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난(亂) 이야기

광화문
                             
▣ 1차 왕자의 난(王子 ― 亂 1398.8 태조 7년 戊寅年 범띠해)
 ○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태조 이성계의 왕자들간의 싸움으로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한다. - 이복 형제간의 싸움

  - 배경
    태조는 둘째부인 강씨의 소생인 방석(여덟째아들,당시 11세)을
    세자에 책봉하였다. 원래 계비 강씨의 요구에 따라 일곱째 아들 방번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공신인 배극렴·조준 등은 방번이 아직 어리고 자질이 
    세자에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방원의 세자 책립을 주장하였다. 
    이에 태조는 방번 대신 방석을 세자에 책봉하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세자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이러한 처사에 한씨 소생의 아들들은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조와 강비 그리고 정도전의 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냉대는 
    결국 혈육간의 살육전을 야기하였던 것이다.

 - 태조 이성계의 후계자 책정에 대한 불만과
    (여기서 후백제 견훤이 장자 신검을 무시하고 막내인 금강이를
    후계자로 지목하는 우를  태조 이성계도 범하게 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정도전의 사병혁파에 대한 이방원의 위기감.

    1398.8 정도전,심효생,남은,이숙번등이 진법훈련에 불참한 왕자들을 
    태조 이성계의 병을 빙자하여 경복궁에 모두 불러모아 제거할 음모를 
    동대문 근처 남은의 소실집에서 모의하다가 안산부사로 있던 이숙번과 이방원의
    휘하 인물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남은 일파를 불의에 기습 살해하고 
    이에 대항하는 세자 방석과 그의 동모형(同母兄) 방번도 
    귀양보냈다가 방번과 함께 살해했다.
    이숙번은 처음에는 정도전 등과 뜻을 같이 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함.

  - 결과 : 왕권우위를 주장한 이방원이 
           신권우위를 주장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정도전,남은,심효생등 정도전 일파와 방원의 이복동생인 방번/방석 제거

    방원이 거사에 성공하자 
    하륜, 이거이 등 방원의 심복들은 그를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방원은 극구 사양했다. 

    장남인 방우는 1393년 이미 병사하였기 때문에 방원은 야심이 별로 없던 
    둘째 방과에게 세자자리를 양보하여, 
    방과가 세자에 책봉되고 곧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방원 일파는 정종 즉위 후 정사공신에 서훈되었으며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병권 집중과 증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한 제도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 정사공신(定社功臣) : 제1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신(29명)들이다.
    1등 - 이화, 이방의, 이방간, 이방원, 이백경, 조준, 하륜, 조영무 등12명
    2등 - 이양우, 이복근, 이지란, 장사길, 박포, 정탁, 이천우, 장사정, 
          이숙번, 신극례, 민무구, 민무질, 심종 등 17명

 ○ 정도전 1342(충혜왕 3)~ 1398(태조 7).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향리집안 출신으로 고조할아버지는 봉화호장 공미(公美)이고, 
    아버지는 중앙에서 벼슬하여 형부상서를 지낸 운경(云敬)이다. 
    어머니는 우연(禹延)의 딸로서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정도전은 이성계보다 2년 늦은 1337년에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개경에 와서 아버지의 친구인 이곡(李穀)(죽부인전)의 아들인
    목은 이색(李穡 한산이씨))의 문하에서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
    박의중(朴宜中)·윤소종(尹紹宗) 등과 함께 성리학을 배웠다.
 
  - 조선을 개창 하다시피한 정도전은 태종 이방원에 의해 역적으로 
    참수되었으며 조선왕조 500년내내 역사 뒤에 숨어 지내다가 
    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을 계기로 복권됐다(1862 고종 2).


▣ 2차 왕자의 난(王子 ― 亂 1400.1 정종2년)  : 
 ○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태조의 왕자들간의 싸움으로, 
     박포의 난이라고도 한다. 동복 형제간의 싸움

  - 배경
    지중추부사 박포朴苞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난을 성공적으로 수습한 공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등공신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죽주(지금의 영동)에 귀양보내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중 방간이 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음을 알고, 
    방간에게 방원이 장차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하였다. 
    방간이 이를 믿고 사병을 동원하자 
    방원도 자기의 사병을 동원하여 개경에서 싸움이 붙었다.

  - 과정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조선의 세력 구조는 
    방원 일파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원의 동복형제들은 여전히 사병을 거느리고 있어 
    이들은 방원에게 만만치 않은 위협 요소가 되고 있었다.

    특히 태조의 넷째 아들인 방간은 
    노골적으로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과 호기를 드러내곤 하였으나 
    인격 · 공훈 · 위세가 방원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이에 방원은 정도전이 추진했던 병권집중운동을 이어받아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었다.

    방원이 정략적으로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조짐을 보이고 
    또한 왕위 계승에 대한 조정의 중론이 방원쪽으로 흐르자 
    방간은 점차 시기심과 불만이 쌓여 갔다. 
    그런 와중에 박포가 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밀고하자, 
    방간은 그 진위를 가려보지 않은 채 사병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 결과
    방원 일파인 이숙번/조영무/이지란(여진족으로 이성계와 의형제)등이 
    숫적으로 열세인 방간일파를 진압
    방간은 방원에게 패배하여 유배되고 박포는 사형에 처해졌다.
    이 일로 방원은 세제(왕위계승자로 결정된 왕의 동생)의 자리를 확보하게 된다.

   제2차 왕자의 난이 수습된 후 
   조정의 대신들은 수차례에 걸쳐 방간을 죽여야 한다고 간언했으나 
   방원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끝까지 그를 죽이지 않고 유배시키는 데 그쳤다.
   방간이 병이 나면  의원을 보내 그를 치료하게끔 도와주기도 하였다. 
   또한 방원이 상왕으로 있던 세종의 치세 때에도 
   방간에 대한 치죄가 논의되었지만 방원과 세종은 이를 거부하였다. 
   방간은 방원의 배려에 따라 천명을 누리다가 1421년 홍주에서 죽었다.

 ○ 좌명공신(佐命功臣) :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신(46명)들이다.
    1등 - 이거이, 하륜, 조영무,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신극례, 이무, 이저
    2등 - 이내, 이화, 이천우
    3등 - 성석린, 이숙, 이지란, 황거정, 박은, 김영렬, 조희민, 윤곤 등12명
    4등 - 조박, 조온, 김승주, 윤자당, 서익, 김정경, 이종무, 연사종, 윤목, 
          조연, 심귀령 등 22명
    
  
▣ 조사의의 난(趙思義 - 亂 1402.11.5 태종2)
 ○ 조사의(趙思義), 강현 등이 동북면(함길도)에서 일으킨 난. 
    동북면의 난(東北面-亂)이라고도 한다.

   - 배경
     조사의(?~1402)는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으로 
     1398년(태조 7) 안변부사가 되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 방석(芳碩)과 그의 형 방번이 희생되자 
     안변 부사 조사의와 신덕왕후 강씨(태조 이성계의 계비)의 조카 강현은 
     그 원수를 갚는다면서 1402년(태종2년) 태상왕인 태조 이성계의 위세를 
     악용하여 동북면(함길도)에서 일으킨 난.

   - 과정
     태종 이방원은 상호군(上護軍, 정삼품의 무관직) 박순(朴淳)을 보내 
     도순문사 박만과 주·군 수령을 회유하도록 하였으나 박순은 군중에게 피살된다. 
     (박순 : 함흥차사(咸興差使)의 고사(古事)가 바로 이 사건에서 연유되었다.)
     정부는 12일에 토벌군을 편성하여 조영무·이천우(李天佑)·김영렬(金英烈)·
     이귀철(李龜鐵) 등을 파견했다. 
     조사의의 군은 고맹주(古孟州)에서 이천우의 군사를 격파하여 기세를 올렸다. 

   - 결과   
     그러나 12월에 접어들자 반란군의 사기가 저하되고 김천우라는 자가 잡혀와 
     정부군의 수가 4만여 명이 넘는다고 하자 두려움이 극에 달해 조화가 도망하려고 
     밤에 군막에 불을 지르고 소리쳐 결국 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틈에 관군이 승리하여 조사의와 아들 홍(洪) 등이 잡혀 모두 처형되고, 
     정용수(鄭龍壽)·신효창(申孝昌) 등은 외방(外方)으로 귀향갔다. 
     이 일로 안변 대도호부를 강등시켜 감무(監務) 파견지역으로 만들었다. 
   
 
▣ 계유정란(癸酉靖難 1453.10.10, 단종1년 계유년 닭띠해)
 ○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일으킨 난
    조선이 개창되고 62년만에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한 사건. 
    단종-13세, 수양-36세,  김종서-63세

  - 배경
    1452년 즉위할 때 단종의 나이는 12세에 지나지 않았으나, 
    당시로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제도로 확립되어 있지 않은 데다가 
    단종의 모후(母后)인 현덕왕후 권씨도 세자빈 때 단종을 낳은 뒤 
    바로 죽어서 수렴청정을 할 만한 사람도 없는 형편이었다. 
    세종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은 자신의 단명을 예견하고 죽기 전에 유언으로 
    영의정 황보인을 비롯하여 
    남지(南智)·김종서 등 대신들에게 단종을 보필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단종이 즉위한 지 얼마 뒤에 좌의정 남지가 죽고 김종서가 좌의정, 
    정분이 우의정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상태에서 황보인·김종서 두 고명대신이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황표정치).   

  - 과정
    그러나 수양대군은 1453년 문종의 유탁을 받은 세 정승 가운데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아들 김승규를 죽였다. 
    이 사건 직후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모반하였으므로 죽였는데, 
    사변이 너무 급하게 일어나 아뢸 틈이 없었다.'고 사후에 상주하였고, 
    곧 이어 단종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을 소집한 뒤, 
    사전에 준비한 살생부에 따라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찬성 이양 등을 
    궐문에서 죽였으며 
    우의정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인 조수량 등을 귀양보냈다가 죽였다. 

    또 수양대군은 자신의 친동생인 안평대군이 '황보인·김종서 등과 한 패가 되어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다.'고 거짓 상주하여 강화도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사하였다. 안평대군(이용)의 책사는 이현로

  - 결과
    수양대군은 10월 10일의 정변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그는 영의정과 이조·병조 판서, 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직하였고 
    정인지를 좌의정, 한확을 우의정으로 삼았으며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를 짓게 하는 등 그의 집권태세를 굳혀갔다. 
    이 정변이 계유년에 일어났으므로 이를 계유정난이라 한다. 

 ○ 정란공신(계유정란의 공신) : 총 43명 
   - 1등 공신 : 수양대군, 정인지, 한확, 이사철, 김효성, 최항, 한명회, 권람, 
                     한명회, 박종우, 박중손, 이계전, 홍달손  12명
   - 2등 공신 : 신숙주, 양정, 홍윤성, 곽연성, 전균 등 11명
   - 3등 공신 : 성삼문, 이예장, 홍순로, 이홍상, 홍순손 등 20명


▣ 이징옥의 난(李澄玉-亂 1453 단종1년)
 ○ 김종서를 도와 6진개척에 공을 세운 이징옥이 김종서계의 인물임을 꺼려서 
    함길도 도절제사(都節制使)로부터 파직되자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 배경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자 
    이징옥이 김종서계의 인물임을 꺼려서 함길도 도절제사가 된 이징옥을 파직하고 
    그 후임에 박호문을 임명, 함길도에 보냈다.
    이징옥은 박호문에게 자리를 인계하고 호위병력 약간을 거느리고
    한양으로 가는 길에 계유정난에 관한 소식을 듣고는 되돌아가, 
    박호문을 죽인후 군사를 이끌고 종성(鍾城)으로 가서 
    스스로를 '대금황제'라 자칭하고 여진족의 후원을 얻어서 반란을 일으켰다..

