Benny Hinn)이다. 그는 폴과 잰 크라우치(Paul & Jan Crouch)의 티비엔(TBN) 방송 프로그램에서 말하기를, 사람들은 티비엔(TBN)을 보다가 죽은 자들이 살아날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장례식들을 취소할 것이며 그들의 죽은 자들을 관 채 가지고 와서 텔레비젼 앞에 두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을 만지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는 그들이 수천명씩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다(Christian News, 1999년 11월 22일).

최근에 온 세계의 은사주의자들은 심지어 금 가루가 예배 시간 동안에 그들의 얼굴들, 손들 및 옷에 나타났다고 말한다(Charisma, 1999년 11월호). 어떤 경우들에는 그것이 일종의 플라스틱 필름이나 반짝이는 장식품이라고 한다. 또한 은으로 한 아말감 충전(充塡, 집어넣어서 막는 것)이나 크라운들과 전체 이[齒]들이 금으로 변한 초자연적 치아 치료들에 대한 주장들도 있다(Calvary Contender, 1999년 6월 15일). 교회성장 전문가요 은사주의자인 피터 왜그너는 이와 같은 기적들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11월 15일.)

넷째로, 은사운동은 신앙생활의 강조점을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보다 은사 체험에 두고 때때로 그 체험은 매우 감정적인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캐시 우드(Cathy Wood)는 브라운스빌 ‘부흥’의 역사에 대해 쓴 그의 책(1997년 간행)에서 은사 사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직접적 진술들을 하였다. 예를 들어 병고침들, 사람들이 수시간 동안 집회 장소 바닥에 누움(‘완전히 의식이 없음’), ‘머리들을 흔듬 혹은 경련함,’ ‘멍한 술취한 상태’에 있음, ‘머리가 희미함’(woozy), ‘성령 안에서 춤을 춤,’ 기타 이상한 육체적 표현들이다. 또 우드는 말하기를, “완전히 무르익은 부흥은, 어떤 물결들이 와서 우리 모두를 깨끗케 하자 많은 사람이 성령 안에서 죽임을 당한 일과 함께 터졌다”고 한다(1996년 2월 10일).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소동(row) 속에서 매우 비슷한 설교들 170편 이상을 들었다”고 한다(2월 16일). 그는, “성령 안에서 춤을 추는 것”과 “다른 한 장소에서 완전히 길을 잃은 것”에 대해 말한다(2월 18일). 그는 덧붙여 말하기를, “나는 내가 스키장의 언덕을 뛰어내려 하늘을 나르고 있었던 것같이 느꼈다. 자유로움은 매우 영광스러웠다. 나는 마침내 집회 장소 앞 부분 오른쪽 바닥에 던져졌으나, 나를 은혜로이 감싼 나의 남편 외에는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억제되지 않은 예배에서 하나님에 의해 들림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인간적 경험과도 달랐다”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중재자들이 모두 “성령 안에서 죽임을 당하여 복도들에 쓰러졌고 심한 울부짖음과 신음 속으로 들어갔다”고 했다(3월 17일). 그는 그 다음 날 오전 2시에 교회를 떠난 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 날은 우리가 도착했던 날과 같지 않은 것 같았다. . . . 그것은 우리가 그 건물 안에 있는 동안 우리가 실제로 어떤 곳으로 가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한다. 그는 한 경험을 이렇게 말했다. “번갯불 같은 것이 나를 쳤다. 나는 벽을 쳤고 미끄러져 넘어졌고, 얼마 동안인지는 몰라도 통제할 수 없도록 몸을 흔들었고 경련을 일으켰다. 숨이 거의 끊어졌고 계속 심히 헐떡거리고 있었다. . . . 나의 머리는 경련을 일으키곤 하였다. . . . 나는 성령의 신선한 기름부음으로 충만함을 얻고 있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서, 그는 “크게 부르짖기” 시작했다(7월 14일). 그는 킬패트릭 목사가 그의 손을 흔들며 그에게로 왔다고 말했다. “그가 나를 향하여 공기를 불었을 때, 그것은 나를 완전히 때려눕혔다”(9월 29일). 그는 말하기를, 그 다음 날 아침, 예배들이 마친 후에도, 만일 빈야드 음악이 연주된다면, 그는 “깊숙이 구부르고, 좌우로 흔들거리고, 비틀거리고, 반대쪽으로 뛰며, 때때로 바닥에 엎어지며 . . . 찬송하며 경배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Calvary Con- tender, 1998년 10월 15일.)

세력

오순절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교회로 알려져 있다. 은사운동은 오늘날 오순절교회 밖에서도 매우 활발하다. 그래서 그것은 때때로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에 이어 기독교의 ‘제3세력’이라고 불리운다.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전세계의 오순절주의자들 혹은 은사주의자들은 약 1억 9천만명인데, 그 중 오순절교인들이 8500만명, 개신교 은사주의자들이 1600만명, 천주교 은사주의자들이 5000만명, 그리고 중국의 은사주의자들이 4200만명 가량이라고 말한다(Kenneth Foreman, “Pentecostals, the Largest Protestant Family,” World Pente- cost, 1987년 12월호; Christian News, 1987년 12월 28일, 16쪽). 오늘날 은사운동은 전통적 교단들에 속한 교인들에게서 많은 세력을 얻었고 또 여러 단체들을 통해 활발히 퍼지고 있다.

알파 코스(Alpha Course)

알파 코스는 1990년 영국 런던의 성공회 소속 성삼위일체 브럼턴교회에서 니키 검벨(Nicky Gumbel)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브럼턴교회는 은사주의적 대교회이다. 알파 코스는 천주교인들, 침례교인들, 및 그 밖의 사람들 가운데서 산불처럼 퍼지고 있다. 그것은 영국에서 발전되었지만, 이제 또한 미국을 휩쓸고 있다. 그것은 온 세계에서 대영제국의 가장 빨리 증가하는 수출품의 하나가 되고 있다. 그러나 씨알엔 뉴스레터(CRN Newsletter)가 지적하는 대로 그것은 묽게 된 죄책감 없는 복음과 유약한 그리스도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그 핵심적 강조는 토론토 타입의 은사주의적 경험에 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4월 1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8년 4월 27일자 크리스챠니티 투데이는 레이톤 포드, 루이스 팔라우, 제이 아이 패커, 앨리스터 맥그래스 등 복음주의자들의 서명과 더불어 알파 코스에 대한 전면광고를 실었다.

1999년 8월 한국의 여러 기독교 신문들도 제2회 알파 코스 세미나 광고를 실었는데, ‘21세기 교회영성 목회를 리드할 성경공부!’, ‘60개국 65개 교파 46,000여 교회 지도자 세미나 참석’ 등의 선전 문구를 사용했다. 그 세미나의 강사는 워싱턴 새문안교회 조병철 목사, 한국의 교회성장연구소장 명성훈 목사, 우석교회 김철영 목사이다.

에반젤리칼 타임즈(Evangelical Times) 1999년 5월호의 한 글에는 성령 충만에 관한 내용의 절반이 방언에 관한 것이다. 성령의 성경적 역할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지만, 은사주의적 알파 코스에서는 성령이 그리스도를 가리운다(Australian Beacon, 1999년 5월호). 전체적인 강조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주목의 중심인 성령에 의해 대치된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11월 1일.)

미국과 영국의 로마 천주교회의 고위 성직자회는 점점더 호감을 가지고 알파 코스를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 벌터머 시의 50개 교구들은 그 교과 과정을 사용했다. ‘천주교인들을 위한 알파’ 프로그램의 북미 조정자는 말하기를, “알파 코스가 로마 천주교회 신앙에 대한 완전한 제시가 아니지만, 그 14개의 비디오 테이프 속에는 천주교인들이 반대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러나 펀더멘탈리스트 다이제스트(Fundamental- ist Digest) 편집자 돈 재스민(Don Jasmin) 박사는 논평하기를, “알파 코스는 성경 용어들을 약간 사용하지만 구원에 관한 명령적 성경 진리들을 지우거나 교묘히 변경시키는 ‘가짜’ 전도 방법이다”라고 한다. (Cal- vary Contender, 2000년 3월 1일.)

프로미스 키퍼즈(Promise Keepers)

오늘날 프로미스 키퍼즈 집회들도 은사주의적이다. 이 집회들은 1991년 미국에서 빌 맥카트니(Bill McCartney)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콜로라도 대학교 축구 코치이었다. 또 랜디 필립스(Randy Phillips)는 그 운동의 책임자인데, 이 두 사람은 모두 불더 밸리 빈야드 교회의 교인들이다. 그 교회의 제임스 라일 목사는 극단적 은사주의파에 속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시기를, 비틀즈는 하나님의 손으로 은사를 받았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은 것은 바로 하나님이셨고 하나님께서 온 세계에 음악적 부흥을 통한 은사주의적 갱신을 시작하실 목적으로 그렇게 하셨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자기 백성에서 여전히 음성으로 말씀하심을 확신한다고 말하였다(John MacArthur, Reckless Faith, pp. 178, 179).

오늘날 다른 많은 운동들과 같이, 이 집회의 문제점은 은사주의적 연관과 에큐메니칼 성격이다. 이런 류의 운동은 자유주의적 교단들을 문제삼지 않고 심지어 로마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CCC의 빌 브라잇, 빌 하이벨즈, 무디 성경학교 교장 조셉 스토웰, 척 스윈돌, 척 콜슨, E. V. 힐 등 에큐메니칼 인사들이 이 운동의 연사들이다.

프로미스 키퍼즈 한국 본부는 이사장에 김의환 박사(전 총신대 총장)를, 이사에 김장환 목사(세계침례회 총회장), 김상복 목사(횃불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김삼환 목사(명성교회), 김연택 박사(대한신학대학 총장), 전호진 박사(횃불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박형용 박사(합동 신학대학원) 등을 세웠고 현재 정두영 목사가 총무를 맡아 실무를 보고 있다고 한다(크리스챤 뉴스위크, 1999년 10월 16일, 2쪽).

카리스마(Charisma)지 발행인 스티븐 스트랭은 “오순절-은사주의 동향” 사설(1999년 7월호)에서 “프로미스 키퍼스는 1990년대 초에 갑자기 등장했고, 은사주의적 형태의 찬양과 예배 음악 뿐만 아니라, 일부 은사주의 연사들을 세웠다”고 썼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8월 1일.)

복음주의자들--CCC, NAE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 교인들이 은사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대학생 선교회(CCC) 같은 단체들이 그러하다. 은사주의자들은 대학생 선교회의 총재인 빌 브라이트에게 따뜻하게 용납된다(Christianity Today, 1997년 7월 14일; Calvary Contender, 1997년 8월 1일). 대학생 선교회로부터 온 1998년의 한 소식지는 ‘예수님’이라는 그들의 전도용 영화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전히 표적들과 기사들을 행하시고 계시다”고 보도한다. 또 한 소식지는 인도의 16살 된 한 소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데, 그 소녀는 몇 시간 동안 죽어서 장사되려고 했었는데 옛날 나사로처럼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 소녀는 죽은 자들이 거하는 장소에 갔었으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7일 동안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고 주장하였다. 그 소식지는 말하기를, 그 소녀는 다시 산 지 7일 후에 죽었다고 한다. 그 소식지는 말하기를, 이 일과 그 밖의 기적들이 아드리안 로저스의 그 주제에 관한 책에 열거된 ‘기적들을 위한 세 가지 시험들’을 통과했다고 한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8월 1일.)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NAE) 회장 케빈 매노이아(Kevin Mannoia)는 자유 감리교회의 감독인데 은사주의자이다. 그는 자신이 ‘보다 넓은 복음주의 운동 안에서’ 은사주의자들과 비은사주의자들 간에 일치의 다리를 놓기를 원한다고 말한다(Charisma, 1999년 5월호). 카리스마지에 의하면, 1993년에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의 회원 교회들의 약 51퍼센트가 오순절파라고 한다. 어떤 보고서에 의하면, 80퍼센트가 그러하다고 한다(Calvary Contender, 1992년 12월 15일).

은사주의자 잭 헤이포드(Jack Hayford)가 1997년에 쓴 책, 유망한 목사들(Pastors of Promise)에서, 미국의 인기 있는 저술가요 연사인 죤 맥아더는, 9천명 교인을 가진 ‘그 길에 대한 솔직한(Foursquare) 복음 교회’의 극단적 은사주의 목사 헤이포드를 칭송한다. 로버트 슐러, 빌 하이벨즈, 척 콜슨, 빌 브라이트, 및 그렉 로리도 추천의 글들에서 그를 칭송하였다. 5년 전, 맥아더는 은사주의적 혼돈(Charismatic Chaos)이라는 그의 책에서 환상 중에 “헤이포드는 그리스도를 본다고 거짓말을 한다”고 말했었다. 헤이포드는 프로미스 키퍼즈 집회들을 장려하고 그 이사회에서 봉사하고 그 단체의 주요 행사들에서 연설한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9월 1일, 15일.)

2. 성령의 세례

오순절주의와 은사운동은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신자가 또한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감리교회와 성결교회의 교리적 사상과 비슷하고 무디의 협력전도자이었던 알 에이 토리의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오순절 사건의 의미

성령 세례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과 직접 관계된다. 그러면 사도행전 2장에 증거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이중적(二重的)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특수한 의미요, 하나는 일반적 의미이다.

특수한 의미

오순절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역사(歷史)의 과정에서 시대적 분기점을 이루는 몇 가지 특수한 의미들을 가진다.

첫째로, 오순절 사건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성령의 강림을 예언하셨었다. 이사야 32:15,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에스겔 36:27, “또 내 신[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요엘 2:28, 29, “그 후에 내가 내 신[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

예수께서도 공생애 말기와 그의 승천 직전에 성령의 강림을 예언하셨었다. 요한복음 14:16, 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한복음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사도행전 1:4, 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이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 오순절 사건이었다.

둘째로, 오순절 사건은 성령께서 지상에 강림하셔서 이제 교회 가운데 거하시는 것을 의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영께서 약속대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이제 구원받은 성도들 즉 신약 교회 속에 영원히 거하시며, 그들의 성화(聖化)와 다른 이들을 위한 전도의 일을 하게 하신다. 신약 교회는 구약 교회가 일찌기 경험하지 못했던 성령의 영원한 내주(內住)하심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요한복음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셋째로, 오순절 사건은 성령의 활동 시대가 시작됨을 의미하였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체에 있어서 한 분으로서 교회와 늘 함께 계시고 함께 활동하시지만, 특히 신약 교회 시대는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시는 시대라고 표현할 수 있다. 사도행전 4:8,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사도행전 8: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사도행전 8:39, “둘이 물에서 올라갈 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사도행전 10: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사도행전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사도행전 15: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사도행전 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사도행전 16:7,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사도행전 18:5,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성령에 이끌리어--전통본문].”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물론, 때때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활동하셨다. 사도행전 9:4, 5,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 . .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도행전 9:10,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사도행전 9:34,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사도행전 18: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이상과 같은 의미들에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은 다시 반복될 수 없는 단회적(單回的) 사건이었다. 헤르만 바빙크의 다음과 같은 말은 적절하다: “오순절에 발생했던 성령의 이러한 보내심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역사상 독특한(unique) 사건이다. 창조와 성육신과 같이, 그것은 오직 한 번 발생했다. 중요성에 있어서, 그것과 동등한 성령의 어떤 허락하심이든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잉태시에 인성을 취하셨고 결코 그것을 다시 버리지 않으시듯이, 성령께서도 오순절에 교회를 그의 거처와 성전으로 택하셨고 결코 그것으로부터 다시 분리되지 않으신다”(Herman Bavinck, Our Reasonable Faith, p. 386).

일반적 의미

그러나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은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성령을 받은 사건이라는 일반적 의미도 가진다. 성령께서는 이 날 그 신자들 속에 처음 들어오셨고 영원히 그들 안에 거하셨다. 신자들 속에 성령께서 들어오시는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오순절은 반복된다. 즉, 죄인들이 구원 받을 때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그들 속에 들어가시고, 그들을 인치시고, 영속적으로 그들 속에 거하시는 것이다. 사도행전 10:44이 증거하듯이, 성령께서는 베드로의 전도를 듣고 믿는 고넬료의 가족들에게 내려오셨고, 그들 속에 들어오셨다. 사도행전 19:6의 에베소의 제자들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들은 바울의 전도를 듣고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고 안수 받을 때, 또한 성령을 처음으로 받았다. 성령께서 최초로 그들에게 들어오신 것이었다.

이와 같이, 이미 지상에 강림하여 계신 성령께서는 교회의 새 회원이 되는 새 신자의 심령에 들어가신다. 물론 신성을 가지신 성령께서 위로부터 들어가시는지, 옆에서 들어가시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무한하신 영,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세례의 의미

그러면 성령세례란 무엇인가? 성령세례란 전통적으로 생각해 온 대로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처음으로 들어오시는 사건인가, 아니면 오순절파나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이미 믿어 구원 받은 자들 즉 성령이 그 안에 계시는 자들에게 두번째의 경험으로 충만하게 부어지시는 사건인가?

신약성경에서 성령의 세례라는 말이 나오는 곳은 사도행전 1:5과 사도행전 11:16과 고린도전서 12:13뿐이다. 사도행전 1:5의 성령의 세례는 오순절 사건을 가리켰다. 오순절의 성령세례는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처음 들어오신 사건인 동시에, 이미 믿던 자들 속에 두번째의 경험으로 들어오시되 충만하게 부어지신 사건이었다. 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사도행전 11:16의 성령세례는 성령께서 고넬료의 가족들에게 최초로 들어오신 사건이었다. 15절,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이 경우에는, 사도행전 1:5의 경우와 달리, 대상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비로소 듣고 믿었을 때 일어났던 사건이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2:13의 성령세례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신비적 연합을 의미한다. “우리가 . .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동일한 사건이다.

이상의 세 성경 구절들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개념은 성령세례가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최초로 들어오시는 사건이라는 전통적 개념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오순절 사건의 일반적 의미와 동일하다. 성령세례란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 처음 들어오셔서 그들 속에 영원히 거하시는 사건이다.

그것은 곧 신자의 중생(重生) 사건과 동일하다. 신자는 중생시 성령을 받고 그것이 곧 성령의 세례인 것이다. 중생시 받는 성령을 성령의 세례라고 부르는 것은 성령께서 그 시간에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으시고 우리의 죽었던 영혼을 살리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령의 구원하시는 사건인 것이다.

오순절파는 사도행전 1:5에 근거하여 믿는 자가 두번째의 경험으로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오순절 사건 이전의 제자들과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상황이 다르다. 왜냐하면 오순절 사건 이전의 제자들은 아직 성령을 받기 전이었지만, 오늘날의 신자들은 믿을 때 이미 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령세례의 시간

성령세례가 성령께서 최초로 신자 속에 들어오시는 사건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성령세례의 때에 관하여 성경 역사상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 이전과 이후를 구분해야 한다.

오순절 사건 이전에는, 사람들이 예수 믿은 후에 성령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성령을 받기 전에 예수님을 이미 믿었고 이미 깨끗함 곧 중생(重生)을 얻었다. 요한복음 1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요한복음 7:39,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16장에서 성령을 약속하셨고, 또 사도행전 1:4, 5에서도 승천하시기 직전에 성령세례를 약속하셨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오순절 사건 이전에 예수님을 진실히 믿었으나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었고, 예수님 승천하신 지 약 10일 후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을 받은 것은 시간적으로 달랐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 이후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받는다. 사도행전 10, 11장의 고넬료의 경우,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 받는 것 혹은 성령세례는 시간적으로 동시적이었다. 그것들은 두 개의 별개의 사건들이 아니었다. 또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된 에베소의 제자들의 경우도 자세히 읽어 보면, 그들이 요한의 세례만을 아는 자들이었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듣고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을 받았다. 또 고린도전서 12:13도 성령세례와 중생 사건을 동일한 사건으로 증거한다. “우리가 . .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한 몸이 되는 것은 중생 사건이다.

더욱이,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다 성령을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성령 안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성령께서는 인만 치고 떠나신 것이 아니고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을 인치심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요한일서 2:20, 27,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성령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 . .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내주하시는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내주하시는 성령]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고린도전서 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께서 예수 믿는 우리 속에 오셔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하신 것이다.

또한, 세례(洗禮)라는 말은 죄 씻음과 새롭게 됨을 표시하는 것인데, 신약성경은 예수 믿는 자들이 성령 안에서 씻음과 새롭게 됨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성령세례와 같은 뜻이다. 고린도전서 6:11,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디도서 3:5-7,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단지, 사도행전 8:15-17에 기록된 사마리아 교인들의 경우만은 예외적이었다. 오순절파는 이 구절을 가장 중요시하며 이 구절에 근거하여 예수 믿는 것과 성령세례 받는 것을 분리시키려 한다. 그러나 그 성경 본문 16절은 그것이 예외적이었음을 보인다: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라.” ‘오직 . . . 만’이라는 표현은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 받지 못한 것이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즉, 이 구절은 오순절 사건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받는 법이었는데, 사마리아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뜻이다(J. A. Alexander, Acts, p. 332).

사마리아 교인들의 경우가 예외적이었던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가지고 있었던 특별한 신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오래도록 종교적 간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유대인들 보기에 반쯤 이방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만일 처음부터 사도들이 그 곳에 내려가 전도해서 예수 믿는 자들을 얻었다면, 아마 성령 강림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한 자는 사도가 아니고 집사인 빌립이었다. 바로 이러한 점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을 주시는 일을 지연시키셨던 것 같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부터 사도들이 파송되어 그 곳에 가서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사마리아 교인들과 유대의 교인들과의 영적 일체성은 확증되었다.

사도시대에 이 한 가지의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약성경이 전체적으로 오순절 사건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성령 받는 것 곧 성령세례를 시간적으로 분리시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성경에는 신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든가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성령을 받는 것 혹은 성령세례가 예수 믿는 자가 두번째의 경험으로 경험하는 어떤 것이 아니고, 그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혹은 그가 중생했을 때 이미 받은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미 성령을 받았고 성령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또다시 성령 받기를 구하거나 성령 세례 받기를 간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단지 이미 오신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우리의 영육의 각 부분과 각 기능에서 충만히 역사하시도록 그에게 겸손히 복종하고 그를 의지할 것만 남아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오순절에 성령의 부으심은 그가 교회 속으로 최초로 그리고 실제로 오심이었다. . . . 그리스도의 몸의 새 부분들은 외부로부터 교회에 추가되며, 성령께서는 몸으로부터 새 지체들 속으로 부어지듯이 그 새 부분들 속으로 부어지셨다. . . . 이것은 또한 오늘날 왜 새 회심자들이 오직 일상적인 방식으로 성령을 받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 . . 또한, 성령의 다른 하나의 부으심이나 세례를 위한 기도가 부정확하고 참된 의미가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한 기도는 실제로 그 오순절 기적을 부정한다. 왜냐면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그 분은 우리에게 더 오실 수 없기 때문이다”(A. Kuyper, The Work of the Holy Spirit, pp. 115, 126, 127).

에취 씨 쥐 무울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서신서들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성령의 세례를 구하라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 . . 보다 더 효과적 봉사를 위해 성령세례를 기다리는 행위는 잘못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미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을 이루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이미 소유한 것으로 충만해지기 위해 가장 겸손한 신앙으로 우리 영혼과 삶의 모든 길과 부분들을 여는 것이다”(H. C. G. Moule, Person and Work of the Holy Spirit, pp. 222, 223). 또한 레만 스트라우스도 같은 신념에서 말하기를, “성령세례를 중생 경험과 별개로 보는 가르침은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 . . . 성령세례는 봉사의 능력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다시 태어난 자들로 그리스도의 지체를 이루게 하는 것과 관계된다”고 했다(레만 스트라우스, 성령론, 132-134쪽).

3.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은사운동은 성령세례를 주장할 뿐만 아니라, 성령세례의 결과로 받는 성령의 은사들, 특히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강조한다. 성령의 은사들에는 자연적 은사들과 초자연적 은사들이 있다. 자연적 은사들이란 로마서 12:6-8에 증거된 대로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勸慰)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의 은사들을 가리킨다. 초자연적 은사들이란 고린도전서 12:8-10에 열거된 은사들을 주로 가리키는데,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들 통역함 등 아홉 가지이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목적

사도시대에 주신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성경 역사에서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직접 나타나심, 말씀하심, 그리고 기적들을 통해 주어졌다. 이것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일치하게, 사도시대에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혹은 기적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전달과 확증을 위한 것이었다. 고린도전서 12:8- 10에 언급된 성령의 아홉 가지 초자연적 은사들 중에,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은 계시 전달에 관계되고, 믿음, 병고침, 능력 행함은 계시 확증에 관계된다. 또한, 히브리서 2:3, 4에는 하나님께서 기적들과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복음을 확증하셨다고 말씀하였다. 또 마가복음 16:17-20에는, 주께서 귀신을 쫓아냄, 방언, 뱀을 집거나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음, 병 고침 등의 표적들을 통하여 복음의 말씀을 확증하셨다고 증거했다. 특히 성경에서 기적을 ‘표적’(sign)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적들 혹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성격이 그러하였으므로, 그것들은 비록 사도 시대에 성도들에게 어느 정도 경험되고 행해졌을지라도 주로 사도들에 의해 행해졌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43과 5:12은 사도들을 통하여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다고 증거했고 고린도후서 12:12은 기적 행함을 사도의 표라고까지 말씀했다. 에베소서 2:20의 말씀대로, 사도들은 신약 교회의 기초를 닦은 자들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혹은 기적들을 나타내게 하심으로 특별 계시들을 전달하고 확증케 하셨던 것이다. 비 비 워필드는 적절히 말하기를,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특별히 사도들의 증명서이었다. 그것들은 교회를 설립하는 하나님의 권위적 도구들로서의 사도들의 신임장의 일부분이었다”라고 하였다(B. B. Warfield, Counterfeit Miracles, p. 6).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사라짐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교회 역사상 사라졌다는 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면 그것들은 언제 그리고 왜 사라졌는가?

언제 사라졌는가?

교회 역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사도시대의 교회의 특징이며 오직 사도시대에만 속하고 그 후시대에는 사라졌음을 증거한다. 따라서 교회들은 전통적으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중단 혹은 폐지를 인정하고 가르쳐 왔다. 우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에 대해 증거하는 신약성경의 말씀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2-14장의 말씀에 근거하여 역사적 사실에 반론하려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역사상 그렇게 섭리하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겸손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주후 4세기 말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대주교장이었던 크리소스톰은 고린도전서 설교에서 방언은 이미 그쳤고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David O. Beale, “Lecture on the History of Dotrines,” Bob Jones University). 주후 5세기 초 유명한 어거스틴도 요한일서 설교에서 방언은 유대 기독교인에게 주신 초기 표적이었고 이전 시대에 이미 사라졌다고 가르쳤다(Beale).

칼빈 선생도 사도행전 10:44 주석에서 “방언의 은사와 및 그 밖에 그와 같은 것들은 교회에서 오래 전에 중지되었다”고 말했다. 비 비 위필드는 초대 교회의 자료들을 연구한 후 다음과 같이 증거하였다: “종교 개혁 이후의 신학자들은 은사들이 사도시대와 함께 중지되었음을 매우 밝히 가르쳤다. . . .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기적들]은 사도시대 교회의 특징이었고, 오직 사도시대에 속했다. . . . 18세기 초에는 은사들이 [교회 역사의] 처음 3세기 동안 계속되었고 4세기 경에 사라졌다는 견해가 지배적이게 되었지만, 이 견해는 사실과 조화되지 못한다”(Warfield, pp. 6-10).

왜 사라졌는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왜 사라졌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성경에서 두어 가지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 독특한 목적 때문에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대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독특한 목적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의 전달과 확증이었다. 그런데 그 목적은 사도시대에 신약성경의 기록이 완성됨으로써 다 성취되었던 것이다.

요한계시록 22:18, 19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이 성경에 충족히 기록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와 같이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더 이상 주어질 필요가 없게 되었으므로, 자연히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사라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워필드의 표현대로, “그것들[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의 기능이 그것들을 특별히 사도교회에 제한시켰고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그 교회와 함께 사라졌다.”

