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ending Confucian> 바다 건너 망국을 보다.
서문- 부분,
1919년 4월 10일 늦은 저녁,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 친션보루(金神父路, 지금의 瑞金一路)의 어스름한 가로등 빛이 스미는 창가를 바라보며 소집된 29명이 서 있었다. 밤새 계속된 회의 끝에 다음날 11일 오전 10시, 내각과 의회가 구성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공화국의 시작이었으며 왕정의 종식이었다. 왕가의 유민은 바다를 건너지 않았고 망국의 주체적 선언에 고개를 돌렸다. 역사도통을 잇기 위한 부름은 장엄하며 숭고헸으나, 모인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부름에 응답한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국가주의자, 제국주의에 호의를 가진자, 무정부주의자, 허무주의자.... 그들이 입고 온 외투는 여기저기 걸려있고 누구든 옷을 바꿔입고 나가도 상관없이 남루했다. (중략)
이제 바다 건너 건국 백 년의 나라를 본다. 백 년의 도통道統을 이은 것은 무엇인가? 유학의 역사에 대한 사적私的 접근에도 역시 질문이 있다. 공자는 춘추春秋가 사사私史 임을 증언한다. 통치의 정통성에서 시간적 연결인 도통道統은 이미 공간을 점거한 힘인 치통治統에 저항하고 때로는 순응했다. 정치적 이질성을 문화로 극복하면서 유학은 오히려 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늘이 부끄러워 쓴 삿갓 속의 어두운 얼굴에 뜻밖에도 유자의 개인주의가 서서히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유학의 순결은 배타성으로 오인되기 쉬웠다. 문화가 혼합되어 특징들이 사라지면서 망국은 그저 제국諸國의 일부가 되었다. 국가에 보루를 둔 유학의 항거에 국가주의가 있다는 오해는 인의仁義와 배치한다. 유자는 늘 소속감으로 이치를 흐리는 겹겹의 내부 국가(Deep State)에 저항했다. 유학이 국가를 위해 소비되는 일은 없었다. 유가의 이념은 법가와 달리 부국강병에 있지 않고 인덕감화仁德感化에 있었다. 이것이 유자의 공화주의였다.
유자는 망국을 개인의 품에 안고 살았다. 나라가 망했어도 산하는 여전했다. 돌이켜 보아 문질文質의 변증법적 순환에서 지난 한 세기가 “실질과 통합”을 지향한 質의 시대였다면 다음 시대는 文을 창달하는 분열의 세상이 기대된다. 지고한 문화와 최악의 야만을 경험한 유자는 문야지별文野之別이 더는 대척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1919년 이후 상해와 중경에서 도통을 이은 망국 유자에게는 시간의 유구한 반복 순환 역시 고통스런 현재 점에 머물러 있다. 두 개의 Deep State는 여전히 견고하다. 도통은 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힘과 결별하여 역사 도통을 이었기에 시간은 퇴계통로退溪通路를 따라 가지 않고 되돌아 왔다. 조선 왕조의 멸망이 외세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공화국을 선포한 1919년인 것은 유자의 주체역사 도통관이다. 이런 시간의 매듭이 문질의 템포로 제어되면서 왕정을 부정했던 유자는 정원을 가꾸고 자연을 걱정한다.
근심은 탄력성있게 자연의 모습에 붙어있다. 분란盆蘭은 뒤집히며 망국의 난蘭은 뿌리가 없다. 무근란無根蘭을 그리며 도통을 회수한 도성都城에서 멀리 떨어진다. 주민증을 불태우고 민적民籍없이 살면서 유자의 공간 영역이 정해지면 그는 감화의 범위에 민감해진다. 스스로 존엄을 지키며 살아온 삶이지만, 인간을 사랑하여 과인過仁의 지나친 공감 능력은 비난받는다.
그 순간 다양한 형태의 은둔이 진행하고 있었다. 독선獨善과 겸선兼善의 착란에서 유자는 위선에 몰린다. 그는 이미 심각한 내상을 입어 은둔지는 안개 속에 가려있다. 흐르는 시간 속 문질文質의 교대의 방향은 불가역이다. 망국은 어느 시대나 있었고 그 한은 끝이 없었다. 바다 건너의 망국은 한 개인의 책임일 수 도 있었다. 망국을 희롱한 사람들의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현실에서 개인의 환상은 죽음을 넘어서지 않지만 해답은 없다. 이는 평등하게 무효가 된 무가치한 삶이 아니다. 그리하여 침묵하며 시간을 견디며 시국을 응시한다. 지난 100년간 세상은 무도하고 인간은 형편없었다. 누각樓閣에 서서 더 한 층 오를 것 없이 수평선 너머 바라본 인간은 서로 관계망關係網을 끊었다. 사랑하지 말자고들 한다. 그래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