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일

전라병영성에서 다산초당까지는 약 29km였습니다. 강진군에서는 좀 먼 거리입니다.

강진은 남도 답사 1번지라고 할 정도로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고장인데 강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다산초당입니다. 한 번도 방문한적이 없지만 여러 매체에서 접했다보니 마치 이웃 마을에 있는 유배처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강진만의 해변길을 따라 달리다가 다산박물관이 있는 길을 따라 다산초당으로 가는데, 이 길은 다산초당길이며 뒤의 산은 만덕산입니다.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에는 민박집과 점방이 있었으며, 입구에서 노인 한 분이 다산초당에서 꼭 봐야 할 곳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茶山草堂)은 조선시대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丁若鏞)선생이 유배생활을 했던 곳입니다.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강진 귤동 뒷산 이름으로 이 기슭에 머물고 계시면서 자신의 호로 써 왔습니다.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선생이 1801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여 동안 적거생활하시는 동안『목민심서』『경세유표』등 5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조선시대 성리학의 공리 공론적이며 관념론적인 학풍을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실사구시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으로 사적 제 10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오후 햇살이 따가워 양산을 들었습니다.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간혹 불어 오는 바람이 힘이 되어 걸음을 옮겼습니다.

 

 

오솔길 옆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나무는 뿌리를 드러냈습니다. 그 뿌리가 계단 역할을 했지만 어린 아이들은 걸려서 넘어질 수도 있기에 유아를 동반한다면 조심해야 겠습니다. 정호승의 '뿌리의 길'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3개의 오솔길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기도 했습니다.

 

 

뿌리의 길 / 정호승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닦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 할
길이 되어 눕는다

 

 

오솔길

다산초당에는 다산의 정취가 묻어 있는 3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입구에서 초당에 이르는 '뿌리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동암을 지나 천일각 왼편으로 나 있는 '백련사 가는 길'이다. 윤종진의 묘 앞에 나 있는 이 오솔길 역시 다산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마을을 오가며 다녔던 길이다.

 

 

제자 윤종진의 묘입니다.

이곳은 다산 선생이 초당에서 양성한 18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윤종진(1803~1879)선생을 모신 묘소이다. 선생의 자는 금계, 호는 순암이며, 부친은 강진읍 내에서 다산을 모셔온 윤규로이다. 다산 선생께서는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삶의 터전을 새롭게 함은 물론, 제자들은 문답식으로 지도하고「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심서」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당시 저술은 18인의 제자들의 역할이 컸다. 다산은 몸이 약하고 체구가 작은 순암을 위해 순암호기를 직접 써 주면서 호연지기를 키우게 했다.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남양주로 돌아가게 되자 순암은 18인의 제자들과 함께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해 평생동안 차(茶)를 만들어 보냈으며, 이 차는 금릉다산향(金陵茶山香)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다. 그는 1867년에 진사가 되었고, 1866년 병인양요 때와 1869년에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의병을 모아 참여하였으며, 추사 김정희, 백파 신현구와 교유하였다. 문집으로는 순암총서를 남겼다.  -묘소에 새겨진 안내문 -

 

 

제자 윤종진의 묘를 뒤로 하고 약간 비탈진 길이 이어졌습니다. 비탈지다보니 몸을 가누기 위해 잡을 수 있는 게 있었는데 대나무로 엮은 이 손잡이는 대나무를 이은 부분이 요즘 유행하는 케이블타이였습니다. 다산초당과 오솔길과 어울리도록 칡덩굴이나 기타 초목의 덩굴로 엮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 부분이 아쉬웠습니다.

 

 

돌계단을 오르면 다산초당입니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초당이 아닌 와당(瓦當)이네.

유배지 거처가 당연히 초가여야지 기와집이라니 말이 됩니까.

1958년 지역민으로 구성된 다산유적보존회가 노후로 무너진 초당을 복건하여 이 해 사적 제107호(정다산유적 丁茶山遺蹟)로 지정받았으며, 건물은 도리단층기와집으로 문화재관리국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복원은 옛모습 그대로를 다시 짓는 것인데 와당이니 이제부터 茶山瓦堂이라 해야 겠습니다.

아주 더운날이었는데 다산초당을 찾은 여행객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그들은 그늘에서 쉬기도 하며 방명록에 흔적을 남기기도 했고, 책을 읽는 이도 있었습니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은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선생이 1801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여 동안 적거생활하시는 동안『목민심서』『경세유표』등 5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조선시대 성리학의 공리 공론적이며 관념론적인 학풍을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실사구시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입니다.

목민서라는 것은 수령이 지역의 백성을 통치하며 지켜야 할 지침을 정리한 책인데, 목민심서는 마음을 다하여 저술한 목민서여서 심(心)자를 붙여『목민심서』가 되었답니다.

 

 

다산초당에는 다산이 남긴 흔적 4개를 꼽아 다산 4경이라고 하는데 제 1경은 정석(丁石)입니다.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은 아무런 수식없이 자신의 성씨인 '정'자만 새겨 넣은 것으로 보아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한데, 다산초당 뒤꼍의 커다란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다산초당 마루에 그 글씨가 있었습니다.