사실, 이것은 과거 수천년 동안 자신의 뜻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방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후에 그것을 책에 기록하게 하셨다. 그것이 구약성경이었다. 모세에게 주셨던 기적들은 그 후시대에 반복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었고, 모세에게 계시되고 확증된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후시대에 전달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둘째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것들의 일시적, 초보적 성격 때문에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독특한 목적은 또한 그것들의 일시적, 초보적 성격을 보인다. 초자연적 은사들은 영속적인 무엇이 아니고, 또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한 온전한 무엇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단지 일시적이었고 부분적이었다.

고린도전서 13:8-12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이러한 성격을 자세하게 증거하였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이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여질 것임이니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들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내가 알려진 것같이 내가 알리라.”

특히,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온전한 것’이 오면 사라질 것이었다. 여기에 이 ‘온전한 것’이란 적어도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한 신약성경의 완성과 관계가 있다. 초자연적 은사들의 단편적인 내용에 비교하면,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충족한, 온전한 계시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의 충족하고 온전한 계시인 신약성경이 완성되었을 때,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곧 일시적이고 부분적이고 초보적인 성격의 것들은 자연히 폐지되고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건물을 지을 때 비계목을 설치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비계목은 건물을 짓기 위해 일시적으로 설치하는 것에 불과하다. 일단 건물이 완성되면 비계목은 철거되어야 한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도 그러하였다.

유명한 설교자 스펄젼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일시성, 초보성을 나무의 지지대에 비유하여 말했다: “만일 과수원에 나무를 심는다면 흔히 그 곁에 큰 지지대를 세워 붙들게 한다. 그러나 아무도 과거 50년간 있었던 사과나무를 지지하기 위해 기둥을 세우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는 기적과 이상(異像)의 지지가 필요치 않는 나무다. 여러분은 이상보다 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신구약 66권의 성경과의 관계는 마치 유치원과 대학교의 관계이다. 성령의 그 은사들은 유아들을 위한 것, 유아시절의 것과 같다. 신구약성경을 가진 자들이 그러한 은사들을 구하는 것은 마치 대학생이 유치원에 등록하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4. 비평: 은사운동에 대해

은사운동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역사상 계속 존재했고 오늘날도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주장한다. 오늘날 오순절파 뿐만 아니라 또한 전통적 교단들 내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견해를 가진다. 그러나 은사운동은 다음과 같이 비평되어야 한다.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됨

첫째로, 은사운동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 전반의 계속성 혹은 회복을 주장하기 때문에 원리적으로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된다. 하나님께서 과연 성경 외에 또 다른 계시들과 예언들을 주신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것을 신뢰할 수 없다. 우리는 신구약 66권의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 최종적 권위의 말씀으로 믿고 있다. 신구약성경만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범이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서 성경과 동일한 내용을 누구에게 계시하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계시의 필요성이 무엇이냐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1900년 기독교 역사상 성령의 내면적 활동을 통해 그의 종들과 백성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성경을 기억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의 새 계시적 활동들을 통해 동일한 성경의 내용을 또다시 받는다는 것은 전혀 불필요한 일이 아닌가?

주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성경말씀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충족하다는 사실을 밝히 증거하셨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 또한 앞에서 인용한 요한계시록 22:18, 19도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을 분명히 증거한다.

물론, 아무도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교회 역사상 거두신 은사들일지라도 다시 주실 수 있음을 부정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유가 있어서 1900년 동안 거두어 가신 은사들의 계속성이나 회복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을 반대하는 일이 된다.

2천년 기독교 역사는 기적 행함의 역사가 아니고 십자가의 말씀을 전파한 역사이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였다(고전 1:22, 23). 물론 중생과 회개의 내면적 기적은 늘 일어났지만, 외적인 기적들은 오랫 동안 대체로 사라졌었다. 특별한 경우 기도의 응답으로 병고침을 받는 것 등은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충족한 계시의 말씀으로 그의 일을 진행해 오셨다. 성경은 사람의 구원과 새생활을 위해 충족한 수단이었다. 성경을 믿고, 성경대로 사는 삶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다. 말씀을 통한 성령의 잔잔한 내면적 활동은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떠난 적이 없었고, 하나님의 그러한 섭리 속에 신자들은 만족을 누렸다.

그러므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계속을 주장하는 은사운동은 성경의 충족성과 종결성에 모순되며 성경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에 반대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사들이 아니고, 성경말씀에 대한 성실한 순종이다.

초자연적 은사들의 실재성이 의문됨

둘째로, 은사운동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교회역사상 계속 존재했고 오늘날 교회 안에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그러한지 의문된다. 기독교회들은 성경에 증거된 계시와 예언, 방언, 병고침 등의 은사들을 계속 경험하여 왔는가? 하나님께서 신실한 성도들과 종들에게 그런 은사들을 항상 주셨었는가? 또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참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이라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우선, 계시와 예언에 대하여, 성경은 기록된 책의 내용 외에 다른 어떤 것을 더하지 말 것을 엄히 명령하였다. 요한계시록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그렇다면 성경 외에 계시와 예언을 말하는 것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 아닌가?

역사상, 초대교회에 몬타누스파들은 초자연적 은사들을 주장했으나 이단으로 정죄되었었다. 18세기 에드워드 어빙이 설립한 카톨릭 사도교회는 모든 사도적 은사들을 주장했고 예언도 했으나 어떤 예언들이 성경과 충돌하고 또 성취되지 않았으므로 정죄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도, 안식교, 몰몬교, 및 여러 신비주의 집단들이 성경 외의 하나님의 계시와 예언들을 말하지만, 다 이단들 혹은 불건전한 단체들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방언에 대하여, 은사운동은 성령세례의 최초의 증거는 방언이라고 주장하며 이 은사는 거의 모든 성도들의 필수적 은사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방언들이 외국어들이었다고 생각되는데 반해, 오늘날의 방언 현상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방언’이라는 헬라어 글로싸는 단순히 ‘언어’를 가리킨다. 신약성경에서 글로싸라는 말은 50회 사용되었고 이 말과 비슷한 말인 디알렉토스는 단지 6회만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서 히브리어 라숀(114회)은 헬라어 70인역에서 91회 가량 글로싸로 번역되었고 2번만 디알렉토스로 번역되었다. 히브리어 사파(176회)는 대부분 ‘입술’(케일로스)로 번역되고 5회는 글로싸로 번역되었고, 아람어 릿솬(7회)은 전부 글로싸로 번역되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방언’이라는 원어는 단순히 ‘언어’라는 뜻이다.

더구나, 방언이라는 말은 빈번히 글로싸이(방언들)라는 복수형으로 사용된다. 그것은 그것들이 여러 개의 언어들임을 나타낸다. 마가복음 16: 17, “새 방언들을 말하며.” 사도행전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방언들]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11, “그들이 우리의 방언들로 하나님의 큰 일들을 말함을 우리가 듣는도다”(원문 직역). 사도행전 10:46, “이는 방언들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사도행전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들도 하고 예언도 하니.”

또한, 고린도전서 14장에 언급된 방언들이 사도행전에 증거된 방언과 다른 성격의 것이라고 추측할 정당한 이유는 없다. 고린도교회가 경험한 방언 은사는 사도행전에 언급된 방언 사실들과 동시대의 현상이며, 따라서 사도행전에 나타났던 방언 은사와 동일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방언을 통역한다는 사실도 방언이 언어적 성격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언어가 아닌 소리를 통역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방언들은 대체로 외국어의 성격을 갖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이 어떤 전문가들의 증거이다. 도날드 버딕은 오늘날의 방언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① 반복이 매우 심하다, ② 방언과 방언하는 사람의 언어적 배경이 비슷하다, ③ 한 두 개의 모음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 ④ 언어적 구조가 부족하다, ⑤ 방언에 비해 통역이 두드러지게 너무 길다, ⑥ 동일한 구절의 통역이 일치하지 않는다, ⑦ 영어 통역시 주로 17세기초의 흠정역(KJV) 문체가 사용된다(Donald W. Burdick, Tongues: To Speak or Not to Speak, p. 65). 미쉬간 대학교 언어학자 케넷 파이크와 미국 성서공회 관계 언어학자 유진 니다 등은 오늘날의 방언들이 언어학이 다룬 어떤 실제적 언어들과도 비슷하지 않다고 지적했다(Richard C. Schwab, Let the Bible Speak about Tongues, p. 108).

더욱이, 방언 같은 현상들은 역사상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어떤 불건전한 단체들이나 이단 종파들 속에 있었고 심지어 기독교 밖에도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몬타누스파들은 방언을 했다. 그 후 17세기 말까지 방언 현상은 교회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다가 1776년 미국 뉴욕주 트로이 부근에 앤 리가 설립한 쉐이커 공동체는 남녀가 나체로 춤추면서 방언을 하였고, 앞에서 언급한 카톨릭 사도교회에서도 방언을 했다. 몰몬교 장로들도 유타주 성전을 봉헌할 때 방언을 하였다(Robert G. Gromacki, The Modern Tongues Movement, pp. 5-29; Schwab, pp. 4-7). 그러므로 방언 같은 현상이 다 하나님이 주신 방언 은사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덧붙여서, 오늘날 은사운동에서 흔히 방언 훈련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인위적이며 비성경적이다. 예를 들어, 1987년 7월 22-25일 미국 루이지아나주 뉴올리안스에서 모인 ‘성령과 세계 전도에 관한 북미 대회’에 관한 한 보도에 의하면, 한 저녁 집회후 성령세례 받을 자들을 위한 집회에서 인도자는 자기의 ‘기도 방언’을 따라하게 함으로써 참석자들로 하여금 방언을 체험케 하려 했고 그들에게 그것이 성령 세례요 하나님이 주신 방언임을 믿도록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은 제재되지 않았다(Dennis W. Costella, “Deceiving and Being Deceived,” Foundation, July-Sept. 1987, p. 9).

그러나 성경의 방언 사례들은 결코 훈련을 통한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방언하기를 구한 것도 아니었다. 사도시대의 신자들은 믿는 자에게 성령이 오신 표로서 방언을 말하는 경험을 했었다. 그러므로 방언 훈련은 명백히 성경의 모범을 벗어난 행위요,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인간적 훈련으로 받게 하려는 거짓된 행위이다. 그러한 활동은 결코 하나님의 일일 수 없다.

그러면 오늘날의 방언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는 분명한 표가 없다면, 오늘날의 방언 현상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물론 그것들 중의 일부는 하나님이 주신 방언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1900년 동안 거두어 가셨던 은사들을 오늘날 정말 다시 주실 것인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의 방식과 성경의 충족성에 비추어 볼 때 그 가능성은 매우 작아 보인다. 오히려, 오늘날의 많은 방언 비평가들은 현대의 방언 현상들이 심리적 현상이거나 위조품이거나 혹은 심지어 마귀에게서 기원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Schab, pp. 104-108; Burdick; Gromacki, pp. 44-49). 특히, 오늘날 방언 현상들의 비(非)언어적 성격이나 방언운동 안의 인위적 요소들은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님을 보인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서도 그렇게 불같이 일어나는 것은 악령이 아니고 무슨 영의 역사이겠는가?

마지막으로, 병고침(신유)에 대해서도, 우리는 단순히 병고침의 현상들이 그것들이 성령의 은사임을 확증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야 할 것이다. 병고침의 현상들은 기독교 안팎의 신비주의적 집단들에서 있어 왔다. 신비주의 연구가 쿠르트 코흐는 악령에 의한 신비적 치료의 많은 사례들을 제시했다(쿠르트 코흐, 사단의 전술전략, 22-101쪽).

더욱이, 성경에서의 병고침의 사례들은 즉각적이고 비제한적이었는데, 오늘날의 병고침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죤 맥아더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병고침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① 한 마디의 말씀이나 한 번의 만짐으로 치료하셨다(막 8:22-26에서 소경에게 두 번 안수하신 예외는 있었지만). ② 즉시 치료하셨다. ③ 완전히 치료하셨다. ④ 모든 사람을 치료하셨고 치료하실 수 있었다. ⑤ 신체 기관의 질병들도 고치셨다. ⑥ 죽은 자들을 일으키셨다(John MacArthur, The Charismatics, p. 151). 그러나 오늘날 은사운동의 소위 병고침과 신유의 은사들은 이러한 특징들을 가지는 것 같지 않다. 잠언 25:14, “거짓 은사를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원문).

신앙을 말씀보다 경험에 의존시킴

셋째로, 은사운동은 성경적 기독교의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에 불만족하며 성령의 체험을 강조한다. 즉 은사운동은 체험적 기독교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을 말씀보다 경험에 의존시킨다. 강조점이 말씀에서 경험으로 이동된다. 성경 말씀으로 만족하던 신앙생활이 경험의존적인 신앙생활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과 그 진리대로 사는 바른 삶을 강조해 왔다. 그것은 옛 길이다. 우리는 그것이 성경적인 건전한 길이라고 확신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영성(靈性)의 표는 그리스도인다운 인격과 삶이지, 어떤 은사 경험이나 행사가 아니다. 은사는 결코 영성의 표나 척도가 될 수 없다.

성경의 대표적 한 예는 고린도교회이다. 고린도교회는 은사들을 많이 경험하고 소유한 교회이었음에도 불구하고(고전 1:7) 영적 어린아이라고 지적되었다. 고린도전서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1987년과 1988년에 미국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던 짐 배커(Jim Bakker)와 지미 스웨거(Jimmy Swaggart) 같은 어떤 은사주의 T. V. 전도자들의 사치스럽고 부도덕한 생활들은 기독교계의 수치이었다. 또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지교회 부흥’의 주역이라는 플로리다주 펜사콜라시의 브라운스빌 하나님의 성회 교회의 세 명의 중심지도자들은 많은 분량의 토지를 샀고 부요한 집들을 지었거나 짓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교회 목사 죤 킬패트릭은 31만불짜리 호화 자동차로 여행을 하고 34만불짜리 호화 주택을 지었다. 전도자 스티븐 힐은 알라바마주의 공식 가격 847,931불짜리 거의 5만평 가량의 땅을 샀다. 브라운스빌의 학교 사역 책임자 마이클 브라운은 727,360불의 값이 나가는 집을 짓고 있다고 보도된다. (Pensacola News Journal; Bob Jones University, What in the World; Calvary Contender, 1998년 12월 1일.)

성경은 초자연적 은사들의 경험보다 바른 인격과 삶을 더욱 중시하고 강조한다. 신명기 13:1-5,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

마태복음 7:22, 23,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못했으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고린도전서 13:1-7은 그 어떤 은사들보다도 중요한 것이 사랑의 인격과 삶임을 밝히 증거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초자연적 은사들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성경에 계시된 객관적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초보적이고 부분적이며 어린 아이 시절의 것이었으나(고전 13:8-12), 신구약 성경말씀은 성숙한, 온전한 것이다(10절).

데살로니가후서 2:9-12,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서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사모하지도 말고 그것들을 구하지도 말고 그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말고, 오직 신구약 66권의 말씀으로, 성경말씀의 연구로, 그 말씀을 믿고 사는 것으로, 그리고 그것을 전파하는 것으로 충분한 줄 깨닫자. 오늘날도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와 새롭게 하시고 부흥케 하시고 성장케 하시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확신하자. 교회의 참된 부흥은 다른 것을 통해서가 아니고 오직 신구약 66권의 말씀의 성실한 강론과 전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누가복음 16:31,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에큐메니칼 운동과 함께감

넷째로, 은사운동은 전통적 교회들과 사역자들이 체험치 못한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을 체험했고 소유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반면, 바른 교리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리하여 은사운동은 오늘날 배교적인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우상숭배적인 천주교회를 분별력 있게 배격하지 않는다. 오늘날 은사운동은 오히려 세계 교회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1987년 성령과 세계 전도 대회에 관한 북미 대회에서 한 예언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지어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의 통합을 선언했다(Costella, pp. 16, 27). 이러한 미혹의 예언은 물론 그 대회에서 제재되지 않았다. 우리 나라의 은사주의자들도 분별력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한 예로서 1993년 순복음 강남 신학원 교수진에는 자유주의적인 한신대, 감신대, 연대 신대의 교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크리스챤 저널, 1993년 5월호, 96쪽).

‘만국을 위한 그리스도’ 선교회는 1998년 6월 21-26일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라는 주제로 5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연사들에는 팻 로벗슨, 베니 힌 등이다(Dallas Morning News, 1998년 5월 30일). . . . 카리스마지 1998년 4월호에 의하면, 선교사 마틴 롬바도는 1월에 로마에서 ‘만국을 위한 그리스도’ 성경학교를 개설하였고 그와 그 외의 은사주의자들은 이태리에서 천주교인들과 개신교인들을 연합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롬바도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천주교인들에게 쏟아부으시는 것을 본다. 은사주의 천주교 무리들이 각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특히 베니 힌의 지난해 방문 이후 그러하다.” 그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이 어울려 그의 충만한 영광 가운데 계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날을 볼 계획이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7월 1일.)

천주교회는 1965년 제2 바티칸 회의 때부터 은사운동을 후원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67년 이후 약 일억명 가량으로 추정된 천주교인들이 은사주의적 갱신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99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천주교회 내에서의 이 ‘갱신’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카리스마 1999년 7월호는 말하기를, 필라델피아 근교 프리젠테이션 BVM 천주교회는 ‘갱신’의 단계를 넘어서 ‘은사주의적 부흥’을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그 특징은 방언을 말하기, 거룩한 웃음, 예배 악단, 춤추는 수녀들, 및 바닥에 납작 업드린 방문객들 등이라고 한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8월 1일.)

이전에 천주교회 신부이었던 바트 브루어는 이렇게 말한다: “은사운동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들에 의해 . . . 의문할 여지가 없는 목적들을 위해 온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두 운동들은 동일한 밭고랑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많은 은사주의자들과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성령을 통해 교파들간의 차이점들이 사라지고 무의미하게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가 머리가 될] 거대한 한 세계교회를 향한 현재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은사운동으로부터 기세를 얻고 있다.” (Jeffrey Khoo, Biblical Separation; Calvary Contender, 1999년 11월 15일.)

W. A. 크리스웰과 더불어, 은사주의적인 조용기, 폴 크라우취, 잭 헤이포드, 죤 윔버 등은 로버트 슐러의 자서전에 인정하는 추천의 글들을 실었다(Christian News, 1996년 5월 20일, 3쪽; Gist, 1996년 봄호). 그러나 로버트 슐러는 자유주의적이고 혼합주의적 인물이다. 그는 기독교를 조롱하는 기독교 일치 학교의 뉴에이지 연례대회에서, 문선명과 함께 통일교회 행사들에서, 그리고 몰몬교 성전에서의 종교 간의 조찬기도모임에서 주강사로 나타났다(Vantage Point, 1998년 11월호). 뉴에이지 운동가들과 몰몬교인들과 천주교인들은 그의 교회당에서 연설했다(Calvary Contender, 1999년 1월 1일). 그는 오래 전에 죄에 대한 바울의 교훈과 이별을 고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자신을 힌두교인들과 이슬람교인들과 단절시키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이름으로 불리우기를 원하지 않는다(The Discerner, 1999년 6월호). 그는 그리스도께서 천국 가는 유일한 길이요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 신앙이라고 설교하지 않는다(Christian News, 1999년 7월 19일). (Calvary Contender, 1999년 8월 15일.)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이런 인물을 위해 추천의 말을 쓰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이다.

오순절파에서 성장했던 오우 탤미쥐 스펜스(O. Talmadge Spence)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오순절주의자들이 항상 신봉하는 가장 큰 이단 사상은, 첫째로, 현존하는 계시들을 성경과 대치하는 것이었으며; 둘째로, ‘방언들로 말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높은 영적 증거들을 위한 품질 증명으로 높이는 것이었다. 또한, ‘방언들로 말하는 것’은 말세를 위해 성경보다 더 후의 계시를 위한 길이 되었다.” 그는 첨가하여 말하기를, “현재의 모든 오순절 운동들은 로마 천주교회 뿐만 아니라 또한 빌리 그레이엄 사역을 지지하고 그것들과 교제한다”(Staightway, 1999년 5-6월호; Calvary Contender, 1999년 7월 15일.)

이렇게 은사운동은 오늘날 잘못된 에큐메니칼 운동의 촉매로서 나타나 그 운동을 촉진시킨다. 이것이 현대교회에 하나님이 주신 부흥의 표가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현대교회의 영적 어두움과 혼란을 추가시키는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것이 성령의 일이겠는가, 악령의 일이겠는가?

결론

우리는 영적으로 메마른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되고 성령의 충만하심 속에 살아야 한다. 성경은 신자의 삶이 이러한 영적인 삶이어야 함을 가르친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에베소서 5:18,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충만을 받으라’는 원어(플레루스데, 현재 수동태 명령형)는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뜻이다. 에베소서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데살로니가전서 5:19, “성령을 소멸치 말라.”

그러나, 오늘날 은사운동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성령의 활동이라는 증거를 갖지 않는다. 도리어, 그 운동의 여러 가지 잘못된 요소들과 경향들은 그 운동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리게 만든다. 은사운동은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결코 현대교회의 영적 부흥의 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대교회에 불어닥친 영적 혼란의 추가적 일일 뿐이다. 그러므로 참 교회들과 신자들은 마땅히 은사운동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마땅히 그 운동을 경계해야 한다.

만일 현대교회에 영적 침체가 있다면, 그것은 ‘전통적인 경직된 성령론’ 때문에가 아니다. 역사상 빈번히 그러했듯이, 교회의 영적 침체는 목사들과 신도들의 죄와 불순종, 특히 세상과 분리되기보다는 세상을 따라가며 세상과 타협하는 인본주의적 삶에 기인한다. 요한일서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왔음이니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러므로, 교회의 영적 부흥은 신자들의 성령세례 경험 같은 어떤 단회적 혹은 반복적 사건들에 있지 않고, 성경말씀에 근거한 철저한 회개와 진실한 믿음,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성경말씀대로 사는 온전한 순종의 삶에 있다.

제6부:

복음주의의 타협

목차

서론 / 289

1. 개념의 정의 / 289

2. 복음주의 협의체 / 294

3. 복음주의 잡지와 학교들 / 304

4. 복음주의 인물들 / 309

5. 복음주의 교단들 / 316

6. 기타 / 319

결론 / 320

서론

복음주의는 역사적으로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를 중심한 개신교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었다. 개신교회들을 복음주의라고 부른 것은, 신약성경에 밝히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왜곡시키고 복음 대신에 성례나 신자의 공로적 선행을 가르쳐왔던 천주교회와 구별하기 위해서이었다. 이와 같이, 복음주의는 역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믿는 입장, 곧 성경적 기독교를 가리키는 용어이었다. 20세기 초 자유주의 신학이 개신교회들에 퍼지기 시작하고 미국에서 1940년대 소위 ‘신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복음주의는 전통적 개신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런 의미에서는 성경의 근본 진리들을 수호하는 전투적 입장을 취했던 근본주의도 복음을 믿고 옹호한다는 점에서 복음주의임에 틀림 없었다.

1. 개념 정의

자유주의 신학이 역사적 개신교회들 속에 들어와 교회들을 부패시키고 변질시켰던 20세기 중엽 이후, 복음주의적 교회들은 두 입장과 진영으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포용적인 신복음주의의 입장이며, 다른 하나는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의 단절을 주장하는 근본주의의 입장이었다.

물론, 오늘날 교회 안에 ‘신복음주의’라는 말에 대한 개념도 서로 다른 것 같다. 많은 보수적 목사들은 신복음주의를 신학적 탈선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성경 무오성을 부정하는 것이나 유신론적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것 등을 신복음주의의 특징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신복음주의는 역사적으로 그런 신학적 탈선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었다. 신복음주의의 본질적 성격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1920년대의 소위 근본주의(보수주의)와 현대주의(자유주의) 간의 논쟁 혹은 갈등에서 외형적으로 현대주의가 승리하고 근본주의가 패배한 이후, 1930년대에 성경적 교회들이 자유적 혹은 포용적 대교단들로부터 분리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1940년대에 와서 그 분리된 교회들 가운데서 ‘신복음주의’라는 한 새로운 경향이 일어났다. 그것은 진리를 위해 끝까지 싸우기보다 평화와 안정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었다. 그런 입장을 주창했던 이들은 성경을 그대로 믿는 보수적 교회들 간의 교제와 협력보다 자유주의 교회들에 속한 자들을 포함하는 폭넓은 교제와 협력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성경적 분리의 명령을 따르기보다 교제와 화합을 좋아했다.

이런 입장을 처음으로 대변했던 인물은 미국의 풀러(Fuller) 신학교 초대 교장이었던 해롤드 오켕가이었다. 1948년 그는 풀러 신학교 강연에서 ‘신복음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는 1930년 보수적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지만, 1936년 교회 분리시 메이천을 따르기를 거부했었다. 그러나 재능과 인품이 탁월한 그는 1942년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NAE)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이 되었고, 1947년 풀러 신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그는 33년간 보스톤의 파크 스트릿 교회의 담임목사로 봉사했고, 25년간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의 이사장이었다. 그는 빌리 그레이엄의 절친한 친구이며 신학적 조언자이었다.

오켕가는 풀러 신학교장 취임시 분리를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을 비난하면서 자기 신학교는 대교단들 안의 목회자들을 훈련시킬 것이라고 선언했었다(William Ashbrook, Evangelicalism: The New Neutral- ism, p. 5). 그는 1957년 한 소식지에서 “신복음주의는 그 전략을 분리에서 침투로 바꾸었다”고 말했다(위의 책, 4쪽). 또한 그는 후에 “신복음주의는 분리를 거절함에 있어서 근본주의와 달랐다”고 회고하였다(Fore- word to Harold Lindsell's The Battle for the Bible).

신복음주의 기관들로서, 1942년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가 조직되었고, 1947년 풀러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또 1951년에는 20개국의 복음주의 협의회들이 모여서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WEF)를 형성하였다. 1956년에는 신복음주의 대변지인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지가 창간되었다.

신복음주의는 그 용어를 처음으로 만들어냈던 해롤드 오켕가의 생각대로 근본주의의 분리의 입장을 반대하는 것을 본질로 하였다. 대교단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이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물론 그 ‘넓어진’ 교회들을 ‘배교’라고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변론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1920년대의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갈등은 여하튼 외형적으로는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났고 그 결과 역사적 대교단들은 ‘넓어진’ 교회들이 되었고 그 이후 대교단들 안에서는 더 이상 자유주의를 배제하려는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 때, 분리되어 나온 소수의 보수적 교회들이 참된 기독교를 계승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 부정적 대답을 가졌다. 오켕가의 말대로, 그들은 분리의 입장을 포기하고 그 대신 넓어진 대교단 속으로 들어가는 소위 ‘침투’의 입장 혹은 전략을 가지며 그 입장을 정당화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대교단들 속으로 다시 들어가 그 교단들을 개혁시키고 회복시키기를 원했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볼 때 신복음주의는 자유주의자들과의 분리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시작된 운동이었고, 그것이 그 입장의 본질적 내용이었다.

그러나 신복음주의자들이 근본주의라는 말을 싫어하고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전유물처럼 사용하게 되었을 때, 복음주의는 다른 현대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신복음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던 각국의 ‘복음주의자 협회’(NAE)나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WEF)는 ‘복음주의’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죠지 말스든의 말과 같이, 신복음주의자들은 점차 자신들을 단순히 복음주의자로 부르기 시작했고 신복음주의는 오늘날 흔히 단순히 ‘복음주의’로 불리운다(George M. Marsden, “fundamentalism,” in New Dictionary of Theology, p. 268). 이와 같이, 오늘날 ‘복음주의’는 신복음주의와 거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고, 신복음주의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몇몇 논평가들의 견해 검토

윌리엄 애쉬브룩의 정의

윌리엄 애쉬브룩은 오늘날의 ‘복음주의’ 혹은 신복음주의를 근본주의에 대해 혹평하며 자유주의에 대해 동정적인 ‘신중립주의’로 묘사하였다(William Ashbrook, Evangelicalism: The New Neutralism). 그 증거들로 그는 이 입장의 주창자 해롤드 오켕가의 반(反)분리주의적 발언과 행위들을 든다. 또 그는 오켕가가 대중적 수준에서 신복음주의의 확신과 이념의 대변자로 제시한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방침의 변경을 다른 한 증거로 든다.