  - 과정
    여진의 후원을 약속받고 두만강 건너편의 오국성에 도읍을 정하기로 결정하고, 
    두만강을 건너려고 종성에 머물 때 이징옥은
    종성판관 정종(鄭種), 호군 이행검 등의 내부 습격을 받고 
    아들 3명과 함께 사로잡혀 죽고 말았다

  - 결과
    계유정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징옥의 난은 조선정부에 대한 최초의  
    반란이었다. 이 사건 이후에 함경도 지역에 대한 차별대우가 더욱 심화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이시애의 반란(1467년, 세조 13년)이 일어나는 
    하나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 이징옥(?∼1453)
    본관은 양산으로, 중추원지사 이전생의 둘째아들이다.
    어렸을 때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용감하였다. 
    세종 초에는 김종서를 따라 북변에 종군하여 
    1424년에는 경원진 첨절제사가 되어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1436년 회령부판사로서 여진족의 추장을 살해하였으며,
              이 해 경흥도호부판사에 올랐다.
    1449년 중추원지사로 승진하였으며, 
    1450년 세종 때 북방 6진 개척에 크게 공헌했다 하여 
    김종서의 후임으로 함길도 도절제사가 되었다. 

   
▣ 이시애의 난(李施愛의 亂 - 1467.5 세조13년) 
 ○ 함경도 길주(吉州)의 토호(土豪) 이시애가 북도(北道)의 수령을 
    남도 사람으로 임명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난 
     
  - 배경
    세조는 즉위하면서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해 
    북도 출신 수령의 임명을 제한하고 경관(중앙관리)으로 대체하였으며 
    수령들에게 지방유지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의 감독을 강화하게 하여 
    북도출신인 수령들과 유향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유향소[留鄕所]:고려 말기와 조선시대, 지방 군, 현의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기관.

    회령부사를 지내다가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한 이시애는 유향소의 불만·불평과 
    백성의 지역감정에 편승해서 아우 시합, 매부 이명효와 반역을 음모하고 
    1467년(세조 13년) 5월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함길도의 절도사가 진장들과 함께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고 선동하여 
    절도사 강효문, 길주목사 설징신 등을 죽였으며, '방금 남도의 군대가 
    바다와 육지로 쳐올라와서 함길도 군민을 다 죽이려 한다.'고 선동하자 
    흥분한 함길도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유향소를 중심으로 일어나 
    타도 출신 수령들을 살해하는 등 함길도는 대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 과정
    왕족인 18세의 구성군 이준(세종의 네째 임영대군의 아들)을 4도병마도통사에, 
    호조판서 조석문을 부총사에, 허종을 함경도절도사에, 강순, 어유소, 남이 등을 
    토벌대장에 임명하여 18일만에 3만여 명의 관군을 출정시켜 진압.
   (유자광은 자진 출전하여 공을 세움으로 세조에게 발탁되어 병조 정랑직에 오른다)

    이시애는 여진족까지 끌어들여 대항하였으나 
    허종·강순·어유소·남이 등이 이끄는 3만 군대는 
    홍원·북청을 돌파하고 이원의 만령에서 반란군 주력부대를 분쇄하였다. 
    이시애는 길주를 거쳐 경성으로 퇴각하여 여진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이 당시 사옹별좌의 벼슬에 있던 이시애의 처조카 허유례는 
    자기 부친이 억지로 이시애의 일파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시애의 부하인 이주·황생 등을 설득하여 
    이들과 함께 이시애 형제를 묶어 토벌군에게 인계하였다.

  - 결과
    8월 이시애 등이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목이 잘림으로써 
    3개월에 걸쳐 함경도를 휩쓴 이시애의 난은 평정되었다. 
    이 난으로 길주는 길성현으로 강등되고 
    함길도는 남·북 2도로 분리되었으며 유향소도 폐지되었다. 
    구성군 준과 조석문·어유소·허종·허유례 등 41명은 
    조선의 제6차 공신인 정충적개공신으로 녹훈되었다.

 ○ 적개공신(敵愾功臣) :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데 참여한 공신들이다.
   1등 - 구성군 이준, 조석문, 남이, 이숙기, 윤필상, 김교, 박중선,
         어유소, 허종 등 10명
   2등 - 김국광, 이운로, 배맹달, 이종생, 이서장, 어세공, 김관, 허유레
         박식, 김백겸, 장말손, 맹석흠, 심응, 손소, 이덕량, 김순명 등 23명
   3등 - 한계미, 선형, 민발, 오자경, 최유림, 정종, 이양생, 우공 등 12명


▣ 홍길동의 난(洪吉同 ─ 亂 1440(?) ~ 1510 
 ○ 조선 연산군때 활동했던 이름난 화적 홍길동이 일으킨 난리
    허균의《홍길동전》(洪吉童傳)은 홍길동(洪吉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 홍길동은 처음에는 충주일대에서 활약했다. 
    홍길동은 버젓이 당상관의 차림으로 무리를 이끌고 관아에 들어갔으며 
    그 기세에 눌려 지방 관아에도 깍듯이 존대하였다고 한다. 
    산 속에 들어가 근거지를 두고 활동한 흔적은 없으며 
    지방의 권농이나 이정, 유향소의 좌수, 별감등도 알아볼 정도였다. 
    그 위세가 일반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 조선왕조실록에 홍길동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정승이
    연산군에게 홍길동이 잡혔다는 보고를 하는 연산군6년(1500년)의 기사이다.

   “ 영의정 한치형(韓致亨)·좌의정 성준(成俊)·우의정 이극균(李克均)이 아뢰기를, 
   "듣건대, 강도 홍길동(洪吉同)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들을 다 잡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좇았다. ”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연산 6년, 명 홍치 13년, 

  - 출신 
    홍길동은 1440년경에 전라도 장성현 아차곡에서 
    홍상직의 서자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종현의 실존 홍길동연구(1986)에 의하면, 
    홍길동은 홍상직(남양홍씨)의 서자로, 어머니는 관기 옥영향(玉英香)이고 
    1443년 출생하였 1510년 사망하였다. 
    홍상직은 아들 셋을 두었는 데, 귀동, 일동, 길동이었다. 
    귀동과 일동은 정처 남평문씨 소생이다.
    
    체포 후 실록에는 홍길동을 잡았단 기사 이외에 어떻게 벌주었다는 기사가 없다. 
    연산군일기가 시대 상황으로 인해 다소 누락된 부분이 많다고는 하나 
    다른 기록이 상세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점이다. 
   다만 훗날 조선 선조때 홍길동과 같은 강상의 죄로 잡힌 이연수의 처리를 논하면서 
    홍길동의 경우를 들어 도당을 나누어 가두고 심문하기를 청하는 것으로 보아 
    옥중에서 서로 말을 맞추었거나 일부 탈옥을 했을 수도 있다.

  - 홍길동전 홍길동은 조선 시대 지배층과 세간에 널리 알려진 사건으로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거론될 정도였다. 
    허균은 조선 시대의 불합리한 서얼 차별과 백성에 대한 가혹한 수취, 
    국방에 대한 부실 등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국왕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로지 백성이라 역설하였다. 
    허균은 백성을 현실에 순응하는 항민, 불만이 쌓인 원민, 
    사회를 바꾸기 위해 직접 나서는 호민으로 나누었으며 
    홍길동을 호민의 대표로 형상화하여 홍길동전을 지었다.

  -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조선 시대의 3대 도둑으로 장길산, 임꺽정과 함께 홍길동을 논하면서 
    이들의 이름이 장사꾼이 맹세하는 구호에까지 들어와 있다고 적고 있다.

  - 평가
    홍길동은 흔히 의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영남대학교 교수 박홍규는 그의 저서 《의적 정의를 훔치다》에서 
    이들이 설사 실제로는 의롭지 않았다 하더라도 민중들은 이들을 통해 
    부정한 체제에 대한 저항을 꿈꾸었기에 의적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 허균(1569~1618)은 29세 때 장원급제하여 
    황해도관찰사가 되지만 한양기생을 가까이 한다고 탄핵받고 파직된다. 
    그 후 복직됐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다시 탄핵받자 스스로 관직을 내놓고 불교에 몰두한다.
 
    그의 누이 허난설헌의 시를 중국에 출판한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나 
    또 불교를 가까이 한다고 세 번째 파직을 당한다. 
    그러나 그의 학식을 높이 평가한 조정은 그를 공주목사로 임명하나 
    이번엔 서얼출신들과 어울린다는 이유로 네 번째 파직된다. 
    파직 후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과 함께 지낸다.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 종묘사에 대한 잘못된 기록을 발견하고 
    이를 정정시켜 광해군의 신임을 얻어 다시 형조참판이 되고 
    좌참찬이 되어 인목대비 폐모론을 성사시킨다. 

    허균은 파직, 복직을 거듭하는 와중에 자신이 모아온 세력을 바탕으로 
    반역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는 신분제도를 없애고 붕당을 혁파해야 한다는 이상을 가졌다. 
    결국 이 사실이 그의 부하에 의해 발설되고, 
    반란 핵심인물로 체포돼 역모혐의로 능지처참되는 운명을 맞았다. 
    그 허균이 소설 홍길동을 썼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소설 속의 홍길동을 통해 그가 꿈꾸던 이상세계를 미리 그려봤을 것이다. 


▣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 연산군12년)
 ○ 박원종, 성희안, 유순종 등이 연산군을 폐하고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이다.

  - 배경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제거하였다. 
    또한 경연(經筵)폐지·신언패(愼言牌) 실시·성균관(成均館)의 연락(宴樂)장소화
   ·도성 밖 30리 내의 민가 철거·언문 도서의 폐기 등 폭정을 일삼았다. 
    그리고 원각사(圓覺寺)를 폐하여 연방원(聯芳院)으로 고치고, 
    흥청들과 기거를 함께하며 채청사(採靑使)를 각 지방에 보내 미녀를 끌어들이고, 
    유희와 안락으로 세월을 보내며 국정을 도외시하였다. 
    이에 훈구 세력을 중심으로 반정의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 과정
    이조참판을 지낸 성희안과 중추부지사 박원종(월산대군의 처 박씨의 동생)은 
    연산군 재위 12년간 화옥과 황욕 등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흔들어놓은 연산군을 
    폐하기로 밀약하고 당시에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군자부정 신윤무 등의 호응을 얻어 
    왕이 장단 석벽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계획을 꾸몄다.
    1506년 9월 1일, 박원종 · 성희안 · 신윤무를 비롯해서 전 수원부사 장정, 
    군기시첨정 박영문, 사복시첨정 홍경주 등이 무사를 규합하여 훈련원에 모았다.

