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외삼촌과 외가

                                                                   정 완 희

부여군 남면 송학리 497번지

최정열, 외조부는 차남이었다.

외증조부 최병현은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비로

이리와 임피 두곳의 향교장 이셨고 침술을 하셨다.

침술이 좋다고 소문이 나서 소문을 듣고 멀리서까지 모여든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서 침을 맞았다고 한다.

한약방이나 한의사를 했더라면 큰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일제가 군수나 도지사 관직을 주겠다 여러차례 불렀으나

일제에 협조하지 않으려 가지 않았다.

말을 타고 큰아들 사는 이리와, 작은 아들 사는 부여군 남면 송학리를 오고 가셨다.

외조부는 차남이라 받은 땅이 작아서, 넓은 땅을 찾아 이리의 전답을 팔고 땅값이 싼 부여군 남면으로 오게 된다.

남면에 와서 농사를 짓다가 몇 년 안되어 홍수를 만난다,

남면의 하천은 부여방향으로 흐르는 금강의 지류인데 금강의 대홍수로 마을의 논들이 모두 물에 잠겼다, 일제말 대동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일제의 행정력이 아무런 힘을 못쓰는 사이에 4년간이나 논에 물이 빠지지 않아 농사를 짓지 못하고 일꾼들을 내 보내고도 빚을 많이 져서 1940년경 땅을 헐값에 팔아 빚을 갚고. 엄마는 급히 판교로 시집 보내고 전가족이 군산으로 이주를 하게 된다.

열여섯에 가장이 된 외삼촌은 군산비행장 미군부대 주변에서 잡부로 일을 하게 된다. 1945년 해방과 1950년 육이오를 군산에서 겪으셨다.

외할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해 외할아버지가 후처를 얻으셨고 외할머니는 외삼촌이, 작은 외할머니는 작은 양복점을 하시는 작은 외삼촌이 내가 중학교 다닐 무렵까지 경암동 하천옆 무허가 주택에서 모시고 살았다.

엄마는 마을에서 새재댁이라 불리었다

가난한 우리집에 시집와서 아버지를 도와 살림을 일구려

군산과 이리를 오가며 감장사 모시장사 옷장사를 하셨다,

 

2.시간 여행

 

아내와 같이 외삼촌이 알려주신 마을을 찾았다

서부여 인터체인지 건너편 마을이다.

들판 가운데 얕으막한 구릉지대 언덕에 20여호의 집이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 저 잿배기가 새재로구나!

엄마가 열여섯에 시집 오기전에 열두살 소녀시절부터 열여섯 처녀시절까지 꽃같은 시절을 보내셨던 마을이다.

엄마가신지 벌써 7년이 흘렀다. 여기일까 저기일까?

엄마 살아계실 때 같이 올걸 그랬다

대숲아래 집이었다니 저기 이겠구나

60년이 지났어도 풍광은 많이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외삼촌이 말씀하신 앞산과 옆마을과 들판과 하늘과 집들도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선다!

엄마가 여기 살았었구나!