그에 의하면, 빌리 그레이엄의 본래의 입장은 건전하였다. 빌리 그레이엄은 1951년 4월 파일롯(Pilot)지의 글에서 “우리는 어떤 형태의 현대주의도 너그럽게 보거나 교제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1952년 6월 3일자 선배 부흥사 밥 죤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현대주의자들은 어디에서나 우리를 후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린스보로와 슈립포트 외에 어느 도시에서나 교회 협의회(NCC)의 후원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 후 빌리 그레이엄은 자신의 입장을 변경하였다. 그는 뉴욕, 샌프란시스코, 필라델피아,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컬럼버스 등의 전도 집회에서 공공연히 자유주의적 교회 협의회의 후원을 받았다(Ibid., p. 9).

애쉬브룩은 또한 자유주의에 대해 복음주의의 포용적인 증거의 추가적인 예들로 크리스챤 라이프지 1957년 4월호가 넬스 페레, 라인홀드 니이버, 해롤드 피 등의 자유주의자들을 정통 기독교인과 거리가 멀지 않은 자들로 묘사한 것이라든가, 에드워드 카넬이 칼 바르트에 대해 매우 동정적이라는 것 등을 들었다.

촬스 우드브릿지의 정의

촬스 우드브릿지는 신복음주의를 자유주의자들의 포용과 그들과의 협력을 주장하는 입장으로 정의하였다(Charles Woodbridge, The New Evangelicalism <1969>, p. 15). 그는 그 증거들로 신학교 영역에서 풀러 신학교가 프린스톤 신학교의 전교장인 신정통주의자 죤 매케이를 강사로 초청하는 것과 같은 빈번한 일들, 기독교 문서 영역에서 크리스챤 라이프, 무디 먼슬리,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이터니티 등이 자유주의자들의 책이나 집회 광고를 싣는 일, 교회연합 영역에서 자유주의적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는 일, 그리고 전도의 영역에서 빌리 그레이엄의 협력 전도와 같이 포용적 방법을 채택하는 것 등을 들었다.

특히 마지막 문제에 관한 예로서 빌리 그레이엄이 미국 로스 앤젤레스에서의 전도집회시 제랄드 케네디 감독을 명예대회장으로 임명했는데, 케네디 감독은 그의 책 하나님의 좋은 소식에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명확히 부정한 자라고 지적하였다(Ibid., pp. 34-39). 우드브릿지는 또한 이러한 타협적 태도의 결과로서 성경의 정경성, 완전 영감, 무오(無誤)에 대한 회의와 진보적 창조 개념의 수납 등의 신학적 변질과, 춤, 영화 등에 대한 개방적 태도에서 볼 수 있는 윤리의 세속화도 지적하였다(Ibid., pp. 47-57).

개리 코우언의 정의

개리 코우언은 신복음주의의 입장을 전도활동의 측면에서 정의하기를, ‘자유주의자들이 이단이 아니고 견해가 다른 형제들이며 따라서 그들을 주님의 일, 특히 전도의 일에 참여시킬 수 있다는 입장’ 즉 자유주의자들과의 협력적 전도를 주장하고 정당화하는 입장이라고 하였다(Gary G. Cohen, Biblical Separation Defended, p. viii).

박형룡 박사의 정의

박형룡 박사는 “신복음주의는 미국에서 20세기 초에 자유주의가 득세(得勢)하고 근본주의가 실세(失勢)한데 대한 반발로 어떤 보수주의 신학 교육을 받은 소장 신학자들이 자유주의 신학과 타협을 감행하기로 발족한 새 신학 운동”이라고 언급한 후, 다음과 같은 요지로 논평하였다(기독교 현대신학 난제 선평 <1975년>, 445-471쪽.)

첫째로,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에 대해 학문성 결여, 반교파주의, 세대주의, 부정주의 등의 말로 가혹히 비판한다. 그러나 근본주의에 대한 가혹한 비평은 비평자의 정통성을 의문케 한다.

둘째로, 신복음주의는 신정통주의와 타협하는 경향이 있다. 신정통주의는 성경의 파괴적 비평을 받아들이는데, 과연 어떤 신복음주의자들은 성경 무오(無誤)를 부정하고 성경을 파괴적으로 비평한다.

셋째로, 신복음주의는 유신론적(有神論的)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이적 부인의 경향을 띤다. 어떤 신복음주의자들은 천지 창조와 인간 창조에 대해 진화론적 개념과 긴 지질학적 연대를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의 교리를 중요치 않게 여긴다.

넷째로, 신복음주의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사회 복음 운동에 따라간다. 오켕가는 말하기를,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가 회피한 사회적 난제들을 취급하기를 의욕함에서 근본주의와 다르다. . . . 개인 복음과 사회 복음 사이에 이분설이 있을 필요가 없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구원의 개인적 초자연적 경험과 사회 철학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신복음주의자들은 민권 투쟁, 빈민 행진 등 과격한 사회 정치 활동에 참여한다.

다섯째로,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 우호적, 협력적 관계를 가지고 배교적 교단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 머문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들과 신학적 대화를 원하고 그들을 강사로 초청한다. 또 빌리 그레이엄의 경우와 같이,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과 협력하여 전도 대회를 연다.

복음주의 혹은 신복음주의에 대한 이상의 진술들은 오늘날의 복음주의 내지 신복음주의가 자유주의자들과 분리하지 않고 그들을 포용하고 그들과 교제하고 협력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을 확증한다. 우드브릿지나 박형룡의 지적대로 신복음주의가 신학적 탈선들의 문제점을 보이고 있으나, 그것은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와 협력에서 생긴 당연한 결과들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자유주의자들로부터의 분리를 반대하고 그들을 포용하고 그들과 교제하고 협력하는 입장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복음주의에 대한 이런 정의에 입각하여 근래에 수집된 사례들을 모아보고 그 문제점을 확증해 보자.

2. 복음주의 협의체들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NAE)

관용적 태도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 회장인 자유 감리교회 감독 케빈 매노이아는 경계선을 넓혀서 전통적 복음주의 영역 밖에 있는 양립할 수 있는 견해들을 가진 자들을 포함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매노이아는 말하기를, 복음주의자 협회는 죤 윔버의 빈야드 같은 은사운동들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는, 많은 복음주의적 연합감리교인들이 복음주의자 협회에서 편안함을 느낄 것이라고 언급하였다(Christianity Today, 1999년 4월 5일). 그는 또한 말하기를, “우리는 판별 시험법들을 찾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벽돌담들을 말뚝 울타리들로 대치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 이사장 레이머 베스트는, 복음주의자 협회가 기독교를 적절하게 만들 새로운 도전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4월 15일.)

자유주의 교단들, 은사주의자들, 천주교인들을 포용함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는 오래 전부터 자유주의적 대교단들의 지교회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여왔다. 또한 1942년에 그 단체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그 협회의 최고 지도자인 돈 아규는 이슬람교 지도자와 함께 자유주의적 미국 교회협의회(NCC) 총회에서 연설하였다(Calvary Contender, 1998년 3월 1일).

또한 카리스마지는 1993년 오순절파 교회들이 복음주의자 협회 회원교회들의 약 51퍼센트를 차지한다고 말했고, 어떤 보고서는 80퍼센트가 그러하다고 하였다. 현 회장 케빈 매노이아는 자신이 ‘보다 넓은 복음주의 운동 안에서’ 은사주의자들과 비은사주의자들 간에 일치의 다리를 놓기를 원한다고 말한다(Calvary Contender, 1993년 3월 15일; Cha- risma, 1999년 5월호; Calvary Contender, 1999년 5월 15일).

콜슨/뉴하우스의 ‘복음주의들과 천주교인들과 함께’(ECT)라는 문서는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 간의 다리 놓기의 한 예이다. 복음주의자 협회의 전 회장 존 화이트는 그 문서에 서명했고 천주교인들을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라고 불렀다(Calvary Contender, 1994년 5월 15일).

이단적 교리를 가진 교단을 회원으로 받음

1997년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는 ‘전세계 하나님의 교회’(Worldwide Church of God)라는 교단을 회원교회로 받아들였다. 그 교단은 여러 방면에서 복음주의적이게 보이며 또한 허버트 암스트롱(Herbert W. Armstrong)의 어떤 이단적 교리들을 버렸고 이제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교단은 여전히 영원한 지옥 형벌의 교리를 거절하고, 유대교적 안식일 준수를 고집하며, 죽은 후에 구원의 두번째 기회가 있다는 비성경적 가르침을 받아들인다(Fundamental Digest, 1997년 10월호). 지옥에 대한 그들의 결함 있는 가르침에 대한 추가적 증거는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1997년 8월 12일자에서 그 교단의 한 교역자 양성 이사의 견해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Calvary Contender, 1997년 11월 1일.)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

회원교회들이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머물게 함

세계복음주의협의회의 회장 데오도르 윌리암스(Theodore Williams)는 세계복음주의협의회 뉴스레터 1993년 8월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교회협의회 소속 교단 내의 복음주의자들은 그대로 머물러 복음주의 입장을 취하고 그 교회 안에 복음주의적 영향을 끼치려고 해야 한다” (Calvary Contender, 1993년 12월 15일).

한국기독교 총연합회

자유주의적 교단들(기감, 기장)을 받아들이려 함

1991년 한국기독교 총연합회 제2회 정기총회는 “기감과 기장의 가입 문제는 일단 긍정적인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음을 거듭 밝혔다”(“교단 부담금 비중 늘릴 계획,” 기독교 연합신문, 1991년 1월 13일, 15쪽). 이 단체는 기감과 기장이 분명히 자유주의적 교단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교단들을 배제할 의사가 없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을 설교자와 강사로 세움

한국기독교 총연합회는 1994년 3·1절 기념예배 설교를 자유주의자로널리 알려져 있는 강원용 목사에게 부탁하였고(교회연합신문, 1994년 2월 19일, 10쪽), 3월 8일 임원 취임 예배 설교를 유명한 기장측 목사인 조향록 목사에게 부탁하였다(기독교보, 1994년 3월 12일, 7쪽). 또 4월 9일 남북교회 협력을 위한 세미나의 강사 명단에 강원용 박사가 포함되었다(한국기독공보, 1994년 4월 2일 ,4쪽).

지도자들이 기독교회협의회(NCC)와 하나되기를 원함

1996년 “한기총은 어디로”라는 주제의 한국 복음주의 협의회 월례발표회에서 발제자 한명수 목사(전 한기총 총무, 창훈대교회 목사, 기독신보 주필)는 진보와 보수는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어느 한 쪽을 강조하면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다고 말하면서 한기총과 교회협[한국교회협의회, NCC]이 새로운 이름을 가진 단체로 우뚝서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논찬자로 나선 정진경 목사(신촌성결교회 원로목사, 전 한기총 대표총무) 역시 개신교계 대표성을 띤 연합기관이 존재해야 한다고 지적, 한기총과 교회협의 하나됨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부회장 김명혁 목사(합동신학교 교수, 강변교회 목사)도 “한기총 대표회장 최훈 목사도 하나되는 소망을 갖고 일한다”며 “양 기구는 기구적 통합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신보, 1996년 9월 14일, 19쪽.)

1998년 2월, 한국기독교 총연합회 지 덕 대표회장은 기자 회견에서 한국교회가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연합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히면서, 특히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 총연합회의 차이가 이제는 그다지 크지 않다고 말했다(기독교신문, 1998년 2월 22일, 15쪽).

기독교회협의회(NCC)와 연합 행사들을 행함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회장: 이성덕 구세군사령관)와 한국기독교 총연합회(회장: 이만신 목사)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평화 통일을 위한 한국교회 특별연합예배’가 2000년 6월 4일 열린다고 한다. 교회협의회 김동완 총무는 “이번 연합예배를 시초로 앞으로도 교회협과 한기총이 좋은 프로그램을 통해 같이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고, 이만신 목사는 “[이] 연합예배가 한국교회가 하나되고 통일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교회연합신문, 2000년 5월 14일, 1쪽).

한국 복음주의 협의회(KEF)

빌리 그레이엄 집회를 수용함

1990년 11월, 한국 복음주의 협의회는 홍콩 국립경기장에서 개최되는 빌리 그레이엄 홍콩 대전도대회의 한국 위성 중계 전도대회를 실시했는데, 그 장소는 부산 수영로교회, 대구 서문교회, 대전 중앙교회 등 예장합동측 교회들을 포함했다(“위성중계 전도대회 실시,” 기독신보, 1990년 11월 3일, 10쪽).

자유주의 교단의 강사를 세움

1995년 한국 복음주의 협의회의 광복 50주년 기념 국제심포지움의 강사 중에도 기장측 조향록 목사가 포함되어 있었다(크리스챤신문, 1995년 8월 5일, 2쪽).

진보와 보수의 통합을 주창함

1996년 한국 복음주의 협의회의 ‘교회협의회(NCC) 개혁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발표회에서, 그 협의회의 지도자인 홍순우 목사는 진보적 교회와 보수적 교회가 모두 자기 반성을 해야 하고 한국교회 전체 정서에 맞는 연합운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앞으로 NCC[교회협]이나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의 연합 기관이 합력하여 대통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또한 그 발표회에서 전호진 박사도 “보수적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연합운동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활발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고 말했다. (기독교보, 1996년 7월 13일, 5쪽.)

한국장로교 총연합회

한국장로교협의회의 연합 행사

1986년 9월 8일 한국장로교 총연합회의 전신인 한국장로교협의회는 새문안교회당에서 노춘경씨 수세 100주년 기념 행사로 5개 장로교단 연합성찬예배 및 강연회를 가졌다. 그 5개 교단은 예장 통합, 예장 합동, 기장, 예장 고신, 예장 대신이었다. 그 행사에 참석한 교회 지도자들은 150여명이었다(“5개 교단 연합성찬예배,” 크리스챤 신문, 1986년 9월 14일, 1쪽).

1993년, 한국장로교회 일치를 위한 특별좌담

1993년 한국장로교회 일치를 위한 특별좌담에서, 예장 통합 부산진교회 박성원 목사는 교회가 “과거 분열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허위 구조 즉 정통성 수호라는 미명아래 교인들에게 강요해온 모든 허위구조를 과감히 떨쳐버리고 하나가 되기 위한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라고 주장하였다. 또 그는 “개인 구원, 사회 구원을 각기 외치면서 교회가 진보, 보수로 나뉘어지는 것은 원칙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한국의 진보교회와 보수교회가 일치하려면 ‘타협주의’가 필요하며, 예컨대 보수측에서 ‘성경이 유일한 계시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한 장로교 일치는 대단히 어렵다고 주장했다. 또 그 좌담에서 기장 신학연구소장 김원배 박사는 교회 일치는 진정한 교회 회복 운동인데, 교회 일치를 위해 도그마[교리적 확신]에서 벗어나 봉사의 자세를 가져야 하며 ‘교리’만 따진다면 끝이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예장 대신 총회 총무 김재규 목사도 한국교회가 교리를 따지지 말고 선교에 함께 참여함으로 일치를 이루자고 제의했다. 심지어 그는 “신학에 대한 고집이 곧 한국장로교회 일치의 저해요인”이라고 주장하면서, 과거엔 김재준 목사를 이단이라고 정죄했으나 오늘 보수 신학에선 그를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크리스챤신문, 1993년 5월 1일, 3쪽.)

1993년의 공동선언문

1993년 한장협 소속 5개 장로교단 총회장 공동선언문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장로교회가 되기를 소원한다고 말하면서 “우리 한국의 장로교단은 신앙의 본질적인 항목들에 있어서 결코 분열될 만큼 의견의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고 진술하였다(기독교 연합신문, 1993년 5월 30일, 3쪽).

1994년의 연합 사업 계획

한장협은 1994년 사업 계획에 각종 강단교류, 신학생 예배강단교류, 세계장로교와의 교류 등을 포함하였다(기독교보, 1993년 12월 11일, 7쪽).

1997년, 장로교 연합운동에 대한 토론회

1997년 3월 예장 통합, 합동, 고신, 대신, 개혁, 기장 등 장로교 주요 9개 교단이 참여하고 있는 한국 장로교 협의회는 한국교회 백주년기념관에서 “장로교 연합운동의 과거, 현재, 미래”란 주제로 토론회를 가졌다. 이 모임에서 예장합동측의 한명수 목사는 “개신교계 분열은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들의 생각을 앞세운 데서 생긴 결과”라고 말했고, 예장통합측의 김순권 목사는 “권위주의와 신학교 난립, 감정 대립 등이 장로교 분열의 원인”이라고 말했다(“장로교 ‘일치(一致)운동’ 활발,” 조선일보, 1997년 4월 5일, 15쪽).

한장협과 예장협의 통합

한국의 대표적 두 장로교 협의체인 한국장로교협의회(한장협)와 대한예수교 장로교협의회(예장협)가 1997년 5월 15일 합동총회를 열어 통합하기로 했다. 양측 합동위원회 모임은 ‘조건 없는 합동’을 결정하였고 두 단체의 회장들은 “두 단체가 따로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데 동의하였다고 한다. 예장협은 34개 교단으로 구성되었는데 보수적인 많은 군소교단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한장협은 예장통합, 기장, 예장합동, 예장고신, 예장대신, 예장개혁 등의 교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장로교 하나 된다,” 기독교 연합신문, 1997년 5월 11일, 1, 3쪽.)

1998년, 회원교단 임원 축하예배

예장협과 한장협이 연합하여 된 한국장로교 총연합회(대표회장: 예장통합측 총회장 서정래 목사)는 1998년 10월 29일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회원교단의 신임 총회장과 총무 임원 축하예배를 통해 장로교회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에 매진키로 결의했다. 예장통합, 예장합동, 예장고신, 기장, 예장대신, 예장개혁 등 31개 회원교단 가운데 이날 참석한 신임 임원 120여명은 공동기도문에서 “지난날 장로교회가 분열된 아픔을 깊이 회개한다”면서 “장로교회가 하나로 연합해 이 땅에 바로 서서 주님의 정의를 아름답게 꽃 피우자”고 강조했다. 예장통합 직전 총회장 민병억 목사는 ‘한 이름 이스라엘로’라는 설교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로 똘똘 뭉친 것처럼 우리 장로교도 하나 돼야 한다”면서 “하나된 장로교가 이 나라와 민족의 통일, 번영에 선구자가 되야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길자연 목사(예장합동 총회장)는 “장로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자기의 입장만 고집해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면서 “이제라도 우리 모두 하나 되기 운동에 적극 참여하자”고 말했다. 서정래 대표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축하예배는 예장합동 길자연 총회장과 예장고신 임종만 증경총회장이 축사하고, 예장합동정통 홍찬환 증경총회장이 대표기도, 예장대신 김백수 증경총회장이 축도했다. (크리스챤신문, 1998년 11월 9일, 14쪽.)

1999년, 신년 하례회

한국장로교 총연합회는 1999년 1월 7일 한국교회 백주년 기념관에서 24개 회원 교단 총회장들과 총무들 등 120여명이 참석한 신년 하례회를 가졌는데, 거기에서 대표회장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통합측) 총회장 유의웅 목사는 신년사를 통해 ‘장로교 연맹’의 결성을 제안했다. 그는 그것을 120여개의 장로교단들이 하나 되는 꿈을 꾸면서 현재의 총회들 질서와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보다 협력과 결속이 강화된 조직으로 묘사하였다. 그의 제안은 장로교 연맹을 만들어 3년 내지 5년 후에 하나의 장로교회 혹은 ‘연합 장로교회’를 만들자는 것이며, 그 장로교 연맹은 하나의 장로교회를 위한 전단계가 되는 것이다(기독교신문, 1999년 1월 17일, 2쪽; 교회연합신문, 1999년 1월 17일, 1쪽).

2000년 각교단 총회행사 계획

한국장로교 총연합회(대표회장: 예장통합 유의웅 목사)는 2000년 회원교단들의 총회 개시일을 9월 25일로 통일시켜 이를 ‘한국장로교의 날’로 선포하기로 했다. 이날 30개 회원 교단 임원과 대의원들은 한 자리에 모여 개회예배를 올리고 성만찬, 축하 공연 등을 함께 갖게 된다. 한장련은 또 총회 직전 주간과 일요일을 각각 ‘한국 장로교 주간’, ‘한국 장로교 주일’로 지정, 장로교 여러 교단이 형제 자매임을 고백하고 일치 의식을 확인하는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조선일보, 1999년 8월 21일, 18쪽.)

2000년 일치 간담회

한국장로교 총연합회(대표회장: 김도빈 목사)는 2000년 2월 내장산 관광호텔에서 한국 장로교 연합과 일치 간담회를 열었다. 그 모임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 모색’이라는 제목의 주제 강연에서 전병금 목사(한장연 서기)는 “처음부터 기구적인 통합을 모색하려고 하기보다는 우선 연합 교회의 형태를 갖춰가면서 점진적인 통합을 이뤄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 장로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과제들로서 △ 교단 간의 강단교류 활성화 △ 총회에 상호사절단 파견 △ 2000년 장로교 총회 개회예배 함께 드리기 △ 같은 지역 안에서의 연합예배와 성찬식 △ WARC(세계 개혁교회 연맹) 참여로 국제 교회와의 연합 강화 등을 제안했다. 논찬에서 김재규 목사(대신 총회장)는 “한국교회에서 사상 논쟁이 사라졌다는 발제에 동감을 표하고, 열린 보수와 열린 진보가 대화하면 사상 논쟁은 무너질 것”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일치를 위해 “우선 실현 가능한 선교, 예배에 대한 것만이라도 구체적으로 실천해가자”고 주장했다. (기독교보, 2000년 2월 12일, 10쪽.)

소속 교단들의 신대원 원우회장 모임

한국장로교 총연합회(대표회장: 예장합동 김도빈 목사) 2000년 한국장로교대회 준비위원회는 5월 1일 장신대 대회의실에서 가입교단 신학대학원 원우회장 제2차 회의를 갖고 한국장로교회는 한 형제, 자매임을 확인하는 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그 회의에서 신학대학원 원우회장들은 한국장로교회의 화해와 협력, 연합과 일치를 위한 계기를 마련코자 실시되는 2000년 한국장로교대회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의했다. 이 날 참석한 원우회장들은 예장통합측, 예장합동측, 예장고신측, 기장측, 예장개혁측 등 11개 교단 신학대학원 원우회장들이라고 한다. (교회연합신문, 2000년 5월 14일, 1쪽.)

한국기독교 목회자협의회

갱신 그룹들의 일치에 대한 생각

예장합동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회장: 옥한흠 목사)를 비롯하여 예장통합 ‘바른목회 실천협의회’(회장: 손인웅 목사), 예장고신 ‘고신정신잇기 목회자협의회’(회장: 윤희구 목사), 기장 ‘21세기 목회자협의회’(회장: 전병금 목사) 등 장로교단들 중 대표적인 네 교단의 목회자협의회들이 1997년 11월 서울 교육문화회관에서 ‘미래 한국교회를 위한 장로교 목회자 모임’을 갖는다. 그 모임에서 발표되는 선언문에는 “장로교라는 같은 뿌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서로 분열된 모습을 보인 것을 참회하는 한편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목회자들이 일치와 연합된 모습을 보이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기독신문, 1997년 10월 29일, 22쪽.)

1998년, 한국장로교 목회자협의회의 ‘교회 개혁을 위한 선언문’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측),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측),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측) 등 장로교 4개 교단의 개혁성향의 목회자 그룹들로 구성된 한국장로교 목회자협의회(회장: 옥한흠 목사)는 1998년 6월 경기도 광주 소망수양관에서 수련회를 가진 후 ‘교회개혁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교회 도덕적 타락현상과 대 사회 영향력 약화 현상을 뿌리뽑기 위해 목회자 개혁과 한국교회 일치가 시급하다고 천명하였다. 특히, 교회의 대 사회적 영향력의 약화 현상에 대해 ‘한국교회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기독교협의회(교회협)로 나눠진 것에서 연유한다’고 말하고 ‘한국교회 일치와 연합은 늦출 수 없는 긴박한 과제’라고 진단하였다. (기독신문, 1998년 6월 24일, 23쪽.)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신학의 변질 즉 자유주의 신학의 포용 문제이다. 오늘날 교회 개혁의 첫번째 과제는 신학적 순수성의 회복이다.

한국기독교 목회자협의회 발족

한국교회의 주요 교단들에서 교회갱신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는 목회자협의회들은 1998년 11월 26일 사랑의 교회(옥한흠 목사)에서 ‘한국기독교 목회자협의회’(한목협) 창립 총회를 열었다. 창립 총회에 참여하는 협의회들은 다음과 같은 14개의 교단들에 소속해 있다: 예장(합동), 예장(통합), 예장(고신), 기장, 예장(대신), 예장(합신), 기감, 예성, 기성, 기침, 나사렛, 기하성, 구세군, 성공회. ‘한목협’의 설립 취지는, 비신학적, 비정치적 한도 내에서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도모하며 특히 성직자와 교회의 윤리성 회복을 통해 대사회적인 영향력을 강화해 나가는 데까지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총회 직전 창립기념강좌 때는 이원규 교수(감신대)와 이성구 목사(고신정신잇기 목회자협의회 총무)의 강의가 있고, 창립총회는 김진호 목사(감리교)의 사회로 대표회장과 공동회장 등 임원을 선출할 예정이다. 총회 직후에는, 창립헌신예배와 성찬식을 갖는데, 창립헌신예배는 전병금 목사(기장측)의 사회, 옥한흠 목사(예장합동)의 설교, 이동원 목사(침례교)의 기도와 현해춘 목사(나사렛 성결회)의 축도로 이어질 계획이다. 또 박경조 신부(성공회)의 창립 선언문 낭독, 유의웅 목사(예장통합측 총회장)와 장 상 총장(이화여대)의 축사, 정철범 주교(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대표회장, 성공회)와 지 덕 목사(한국기독교 총연합회 대표회장)의 격려사 등의 순서가 포함될 예정이다. 창립선언문 초안 작성에는 김원배 목사(기장측)를 중심으로 김영만 목사(기하성), 임승안 목사(나사렛), 이성구 목사(고신) 등이 참여할 계획이다. (기독신문, 1998년 11월 11일, 23쪽; 기독교연합신문, 1998년 11월 15일, 1쪽.)

대한예수교장로회 연합회[예장연]

대한예수교장로회 연합회(대표회장: 김경희 목사)는 2000년 1월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신년하례회를 가졌다. 이 날 예배 설교는 김의환 목사가 하였다. (교회연합신문, 2000년 1월 30일, 10쪽.) 그러나 예장연이 바로 가려면 신복음주의 정신을 가진 인사를 배제해야 할 것이다.

3. 복음주의 잡지와 학교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개념의 정의에서 언급했듯이,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는 빌리 그레이엄에 의해 신복음주의적 정신을 가지고 창간되었고 빌리 그레이엄이 이사장이며 신복음주의적 잡지들 가운데서 신복음주의의 대변지로서 계속 활약하였다.

최근의 한 예로서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9월 7일자는 고(故) 레이몬드 브라운 ‘신부’의 신약개론을 높이 추천했고 “그는 오늘날 신약학의 탁월한 종합적 지식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브라운은 예수께서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이 아니셨고 오류를 범하셨다고 말한 천주교 자유주의 신학자이었다. 또 그는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거부했고,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적이었다. 그는 1971년 미국 뉴욕의 자유주의적 유니온 신학교에서 최초로 종신직 천주교 교수가 되었다(Christian News, 1998년 9월 14일). 무디 성경학교의 죠셉 스토웰, 워런 위어스비, 그리고 미국 근본주의 독립교회(IFCA) 교단의 에드 답슨은 천주교인들과 더불어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의 ‘자문편집위원들’이다. (Calvary Con- tender, 1998년 10월 15일.)