    그들은 먼저 권신 임사홍·신수근과 
    그 아우 신수영 및 임사영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대비의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맞아 왕으로 옹립하니 그가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 결과
    중종반정은 신하들이 주체가 되어 그들의 뜻대로 왕위를 교체한 사건으로, 
    조선왕조 개창 이래 장자(長子) 상속의 왕위세습제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반정 자체가 철저하게 신하 주도로 이루어짐에 따라 중종이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하기는 어려웠다.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된 중종은 공신이 중심이 된 정치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고, 
    집권 초기 권력은 이들에게 집중되었다. 
    중종반정을 통해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연산군대에 
    공직에 있던 인물이 왕을 교체한 후 다시 기득권을 유지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연산군은 왕위에서 쫓겨나 군(君)으로 강등된 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1506.11 31세로 죽었다.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 정국공신(靖國功臣) : 중종반정 때 공신(103명)들이다.
   1등 -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신윤무, 유자광, 박영문, 홍경주 등 8명
   2등 - 이효성, 심순경, 변수, 최한홍, 윤형로, 조계상, 김수동, 이계남 등 13명
   3등 - 고수겸, 심형, 유계종, 신준, 심정, 유세웅, 유계종, 윤사정, 
         정윤경, 김수경, 백수장, 김경의 등 30명
   4등 - 변준, 변사겸, 한숙창, 윤여필, 성희옹, 신윤문, 유응룡, 유승건, 이종의, 
         이기, 한사문, 강윤희, 최유장, 윤금손, 이맹우, 박영창 등 52명



▣ 임꺽정의 난(?~1562 명종17) : 
 ○ 16세기 중반 조선 명종 때의 의적(義賊)으로 몰락농민과 백정·천인들을 규합하여 
    지배층의 수탈정치에 저항, 정국을 위기로 몰아넣었던 난리. 
    일명 임거정(林巨正)·임거질정(林居叱正).

  - 배경
    임꺽정은 
    16세기 중엽(명종 때) 양주의 백정으로 관리의 수탈에 못 이겨 도적이 되었다. 
    당시의 명종조는 을사사화 등으로 중앙 정치가 문란해져 지방 통치가 소홀하여 
    관리들 에 의한 농민 수탈이 극성을 부리던 때이고, 
    관수 관급제의 실시로 관료들의 토지 소유욕이 증가하여 농장이 확대되는 속에서 
    농민들이 몰락하던 때였으며, 왕실과 관료들의 사치가 날로 심해지고 
    방납 등의 폐단으로 공물의 양은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나던 때였으며, 각종 부역과 
    군역에 시달려 농민들이 이를 피하기 위해 고향을 등지기 일쑤인 때였기에 
   “백 리 사이에 밥 짓는 연기가 보이지 않는다.”라고 할 정도로 
    농민의 생활은 피폐하였다. 즉, 당시의 사회 경제적인 모순이 심화되면서 
    몰락한 농민과 유랑민들을 배경으로 도적은 들끓을 수밖에 없었고 그 중 대표적  
    인물이 임꺽정이었는데, 홍길동·장길산과 더불어 3대 도적으로 유명하다. 

  - 과정
    경기도 양주에서 백정 신분으로 태어나 황해도에서 생활했다. 
    뜻을 같이하는 비슷한 처지의 농민 수십 명과 그 가족으로 집단을 이루어 
    황해도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도적활동을 시작했다. 
    날쌔고 용맹스러우며 지혜로웠던 그는 
    1559년경(명종14) 황해도·경기도·평안도까지 활동영역을 넓혀 
    이 지역의 관청이나 양반·토호의 집을 습격, 
    이들이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인 재물을 빼앗았다. 
    또한 서울·평양 간 도로와 그밖의 주요교통로를 장악하여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토지세·공물·진상물 등을 탈취했다. 
    이와 함께 관군의 방비와 토벌의 허점을 교묘히 찌르며 세를 확장하면서, 
    빼앗은 재물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어 의적으로서의 성가를 높이고 
    이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다. 

    위기감을 느낀 정부 지배층이 여러 차례 관군을 동원하여 진압하려 했으나, 
    이를 번번이 물리치고 1559년에는 개성에 쳐들어가 
    포도관 이억근(李億根)을 살해하기도 했다. 
    1560년 가을에는 봉산·개성을 거점으로 서울까지 진출했으나, 
    같은 해 11월 참모인 서림(徐林)이 체포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정부는 서림에게서 활동의 계획과 비밀을 알아내고 선전관 정수익(鄭受益)과 
    봉산·평산의 관군으로 하여금 토벌하도록 했으나 뛰어난 전투력과 
    농민·이서(吏胥)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당시
    이서와 농민의 도움은 임꺽정의 부대가 모이면 도적이 되고 흩어지면 백성이 되어 
    출몰을 예측할 수 없어 잡을 수가 없다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1561년에 들어 황해도,경기도 북부,평안도,강원도 지역에 출몰하여 활동했으나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이 이어져 구월산(九月山)으로 철수하여 항전하다가 
    형인 가도치(加都致)가 체포되는 등 세력이 점차 위축되었다.
 
    토포사 남치근(南致勤)이 이끄는 관군의 끈질긴 추격으로부터 도망하던 중 
    마침내 1562년 1월 서흥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당해, 15일 만에 죽음을 당했다.

  - 결과
    임꺽정의 의적활동은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체에서 일어났던 농민봉기의 일환이며 그 집약점이었다. 
    이 시기 농민의 저항은, 당시의 사관이 "도적이 되는 것은 
    도적질하기 좋아서가 아니라 배고픔과 추위가 절박해서 부득이 그렇게 
    된 것이다. 백성을 도적으로 만드는 자가 누구인가"라고 기록한 바와 같이 
    사회경제적 모순이 격화됨에 따라서 
    지배층에 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임꺽정 집단의 치열하고 오랜 활동은 
    정부·지배층에게는 불안과 공포의 위기의식을 심어주었으며 
    피지배층 일반에게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도 상반되어 지배층은 
    그를 흉악무도한 도적이라고 했고 민중들은 의적으로 영웅시했다. 
    그뒤 그에 관한 많은 설화가 민간에 유포되었고, 
    그의 행적이 소설로 그려지기도 했다.
    소설 임꺽정 - 홍명희, 만화 임꺽정 - 이두호


▣ 임진왜란[壬辰倭亂](1592.4.13 선조25 임진년 사월 임인일 묘시) 
 ○ 1592년 4월 13일~1598년 11월 18일까지 왜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
      (정유재란 포함)
  - 배경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이 죽고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이 왕위에 즉위하니 14대 왕 선조이다. 
    선조 때 조선의 정세는 사화를 겪은 이후에 사림의 내부 분열로 
    권력 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어 이조 전랑의 임명권을 계기로 
    붕당 정치를 형성하여 세력 다툼을 하고 있어 국방력 약화의 한 원인이 되었다. 

    1590년 조선의 선조가 정사에 황윤길을 부사에는 김성일을 통신사로 보낼 무렵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의 무로마치 막부를 무너뜨리고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자신에 대한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자신의 침략적 야심을 펴기 위하여 군사를 조총으로 무장시키고 
    전쟁 준비에 한창이었다.

    통신사 일행이 일본을 돌아보고 6개월 후인 
    1591년 선조에게 이야기 하기를 
    정사 황윤길은 "풍신수길은 야심이 많은 자이며 반드시 전쟁을 일으킬 인물로서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고 반면 
    부사인 김성일은 다르게 말하길 "풍신수길은 보잘 것 없는 인물이니 어떻게 
    천하를 통일하여 전쟁을 준비하여 쳐들어 올 수 있는가 하고 이야기를 했으며 
    서장관으로 따라갔던 허성은 반드시 일본이 침략 할 것이라고 얘기하여 
    같은 동인들로 부터 따돌림 당하였다. 

    동인인 김성일의 말을 믿고 침입에 대비하지 않는 걸로 판명이 났으며 
    이율곡의 10만 양병설 주장도 묵살된 채 전쟁의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1591년 유성룡에의해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군량을 비축하고 군사를 
    조련하는 한편 판옥선과 거북선 등을 건조하게 하여 왜의 침입에 대비를 하였다


  - 과정
    일본은 조선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게 
    길을 비켜 달라고 요구하였고,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쳐들어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여만명의 군사와 함선으로 조선을 침략 하였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조선 침략 선봉군 제 1군 18700명을 실은 칠백여 척의 함선이 쓰시마를 출항, 
    부산 앞바다에 몰려 들어 옴으로써 임진왜란은 시작되었다
    정발(鄭撥)이 지키는 부산진성과 송상현이 지키는 동래성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부산진성 첨사 정발 전사, 다대포 첨사 윤홍신 전사, 동래부사 송상현 전사, 
    김해부사 서예원 도주, 경상병사 김응남 도주, 경상 좌수사 방홍 언양으로 도주,
    경상 남도 전역이 왜군의 수중으로 떨어짐)
   
    음력 4월 24일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일본군에서 패하고 도주, 
    10일만에 경상도가 넘어갔다.
    음력 4월 28일 도순변사 신립이 충주의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일전을 겨루어서나 일본군에게 패하고 전사하였다.

    일본군의 작전은 육군은 종래 일본 사절단이 조선에서 이용하던 
    세군데 길을 따라 북상하고, 
    수군은 조선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는 것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제1군은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을 거쳐 충주에 이르고, 
    제2군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인솔하여 울산·영천을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세하여 한양으로 진군하였으며, 
    구로다 나가마사(?田長政)의 제3군은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북상하였다. 
    일본군이 물밀듯이 북상해 오자 왕실과 조정은 한양을 떠나고 
    북쪽으로 피신하였다.

    음력 5월 3일 일본군 제1군과 제2군은 개전한 지 20일 만에 
    충주·여주·양근을 거쳐 한양을 점령하여 본거지로 삼았으며, 
    음력 5월 17일 도원수 김명원을 임진강 전투에서 격파한 뒤, 
    다시 군을 나눠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평안도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함경도로, 각각 한반도 북부까지 쳐들어갔다. 
    음력 6월 13일에 평양이 함락되었다. 다급해진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떠난다.

  - 이순신 장군의 활약 
    경상 좌수영과 우수영은 왜적이 침입하자 해상에서 제대로 싸움조차 못한 채
     패하였다.  전라 좌수영의 수군 절도사로 있던 이순신은 
    경상 우수영으로부터 보고를 받자 출동하여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 
    당포, 당황포, 한산도, 부산 등지에서 계속 큰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한산도 앞바다의 해전은 진주성 싸움, 행주산성 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이라 일컫는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한 조선군은 해상으로 북진하여 
    육군과 합세하고 물자를 조달하려던 왜군의 작전은 완전히 분쇄하고, 
    우리는 남해의 제해권을 확보함은 물론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 임진왜란의 결과 
    7년 만에 일본을 물리침(1598년)
    노량 대첩을 끝으로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1592년 4월 13일 ~ 1598년 11월 18일까지 7년 전쟁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년도는 6년 7개월이다.
    전란이 끝나고 광해군 시대에는 농토가 170만결에서 54만결로 줄어
    (1결:약삼천평~만평정도) 
    그만큼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국가의 조세 수입도 감소. 
    인심이 흉흉하여 이몽학의 난과 같은 반란 발생. 
    전쟁 중에 군량을 모으기 위해 발행한 공명첩은 
    조선 왕조의 신분 제도를 붕괴시키는 역할을 함.

    문화재의 손실도 막대하여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의 궁전과 
    불국사 등의 수많은 사찰이 불탔고, 
    이 밖에 서적 미술품 등이 소실되고 약탈되었으며, 역대 실록 중
    귀중한 사서를 보관하였던 사고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다만 전쟁 중에 절강병법을 새로이 도입 수용하였고,
    비격진천뢰나 화차 등 신무기를 개발함으로써 전술 무기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이장손이 비격진천뢰를, 변이중이 화차를 발명하였으며 왜의 조총이 보급되고 
    명군으로부터 서양식 대포인 불랑기포가 소개됨.