 

 

다산초당 안내문입니다.

옛날 유배생활은 요즘의 감옥과 달리 자유로웠나 봅니다. 어떤 이는 학문을 연구하거나 책을 짓고, 또 어떤 이는 서당을 열어 마을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고도 합니다.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 역시 천주교를 믿어 1801년 신유사옥 때 흑산도로 귀양을 갔었는데, 1814년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하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문헌을 참조하여 자산어보(玆山魚譜)를 만들었습니다. 玆山魚譜에는 흑산도의 어류·패류·조류·해금충수류 등 수산동식물의 분포형태, 습성 등이 실려 있습니다.

 

 

다산초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정약용(丁若鏞)이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한 곳입니다.

 

 

'茶山艸堂' 현판은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입니다.

 

 

 

다산 2경인 약천(藥泉)입니다.

약천은 다산초당 뒷편에 작은 샘으로 처음에는 물이 촉촉히 젖어 있던 곳이었는데 다산이 직접 이곳을 파니 돌 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 나왔다고 합니다. 다산은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다산 3경은 다조(茶竈)입니다.

다조만 찍었는데 오후 햇살이 너무 눈부셔 다조의 모습이 제대로 표현이 되지 않아 멀리서 찍은 모습입니다.

茶竈는 다산초당 앞마당에 큼직한 넓은바위입니다. 다산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이 돌은 차를 달이는 부뚜막으로 사용되었는데, 다산은 이곳에서 약천의 물을 떠다가 주변에서 모은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찻물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다산 4경인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입니다.

다산초당과 동암 사이에 있는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돌탑입니다. 다산은 원래 이곳에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강진만 바닷가 돌을 주워와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고 하였는데, 이 연못에선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기르던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지금도 잉어가 노닐고 있었습니다.

 

 

다산초당에서 약간 위로 올라가면 동암이 있습니다.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립니다.

도서관의 역할을 했다던 동암은 실제로 저술에 필요한 2천여권의 서적들이 보관되었던 곳으로 다산의 대표작인 『목민심서』가 집필된 곳이기도 합니다.

 

 

 

측면입니다.

 

 

'보정산방(寶丁山房)'은 다산의 학예와 인품을 존경하고 보배롭게 여기는 산방이라는 뜻으로 추사가 강진 귤동마을의 다산 제자에게 써준 예서 현판 글입니다. 현재 다산초당 동암의 寶丁山房은 추사 친필본을 모각한 것이며, 또 다른 현판인 '다산동암(茶山東庵)' 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고 합니다.

* 모각[模刻] : (조각가가 이미 있는 조각 작품을)보고 그대로 본떠 새기다.

* 집자[集字] : 글씨를 쓰거나 시문을 짓기 위해서, 옛 문헌이나 선인의 비첩 따위에서 필요한 글자를 찾아서 모음.

 

 

동암은 지형적으로 정면에서 사진을 찍기가 애매하여 측면만 있으며, 아쉬워 동암 뒷편에 있는 굴뚝을 찍었습니다. 동암이 도서관 역할을 했으니 온도와 습도 조절이 필요하니 온돌도 필요하지요.

 

 

 

동암을 나와 조금 걸으면 백련사 가는 오솔길이 있고 벼랑위에 천일각이 있습니다.

백련사로 가는 오솔길은 다산이 친구가 그리워 백련사의 혜장선사를 만나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백련사의 혜장스님은 다산과 함께 이 길을 오가며 학문도 교류하고 시도 읊고 차도 마시며 우정을 쌓았다고 합니다. 이 길은 차나무와 동백숲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우리는 백련사 방문시 다산초당을 나서 백련사로 이동했습니다.

 

 

 

천일각이라는 이름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매일각을 줄인 말로,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었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세웠습니다.

 

 

 천일각 편액입니다.

 

천일각에 올라서면 강진만이 펼쳐져 있습니다. 지금은 수목이 자라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그 옛날 다산이 이 언덕에 올랐을 때 강진만은 지금보다 더 넓었을 겁니다.

 

 

 

아이들이 천일각으로 가고 다시 다산초당으로 왔습니다. 기다려도 아이들이 오지 않았으며 크게 불러도 들리지 않는지 오지 않았기에 천일각으로 가니 시원하며 풍경이 좋아 즐기고 있었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천일각은 있는 줄 모르고 다산초당만 휙 둘러가지 싶다고 합니다.

 

 

다른 여행객들이 그러하듯 마루에 앉아 보았습니다.

 

담박(淡泊)함을 즐기다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담박함을 즐길 뿐 아무 일도 없지만
타향에서 산다 해도 외로운 것만은 아니네
손님 오면 꽃그늘에서 시집을 함께 읽고
스님 떠난 평상 가에는 떨어진 염주를 발견하네
장다리 밭에 해 높이 뜨면 벌들이 잉잉거리고
보리 까끄라기에 미풍 불면 꿩들이 꺼겅 대지
우연히 다리 위에서 이웃 사는 영감 만나
배하나 띄워 놓고 취하도록 마시자 약속 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