미국, 풀러(Fuller) 신학교

풀러 신학교의 1984-85년 요람은 천주교 레이몬드 브라운 ‘신부’를 강사로 열거하였다(Calvary Contender, 1984년 10월 15일). 그러나 브라운은 예수께서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이 아니셨고 오류를 범하셨다고 말한 자유주의 신학자이었다. 또 그는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거부했고,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활동적이었다. 그는 1971년 미국 뉴욕의 자유주의적 유니온 신학교에서 최초로 종신직 천주교 교수가 되었다(Christian News, 1998년 9월 14일).

풀러(Fuller) 신학교는 처음에는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옹호했었다. 그러나 이 학교는 어느날 이 교리를 거부했고, 또한 은사운동을 조장하기 시작했다(Christian News, 1998년 6월 29일). 이 학교는 이제 여성 안수를 강하게 지지하고 있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8월 1일.)

아더 후크는 1999년 7월 27일 풀러 신학교를 방문하고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그는 신학부의 인기 있는 죤 골딘게이 교수의 강의실에 참석했는데, 골딘게이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여리고성이 있었고 그 성벽들이 무너져내렸다는 고고학적인 증거는 없다. . . . 아마 이것은 비유일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불신앙이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9월 15일.)

“풀러 신학교에서 설교를 가르치는 ‘목사요 교사요 여자 성직자요 학자요 저술가’인 마가렛 서스터는 1999년 4월 20일 안식교가 후원한 위성 생중계 ‘대화식 세미나’를 위한 초청 설교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Fun- damental Digest, 1999년 7-8월호; Calvary Contender, 1999년 9월 15일).

미국, 달라스(Dallas) 신학교

1992년 2월 4일부터 7일까지,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의 브루스 메츠거 교수는 달라스 신학교에서 강연했다. 그는 성경이 진실성과 역사성을 믿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자이다. (Calvary Contender, 1992년 9월 1일.)

달라스 신학교는 위클립 성경번역 선교회와 협력하는데, 위클립 성경번역 선교회는 오래 전부터 천주교인들, 자유주의 교단들, 및 신복음주의자들과 친근하다. (Calvary Contender, 1993년 9월 15일.)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와 관계하여 31년간 봉사했고 세계복음화 로잔위원회 명예 평생회장인 레이턴 포드는 1997년 5월 달라스 신학교 졸업식 연사이었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 협동편집자 앨리스터 맥그레이스는 1997년 경건회에서 그리피스 토마스 기념강연을 하였다. 달라스 신학교 교장 척 스윈돌은 1997년 10월의 한 서신에서 테레사 수녀를 ‘주목할 만한 여인’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을 잘못된 종교체제로 인도하는 자가 ‘주목할 만한 자’라고 칭송되어야 하는가? 달라스 신학교 교수들은 1997년에 프로미스 키퍼즈 집회에서 그리고 휫튼 대학, 무디 성경학교 및 브라이언 대학에서 강연했다. 달라스 신학교가 신복음주의적 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오늘날 의심할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Calvary Contender, 1998년 2월 1일).

미국, 무디(Moody) 성경학교

무디 성경학교 교장 죠셉 스토웰은 1996년 5월 1일 미국 워싱턴 D.C. 부근에서 모인 전국 전도협의회에 참석하였고 거기에서 그는 “참석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몸이 연합될 때만 역사적으로 움직이셨음을 상기시켰다.” 당시 전도협의회의 회장이었던 죠 앨드리히도 연합은 모든 영적 질병들을 위한 보편적 치료약이라고 주장했다(Voice, 1998년 5-6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연합을 진리보다 높이지 않는다. 오류 안에서 연합하는 것보다 진리 때문에 나뉘는 것이 더 낫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7월 15일).

교장 죠셉 스토웰의 1999년 9월부터 2000년 2월간의 순회설교 일정은 프로미스 키퍼스, 빌 하이벨즈의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 빌리 그레이엄의 코우브(The Cove), 미국 종교 방송협회, 달라스 신학교, 생명의 말씀사, 시다빌 대학(정규침례교회 총협의회의 인준받은 학교) 및 루이지애나 침례교대회 등을 포함한다. 조용한 전진으로 스토웰은 에큐메니칼 유산을 세우고 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11월 15일.)

무디 성경학교 교장 죠셉 스토웰과 침례교회 세계연맹의 데니스 로츠는 지난 달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의 이사회에 추가되었다(Alabama Baptists, 1999년 11월 11일). 스토웰은, 빌리 그레이엄이 설립자요 이사장인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의 자문 편집인이다. 스토웰은 빌리 그레이엄 훈련센터에서 강연하였고, 그레이엄은 무디 성경학교의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강연하였다. 스토웰은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의 회원이며 프로미스 키퍼즈와 남침례교회에 관련된 행사들에서 강연했다. . . . 우리는 스토웰이 최근 수년 동안 무디 성경학교를 신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 안으로 취하여 들어간 가속화된 단계를 보고 슬퍼한다. (Calvary Con- tender, 1999년 12월 15일.)

미국, 고든-콘웰(Gordon-Conwell) 신학교

척 콜슨과 루이스 팔라우는 1999년 5월 1일부터 유효한 미국의 고든-콘웰 신학교의 이사들로 선출되었다. 친(親)천주교적 교회연합운동가들로서, 그들은 고든-콘웰의 신복음주의적 입장에 잘 맞을 것이다. 빌리 그레이엄은 고든-콘웰의 이사장으로 일해 왔고 고든-콘웰은 지난 5년에 걸쳐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로부터 4백만불의 장학금을 받았다. 고든-콘웰의 힐탑(Hilltop)지는 죤 암스트롱, 앨리스테어 벡, 그리고 케이 아서 등의 교회연합운동가들을 가을학기 강사들로 열거한다. 지난 여러 해들에 고든-콘웰은 자유주의 연사들을 단에 세웠었다(예를 들어, 미국 유니온 신학교의 극단적 자유주의자인 제임스 포브즈). (Calvary Contender, 1991년 3월 15일; 1999년 9월 15일.)

미국, 리버티(Liberty) 대학교 및 신학교

제리 팔웰 박사의 1998년 4월호 내쇼널 리버티 저널은 다음과 같이 썼다: “리버티 침례교신학교는 하워드 핸드릭스 박사가, 게리 콜린스, [‘성경으로 돌아가자’ 프로의] 우드로 크롤, 죤 맥스웰, 스티븐 올포드, 제리 바인즈 및 죤 월보어드를 포함하는, 우리의 탁월한 방문교수 명단에 들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팔웰은 케이 아더와 다른 이들과 함께 ‘예수 2000 성지순례단’을 위한 연사로서 사진으로 보도되었다. 그의 1998년 대집회 연사들은 달라스 신학교 교장 척 스윈돌과 죤 맥스웰(로버트 슐러 연사)을 포함한다. 위에 언급된 모든 사람들은 다 에큐메니칼적인 연사들이다(Calvary Contender, 1998년 4월 15일).

제리 팔웰이 이끄는 리버티 대학교는 이제 남침례교단과 관련을 맺었다. 그 학교는 1999년 11월 버지니아 남침례교 보수주의자 모임에 공식적으로 가입하였다(Religion Today, 1999년 11월 17일). 새로운 관계는 남침례교회 학생들로 하여금 리버티 대학교에 다니도록 격려하고 그 학교에 대한 47,000개의 남침례교회들의 재정적 후원을 가능하게 만든다. 남침례교단 총회장 페이지 패터슨은 리버티 대학교의 남침례교단 가입은 “우리 모두에게 기도의 응답이다”라고 말했다. (Calvary Contend- er, 1999년 12월 15일.)

합동신학교

합동신학교 학우회는 개교 15주년 기념 찬양 축제에 총신대, 장신대 신대원 학우를 초청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동신학교의 김명혁 교수는 “그 동안 분리에 분리를 거듭했던 총신과 장신, 그리고 합신의 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 마음을 모으고 목소리를 합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니 감격스러울 뿐 . . . 역사는 종종 젊은이들의 순수한 헌신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한국교회 안에 이미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나 다름 없다”고 말하였다(기독신보, 1995년 11월 18일, 17쪽).

총신대학교

1997년 5월 3일 총신대학교(총장: 김의환 목사)와 장신대학교(총장: 서정운 목사) 교직원 친선 체육대회가 장신대에서 열려 학교간 친선을 도모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이날 행사에는 양교에서 150명이 참가했다고 한다(기독신문, 1997년 5월 14일, 21쪽).

4. 복음주의 인물들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빌리 그레이엄의 ‘금세기의 책’인 내 모습 그대로(Just As I Am)라는 책의 서평에서, 컬럼비아 국제대학교 명예총장 로벗슨 맥퀼킨은 다음과 같이 썼다: “빌리 [그레이엄]의 접근 방식이 모든 사람들, 즉 로마 천주교인, 그리스 정교회 교인, 자유주의자에게 열려 있고 따뜻하다는 것은 . . . 분명하다. 근본주의자들 외의 모든 사람에게[!]. 에큐메니칼 포용주의에 대한 그의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중심주제이다. 그래서 그의 신학적 혈육인 근본주의자들은 그를 따르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이 그레이엄과 분리된 것은, 한 부류로서의 근본주의자들이 다른이들보다 더 위선적이고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정직하다. 그들이 방법론에 관하여 그렇게 엄격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 그들은 영적 사역에서 불신자들과 협력하는 것은 죄악된 불순종이라고 믿는다. . . . 빌리는 기독교계를 나누는 많은 교리들을 힘써서 무시하고, 연합하는 것을 전공한다. . . . 그의 강조점은 신앙의 순결성보다 그것의 일체성에 있다. . . . 빌리는 신학적 차이점들을 의식적으로 피하거나 낮춘다” (Christianity Today, 1997년 8월 11일; Calvary Contender, 1997년 9월 15일).

로버트 슐러와의 1997년 5월 31일 텔레비젼 대담에서 빌리 그레이엄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 혹은 그리스도를 아는 모든 사람, 그들이 그것을 의식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라고 생각한다. . . . 그들은 심지어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고 있지 못할지도 모르나 그들은 그들의 마음 속에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빛으로 향하며, 나는 그들이 구원을 받았고 그들이 우리와 함께 천국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 . 그들은 그들의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었고, 그들은 주위의 사회와 전혀 다른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다”(Foundation, 1997년 5-6월호).

로버트 코팔(Robert Kofahl)은 그의 발언을 이렇게 논평했다: “그레이엄 박사가 표현한 교리는 . . . 정확히 교황과 로마 천주교회의 에큐메니칼 연구소가 수년 동안 가르쳐 왔던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우상숭배를 행하고 성경이나 은혜의 복음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이름과 구속 사역에 대한 지식이 조금도 없는 어떤 이교도도, 만일 그가 ‘좋은 사람’이고 그가 믿는 바가 무엇이든지 그 믿는 바에 있어서 신실하다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는다’는 관념이다”(Calvary Contend- er, 1997년 10월 15일).

오 디모데(O Timothy)의 편집자 데이빗 클라우드는 빌리 그레이엄의 문제점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빌리 그레이엄은 천주교 대학들에서 명예 학위들을 받았고 천주교회의 복음이 자기가 전하는 복음과 동일하다고 말했다. 그는 수천명의 회심자들을 배교적 교회들[천주교회와 자유주의 교회들]에 넘겨주었다. 그는 교황이 전도자요 도덕적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천주교회 주교들을 그의 강단에 초청하고 그의 결신 초청시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축복하게 한다. 그는 유아 세례시 기적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옥이 문자적으로 불붙는 고통의 장소라고 믿지 않는다. 그는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라고 허용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현대주의자들[자유주의자들]을 칭송한다. 그는 변질된 성경 번역본들을 장려한다. 그는 동정녀 탄생이 기독교 신앙의 필수적 부분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성경이 무오(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변호하기를 거절한다. 그는 이단적인 로버트 슐러의 복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에 동의한다. 그는 신학이 더 이상 자기에게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하지 않는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9월 15일.)

2000년 1월 2일 폭스(Fox) 뉴스 인터뷰에서, 토니 스노우는 빌리 그레이엄에게 질문했다: “귀하께서 천국에 도착하실 때, 누가 먼저 말씀하실 것입니까, 귀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십니까?” 그레이엄은 대답했다: “제가 거기 도착할 때, 예수께서 저를 환영한다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가 ‘잘하였다, 우리의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그가 ‘너는 잘못된 곳에 있구나’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스노우: “귀하는 귀하가 잘못된 곳에 있다는 말씀을 들을지도 모른다고 정말 염려하십니까?” 그레이엄: “예, 왜냐하면 저는 의로운 사람이지 못했고 지금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제가 제 개인의 삶에서 속하지 않는 대(臺) 위에 저를 올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를 실제의 저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저를 생각하는 것 같은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신문들과 잡지들과 텔레비젼은 저를 성자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테레사 수녀가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매우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Calvary Contender, 2000년 1월 15일.)

우리가 성자가 아니며 심히 부족한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을 만하지 못한 종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우리의 행위에 근거하듯이 표현된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 예수님이 우리의 의요 우리의 구원이시다!

R. L. 히머스 박사는 크리스토퍼 케이건 박사와 함께 쓴 죽어가는 국가를 위한 설교라는 책에서 “통계에 의하면, 그레이엄 박사의 전도 대회들의 결실로서 교회들에 등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숫자들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히머스와 케이건은 그레이엄의 전도 대회에서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했다고 주장하는 자들 중에 어떤 교회에 교인이 되어 머무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양한 통계 조사들을 인용한다. 그들은 또한 주장하기를, 그레이엄의 전도 대회들은 그 대회들이 열린 지역들의 도덕적 분위기를 도와주지 못했다고 한다.

히머스는 한 때 그레이엄의 열렬한 후원자이었다. 그러나 그레이엄은 낙태와 같은 죄에 대해 강한 공적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동성애에 대해 사람이 동성애자로 태어난다고 말함으로써 변명했다. 마침내 히머스는 그레이엄의 촬스 피니 스타일의 ‘결심’ 신학과, 유대인들과 회교도들과 다른 비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적 신앙 없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그레이엄의 견해로 인해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히머스는 위의 책에서 이렇게 쓴다: “나는 빌리 그레이엄의 사역을 믿었다. 나는 그를 위해 매일 기도했다. . . . 나는 빌리 그레이엄의 추종자이었다. . . . 나는 빌리 그레이엄을 신뢰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속임을 당했다.” “그레이엄 박사가 교황을 위대한 도덕적 지도자요 전도자라고 찬양하고 테레사 수녀와 그 동료들을 기독교의 고상한 모범들로 말했을 때, 나는 이 천주교인들을 바라보고 그들이 결국 좋은 그리스도인들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빌리 그레이엄은 그들이 그렇다고 말했다. 우리는 결코 그의 판단이나 지도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각별히 빌리 그레이엄을 만났고 그와 대화하였다. 나는 심지어 그와 함께 전문적 사진들을 몇 장 찍기도 하였다. 나는 내가 신복음주의의 결심주의(decisionism, 사람이 결심하면 믿었다고 간주하는 생각)의 오류들을 깨닫기 시작하기 전까지 매우 확실하고 매우 강하게 그레이엄 박사의 영향 아래 있었다.” (Christian News, 1999년 9월 27일, 1, 18쪽.)

미국의 남침례교회는 침례교세계연맹의 주요 회원 교단이다. 데스몬드 투투는 1998년 침례교세계연맹 모임에서 연설했다(Calvary Contend- er, 1998년 8월 15일). 침례교세계연맹의 1999년 10월-12월호 뱁티스트 월드(Baptist World)는 빌리 그레이엄을 “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전도자”라고 높여 말한 글을 실었고, 급진적 자유주의자 본훼퍼와 마틴 루터 킹과 오스카 로메로와 같은 이들을 “20세기의 선지자들”이라고 불렀다. 빌리 킴[김장환 목사]은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침례교세계연맹의 회장으로 지명되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12월 15일.) 혼란스러운 일들이다.

빌 브라이트(Bill Bright, CCC 총재)

1998년의 ‘금식과 기도’ 집회는 미션 아메리카와 대학생 선교회의 공동후원을 받았다. 참석자들은 에큐메니칼 유명인사들인데, 빌 매카트니(프로미스 키퍼스), 프랭클린 그레이엄, 돈 아규(미국 복음주의자 협회), 폴 시더, 케이 아서, 빌과 보넷 브라잇, 애드리안 로저스, 팻 로벗슨, 토마스 트래스크(하나님의 성회) 및 데이빗 브라이언트가 포함되어 있다. 빌리 그레이엄과 존 퍼킨스와 빌 브라잇은 명예공동회장이다. 위에 열거된 다른 이들은 실행위원회에 속해 있다. 스티브 그린, 로벗슨, 시더 그리고 브라잇은 한 시간을 인도한다. 다른 시간은 로저스와 매카트니에 의해 인도된다. 그것은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위성중계로 미국 전역에 생방송된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10월 1일).

제이 아이 패커(J. I. Packer)

복음주의 신학자 J. I. 패커는 “2천년대 문앞에서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1995년 대회에서 근본주의자들을 다음과 같이 비평하여 말했다: “보수적 개신교인들과 동방 정교회 교인들과 주류 로마 카톨릭 교인들은 내가 말한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연합할 수 있는가? 구원 과정의 세부 사항들과 그 과정에서의 교회의 위치에 관한 우리가 이미 아는 그리고 계속되는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연합할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다. . . . 확실히, 우리의 세 전통들 내에서 근본주의자들은 이 일에 우리와 연합할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마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긍휼이 개념적으로 정확한 사람들 위에 자동적으로 머물며, 개념적 정확성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로부터 자동적으로 보류되는 것처럼, 논쟁적 정통주의(contentious orthodoxism)의 길을 따르는 것이 근본주의자들의 길이기 때문이다.”

포커스 언 미션즈의 회장 레이 아담스는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패커의] 욕설어린 비난은 이 유명한 신학자와 성경 강해자를 위해 좋은 징조는 아니다. 슬프게도, 그는 오류와 분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을 따르기보다 많은 무리와 함께 행하기를 선택한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논쟁적 정통주의의 길’이라고 정의될 수 없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9월 15일.)

에프 에프 브루스(F. F. Bruce)

스코틀랜드 신학자 에프 에프 브루스는 복음주의자로 칭송을 받았으나, 많은 자유주의 신학적 견해들을 가지고 있었다(Calvary Contend- er, 1990년 11월 15일). 그는 신정통주의자 칼 바르트를 루터와 칼빈과 웨슬레와 동등하게 ‘그리스도의 종’으로 보았다. 그는 바르트의 하나님이 성경의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그는 성경의 어떤 파괴적 고등비평을 받아들였고, 바울이 여성의 지도자 역할들을 제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브루스는 “신복음주의자들이 그것 때문에 비평되는 포용주의, 예를 들어 빌리 그레이엄의 포용적 전도대회들에서 아무런 잘못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무디 먼슬리 1986년 6월호는 그를 ‘복음주의’ 지도자로 높여 말하였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8월 1일.)

제리 팔웰(Jerry Falwell)

제리 팔웰은 자신을 근본주의자라고 말하는 미국의 한 유명 인사로서 리버티 대학교와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근래에 그는 신복음주의자들과 친근히 지내왔고 빌리 그레이엄과도 가까와졌다. 1997년 5월 3일 리버티 대학교 제24회 졸업식에서 빌리 그레이엄은 연설을 하였다(National Liberty Journal, 1997년 6월호).

주의 검(Sword of the Lord) 편집자 쉘톤 스미스는 빌리 그레이엄과 제리 팔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둘은 다 근본주의자들로 시작하였다! 그 둘은 다 큰 성공을 이루었고 국제적 인물로 부상되었다! 그 둘은 다 그들의 사역의 거점을 그들의 근본주의적 기지로부터 보다 넓은 복음주의자들의 진영으로 변경하였다. 표준과 분리의 원리들은 사라졌다! 타협은 규범이 되었다! (50년대에) 그레이엄에 의해 채택된 에큐메니칼 태도는 이제 리버티 대학교에서 기정화된 경기 방법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진리와 오류는 자유로이 섞인다. 바른 교리는 교제를 위하여 보류된다. 한때 성경적 권위의 강한 목소리가 있었던 곳에, 이제는 적응과 편의의 정신이 우세하다” (Calvary Contender, 1997년 6월 15일).

씨 에스 루이스(C. S. Lewis)

1963년 씨 에스 루이스의 죽음 이후, 그의 책들의 판매는 연간 2백만불에 이르렀고, 그는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의 일부 독자들에 의하여 최근에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가라는 등급을 얻었다. 그러나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8년 9월 7일자는 그의 사상의 ‘약한 점들’로서 속죄에 대한 그의 개념, 그가 죄의 용서에 대해 논의할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언급을 한 적이 없다는 점, 세례중생론에 대한 그의 환대, 그리고 성경 영감에 대한 그의 비(非)무오적(無誤的) 견해, 거기에 덧붙여 연옥과 및 불신자로 이 세상을 떠난 일부 사람들의 최종적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긍정 등을 열거하였다. 마틴 로이드-죤스는 루이스가 과연 크리스챤이었는지 의심하였다. 루이스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천주교인들이었다. 그는 또한 몰몬교인들에게 좋은 영접을 받았다. 그는 선하게 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중세 시대의 개념을 가르쳤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구원을 받기에 충분할 만큼 선하게 되도록 도우실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입된 은혜에 의한 구원은 전혀 은혜가 아니다(Christian News, 1998년 6월 29일). 루이스의 신학은 치명적 결함이 있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9월 15일.)

토니 캠폴로(Tony Campolo)

미국 CNN 방송의 크로스파이어(Crossfire) 프로그램에서, 토니 캠폴로는 예수께서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기를 거절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예수께서 오직 그리스도인들 속에만 살아계신다고 확신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오늘날 복음주의자들 중의 한 대표적 인물이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8월 15일.)

김의환 박사

1997년 5월에 열렸던 고(故) 박형룡 박사의 신학을 평가하는 ‘제1회 죽산 세미나’에서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총장 한철하 박사는 박형룡 박사의 신학을 기독교의 정통적 교리 사상을 전승한 ‘사도적 신학,’ ‘바른 신학’이라고 평가하였다. 한편 총신대학교 총장인 김의환 박사는 “박 박사는 선교사들이 전수한 신학을 보다 체계화하고 한국교회의 현장에서 보수신학을 수호하고 전수했으며 메이천의 ‘교회론적 취약점’을 극복, 결과적으로 우리 교단[합동측 교단]을 만들고 지켜왔다”고 평가하였다. (기독신문, 1997년 6월 4일, 7, 21쪽.)

늦게나마 박형룡 신학의 의의와 가치를 인식하는 기회가 되었다면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다. 박형룡 박사는 하나님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노력한 주의 충성된 종이었고 자유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 그리고 신복음주의 바람에 대처하여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힘써 싸웠던 분이셨다.

그러나 “메이천의 ‘교회론적 취약점’”이라는 김의환 박사의 표현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박형룡 박사는 ‘한국의 메이천’이라고 불리웠다. 그것은 그가 메이천 박사처럼 자유주의를 철저하게 비평하고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보수하고 변호하였기 때문이었다. 메이천이나 박형룡의 사상을 아는 자라면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론은 어느 분야보다 중요하였다. 박형룡 박사는 메이천처럼 자유주의에 대한 비평 뿐만 아니라 또한 복음주의의 타협적 입장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평하였다. 그는 신복음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과 우호적 관계를 가지고 빌리 그레이엄과 같이 그들과 협력적 전도활동을 하며 배교적인 교단들을 떠나지 않고 머물고 있음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박형룡, 신복음주의 비평 <1971>, 26-58쪽).

그러므로 박형룡 신학에 대한 평가는 그가 매우 중요하게 여긴 이러한 점을 바르게 다루지 않고서는 바르게 이루어질 수 없다. 오늘날 예장합동측 목사들이 박형룡 박사의 제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정작 그 교단과 신학교에서는 그의 보수주의적 정신, 분별력 있는 바른 입장은 사라져가고 있다.

5. 복음주의 교단들

미국, 남침례교회

미국의 남침례교단은 침례교세계연맹에서 가장 큰 회원교회이다. 침례교세계연맹 회원 교회들의 다수가 세계교회협의회와 관계가 있다. 세계교회협의회에서 침례교세계연맹의 회원 교회들은 약 15퍼센트에 이를 것이다. 빌리 그레이엄은 여섯 번의 침례교세계연맹 대회에서 연설하였고 모든 사람에게 그 단체를 후원하라고 격려하였다. 또 1995년 침례교세계연맹은 그에게 특별상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Baptist World, 1997년 7-9월호.) 그러나 세계교회협의회나 침례교세계연맹은 자유주의 이단을 배격하지 않고 포용하는 배교적 단체들이다.

1998년 3월 실행위원회 모임에서, 침례교세계연맹 총재 닐슨 패니니는, “신학은 때때로 우리를 분열시키지만, 선교와 전도는 우리를 연합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Baptist World, 1998년 7-9월호). 빌리 그레이엄이 수년 전에 그와 비슷한 발언을 했었다. 빌리 그레이엄과 코리타 스카트 킹은 1999년 1월 9-11일에 미국 애틀란타에서 열릴 ‘인종차별반대 국제침례교회 지도자회의’의 공동회장이 될 것이다. 미국의 남침례교단은 이 배교적 침례교세계연맹의 회원교단이다. 미국에서 근본주의자라고 알려진 제리 팔웰은 최근에 남침례교단에 가입한 바 있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8월 15일.) 1995년에 40,039교회, 1,566만 교인을 가진 세계 제1의 대교단인 미국의 남침례교단 안에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 교단이 배교적 침례교세계연맹의 회원교단이라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수천명의 남침례교회 목사들과 수십만명의 남침례교회 평신도들은 프리메이슨(Freemason)의 회원들이다. 프리메이슨은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행위구원을 가르친다. 프리메이슨은 몰몬교와 똑같이 반(反)기독교적이다(Christian News, 1998년 6월 1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측)

1997년 7월, 예장합동측, 고신측, 통합측 3개 교단의 전국 남전도회 혹은 남선교회 연합회 임원들은 대구에서 제4차 연석회의를 열었는데, 그들은 결의문에서 서로 사랑할 것을 다짐하면서 첫번째 내용으로 교단 간의 화합과 일치운동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기독교보, 1997년 7월 12일, 1쪽.) 각 교단들의 지도적 장로들이 오늘날 기독교계의 배교의 문제점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다.

예장합동(총회장 길자연 목사)과 예장통합(총회장 유의웅 목사)은 1999년 9월 제84차 총회시 개회예배를 함께 드리고 성찬식을 합동으로 거행하기로 계획한다. 또한 양 교단은 이에 앞서 양 교단 화해와 연합의 상징으로 내년 중 구국기도회를 공동으로 개최한다. 양 교단 임원진은 이외에도 합동, 통합의 신학 교류를 위해 ‘총신대-장신대 신학포럼’을 열자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소속 교단에서 서로 노력키로 했으며, 1999년 1월에 개최되는 양 교단의 신년하례회에는 상대방 총회장을 초청하여 축사를 하도록 했다. (기독교보, 1998년 12월 26일, 2쪽.)

1999년 1월 예장통합측 총회(총회장: 유의웅 목사)는 예장합동측 총회장 길자연 목사(서울 신림동 왕성교회)를 초청한 가운데 신년하례회를 가졌다.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이날 하례회에서 총회장 유의웅 목사는 설교에서 “우리가 하나되는 것은 믿음과 사랑을 녹여 연합과 일치로 모일 때만 가능하다”면서 “앞으로 합동측과 함께하는 여름 구국기도회와 가을 총회 개회예배를 통해 한국장로교 일치와 연합에 도움이 되며 세계 선교와 봉사에 헌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축사에 나선 예장합동측 길자연 총회장은 “하례회 초청에 감사하고 장족의 발전이 있기를 바란다”면서 “통합과 합동이 이심전심으로 장로교 연합과 일치 운동을 벌여 올해는 하나로 되어가는 분기점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독교연합신문, 1999년 1월 10일, 15쪽.)

1999년 예장 총회 제83회기 총대를 대상으로 한 전화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80%이상이 예장통합과의 강단 교류와 신학 교류, 연합 사업을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또 64%가 통합측과의 교단 통합에 대해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독신문, 1999년 3월 3일, 1쪽.)