    왜란을 통하여 조선 백성들의 애국심은 고취되었고 자아반성의
    계기가 마련되는 한편, 명의 원군 파견으로 숭명사상이 더욱 굳어졌고,
    일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은 더욱 높아졌다. 
    전란 중에 명군에 의해 관우 숭배사상이 전래되어 
    난이 끝난 후 한양을을 비롯한 여러 곳에 관우묘(안동 서악사 관왕묘)가  
    세워지는 등 민간신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정치상 - 비변사가 강화되고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 기구의 개편. 
            어영청.총융청.수어청.금위영을 설립하여 5군영 제도가 마련되었으며, 
            지방에는 속오군을 창설
  
   1592년  4월 13일 : 일본, 20여만명의 병력으로 조선 침입
           4월 14일 : 부산진 함락
           4월 15일 : 동래성 함락. - 본격적으로 일본군 북상 시작.
           4월 24일 : 8천 여명의 병력을 이끌던 이일 상주에서 패배 도주
           4월 28일 : 충주 달래강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치고 결사항전, 대패 
                      - 신립 달래강에 김여물과 함께 투신. 
           4월 30일 : 선조 몽진
           5월  2일 : 일본군 한성 점령
           5월  7일 : 이순신, 옥포에서 일본함대 격파
           5월 29일 : 사천에서 거북선을 최초로 사용
           5월      : 선조, 이덕형을 명으로 보내 구원요청,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화재
           6월 13일 : 일본군, 평양 점령
           6월      : 선조, 의주에 피난, 명의 지원군 도착
           7월  8일 : 한산도 대첩. - 일본 함대를 격파함에 따라 저해권 장악
           7월말,   : 곽재우가 의령, 현풍, 영산 등지에서 왜군 격파
           7월,     : 묘향산의 휴정이 전국의 승병을 일으킴
           7월,     : 회령에서 임해군, 순화군이 일본군에게 잡힘
           8월,     : 금산전투에서 조헌과 영규의 의병전사
           8월,     : 명나라 대표 심유경이 종전을 위한 회담시작
           9월,     : 이순신, 부산포에서 일본수군 대파
           10월,    : 제1차 진주대첩
           12월,    : 이여송이 4만의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옴
 
   1593년  1월,     : 의병, 관군, 명군이 연합하여 평양성 탈환
           2월,     : 행주대첩, 함경, 평안도의 왜군 한성으로 퇴각
           3월,     : 심유경 일본과의 강화회담 재개
           6월,     : 제2차 진주성싸움
           8월,     : 일본군 철수 시작, 명군 철군
           10월,    : 한성으로 선조 돌아옴
 
   1594년  1월,     : 전국에 대기근 발생
           2월,     : 훈련도감 설치
           3월,     : 당항포의 일본수군 격파
 
   1596년  7월,     : 이몽학이 난을 일으킴
           8월,     : 김덕령 사망
           9월,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과의 화의조건에 반발, 조선 재침을 명함
 
   1597년  1월,     : 정유재란 발발
           2월,     : 이순신 무고로 투옥
           7월, : 원균이 지휘하던 수군이 칠전량에서 대패, 원균사망,이순신 재임용
           9월,     : 명량해전
           10월,    : 일본군 남해안으로 퇴각
 
   1598년  9월,     : 도요토미의 유언에 따라 일본 철군 시작
           11월,    : 노량해전. 일본 수군 대파, 이순신 전사.
 
■ 당시 일본군의 편재
   
    ≫   제 1군 小西行長(고니시 유기나가) 18,700명
     ≫   제 2군 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 20,800명
     ≫   제 3군 黑田長政(구로다 나가마사) 12,000명
     ≫   제 4군 島津義弘(시마쓰 요시히로) 15,000명
     ≫   제 5군 福島正側(후구시마 마사노리) 24,700명
     ≫   제 6군 小早川隆景(고바야가와 다다가게) 15,700명
     ≫   제 7군 毛利輝元(모리 레루모도) 30,000명
     ≫   제 8군 宇喜多秀家(우기다 히데이에) 10,000명
     ≫   제 9군 羽柴秀勝(하시마 히데가쓰) 11,500명
     ≫   수군 九鬼嘉隆(구기 요시다가) 115,00명
     ≫   예비병 德川, 前田, 上衫, 伊達 139,750명 = 307,000명

          함선 총계 : 3000여척


▣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1 선조30)
 ○ 임진왜란 중 화의교섭의 결렬로 1597년(선조 30)에 일어난 2번째 왜란.
    정유년에 왜가 재침략하였다고 하여‘정유재란’이라고 한다.

  - 1593년에 전쟁이 끝이 나고 
    1594년~1597년까지 명나라와 일본은 강화 협상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본군은 화의 진행 도중 진주성에 진주대첩에 대한 보복적인 공격을 가하니 
    10만의 왜병에 맞서 3천여명의 조선군이 9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의병장 김천일·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충청병사 황진(黃進) 등이 전사하고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으나 
    왜군에게도 심한 피해를 입혀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좌절시켰다. 
    이는 임진왜란 중 가장 치열한 전투의 하나였다. 이것이 제2차 진주성 전투이다.
    양국은 3년에 걸쳐 지루한 휴전 협상을 했고 
    이 과정에서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강화 협상에서 왜가 요청한 것은 조선 8도 중에서 4도를 할양할 것과 
    명나라의 황녀를 후비로 보낼 것 등을 요구하였으나 
    명나라는 도토도미 히데요시를 왜 왕으로 봉한다는 칙서와 도장을 보내자
    1597년 1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4만 대군으로 재침략하니, 
    3년 간 이어졌던 강화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왜군들의 철군이 시작되었다
    1598년 11월 18일 왜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승리를 거둔 후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전사하니 이로써 6년 7개월 간의 전쟁이 종식 되었다.
  
  - 조선은 전국토가 황폐화가 되고 문화재가 소실되었으며 
    경복궁 등이 불에 탔고 농경지가 1/3으로 줄었다.
    일본은 무리한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63세로 병사하자 
    전국시대가 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물려받아 
    에도 막부로 시대가 변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조선에 원군 파병으로 국력이 쇠퇴했으며 
    만주의 여진족에게 지배권을 내주게 되었고 
    훗날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인해 명나라가 멸망하게 된다.


▣ 이몽학의 난(李夢鶴 ── 亂 1596.7 선조29) 
 ○ 임란 와중에 충청도 홍산을 중심으로 거사한 종실의 서얼출신 이몽학의 난

  - 배경
    조선은 연산군 이후 문란하기 시작한 사회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리·토호 들의 부정행위가 속출하고 일본의 재침략에 대비한 
    산성의 축조 등으로 백성들은 피폐해 있었다. 
    전화에 따른 직접적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세금은 증가되고
    농촌은 황폐화되어 전쟁 전에 170만결에 이르던 경지면적이 
    전쟁 후 54만결로 줄어드는 현상을 보였다. 

    기근과 질병이 만연하여 백성들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하게 되어 
   '인상살식'(人相殺食)의 현상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국가의 재정 역시 악화되었고, 
    조세의 파악 근거인 호적과 양안(量案)마저 소실되어 버렸다. 

    또한 전쟁 초기에 큰 활약을 했던 각지의 의병들은 전쟁이 장기화되고 
    유능한 의병장들이 관인이 되거나 전사함에 따라, 
    의병으로서의 기능이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1594년 4월 제도(諸道)의 의병을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의 지휘하에 소속하게 했지만, 
    이미 명목상 조직되었을 뿐 국가에서 이들을 통제할 수 없었입니다. 
    특히 의병 중에는 관군을 기피한 피역자들이 많았기에 
    기근과 질병이 닥치자 군도(群盜)로 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군중을 선동하여 내란을 획책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1594년(선조 27) 송유진의 난과, 1596년(선조 29) 이몽학의 난은 
    왜란 중에 있었던 대표적인 반란사건으로 일반 민중에 미친 영향이 대단히 컸다. 

  - 과정
    이몽학은 전주 이씨의 서얼로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전라 지방을 전전하다가 
    임진왜란중에 호서지방의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과 함께 의병모집을 구실로 
    충청도 홍산(鴻山:지금의 부여) 무량사(無量寺)에서 
    동갑계회(同甲契會)를 조직해서 군사조련을 실시했다. 
    그런데 한현이 아버지의 상을 당해 홍주로 가면서 이몽학에게 
    지금이 민심이 이반되고 방비가 소홀한 때이므로, 먼저 봉기하면 
    내포(內浦)에서 합세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하여 이몽학은 김경창(金慶昌)·임억명(林億命)·이구(李龜)·장준재와 
    사노(私奴) 김팽종(金彭從), 승려 능운(凌雲) 등을 거느리고 
    스스로 선봉장이 되어 홍산 쌍방축(雙防築)에서 군사 600~700명을 모아 봉기했다.

    7월 6일 이몽학군은 홍산현에 쳐들어가서 현감 윤영현을 붙잡아 인신(印信)을 
    빼앗은 후 다시 임천군(林川郡)에 쳐들어가 군수 박진국(朴振國)을 포박했다. 
    이어 7일에 정산현(定山縣),8일에 청양,9일에 대흥(大興)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강제징세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대거 합세함에 따라 며칠 동안에 
    수천 명으로 불어난 이몽학군은 10일 홍주성(洪州城)으로 진격했다. 
    이에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시간을 벌기 위하여 주관속(州官屬) 이희수·
    신수(申壽)를 이몽학군에게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고, 
    그동안 인근 수령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순찰사 신경행(辛景行)·최호·박동선(朴東善)·황응성(黃應聖)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홍주성으로 가서 이몽학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동안 도원수 권율(權慄), 충청병사 이시언(李時言), 
    중군(中軍) 이간(李侃) 등이 홍주 주위로 향했다. 

    이때 판관아병 윤계(尹誡)가 10여 명을 이끌고 밤에 이몽학의 진영에 침투해
    총포를 쏜 다음 곧 모두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으며, 
    이몽학의 머리를 베어오면 상을 주겠다고 유포 한다. 

    이에 이몽학군 중 김경창·임억명·태척(太斥) 등이 이몽학을 살해하자 
    이몽학군은 일시에 흩어지고 
    관군들은 추격전을 벌여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다. 

    한편 모속관 한현은 홍주에서 수천 명을 모병하여 이몽학군과 합세하려 했으나 
    관군의 공격을 받아 패주하다 잡혀 서울로 압송, 선조의 친국을 받고 처형당했다. 
    이때 서울에서 처형된 반란군은 33명이며, 지방에서는 100여 명에 달했다. 

    그런데 한현의 친국 과정에서 김덕령·홍계남(洪季男)·최담령(崔聃齡)·곽재우·
    고언백등이 공모했다는 얘기가 나와 김덕령과 최담령은 고문 끝에 죽고 말았다. 
    뒤에 김덕령은 무고당했음이 밝혀져 신원되었으나, 
    민란의 수습과정에서 호서지방의 많은 민들을 '반도'로 색출함으로써 
    민란 후에도 조정에 대한 호서민들의 불만이 많았입니다. 

  - 1604년(선조 37) 논공을 할 때 
    이몽학을 죽인 김경창·임억명은 가선(嘉善)에 오르고, 
    홍가신은 청난 1등공신(淸難一等功臣), 박명현과 최호는 2등공신, 
    신경행과 임득의는 3등공신에 책록되었다

 ○ 의병장 김덕령장군
  -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속(奴屬)을 장살(杖殺)하여 투옥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었다. 
     그해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려 했으나, 
     오히려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순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서울에 압송되어 역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류성룡은 김덕령의 치죄를 신중히 따져가며 하도록 간했으나 
  윤근수의 형제이기도 했던 서인 판중추부사 윤두수는 엄벌을 주장했다. 
  수백 번의 형장 심문으로 마침내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질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은 김덕령은 결국 장독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말았다. 
  죄가 없음을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죽음을 직감한 김덕령은
   ‘춘산에 불이 나니’라는 시조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 구르멀 벗어난 달처럼( 이몽학의 난을 영화화)


▣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 인조원년)
 ○ 광해군의 후금에 대한 외교정책과 폐모살제가 명분이 되어
    (외교정책 : 명나라와 후금사이에서 실리 외교정책
     폐모살제 :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임해군과 이복동생인 영창 대군을 살해)
    몇십 년째 동인 계열의 북인(대북파)들에게 억눌려 지내던 
    서인 일파(이귀·김유·김자점·이괄)와 동인 계열의 남인 일부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다.
  
  - 배경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당론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애썼으나, 
    자신이 대북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당론을 초월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이원익·이항복·이덕형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으나, 
    이이첨·이위경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과 이모제 영창대군을 죽였으며, 
    또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폐륜을 자행하였다(폐모살제). 

    이와 같이 광해군의 실정이 계속되어 기강이 문란해지자 
    서인 이귀 · 김자점 · 김류 · 이괄 등은 반정을 모의, 
    1623년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추진하였다. 
 
  - 과정
    도중에 이이반의 누설로 탄로될 위기에 놓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서는 장단에서, 이중로는 이천에서 군사를 일으켜 홍제원에서 
    김류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 군대를 능양군이 친히 거느리고 
    이괄을 대장으로 하여 12일 밤에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반정군은 무난히 궁궐을 점령하였다. 
    이어 왕대비(인목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올랐다.

  - 결과   
    광해군은 의관 안국신의 집에 피신하였다가 잡혀 
    왕에서 군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대북파 이이첨 · 정인홍 · 이위경 등 수십 명은 참수되었으며, 
    추종자 200여 명은 유배되었다. 반정에 공을 세운 이귀·김류 등 33명은 
    3등으로 나누어 정사공신 호를 받고 권좌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 정사공신靖社功臣 : 인조반정 때 인조를 왕으로 세우는 데 참여한 공신들이다.
   1등 - 김유, 이귀, 김자점, 심기원, 신경진,이서, 최명길, 이흥립, 구굉,심명세
   2등 - 이괄, 김경징, 신경인, 이시방, 이중로, 이시백, 신경유, 심기성 등 15명
   3등 - 박유명, 한교, 홍진문, 홍효손, 이기축, 김원량, 송시범, 
         노수원, 원유남, 홍진도 등 28명

    그러나 이 논공행상이 공평하지 못하다 해서 1년 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반정 후 남인의 이원익이 영의정에 영입됨으로써 
    남인도 제2의 당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 기타
    드라마 서궁(1995 kbs2)


▣ 이괄의 난(李适-亂 1624 인조2년)
 ○ 평안도병마절도사 이괄이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 

  - 배경 
    인조 반정 거사 도중 기밀이 누설되자 후퇴한 김류, 이귀 등을 대신하여 
    반정군을 인솔하여 반정을 성공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나 
    서인 공신들의 질투와 비판을 받게되고 후금의 관서 지방 침입에 대비한다면서 
    이괄을 부원수 겸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임명하여 도원수 장만 휘하에 소속시켰다.

    또 공신책록에서 2등 공신으로 밀려난 것과 아들 전이 공신들의 횡포로 인한 
    시정의 문란을 개탄해 하는것을 반역으로 몰아 붙이자 이괄은
    공신들에 대한 적개심이 폭발, 기익헌, 한명련 등을 포섭하여 난을 일으켰다.
 

  - 과정
    조정에서는 관군을 보내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괄의 부대는 중앙에서 보낸 군대를 격파하고 1624.2.10 한성으로 입성 하였다.
    반란군이 한성을 점령한 일은 조선시대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인조는 공주로 쫓겨 갔다.
    이에 이괄은 선조의 열번째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기까지 하였다. 

  - 결과
    그러나 장만 도원수가 이끄는 관군은 
    그날 밤 바로 한성 근교의 안현에서 이괄의 부대를 대파하여 승기를 잡는다. 
    이괄은 경기도 이천으로 달아났으나 자신의 부하 기익헌·이수백 등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고 기익헌·이수백이 관군에 투항하면서 반란은 평정되었다.

 ○ 이괄(李适, 1587년(선조20) ~ 1624년 2월 14일)
    조선시대 중,후기의 무신, 정치인. 본관은 고성, 자(字)는 백규(白圭)이다. 
    무과 급제 직후 형조좌랑, 태안군수, 대정현감 등을 지냈다.
    용헌 이원(세종때 좌의정)의 일곱째아들 사암공 이지의 오대손이 이괄임
    고성이씨 안동 입향조인 이증은 용헌 이원(세종때 좌의정)의 여섯째 아들임.
    용헌 이원(세종때 좌의정)의 일곱째아들 사암공 이지의 오대손이 이괄.

 ○ 진무공신振武功臣 :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참여한 공신들이다.
   1등 - 장만, 정충신, 남이흥
   2등 - 이수일, 변흡, 유효걸, 김경운, 이희건, 조시준, 박상, 성대훈
   3등 - 신경원, 김완, 이신, 이휴복, 송덕영, 최응일, 김양언, 김태을, 
         오박, 최응수, 지계최, 이락, 이경정, 이택, 안몽윤
   
 
▣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 인조5 후금 3만)
 ○ 인조반정 후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을 표방하던 조선에 
    후금(後金:淸)이 3만 명의 병력으로 1627년(인조5) 1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약 2개월간 지속되었던 조선을 침략한 전쟁.

  - 배경
    임진왜란 후 만주의 여진족은 조선과 명의 국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흥기했으며, 1616년(광해군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차지하기 위해 남하함에 따라 명과의 무력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러던 중 1618년 후금의 누르하치(奴爾哈齊)가 '7대한'(七大恨)을 내세우며 
    명의 변경요지(邊境要地)를 공격하여 점령하자, 명은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명의 원정군을 일으키고 조선에도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하여 조선은 1619년 강홍립(姜弘立) 등이 이끄는 
    1만 여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당시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흥기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따라 강홍립에게 형세가 불리하면 
    후금에 투항하는 것도 주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강홍립은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심하(深河)전투에서 패배한 뒤 
    후금군에게 투항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준 명의 출병요구에 부득이 응했다고 해명했다. 
    누르하치는 그러한 상황을 인정하고 조선에 
    친화적인 입장을 보임으로써 광해군 때에는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정권은 요동 등주(登州)의 명군과 연계하여 
    동남쪽 후금군을 괴롭히는 
    가도의 모문룡(毛文龍)의 군대를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정책을 내세웠다. 
    한편 후금에서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은 즉위 전부터 중국본토 침입 때 
    자신들의 배후를 칠 우려가 있는 조선을 미리 정복하자고 한  
    주전론자(主戰論者)였다.따라서 조선과 후금의 충돌은 예상되는 것이었다.
 
  - 과정
    또한 후금은 명과의 교전(交戰) 때문에 경제교류의 길이 막혀 야기된 
    심한 물자부족 현상을 타개해야 했는데, 
    마침 이괄(李适)의 난이 실패한 후 
    후금으로 도망간 이괄의 잔당이 조선의 병력이 약하고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지졸이라며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후금의 태종은 침략의 뜻을 굳히고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것 등을 구실로 
    1627년 1월 아민(阿敏) 등에게 3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했다.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부대는 의주를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안주·평양을 거쳐 1월 25일 황주에 이르자 인조를 비롯한 조신(朝臣)들은  
    강화로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피난했다. 
    한편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했는데, 
    정봉수(鄭鳳壽)·이립(李立)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 결과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다가 후방을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는 점과, 
    명을 정벌할 군사를 조선에 오랫동안 묶어둘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강화(講和)의사를 표시했다. 
    이에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했던 조선의 조정은 후금의 제의를 받아들여 
    양국 사이에 3월 3일 화의가 성립되었다. 화약(和約)의 내용은 
    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 화약이 성립되면 곧 군사를 철수시킬 것,
    양국 군대는 서로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조선은 금과 강화해도 명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 등의 내용이었다. 
    이 화약은 비록 형제의 국(國)을 규정하기는 했지만 후금군을 
    철수시키기로 한 것과 명과의 외교관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후금군의 무력에 굴복한 일방적 조약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비록 군사적으로는 열세였지만 
    후금군이 장기적으로 주둔할 수 없다는 약점을 잘 활용한 협상이었다. 

    이후 조선은 친명배금정책을 계속 추진하면서 그것을 뒷받침할 군사력 배양에  
    주력하여 수어청의 창설, 어영청의 증강, 훈련도감의 증액 등에 힘쓰게 되었다. 
    그러나 후금은 군사를 철수시킨다는 약속을 어기고 의주에 군사를 주둔시켜 
    모문룡의 군대를 견제하면서 
    세폐(歲幣)·중강개시(中江開市) 등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으며, 
    1632년에는 '형제의 맹'에서 '군신의 의(義)'로 양국관계를 고칠 것을  
    요구 하면서 많은 세폐를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경제적 부담이 되어왔던 세폐에 대해서는 절충을 시도했지만,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은 것도 굴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군신의 의'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절화(絶和)의 태도를 굳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636년 다시 후금은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사신을 보내 태종의 존호(尊號)를 알리고 신사(臣事)를 강조했다. 
    조선이 청과의 싸움을 결정한 후 같은 해 12월 청나라의 침략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했다.

 
▣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2 인조14)
 ○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형제관계에서 군신 관계를 요구하자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친명배금정책)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청(淸)나라 청태종이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전쟁.

  - 배경
    후금은 1632년에는 만주와 내몽골의 대부분을 차지한 뒤 베이징[北京] 부근을 
    공략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 더욱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청 태종은 
    사신을 보내 '형제지맹'을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치려 했고 세폐도 늘려 
    금 100냥, 은 1,000냥, 각종 직물 1만 2,000필, 말 3,000필 등과 
    정병(正兵) 3만 명까지 요구했다. 이에 조선측은 
    세폐를 대폭으로 감액하는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했고, 그 다음달에는 
    후금으로부터 명나라 공격에 필요한 군량을 공급하라고 요구받았다. 
    이처럼 후금이 무리한 요구를 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절화(絶和)하는 한편 
    군비(軍備)를 갖추어야 한다는 논의가 격해졌다. 
    
    그러던 중 1636년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이 
    인조비 한씨(韓氏)의 조문(弔問)을 왔을 때 
    후금 태종의 존호(尊號)을 알리면서 군신의 의(義)를 강요했다. 그러자 
    조정 신하들은 부당함을 상소하며 후금의 사신을 죽이고 척화할 것을 주장했고, 
    인조도 후금의 국서를 받지 않고 그들을 감시하게 했다. 
    후금의 사신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도망갔다. 
    정부에서는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의주를 비롯한 서도(西道)에 병기를 보내고 
    절화방비(絶和防備)의 유서(諭書)를 평안감사에게 내렸는데, 
    도망하던 후금의 사신이 그 유서를 빼앗아 보고 조선의 굳은 결의를 알게 되었다. 
    또한 1636년 4월에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때를 기다리던 청태종은 
    그 해 12월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쳐들어 오게된다.  