1999년 6월 27일 주일오후예배때 예장합동측의 역사적 교회인 승동교회(박상훈 목사)와 예장통합측의 대표적 교회인 영락교회(이철신 목사) 간의 강단교류가 양교단의 분열 40년 만에 승동교회에서 이루어졌다. 영락교회의 이철신 목사와 장로 30여명과 성가대원 100여명이 승동교회의 오후 3시 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를 인도하였다. 또 8월 22일에는, 승동교회가 영락교회를 방문하고 예배를 인도할 예정이라고 한다. (기독신문, 1999년 6월 30일, 19쪽.)

얼마 전 합동측 총회장 길자연 목사의 왕성교회와 통합측 총회장 유의웅 목사의 도림교회가 이미 이런 식으로 강단교류를 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새로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예장합동측이 총회적으로 불건전한 교단과 강단교류를 금한다는 결의를 한 바가 있고 지금까지 그것을 지켜왔기 때문에, 지난 번의 총회장의 행위나 이번 승동교회의 행위는 거룩한 총회의 결의를 무시한 무질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러한 강단교류가 합당한 일이라면, 먼저 총회적 논의를 통해 총회 결의를 수정해야 했을 것이다.

2000년 3월, 한국기독교 교단총무회(회장: 김상학 목사)는 한국교회 백주년 기념관에서 회의를 열고 교회연합운동에 최선을 다하기로 하고, 교회협과 한기총의 연합 움직임에 적극 협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교단총무회는 회장에 김상학 목사(예장통합), 부회장에 서성수 목사(예장합동), 총무 심군식 목사(예장고신), 서기 한창영 목사(예장합동보수), 회계 박봉규 목사(예장개혁합신), 감사에 양회협 목사(침례교), 이요한 목사(감리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독교연합신문, 2000년 3월 19일, 1쪽.) 오늘날 자유주의가 없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수교단 목사들의 입장은 이전보다 더욱 흐려졌다.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측)

1997년 예장대신측의 전총무인 조순태 목사는 “한국교회 연합운동”이라는 글에서 사회가 정치적, 경제적, 윤리적으로 위기상황일 때 교회 연합이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면서 “내가 마땅치 않게 여기는 교파도 같은 사도신경을 믿고 있으며 . . . . 교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기독교보, 1997년 6월 21일, 3쪽). 그러나 그의 주장은 심히 정신없고 무책임하고 잘못된 것이며, 그런 글이 소위 한국의 보수교단들로 알려져 있는 대신측 교단의 직전 총무에 의해서 쓰여졌고 또 고신측 교단의 기관지에 실렸다는 것은 대신측과 고신측의 넓어진 노선의 증거로서 슬픈 일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측)

1997년 예장고신측 총무 심군식 목사는 “연합운동의 자세와 방향”이라는 글에서 사회적 문제와 사이비 이단이 판을 치는 현실에서 한국교회는 보수와 진보의 두 성향을 구별하여 힘을 약화시키지 말고 일치단합된 연합운동과 사업으로 현실에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기독교보, 1997년 7월 5일, 3쪽).

예장고신측 총회임원회(총회장: 조긍천 목사)는 2000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될 한국 장로교 대회에 교단적으로 참가하기로 했고 한국의 장로교가 함께하는 연합행사에 교단이 적극 참여하여 장로교 연합과 성장에 이바지하기로 하였다(기독교보, 2000년 4월 1일, 1쪽).

6. 기타

진화론 포용

크리스챤 뉴스 1998년 7월 6일자는 신비주의(occult)에 대한 데이브 헌트의 최근의 책을 여러 곳 인용하면서, 천주교회, 교황,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빌리 그레이엄, 프로미스 키퍼즈 등 기타 많은 교회 단체들이 오늘날 진화론(進化論)과 보조를 함께함을 보여준다. 오늘날 6일 창조를 옹호하는 자들은 거의 없다. 제임스 답슨 같은 복음주의자 조차도 유신론적 진화론(창조와 진화론을 함께 믿는 견해)을 위해 문을 활짝 열어 놓은 휴 로스의 책들을 선전하여왔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8월 1일.)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 포용

복음주의 인사들 다수가 로버트 슐러에 대해 포용적이며 단상에 같이 나타난다. 그러나 로버트 슐러는 자신의 자기존중의 철학에 일치시키기 위해 여러 성경교리들을 재해석하였다. 그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자기존중을 제공하는 예수이다. 그의 복음은 부정적 자기 개념들을 긍정적 개념들로 대치하는 것이다. 슐러에게, 죄란 단순히 자기존중의 결핍이다. 그에게 가장 큰 악은 성경적 방식으로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의 자기존중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슐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믿는 보편구원론자다. 그의 목표는 각 사람으로 하여금 이 사실을 이해하고 누리도록 돕는 것이다. 그는 노만 빈센트 피일의 제자이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7월 15일.)

로버트 슐러의 ‘성공적 교회 지도자 학교’는 1999년 1월에 다음과 같은 연사들을 세웠다: 토니 캠폴로, 빌 하이벨즈, 루이스 팔라우, 죤 맥스웰, 윌리엄 베네트(천주교인), 마이클 모인한 신부, 그리고 한국의 김선도 감독 등이다. (Christianity Today, 1999년 10월 4일; Calvary Contender, 1999년 11월 15일.)

결론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문제는, 비록 20세기 초엽과 중엽에 미국 교회에서 일어난 문제이었지만,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경험될 수 있는 문제이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보수적 교회들은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어떤 신학적 탈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적 탈선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한 신학적 탈선들은 이미 자유주의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고(故) 박형룡 박사는 신복음주의를 ‘신자유주의 내지 신이단운동’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던 것이다(박형룡, 신복음주의 비평, 47쪽).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에 대한 바른 개념은 그러한 신학적 변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제의 문제에 있다. 그것은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의 문제이다. 오늘날 복음주의는 자유주의자들을 강하게 비평하거나 배격하지 않는다. 복음주의자는 자신의 교단이 고의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할 때도 그 교단 안에 머물러 있으며 그 자유주의자들과 교제하고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성경에 밝히 계시되고 전통적으로 믿어온 진리들에 대한 확신이 없고,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싸우려는 마음이 약하며, 성경적 분리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그 교훈을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이런 태도는 분명히 성경적 분리의 교훈을 어기는 일이요 주께 대한 불성실과 불순종이다. 그러므로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현대 교회의 배교와 불신앙에 대해 타협하는 비성경적 입장에 불과하다.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잠언 28: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잭 스티븐스는 오하이오 바이블 펠로우쉽 비지터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신복음주의자의 마음가짐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복음으로 세상을 접촉하는데 관심을 가지며 그것이 더 빠를수록 더 좋다고 본다. 또 그는 그것을 하기 위해 그 밖의 거의 모든 것을 희생하려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에 있어서, 그는 너무 지나치게 많은 것을 포기하며, 그가 진전시키려고 하는 바로 그것을 파괴한다. 그는 외적인 성공을 거두며 참으로 형통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매우 진실하며 자기가 바르다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의 형제이다. 그러나 그는 매우 잘못되어 있다”(Calvary Contender, 1998년 3월 1일).

오늘날 우리 나라의 많은 보수 교회들은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분별력 없는 많은 보수적 목사들은 화평과 일치와 사랑을 표방하면서 성경적 분리의 교훈을 확신하고 지키려 하는 자들을 비난한다. 많은 목사들이, 비록 하나님의 다른 일들에 대해 열심이 있어 보이나, 교회의 교리적 순결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순결한 교회를 구원 계획의 목표로 삼으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큰 잘못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명백히 이단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기독교는 마땅히 자유주의 이단을 배격해야 하며, 자유주의자들을 참된 교회의 교제로부터 제명 출교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는 신복음주의는 악에 대한 타협이며 주께 대한 불충성이다. 오늘날 배교와 타협과 혼동이 점점 가득해지는 때에, 하나님의 뜻은 배교로부터의 명백한 분리이다.

성경은 분명히 이단과 오류로부터의 분리를 명한다.

로마서 16:17,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고린도후서 6:14-17,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 . .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에베소서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요한이서 10, 1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유다서 3, “. . . 성도에게 던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제7부:

근본주의의 입장

목차

서론 / 325

1. 역사적 고찰 / 326

2. 개념의 정의 / 332

3. 성경적 평가: “분리의 원리” / 335

4. 역사적 후원 / 351

5. 잘못된 비평들에 대한 비평 / 355

결론 / 369

서론

오늘날 근본주의라는 말은 말하는 이의 분별력이나 입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일찍부터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를 근본주의적이라고 비난해 왔다. 감리교 신학교 교장이었던 홍현설 박사는 ‘극단적인 근본주의’가 한국 교회 내의 지배적인 신학적 추세이었다고 말했다(간하배, 현대신학해설, 153쪽).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인 김재준 박사는 한국의 ‘엄격한 근본주의’ 신학 교육을 지적하고 공격하면서 “객관적 비판의 여지가 없이 일정한 근본적인 신조들의 주입이요 . . . 교회 지도자들의 시야(視野)는 극히 타계적(他界的)이며, 강한 율법주의와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었다”고 말했고, 장로회 신학대학장이었던 이종성 박사는 근본주의를 “신바리새주의”라고 불렀다(위의 책).

자유주의자들의 이런 비평과 같이 한국의 보수주의가 불건전하고 바리새주의적인 ‘극단적’ 근본주의인가? 근본주의는 무엇이고 극단적 근본주의는 무엇인가?

한편, 보수주의 진영에서도 빈번히 근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볼 수 있다. 한국교회가 존경한 고(故)박윤선 박사도, 근본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구원을 더욱 강조하며, 성경을 비교적 단편적으로 보고 체계적으로 깊이 보지 못하며,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의 교리를 깊이 보지 못하며, 권위주의적이고 반(反)지식주의적인 경향이 있다고 비평한 적이 있다(“개혁주의 소고,” 신학지남, 1979년 가을, 13-24쪽).

근본주의가 과연 이런 사상인가? 만일 그렇다면, 보수적 장로교회들은 근본주의를 단호히 거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 근본주의에 대한 박윤선 박사의 비평은 침례교회 신학이나 세대주의에 대한 비판에 불과하다. 근본주의의 핵심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침례교인들도 있고 세대주의자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근본주의자들 가운데는 많은 장로교인들도 있다. 근본주의는 결코 침례교회 신학이나 세대주의와 동일시 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근본주의는 그것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무엇이다. 근본주의의 본질은 다른 데 있다. 그러면, 과연 근본주의는 무엇이며, 그것들은 성경적으로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가?

1. 역사적 고찰

근본주의의 시작

‘근본주의’는 19세기말 미국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1875년 제임스 브룩스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성경공부모임은 예언 사경회로 발전했다. 이 모임은 1883년부터 1897년까지 1884년을 제외하고 매년 나이아가라에서 모였으므로 ‘나이아가라 예언사경회’로 알려지게 되었다. 강사들 중에는 제임스 브룩스 외에 윌리암 어드만, 아도니람 고든, A. C. 딕슨, 허드슨 테일러, A. T. 피얼슨 등이 있었다.

이 예언사경회는 1878년 부룩스의 지도 아래 14개 조항의 신조를 선언하였는데, 그것은 후에 ‘나이아가라 신조’라고 불리웠다. 그 내용은 ① 성경 영감, ② 삼위일체, ③ 아담의 타락과 전적 부패, ④ 원죄와 사람의 전적 부패성, ⑤ 중생(重生)의 절대 필요성, ⑥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 ⑦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죄책(罪責)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 ⑧ 구원의 확신은 모든 신자의 특권, ⑨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중심 되심, ⑩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모든 자들로 구성됨, ⑪ 성령은 우리들의 영속적 위로자이심, ⑫ 성령을 따라 삶, ⑬ 신자와 불신자의 죽은 후 상태와 최종적 부활, ⑭ 심판의 때가 가까움과 그리스도의 전천년적 재림 등이었다(David O. Beale, In Pursuit of Purity: American Fundamentalism since 1850 <1986>, pp. 23-33, 375-379).

그 후, 1910년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는, ① 성경의 무오성(無誤性), ②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③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④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⑤ 그리스도의 기적들의 사실성의 교리들을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본질적 내용’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1916년과 1923년 총회에서 두 번이나 재확인되었다(A Brief History of the Bible Presbyterian Church and Its Agencies, ed. Margaret G. Harden, p. 15).

이러한 선언은, 19세기 후반 신학교들과 교회들에 불신앙적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한 것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이 다섯 가지 교리들을 부정하였다. 1890년, 촬스 브릭스가 독일 유학후 당시 북장로교 소속 유니온 신학교 교수로 들어와 공공연히 성경의 오류를 주장했을 때, 1892년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는 그를 징계했었다. 그러나 유니온 신학교는 총회에서 독립하여 브릭스를 계속 채용하였다. 그러므로 장로교회 총회는 이런 자유주의 신학 사상에 대한 경고로 다섯 가지 근본 교리들을 천명한 것이었다.

또한, 1910년부터 1915년까지 근본 교리들: 진리에 대한 증언이라는 12권으로 된 책자들이 무료로 약 300만부 배포되었다. 이 일은 캘리포니아주의 부유한 석유 자본가 형제 리만 스튜어트와 밀톤 스튜어트의 약 20만불의 헌금으로 가능하였다. 이 책자들의 내용들은 주로 진화론과 성경의 고등 비평에 대항하여 성경의 근본적 교리들을 변호하는 것들이었다(C. T. McIntire, “Fundamentalism,”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pp. 433).

1920년 7월 1일, 컬티스 리 로즈는 미국 뉴욕의 침례교회 주간신문 워치먼 이그재미너(Watchman-Examiner) 사설에서 ‘근본주의자’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위해 싸우는 자를 ‘근본주의자’라고 묘사한 것이었다(박형룡, “근본주의,” 신학지남, 25권 1호 <1960>, 13쪽).

1920년대의 근본주의

미국 교회에서 1920년대는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신학적 논쟁의 시대이었다. 제이 그레샴 메이천은 1923년에 출간한 그의 책에서 말하기를, “특히 종교의 영역에서 현대는 논쟁의 시대이다. 항상 기독교로 알려져 왔던 저 위대한 속죄적 종교가 완전히 다른 형태의 종교적 신념과 싸우고 있는데, 그 종교적 신념은 전통적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일층 더 파괴적일 뿐이다. 이 현대적 비(非)속죄적 종교는 ‘현대주의’ 혹은 ‘자유주의’라고 불리운다”고 했다(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p. 2).

예를 들어, 1923년 미국 북장로교회 안에는 소위 ‘어번 선언서’라는 것이 작성되었고 곧 1293명의 목사들의 서명을 받았는데, 그것은 1910년, 1916년, 1923년 3차례나 총회가 선언하고 재확인한 5개의 근본 교리들을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 본질적이지 않고 단지 이론들(학설들)일 뿐이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어번 선언서는 또한 성경 무오(無誤)의 교리가 성경 숭배에 빠지기 쉽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장로교회 총회 안에는 서로 상반된 두 개의 입장이 있었고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해 총회는 이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거나 어번 선언서의 서명자들을 징계하지 않았다. 교회들은 영적으로 잠들어 갔고, 진리의 싸움보다 평화를 원하게 되었다.

1924년과 1925년 미국 북장로교회의 보수 신학의 마지막 보루였던 프린스턴 신학교 안에서는,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한 중부 대서양 신학교 협의회와 관계를 단절하고, 보수적인 복음주의 학생 연맹 결성에 참여하는 문제로 갈등과 논쟁이 일어났다. 메이천과 다수의 학생들과 운영이사회는 보수주의적 강경 입장을 취하여 학생회의 그러한 조치를 환영하였으나, 교장 로스 스티븐슨은 그것에 불만했고 스티븐슨의 동료 교수들과 특히 학생처장 촬스 어드만, 그리고 재단이사회는 스티븐슨의 온건하고 포용적인 입장을 지지하였다고 한다.

이 때, 포용주의적 총회 정치가들은 신학교의 운영이사회와 재단이사회를 통합시킴으로써 자유주의적 세력을 우세하게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프린스턴 신학교는 포용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갔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1929년 메이천을 비롯하여 로버트 딕 윌슨, 오스왈드 앨리스, 코넬리어스 반틸은 프린스턴 신학교를 떠났고 다른 이들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였다(Harden, pp. 14-23).

1930년대의 근본주의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싸움은 외적으로 근본주의의 패배로 끝났다. 미국 내의 역사적 대교단들은 자유주의를 제거하지 않고 자유주의를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30년대의 근본주의는 포용적이고 자유화되고 변절된 대교단들로부터 분리(分離)하는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즉, 1930년대의 근본주의는 ‘분리’라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이 분리는 자유주의의 포용, 자유주의자와의 교제를 양심적으로 용납할 수 없었던 신앙적 동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소수의 신실한 목사들은 대교단들의 입장과 방향에 찬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母)교단들을 떠나기도 하였고 또 어떤 이들을 모교단으로부터 쫓겨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미국에 많은 독립 교회들과 작은 새 교단들이 생겨났다. 1930년에 조직된 미국 근본주의 독립교회 협의회(IFCA), 1932년의 정규 침례교회 총회(GARBC), 1936년의 미국 장로교회(Presby- terian Church of America) 등이 그러하다.

미국 장로교회의 설립을 잠시 살펴보자. 1932년 미국 북장로교회에서는 “선교를 재고함”이라는 보고서가 출판되었는데, 그 내용은 매우 자유주의적이었다. 그 보고서는 19세기의 선교 방법의 전면적 수정을 주장했고, 선교사들이 피선교지의 문화나 종교를 비판하지 말고 존중하며 타협적으로 선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33년 메이천과 그의 동료들은 총회의 선교 정책이 성경적으로 바르게 되기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장로교 해외 독립선교부’(IBPFM)를 설립했다.

그러나 1934년 총회는 독립선교부에 관련된 자들에게 그 선교부로부터 탈퇴할 것을 명령했고, 1934-35년 동안 총회의 명령에 복종치 않았던 7명의 목사들이 각 노회에서 면직을 당하였다. 그러나 1936년,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는 메이천과 그 동료들에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그들의 상소를 기각하였다. 그러므로 1936년은 보수적 전통을 가졌던 미국 북장로교회가 실로 ‘배교적(背敎的)’ 교회가 된 해이었다.

그 해, 미국 장로교회라는 분리된 작은 교단이 설립되었다. 1937년, 전천년설의 옹호와 금주(禁酒), 금연(禁煙)의 미국 장로교회 전통을 지키기 원한 목사들이 미국 장로교회에서 나와 따로 성경 장로교회(Bible Presbyterian Church)와 페이스(Faith) 신학교를 세웠다. 1939년, 미국 장로교회는 정통 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Beale, pp. 317-19).

신복음주의의 출현

1940년대에 들어와 ‘신(新)복음주의’(New Evangelicalism)라는 한 경향 혹은 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경향은 소수파로 드러난 근본주의자들 가운데서 일어났다.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진리를 위해 끝까지 싸우기보다 평화와 안정을 더 좋아하였다. 또 그들은 신실한 소수의 보수주의자들과 보수주의 교회들 간의 교제와 협력보다 더 폭넓은 교제와 협력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성경적 분리의 교훈을 따르기보다 일치와 화합을 원하였다. 1948년 풀러 신학교의 강연에서 학장 해롤드 오켕가(Harold Ockenga)는 ‘신복음주의’(New Evangelicalism)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신복음주의적 기관들로서, 1942년에 미국 복음주의자 협회(NAE)가 조직되었고, 1947년에 풀러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1951년에는 20개국의 복음주의자 협회들이 모여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WEF)를 형성하였다. 또한 1956년에는 신복음주의의 대변지와도 같은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tianity Today)지가 창간되었다.

배교와의 분리를 주장한 근본주의자들은 1941년 미국 기독교회 협의회(ACCC)를 조직하였고, 그 단체를 중심으로 1948년 국제 기독교회 협의회(ICCC)가 형성되었다. 국제 기독교회 협의회는 그 헌법 서문에서 현대를 이교적 현대주의의 물결이 범람하는 배교(背敎)의 어두운 시대라고 언급하고 “그의 백성에게 모든 불신앙과 부패로부터 분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들은 분명하고 적극적이다”라고 진술한 후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교리적 선언을 채택하였다: (1) 성경의 완전한 영감, 무오성(無誤性), 최종적 권위, (2) 하나님의 삼위일체, (3)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영원하신 신성과, 그의 참되신 그러나 죄 없으신 인성, (4) 그의 처녀 탄생, (5) 그의 대리적, 속상적(expiatory) 죽음, (6) 그의 육체적 부활, (7) 동일하신 그 분의 영광스런 재림, (8) 사람의 타락과 전적 부패, (9) 성령으로 말미암은 중생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얻는 구원, (10) 구원받은 자들의 영원한 복과, 잃어버린 자들의 영원한 형벌, (11) 그의 보혈로 구속받은 모든 자들의 영적 일체성, (12)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리와 생활에 있어서 교회의 순결성 보존의 필요성(“Constitution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in Program and General Information: The Ninth World Congress of 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Nairobi, Kenya, 16-27 July 1975, p. 39).

1950년대 이후의 근본주의

신자들이 자유주의 교회들로부터 분리해야 한다는 것은 비교적 쉽게 이해되었으나, 거기에 뒤따르는 보다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신복음주의자들과의 교제 문제이었다. 자유주의 교회에 머물거나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고 그들과 교제하는 신복음주의자들과 계속 교제해야 할 것인가? 그들의 잘못된 교제를 계속 용납해야 할 것인가? 그들을 책망하고 징계하며 그들과의 교제를 단절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이들은 신복음주의자들과의 분리를 ‘2차적 분리’라고 불러 그 중요성이나 당위성을 낮추어 평가하려고 하였으나,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 예를 들어 칼 매킨타이어(Carl McIntire), 밥 죤스(Bob Jones) 2세, 이안 페이슬리(Ian R. K. Paisley) 등은 신복음주의자들과의 분리를 필요하고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국제 기독교회 협의회(ICCC)와는 별도로, 1976년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WCF)가 밥죤스 대학교의 명예 총장이었던 밥 죤스 2세와 북아일랜드의 보수적 교회 지도자 이안 페이슬리 등을 중심으로 모였다. 또한, 1987년 ‘성경을 믿는 교회 국제 협의회’가 근본주의적 지도자들에 의해 조직되었고, 1990년 그 단체는 ‘세계 성경적 교회 협의회’(WCBC)로 명칭을 바꾸었다.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는 다음과 같은 신조를 선언하였다. “우리는, 근본주의자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重生)한 신자로서 다음과 같은 자라고 믿는다: 첫째, 무오(無誤)하며 글자까지 영감된 성경에 대해 요동치 않는 충성심을 가지는 자. 둘째, 성경이 말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다 그러하다고 믿는 자. 셋째, 성경에 의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판단을 받는 자. 넷째, 다음과 같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진리들을 확언(確言)하는 자: ① 삼위일체의 교리, ②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동정녀 탄생, 대속(代贖), 육체적 부활과 영광스런 승천, 및 재림(再臨), ③ 성령의 중생(重生)케 하심을 통한 새로운 출생, ④ 성도들의 부활과 영생, ⑤ 불경건한 자들의 부활과 최종적 심판과 영원한 죽음, ⑥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의 교제. 다섯째, 이러한 신앙에 대한 충성을 실천하며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려고 애쓰는 자. 여섯째, 이러한 신앙에 대한 모든 단체적(교회적) 부인과, 오류와의 타협과, 진리로부터의 배교(背敎)를 폭로하며 그것들로부터 분리하는 자. 일곱째,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는 자.”

한편 1980년대 이후에, 근본주의자로 자처하는 제리 팔웰이 신복음주의자들과 교제하고 협력함으로써 근본주의 진영에 다시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Jerry Falwell, Ed Dobson, and Ed Hinson, eds., The Fundamentalist Phenomenon: The Resurgence of Conservative Christianity <1981>). 그러나 그의 입장은 ‘가짜 근본주의’(pseudo- fundamentalism)로 불리운다. 그는 칼 매킨타이어의 옷을 입고 해롤드 오켕가의 목소리를 내는 자라고 묘사된다.

2. 개념 정의

자유주의자 컬솝 레이크는 말하기를, “근본주의를 하나의 새롭고 이상한 사상 형태라고 상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그런 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때 모든 기독교인이 보편적으로 주장했던 신학의 잔존물이다”라고 하였다(Kirsopp Lake, The Religion of Yesterday and To- morrow <1925>, pp. 61, 62). 근본주의에 대한 그의 개념은 정당하다.

예일 대학교의 교회사학자 케넷 라투렛은 말하기를, “1914년 얼마 전에 [자유주의, 사회 복음, 성경의 고등 비평, 진화론 등에] 반대하는 자들은 그들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 교리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보수하는 것 때문에 자신들을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불렀고 다른 이들로부터도 그렇게 불리우기 시작했다”고 했다(Kenneth S.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ity, vol. 2, p. 1264).

해롤드 쿤은 근본주의를 정의하기를, “기독교 체계의 기초적 원리들을 보존하고 현대주의라 불리우는 운동에 있는 위험한 신학적 경향들로 간주된 것들을 저항하기 위해 의도된 최근 수십년 동안 일어난 신학적 운동”이라고 했다(Harold B. Kuhn, “Fundamentalism,” Baker's Dic- tionary of Theology, p. 233).

죠지 말스든은 말하기를, “미국에서의 근본주의는 전투적으로 반(反)현대주의적인 복음주의적 개신교 운동으로 가장 잘 정의된다”고 서술했다(George M. Marsden, “Fundamentalism,” Eerdmans' Hand- book to Christianity in America, p. 384).

한국 장로교회의 보수적 지도자이었던 박형룡 박사는 말하기를, “근본주의는 별다른 것 아니라, 정통주의요 정통파 기독교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근본주의는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적 정통적 신앙을 그대로 믿고 지키는 것 즉 정통 신앙과 동일한 것이니만치, 이것은 곧 기독교 자체라고 단언하는 것이 가장 정당한 정의일 것이다. 근본주의는 기독교 자체다”고 했다(박형룡, “근본주의,” 신학지남, 25권 1호 <1960>, 16쪽).

근본주의에 대한 이러한 정의들은, 비록 부족하긴 하지만, 상당히 역사적 정당성을 가진다. 근본주의는 새로운 어떤 것이 아니고 옛날부터 있었던 무엇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들을 성경에 계시된 대로 그대로 믿고 따르고자 하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입장인 것이다. 참으로, 그것은 박형룡 박사의 말대로 ‘정통 기독교요 기독교 자체’인 것이다. 성경은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를 굳게 보수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위의 역사적 고찰에서 증거된 대로, 근본주의에 대한 정의는 이런 근본 교리들에 대한 보수성(保守性)과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전투성에 덧붙여 배교적 교단들과 타협적 신복음주의자들로부터의 분리(分離)의 입장이 첨가되어야 한다. 1930년대 이후의 미국 교계의 상황이 대교단들의 배교(背敎)로 진행되었고 1940년대에는 신복음주의가 출현했기 때문에, 성경적 보수주의는 배교된 교단들로부터 분리되지 않을 수 없었고 또 타협적 신복음주의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에 대한 바른 정의는 (1) 근본 교리들의 보수와, (2) 배교와 타협으로부터의 분리라는 두 요소를 포함한다. 즉, 근본주의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保守)하고, 자유주의의 배교와 신복음주의의 타협으로부터 분리(分離)하는 입장’이라고 정의된다.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WCF)는 1976년 다음과 같은 진술을 채택하였다: “우리는, 근본주의자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重生)한 신자로서 다음과 같은 자라고 믿는다: (1) 무오(無誤)하며 글자까지 영감된 성경에 대해 요동치 않는 충성심을 가지는 자, (2) 성경이 말하는 바는 무엇이든지 다 그러하다고 믿는 자, (3) 성경에 의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판단을 받는 자, (4) 삼위일체의 교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동정녀 탄생, 대속(代贖), 육체적 부활과 영광스런 승천, 및 재림(再臨), 성령의 중생(重生)케 하심을 통한 새로운 출생, 성도들의 부활과 영생, 불경건한 자들의 부활과 최종적 심판과 영원한 죽음,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의 교제 등의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진리들을 확언(確言)하는 자, (5) 이러한 신앙에 대한 충성을 실천하며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려고 애쓰는 자, (6) 이러한 신앙에 대한 모든 단체적(ecclesiastical) 부인과, 오류와의 타협과, 진리로부터의 배교(背敎)를 폭로하며 그것들로부터 분리하는 자, (7) 그리고 단번에 주신 믿음을 위해 힘써 싸우는 자.” 이 진술은 1980년, 1983년, 1986년, 1990년에 계속 확인되었다.