  - 과정 
    조선에서는 의주부윤 임경업장군이 백마산성에서 적을 맞았으나, 
    청군의 군사 일부만 백마산성을 포위 대치하게하여 임경업장군의 발목을 
    잡아 놓고 청군의 주력은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군사를 한양으로 진격시켰다. 
    조선 조정은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던 중 14일에 적군이 
    개성을 통과했다는 보고를 받고, 
    김경징을 감찰사, 장 신을 주사대장에 임명하여 강화도를 지키게 한 후, 
    윤 방과 김상용의 책임하에 종묘사직의 신주와 세자빈 강씨, 
    원손, 봉림대군 등을 먼저 강화도로 피난시켰다.

    또한 심기원을 유도대장으로 삼아 한양을 지키게 하고, 
    인조도 소현세자와 함께 강화도로 향했으나 
    청군이 이미 홍제원에 도달해 길을 막았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그 후 이조판서 최명길이 청군의 진영에 나가 침입한 이유를 따지며 진격을  
    막는 동안 왕은 신하들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신경진, 구 굉, 구인후, 이 서, 이시백  등이 수비군을 지휘했는데, 
    군사는 1만 3천이었고 양식은 50일분이 남아 있었다.

   청군은 16일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다음해 1월1일에는 청 태종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조선군은 남한산성에서 45일간 항전 했으나 
    전세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다.  
   또한 각 도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나,이미 때가 늦어 남한산성에는 이르지 못했다.

  - 결과 
    전쟁동안에 조선에서는 화의를 맺자는 주장과 끝까지 싸우자는 주장이 
    격렬하게 대립했으나 결국 최명길이 주도한 주화론이 김상헌과 
    정 온이 이끈 척화론을 누루고 대세를 장악합니다. 
    그러나 청의 요구는 조선의 임금이 직접 항복 의식을 치르고 척화 주모자를 
    결박해 오라는 강경한 것이어서 망설이던 중 1월 21일에 강화도가 함락되고 
    세자빈과 대군이 포로로 잡히자 결국 항복하기로 했습니다.

    결국 1월 30일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 누루하치에게 의식을 갖추어 항복하는데 인조는 누루하치 앞에서 
    무릎을 세번 꿇고 아홉번 절(삼계구궤도)을 하는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으로 항복하는 수치의 역사를 남겼습니다. 이로써 전란이
    끝나고 청군은 돌아가면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왕자가 인질로 잡혀가고 
    척화파의 강경론자였던 홍익한,윤집,오달제 등 3학사가 잡혀가 죽음을 당하였다. 
    이 외에 무려 50여만명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그리고 청의 요구로 삼전도에는 청태종공덕비를 세웠다..


▣ 장길산의 난(張吉山-亂 1697 
 ○ 17세기 이후 어려워진 사회조건 속에서 기층민인 서얼·승려·농민 등이 결합하여 
    새로운 왕조를 창립하려고 한 모반사건의 하나였다.

  - 장길산은 조선 숙종 때 해서(海西)지방의 구월산(九月山)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활동한 도둑의 우두머리이다. 본래 광대 출신이나 도당을 모아 
    1687년(숙종 13)경부터 여러 도에서 세력을 늘리며 활동하였다. 
    1692년 관군의 토벌로 양덕(陽德) 일대로 이동하였고, 
    뒤에는 함경도 서수라(西水羅) 등지에서 활동하며 마상馬商)을 가장한  
    군대 오천과 보병 1,000여 명을 거느린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함경도뿐만 아니라 평안·강원도에서도 활동하였던 그의 부대는 
    한때 서울의 서얼 출신 이영창(李榮昌), 금강산의 승려 운부(雲浮)와 손을 잡고 
    승려세력과 함께 봉기, 서울로 쳐들어갈 계획이었다고 한다. 
    승려 운부가 북쪽에서 인삼을 가져다가 군자금으로 사용한 점 등 
    상업활동을 벌인 점이 특징적이다. 
    조정에서는 그를 잡으려고 여러 차례 노력했지만 그는 끝내 잡히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장길산 관련 기사는 2개이다. 
    하나는 1692년 평안도 양덕현에서 장길산을 잡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그 고을 현감을 좌천시켰다는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1697년 이익화, 장영우 등의 반역 모의와 관련되어 
    이들이 장길산과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된 부분이다.
    특히 1697년의 실록 기사에서 숙종은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 극적 장길산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로 왕래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양덕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체포하려고 포위하였지만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역시 그 음흉함을 알 만하다. 
      지금 이영창의 초사를 관찰하니, 더욱 통탄스럽다. 여러 도에 은밀히 
      신칙하여 있는 곳을 상세하게 정탐하게 하고, 별도로 군사를 징발해서
       체포하여 뒷날의 근심을 없애는 것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 
  ? 조선왕조실록, 숙종 31권 

    소설: 장길산 (소설), 황석영, 1974년 - 1984년 한국일보 연재 및 출간[5]
    만화: 장길산 (만화), 백성민, 1989년 - 1991년
    드라마: 장길산 (드라마), SBS, 2004년


▣ 이인좌의 난(李麟佐 ― 亂 1728.3, 영조4년-무신년戊申年)
 ○ 이인좌를 비롯한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 (密豊君) 탄(坦)을 
     추대하고자 했던 난. 무신년戊申年에 일어났다고 하여 무신 난이라고도 한다.
     
  - 배경
    소론은 경종 연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하였으나,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소론의 강경파들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 탄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남인들도 일부 가담하였다.

  - 과정
    1728년 3월15일, 이인좌는 스스로를 대원수로 자칭하고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성에 진입해 충청병사 이봉상, 군관 홍림, 영장 남연년 등을 살해하고 
    청주성을 점령하고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는 점을 널리 선전하면서 
    한양으로로 북상하였다. 

    이인좌의 격문
      경종이 억울하게 죽었다. 
      영조가 숙종의 왕자가 아니므로 왕대비의 밀조를 받아 경종의 원수를 갚고 
      소현세자의 적파손(嫡派孫)인 밀풍군 이탄을 왕으로 세워 왕통을 바르게 한다.
   
    그러나 이들은 24일에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되었고,청주성에 남은 
    세력도 박민웅,김중만 등의 창의군에 의해 밀려나 상당성에서 패하였다.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이인좌의 동생 이응보와 정희량의 인척인 조성좌와 함께 
    거병하여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령하였으나 경상도관찰사가 지휘하는   
    관군에게 토벌 당했다. 그리고 호남에서도 거병 전에 
    박필현 등의 가담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 결과
    결국 반란을 주도했던 이인좌를 비롯해 권서봉, 목함경 등이 생포되면서 
    이인좌 난은 실패하고 말았다.
    난의 진압에는 병조판서 오명항 등 소론 인물들이 적극 참여하였으나, 
    이후 노론의 권력장악이 가속화하였고 소론은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영조는 대구 입구에 ‘영남을 평정한 비'란 뜻의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워 
    이 사건을 영남지역의 반란으로 규정지었다. 나아가 영남을 반역향으로 지목해 
    일체의 과거 응시를 중지시키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 
    약 50년간 경상도는 조정에 출사가 제한되는 차별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 영조는 지방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하였고 
    토착세력에 대한 수령들의 권한이 커져갔다.


▣ 홍경래의 난(洪景來의亂 1811 순조11) 1811.12.18 ~ 1812.4.19 
 ○ 조선 순조 11년(1811)에 평안북도 가산군에서 홍경래가 
    지방 차별과 조정의 부패에 항거하여 일으킨 난. 평안도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이듬해 관군에게 진압되었다.

  - 1780년(정조 4년)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군 화장골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중화에 사는 외삼촌에게서 글을 배운 후 스스로 공부하여 19세 때 
    초시인 사마시에 응시했으나 서북인이란 이유로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다른 기록에 보면 
    사마시에 실패한 뒤 그 급제한 자를 보니 모두 귀족의 자제들이었다. 
    당시 과거 제도도 크게 부패하여 권문세가의 자제는 무학둔재(無學鈍才)라도 
    급제의 영예를 차지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쉽게 성공할 수 없으며, 
    특히 평안도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있으니, 
    이것이 홍경래로 하여금 개조범상(改造犯上)의 뜻을 굳게 하여 10년간 난을 
    계획하고 준비 하였다고 한다.

  - 배경
    1804년(순조 4)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이듬해 정순왕후가 죽으면서 
    벽파와 경주김씨 세력은 김조순이 주도하는 시파의 반격을 받았다. 
    김달순이 사사당하고 김관주가 유배되는 등 다수의 벽파가 축출되었으며, 

    1807년 이경신(李敬臣)의 옥사를 계기로 벽파는 완전히 패배하고 
    김조순의 안동김씨가 실권을 잡았다. 
    이로부터 왕권이 유약해지면서 왕권문제를 초점으로 하여 
    발생한 정쟁이라고 할 수 있는 시파·벽파의 분파는 끝났고, 
    이후 정국은 극소수의 노론 중 이름있는 외척가문 중심으로 
    전권이 장악되는 세도정치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평안도지역은 국경과 인접해 있어 
    조선 초기에는 반란의 위협 때문에 조선 중기부터는 성리학적 기준에 의해
   ‘학문도 예의도 모르는 지역’으로 인식되어 정치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았고
     평안도 출신은 개인의 능력에 관계없이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또한 이 지방은 삼남 지방과는 달리 사족세력의 형성이 미약하여 
    향촌의 지배질서도 비교적 느슨했기 때문에 신분적 제약도 비교적 약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791년(정조 15)에 신해통공이 실시되면서 
    상업의 자유화가 어느 정도 인정되었고 청과의 국경지역에 위치한 평안도는 
    국제 교역과 국내 상업분야에서 성장을 거듭하여 
    18세기에는 전국에서 상업이 가장 번성한 지역으로 부상하였다. 
    또한 금은 등의 수요증가로 평안도 지역에 광산이 개발되고 
    1801년(순조 1)에는 6만여 명의 공노비가 해방되어 
    이들이 일감을 찾아 평안도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특성과 시대적 상황 때문에 평안도 지역은 
    궁극적으로는 반봉건 근대화를 지향한 선진지역으로 발전하였고,
    강한 반정부적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홍경래의 난은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 과정
    당시 세도정치로 인한 가혹한 세금징수 때문에 평안도 지역은 민심이 흉흉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이미 말한 이유로 신흥 부자들이 속속 나타났고, 
    정부의 평안도 지역 차별에 반발한 홍경래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신흥 부자들을 포섭하여 당을 만들고 가산 다복동에 거점을 마련하여 
    수년 간 무기를 만드는 등 봉기 10년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홍경래는 당초 1812년(순조 12)에 거사할 계획이었으나 정보가
    새나가 거사를 앞당겨 1811년 12월에 봉기하여 관서 일대를 무난히 점령했다. 
    이때 봉기하면서 이들은 정부에 전면전을 선포하였다.

    홍경래군의 지휘부는 평서대원수 홍경래, 부원수 김사용, 부모주 김창시, 
    선봉장 이제초·홍총각 후군장 윤후겸, 군수총관 이희저로 구성되어 있었다. 

    홍경래는 풍수장이로 부호의 집에 출입하던 우군칙을 가산 청룡사에서 만나 
    시국을 논의하다가 서로 공감하고 봉기하기로 약속하였다. 

    또한 홍경래는 시국에 불만이 있는 자들과 부의 축적을 통해 
    새로운 지배층으로 성장한 부류 및 황해도·평안도 일대의 
    상인들에게 접근하였으며, 벼슬길이 막힌 현실에 불만을 품고 있던 
    양반 지식층에게도 접근하여 진사 김창시 등을 포섭하였다. 

    그리고 거부 이희저를 회유하고 홍총각과 이재석등을 뽑아 선봉장으로 삼았으며, 
    지략과 무용을 겸한 김사용과 함께 가산 다복동을 중심으로 봉기준비를 했다.

    홍경래와 만나서 봉기를 약속한 우군칙은 평안도 태천 출신으로 
    홍경래의 모사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는 풍수에 밝아 가산 동북면에 살면서 묘터를 봐주고 점을 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홍경래와 만난 후 풍수와 점복을 이용하여 
    가산의 거부인 이희저를 끌어들여 군비의 조달을 맞게 했고, 
    인삼밀매 금지법에 불만을 품은 개성·의주 둥지의 
    거상과 부호들을 회유하여 세력을 확대했다. 
    또한 당시에 광산 채굴이 성행하여 부랑자들이 광산으로 몰리는 것을 이용하여 
    운산 촛대봉에 광산을 열고 저임금 광산노동자들을 모아 병사로 훈련시켰다.

    김사용은 평안도 태천 출신으로 우군칙의 제자였는데, 
    부원수에 임명되어 북진군을 인솔하여 남쪽으로 진군하여 
    홍총각이 이끄는 남진군과 합세하였다. 
    그후 요충지인 안주를 공격하기 위해 
    박천 송림리에서 관군과 싸우다가 유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김창시는 평안도 곽산 출신으로 진사에 급제한 지식인이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들이 봉기한 이유와 목적을 담은 격문을 작성하였고, 
    운산 촛대봉의 금광과 연락을 담당하였다. 

    이희저는 가산의 역노로 무과에도 급제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대청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평안도 내의 부호였는데, 
    대정강변 다복동 골짜기에 거점을 마련하고 각지의 거부들과 연계를 맺고, 
    한편으로는 운산 촛대봉 아래에 광산을 경영하여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주고  
    고용하여 낮에는 광산일에 조사시키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시켰다. 

    홍총각은 본래 어염등을 팔던 소상인으로 본명은 홍봉의였는데 나이가 
    들도록 장가를 가지 못하여 홍총각으로 불리웠다. 
    그는 곽산 출신으로 체구가 우람하고 키가 5척이 넘어 
    홍경래가 이끄는 남진군의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홍경래 군은 이러한 지휘부의 통솔 하에 남진군과 북진군으로 나뉘어 
    군사를 일으킨지 10여일 만에 곽산 등 7개 지역을 석권하였는데, 
    이는 각 고을의 내응세력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당시 관군은 제대로 대응치 못하고 계속 후퇴하였는데 
    이는 박천 송림 전투까지 계속되었다. 

    홍경래는 가산을 함락하고 청천강에 얼음이 어는 시기를 이용하여 
    서울로 진격코자 했는데 마침 큰비가 내려 얼음이 녹는 바람에 
    배를 준비하지 못한 홍경래군은 
    전략을 바꾸어 1812년 1월에 정주성을 함락시키고 점거했다. 
    이들이 정주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출정시켜 공격을 계속하자 
    안동 김씨의 한 사람인 선천부사 김익순(김삿갓의 조부)이 자진 항복했다. 
    홍경래군은 이어서 박천의 송림에 군사를 주둔시켰으나 
    함종부사 윤욱렬과 곽산군수 이우식 등의 공격에 패하고 정주성으로 퇴각하였다. 

    홍경래군은 숫적으로 우위인 관군을 맞아 4개월간 공방전을 벌였으나 
    조정에서 양서순무사 이요원과 순무중군 박기풍을 보내자 사기가 줄기 시작했고 
    이 틈을 탄 김익순이 김창시의 목을 베어 성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러나 박기풍이 여러 번 정주성을 공략했음에도 소득을 올리지 못하자 
    박기풍이 파직되고 병사 유효원이 파견되었다. 

    유효원이 4월에 화약으로 성벽을 폭파시키고 정주성을 공격하자 
    성을 지키던 봉기군은 놀라 사방으로 달아났고 
    홍경래는 관군과 싸우다가 유탄에 맞고 죽었다. 
    이에 그의 목을 베어 상자에 담아 서울로 보내고 
    우군칙 등도 사로잡아 서울로 압송하여 홍경래의 반란은 평정되었다. 

  - 결과
    비록 봉기군은 평정되었으나 당시 정부는 순조가 중풍을 앓고 있어서 
    국정을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순조의 장인 김조순과 훈련대장 박종경에게 정사를 논의케 하였는데

    안동 김씨의 후원을 받은 조득영이 훈련대장 박종경이 
    군권과 경제권을 쥐고 왕권을 흔든다고 상소를 올렸다. 
    이에 박종경이 병부를 반납하고 서울을 떠났고 
    순조가 불러도 오지 않아 양주목사로 좌천되었다. 
    박종경의 실세로 반남 박씨 세력이 정계에서 물러나고 
    김조순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 김씨가 확실히 정권을 잡게 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농민층의 분해과정에서 생긴 향촌 부호, 
    경영형 부농, 서민 지주, 사상인, 몰락 양반 및 지식인 등이 
    임금노동자와 빈농을 규합하여 일으킨 반봉건 농민항쟁이었다.


▣임술민란(壬戌民亂)임술농민항쟁(1862 철종13)-진주농민항쟁
 ○ 임술년(1862)에 일어난 농민봉기로 임술민란 또는 임술농민항쟁이라 한다.
    진주에서 처음 시작하여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광주까지 파급된 농민항쟁이다

  - 배경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60여 년이 되어 가면서 안동 김씨 세도가 김좌근에게 
    집중되었으나 세도정치 말기 현상이 전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뇌물이나 권력자의 도움으로 각 도와 고을의 관리가 된 자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어 다시 세도가에게 바치거나 자신들의 재산으로 착복하였다. 

    오랫동안 민중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여겨왔으나 이 새대의 백성들은 
    토호세력과 정부관리들의 수탈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면서 
   전국의 민중들은 서서히 각 군현을 단위로 행정관청과 토호에 대한 저항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하여 마침내 1862년(철종 13) 임술년에 민란을 일으켰다.

  - 과정
   1. 진주 민란(晋州民亂)
     임술년에 일어난 전국 각지의 민란 중 대표적인 민란은 진주 민란이다. 
     진주민란은 1862년 2월 18일 민란이 일어났는데 
     직접적인 원인은 새로 부임한 경상도 우병사 백낙신의 탐학이었다. 
     백낙신은 임지에 부임하자마자 갖은 명목으로 겨우 연명해 가는 농민들에게서
     거액의 세전(稅錢)을 강제 징수하여 사욕을 채웠으며 그 동안 
     
     착복한 환곡 7만2천여 냥을 농가에 분담케 하여 강제징수 하려고 하였다. 
     이에 진주 서남쪽 30리 정도 떨어진 유곡동에 살던 유계춘이 
     김수만·이귀채 등과 거사를 하기로 합의하고 
     한글로 격문을 붙이고 통문을 돌려 2월 18일에 거사를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진주민란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2월 29일 부호군 박규수를 진주 안핵사로 삼아 3개월에 걸쳐 사태를 수습하였다.
    경상 우병사 백낙신과 진주 목사 채병원을 파직하여 민중을 진무케 하였고
     난의 주동자들은 엄중 처벌 당하였다.
     농민측은 효수 10명, 귀양 20명, 곤장 42명, 미결 15명이었고, 
     관측은 귀양 8명, 곤장 5명, 파직 4명, 미결 5명이었다.

   2. 조정의 조기수습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란은 충청도와 전라도로 번졌는데 
     이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 충청도에서는 양반들의, 
     전라도에서는 아전들의 폐단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전라도 관찰사 김시연도 탐학한 관료 중 한 명이었는데, 
     그의 관할 중 한 곳인 익산의 농민 3천여 명이 
     1862년 3월 27일에 불법적인 도결의 시정을 요구하면서 
     관청을 습격하여 군수 박희순을 납치하여 인신과 병부을 빼앗았고, 
     함열현으로 쳐들어가 현령의 병부도 빼앗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정현을 안핵사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고 
     이정현은 농민 임치수?이의식?문희백 등을 반란주동죄로 처형하고 
     관찰사 김시연과 군수 박희선을 귀양보냈으며, 
     이방 임종호, 좌수 최학손 등을 효수하였다.

   3. 4월 16일에는 전라도 함평에서 정한순의 주동 하에 민란이 일어났다.
      함평관아를 습격하여 현감 권규명을 쫓아내고 민가를 부수고 불을 질렀다. 
      조정에서는 익산 안핵사 이정현에게 함평민란을 수습케하여 
      주동자 정한순 등을 처형하고, 
      채행렬 등 11명은 귀양을 보냈으며, 현감 권명규를 귀양형에 처하고 
      좌수 장채성, 호장 이희경, 이방 이흥원 등을 섬으로 유배했다. 
    
  - 결과
    조정에서는 임술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그해 5월 25일부터 윤 8월 19일까지 4개월 간 
   ‘삼정이정절목’41개 조를 제정하여 반포하였다. 그러나
    고식적 정책에 불과하여 오래가지 못하였고 삼정의 폐단을 해소하지 못하였다. 
    1863년 말 철종의 붕어로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여러가지 개혁정책이 실시되면서 외형적으로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다.


▣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 고종19년)
 ○ 1882(고종 19)년에 구식 군대의 군인들이 일본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밀린 급료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일으킨 변란.
    1882년 6월 5일 무위영 소속 구훈련도감 군병들이 선혜청 도봉소에서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급료로 지급하려던 관리들을 구타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 배경
    임오군란은 개항 이후 신설된 신식 군대와 구식 군대와의 차별 대우, 
    일본의 정치·경제적 침투에 대한 백성들의 반일 감정, 
    흥선 대원군과 민씨 세력간의 다툼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일어났다.

    특히 구식 군대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는 달리 
    언젠가는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심한 차별 대우로 불만이 컸다. 더욱이 

    구식 군대에게는 13개월치 봉급이 밀려있어 불만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전라도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둔 쌀이 서울에 도착하여 
    밀린 봉급을 지급하게 되었는데 
    이 때 쌀을 지급하던 선혜청 관리가 곡식에 모래와 겨를 섞어 내주고 
    남은 곡식을 챙기려고 하였다. 
    이에 분개한 구식 군대의 군병이 그 관리를 마구 때린 일이 발생하였다.

  - 과정
    이 보고를 들은 선혜청의 책임자인 민경호가 주모자를 잡아 처형하려고 하자 
    분노한 군병들은 민겸호의 집을 습격하고 
    야인으로 있던 대원군에게 달려가 구원을 요청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이들을 달래는 체하면서 은근히 충동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구식 군대의 군졸들은 포도청을 습격해
    붙잡혀간 사람들을 구출하고 의금부로 가서 죄수들을 풀어주었으며, 
    별기군 교련장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를 죽이고 
    경기감영과 일본공사관을 습격했다.
    놀란 일본인들은 인천을 통해 본국으로 도망가고 
    시간이 갈수록 하급군병·빈민 들이 가세해 대규모의 세력을 형성했다. 
    10일에는 흥인군 이최응의 집을 습격·살해하고, 
    민비를 공격하기 위해 창덕궁으로 몰려가 민경호·김보현 등을 살해하고 
    민비를 찾기 위해 사방을 수색했다. 민비는 충주로 피신하였다. 
    사태를 수습할 능력을 잃은 고종은 대원군에게 정권을 넘겼다. 