미국 기독교회 협의회(ACCC)는 근본주의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참된 근본주의 그리스도인은--비록 그것이 오늘날 반대로 표현되지만--하나님의 영감되고 무오한 말씀에 대한 견고한 충성을 주장하며 모든 것들을 성경의 잣대로 판단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중생한 신자이다. 근본주의자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진리들을 확신한다. . . . 참된 근본주의자의 다른 하나의 중요한 확인할 수 있는 표시는--그것은 실상 근본주의자와 신복음주의자를 실제로 구별짓는 표시인데--그가 교회의 배교(背敎)와 및 성경적 분리를 실천하지 못하는 타협하는 개인들과 단체들을 폭로하고 그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 . . 근본주의의 적(敵)들은 자유주의, 에큐메니칼 운동, 천주교회, 은사운동, 인본주의, 및 신복음주의이다. 성경에 대한 순종은 근본주의자들의 표어이며, 구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의 참된 증거이다”("ACCC Resolution in 1993," in Calvary Contender, 1993년 12월 1일). 북미 독립침례교 협의회(In- dependent Baptist Fellowship of North America)도 동일한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Calvary Contender, 1993년 7월 15일).

미국 기독교회 협의회(ACCC)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세상의 여러 표준들에 적응시킴으로써 그리스도를 배신하였다. 그들은 근본주의자들을 ‘바리새인들,’ ‘사랑 없는 자들’, ‘분열을 조장하는 자들’ 등으로 표현한다. 그들은 가르치기를,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성공하기 위해 배교적 교회와 협력하여 일해야 한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의 무오(無誤), 진화론, 심지어 교회의 사명을 재검토하는데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만이 오늘과 내일의 일들을 위해 충족하다고 가르치는 신실한 근본주의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1998년 10월 27-29일 미국 미주리주 모넷에서 모인 미국 기독교회 협의회 57차 대회 결의문 중에서; Calvary Contender, 1998년 11월 15일).

비록 정통 교리는 교파적 확신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역사적 개신교회들의 교리적 신념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 물론 성경의 근본적 교리들을 어디까지로 볼 것인가라는 근본 교리의 범위의 문제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며 그것이 교파들이 생기게 된 한 주요한 원인이었지만, 역사적 개신교회들의 공통적 신념이 근본 교리 안에 든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통적 근본 교리들의 공동적 고백은 현존하는 참된 교회들의 일치의 기초가 될 수 있다. 죤 칼빈이나 죤 오웬은 기독교의 근본적 혹은 본질적 교리들을 그리스도인의 일치의 기초로 간주했었다(John Calvin, Institutes, IV. i. 12; John Owen, The Works of John Owen, XV, 106).

근본주의는 적어도 기독교의 이런 공통적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출발되었기 때문에 그 성격상 초교파적이었다. 그러므로 근본주의를 좀더 정확히 정의한다면, 근본주의는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배교와 타협으로부터 분리하는 초교파적 입장 혹은 운동이다.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차이는, 요약하면, 자유주의에 대한 태도에 달려 있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를 용납할 수 없는 이단으로 간주하고 그것으로부터 분리해야 할 것을 주장하는 반면,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그것을 용납하고 그런 사상을 가진 자들과 교제하고 협력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와 자유주의자들을 용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 문제의 촛점이다.

3. 성경적 평가: “분리의 원리”

성경은 성도간의 사랑의 교제를 강조하지만 또한 어떤 이들과의 교제의 단절 곧 분리에 대해서도 밝히 가르치고 있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권징의 성실한 실행’을 참 교회의 한 표로서 가르쳐왔다(스코틀랜드 신앙고백 <1560년>, 제18항; 벨직 신앙고백 <1561년>, 제28항, 제29항; Hermann Hoeksema, Reformed Dogmatics, pp. 617-621; Hein- rich Heppe, Reformed Dogmaics, pp. 668-671).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성경적 분리’는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권징의 교훈 속에 들어 있는 원리이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분리의 원리를 고찰함으로써 오늘날 근본주의 입장이 성경적으로 바르고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입장이 성경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분리의 대상들

성경은 성도들에게 어떤 자들로부터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치는가? 성경이 가르치는 분리의 대상들은 다음 네 부류이다.

불신자들

첫째로, 성경은 성도들에게 불신자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친다. 여기에서 말하는 ‘교제’란 교회적 교제 즉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나누는 영적 교제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로서 나누는 이 교제는 특히 성찬식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잘 표현된다.

고린도후서 6:14 -18,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 . .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세상과 교회,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 사이에는 명확한 선이 있다.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이므로, 교회적 교제에는 어떤 한계선이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구든지 주께로 나오라고 초청되지만, 믿는 자만이 성도로서의 영적 교제를 서로 나눌 수 있다.

이단자들

둘째로, 성경은 성도들에게 이단자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친다. 로마서 16:17, 18,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너희가 배운 교훈 혹은 교리를]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 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거절하라].” 요한이서 7-11,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 . .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유다서 3, 4,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더욱이, 이단의 성격들을 생각할 때, 성도와 이단간의 교제의 단절이 필요함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첫째로, 이단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사상이다. 갈라디아서 1:8,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둘째로, 이단은 멸망케 하는 사상이다. 베드로후서 2: 1,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셋째로, 이단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다. 디모데후서 2:17, 18,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오늘날 이단에 속하는 것은, 우선 개신교회가 전통적으로 적그리스도적이요 우상숭배적이라고 간주했던 천주교회를 비롯하여, 주로 19세기 이후에 많이 일어난 각종 이단 종파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크리스챤 사이언스, 통일교, 천부교 등과, 특히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포용적일 뿐만 아니라,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호의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천주교회는 근본적으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특히,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 예를 들면, 성경의 신적 권위와 무오성(無誤性), 하나님의 인격성과 형벌적 공의의 속성,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처녀 탄생, 신성(神性), 대리적 속죄, 육체의 부활, 승천 및 재림을 부정하는 무서운 불신앙적 이단 사상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유주의 이단을 결코 용납해서는 안되며,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마땅히 교회의 교제에서 배제되어야 하고 정통 교회로부터 출교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의 단절이 성경적이라면, 자유주의자들과의 분리를 주장하는 근본주의 입장이 바르고 분리를 반대하고 교제, 공존, 협력을 주장하는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 입장이 잘못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범죄자들

셋째로, 성경은 성도들에게 윤리적으로 드러난 죄를 짓고 회개치 않는 자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그런 자들을 교회에서 내어 쫓으라고 가르친다. 고린도전서 5:11-13,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 . .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이 점에 비추어 볼 때도, 오늘날 참된 교회들은 윤리적으로 심히 부패한 교회들과의 교제를 단절해야 할 것이다.

불순종자들

넷째로, 성경은 성도들에게 사도들의 교훈 곧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고의적으로 불순종함으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친다. 데살로니가후서 3:6, 14-15,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 . .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이것은 이 편지가 쓰이던 당시에는 성실하게 일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교훈이었지만, 그 원리는 다른 일에서도 적용된다. 특히, 이 말씀은 오늘날 이단을 배격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고의적으로 불순종하고 자유주의 이단자들을 용납하고 그들과 교제하는 소위 신복음주의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비록 신복음주의자들의 대다수는 신학 사상의 변질이 있는 이단이 아니고 우리와 같이 복음을 믿는 참된 성도요 우리의 형제일지라도, 우리는 그들의 고의적 불순종과 타협적 행위를 묵인하거나 용납해서는 안되고, 마땅히 그것을 책망하고 만일 그들이 그 행위를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들과의 교제도 끊어야 할 것이다.

페이스 복음주의 루터교 신학교의 데오도르 슈브케겔 교수는 신복음주의를 ‘치명적 악’이라고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본적 문제는 . . . 교회 내에서 오류와 잘못된 가르침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이다. 옛방식은 . . . 오류에 빠진 사람을 책망하고 그를 교정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의 잘못된 가르침을 고집하면, 우리는 그가 회개하고 그의 길의 잘못으로부터 돌아서기까지 그를 우리로부터, 혹은 우리 자신을 그로부터 분리시킨다. 이것이 성경적 방법이다. . . . 그러나 신복음주의자들은 이 분리의 방침을 내버리고 그 대신 오류를 포용하는 침투라는 방침을 취했다”(Christian News, 1999년 5월 31일; Calvary Contender, 1999년 7월 1일).

마크 시드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적인 인물이 범하는 공적인 죄는, 속임을 당하는 자들을 위해 공적으로 책망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배교(背敎)와의 교제를 옹호하고, 거짓 교사들과 불신자들과 협력하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공적으로 도전한 죄가 있다. 그가 잘못 인도하고 있거나, 또는 만일 성경으로부터 적절히 경고를 받지 못한다면 그에 의해 잘못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을 위해, 그리스도의 충성된 목사는, 비록 그 사람이 복음을 전파하는 체하고 또 아마 어느 정도 그러할지라도, 그에 대해 경고해야 한다. 기껏해야, 이것은 불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이 거짓 교사처럼 행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람들이 입장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불행스럽다. 우리가 오직 입장에만 집중하고 성경적 불순종이나 타협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비성경적 입장의 주된 선동자요 촉진자요 옹호자일 때, 우리는 그가 촉진하고 있는 그 죄를 비난하면서 그 사람을 폭로하지 않을 수 없다.” (Mark Sidwell, The Dividing Line: Understanding and Applying Biblical Sepa- ration; Calvary Contender, 1998년 11월 1일.)

분리의 이유들

성경이 성도들에게 위의 네 부류의 사람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치는 이유들은 무엇인가?

교회의 본질 때문에

성경적 분리의 첫번째 이유는 교회의 본질 때문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구원 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며, 참된 성도라면 성경적 교리를 믿고 성경적 교훈에 순종할 것이 기대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이러한 본질적 성격에 배치되는 요소들, 곧 불신앙, 이단들, 회개치 않는 죄들, 고의적 불순종 등은 교회에서 마땅히 배격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과의 연합 전도 활동이 겉보기에 큰 결실이 있는 것 같으나, 성경이 그러한 잘못된 교제를 금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구실도 용납하지 말고 그런 활동을 반대하고 배격해야 한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주의 명령에 대한 순종에 있다. 기독교는 물량주의, 숫자주의, 실용주의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성경주의, 진리주의이다.

교회의 순결성 때문에

성경적 분리의 두번째 이유는 교회의 순결성 때문이다. 교회는 거룩하며 또한 거룩해야 한다. 이것은 교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윤리적으로도 그러해야 한다. 에베소서 5:26, 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비록 지상에 완전한 교회가 없겠지만, 우리는 순결한 교회, 흠 없는 교회를 건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뻔뻔스런 불신앙이나 고의적 불순종을 교회 안에 용납해서는 안된다.

악의 전염성 때문에

성경적 분리의 세번째 이유는 악의 전염성 때문이다. 교리적 오류이든지 윤리적 오류이든지 간에, 죄악은 누룩처럼 교회 안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악의 전염성 때문에 교회는 악을 제거하고 악과의 교제를 단절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곧 부패되고 속화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5: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갈라디아서 5: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디모데후서 2:17,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하나님의 명예 때문에

성경적 분리의 네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명예 때문이다. 교회가 윤리적 죄악을 포용하면, 세상이 교회를 비난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비난하고 조롱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도 그 성결성을 유지해야 한다. 로마서 2: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분리의 방법들

성경은 성도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교제를 끊으라고 가르치는가? 성경적 분리는 어떤 방식으로 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오류는 지적되어야

우선,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된 교훈과 입장과 활동들은 지적되고 비평되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교훈들을 비평하고, 교훈하는 자들을 비평하지는 말라’고 하지만, 교훈과 교훈하는 자는 분리되기 어렵다. 밴가드(Vanguard) 1999년 6월호는 다음과 같이 적절히 말했다:

첫째로,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 것은 성경적이다. 바울은 긍정적으로 활동들을 추천하기 위해 사람의 이름을 들었고(고전 16장; 빌 2:25; 골 4장), 부정적으로 활동들을 경고하기 위해서도 그렇게 하였다(딤전 1장,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딤후 2장, ‘후메내오와 빌레도’; 딤후 4장, ‘알렉산더’). 요한도 또한 구체적으로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요삼 9, 10, ‘디오드레베’).

둘째로, 만일 우리가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칭찬하기를 기뻐한다면(예를 들어, 루터와 스펄전과 웨슬리의 전기들), 부정적으로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 것은 논리일관한 일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구가 되는 사람들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똑같이 정당하다. 더구나 우리가 글을 쓸 때, 우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미워하라고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조심하라고 하는 것이다(딤후 4:15).

셋째로,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 것은 실제적인 문제이다. 슬프게도, 사람들은 흔히 설교들보다 설교자들을 따른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우리는 사람들의 이름들을 들어야 한다.

넷째로, 사람들의 이름들을 드는 것은 역사적인 후원이 있는 일이다. 교회 역사를 통해 볼 때, 사람들은 그들이 반대하는 내용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반대하는 인물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진술하기를 겁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흔히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비교적 보수적인 정규 침례교 총협의회(GARBC)가 인준한 침례교 성경 대학 및 신학교의 교장 밀로 톰슨 박사는 그 교단의 최근 연례 대회에서 캘버리 컨텐더 같은 현대 교회 문제들을 지적하는 소식지들을 ‘남들을 중상이나 하는 종이들’(scandal sheets)이라고 표현하고 그것들을 목욕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거기에 대하여, 캘버리 컨텐더(Calvary Contender) 편집자인 제리 허프만 씨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 . . . . 우리는 보도되고 있는 ‘타협’이 그것을 보도하는 것보다 ‘목욕’시킬 필요가 더 있다고 느껴야 한다. 보기를 원치 않는 자들처럼 눈 먼 자들은 없다! 그렇다. 캘버리 컨텐더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속지 않게 하기 위하여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문제들’(scandals)을 보도하거나 폭로한다는 의미에서 ‘문제의 종이’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수치스런 문제들 중의 하나는 ‘근본주의자들’이 신복음주의의 궤도 안으로 집단적으로 변절하는 것이다.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에큐메니칼 자유주의자들이나 포용주의자들과 교제하고 강단 교류를 한다. 이런 류의 타협이야말로 20세기 말의 가장 큰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힘주시는 대로, 우리는 심지어 개인적으로 조롱을 받을지라도 계속 진리를 위해 서서 이러한 ‘문제들’의 나타남들을 보도할 것이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8월 1일.)

교회적 교제를 단절해야

성경이 가르치는 분리는 일차적으로 교회적 교제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교제를 끊어야 할 대상자들이 있을 경우, 성도들은 성경이 가르친 대로 그리고 교회 헌법의 권징의 규칙을 따라 권계(勸戒, 권면과 충고), 수찬 정지(受餐停止, 성찬식에서 제외함), 제명 출교의 절차를 행해야 할 것이다(마 18:15-17).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들간의 막힌 담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들 상호간의 막힌 담도 허물어 뜨리신 위대한 화해자이시지만, 비록 그들 중 어떤 이들이 우리와 똑같이 주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 곧 우리의 진정한 형제들이요 자매들이겠지만, 비록 우리가 그들 중 어떤 이들과 함께 천국에 들어갈지도 모르지만, 성경적 분리는 성경적 원리요 성경적 교훈이다.

불신앙, 이단들, 회개치 않는 악들, 고의적 불순종들에 대한 적절한 권징과 교제의 단절은 성경에 밝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이다. 고린도전서 5:11-13, “[이런 자와는] 사귀지도 말고 . . . 함께 먹지도 말라 . . .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데살로니가후서 3:14,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므로 성경적 교회는 합법적인 권징과 교제의 단절을 성실히 실행해야 한다.

특히, 교회는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마땅히 출교되어야 할 이단자들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단의 신학교를 위해 교수를 청빙할 때 신학교 이사들은 먼저 청빙할 교수들의 신학 사상이 건전한 지를 신중하게 심사해야 한다.

또한 성경적 교회들은 자유주의 교회들이나 포용주의적 교회들과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대 교단들이 자유주의화 된 상황이므로, 소위 세계교회협의회(WCC)와 각 나라의 교회협의회(NCC)들은 잘못된 단체들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교회들은 이러한 단체들과 관련된 활동들을 반대해야 하고 거기에 참여치 말아야 한다.

특히,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활동과 같이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교회들과 협력하는 전도 활동은 명백히 비성경적이고 인본주의적이므로 우리는 그러한 활동을 인정하지 말고 또 거기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후원하지도 말아야 한다.

또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망라한 초교파적 연합 집회들, 예를 들어 부활절 연합예배, 연합 성찬식, 그리고 성서공회, 기독교 방송국, 찬송가공회 등의 연합 활동들도 옳지 않다. 성경의 기본적 교리들을 믿는 교회들간의 초교파적 연합 활동들은 가능하고 또 필요하지만, 보수적 교회들과 자유적 교회들간의 연합 활동은 명백히 비성경적이다.

덧붙여서 생각할 바는, 한 교회 혹은 교단이 자유주의화 되었거나 자유주의자들을 고의적으로 포용할 때, 보수적 신자들 혹은 목사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는가? 우선, 그는 그 교회와 교단이 자유주의자들을 내어쫓고 성경적 교회와 교단이 되도록 말과 글로써 그리고 합법적인 절차를 따라 노력함으로써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교회나 교단이 자유주의자들이나 혹은 그들을 옹호하는 세속적 교권주의자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어서 자유주의자들의 권징 출교나 교회 정화 혹은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그는 그 교회와 교단을 떠나야 하고 바른 입장을 가진 성경적 교회를 찾아 거기에 속하거나 그러한 교회 혹은 교단을 설립해야 한다. 에베소서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고린도후서 6:17, “거기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계 18:4에도 같은 말씀이 있음).

마크 시드웰은 제리 팔웰과 잭 반 임페의 ‘신근본주의’에 대해 경고한다. 그는 또 성경 무오성을 옹호하며(린젤), 신학적 타협에 항거하며(쉐퍼, 웰즈) 은사주의에 대해(죤 매카더) 그리고 천주교회에 대해(스프라울) 경고하는 인기 있는 복음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근본주의자들이 그들의 비평서들을 읽고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나 이 저자들이 여전히 분리에 관해서는 근본주의자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시드웰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거짓된 교훈과 잘못된 실천의 관용을 용납하고 촉진하는 기관들과 연맹들의 그물망의 부분으로 남아 있다. 어떤 위험에 대한 공통적 반대가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들과 비(非)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일치를 위한 근거가 된다고 추정하는 것이 신근본주의적 오류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참된 일치의 근거는 오류에 대한 공통적 반대가 아니라 성경적 진리와 성경적 실천에 대한 공통적 신념이어야 한다.” (Mark Sidwell, The Dividing Line: Understanding and Applying Biblical Separation; Calvary Contender, 1998년 11월 1일.)

개인적 교제를 조심해야

물론, 우리는 교회적 교제를 끊어야 할 대상자들과의 개인적인 교제도 조심해야 한다. 때때로 그런 자들과 개인적 교제를 완전히 단절하기 어려운 상황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자들이 우리의 가족들 중에나 우리의 친구들이나 이웃들 가운데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무분별한 교제로 악을 용납하거나 공적으로 악을 승인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구약시대에 유다 왕국의 경건했던 여호사밧 왕은 이스라엘 왕국의 악한 아합 왕과 교제함으로써 하나님의 책망과 진노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후손에게도 이스라엘 왕국의 우상숭배의 씨를 뿌리는 결과가 되었다.

역대하 19:2,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가로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요한이서 7- 11, “. . . 그[이단자]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덕을 잃지 말아야

특히 오류를 범한 자들과 교제를 끊을 때, 우리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우리의 교제의 단절은 먼저 우리의 성실한 노력을 전제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의 잘못의 교정을 위해 먼저 개인적으로 진지하게 권면하고 교회적으로 성실히 노력해야 한다. 또 교제를 끊어야 할 때에도 지금이 불가피한 분리의 때인지 신중히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우리의 성급한 분리는 교회의 개혁이나 갱신에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다. 더욱이, 신자 개인의 경우에는 교회적 대책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떠나야 할 교회를 대체할 건전한 보수적 교회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때때로 어려움이 많이 있다.

분리에는 항상 극단적 태도의 위험이 있다. 건전한 성경적 확신에서라기보다는 개인적 해석들이 분열의 문제점으로 부각될 수도 있다. 죤 애쉬브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분리는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또 분리는 배교로부터 분리하기를 원치 않는 불순종하는 형제들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그러나 분리가 형제들 간의 모든 불일치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Calvary Contender, 1998년 11월 1일).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특히 이런 교회적 갈등과 결단의 때에, 겸손과 온유와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한다. 미움이나 교만은 그 어떤 죄와 오류 못지 않은 큰 죄악이다. 사람이 성경적 분리의 명령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도 중요하지만, 그에게 좋은 성품과 삶이 있느냐 없느냐는 더 중요하다. 더욱이, 우리의 우리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이들보다 영적 분별력을 좀더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일 뿐이며,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교만할 수 없다. 갈라디아서 6:1,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범죄자]를 바로 잡고.” 디모데후서 2: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데살로니가후서 3:15, “그들[무질서하게 행하는 자들]을 원수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이상의 ‘성경적 분리의 원리’를 고찰해 볼 때, 근본주의는 자유주의적 배교와 신복음주의적 타협을 반대하고 성경의 교훈대로 순수하게, 성실하게 행하고자 하는 바른 입장이다. 근본주의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입장이다. 우리는 인본주의적 관념의 넓은 길을 버리고 성경 진리대로의 좁은 길을 구하며 확신하며 그 길로 진행해 나아가야 한다. 두드러진 교리적, 윤리적 오류의 묵인은 주께 대한 불성실과 불순종이며, 그 오류와 타협하지 않고 그것들로부터 떠나는 것은 참된 성도들의 당연한 의무이다.

분리의 정당성

앞에서 우리가 정리한 바와 같이, 배교와 타협으로부터의 분리는 정당하다. 미국 기독교회 협의회(ACCC)는 1999년 10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정당하게 진술하고 결의하였다: “근래의 수 년 동안 우리는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이 하나님께서 친히 두신 분리의 벽을 제거하기 위하여 서로 간의 일치의 문서들에 서명하는 것을 보아 왔다. 자칭 근본주의자들과 신복음주의자들은 또한 함께 설 공통적 기반을 찾고 있다. 하지만,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계속 견고하다. 진리와 오류가 하나처럼 함께 거하는 것은 여전히 금지되어 있다. 분리의 교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성령의 중생케 하심으로 그에게 속한 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함이다. 아모스 3:3은 ‘두 사람이 의합(意合)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고 질문한다. 가룟 유다는 그리스도와 제자들 가운데 행하였지만, 그들에게 속한 자가 아니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을 ‘흉악한 이리’라고 말했는데(행 20:29), 그것은 그들이 은혜의 복음에 무엇을 더했기 때문이었다. 중생한 신자가 주께 불성실함 없이 불신자들이나 타협자들과 멍에를 같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순종은 죄이다. . . . 분리의 교리에 대한 성실한 고수(固守)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거룩과 순결을 보존시킨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12월 15일.)

어떤 운동이나 교회가 어떻게 배교에 떨어지는가? 클레이 나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는 배교(背敎)가 한 시대에 걸쳐 일어나고 하룻밤에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여러분은 ‘교회가 오직 두 명의 목사를 거치면 자유주의화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첫번째 목사는 그 교회를 부드럽게 하고 그 다음은 그것을 배교로 인도한다. 자유주의를 향해 움직이는 교회들을 확인하는 길들이 많이 있지만, 그 길에 있는 자들은 친구들로부터의 경고들을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와 같이 배교를 향해 움직이는 것은 그들이 거기로 인도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심지어 여러분이 그들에게 그들의 교단이 장소적 천국과 지옥불이 없다고 하는 자유주의 교리들을 신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때에라도 그 명백한 사실에 직면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충성된 경고자들을 향하여 그들이 거짓 교리를 취급하고 있기보다는 개인적 문제를 논하고 있다고 본다. 그들은 우리를 ‘사랑이 없다,’ ‘천박한 정신을 가졌다’고 표현한다. 사람이 어떻게 배교에 도달하는가? 사사기 2:10은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라고 말씀한다.” (Shepherd's Staff, 2000년 1월 8일; Calvary Contender, 2000년 2월 1일.)

쥐를 죽이는 것은 98퍼센트의 햄버거 속에 넣어진 2퍼센트의 혼합물인 독약이다. 진리와 거짓의 혼합물은 격리되고 분간될 수 있는 순수한 거짓보다 보통 훨씬 더 치명적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나 그 안에 좋은 점이 매우 많다”고 흔히 말한다. 모든 거짓 사상 체계들은 진리의 요소들을 담고 있다. 사실상, 더 많은 진리가 치명적 오류와 섞여 있을수록, 그것은 속임을 위해 더 많이 위험하다. 효력이 있으려면, 속임수는 본질적으로 참되게 보여야 한다. 목표 지점을 향해 전달되는 내용의 90퍼센트 이상은 참되어야 한다. 그러나 심지어 미혹의 시대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속임 당함에 대해 핑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우리 시대의 오류나 오류자들을 폭로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사 8:20). (Calvary Contender, 2000년 3월 15일.)

타협의 잘못

오류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다. 스스로 기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정통적 기독교의 역사적 성경적 교리들로부터 심각하게 떠날 때, 우리는 게으르게 침묵함으로 서 있어서는 안된다(딤 1:9-11). 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것이며 그 오류의 전파자들과 그것을 듣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Vantage Point, 1998년 7월). 침묵하는 파수꾼들은 없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파수군들이 의무를 다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안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나라의 목자들을 ‘눈 먼 파수꾼들’이라고 부르셨고 또 그들을 ‘벙어리 개요 능히 짖지 못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사 56:10).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릇된 교리를 비난하지 않으셨고, 오직 그들이 경고했어야 할 때 잠자고 있었음을 비난하셨다. (Calvary Contender, 1995년 9월 1일).

여러 가지 문제들로 혼란스러운 오늘날 교계의 현실에 사랑과 관용만을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들을 이롭게 하는 것뿐이다! 교회 내의 오류들은 지적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A. W. 토저는 ‘관용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의 유행은 우리가 도량이 좁다는 평판을 얻지 않으려고 무엇이든지 관용하는 것이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명령하셨던 아말렉의 왕 아각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참아 볼 수 없으며(삼상 15장), 그래서 그들은 오류와 악을 용납함으로써 오는 시대를 위해 교회의 건강을 희생시키는 길을 택하며, 이것을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악의 자리들을 소란시킬 의무가 있으며,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한 신실한 사랑에서 행해지는 곳에 큰 유익이 따를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일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하는 심사(審査) 때문에 손해를 입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을 가장한 소심함 때문에, 많은 교회에서 쓸데 없는 형식들과 비(非)성경적 행위들이 계속되도록 허용되었고, 그것들은 마침내 점점 교회의 생명을 질식시켰고 교회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신으로 . . . 교회 문제들을 심사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결점을 찾는 자가 되지 않고서는 결점을 찾기가 어렵다. . . . 그러나 우리가 악한 시대에 하나님의 일이 순수하게 보존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A. W. Tozer, Berean Call, 1998년 7월; Calvary Contender, 1998년 8월 1일.)

캘버리 컨텐더지는 이렇게 말했다: “참된 기독교적 일치는 공통적으로 믿는 고정된 성경 진리들을 믿고 주의하는 것을 포함한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의 거짓된 일치는 ‘다양성 속의 일치,’ 다원주의, 그리고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섞는 것이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다’(약 3:17). ‘외적 일치와 복음 진리 사이에 양자 선택을 해야 한다면, 진리를 위해 일치를 양보해야 한다. 오류 안에서 연합하는 것보다 진리에 의해 분리되는 것이 더 낫다.’ 그러한 분열의 책임은 진리를 떠난 자들에게 있다. A. W. 토저는 말하기를, ‘타협은 압박을 제거할 것이다. 사탄은 싸우기를 중지한 사람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지의 댓가는 평화로운 침체의 삶일 것이다’라고 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4월 1일.)

테리 아놀드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썼다: “오늘날 ‘관용’이라는 말은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찬미를 받고 있다. 기독교 세계에서와 기독교 교리에서 관용에 대한 점점 더 많은 요구가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의미한 바와 성취된 바는 흔히 관용이라기보다 ‘타협’이다. . . .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과 그의 말씀을 타협하는 것은 죄이다! 중요한 교리들과 타협하는 것도 또한 죄이다! 거짓 교사들과, 사람들을 건전한 교리에서 떠나게 하는 자들과 타협하는 것은 죄이다. 성경은 때때로 일치보다 분리에 관해 말한다. . . .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 대해 관용하셨지만 결코 타협하지는 않으셨다. 사실 그는 흔히 논쟁에 휘말리셨다! . . . 나는, 그들이 뒤에 더 큰 것들에 대해 타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금 작은 것들에 대해 타협하는 소위 ‘화평케 하는 자들’을 주의한다. 많은 목사들은 사람들이나 그들 자신의 지위나 인기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서 어떤 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 . . 진리를 희생하는 관용은 타협에 이른다. 타협은 항상 본래의 표준을 낮춘다. 진리는 경계선을 가지고 있지만, 오류는 경계선이 없다. 불행하게도 타협은 오늘날 덕(德)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진리는 감정 상하는 일이 되었다.”(Calvary Con- tender, 1999년 4월 15일.)

캘버리 컨텐더는 또한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날은 타협의 시대이다. 명료성을 위한 단순함보다 혼란함을 위한 복잡함이 있다. 오늘날은 다리 놓기와 수용(受容)의 시대이며, 어떤 담장들은 목적이 있다고 여전히 믿는 ‘옛 방호물’에 대한 격렬한 반작용의 시대이다. 어떤 이들은 믿기를 배교가 멀리 떨어진 다리인 한 진정한 위협은 없다고 한다. 나는 목회하는 어떤 친구들이, 우리는 ‘옛자유주의’를 두려워할 게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힘 없는 흔적이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그들은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의 충돌을 옛문제로 보았다. 지금 그들 중 다수가 자유주의적 교리를 그들 속에 품었거나 그것에 대해 그들의 눈을 닫았다. 이 사람들 중 대다수는 자신들을 근본주의자라고 부를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행위들은 배교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 . . 그 대답은 참으로 매우 분명하다. 그들은 그들을 돌아가게 허용할 다리들을 파괴하지 못했기 때문에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그 다리들의 일부를 황폐케 했으나, 지금 그것들은 재건되고 있다. 그렇다, 우리의 선조들에 의해 건립된 어떤 담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담장들은 인기가 없고 ‘에큐메니칼 복음주의’에 장애물이 되어 있다. 그것들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담장들은 미움을 받고 조롱을 받고 멸시를 받는다. 다리들은 ‘신자유주의’를 옛자유주의와 똑같은 파멸로 인도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있다.” (Calvary Contender, 1999년 9월 1일.)

“오늘날 불관용의 사람은 관용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즉 만일 그가 ‘우익’(右翼)이라면. 그러한 사람들은 너무 정신적으로 병적이어서 발언이나 종교의 자유와 같은 권리들이 주어질 수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미국의 공중 위생국 장관인 데이빗 샛처는, 미국인 전체 중 22퍼센트가 어떤 특정한 때에 ‘진단할 수 있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으며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그들의 생애 중 어느 때에 . . . 정신적 질병을 앓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New American, 2000년 2월 14일). 야구 선수는 그의 정치적으로 부정확한 견해들 때문에 상담을 받아야 하지만, 브레이브즈의 소유주 좌익파 테드 터너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증오의 발언을 사용하며, ‘관용’ 경찰의 감수성 훈련 상담을 피할 수 있다. (Calvary Contender, 2000년 3월 15일.) 기이한 세상이다. 그러나 진리의 사람들은 이런 세상 속에서도 오류들을 정죄하고 배격해야 한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중적 의무가 있다. 즉 ‘땅의 소금’이 되는 것과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많은 신복음주의자들은 낙태, 동성애, 음란물, 그리고 다른 악들과의 싸움에서 우리로 하여금 천주교인들과 힘을 합치기를 원한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다른 이들과 함께 연합할 수 있지만,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기도하고 종교적 방식으로 함께 행진하고 사역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불신자들과 멍에를 같이함으로써 우리의 ‘빛’의 역할을 절충하고 혼란케 하는 댓가를 치루면서 ‘소금’의 역할을 강화시키려는 위험을 본다. 하나님의 일은, 그의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그의 일이 아니다. ‘신학적 차이점들을 제쳐놓고’ 거짓 복음을 조장하는 천주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일하고 예배할 때, 우리가 어떻게 그들에게 구원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행위는 ‘빛을 말 아래 감추는’ 격이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분리를 명령하신다(고후 6:14-17). 우리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고, 소금을 강화시키기 위해 빛을 약화시켜서는 안된다.” (Calvary Contender, 1998년 9월 15일.)

4. 역사적 후원

16세기 종교 개혁은 20세기 근본주의 운동의 모본이 된다. 일반적으로 권징은 회개치 않는 범죄자를 교회로부터 배제하는 행위이지만, 16세기 종교 개혁 당시에는 서방 교회 즉 천주교회가 전체적으로 변질, 부패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교 개혁자들은 그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분파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종교 개혁 운동은 분파 운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패된 교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악한 일이다.

20세기 기독교계의 상황은 16세기 종교 개혁 당시보다 더 어둡고 혼란스럽다. 역사적 대교단들은 자유화 되었거나 자유주의를 고의적으로 포용하는 넓어진 교회들이 되었다. 다수의 교회들은 자유주의자들을 권징하거나 출교시킬 의사가 전혀 없다. 그리고 보수적인 교회들도 자유적 혹은 포용적 교회들과 점점 더 자유로이 교제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참된 성도들과 목사들은 배교적 혹은 포용적 교회들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그들의 속한 교회들이 어떤 방향으로 가든지 자신들만 보수적으로 믿으면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마땅히 그 교회들로부터 나와야 하고 그런 잘못된 교제와 협력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이것은 분파주의적 관념이 아니고 성경이 명령하는, 그리고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정당한 분리이다. 참된 성도들이 죽은 교회, 배교적인 교회로부터 떠나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며 또한 의무이다.

침례교 연맹의 교리적 탈선들을 지적하면서 1887년 그 단체로부터 탈퇴했던 촬스 스펄젼은 말하기를, “나는 내가 아는 한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했고, 그 독특한 내용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증거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신앙이 잘못된 자들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그들과 교제하는 자들로부터 내 자신을 분명하게 단절시켰다,” “오류가 확립되었음을 내가 보았거나 내가 보았다고 생각하자마자, 나는 심사 숙고하지 않았고, 즉시 그 단체와 결별했다. 그때 이후 나의 한가지 조언은 ‘그들로부터 나오라’는 것이었다,” “오류에 연루되는 것은 가장 훌륭한 사람들에게서 그 오류를 성공적으로 저항할 능력을 취하여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William E. Ashbrook, Evangelicalism: The New Neutralism, p. 44; Calvary Contender, 1998년 9월 15일).

유명한 캠벨 모간 목사도 잘못된 관용이 선한 영향력을 잃게 만든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신 행위인 관용이 있다. 마비 상태를 낳는 화평이 있다. 교회가 일을 할 때 타협에 근거한 교제를 요청하는 자들에게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때들이 있다. 그렇게 떨어져 서 있는 것은 추방과 핍박을 낳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능력과 영향력을 유지할 것이다. . . . 오늘날 교회는 타협에 의하여 그 자신의 영향력을 파괴시켰다”(Calvary Contender, 1998년 8월 15일).

20세기 미국 북장로교회의 배교에 대항하여 싸웠던 보수적 지도자이며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설립자의 한 사람이었던 메이천은 자유주의자들과의 분리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한가지 사실이 완전히 명백하다. 즉 자유주의자들이 기독교인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자유주의가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은 여하튼 완전히 분명한 것이다. 또한, 그것이 그러하다면, 자유주의와 기독교가 계속 동일한 조직체 안에서 전파된다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하지 못하다. 교회 안에 있는 그 두 부류들의 분리는 이 시대의 절실한 요구이다”(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lism, p. 160).

그는 배교적인 교회로부터의 분리의 정당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자유주의파가 실제로 교회의 기관들을 완전히 장악한다면,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은 그 교회의 활동을 계속 후원할 수 없을 것이다. . . . 만일 자유주의파가 실제로 교회를 장악한다면,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물러설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위의 책, 166쪽). 메이천은 신복음주의적 타협의 죄에 대해, “오늘날 가장 나쁜 죄는 당신이 기독교 신앙을 동의하고 성경을 믿는다고 말한 다음, 기독교의 기본적인 사실들을 부인하는 자들과 협력하고 타협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Ashbrook, p. 45).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이었던 죤 머리는,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신복음주의적 전도 방법에 관하여, 자유주의자들에게 전도하는 것과 그들과 함께 전도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하면서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전도 방법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분명하게 비평하였다(John Murray, “Cooperation in Evangelism,” in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I, 161-62). 또한 그는 신자의 교회 소속 문제에 관하여, 우리가 소속한 교회의 집단적 증거는 곧 우리의 증거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 신실한 교회에 소속해야 한다고 말했고, 집단적 관계와 책임을 무시하는 것은 악이라고 부언하였다(“Corporate Responsibility,” ibid., pp. 273-79).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변증학 교수이었던 코넬리우스 반틸은 신복음주의자들의 신학적 약점들, 타협적 전도 활동, 및 신복음주의적 잡지들을 비평했다(Cornelius Van Til, The New Evangelicalism). 예를 들어, 그는 타협적 전도 활동을 반대하는 메이천의 입장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메이천은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자들과 협력함으로 이루어지는 협력 선교, 협력 전파, 협력 전도를 반대했다. 메이천에게 있어서 그러한 협력은, 유대주의자들과의 협력이 바울 사도에게 불가능했던 것처럼 불가능하였다. . . . 그는 그 자신의 교회에서 선교에 있어서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독립 선교부를 조직하지 않았을 것이다. . . . 그는 협력 전도의 개념이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의 배신임을 명백히 했다”(Ibid., pp. 23, 24, 28).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구약 교수이었던 에드워드 영은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문제에 대하여, 신복음주의가 전도와 학문과 교육을 강조한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사실, 그것[신복음주의]은 매우 중요한 교회의 교리와 신앙을 위한 활기찬 투쟁의 필요성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강조한다. . . . 그러면 신복음주의가 오늘날의 상황에 대한 해답인가? 우리는 아니라고, 강조해서 아니라고 대답한다. 여기에 한 일시적 현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빨리 지나갈수록 교회를 위해 더 유익하다. . . . 근본주의 안에는 훌륭한 많은 점들이 있고, 만일 우리가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를 당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주저도 없이 근본주의를 택해야 할 것이다. 근본주의는 신앙의 변호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관심은 참으로 성경적이다. . . . 그것[근본주의]은 실수들을 범했으나, 외쳐야 할 적절한 때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저 조심성 있는 중도파들이 범한 것과 같은 그렇게 큰 실수는 아니었다”(E. J. Young, “Where Are We Going?” The Presbyterian Guar- dian, 10 April 1959, pp. 187, 188).

훌륭한 기독교 신학자요 변증가인 고든 클락은 배교적인 교회로부터의 탈퇴의 역사적 정당성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였다: “모든 교회들은 약간씩은 다 허물이 있으므로 교적을 바꾸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고 하는 그럴 듯한 변론은 루터와 칼빈 또는 청교도들에게는 결코 통하지 않았던 변론이다. 방종한 촬스 2세가 반기독교적인 법령을 제정하여 강요한 까닭에 약 2000명의 목사들이 1660년 영국 국교를 탈퇴했던 것을 기억하라. 이렇게 탈퇴함으로 해서 그들은 생활비를 받을 수가 없게 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 . . 금일에 적은 형벌이라도 기꺼이 받고자 하는 목사들이 과연 몇명이나 있을까? 그리고 약간의 방해 외에는 전혀 아무런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과연 평신도 중에 몇명이나 배교적인 조직체를 탈퇴할 만한 확신들을 갖고 있을까?”(Gorden H. Clark, 장로교인들은 무엇을 믿는가?, 291쪽).

5. 잘못된 비평들에 대한 비평

명칭보다 중요한 것은 바른 개념과 정신이다.

우리가 어떤 사상이나 운동을 논할 때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명칭이 의미하는 바가 중요하다. ‘근본주의’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근본주의’라는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 성경의 근본적 교리들의 수호와 배교적 교회들로부터의 분리라는 그 본질적 정신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근본주의이다, 아니다’를 말하기 전에 근본주의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근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그 입장이나 운동을 옹호할 필요도 없고 또는 그것을 비평할 필요도 없다. 만일 근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그것을 비평한다면 허수아비를 놓고 비평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한국 교계에 유행하는 근본주의 비평의 말들은 대개 근본주의에 대한 무지에서 나왔거나 아니면 신복음주의적 편견에서 나왔다고 판단된다. 역사적으로 정의된 바 근본주의는 성경적 입장이며 바른 입장인데, 그 동일한 정신을 가진 일부 보수적 목사들이 근본주의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로 인하여 근본주의를 비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본주의라는 명칭에 대한 시비를 잠간 접어놓고 그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기를 원한다. 진실한 목사들은 양심적으로 이 질문들에 스스로 대답해 보기를 원한다.

첫째로, 당신은 성경의 근본적 교리들을 참으로 믿으며 옹호하고 그것들을 부정하는 모든 사상들에 대항하여 힘써 싸워야 한다고 인정하는가?

둘째로, 당신은 오늘날 대교단들(예를 들어, 기장, 기감, 예장 통합 등) 속에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가진 목사들이 목사 후보생들을 교육하는 신학교들에 교수들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는가?

셋째로, 당신은 그 교단들이 포용주의적이어서 이런 사실을 통분히 여기고 그런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배제하려는 진지한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는가?

넷째로, 당신은 그런 자유적 혹은 포용적 교단들이 바른 말씀을 지키고 이단을 배격하라는 주의 명령을 저버린 불신실한 교회 혹은 배교적 교회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겠는가?

다섯째로, 당신은 그런 교단들 속에 있는 참된 목사들과 성도들이 교단의 갱신을 위해 성실히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여섯째로, 당신은 성경을 그대로 믿는 보수 교단들(예를 들어, 예장 합동, 고신 등)이 그런 포용적 혹은 배교적 교단들과 무분별하게 교제하거나 교류하지 말고 그런 교단들을 오히려 책망해야 하고 그들과 교제를 단절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근본주의의 문제는 첫째로 성경의 근본 교리들의 보수(保守)와 옹호에 대한 문제요, 둘째로 포용적 혹은 배교적 교단들과의 교제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에 대한 변론은 바로 이 핵심적 문제에 대한 논의이어야 한다. 그 외의 것들은 본질의 문제가 아니고 주변의 문제이다. 누가 그 외의 것들을 열렬히 거론하고 비평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핵심적 문제는 남아 있다. 근본주의라는 명칭이 문제가 아니고 그것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정신이 문제이다.

성경의 근본 교리들의 보수와 옹호에 대하여는, 성경을 믿는 진실한 신자라면 아무 반론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분명히 말하기를,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고 했다(딤후 1:13). 이것은 우리가 사도들로부터 전달되어 내려온 ‘바른 교훈의 윤곽 혹은 개요를 지키라’는 뜻이다. 또 유다는 기록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라고 했다(유 3).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바른 말씀 곧 근본 교리들을 지키고 그것들을 위해 힘써 싸워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의 명백한 뜻이다.

근본주의의 두번째 문제인 포용적 혹은 배교적 교단들과의 교제 문제는 어떠한가? 사실, 여기에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있다.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신복음주의 입장을 취한다. 그들은, 박형룡 박사의 지적대로, 자유주의자들과 우호적 관계를 가지고 WCC 에큐메니칼 운동과도 우호적이며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는 전도활동을 펼친다. 많은 이들이 배교적 교단 안에 머무는 타협자들이며 그렇지 않은 자들도 배교를 지적하거나 책망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기에는 기독교계가 이미 너무 혼합적이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현실이 어떠하든 간에 무엇이 성경적으로 옳은 태도인가? 구약 시대에 노아는 어떠했으며 모세는 어떠했는가?(벧후 2:5; 출 32장) 엘리야는 어떠했으며 미가야는 어떠했는가?(왕상 19:10; 왕상 22:5-14) 에스라는 어떠했으며 느헤미야는 어떠했는가?(스 9, 10장; 느 2, 6, 13장) 신약 시대에 바울의 태도는 어떠했는가?(고후 11장; 갈 1장; 딤후 1-4장) 성도들이 이단자들로부터 교제를 단절해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 분명하다(롬 16:17; 딛 3:10; 요이 7-11; 유 3; 갈 1:8; 벧후 2:1; 딤후 2:17, 18). 아무리 오늘날 기독교계가 포용적이게 되었다 할지라도 주의 바른 종들과 교회들이 가야할 길은 분명하다.

근본주의는 개혁주의와 대립되는 신학 체계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우리의 입장은 근본주의가 아니고 개혁주의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말은 근본주의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개혁주의라는 말은 역사상 루터파의 신학적 입장과 대조해서 표현된 말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신학 체계를 가리킨다. 그것은 주로 장로교회의 신학 체계이다. 반면에, 감리교회나 성결교회는 웨슬리-알미니우스주의라는 신학 체계를 채용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그런 류의 신학 체계가 아니다. 근본주의는 20세기초 기독교계 전반에 걸쳐 강하게 불어닥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강경하게 반대한 초교파적 태도와 입장이었다. 근본주의는 장로교회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고 감리교회나 침례교회 등 각 교파들에서도 일어난 하나의 초교파적 운동이었다. 개혁신학을 따른다고 자칭하는 장로교 목사들 가운데서도 자유주의에 대한 태도가 서로 달랐다. 어떤 이들은 강하게 반대하였으나 다른 이들은 포용적이었다. 그러므로 근본주의를 개혁주의와 대립시켜 말하는 것은 무식의 소치이다.

김의환 박사의 비평에 대한 비평

김의환 박사는 1970년에 쓴 도전 받는 보수신학이라는 책에서 근본주의를 비평하면서 “우리의 입장은 근본주의도 아니요 신복음주의도 아니다. 우리의 입장은 역사적 칼빈주의 신앙 노선을 따른다. 역사적 칼빈주의는 근본주의적 요소도 있고 신복음주의적 요소도 있다”고 말하였다(114, 115쪽). 또 그는 “칼빈주의자는 근본주의를 받아 들일 수는 있어도 근본주의자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칼빈주의는 근본주의보다 훨씬 광범한 신학 체계이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115쪽).

그러나 우리가 그의 논의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근본주의에 대한 그의 개념이다. 그는 근본주의 운동의 시작을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들을 주장하는 운동으로 보나(96-100쪽), 곧 신복음주의에 대해 논의하면서, 근본주의에 대한 신복음주의의 비평을 수용하는 것 같다. 그것은 근본주의 운동이 교리적 축소주의, 방법적 편협주의, 소아병적 부정주의, 고양이와 개의 싸움 같은 지엽적 논쟁, 학적 수준의 저조, 사회 도피적 경향, 독립주의의 위험 등을 가졌다는 비평들이다(100-114쪽).

무슨 문제의 논의에서든지, 용어의 정확한 개념은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는 먼저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에 대한 자신의 개념들을 명확히 말했어야 한다. 본인이 알기에는 신복음주의자들이 지적하는 점들은 어떤 근본주의자들의 약점들일지는 몰라도 근본주의 운동의 본질이 아니며 근본주의 대회들이 지향하는 바도 아니다. 그렇다면 몇몇 약점들을 들어 어떤 운동이나 입장을 비평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오히려 바른 비평의 태도는 그 운동이 주장하고 지향하는 바에 대해 성경적으로 논의하는 것이다.

“우리의 입장이 근본주의가 아니요”라고 그가 말했을 때 만일 그 근본주의가 소위 그런 약점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오늘날 근본주의자들도 그런 입장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서 “역사적 칼빈주의는 근본주의적 요소도 있다”고 말하며 더욱이 “칼빈주의자는 근본주의를 받아 들일 수는 있어도 근본주의자는 될 수 없다”고 말하니 도대체 그의 ‘근본주의’는 무엇을 말하는가?

만일 그가 근본주의를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받아들이는 입장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입장은 근본주의가 아니요’라는 말은 틀린 것이고, 그는 ‘우리의 입장은 근본주의이요’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런 것이 아니고 그가 근본주의를 신복음주의자들이 비난하는 어떤 약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라면, ‘칼빈주의자는 근본주의를 받아 들일 수는 있어도’라는 그의 말은 틀린 말일 것이다.

또한, ‘근본주의를 받아 들이는 것’과 ‘근본주의자가 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것도 독자들을 혼동케 한다. ‘근본주의자’라는 말이 일반적인 정의가 ‘근본주의를 받아 들이는 자’를 가리킨다는 것은 상식적이다. 그런데 그의 발언은 혼란스럽다.

이와 같이 근본주의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지 않으면서도 그는 계속 말하기를, “극단의 근본주의 편에서 볼 때는 웨스트민스터나 커비난트 신학교의 입장이 신복음주의적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본주의만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고 한다. 그는 ‘극단의 근본주의’가 무엇인지 먼저 개념을 분명하게 해설해야 했다. 또 ‘우리는 근본주의만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근본주의는 무엇을 의미했는지도 분명히 해야 했다.

만일 근본주의가 성경의 근본적 교리들을 믿는 입장을 가리켰다면, 그는 성경의 근본적 교리들을 따르는 입장을 왜 비난하는가? 그런 근본주의의 입장은 완전히 옳은 입장이 아닌가? 만일 그것이 아니고 근본주의가 어떤 인간적 약점들을 의미하는 말이라면 ‘우리는 근본주의를 따르지 않는다’고 말했어야 정당하지 않겠는가?

이런 모든 혼란과 모순이 생기는 것은 그의 논의에서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에 대한 기본적 개념 혹은 정의가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근본주의에 대한 모든 논의는, 근본주의 역사에서 고찰되고 확인되듯이, 근본주의가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들을 보수하고 자유주의적 배교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초교파적 운동 혹은 입장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김의환 박사는 또한 근본주의의 결함들을 열거하면서 신복음주의자 칼 헨리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첫째로, 그는 근본주의가 교리적 축소주의의 약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116, 117쪽). 그는 말하기를, “미국의 근본주의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교리만을 안고 성경학교로만 돌아가 그것만 되풀이 하면서 지나는 동안 오늘의 신학적 판도에서 보수 신학을 위해 싸울 수 있는 학자를 기르지 못하고 말았다”고 했다(116쪽).

그는 계속 말하기를, “과학에 대한 혐오, 지식에 대한 반감, 세속에 대한 기피, 이와 같은 근본주의의 경향은 필경 학적 세계에서 경원되고 신학 운동의 주류에서 배제되고 칼빈주의자들에게서 격리되게 하고 말았다. . . . 근본주의가 신학적 ‘이니시아티브’를 신정통주의에게 빼앗기게 된 것은 근본주의 신학 자체의 신학적 빈혈증 때문이었다”고 했다(117쪽).

그러나 이것은 근본주의의 핵심적 논의가 되지 못한다. 또 근본주의의 초교파적 성격을 이해하면 왜 근본주의 운동에서 근본 교리들에 대한 언급이나 강조가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근본주의 운동에 속한 교파들은 자기들의 신학 체계를 가지고 있지 몇 가지의 근본 교리만을 믿는 자들이 아니다. 또 과학에 대한 혐오나 지식에 대한 반감은 불경건한 과학과 지식에 대한 것이지 진정한 과학, 진정한 지식을 누가 반대하는가?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은 1920, 30년대에 훌륭한 신약 신학자이었던 제이 그레셤 메이천 박사를 그들의 모범으로 존경하고 있다.

가난하고 빈약한 집안을 가난하고 빈약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누가 가난하고 싶어서 가난하며 누가 빈약하고 싶어서 빈약한가? 근본주의자들의 중심이 바르다면 그들의 약점을 가지고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신학계에 학자로 말한다면, 단연히 자유주의적 학자들이 다수가 아닌가? 우리가 쓰는 히브리어 사전(BDB, KB)이 그러하며 신약신학 사전(Kittel)이 그렇지 않은가? 약점들을 비난하지 말고 본질적 주장을 성경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둘째로, 김의환 박사는 근본주의가 방법적 편협주의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117-119쪽). 이것도 그가 신복음주의자들의 생각을 그대로 채용한 것이다. 그는 근본주의가 부정적 사고 방식이 체질화 된 운동이라고 비난한다. 그는 근본주의가 교리 문제가 아닌 지엽적 문제나 시행 방법의 차이 때문에 교파를 분열시켰고 불필요한 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그는 신복음주의자들이 묘사하는 대로 근본주의자를 ‘신학적 깡패, 연합 운동의 방해자, 문화의 낙후자, 반과학-반지식주의자, 극단적 세대주의자, 강단 위주의 선풍주의자, 과격한 감정주의자, 사회적 은둔주의자, 열광적 찬송주의자’ 등으로 가혹하게 비난한다(118, 119쪽). 그의 말이 옳다면 아무도 근본주의자가 되기를 원치 않을 것이며 근본주의 가까이도 가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논점을 흐려놓고 하나님의 귀한 종들과 사역을 순전한 독설로 비난하는 악한 일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근본주의의 그 중심적 주장과 입장을 논의함이 없이 단순히 어떤 근본주의자들의 약점들을 마치 그것들이 근본주의의 본질인 것처럼 선전하는 것은 논점을 흐려놓는 일이다. 설령 신복음주의자들의 비난이 다 옳다고 하더라도, 근본주의가 주장하는 ‘배교로부터의 분리’의 외침은 여전히 중요한 요점으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논점을 흐려놓지 말고 배교의 문제와 배교로부터의 교제의 단절 혹은 분리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진실하게 논의하고 확정해야 한다.

사실, 근본주의는 신복음주의자들이 독하게 비난하는 그런 점들을 옹호하지 않는다. 근본주의자들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혹 자신들에게 어떤 약점들이나 실수들이 있었다면 그것들을 뉘우치며 고치려 하는 자들이다. 약점과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다. 또 많은 경우, 그 책임은 어느 한 쪽에 있지 않다. 더욱이 오늘날 배교의 물결이 너무 크기 때문에, 사탄의 활동이 너무 교묘하게도 교회들과 신학교들 안에서 승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이 바른 길 가고 좁은 길 간다는 것은 단순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보수하고 배교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외치는 자들을 ‘신학적 깡패, 연합 운동의 방해자’로 몰아붙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열심히 설교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자들을 ‘강단 위주의 선풍주의’니 ‘과격한 감정주의’니 ‘열광적 찬송주의’니 하고 비난하는 것은 진실한 형제들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김의환 박사는 또 그의 책에서 1936년에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면직되었던 보수적 신학자요 지도자인 제이 그레셤 메이천이 분리주의적 근본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반틸의 글을 인용하였다(123쪽). 그러나 그는 메이천 당시의 북장로교회가 종교개혁 당시 칼빈이 떠난 천주교회보다 성경의 기본적 교리를 더 불신앙하였다고 말함으로써 메이천이 모교단을 떠난 것이 정당한 것이었음을 옹호하였다(124쪽).