  - 결과
    대원군은 곧바로 정상적인 급료 지급을 약속하고 별기군을 폐지했으며 
    5군영 체제를 복구시키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후 폭동은 가라앉았으나 군병들은 소규모 부대를 이루어 활동을 계속했다. 
    대원군 정권이 들어서자 
    일본과 청국은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즉시 군대를 파견했다.

    병력을 이끌고 서울에 온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는 주모자 처벌, 
    피해보상, 개항 및 통상의 확대, 병력주둔을 비롯한 8개 조항을 요구했다. 
    대원군은 일본의 이러한 요구에 무력으로 대응할 방침을 세우고 
    마산포에 상륙중인 청국군에게 일본군을 견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서울에 들어온 청군은 대원군 정권과 일본측을 중재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해가는 한편,군대를 몰아 서울 시내와 궁궐을 장악했다. 
    
    청군은 대원군 세력을 체포·투옥하여 대원군 정권을 무너뜨리는 한편, 
    군병의 집단적 거주지인 왕십리와 이태원을 공격하여 저항 세력을 진압했다. 
    임오군란은 개항 이후 대규모로 전개된 최초의 반봉건·반외세 투쟁이었다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 고종21)
 ○ 1884(고종 21)년에 김옥균,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등의 개화당이 
    독립적인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일으킨 정변이었으나(3일천하). 
    이틀 만에 민 씨 등의 수구당(守舊黨)과 청나라 군사의 반격으로 실패하였다.
    
  - 배경
    임오군란 후 청나라의 도움으로 정권을 다시 잡은 민씨 세력은 친청 사대 
    경향을 띠게 되고 청나라는 이 때부터 조선의 내정에 깊이 간섭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재필 등 젊은 개화파들이었다. 
    이들은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근대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빨리 근대 국가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의존하여 서양 문물을 
    서서히 받아들이자는 온건 개화파와 손을 잡고 이들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이에 급진 개화파는 빨리 근대화를 이룩하여 열강과 
    대등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비상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때마침 청나라가 청·프 전쟁에서 패배하여 정국이 어수선하게 되자, 
    급진 개화파는 이 틈을 이용하기로 하고, 
    일본과 모의하여 정변을 일으켜 혁신 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 과정
    1884년 10월에 새로 설치된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계기로 
    급진 개화파는 일본과 손 잡고 정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몰아내고, 
    고종을 경운궁으로 모신 뒤 새 내각을 조직하였다. 
    문벌 타파, 사민 평등, 재정의 일원화 지조법의 개정, 경찰제 실시, 
    행정 기구 개편 등 14개조로 된 개혁안을 선포하였다. 
       
  - 결과
    청나라의 군사적 행동과 일본의 배신으로 사흘 만에 실패하고,
    (청군은 군사가 1500명이나 되는데 일본은 군사를 150명정도 밖에 
     지원해주지 않은데다가 다른궁으로 옮기자는 민비의 의견에 찬성하여 
     수비가 어려운 넓은 궁으로 옮기는 바람에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그 중심 인물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우의정 홍윤식-사망, 호조판서 김옥균-일본망명, 좌포도대 박영효-일본망명
    우포도대장 서광범 - 
    서재필,윤치호 - 미국망명
    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측은 오히려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사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와 1885년 1월 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은 일본에 사의를 표명하고 10만 원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공사관 수축비를 부담하게 되었다. 

    한편 갑신정변의 실패로 한반도를 둘러싼 청국과의 경쟁관계에서 다시
    불리한 처지에 빠진 일본은 정세를 만회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전권대사로 
    청국에 파견하여 이홍장과 담판하게 한 결과, 
    조선에서의 청·일 양국군의 철수,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서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에는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天津] 조약을 체결했다(1885. 4. 18). 
    이로써 갑신정변의 뒷마무리는 일단 끝났지만,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문제에 있어서 청국과 같은 파병권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10년 후에 일어난 갑오농민전쟁 때 일본의 파병 구실이 되었다

▣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1894 고종31년)
 ○ 1894(고종 31)년에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동학도와 
     농민들이 일으킨 농민 운동.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횡포와 착취에 농민들이 항거한 데에서 
    비롯되었으나, 근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패하여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체포 처형됨으로써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초기에는 동학난으로 불리다가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甲午農民運動),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 배경
    개항 이래, 
    조선을 둘러싸고 전개된 열강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침략 경쟁은 갑신정변 후에 더욱 가열되었다. 
    청국과 일본 간의 침략적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영국까지도 조선 문제로 충돌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지배층은 외세의 침략에 적절한 대응책을 세우지 못한 채 
    타협과 굴복을 일삼음으로써, 
    당면 문제에 대한 해결 능력을 보여 주지 못하였다. 

    더욱이, 국가 재정은 개항 이후 국제적 분쟁으로 인한 배상금 지불과 
    근대 문물의 수용에 필요한 경비 지출 등으로 더욱 궁핍해졌고, 
    지배층의 농민에 대한 압제와 수탈도 심해졌다. 

    한편, 조선의 농촌 경제는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피폐해져 갔다. 
    개항 이후, 조선에 가장 먼저 침략의 손을 뻗친 일본 세력은, 
    정치적인 면에서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통하여 청국에 밀려 크게 
    약화되었으나, 경제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청국보다 강세를 유지하였다. 
    일본 상인들은 처음에는 청국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영국의 면제품 등을 싸게 사다가 비싸게 파는 중계 무역을 하였으나, 
    점차 자국 제품으로 대치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하였다. 

    당시, 일본에 대한 조선의 수출품은 미곡이 30% 이상을 차지하였는데 
    일본 정부의 정치적 비호를 받은 일본 상인들은 
    조선 농민의 가난한 형편을 이용하여 입도 선매나 
    고리대의 방법으로 곡물을 사들여 폭리를 취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응하여, 함경도와 황해도 지방에서는 
    곡물의 수출을 금하는 방곡령을 내리기도 하였으나, 
    일본의 항의로 배상금만 물고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농촌 경제는 갈수록 피폐해지고, 농민들의 일본에 대한 적개심도 커 갔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 열강의 침탈과 지배층의 착취로 인하여 농촌 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더욱 팽배해 갔다. 
    그리고 농촌 지식인들과 농민들의 정치·사회 의식의 급성장하여 
    사회 변혁의 욕구도 고조되었다. 

    이 무렵, 동학의 교세는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갔다. 
    동학의 인간 평등 사상과 사회 개혁 사상은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를 갈망하는 농민의 요구에 부합되었고, 
    동학의 포접제 조직은 대규모 농민 세력의 규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종래에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민란 형태의 농민 운동은 
    조직적인 농민 전쟁의 형태로 바뀌어 갔다.

    기존 조선 양반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남형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그리고 동학 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동학 농민군 중 일부는 
    흥선대원군, 이준용 등과도 결탁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고, 
    동학 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 동학 농민군 중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 대원군의 감국(섭정)까지도 거병의 명분으로 삼은 바 있었다

 ○ 동학[東學] 
    조선 말기 1860(철종 11)년에 최제우(崔濟愚)가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가지고 창건한 민족 종교. 
    뒤에 손병희의 천도교(天道敎)와 이용구의 시천교(侍天敎)로 분열되었다.

  - 동학의 교세가 확장되자, 
    동학 교도들은 삼례와 보은 등지에서 대중 집회를 열고, 
    교조 신원 운동을 벌여 동학을 공인받으려 하였다. 

    특히, 
    보은 집회는 동학 교도와 농민이 참가한 대규모의 집회로 발전하여 
    탐관 오리의 숙청, 일본과 서양 세력의 축출을 요구하는 
    정치적 구호를 내세우더니 마침내 동학 중심의 종교 운동을 
    농민 중심의 정치 운동으로 전환시켜 갔다. 

  - 과정과 결과
    동학 농민 운동은 대체로 네 단계로 전개되었다.

   1. 제 1기는 고부 민란의 시기이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와 착취에 항거하여, 
     1894년 2월 전봉준이 이끄는 1,000여 명의 고부 농민들이 일으킨 농민항쟁.
     관아를 습격하여 군수를 내쫓고 아전들을 징벌한 후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10일 일 만에 해산하였다(1894).

     갑오농민전쟁의 전초전적 성격을 가진다.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은 민보(民洑)를 축조한다는 명분으로 농민들을 
     강제 동원했으며, 부당한 수세를 징수하여 700여 석을 가로챘고, 
     자기 아버지를 위한 비각을 건립한다는 명목으로 
     농민들로 부터 1,000여 냥을 거두었으며, 
     대동미를 좋은 쌀로 거두고 나쁜 쌀로 상납하여 이익을 착복했을 뿐만 아니라 
     불효·불목·음행·잡기 등의 죄목으로 농민들의 재물을 빼앗았다. 
     이에 농민들은 2월 10일 전봉준의 지휘하에 관아를 습격하여 군수를 내쫓고 
     아전들을 징벌한 후 곡식을 풀어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10여 일 간 폐정을 처리한 후 일단 해산했다.
 
     그뒤 3월 하순 백산에서 갑오농민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부민란은 군수와 아전을 징벌하는 데 그친 '민란'이 아니라, 
     전봉준이 "전라 일도의 탐학을 없애고 매관매직하는 권신을 축출하면 
     팔도가 자연히 일체가 되리라"고 말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민씨 일파의 중앙권력까지 축출할 것을 목표로 일으킨 농민항쟁이었다.
     → 갑오농민전쟁

   2. 제 2기는 동학 농민 운동의 절정기로서 
     전봉준, 김개남 등의 지도하에 동학 농민군이 
     보국 안민과 제폭구민의 기치를 내걸었던 시기이다. 
     동학 농민군은 고부와 태인에서 봉기하여 황토현 싸움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정읍, 고창, 함평, 장성 등을 공략한 다음, 전주를 점령하였다.

   3. 제 3기는 동학 농민군이 정부와 전주 화약을 맺고,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그들이 제시한 폐정 개혁안을 실천에 옮긴 시기이다. 
     전주 화약이 맺어졌으나, 
     정부는 동학 농민군의 개혁 요구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정부는 동학 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청이 조선에 파병하게 되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보내어 마침내 청·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4. 제 4기는, 청·일 전쟁에서 승세를 잡은 일본이 내정 간섭을 강화하자 
     이에 대항하여 대규모의 동학 농민군이 다시 일어난 시기이다. 
     동학 농민군은 논산에 집결하였다가 
     공주의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으나 
     근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패하여 큰 희생을 치렀으며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8.22 순종4),한일합방(韓日合邦)
 ○ 일제가 한일병합조약에 따라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빼앗고 식민지로 삼은 일.
    조선멸망 1392 ~ 1910년 까지 518년동안의 조선시대는 막이 내린다.
    

  - 학부대신 이용직은 조약을 반대하다 쫓겨났고, 
  - 조약 체결에 찬성, 협조한 경술국적이라고 불리는 매국노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 8명. 
    이 8명은 한일합방 이후 공을 인정받아 작위를 수여받았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내용 이지만 한번 옮겨 보았습니다. . . . . .
 
   <출처 : 인터넷에서 발췌>

  [참고] 야사(野史)와 정사(正史)는 다를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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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붕어알 친구  |  글쓴이 : 허꺼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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