물론, 메이천은 1930년대 미국의 상황에서 먼저 교단 내에서 진리의 선한 싸움을 싸웠었다. 그러나 그 때에도 그는 이렇게 글을 썼었다. “만일 자유주의파가 실제로 교회의 기관들을 완전히 장악한다면,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은 그 교회의 활동을 계속 후원할 수 없을 것이다. . . . 만일 자유주의파가 실제로 교회를 장악한다면, 복음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물러설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기독교와 자유주의, 166쪽).

이것이 성경적 분리의 정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더욱, 교단이 자유화 되고 배교적이게 된 이후에 그 교단을 떠나고 그 교단과 교제를 끊는 것이 성경적으로 바른 태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만일 그가 메이천의 행동을 정당한 것으로 참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근본주의적 정신에 동의해야 할 것이다. 근본주의는 성경에 가르친 대로 배교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입장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근본주의는 오늘날의 배교와 혼동의 시대에 성경적인 바른 입장과 태도이다.

간하배 교수의 비평에 대한 비평

근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많은 영향을 준 또 다른 한 사람은 간하배(Harvie M. Conn) 교수이었다. 그는 미국 정통장로교회 선교사로서 한국에 나와서 10여년 동안 활동하였고 특히 예장 합동측 총신대학 신학연구원에서 강의하였다. 그는 지금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실천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1973년 현대신학해설(한국개혁주의 신행협회 편찬)이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이것은 그가 예장 합동측 기관지이었던 기독신보(기독신문)에 여러 번 기고한 글들을 모은 것이었다.

그는 그의 책에서 1930년대 이후의 근본주의를 ‘신근본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이들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칼 매킨타이어 같은 인물을 거기에 포함시키지 않는다(159쪽). 그는 근본주의의 문제점을 열거하면서 체계적인 교리 작성에 대한 무관심, 하나님의 전체적 뜻을 축소함, 비성경적인 부정주의와 독고(獨孤)주의로 빠질 위험 등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첫째나 둘째의 문제는 초교파적 운동 일반이 갖는 특성이며 근본주의의 약점이나 문제점이 될 수 없다. 초교파적 운동은 교파적 신학 체계를 추구하는 운동이 아니다. 체계적인 교리 작성이나 하나님의 전체적 뜻의 추구는 각 교파의 신학, 특히 장로교 신학에서 계속 추구되어 왔고 또 추구되어야 할 바이다.

또 셋째의 문제 즉 ‘비성경적인 부정주의와 독고주의로 빠질 위험’은 어디까지나 위험성이지 그것이 그 운동의 본질이 아닌 한 그 운동 자체의 문제점으로 열거되어서는 안된다. 근본주의자들도 그런 위험성을 인식하고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기를 구한다.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로서 비성경적 오류에 떨어지기를 원하는 자는 없다.

간하배 교수는 후기의 근본주의 곧 신근본주의에 대하여 논하면서 그 운동을 세대주의와 동일시 하려는 경향을 보인다(163쪽). 그러나 그것은 정당하지 않다. 근본주의는 초교파적 운동이었고 그 구성원들 중에 세대주의자들이 많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운동이 세대주의와 동일시 되는 것은 옳지 않다. 단적인 반증으로, 오늘날 달라스 신학교나 바이올라 대학교(탈봇 신학교) 등은 강한 세대주의 경향을 보이지만, 근본주의로 불리우지는 않는다.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세대주의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 때문에 근본주의가 세대주의와 동일시 된다는 말은 잘못된 판단이다.

간하배 교수는 신근본주의의 위험한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과도히 부정적인 자세, 사사로운 다툼, 질책의 언어, 기독교의 사회적, 문화적 명령의 무시, 과학 일반에 대한 불신적 태도, 반교파주의 등(165-169쪽).

그러나 이것들이 근본주의의 본질적 특징들인가? 아니다. 혹 어떤 근본주의자들이 이런 저런 잘못을 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불완전에서 온 실수들이요 그런 것 때문에 그 운동이 주장하는 본질적 입장이 흐려지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배교의 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이 교회들 안에서 없어지지 않는 한 없어질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주의 진실한 종들은 배교의 문제의 논점을 흐리지 말고 배교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분리’의 태도이다. 배교와는 어떤 협력이나 타협이 있을 수 없다. 배교와는 오직 교제의 단절 즉 분리가 필요하다.

그 외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는, 주의 모든 진실한 종들은 성경적 사상과 덕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아무도 잘못된 것을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지나치게 부정적인 자세를 좋아하며, 어떤 이가 사사로운 다툼을 좋아하며, 누가 은혜로움과 예의를 저버리고 질책만 좋아하겠는가? 어떤 그리스도인이 기독교의 사회적, 문화적 명령, (만일 그것이 성경적이라면) 그것을 무시하겠으며 누가 참된 과학을 무시하겠는가? 어떤 이가 건실한 교파적 확신을 무시하며, 교회가 가능한 한 외적으로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반대하겠는가? 건전한 정신을 가진 성도라면 이 모든 점들에 대하여 부정적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들은 근본주의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간하배 교수는 근본주의 혹은 신근본주의를 논하면서 정작 중요한 ‘분리’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고 신복음주의자들이 열거하는 어떤 근본주의자들의 약점들에 대해서만 언급하였다. 이것은 어떤 운동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방법이나 태도가 될 수 없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실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의 실수들이나 약점들을 그 사람의 사상이나 입장이라고 묘사하지는 않는다. 비록 그 실수들조차도 하나 하나 그것들이 정말 사실이며 얼마나 그러한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설사 그것들을 다 인정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배교로부터의 분리냐 아니냐’는 태도의 문제는 남는다. 거기에 근본주의의 본질이 있다.

박아론 교수의 비평에 대한 비평

근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영향을 끼친 또 한 사람은 박아론 교수이다. 그는 고(故) 박형룡 박사의 아들로서 다른 이들보다 비교적 보수적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1985년에 쓴 보수신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는 책에서 근본주의에 대해 부정확하고 잘못된 견해를 드러내었다.

그는 1930년대에 메이천의 동료들이 미국의 북장로교회를 떠나 새 교단을 설립한 것을 언급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와 같은 ‘이탈과 분리’가 그 후의 미국 근본주의 운동의 특징처럼 되어 버렸다. 투쟁하기보다는 자유주의화 해가고 있는 신학교들과 교회들로부터 이탈하여 그들의 신학교들과 교회들을 별도로 세우는 것이 그들의 대(對)자유주의 전략의 패턴이 되어 버렸다. 이와 같은 대자유주의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대교단들과 신학교들을 자유주의자들의 손에 넘겨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위의 책, 22쪽).

그의 글에는 제리 팔웰의 근본주의 현상이라는 책을 참고하라는 각주가 붙어 있다. 제리 팔웰은 근본주의자로 자처하지만, 신복음주의 정신을 가지고 활동하는 자로 알려져 있다.

박아론 교수가 근본주의자들이 성경적 분리의 원리를 좇아 불가피하게 행한 분리를 무책임한 오류로 매도하는 것은 잘못이다. 특히 1936년 북장로교회의 작은 분열이 각 노회가 메이천과 그의 동료들을 면직시키고 총회가 그들의 상고를 기각했을 때 이루어졌음을 생각하면 분명히 그러하다. 또 다른 경우들에서도 자유주의자들 혹은 포용주의자들이 교권을 장악했을 때 개인적으로, 단체적으로 분리가 이루어졌다면 그 분리는 무책임한 오류로 비난될 수 없다.

오히려 이런 경우들에 보수주의자들이 그 배교적 혹은 포용적 교단들 안에 머물며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악에 대한 타협이며 주께 대한 불신실이다. 사실, 근본주의 운동은 대교단들이 자유주의화 혹은 포용주의화 되었을 때 분리의 운동으로 진전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저 배교적, 포용적 교단들이 더 이상 신앙적 용사들의 도전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침묵이 곧 타협임을 잘 보여준다. 배교에 대한 성경적 바른 태도는 ‘분리’이다.

박아론 교수는 또한 근본주의 운동에서 세대주의에 대해 포용적 태도를 가지는 입장을 가리켜 ‘신근본주의’라고 부르면서 미국에서 칼 매킨타이어 박사, 페이스 신학교, 성경 장로교회, 밥 죤스 대학교 등이 거기에 속한다고 말한다(위의 책, 28, 29쪽).

그러나 이것은 그가 근본주의 운동이 초교파적 운동이라는 사실을 잊은 데서 나온 발언이다. 물론 우리가 교파적 확신을 가지고 교리적 토론을 하고자 할 때 초교파적 운동은 우리에게 거리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배교가 현대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파적 토론을 넘어서서 자유주의에 대처하는 공동 전선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 근본주의의 초교파적 성격이 있다. 20세기 초 보수적 지도자이었던 제이 그레셤 메이천도 초교파적 협동이 완전히 가능하다고 보았다(기독교와 자유주의, 71-75쪽).

또한 박아론 교수는 신근본주의를 비평하면서 다음의 몇 가지 점들을 열거하였다: (1) 분리주의적 사고의 심화(深化), (2) 신학 연구와 문화적 관심의 쇠퇴, (3) 주제 의식이 불분명한 인물 본위의 운동, (4) 독고적 근본주의자들로 둔갑.

첫째로, 그는 신근본주의가 분리주의적 사고를 심화시킨 운동이라고 비평하였다(박아론, 29, 30쪽). 그는 신근본주의 지도자 칼 매킨타이어가 부정당한 분리의 원인자라고 비난하면서, “분리하라는 경고는 불신에서 분리하라는 것뿐 아니고 신근본주의 환상에 동참치 않는 자들로부터 분리하라는 요구가 되었다”는 간하배 교수의 논평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또 그는 신복음주의자 칼 헨리가 근본주의의 한 특징이 ‘부정적 사고 방식’이라고 비난한 것을 “일리가 있다”고 긍정한다(위의 책, 30쪽).

그러나 이러한 논평은 정당하지 않다. 만일 어떤 근본주의 지도자들에게 부족이나 약점이 있어서 부정당한 분열의 부분적 원인이 되었다면 그것을 옹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분열이 그 운동의 본질인가? 또 커버넌트 신학교의 분리가 순전히 칼 매킨타이어 박사의 잘못이며 커버넌트 신학교나 그 학교가 속했던 교단(처음엔 RPCES, 지금은 PCA)의 입장이 옳았다면 왜 오늘날 그 교단이 신복음주의적인 미국 복음주의 협의회(NAE)에 소속하여 있는가?

둘째로, 박아론 교수는 신근본주의가 신학 연구와 문화적 관심에 있어서 쇠퇴하고 있다고 비평하였다(위의 책, 30, 31쪽). 그는 신근본주의가 “다섯 가지 교리만을 안고서 성경학교로 돌아가 그것만 되풀이 하면서 지나는 동안 오늘의 신학적 판도에서 보수 신학을 위하여 싸울 수 있는 학자를 기르지 못하고 말았다”고 비난한 김의환 박사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다(위의 책, 31쪽).

그러나 이러한 논평도 정당하지 않다. 이것이 근본주의 혹은 신근본주의의 본질인가? 그들은 다섯 가지 교리만 안고서 성경학교에 돌아가 그것만 되풀이 하는 자들인가? 그런 악한 비난이 어디 있는가? 그의 부친인 고(故) 박형룡 박사는 말하기를, “근본주의자들은 기독교 교리 체계를 축소하였다고 비난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적당한 비난이니 금일의 시대론자들이라도 다섯 가지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전통적인 신조들도 여전히 믿는 것이 많으리라고 생각된다”고 하였다(박형룡, 신복음주의 비평, 23쪽).

셋째로, 박아론 교수는 신근본주의가 주제 의식이 불분명한 인물 본위의 운동이라고 비평하였다(위의 책, 33쪽). 그는 말하기를 “오늘날의 ‘신근본주의 운동’은 주제보다는 인물을 중시한 결과 신학적 노선보다는 밥 죤스나 칼 매킨타이어와 같은 특출한 인격에 그 닻을 내리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같은 쪽). 심지어 그는 말하기를, “이런 점에 유의할 때 에드워드 죤 카넬이 근본주의를 ‘고전적’(classic)인 것과 ‘종파적’(cultic)인 것으로 나누고 ‘신근본주의’ 또는 ‘후기 근본주의’ 운동을 후자에 해당시킨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의 보수적 신학자라는 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귀한 종들과 바른 운동에 대하여 이런 무지하고 무책임한 비난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오늘날 근본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들이 밥 죤스나 칼 매킨타이어 뿐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무식의 소치이다. 오늘날 미국과 세계에 흩어져 있는 근본주의자들 가운데는 국제 기독교 협의회(ICCC) 외에도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WCF)와 세계 성경적 교회 협의회(WCBC)에 속한 수많은 지도자들이 있다. 북아일랜드의 자유 장로교회의 지도자 이안 페이슬리 박사나 한국에 종종 나오시는 O. 탤매쥐 스펜스 박사 등도 거기에 속한다.

더욱이 그가 근본주의에 대한 에드워드 카넬의 악한 비난에 동감을 표현했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놀라운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에드워드 카넬은 신복음주의 신학교인 풀러 신학교의 교수이었고 신복음주의의 대변자로 짧게 활약했다가 별세한 분이었다. 그가 후기의 근본주의를 ‘종파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분명히 따져 보아야 할 점이다. ‘종파적’(cultic)이라는 영어 표현은 이단 종파 혹은 사이비 종파라는 의미이다. 만일 근본주의가 그런 운동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당연히 그리고 단호히 거절하고 반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근본주의가 그런 운동이 아니라면, 카넬과 박아론 교수의 그런 비난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큰 악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신학자들 혹은 교회 지도자들이 근본주의에 대하여 이런 류의 비난을 하는 것에 대답하여, 탤매쥐 스펜스 박사는 근본주의: 이단 종파가 아님(O. Talmadge Spence, Fundamentalism: Not a Cult)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그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근본주의자들인 우리는 ‘옹고집들’로부터 ‘웃기는 자들,’ ‘생각 없는 자들,’ ‘변두리의 미치광이들,’ ‘이단종파자들’까지 온갖 명칭들로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이단종파자가 아니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우리를 그런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글을 읽을 수 없거나 읽기를 거절하는 자들, 혹은 들을 수 없거나 듣기를 거절하는 자들일 것이다. 우리는 이단종파자가 아니다!”(Spence, p. 22).

넷째로, 박아론 교수는 신근본주의자들이 ‘독고적(hyper) 근본주의자들’로 둔갑했다고 비평하였다(박아론, 32-35쪽). 그가 어떤 뜻으로 ‘독고적’이라는 말을 사용했는지 분명치 않으나, 영어의 ‘하이퍼’라는 접두어는 ‘과도한, 지나친’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극단적 근본주의자’라는 말로 이해된다. 그의 이 표현은 제리 팔웰의 근본주의 현상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박아론 교수는 신근본주의의 마지막 문제점을 이렇게 표현해 놓고서는 그 구체적인 점들을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독고적 근본주의자들’이 제리 팔웰에 대해 신복음주의적 경향이 있다고 비평한 것에 “극단적이며 무리한 면이 없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어떤 점에서는 “공감이 간다”고 말했다(박아론, 34쪽). 박아론 교수의 입장은 분명치 않은 것 같다.

칼 매킨타이어 박사나 밥 죤스 박사의 무엇이 극단적이란 말인가? ‘신근본주의’의 무엇이 극단인가?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과 교회의 배교에 대항하여 성경적인 교제와 분리의 원리를 주장하는 것이 극단인가?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 극단인가? 오히려 사실을 정확히 검토하고 판단함이 없이 주의 귀한 종들을 비난하는 것이 편협함과 극단이 아닌가?

박아론 교수는 근본주의자로 자처하는 제리 팔웰이 해롤드 린젤이나 W. A. 크리스웰 등의 신복음주의자와 교제하는 ‘처신술’을 정당하다고 보든지, 아니면 다른 근본주의자들의 표현대로 제리 팔웰이 ‘근본주의자의 옷을 입었으나 신복음주의자의 목소리를 내는 자’라고 비평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O. 탤매쥐 스펜스 박사는 팔웰에 대하여 이렇게 논평했다. “팔웰은 그가 쓴 근본주의 현상이라는 책과 근본주의 저널에서 근본주의를 ‘폭넓은 복음주의적’ 연합과 기초로 확대시키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의 ‘폭넓은’ 기초는 분리와 전투성에 대한 거부이었고, 이전의 근본주의자들, 신복음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은사주의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무시해 버리는 타협이었다. 팔웰은 근본주의와 그 역사적 유산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려 했지만, 결코 그것을 완수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그의 조합을 통하여 신복음주의자들, 개조적 신근본주의자들, 남침례교인들, 풀러 신학교의 자유적 복음주의, 에큐메니칼 은사주의자들 등과의 어떤 친척 관계를 볼 것이다”(Spence, p. 26).

결론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문제는, 비록 20세기 초엽과 중엽에 미국 교회에서 일어난 문제이었지만,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경험될 수 있는 문제이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보수적 교회들은 근본주의보다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론적으로,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어떤 신학적 탈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적 탈선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한 신학적 탈선들은 이미 자유주의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고(故) 박형룡 박사는 신복음주의를 ‘신자유주의 내지 신이단운동’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던 것이다(박형룡, 신복음주의 비평, 47쪽).

그러나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에 대한 바른 개념은 그러한 신학적 변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제의 문제에 있다. 그것은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의 문제이다. 오늘날 복음주의는 자유주의자들을 강하게 비평하거나 배격하지 않는다. 복음주의자는 자신의 교단이 고의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할 때도 그 교단 안에 머물러 있으며 그 자유주의자들과 교제하고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약하면,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성경에 밝히 계시되고 전통적으로 믿어온 진리들에 대한 확신이 없고,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싸우려는 마음이 약하며, 성경적 분리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그 교훈을 순종하려고 하지 않는다.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이런 태도는 분명히 성경적 분리의 교훈을 어기는 일이요 주께 대한 불성실과 불순종이다. 그러므로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는 현대 교회의 배교와 불신앙에 대해 타협하는 비성경적 입장에 불과하다.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잠언 28: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잭 스티븐스는 오하이오 바이블 펠로우쉽 비지터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신복음주의자의 마음가짐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복음으로 세상을 접촉하는데 관심을 가지며 그것이 더 빠를수록 더 좋다고 본다. 또 그는 그것을 하기 위해 그 밖의 거의 모든 것을 희생하려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에 있어서, 그는 너무 지나치게 많은 것을 포기하며, 그가 진전시키려고 하는 바로 그것을 파괴한다. 그는 외적인 성공을 거두며 참으로 형통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매우 진실하며 자기가 바르다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의 형제이다. 그러나 그는 매우 잘못되어 있다”(Calvary Contender, 1998년 3월 1일).

오늘날 우리 나라의 많은 보수 교회들은 이러한 신복음주의 혹은 복음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분별력 없는 많은 보수적 목사들은 화평과 일치와 사랑을 표방하면서 성경적 분리의 교훈을 확신하고 지키려 하는 자들을 비난한다. 많은 목사들이, 비록 하나님의 다른 일들에 대해 열심이 있어 보이나, 교회의 교리적 순결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순결한 교회를 구원 계획의 목표로 삼으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큰 잘못이다.

한편, 근본주의자들의 분리의 확신은 많은 목사들의 오해와 비난을 받아왔다. 자유주의적 편견에서 나온 비난은 놔두고라도, 분별력 없는 많은 복음주의 목사들조차도 근본주의의 분리의 확신을 비난하였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의 다른 일에 대해 열심이 있는 것 같으나, 교회의 순결성에 대해 무관심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순결한 교회를 구원 계획의 목표로 삼으셨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바른 입장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명백히 이단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기독교는 마땅히 자유주의 이단을 배격해야 하며, 자유주의자들을 제명 출교해야 한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을 포용하는 신복음주의는 악에 대한 타협이며 주께 대한 불충성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적 배교와 신복음주의적 타협으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하는 근본주의는 성경적으로 바른 입장이다. 오늘날 배교와 타협과 혼동이 점점 가득해지는 때에, 하나님의 뜻은 배교와 타협으로부터의 분리이다.

우리가 근본주의를 옹호하는 이유는 근본주의가 성경적으로 바른 입장이기 때문이며, 사람들이 근본주의를 잘못 알고 잘못 비난하기 때문이며, 근본주의라는 용어 외에 오늘날의 바른 입장을 나타낼 적절한 말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에는 근본주의적 교회들이 필요하다. 근본주의적 장로교단이 필요하고, 근본주의적 초교파 협의체가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단체에근거하여 바른 기관들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근본주의적 정신에 입각한 장로교 신학교, 성경공회, 방송국, 선교 단체, 신문사, 출판사 등이 필요한 것이다.

근본주의에 대한 바른 신념을 가진 목사들, 평신도들, 교회들은 대동 단결하여 이 악한 배교와 타협의 시대에 작을지라도 바르고 순수한 하나님의 교회들을 건립하고 하나님의 일들을 바르고 충성되게 수행해야 할 것이다. 바른 확신과 분별력을 가진 종들은 뜻을 함께하여 새 일을 시작해야 한다.

전체적 결론

현대 교회는 한 마디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세계적으로 개신 교회의 전통적 대교단들은 그 지도층이 현대 자유주의 신학을 배제할 의지가 없고 오히려 그것을 용납하고 그들 자신이 자유주의화 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배교(背敎)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 도대체 주께 대한 배신과 변절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자유주의 교단들 안에 있는 소수의 보수적 지도자들은 이 배교를 대항하기는커녕 침묵하면서 배교와 타협하고 협력하는 행위를 일삼고 있으니, 이는 무분별함 때문인가, 불신실함 때문인가, 아니면 연약함 때문인가?

더욱 가슴 아픈 일은, 보수 교회들의 타협이다. 보수 교회의 지도자들의 다수는 자유주의 교단들 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거기로부터 나오라고 외치지 않는다. 그들 자신은 오히려 자유주의 교회들과 그 지도자들과 교제하고 협력하고 있다. 이 포용주의적 풍조가 현대 보수교회의 특징이 되어 가고 있다. 이 타협, 이 불신실을 누가 고발할 것인가? 누구에게 고발할 것인가? 무엇을 통해 고발할 것인가? 이리하여, 오늘날 신실한 개혁 교회들과 교단들을 찾아보기가 심히 어려운 실정이다. 미국의 어느 장로교단이 모범적인가? 한국의 어느 장로교단이 모범적인가? 우리는 신실한 교회들과 신학교들이 외적 영광을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신실한 지도자들을 꼽아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주의 종들과 자녀들에겐 낙심이 있을 수 없다. 고린도후서 4: 1,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4:7, 8,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아라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린도후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는 주의 은혜로 힘을 내어 이 배교와 타협의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참 교회의 건립과 사역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전체적 결론으로서 현대 보수교회들이 힘써야 할 몇 가지 점들을 정리해 본다.

첫째로, 우리는 옛신앙을 파수하고 전파해야 한다.

옛신앙의 핵심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속죄의 복음이다. 바울 사도께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음”을 전파하셨던 것과 같이, 오늘도 교회와 목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만을 전파해야 한다. 그것은 영원한 복음이며, 20세기 말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 그 뿐만 아니라, 교회는 옛부터 믿어온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포함한 교리 체계를 지키고 전파해야 한다. 보수신앙의 부흥, 즉 옛신앙의 보수와 전파는 20세기말의 혼란한 현대교회의 절실한 요구이다. 속죄의 복음을 믿은 참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들이, 속죄의 복음만을 전파하는 참 교회들이, 처처에 세워져야 한다. 여기에 죄와 죽음을 정복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있고, 여기에 확실한 천국의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의 사랑의 공동체가 있다.

둘째로, 우리는 오직 말씀과 기도로만 진행해야 한다.

교회의 바른 진행의 힘은 오늘날 유행병처럼 강조되는 신비적 은사 경험에 있지 않고, 신앙의 옛 선조들이 하던 대로 신구약성경의 성실한 연구와 날마다 하나님을 우러러 보며 하는 진실한 기도의 무릎에 있다. 성경 말씀대로만 믿고, 성경 말씀대로만 살기로 굳게 다짐한다면, 현대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은 즉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 받은 자들이라면,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라면, 온갖 종류의 불신앙, 불순종을 회개하고, 또한 땅의 것을 구하기 때문에 오는 인간적 변명과 타협을 깨끗이 떨어버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앞에 복종해야 한다. 그 뜻은 신구약 성경 말씀에 밝히 기록되어 있고 제시되어 있다.

셋째로, 우리는 성경적 분리의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

현대교회문제는 단지 로마서 14장에 언급된 것과 같은(1-5절, 13절) 관용할 수 있는 윤리적 문제가 아니다. 현대교회문제는 이단을 포용해도 되는가 하는 중대한 문제이다. 현대교회문제는 한마디로 ‘분리’의 문제이다. 성경적 분리의 명령을 어떻게 순종하며 현실적 상황에 건전하게 적용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과격한 분리나 정죄는 피해야 한다. 인간적 교만은 이단의 포용만큼이나 큰 죄악이다. 우리의 주장이 하나님의 교회들에 대한 눈물과 동정을 가진 것이어야 할 것이다. 배교와 타협의 악에 대한 책망이나, 하나님의 바르고 온전한 뜻에 대한 우리의 확신과 입장을 천명함도 어지러워진 교회들에 대한 눈물과 동정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대 교단들이 자유주의화 되었거나 배교(背敎)된 현 상황에서, 성경대로 믿는 목사와 신자는 자유화된 교단들 안에 머물러 있지 말고 거기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야 한다. 또한 보수교회들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분별한 연합활동을 중지하고 마땅히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적 교단들과 분리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가장 무서운 이단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선교의 개념이 변질되어 사회 정치적 활동들도 선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경향을 단호히 배격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옛복음을 그대로 증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또 보수적 개혁 교회들은 예배의 세속화와 교회 음악의 타락, 낙태와 동성애의 용납 등 교회의 윤리적 부패에 대해서도 확실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은사운동의 혼란에 대해서도 진실한 성도들에게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한다.

오늘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제의 원리이다. 성경적 보수교회들은 성경적 보수교회들만 교제해야 한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 보수적 교회들은, 비록 자신들의 모습이 연약하고 보잘 것 없을지라도, 교회의 영광을 교인수나 건물 크기나 헌금 액수 등의 외적인 데서 찾지 말고, 자신이 고백하고 선포하는 복음 진리와 거룩한 순종의 삶 등의 내면적인 데서 찾아야 한다. 성경적 교회는 땅에 속한 것들을 바라지 않고 하늘에 속한 것을 바란다.

넷째로, 우리는 바른 신학교들을 세워야 한다.

신학교는 옛 선지학교와 같이 제자 훈련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거기에서 목사와 전도자 후보생들은, 경건과 거룩의 훈련과 더불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전체적, 기본적 지식을 습득해야 하고, 기독교의 교리들에 대한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해야 한다. 그들은 또한 사도시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교회의 역사에 대한 바른 입장에서의 개괄적 지식과, 특히 현대교회의 문제들에 대한 바른 분별력을 얻어야 한다. 거기에 덧붙여, 그들은 또한 목회와 전도의 실제적 문제들에 대한 필요한 지식과 훈련도 쌓아야 한다.

신앙과 인격과 실력을 구비한 충성된 신학 교수들의 채용은 바른 신학교 건립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 디모데후서 2:2,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교회는 공정한 시험과 면접을 통해 그들을 선별하여 채용해야 하며, 또한 그들이 신학 연구와 교수의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분열의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자유주의 이단들과의 분리는 성경적인 정당한 분리이지만, 교권 쟁탈을 위한 분열, 지방색을 따른 파벌, 이권과 명예심으로 인한 분쟁 등은 하나님 앞에 심히 죄악된 일들이다. 욕심, 교만, 미움은 옛 사람에 속한 것들이다.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청결한 마음과 겸손과 사랑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은 성도의 초보적 생활 원리이다. 우리는 형제들 간의 단합을 중요히 여겨야 한다. 마태복음 20:26,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에베소서 4:1-3,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참된 교회들이여, 진실한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여,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 혹시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잠에 빠졌을지라도 어서 깨어 일어나라! 하나님의 바른 말씀 안에 굳게 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